감라

甘羅

생몰년도 미상

전국시대의 재상.

할아버지 역시 재상을 지낸 감무였으며, 감라는 한술 더 떠서 무려 열두살 때 재상 자리에 올랐다. 할아버지 자리를 이어받은 게 아니라, 여불위 식객 노릇을 하다가 자기 능력으로 차지했다. 한마디로 희대의 신동이자 엄친아.

중국사에서 나이들어 성공한 사람의 대표가 강태공이라면, 어린 나이로 성공한 사람의 대표가 바로 감라. 수호지에서 가짜 점쟁이로 분장한 오용의 호객송(?)에도 등장한다.

이때 진의 왕은 정(政)-훗날 진시황-이었는데, 나라를 향해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러자 채택나라와 연합해서 조를 샌드위치 치는 계획을 올리고, 양국은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한다. 결국 연은 태자 단(丹)을 인질로 보내고 대신 진의 중신 한명을 대신으로 삼기로 한다.[1]

그런데 연에 보내기로 한 장당(張唐)이 배 째라고 드러누웠다. 사실 말이 좋아 대신이지, 상호간 인질이나 다름없는 자리인데다가, 장당은 전에 조나라 침공전에 여러 차례 참가한 바 있는데, 연나라에 부임하려면 조나라를 꼭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대충 돌아가는 꼬락서니만 봐도 연나라와 진나라가 인질을 교환하는 속내가 조나라를 협공하는 데 있다는 걸 조나라가 몰랐을리도 없고... 장당으로서는 그야말로 목이 간당간당한 상황이었으니 쉬 수락할 리가 없었던 것.

이 문제로 여불위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마침 감라가 보고서 이유를 물었다. 전후사정을 들은 감라는 장당을 설득하겠다 호언장담했고, 여불위는 성공하면 재상 자리에 앉히겠다 약속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재상은 여불위였으니 재상은 아니고 공경(公卿) 가운데 가장 높은 직위였던 상경(上卿) 자리를 약속한 것이었지만.

여하간에 감라는 장당을 찾아가 쌩뚱맞게 조상(弔喪)을 하러왔다며 떡밥을 던지더니, 한바탕 썰을 풀어대는데...

"너님하고 옛날 백기 둘중 누가 짱임?"

"내가 백기한테 쨉이 안됨."
"여불위하고 옛날 범수 둘중 누가 짱임?"
"여불위가 많이 무서움."
"근데 백기가 범수한테 개겼다가 뒈졌거든요. 님은 대체 뭘 믿고 여불위한테 개김?"

 
그제서야 장당은 놓았던 정줄을 바로잡고, 감라가 조언한대로 여불위에게 사죄하고 연나라로 떠나기로 한다.

한편 감라는 여불위에게 장당을 설득했음을 알리고 자신을 조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진에서 연으로 가려면 조를 지나야했기 때문에, 장당은 여전히 사망플래그가 꽂힌 상태라(...) 애초에 이걸 뽑겠다는 것.

여불위는 이런 감라를 기특하게 여겨 진왕에게 소개했고, 진왕 역시 감라의 재주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렇게 진왕의 사신이 되어 조나라로 간 감라는 조왕을 만나 또 한바탕 썰을 풀어대는데...

"진과 연이 인질 교환하기로 한 거 아삼?"

"암"
"두 나라가 손잡으면 가운데 낀 조나라가 개피보는 거 아삼?"
"암"
"연이 뭐가 이뻐서 손잡겠삼. 다 땅따먹기임. 앗싸리 조나라 땅 다섯 고을만 떼주삼. 그럼 연이랑 안 놈. 그 다음 님이 연 조져서 땅따먹으면 더 이익 아님둥?"[2]

 
이 말을 들은 조왕은 진에 땅을 바치고 땅을 받은 진왕은 인질교환을 하지 않았으며, 연에 가지 않게 된 장당은 감라에게 감사했다.

진과 연의 연합이 파토 나자 조왕이 연을 쳤으며 연은 개발살나고 땅덩어리를 크게 넓힌 조왕은 좋아했다. 그리고 큰 공을 세운 감라 역시 벼슬에 오르고 땅을 받았다.

이렇게 전쟁은 모두가 이득을 보고 좋게 끝날...리가 없다. 연나라는 뒷통수 맞아서 개발살나고 연나라의 태자 단은 이때 이미 진나라에 인질로 와 있었다. 이후 온갖 고생 끝에 간신히 연나라로 귀환한 태자 단이 이를 갈던 끝에 진시황에게 보낸 복수의 선물이 바로 형가였다.

감라는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가 죽자 하늘이 그의 재능을 시기해서 일찍 데려가버렸다고 사람들이 슬퍼했으며, 이에 대해 암살 의혹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감라가 요절하지 않고 더 오래 살아서 진시황 영정을 보좌했으면 진이 조금 더 오래 남았으리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감라는 분명히 여불위의 식객, 즉 여불위의 사람이었다. 도리어 오래 살았으면 그 똑똑한 머리로 여불위의 권력을 어떻게든 더 유지시켜서 진의 왕권을 위협할 유력한 인물이 됐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진이 연과 조를 박살낼 기반을 만들어준 인물로, 짧고 굵게 간 천재중 한명으로 당당히 언급될만한데 특이하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인지도가 거의 없으니 창작물에서 언급도 거의 없거니와, 심지어 별의 별 인물을 다 재조명하는 만화 킹덤에서도 언급이 없다. 안습(...)

  1. 현대 국가개념으론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사실 전국시대엔 국적 불문하고 유능한 인물이 타국의 재상을 맡는 일은 다반사였다. 유명한 맹상군 역시 진의 재상 자리에 오를 뻔 했다. 하지만 이 분야 본좌는 소진.
  2. 감라가 했던 말을 좀 더 부연하자면 "진나라가 장당을 연나라 재상으로 보내는 건 조나라 상당 땅을 얻기 위해서니까, 아예 그 땅을 먼저 진왕한테 진상하시고 우호를 맺으십시오. 그런 다음에 진과 연합하여 연나라를 들이치면 진나라한테 바친 땅의 몇 배나 되는 새 영토를 얻을 수 있으니 그 쪽이 더 이득입니다." 물론 단기적으로 맞는 말이긴 한데 최강국 진나라한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이 정도로 근시안적인 6국이 진에게 모조리 망한 것도 무리는 아닐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