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내각총리대신
85대 ~ 86대87대 ~ 89대90대
모리 요시로고이즈미 준이치로아베 신조


小泉 純一郎(こいずみ じゅんいちろう)
소천순일랑
Jun'ichirō Koizumi
1942년 1월 8일 ~
키 169cm

임기 : 2001년 4월 26일 - 2006년 9월 26일(5년 5개월).

1 개요

일본 총리이자 성우자민당 총재. 일본정치가1942년 1월 8일 생이다.

경제적 불황을 2008년 전까지 완전히 끊어낸 잃어버린 10년을 종식시킨 보수개혁 총리

현재 아베 신조 때문에 재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

일본 내각총리 치고는 상당히 긴 기간인 5년 5개월을 재임했으며, 그렇게 4년 11개월의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제치고 전후 최장기 재임 3위에 빛나는 기록을 세웠다. 의원 내각제인 일본 정치에서 연임을 포함해 총리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단임인 한국 대통령의 임기인 5년보다 더 길게 재임하였고, 그 재임기간 중 3년 8개월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겹친다. 그 덕에 한국인들에게 아주 악명 높게 제대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단순한 파격, 막장 정치인이라고 하기에는 나카소네 이후로 일본 정치에서 가장 리더십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따지고보면 나카소네 수상도 한국에서 좋은 까임감이 되었다. 이게 다 오랜 재임기간과 악명이 비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월이 약인지 고이즈미의 악명도 퇴임 후 1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바랬으며, 퇴임이후 튀어나온 막장 4천왕(이시하라 신타로, 아베 신조, 아소 다로, 하시모토 도루)과 외에도 NHK 회장 모미이 가츠토 그리고 하쿠다 나오키, 다모가미 도시오 외 다수가 미친 존재감을 보이면서 묻히고 있다. 도리어 이런 인간들을 거느리고도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았던 고이즈미는 의외로 정상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주장마저 나오는 상황.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신사참배나 독도 문제를 제외하곤 상당히 상식선에 들었던 인물이었다. 대외정책 문제는 미일동맹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국내 문제에 집중하겠다는 의도 또한 작용했다. 고이즈미에게는 특별한 외교적 지향이나 대외정책에 대한 정견이 없었다. 내정개혁이 고이즈미가 임기 내내 추구한 단일한 목표였고, 그 밖의 다른 분야의 정책들은 그 달성을 위해 희생되어도 감수하겠다는 것이 고이즈미 내각의 일관된 기조였다. 신념에 찬 보수 우파 아베 신조 같은 경우와는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2 젊은 시절

1942년 1월 카나가와요코스카에서 출생하였다. 선거구를 3대째 세습해온 정치 명문가의 3세 국회의원이다. 외조부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郎)는 야쿠자 조직의 보스로 시작하여 일본제국 국회에서 체신상을 지냈고, 부친 고이즈미 준야(小泉純也)는 1960년대 방위청 장관을 지냈다. 준야의 성씨는 본래 '사메지마(鮫島)'였으나 마타지로의 유일한 친자식인 고이즈미 요시에(小泉芳江)와 결혼, 아내의 성씨를 따라 '고이즈미'로 성씨를 바꾸고 고이즈미 가문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준야와 요시에는 장녀 미치코(道子), 차녀 다카코(隆子), 3녀 노부코(信子), 장남 준이치로, 차남 마사야(政也)를 낳았는데 3녀 2남 모두 '고이즈미' 성씨를 따랐다.

고이즈미는 사립 명문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런던에서 공부하던 중 부친 준야가 급사하는 바람에 갑자기 귀국하여,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총선에 출마하면서 27세의 나이로 정계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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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그러나 27세에 처음 출마한 선거에서 낙선하여 자민당 우파의 거두인 후쿠다 다케오 前 총리의 비서로 들어가 정치를 배웠다. 이 후 29세 때 처음 중의원에 당선됐고, 대장성 정무차관, 후생상, 우정상 등의 각료를 역임했다. 우정상 때부터 민영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고, 결국 뜻을 이뤘다.

3 총리가 되다

고이즈미는 1990년 가토 고이치, 야마사키 다쿠와 함께 YKK 연합을 결성하고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YKK는 세사람의 영문이니셜로 이들은 다케시타파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YKK 연합은 고이즈미보다는 가토가 리더의 역할을 했기에, 사실상 이 연합의 막내격이었는데...

1995년 9월에는 우정사업 민영화를 내걸고 하시모토 류타로와 총재 자리를 놓고 싸웠으나 대패하고, 1998년에는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와 대결하였으나 역시 패하였다. 그러나 2000년 말 '가토의 난'이 실패하면서 고이즈미가 YKK연합의 대표로 나섰으며, 2001년 4월 24일, 자민당 총재경선에서 예상 밖의 당원 돌풍을 일으키면서 95년 패했던 자민당 최대 파벌 하시모토 류타로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이로 누르고 총재도전 3수만에 정상에 올랐다. 이후 2003년에 후지이 다카오 후보를 누르고 총재 자리를 연임했다. 그리고 2001년 10월 16일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의 인터넷에서 원래 노나카 히로무가 총리로 유력했으나 부라쿠민이어서 고이즈미가 이겼다는 식의 얘기가 퍼져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노나카 히로무는 총재 선거에 출마한 적도 없고, 하시모토 류타로와 후지이 다카오를 후보로 밀었으나 두 후보 모두 개혁을 내세운 고이즈미에게 패배한다.

4 총리 시절

총리로 재임할 당시 2차 대전 이후의 일본 정권으로는 사토 에이사쿠와 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긴 장기 집권기간(1,980일)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되었다. 그의 첫 임무인 잃어버린 10년을 끝내고, 김대중 정부 시절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온전한 한일 관계 유지에 노력하였으나 노무현 정부 시절 시마네 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면서 대한민국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근데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자기의 의지가 아닌 자민당내 우익들을 회유책으로서 코이즈미가 쓴 수단이라고 보는경우도 있다. 2000년 초반에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묘지화 할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그외에 반원전등을 주장하는등 어느정도 기존우익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실제로 고이즈미 총리의 경우 자민당내 비주류파로 있다가 아베-아소등의 진퉁 꼴보수를 등에 업고 총리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2004년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근소하게 승리하자 리더십이 약간 약해지려는 기미를 보였는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단박에 승부수를 던진다!

우정 해산 때의 중의원 해산 영상(당시 중의원 의장은 고노 요헤이). 중의원들도 당황해서 만세(반자이) 삼창을 제대로 못했다. 영상에 보면 중의원 해산에 항의하는 의원도 보인다.

2005년 8월 8일 중의원(하원)에서 통과된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민주당이 다수당인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참의원 부결 30분만에 내각에서 중의원 해산을 결정하고, 중의원 해산결의에 서명을 거부한 시마무라 요시노부 농림수산성 대신을 파면시키는 패기를 보인다(;;;). 이른바 우정 해산. 이 도박으로 9월 11일 제44회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296석을 획득하여 크게 승리했다. 우정 해산 과정을 서술한 엠팍의 한 게시물.

자민당 총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2006년 9월 20일 일본의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자민당 제21대 총재로 선출되면서 내각 총사퇴 후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마친 몇 안되는 케이스.

정책적인 면에서는 지금도 많이 회자되는데, 일본 역사에 손꼽힐정도의 리버럴리스트로 유명하다. 고이즈미의 기본 기조는 작은 정부였으며, 이는 일본의 전통적인 정치성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 많았다. 모리 요시로 총리가 대표적. 그러나 신자유주의 성향의 리버테리안들과 외교정책 등에서의 보수주의자들이 환영했기에, 보수주의자들을 결집시켜서 지지기반이 대단히 확고했다. 이런 지지 기반 덕분에 우정 민영화나 덴노의 여계 혈통 인정과 야스쿠니 신사 대체 시설 마련 등 일본의 내부적인 문제에 대해선 상당히 개혁적이었는데도 반발이 거세지는 않았다고 한다. 단 어디까지나 일본 전체로 봤을 때 거세제 않았던 것이고 위에 언급된 두 문제에 대해선 극우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일본 같은 나라에서 저런 진보주의자가 총리직 길게 해먹을수 있었던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아베 신조 (1차) 내각과 후쿠다 야스오 내각 또한 고이즈미의 노선(강한 친미노선)을 기본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등 2000년대 일본 정치는 물론 세계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2002년, 2004년 두차례 북한 김정일과의 최초의 북조선-일본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이 다시 터졌어요!

이런 덕에 같은 시기에 미국 대통령이였던 조지 워커 부시와 죽이 잘 맞았으며, 이후 부시의 자서전에서 가장 마음이 잘 맞았던 지도자로 꼽을정도로 비슷한 성향의 인물이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결과, 복지 혜택이 축소되고 많은 분야에서 불평등성이 심화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고이즈미 임기 만료 후, 이러한 폐단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고이즈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물론 고이즈미를 가리켜서 '부시의 푸들', '부시의 들러리'라고 비꼬는 시각도 있다. 참고로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 정책의 문제점으로 인해 복지 혜택이 제대로 부여되지 못하는 등의 비판은 있었지만 적어도 부시의 푸들, 부시의 들러리는 아니었다.(...)

4.1 일북 정상회담

북핵문제로 인한 고립을 돌파하기 위해서 2000년대 이후 개혁개방적 면모를 한창 보이던 김정일은 2000년 6월, 한국김대중 대통령과 1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같은 해 9월에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10월에 러시아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각각 회담을 마쳤다. 하지만 조지 W. 부시가 예상을 깨고 앨 고어를 꺾고 당선 되면서 상황은 뒤집힌다.

그러나 북한의 평화공세는 계속되었고, 결국 2002년 3월 전격적으로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와 일북 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당시 김정일은 고이즈미에게 "남한에 8억 달러 줬으니 우리에게도 100억 달러는 줘야 한다"하면서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런데 북한의 일본인 납북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 사회가 들끓기 시작한다.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의 부모를 비롯한 납북자의 가족들이 연일 시위를 하면서 납북 일본인 귀국을 촉구했고 이에 분노한 고이즈미는 "납북 일본인의 존재를 밝히고 사죄하라"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당혹한 김정일은 오후에 대답하겠다고 자리를 파한 다음에 결국 그날 오후 일본인 납북 문제를 시인하고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던 김정일이 한발 물러선 것이다. 하지만 납북자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요코다 메구미의 경우에는 죽었다고 둘러대면서 유골만 돌려주었지만 그나마도 다른 사람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마무리가 되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이라크 전쟁 이후 사담 후세인의 몰락을 보고 겁을 먹은 북은 아예 과거 김일성 시대처럼 "우린 핵 없다. 남조선과 미국의 전쟁주의자들의 왜곡이다."라고 오리발 내미는 방침에서 돌아서서 미국 특사 켈리에게 "우리 핵 있다!"라고 유세를 부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핵이 있으면 미국의 침공을 피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이었다. 결국 김정일은 국제사회의 공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진행되면서 고이즈미가 북한과의 수교를 서두르면 미국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이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게 일북회담은 기초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일북수교는 무산되었고 북한은 제2의 경술국치, 제2의 을사조약 운운하면서 그야말로 길길이 날뛰었다. 김정일은 분에 치밀어 서방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허용했던 장마당까지도 죄다 파괴해버렸다!

한편 고이즈미도 국내에서 납북자들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나 북한 칠보산 송이를 받아온 일은 "납치된 국민이 아니라 송이버섯을 가져오다니, 미쳤냐?" 하곤 전국적인 조롱과 비난거리가 되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같다

아베 신조 당시 관방장관도 고이즈미와 동행하여 2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그런데 2014년 현재 미국의 대북 포위망도 무시하고 북한과 공조하려고 하고 있다. "한 번 속으면 속인 상대가 부끄러워 해야하지만, 두 번 속으면 본인이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했는데 같은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다른 결과를 내려고 하면 정신병자다

5 성격

일명 '헨진(変人:괴짜)', '일언거사(一言居士)'로 불리는 등 파격적이고 독설적인 언동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네티즌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성격 문제 때문에, 그의 아내였던 미야모토 카요코(宮本佳代子)는 결혼한 지 4년만에 막내 아들 요시나가(佳長)를 임신하고 있던 중에 이혼을 당했다. 고이즈미 집안에 문제가 있다는 설도(...). 또한 카요코는 이혼당한 후, 두고 온 두 아들 고타로(孝太郞)[1]와 신지로(進次郞)[2]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 때마다 고이즈미가 거절해서 멀쩡히 살아 있는 어머니와 아들들을 생이별하게 만들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인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있는 소문.

소설가 이케미야 쇼이치로에게 오다 노부나가와 닮은 꼴이라는 평가를 받고 대단히 흡족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의 열렬한 팬이라고.#. 이 소설가는 소설 <혼노지>의 작가로 이 사람의 소설 <혼노지>는 한국에 <난세의 파천황 오다 노부나가>라는 제목으로 정발되었다.

6 어록

출전은 일본어 위키인용집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문서. 그 중에서도 대부분의 출처는 오가타 구니히코의 '괴짜 총리 고이즈미, 흔들리는 일본'이다.

  • 주식을 갖고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만큼 의심을 받고 나쁘다고 말하니 도리가 통하지 않는 상황이어서 팔아버렸다. - 1989년 2월 각료 재산 공개시
  • 복지를 담당하는 부서이니 노인에게도 이해가 되는 아름다운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하시오. - 1989년 3월 후생성 예산설명시
  • 자민당이 증인심문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국회에 나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정치가라 생각한다. 나카소네는 좀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 - 1989년 4월 리크루트 사건시
  • 일본 경제의 발전은 민간이 노력해서 성장해 왔다. 우정의 일은 관업(官業)이 민업(民業)을 압박하고 있다. 마찰이 있는 부서지만 부서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이 우선이다.
- 1992년 12월 우정상 취임 기자회견시
  • 진짜 칼을 뽑아서 행정개혁을 추진해 달라. 당신은 연습용 죽도를 흔들고 있다.
- 1996년 8월 총리 하시모토 류타로와 대담
  • 알기 쉽게 말하자면 부하가 책임을 지고 할복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무거운 책임을 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1996년 11월, 뇌물 수뢰 의혹 후생성 사무차관 사직 승인시
  • 후보자는 유권자를 고르지 못한다. 헌금을 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고 알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 1996년 12월 후생성 소관 공익 법인 정치단체로부터 뇌물 수뢰시
  • 행정개혁의 제일보는 정치가 자신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 1997년 9월 중의원 연속 재직 25년 표창 거부시
  • 새로운 부서의 이름이 너무나 가볍다. 노동복지성이라면 각의에 서명하지 않겠다. 내 목을 잘라달라
- 1998년 1월 재편예정 명칭 반대시
  • 보통사람도 군인도 이 세상에서 사리지고 남은 것은 괴짜(變人)뿐이다.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데 정계에서는 괴짜라고 평한다. 진짜 괴짜는 나가타 초다.
- 2000년 7월 다나카 마키코의 보통사람, 군인, 괴짜 발언 인용. 나가타 초는 일본 국회의사당이 위치한 동의 이름으로 "일본 정치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언론사가 사용하는 여의도 혹은 여의도정치와 비슷한 맥락이다.
  • 나는 괴짜라고 불리지만 괴짜라는 것은 변혁하는 사람에 대한 칭찬이다.
- 2001년 3월 파벌 소속 의원 모임에서
- 미국 조지아 주 시아일랜드에서 개최된 제30회 주요국 수뇌 회담에 참가하여, 2005년 6월 9일 기념 촬영을 했을 때, 이탈리아 수상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게 말을 걸었을 때의 기행. 베를루스코니는 기가 막혀했고, 기자단으로부터는 'Shame on You!'(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그는 이에 대해 '땡큐!'라고 대답했다. 참고로 베를루스코니 또한 오바마에게 썬탠드립(...)을 날리는등 망언으론 어디서 안꿀리는 막장정치인이다.
  • 나는, 지금, 국회에서 우정국 민영화는 필요 없다고 하는 결과가 나왔습니다만, 다시 한번 국민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로 우정국의 일은 국가 공무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지. 민간인으로는 안되는 것인지?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떤 공무원 삭감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어떤 행정 개혁이 가능하겠습니까?
- 중의원 해산 때의 총리 기자회견. 고이즈미나 다른 우파 정치인들이 보기에, 일본 우정청은 일본 국민들에게 철밥통 공무원의 상징같은 존재였다. 옥상옥식의 비효율적인 조직을 끊임없이 확대하는 관료주의로 인해서 많은 정권들이 어떻게던 손을 볼려고 했지만 로비에 밀려서 실패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민영화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의견 역시 존재.
  • 인생 가지가지, 회사도 가지가지, 사원도 가지가지 (人生いろいろ、会社もいろいろ、社員もいろいろ) -
2004년 국민연금 미납 사실때문에 곤혹을 치루던 와중에 알고보니 한 후원자의 회사에 적을 두고 거기서 직장인 신분으로 월급을 받고 연금보험료까지 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들통나자 한 소리. 덤으로 저 소리를 하면서 "당시 사장은 '자네 일은 의원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회사에 출근한 사실은 없지만 나중에 중의원이 됐으니 사장 말대로 일을 제대로 한 셈"이라는 개드립을 날려 자민당의 지지율은 급전직하, 참의원도 패배(...). 결국 저 말은 2004년 최고의 유행어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원래 저 말은 시마쿠라 치요코(島倉千代子)의 노래인 "人生いろいろ"의 가사의 패러디(?)쯤 된다. 원래 가사는 "인생 가지가지, 남자도 가지가지, 여자도 가지가지"(人生いろいろ、男もいろいろ、女だっていろいろ). 고이즈미의 이 발언 때문에 시마쿠라 치요코는 2004년 연말에는 8년만에 홍백가합전까지 출장하게 됐다.

고이즈미의 성공적이지 못한 결혼생활을 비꼰 에로 어록이라는 것도 있다(...)

  • 새들은 참 좋겠어. 언제든지 할 수 있고.
  • 오늘은 거시기가 빳빳해.
  • 최근엔 아침에 텐트쳐.
  • 한동안 오른 손이 애인이야.(일본기자들에게)
  • 과거 영국여자와 거시기 할때 참 좋았어.(블레어 영국총리에게)
  • 일본에선 부부도 거시기가 끝나면 따로자.(부시 미국대통령에게)

7 널을 뛰었던 신사참배 발언과 고이즈미 담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관련해 한국측의 재수정 요구에도 '일본 역사교과서는 별 문제가 없다'는 부정적 입장을 밝히는 한편,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의사 표명, 자위대의 집단 자위권 용인 등 보수 우경화 정책을 고수했다. 그래서인지 보수, 극우파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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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를 참배하였다. 2001년 8월, 2002년 4월 등이다.

내가 신사에 구애를 받거나 집착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수상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자가 온 정성을 다해 신사에 참배를 했을 뿐이다. 나라들의 반발과 입장도 고려해서 부득이 오늘(2001년 8월 13일) 참배한 것이다.

- 2001년 8월 13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즉 그래도 신경써서 8월 15일에 안했다는 의미다.

실제로 고이즈미는 패전 60주년이었던 2005년 8월 15일 의외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답습, 계승하는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식민지 지배와 침략행위로 인해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국민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 재차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지나간 전쟁으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담화 전문

앞선 그 해 정월에도 야스쿠니 참배를 미루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 내각 내 반대 탓도 있었고, 여론도 좋지 않았으며,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도 반대했다. "그렇게 올 해는 안 하는가..." 했는데, 결국 2달만인 10월 17일 개인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강행하였다(!). 우정 해산 이후 승리에 따른 자신감으로 풀이되었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그로인해 국제무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설전을 벌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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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설전에서 노무현에게 관광당한듯 하다. 어서와 고이즈미. 한국은 처음이지?[3]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경우)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가 이웃에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해 일체의 추모시설을 만들지 않았다. "독일은 일부 영토까지 포기할 정도로 역사인식을 철저히 청산했다. (역대 공동체 발전은) 과거질서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 기초해야 한다."

"한명의 국민, 총리로서 자국 시설에서 평화를 빌고 전몰자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을 비판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다. 전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2005년 12월 14일, 대통령 노무현- 총리 고이즈미 설전 내용.

게다가 아예 임기 마지막 해인 2006년에는 쐐기를 박았다(...)

일국의 수상이 내 나라에 있는 신성한 신사에서 수상 명의로 참배하는 것이 뭐가 그리 거슬리거나 잘못되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고로 그들 반대세력들에게 제발 좀 내정간섭이나 신사참배 가지고 뭐라고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들에게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느니 오늘(2006년 8월 15일) 직접 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2006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이후

실제로 중국의 경우, 2차 참배 이후로 고이즈미의 중국 방문을 거부하기도 했다#.

문제는 고이즈미의 저 입장이 일본 극우파로서는 정말 온건한 입장이었다는 것. 그래서 후임 총리는 더 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8 가족 관계

1978년, 21세의 미야모토 카요코(宮本佳代子)와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 2,500명의 하객들 앞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하였다. 그러나 4년 후인 1982년에 이혼하였다. 당시 카요코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고, 첫째와 둘째는 고이즈미 일가에 두고 나와야 했다. 이혼이 결혼보다 10배 많은 에너지가 소비되었다며, 고이즈미는 이후 결혼을 다시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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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큰아들인 고이즈미 고타로(小泉孝太郎, 1978년생) #는 일본에서 드라마나 영화의 주조연급 배우로 활약중이다. 대표작은 국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직장의 신의 원작인 파견의 품격(2007년작)인데, 파견사원을 물심양면 도와주는 사람 좋은 직장상사로 나온다. 재미있는건 아버지 고이즈미 총리는 각종 노동법을 개악시킨 걸로 유명한데, 파견의 품격에서 고타로가 연기한 '사토나카 켄스케'는 노동법의 부조리에 괴로워 한다는 설정이였다. 물론, 악역으로써도 활약하고 있는데, 대표적인게 변두리 로켓 (下町ロケット)에서 주인공의 회사와 경쟁하는 대기업의 NASA 엘리트 출신의 사장으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을 압박하는 엄청난 포스를 보여줬다. 준이치로는 장남인 고타로가 자신의 선거구를 물려 받아 정치인이 되길 원했기에 배우가 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고집을 꺾지 못해서 인정해 줬다고. 또한 데뷔하기 전부터, 배우로써도 활약을 하였던 더 드리프터즈의 리더인 이카리야 쵸스케의 제자로 들어가서 연기를 배웠고, 사제관계보다 나이차가 큰 형제 관계로써 친하게 지냈다.

고이즈미 고타로는 아버지와 달리 표정이 호감상이어서 대한민국 일드 팬들이 하악거렸는데, 알고 보니 고이즈미의 아들이라서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래도 정치활동과는 거리를 두고 연기 쪽에 몰두 중인 행보를 보이는 터라 국내에선 우호적으로 보는 편. 최근에는 미국 디즈니사 + 마벨사의 첫 합작품인 빅 히어로 6에서 테디 하마다의 성우로도 활약. 원판 성우가 한국계 미국인 배우로 유명한 다니엘 헤니다. 뭐, 한국인 캐릭터라는 고고도 한국계 미국인 배우 제이미 정이 녹음하고, 일본에서는 일본 성우 아사노 마스미가 녹음했다.

드라마 외에도 활약중. 고시엔 등의 여러 스포츠 대회의 메인 캐스터로 자주 나오고, 예능에서는 선배 배우인 사사노 타카시와 함께, 블랙마요네즈와 베키가 진행하는 "인간 관찰 버라이어티 모니터링"에 레귤러 패널로, 그리고 매주 다른 연예인들과 하룻밤을 지내는 예능인 모노모노 후타리 에서, 바나나맨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


둘째 아들인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 1981년생)는 간토 가쿠인 대학과 미국 뉴욕 시에 있는 아이비 리그 컬럼비아 대학교 출신으로, 형 고타로가 배우의 길로 들어선 이후 아버지의 선거구를 물려받아 현재는 정치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민당의 약화 속에 선거광고에도 나오는 등 꽃미남 정치인으로 주목 받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자기 아버지 표정 닮아간다.(…) 2014년 4월 기준으로 일본 내각부 부흥담당 정무관의 직책을 맡고 있다. 한국으로 치면 차관급의 고위직. 2013년엔 자민당 청년부장 자격으로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막내인 미야모토 요시나가(宮本佳長)는 이혼 후 출생하여 어머니 카요코의 곁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현재는 게이오대학 졸업. 아버지의 정치 운동을 관람하여 만나려고 했으나 거부당했다. 또한 어머니 카요코와 함께 친할머니 요시에의 장례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제지당했다. 카요코와 요시나가는 간곡히 애원하여 간신히 분향만 할 수 있었고, 분향이 끝나자 곧바로 쫓겨났다. 준이치로, 고타로, 신지로는 카요코와 요시나가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다만, 카요코의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2013년 말 요시나가의 결혼식 때 다섯 식구(본인, 전 남편(준이치로), 아들 셋을 말하는 듯)이 30년 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

9 정계 부활하려다가...

보수주의자로 유명했던 그가 2013년에 들어와서는 원전 반대를 외치고 다녀서 아베 신조와 자민당 인사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시사잡지 "프레지던트"의 창간 50주년 기념행사에서 고이즈미는 인간이 원자력을 제어할수 있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서 정치권이 원전 제로를 결단해야 한다고 역설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일본 사회민주당과의 좌담 강연회에서는 "(기술 문제와 관계 없이)국민과 정권이 마음만 먹으면 원전 제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며 원전에 대해서는 급진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2014년 1월 14일, 탈원전을 기치로 하여, 2월 9일에 있을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선 호소카와 모리히로후보 전격 지지 선언. 호소카와는 전 일본 총리로 비 자민당 출신 총리다. 이게 거의 무슨 소리냐면, 한국으로 치면 이명박 전 대통령과 고건 전 총리 쯤 되는 사람들이 연대하여 서울 시장에 반 여당 후보로 나왔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게 비유가 그렇다는 거고, 일본 정치에서의 고이즈미와 호소카와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충격이다. 그야말로 충공깽. 고이즈미 극장 부활

정치적 스승인 고이즈미의 탈원전 조언을 아베 신조가 무시한 채 중동지방을 돌아다니며 원전 세일즈를 했던 것이 고이즈미의 결단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만일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의 전 후생노동상이었던 마스조에 요이치가 패배할 경우 아베의 리더십엔 상당한 위기가 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발리며 망했어요가 되고 말았다. 고이즈미도 이제 퇴물이구나... 근데 호소카와가 우쓰노미야랑 단일화 안 한 것도 커서...

고이즈미는 2013년 8월에 핀란드의 방사성 폐기물 최종처분장을 방문한 뒤 지하수가 많고 지반이 불안한 일본에서 원전을 통제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탈원전으로 돌아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리 재직 시절에 고이즈미는 원전을 찬성하는 쪽이었다. 일본 사민당과 일본 공산당이 지지하는 변호사 출신의 우쓰노미야 겐지(宇都宮健兒)와 호소카와가 단일화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 사람은 일본의 변호사로 일본 변호사연합회장 출신이다. 혐한 시위를 인종차별 시위로 규정하고 반대했다. 자민당은 고이즈미 전 총리의 차남인 고이즈미 신지로를 자민당 유세에 투입하여 부자대결 식으로 맞불을 놓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신지로가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고이즈미와 정면 대결하기보다는 원전 이슈를 희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자민당의 관계자는 고이즈미가 아베를 흔들려고 이런다기 보다는 자민당내에 친원전 의원들이 아베에게 원전 재가동을 압박하는것을 막기 위한 제스쳐로 본다고 지적했다. 어찌되었든 당의 원전 재가동 정책과는 정반대의 행보라 "그냥 말을 말았으면.." 하는 반응이 대다수. 그의 아들인 신지로를 비롯해서 유력 인사들은 고이즈미의 발언과 자민당 사이에 선긋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베와는 우정 민영화 철회 등으로 정책적 골이 상당한지라 고이즈미의 행보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2016년 현재도 원전 반대 운동에 열심인 듯 하다. 5월에는 미국 강연에서 동일본 대지진 당시 구호작전에 나섰다가 피폭당한 미군을 도와야 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고.
여담으로, 같은 때 일본을 방문한 부시 전 대통령(아들 부시)는 아베 신조 총리와 만났는데, 대화 주제 중 하나가 부시와 고이즈미와의 추억이었다고 한다. 아베가 고이즈미 정권 당시 관방장관 출신이라 그런 듯 한데, 원전 문제로 둘 사이가 (조금은) 껄끄러운 점을 감안하면 미묘하다고나 할까...

사실 고이즈미의 성향 자체가 완전히 통일된게 아니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건데, 정치/경제적으로는 보수적 성향이 짙으나 정작 사회적인 문제에선 진보 성향이 짙은 편. 위에서 말한 우체국 민영화야 개혁은 개혁이래도 경제적으로 봐서는 보수적인 시각이겠으나, 덴노의 여계 혈통을 인정하는 방안을 고려했던 사람도 고이즈미였다. 히사히토가 태어나면서 유야무야되긴 했어도 일본에서 왕실 문제를 저 정도로 생각했다는건 그만큼 상당한 진보적인 이념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유럽의 군주국들은 대부분 여계 혈통을 인정했지만 아시아의 군주국들은 아직도 인정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4]

또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한편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하기 위해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을 국립추모기관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다만 이 일은 극우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10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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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의 사진 자체는 합성이다. 실상은 이렇다.


이 사람의 집권기간이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고공행진을 하던 시기였던지라 한국에서 고이즈미의 이미지는 아주 안 좋은 편이었다. 사실 이 사람만큼 한국인들에게 관심(?)을 받은 일본 총리는 거의 없었고,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 하에서 박정희 정부때(한일 외교협정)와 김영삼 정부 때 이래로 이 때만큼 한일관계가 대놓고 불편했던 적도 드물었다. 일본 극우파의 영원한 떡밥인 '독도=다케시마=일본 땅...

그런데 2013년 출범한 아베 신조 내각이 시작부터 막나가면서 고이즈미를 능가하는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아예 고이즈미 시절 일본이 그나마 나았다고 하소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고이즈미가 과거사 망언은 많았지만 현대사까지는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아베 정부 때 현대사의 대명사인 한일월드컵 개최 사실도 삭제한 교과서를 검정통과시키는 만행이 나왔으니...

엘비스 프레슬리의 왕 팬으로 알려져있다. 조지 부시와 함께 미국 방문당시 엘비스의 저택인 "그레이스랜드"가 있는 멤피스에도 방문을 했는데, 여기서 프리실라 프레슬리(부인)와 리사 마리 프레슬리(딸)도 만났다. 그리고 그레이스랜드에는 엘비스가 살아 생전 쓰고 다녔던, 엘비스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선글라스가 유리관 속에 넣어져서 전시되어 있었는데, 고이즈미는 이것을 당당하게 꺼내서 쓰고 엘비스 춤을 흉내냈다. 엘비스 덕후들로서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역시 총리쯤 되면 저 유일무이한 아이템도 써볼수 있고 좋구나!라는 조롱과 부러움이 섞인 탄식이 나오는 장면이었다고...당시 영상

청년 시절에 한국 가수 계은숙의 열혈팬이었다. 그래서 팬클럽 회장을 맡았던 적도 있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고이즈미는 42년생이고 계은숙은 62년생이라 계은숙이 데뷔했을 때 고이즈미는 이미 40대였다. 팬카페에 가입했다는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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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뒤인 2009년 대괴수배틀 울트라 은하전설 THE MOVIE에서 다름아닌 울트라맨 킹의 성우를 맡아서 수많은 특덕후들을 충공깽에 빠뜨린 적이 있다.(...) 평가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

이 인간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세계의 정상들과 마작으로 승부하는 헛쯔모없는 개혁라는 만화가 있다.

몇년 전 웹상에서 고이즈미를 로, 당시 고이즈미의 비서관이었던 이이지마 이사오를 으로 만든 일본의 BL동인지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특이한 생김새와 기행들로 알려져 있어서 인지 해외에서는 일본의 마스코트격(?) 되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있다. 특히 한국 내에서 나오는 CF들 중 일본인 캐릭터를 내세운 CF중엔 고이즈미를 모델로 한 듯한 인물들이 심심치않게 등장한다.

한국 영화인 청연을 망하게 한 원흉이 이 인간의 외조부임이 밝혀져서 또 화제를 불러일으킨바 있다. 주인공을 후원해주는 일본인의 모델이 다름아닌 이 인간의 외조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고.
  1. 배우로 활동 중.
  2. 아버지를 이어 정치가로 활동 중.
  3.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직설적 화법을 좋아해서 많은 외교정상들이 이런 뻘줌한(...) 상황을 겪었다.
  4. 옛날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 한국 신라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일본 스이코, 메이쇼 같은 사례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