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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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 National Foundation University 建國大學

1 개관

1938년 5월에 개교하여 1945년 8월 소련군만주 작전에 의해 만주국이 멸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수도 신징(新京)에 위치했었던 만주국 국무원 직할의 국립대학이다. 이시와라 간지의 "아시아 대학" 구상에서 발단해 츠지 마사노부에 의해 초안이 작성되어 관동군이 확보한 부지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설립 후 부터는 명목상이나마 관동군과는 독립된 만주국의 최고 학부로서 의 독자적인 건학이 진행되었다.

만주국의 국가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오로지 문과계로만 이루어졌으며[2] 만주국 황제의 칙령에 의해 만주국의 법정 최고학부로 규정되어 있었다. 일본 제국 내에서는 내지의 제국대학식민지의 제국대학 사이의 취급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제국대학은 제국대학이긴 한데 내지 제국대학만큼의 위용은 없고 일단 관리가 되려면 고등문관시험도 준비해야했던 반면에, 건국대학은 내지 제국대학보다는 네임밸류가 떨어지지만 적어도 고등관리임용 100% 보장이라는 엄청난 메리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3][4] 통칭 켄다이(建大).

도쿄제국대학의 기념식에 일본 덴노가 참석해 은시계를 하사했듯이 만주건국대학의 기념식에는 만주국 황제가 참석해 은시계를 수여했다고 한다.

2 학사제도

건국대학의 학사과정은 각각 3년의 전기와 후기 과정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기는 일본 본토의 구제 고등학교나 구제 대학예과에 해당하는 과정이었고 후기는 대학 학부 과정에 해당했다. 전기 과정에는 학과를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이 공통으로 만주국의 건국정신인 오족협화의 이론과 근로실습, 군사훈련, 그리고 중국어일본어를 배워야만 했다. 그리고 후기 과정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는데 정치학과, 경제학과, 문교학과의 3개과가 있었고, 만주국의 목적이 목적인 만큼 법학, 정치학, 경제, 윤리, 철학, 역사가 주요과목이었다.

학생들의 모든 학비와 생활비는 관비를 지급하여 무상 보장 하였으며, 건국대학을 졸업한 자는 6년간의 교육비를 변제한다는 취지에서 만주국 관리나 관제단체인 협화회에 복무할 의무를 갖도록 하였다. 학비가 전액 면제된다는 것과 더불어 메이지 유신초기의 도쿄제국대학이 그랬듯, 졸업과 동시에 국가의 고위관료로 취업이 보장된다는 매력 때문에 입시에서 30대 1의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

그러나 혜택이 큰 만큼 학사 과정은 매우 혹독했다. 학과교육 만큼이나 훈련이 중요시되어 학생들은 군사훈련, 무도훈련, 농사훈련에 힘써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군사훈련은 하급장교 정도의 전투지휘 능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빡쎘고(...) 무도훈련으로서는 유도와 검도, 합기무도(아이키도)를 필수로 하여 3년 중 270시간을 이수하도록 하고, 선택으로 궁도, 스모, 총검술을 선택해야 했다.[5]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할 수 있는 농사훈련은 당시 만주국 인구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한 것도 있고, 만주국의 설립 목적이 일본 제국의 군량미와 중공업제품을 납품하는 식민지였기 때문에 만주국의 지도층이 될 학생들은 필연적으로 농업에 대해 잘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붓 잡는 것 외에는 잘 하지도 못하는 문과생들에게 농사훈련은 실효성이 의심되는 것이 당연했고 실제로 만주국 내에서도 이에 대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국대학이 배출하려는 인재는 학문연구를 하는 학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대중을 이끌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만주국 최고의 국립대학이자 학생 전원이 기숙사에 거주하면서 교련, 농업 훈련에 힘쓰고 건국정신인 오족협화를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 건국대학은 만주국 그 자체이자, 건국 이념인 오족협화의 현현이라 할 수 있었다.[6]

3 만주국의 씽크 탱크

건국대학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더불어 만주국의 씽크 탱크 쌍두마차로 활약했던 연구원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로 경제정책의 연구에 치우친 남만주철도회사와는 달리 연구원의 연구 범위는 "국가정책의 근본을 연구하고 국가 발전을 이룩한다."며 매우 광범위하게 정의되었다. 즉, 건국대학의 연구원은 만주국 통치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국가정책의 방향성을 지도하는 복합적인 성격의 씽크 탱크였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만주사변으로 수립된 괴뢰국인 만주국의 체제를 신속히 정립하고 정통성이 결여된 정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제 안정화를 위한 선전과 인력동원을 담당한 것이 관제단체인 협화회였다면, 이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건국대학의 연구원이었다. 건국대학은 최고 엘리트 양성기관일 뿐만 아니라 만주국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적 씽크 탱크였던 것이다.

4 폐교 그 후

만주 작전으로 만주국이 멸망하면서 만주국의 상징이었던 건국대학도 같이 붕괴되었다. 건국대학 출신자들 중에는 훗날 시베리아에 억류된 경우도 있고, 중국인들 중에는 문화대혁명에 휘말려서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경우도 많다. 일단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만주는 공산당의 영역이었고, 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만주국과 그 부가 시설들은 완전히 일종의 식민지 잔재 취급을 받았다.

혼란속에서 남아있던 몇몇 도서들과 조선인 학생들과 소수의 교직원들은 한반도로 내려왔다. 출신자들 중 일부는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가 되어 활동했고,[7] 그 외의 건대출신 조선인 지식인들은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여 학계 및 정재계에 스며들었다. 일부는 해방 후 조선정치학관의 창설에 기여하게 되기도 하는데, 이 학교는 이후 종합대학 인가를 받아 오늘날의 건국대학교가 되었다.

건국대학 건물들은 2차대전 후 중국 정부로 이관되어 현재의 장춘대학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의 건물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5 참고 항목

6 관련 인물

  • 김대중 - 본인이 자서전에서 이곳에 합격했으나 안 갔다고 하기도 했고 후에 대선 후보로 출마할 당시에 최종학력으로 적어놓기도 하였다. [8]
  1. 더이상 만주국이 존재하지도 않고, 건국대학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2. 제국대학 출신으로도 이공계 수급이 충분한 것도 이유였다.
  3. 건국대학과 경성제국대학에 동시에 합격한 경우 보통 건국대학으로 갔다. 설명이 더 필요한가? 평양외대 교수를 하다 전 한국외대 교수를 한 동완, 유네스코 대사였던 박노선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김삼수 등이 경성제국대학과 건국대학을 동시에 합격했지만 건국대학을 선택한 케이스이다.
  4. MBC에서 오래전에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만주의 친일파'편에 건국대학 졸업ㆍ재학생들의 인터뷰를 보면 당시 만주 건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일단 당시 중소지주가 아니면 부담하기 힘든 대학 학비뿐만 아니라 생활비 일체를 지급하고 졸업이후에는 일본과 조선 내의 고등문관시험에 준하는 만주고등행정고시 무시험 검정 자격을 부여하는 건국대학은 경성제국대학 뿐만 아니라 일본 내 제국대학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조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만주 건대가 설립된 시기는 전쟁 시기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제국대학을 졸업한다해도 바로 대학생지원병으로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에서 고문시험을 준비한 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5. 무도를 대학교육의 과목으로 했던 것은 추상적 강의보다 일본문화에 대한 교육효과를 더 효과적으로 올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6. 심지어 만주국이 사실상 관동군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처럼 건국대학도 사실상 관동군의 지도하에 있었다.
  7. 대표적인 예가 김태형 교수.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에 있다가 1.4후퇴때 월남했다. 당시 건국대학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창설 당시 협조했던 교수들 중에 월남한 케이스가 많다.
  8.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601&docId=62877740&qb=6rmA64yA7KSRIOuMgO2VmQ==&enc=utf8&section=kin&rank=3&search_sort=0&spq=0&pid=SBb1rlpySowsstkaUK4ssssssuo-520250&sid=rRH8a7SqWwMEvTf7r3wl1g%3D%3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