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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顧榮
(? ~ 312)

삼국시대 오나라와 서진, 동진의 인물. 자는 언선(彦先). 고유의 아들이자 고옹의 손자.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주가 놀랄 만했으며, 풍격이 높고도 빼어나면서 동남쪽 지역의 명사였다. 오나라에서 황문랑을 지내다가 오나라가 평정되자 서진에서 육기 형제와 함께 삼준(三俊)이라 했고 낭중, 상서랑, 태자중서인, 정위정 등을 역임했다. 한 번은 관청에서 동료들과 술을 마실 때 구운 고기를 나르는 자 중에 보통 노복과 다른 자가 있음을 보고서 자기 고기를 나누어 그에게 먹게 했다.

후에 조왕 사마윤이 왕위를 찬탈했을 때 그의 아들이 중령군이 되어 고영은 억지로 장사로 기용되었는데, 사마윤이 주살되자 고영도 체포되어 살육당한 자가 무릇 십여 명이나 되었다. 그 때 고영을 어떤 자가 구해줘서 고영이 물었더니 예전에 관청에서 고기를 받아먹은 노복이었다고 하며, 고영이 "한 끼 밥의 은혜를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고 하더니 옛 사람이 어찌 헛된 말을 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301년에 제왕 사마경, 장사왕 사마예,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 등이 사마륜을 몰아내자 사마경의 주부가 되었으며, 육기가 사마영 덕분에 살아남은 일로 그를 의지하려고 하자 대연과 함께 중원 지역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 오 지역으로 돌아오라고 권했지만 육기는 이를 거절했다. 302년에 사마경이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자 화가 미칠 것을 알고 고의로 술에 취해 일을 돌보지 않았으며, 장사 갈여가 사마경에게 직책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탄핵되어 중서시랑으로 옮겨졌다.

사마예가 표기장군이 되자 고영은 사마예의 장사가 되었고 사마예가 죽자 사마영의 승상종사중랑이 되었으며, 혜제가 임장에 행차하면서 시중을 겸임했고 혜제를 따라 왕릉으로 갔다가 장방이 낙양을 점거하자 진류로 피했다. 혜제가 장안으로 가자 고영은 산기상시에 임명되자 세상의 혼란에 응할 수 없다고 해서 오군으로 돌아갔는데, 사마월이 서주에서 군사를 이끌고 고영은 군자좨주에 임명되었다.

305년에 진민이 광릉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장강 남쪽으로 건넜고 진민에게서 우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고영은 진민에게 아첨하는 자들을 막는다면 몇 개의 주는 격문 한 장만으로 평정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진민 휘하에서 단양태수를 지내다가 진민이 포악한 정치를 하자 진민을 도모하고자 했고 정동대장군 유준에게 편지를 보내 군사를 파견하면 안에서 내응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머리를 깎아 신표로 삼았다.

유준이 양주자사 유기 등을 파견해 진민을 토벌하게 하면서 진민에게 갔다가 주기와 함께 감탁을 설득했고 주기, 감탁, 기첨 등과 함께 진민을 공격했으며, 진민이 토벌되자 조서가 내려와 시중이 되었다. 고영은 서주에 이르자 북방이 혼란하다는 소식을 듣고 의심해 나아가지 않다가 동해왕 사마월이 서주자사 배순에게 편지를 보내 고영 등이 생각하고 관망한다면 군의 예에 따라 호송하라고 했는데, 고영은 두려워서 도망가 강동으로 돌아갔다.

산기상시에 임명되었고 정치하는 것에 대해 상소를 올리고 양주의 인재들을 추천했다. 307년에 군사마가 임명되어 중용되었으며, 진동장군부의 군사를 지내다가 그가 죽자 표를 올려 시중, 표기장군, 의동삼사로 추증되었다.

세설신어에서는 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구운 고기를 나르는 사람이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것을 나눠주자 같이 앉았던 사람들이 비웃었는데, 고영은 "어찌 종일토록 고기를 만지면서도 그 맛을 모르는 자가 있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했다. 후에 난리를 만나 강남을 건너갈 때 위급함을 겪을 때마다 항상 어떤 사람이 자기를 도와줬는데, 그 사람은 고영이 고기를 줬던 사람이었다.

또한 원제가 처음 강남으로 옮겨갈 때 표기장군으로 있던 고영에게 남의 나라 땅에 기거하니 마음에 항상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하자 고영은 무릎을 꿇으면서 왕자는 온 천하를 집으로 여긴다면서 은나라가 도읍을 옮기거나 주나라가 구정을 낙읍으로 옮긴 것을 얘기해 천도한 것을 신경쓰지 말라고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