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대한민국의 10대 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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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기준은 창간일자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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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주식회사 경향신문사
영문명칭The Kyunghyang Shinmun
설립일1946년 10월 6일
업종명일간신문과 정기간행물 및 도서 발간
상장유무비상장기업
결산월[1]3월 결산법인
기업규모중견기업
소재지04518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3
홈페이지

1 개요

두려운 것은 오직 독자밖에 없습니다. - 2001년 광고에서

1946년 10월 6일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에서 창간한 전국종합일간신문.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은 지금의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 각 교구 소유의 건물이나 기부금 등을 관리하기 위해 있는 재단법인이다. 그냥 서울대교구라고 생각하면 된다. 중간에 천주교 재단에서 분리됐다. 이제 경향신문에서 천주교의 흔적은 이름에 붙은 경향밖에 없다. '경향'이라는 이름은 라틴어의 Urbi et Orbi(바티칸 시와 전 세계에)를 한자 '京鄕'으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수도와 지방 또는 도시와 시골 정도에 해당하는 뉘앙스인데, 새로 즉위한 교황이 첫 연설을 하면서 꺼내는, 이를테면 "신사 숙녀 여러분"과 비슷한 정도의 의례적인 인삿말이라고 한다.

참고로 비슷한 제호를 가진 경향잡지#는 전형적인 천주교 잡지다. 1906년에 서울대교구에서 같은 이름으로 발행하던 신문의 부록으로 '보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10년에 폐간되면서 잡지로 분리가 되었고 광복 이후 경향신문 창간 이후에도 서울대교구에서 같이 발행하였으나 1959년 경향신문이 이승만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 되자 경향잡지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로 넘어가 한국천주교의 공식기관지로 남게 되었다. 현재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간.

2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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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04518 서울시 중구 정동길 3

설계자는 김수근. 박정희 정권 때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을 합병하면서 지은 것이다. 당시에는 신문사, 윤전공장, TV 및 라디오 방송국에 체육관과 문화관광호텔 등 상업시설까지 한군데 있는 복합문화미디어공간[2].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신문 방송 겸영이 금지됨에 따라 문화방송이 분리되어 한동안 한지붕 세가족 한지붕 두가족 신세를 지다가 1984년에 MBC가 여의도로 갔고 경향신문만 남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저층에 큰 유리창 부분이 경향신문과 문화방송 편집국, 보도국, 라디오스튜디오, 촬영실 등이며 윗쪽 작은 창문들이 호텔 부분이다. 호텔 부분 창문은 TV 브라운관 모양으로 설계한 것. 옥상에 있는 철탑이 바로 문화방송 VHF 11번 채널과 문화방송 라디오 송출 안테나인데 지금은 그냥 데코레이션. 동아일보[3]와 비슷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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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보이는 문화체육관은 변웅전씨가 사회를 보며 명랑운동회를 하던 곳이 바로 그 곳. 경향신문 윤전공장도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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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체육관을 개조해 뮤지컬 전용관 팝콘하우스로 운영하던 때 찍힌 것이다. 현재는 윤전공장은 가산동으로 이전하고, 철거 후 고급아파트인 정동상림원을 지었다. 경향신문은 드물게 윤전공장을 아직도 외주화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신문사인데, 종업원 지주회사이다보니 해고 및 외주화가 쉽지 않은 것이 이유.

문화방송이 여의도로 가기 전까지 경향신문은 1층과 지하 1층, 그리고 문화체육관 일부(윤전공장 입주)를 사용했다. 현재는 5층이 사장실 및 임원실, 6층이 경향신문/스포츠경향 편집국, 7층이 주간경향/레이디경향/출판부, 8층이 행정실로 4개 층을 사용. 1층~4층은 장남감박물관, 공연장 등인데 '국내 최초 심야 영화'였던 스타식스영화관이 있던 자리다.

김수근이 설계한지라 보존가치도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설계한 또다른 건물이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

사옥 대지 중 40%를 정수장학회가 가지고 있다.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정권 시절 경향신문-문화방송 최대주주이고 현재도 문화방송 지분 30%, 부산일보 지분 100%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토지 소유권도 가지고 있는 것. 따라서 경향신문은 매달 토지사용료를 정수장학회에 내고 있다. 현금으로 주지는 않고, 사옥 한개 층을 임대료 없이 정수장학회가 사용한다.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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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호 1면 우측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축 경향신문 창간", 좌측에는 여운형 선생의 "공명정대"라는 축하휘호가 나란히 실렸던 적이 있다. 초대 편집국장은 횡보(橫步) 염상섭.

창간 초창기 시절엔 그야말로 고난의 행로를 걸었다. 1947년 1월 15일자 1면 칼럼 '여적'(餘滴)에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문제를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필자인 정지용이 미군 당국자와 '백골단' 등 극우 단체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1952년 '발췌개헌안'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하자 우익폭력단인 '땃벌떼'가 습격하기도 했다.

1957년 7월 2일부터 조간 2면과 석간 4면을 발행하고, 1958년 12월 17일부터 조석간 8면을 발행했다. 1959년 자유당 독재체제가 굳어지자 반독재 노선을 분명히 했으며, 천주교 신자인 장면 부통령 피습사건 이후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이런 자세는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당시 발행부수 20만 부를 기록했다. 1959년 2월 4일 '여적'란에 실린 당시 국회의원 주요한의 "현 한국정세는 공명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무력에 의한 혁명이 일어날 전조를 보이고 있다"라는 내용이 미군정 법령 88호(신문과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조항, 1961. 12. 30 폐기)에 위반된다 하여 필자와 당시 사장 한창우가 2월 28일 기소되었고, 신문은 4월 30일 강제 폐간당했다.

이러한 조치에 불복하고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여 승소했으나, 정부는 폐간조치를 무기한 발행정지처분으로 바꾸어 발행을 막았다가 4.19 혁명 이후 복간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더욱더 고난의 행로를 걷게 되었다. 비판적 논조가 거슬린다며, 경향신문 주요 인사 교체 - 주가와 판권매각으로 정수장학회와 여러 대기업의 소유가 되었으며 당시 상황이 이 기사에 자세히 나온다. 한때는 신진자동차그룹이 인수한 적도 있었으며, 기아자동차에서 발행한 회사의 역사를 다룬 책에 나오는 한 때 기아가 경향신문을 소유했다는 기록은 이것과 연관된 것. 어찌보면 기아의 흑역사라 할 수 있다.

1974년에는 강제적으로 MBC와 합쳐져 두 언론이 함께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한다. 이 시기에 주요 병크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군부의 내란음모 주작 사건으로 복역할 당시 5공의 지시에 따라 '김대중의 사악한 마키아벨리즘과 국가 전복 음모'를 사설에 싣기도 했고, 1981년 그리스의 사회주의 내각 수립과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취임 소식을 '유럽 공산화의 전조'(...)라고 해석하는 병크를 터뜨리기도 했다.[4] 이런 사건 덕분에 6월 항쟁 와중에는 군부독재정권의 확성기로 매도당해 시위대가 경향신문을 불태우는 흑역사를 겪기도 했다.

이후 1990년 한화그룹에 인수되었으나, 1998년 다시 한화그룹이 판권을 포기함으로서 마침내 한겨레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신문이 되었다. 이 때부터, 국내 언론사 중 드물게 사원주주제를 시행하고 있다. 경향 이외에 사원주주제를 시행하고 있는 신문은 한겨레신문, 내일신문, 서울신문 등이 있다. 단, 서울은 공기업 지분이 사원주주의 두배가 넘는다.

3.1 정동사옥 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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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에 민주노총을 경향신문 사옥 세입자로 맞이했다. 2013년 12월 철도파업의 여파로 서울이 온통 난리였던 분위기 속에 민노총의 산하 지부인 철도노조의 지도부가 사무실에 숨어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2013년 12월 22일 경찰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강제진입을 시도하면서 조용하던 일요일 아침 사옥이 탈탈 털렸다.(...)

경향신문이 설립되고 최초로 일어난 일이며, 정동사옥이 열린 뒤 언론사가 공권력에 털린 최초 사례로 남게 되었다. 사옥 정문이 완전히 박살나고 사무실로 통하는 계단과 문짝, 집기가 온통 난장판이 되었다. 참고로 신문사들은 관례적으로 일주일 중 토요일 하루를 쉰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신문을 발행하지 않기 때문. 하지만 일요일은 월요일자 신문을 찍어야하기 때문에 근무한다. 즉, 신문사 직원들이 근무 중일 때 사옥이 털렸다는 소리.(...) 피해상황.

근데 정작 털어놓고 보니까 철도노조 지도부는 이미 오전 중에 빠져나간 상태였고(...) 경찰의 삽질은 대대적으로 비웃음을 당했다. 빠져나간 철도노조는 조계사에 피신했다고. 또 이와중에 일부 의경이 사무실에 비치된 커피 맥심을 훔치는(...) 촌극을 벌여 경찰이 잡은건 맥심밖에 없었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맥심이 아니다! 그 맥심이!

그리고 경향신문은 사건이 터진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계속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연속적으로 내보냈다. 사건 다음날인 12월 23일자 사설. 경향신문은 해당 사설 <경향신문사 난입은 반언론적 폭거다>를 통해서도 "언론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이번 반언론적 폭거가 어떻게 기획ㆍ실행됐는지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엄중 처벌할 것을 정부에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사옥 침탈에 분노한 경향.

4 성향

중도진보성향. 근본적으론 한겨레, 오마이뉴스와 비교적 비슷하다고 보기도 하지만 세부 성향을 따지면 좀 다르다. 오마이뉴스와 한겨레보다는 온건한 진보노선을 띄고 있다. 옛날 TV방송에선 중도신문이라고 대놓고 광고한 적도 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강경진보 vs 온건진보 구도로 보는 것도 잘못된 구분이며, 경향도 사안에 따라 강경할 땐 강경하고, 다른 신문도 온건할 땐 온건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민족주의, 대북정책, NL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고 봐야한다. 특히 경향은 북의 인권, 3대세습, 핵개발, 선군정치 등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하며 2010년 김정은이 차기 지도자로 확정받았을때 민노당에서 세습을 우회적으로 인정하는 듯한 입장을 표명하자, 논설위원인 이대근이 민노당 NL계와 통일운동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북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친노에 대해서도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고 날이 선 비판을 자주 가한다.

이 때문에 경향신문 독자들 중에선 한경오로 묶여 불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반대로 조중동 독자를 비롯한 보수 진영에서는 경향신문을 진보신문 중 가장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보수 성향의 논객들이 자주 글을 올리는 것도 특징이다. 중앙대 이상돈 교수, 전원책 변호사 등이 그들이며, '한국, 소통합시다'(2009년), '이상돈, 김호기의 대화'(2010년) 등의 시리즈를 통해 PD성향 인사들과 보수성향 인사들의 대담록을 시리즈로 연재하기도 했다.

5 신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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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자협회와 여론조사회사가 실시한 2016년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한겨레신문 - JTBC - 조선일보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2013년에는 2위를 하는 등, 지난 10년래 전문가-일반인 조사 모두에서 신뢰도는 신문-방송-통신사 통합 5위권 내에 늘 드는 편.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순위에선 위 원그래프에 표기된 6위 한겨레 다음 중앙일보-MBC에 이어 9위를 기록해 다소 편차를 보였다.[5]

6 재정상태

1996년 이후부터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나(사실 한화그룹이 경향신문을 독립시킨 것도 이 때문), 2008년 촛불집회 이후 판매부수가 대폭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광고 단가가 올라갈만큼 판매부수가 늘어난건 아니어서 오히려 경영상황이 더 어려워지기도 했다. 2009년 회계연도 기준 누적 부채액수는 2000억 원에 달했다. 덕분에 2000년대엔 사장이 교체되는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2009년 이후 반전되어, 3년 연속 흑자를 내는 등 그나마 숨통은 트였다고 한다. 사장 인터뷰내용.

7 주요 보도

7.1 성완종 회장 인터뷰 보도

경항신문은 성완종 회장의 자살 직전 인터뷰를 했는데, 이 때 녹취록이 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다. 인터뷰 내용에는 성완종 회장이 누구에게 돈을 주었는지와, 언제 돈을 주었는지가 있었으며, 이완구 당시 국무총리를 두고 정작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 사정권을 휘두르고 있다고 맹비난하는 내용이 있었다.

경향은 이 녹취록을 몇 파트로 나눠서 보도했는데, 지속딜 여권에서는 이야기가 다 나오지 않은 채로 섣불리 대응하기가 매우 곤혹스러웠다. 김무성 당시 대표는 경향신문은 이 녹취록을 하루빨리 전부 보도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사실상 애원했을 정도. 그러나 이 과정에서 JTBC가 경향신문이 검찰에 제출했던 녹취파일을 입수해서 자신들은 경향과 상관없다면서 보도 전날 모두 방송해버리는 일을 저질러버려서 JTBC와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8 흑역사

9 논란

9.1 류근일 영입

2011년 8월, 보수주의자들의 의견을 듣는다는 취지에서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류근일을 객원논설위원으로 영입했다. 그러나 상술한 이상돈 같은 경우는 친여 성향이기는 해도 PD계열과는 대화가 통하는 인물인 것과 대조적으로, 류근일은 뉴라이트의 모체인 자유주의연대의 고문이자 조선일보 퇴직 이후에도 월간조선, 뉴데일리 등에서 '한국의 진보라는 사람들은 볼셰비키, JMS 추종자보다 더 나쁘다', '참여정부는 민주당과 북한 노동당의 연합정권이었다' 등의 글로 독자들의 빈축을 샀던 인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안철수는 좌파의 숙주', '2012년 대선은 김정일 추종세력과 자유민주주의 세력의 싸움' 등 매카시즘성 글을 연일 휘갈겼다. 그러나 이대근 편집국장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좌우' 편가르는 패거리주의가 더 나쁘다며 보수와의 대화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식의 접근은 미국의 뉴욕 타임스에서도 나타난다. 독자들에게 다양한 의견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

9.2 사장선거 불출마 논란

경향은 사원주주제로 사원들이 사장을 직접 선출한다.오오 2011년 5월, 사장선거에 강병국 변호사[6]가 출마하려고 했다. 이 사람은 경향신문 노조위원장이었으나, 한화 계열사 시절 해직된 뒤 사법고시에 패스해 경향신문 측 변호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강병국 변호사가 사장 선거에 출마하려고 하자 송영승 사장의 측근인 이대근 편집국장이 강병국 변호사를 찾아가 조직의 안정성을 해친다며 불출마를 요구했고, 결국 강병국 변호사의 불출마로 송영승 사장이 연임에 성공해 말썽을 빚었다.

이 부분은 위에서 언급된 비판 지점들과 연계되는 복잡한 내부사정이 빚어낸 결과다. 참여정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였던 최장집 교수와 입장을 같이 하는 이대근 편집국장과 친노 성향이 강한 부장들 사이에서 알력이 있었으며, 강병국 변호사는 이대근 국장에게 맞서기 위한 대립교황으로 옹립된 것이다. 이런 이대근 국장의 행동은 분명 문제가 있었고 결국 경고조치를 받았지만, PD 성향이 강한 평기자들이 자보를 붙이며 국장의 손을 들어주어 일단락되었다.

한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이 사태에 대해서 미디어오늘이 앞장서서 이 사실을 보도했다는 점이다. 미디어오늘은 이전에 북한의 3대 세습 문제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며 이대근 국장에게 "미디어 과거인지, 미디어 김정일인지"라고 까인 적이 있다. 이후 이 국장은 이를 두고 "트위터의 특성을 잘 모른 상태에서 한 실언이었다"고 밝혔지만 "이 문제는 아직도 유효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는 것 아닌가 싶다"고 했다. 근데 미디어 오늘은 이전에도 간간히 언론사 내부의 일이나 복지수준에 대해서도 원래 그러라고 있는 신문이라 기사로 내곤 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한 사실은 아니다.

9.3 삼성 눈치보기 의혹

2010년 삼성그룹을 비판하는 내용의 칼럼을 편집부에서 내렸다가, 해당 저자가 프레시안을 통해 폭로하자 내부 격론 후 대기업 보도도 엄정히 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삼성이 경향신문 광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보니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충돌이 오는듯. 여기 언급된 것만 봐도 경영이 꽤 어려워보인다.

그런데 다시 2014년 광고국에서 송경동 시인의 삼성비판 칼럼 중 일부내용을 삭제해 논란이 되었다.# 사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2016년 7월, 이건희 삼성회장 불법 성매매 의혹 기사를 뉴스타파가 최초로 보도하자, 거기에 발빠르게 지원사격식으로 기사를 내보내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9.4 산케이신문과의 제휴

산케이신문의 성향 때문에 제휴했다고 까인다. 다만 이는 군부독재 시절 경향신문이 친독재정권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당 정권에서 가장 독재정부를 심하게 깠던 경향신문은 5.16 이후 사단법인화되어 사실상 국유재산이 되고 지금 조중동은 비교되지도 않는 박정희 찬가를 불러댔다. 그 시절 대학교에선 경향신문 보기가 어려웠다고.(...) 아이러니하게 당시 박정희를 가장 비판한 신문이 동아일보여서 대학생들은 동아일보를 보는 것을 지성의 상징으로 여겼다.[7] 이 땐 상호인력교류가 있을 정도로 경향신문과 산케이신문은 밀접했다. 한편 독재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당시 동아일보는 역시 자민당에 비판적인 아사히신문과 제휴했다.

지금은 사무소를 상호임대하는 수준이고, 사실상 제휴만 해놓고 별거 없는 상태. 경향신문 사옥에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이 있고, 동경 산케이신문 사옥에는 경향신문 도쿄지국이 있다.

9.5 남성혐오 사이트 메갈리아 옹호

미러링이라는 테러리즘을 바탕으로 한 남성혐오 사이트라 의심받는 메갈리아 및 파생 사이트들에 대해 찬양 일변도의 기사를 경향 소속 일부 기자들이 쏟아내고 있다. 남자 연예인 갤러리 남혐 여성들의 유희로 시작된 메갈리아의 시발점에 대해서도 "메르스 갤러리의, 여혐에 대한 반발"이라는 거짓 기사를 내보내는가 하면, 여성 혐오에 맞선 활동가로 포장하고 있다.# 이런 논조는 강남역 10번출구 사건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비판이 일고 있다. 강남역 시위 충돌 사건 참고. 이런 기사불쏘시개도 있다. "메갈리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차별주의자에 여성혐오자"라고 주장하는 기고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논리는 원천봉쇄의 오류에 해당한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메갈리아 항목 참조. 또한 한계례와 같은 내용의 기사를 올리는 중으로 내용은 메갈, 워마드 옹호와 각종 패치에 대한 수사가 편파 수사라는 소식이다.

10 트리비아

만평으로 유명한 '장도리'와 '그림마당'이 지면과 인터넷에, 박건웅의 '칸과 칸 사이'가 인터넷판에 연재되고 있다. 셋 다 재미와 풍자, 간혹 씁쓸함도 담고 있다.

2010년 5월, 위클리경향 875호에 용자 기사가 실린 바 있다. 앙? 담당기자가 원래 덕후 성향이 있다. 그리고 트윗 봇에 관한 기사를 쓸 때 리그베다위키(현 나무위키)의 트위터 봇/목록 항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언더그라운드.넷 항목 참조.

2013년 11월 3일부터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했다.

2014년 3월 경향신문과 비슷한 이름을 써서 이익을 챙겼다고 판단한 경향일보에 상표권등침해금지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그리고 동년 8월 경향일보와의 소송에서 승소했다.

경향신문이 운영하는 페이스북에서 기사를 공유할 때마다 기사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약빤 짤방을 매치해 호응을 얻고 있다. 사례. 또한 페이스북 관리자 ‘향이’가 댓글을 달아주기도 한다.

현 사옥 소재지는 원래 러시아 정교 성당이 있던 자리였다고 하며 사옥 인근에 옛 러시아 제국 공사관의 건물 한 동이 남아 있다. 현 경향신문 사옥에서 걸어서 10분 안에 있다.

11 자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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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기준으로 자매지인 레이디경향이 42,100부 수준이었다. 여성지 가운데 여성조선(44,600부)과 비슷한 수준이다. 2012년엔 여성종합지 가운데 1위를 했다고 한다. 2016년 4월호를 끝으로 정간에 들어갔다. 사실상 폐간이라고 받아들이는게 대세.

주간경향#의 경우 한동안 뉴스메이커, 위클리경향 등 제호를 바꿔가며 죽을 쒔지만, 현재는 2만 부를 조금 넘기는 수준으로 뉴스위크 한국판과 비슷한 수준이다. 주간지 시장은 대체로 진보 매체가 강한 편이지만 한겨레21이나 시사in에 비하면 부수가 낮은 편이다.

스포츠신문인 스포츠경향#은 2005년 스포츠칸이란 제호로 창간했다가 '명칭통일화'에 의해 2008년 현재 제호로 바뀜. 부수는 2010년 기준으로 105,307부 수준이라고.

경향게임스#는 게임 전문 타블로이드판 신문으로, 독립법인이며 경향신문과는 제호 사용 계약만 하고 있다.
  1. 이 칸이 없으면 다 12월 결산
  2.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신문사 한 개가 쓰기에도 모자라다고 느끼지만, 종로구 관철동 31빌딩이 "31층이나 된다고" 지금의 63빌딩처럼 대접받던 시절임을 생각해보자
  3. 언론통폐합 때까지 동아일보는 AM 792㎑ 라디오방송을 했고 광화문네거리 구 동아일보 사옥, 현 일민미술관 옥상에 라디오 송출탑이 있었다. 지금은 대형전광판을 설치하느라 철거했다. 5공화국에서 신문 방송 겸영을 금지하며 동아일보에서 분리된 AM 주파수는 후에 서울지역민방 SBS가 출범하면서 라디오방송 주파수로 받게 되었다. 바로 현재 SBS AM 792㎑, 표준FM 103.5㎒인 러브FM.
  4. 여담이지만 훗날 경향신문을 인수해 8년간 경영했던 한화그룹은 이 그리스 사회주의 내각과 밀월관계였다(...)
  5. 한국기자협회 창립 52주년 기자 300명 여론조사#
  6. 전 경향신문 기자, 5대 노조위원장 및 감사 역임#
  7. 이 시기 대거 해직된 동아일보 기자들이 주축이 되어 한겨레신문을 창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