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조선의 역대 국왕
14대 선조 이연15대 광해군 이혼16대 인조 이종
묘호없음
시호없음
존호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
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
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1]
→없음(폐위)
군호광해군(光海君)
본관전주(全州)
[2]광해군묘(光海君墓)
이(李)
혼(琿)
출생지
사망장소제주도
배우자폐비 유씨(廢妃 柳氏)
아버지조선 선조
어머니공빈 김씨(恭嬪 金氏)
[3]
생몰
기간
음력1575년 4월 26일 ~ 1641년 7월 1일
양력1575년 6월 4일 ~ 1641년 8월 7일(66년 2개월 3일, 2만 4171일)
재위
기간
음력1608년 2월 2일 ~ 1623년 3월 12일
양력1608년 3월 17일 ~ 1623년 4월 11일(15년 25일, 5503일)
조선의 역대 왕세자
순회세자 이부광해군 이혼이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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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위치한 광해군묘.[4]

조선의 제15대 왕(1575~1641, 재위 1608~1623).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무리한 토목공사로 조선의 재정을 파탄냈고, 아버지가 물려준 인재풀을 다 박살내버렸으며, 말년에 후회하듯 다시 서인들과 남인들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결국 역으로 그것이 원인이 되어 몰락했다. 당파성이 적은 중신들만 처음처럼 계속 중용했어도... 하지만 좌청룡 선조, 우백호 인조의 든든한 지원으로 재평가를 받고 있다. 폐위 된 왕치곤 후대의 평가가 좋은 몇 안 되는 왕 중 하나로, 사극이나 창작물의 소재로도 잘 등장한다. 20세기 들어서 재평가 바람이 불기도 하였으나, 2010년대 들어 거품이라는 평가가 다시 늘어나고 있다.

선조와 인조에게 핍박당한 왕이라서 재평가를 받으나, 업적만 평가하자면 아버지 선조에게 절대로 못 미친다. 조선왕조 최악의 왕으로 욕을 먹는 인조조차 광해군이 남긴 뒤처리를 맡은 왕이며, 재정 관리를 포함한 다방면에서 인조보다 대충한 일이 많다는, 일반적인 여론과는 정반대의 암군 자질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정치계의 1인자가 성급하면 정반대의 역풍을 맞는다는 진리를 매우 잘 보여주는 왕이다.[5]

선조차남이자 서자로써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 책봉된 후 왕위에 올랐다.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제외하면 아들 모두가 서자들이고, 광해군은 그들 서자들 중에서도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기에 서손인 선조만큼은 아니었지만 지위가 불안정했다.

광해군은 양위 및 폐위로 묘호가 추숭되지 않았던 4인의 조선 국왕 중 한 임금이기도 하다. 다른 3명은 2대 공정왕,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이다. 다만 공정왕과 노산군은 숙종 대에 들어서 각각 정종단종으로 추숭되었으므로 결국에는 연산군과 같이 둘밖에 남지 않았다. 더불어 광해군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노산군, 연산군과 같이 '실록'이 아닌 '일기'의 형식으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실린[6] 단 셋 뿐인 임금이다. 다만 재위 내내 숙부에게 끌려다니다 죽어 동정을 받는 단종과 역으로 오직 전횡만을 일삼아 비판을 받는 연산군과는 다르게,[7] 광해군은 치적의 공과가 뚜렷하여 그 평가 스펙트럼도 상당히 넓은 편. 재위기를 떼놓고 보더라도 세자시절 구국을 위해 전장을 누볐던 면모부터 노년기 제주도에서 유배생활 끝에 숨을 거두기에 이르기까지, 군주가 아닌 한 인간의 생애로 보더라도 굉장히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큰 편이기도 하다.

묘호와는 별도로, 광해군은 재위 도중에 따로 존호를 받은 바가 있었다.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시호와 무관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 역대 국왕의 존호 중에서도 압도적인 길이다. 이러한 존호들 가운데 일부는 명의 황제가 내린 칙서의 령을 받들기 거부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예를 표하고자 바쳐진 존호로, 사실상 명에 대한 기만책으로서 전략적으로 활용되었다.

2 일대기

2.1 즉위 이전

즉위 이전의 업적으로만 치면 조선 역대 세자들 중 손에 꼽히던 리즈시절 & 중립외교와 같이 일반 대중들에게 고평가받는 이유.[8]

광해군은 1575년에 선조와 훗날 잠시 공성왕후로 추존되었던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태어났다. 선조의 장남이자 광해군의 동복형으로는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많은데도 너무나 제멋대로에 포악한 성격의 인물이었기에 뭇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이렇듯 출생이나 인기 자체는 괜찮았으나, 실제 계승 이후에는 왕권이 불안한 왕이었다. 대외적인 상황도 안 좋았다. 당시 명나라만력제도 쟁국본에서 후계 문제로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었던 데다가, 선조가 아들들을 줄세우면서 판단이 자주 흔들렸다는 것이 계승에 있어 더 실질적인 문제였다. 조정의 여론은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광해군이 대세였으나, 그럼에도 선조는 재위 중기엔 계승서열이 더 낮은 인빈 김씨 소생의 의안군과 신성군을 총애하여 세자감으로 눈여겨 보았고 말년에는 적자인 영창대군에 주목했다. 반면 종법상 가장 정통성이 강했던 임해군은 그 난폭한 행실 탓에 선조에게도 조정에서도 전혀 군왕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박시백 화백은 "선조가 광해군을 괴롭히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한 이유는, 임진왜란 중 도망치기만 한 자신과는 달리 광해군은 분조를 잘 이끌어 백성들과 신하들의 지지를 얻자, 그 점을 질투했기 때문이다"라는 설을 제시했다. 또 이 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애초에 광해군은 종법상으로 따져봐도 영창대군보다 우월한 지위였다.

아버지 선조처럼 광해군에게도 그가 왕자였던 시절에 부왕의 물음에 영특하게 답한 일화가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루는 선조와 의인왕후가 10명이 넘는 왕자들을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맛난 반찬 음식이 무엇이냐?"며 묻기를,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9]을 댔으나 유독 광해군만은 조미료인 소금이라 답했다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광해군 이르기를, "소금이 아무리 흔한 물건이라지만, 아무리 맛난 산해진미도 소금 없이는 100가지 맛을 이루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선조가 왕자들에게 가장 아쉽게 여기는 점이 무엇이냐 묻자, 다른 왕자들의 답변과 달리 광해군은 모후와 일찍 사별한 것을 가장 아쉽게 여긴다고 답했다. 이 일화를 전해들은 신료들은 일찌감치 광해군을 왕의 재목으로 주목했다고 한다.

2.2 임진왜란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선조는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유능한 왕자를 세자로 삼아야겠다는 결단을 내려 둘째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당시 청년시절의 광해군의 활약은 그에 대한 평가의 호오와 별개로 조선왕조 역사상 그리 많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실천된 사례로써 뭇 사람들이 그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시기였다. 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조선의 창건자인 이성계와 그리고 같이 전쟁터에 나갔던 정종을 제외한다면, 외적과의 전면전에 직접 뛰어들어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국왕은 광해군이 유일하다. 농성을 포함한다면 인조도 해당되겠지만 이쪽은 삼남 쪽으로 도망치려다 갇혀서 농성했기 때문에 본의로 임한 것이 아니라서 경우가 좀 다르다.

떠넘겨지듯 종묘사직을 떠맡게 된 광해군은 조정을 분할하여 분조를 이끌었으며, 왜군이 길을 막아 북쪽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분조를 남으로 이끌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항쟁을 지휘하여 높은 성과를 올렸다. 선조의 도주로 궁궐을 불지르고 왕의 아들들을 (깽판을 쳤다지만) 왜군에게 넘길 정도로 백성들에게 왕실의 이미지(권위)가 지하 암반을 뚫고 내려가고 분노와 실망을 안겨주던 시절, 유일하게 왕실의 일원으로서 해야할 일을 책임있게 그리고 꽤 성공적으로 임한 인물민심수습, 사기 회복, 왕실이미지 회복의 효과가 꽤 컸다. 그 때 광해군의 나이[10]나 상황[11]을 고려했을 때 이 정도로 책임의식을 가지고 해낸 것이 놀라울 정도이며 이 때 대처는 한국사 통틀어 다른 전란기 왕들과 비교해봐도 꿇리지 않을 정도. 괜히 신하들과 명이 선조를 끌어내리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게 아니다.

전란이 계속되면서, 명이 광해군을 새로운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선조는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의심이 짙어졌다.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반란 사건으로 가뜩이나 의심이 많아진 선조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광해군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여러차례 양위 소동을 벌여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는 결국 광해군 대에 부담으로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인목왕후를 새로이 맞아들였는데 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적자인 동생이 태어나자 그렇지 않아도 껄끄러웠던 광해군은 처지가 더 곤란하게 되었다.[12] 선조는 전란을 수습한 광해군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심을 크게 느꼈고[13], 세자를 멸시했지만, 영창대군은 아직 어려도 너무 어렸던 데다가 현 세자인 광해군이 유능하고 별 흠이 없었기 때문에 애매한 태도를 보였으며, 유영경을 비롯한 영창대군 옹위파 신하들은 그런 선조의 마음을 읽어 적통을 우선하여 세자의 지위를 흔들었기에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덤으로 명나라 조정이 내부의 후계문제로 인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만력제 항목 참조.

2.3 즉위 시절의 불안정

선조는 병상에서까지 후계에 대한 확정을 미루다가 결국 죽음이 임박해서야 "광해군을 왕위에 앉히고 왕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탁소북의 영수이자 권신이었던 류영경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위해 이 교지를 자신의 집에 몰래 감추어 계승을 교란시켰고, 결국 정비였던 인목왕후가 언문교지를 통해 광해군의 후계성을 인증하고서야 광해군이 즉위할 수 있었다.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던 셈이다.

위의 항목에서, 즉위부터 걸림돌이 되었던 영창대군 문제는 계속 광해군을 괴롭혔고,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대비의 시위도 적지 않았다. 광해군은 초기에 탕평인사를 주장하면서 대북 뿐만 아니라 다른 파벌도 감싸 안는 대정체제를 취했지만, 당시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세력은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광해군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려 했다. 기폭제가 된 것은 임해군을 시작으로 봉산옥사, 김직재와 신경희의 옥, 계축화옥 등 거듭 발각되는 역모 모의 사건이었다.[14]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부왕 선조가 이몽학의 난 이후부터 보여준 모습과 마찬가지로 왕위 사수에 대해 극심한 노이로제를 보였다. 그 결과 왕권을 위협할만한 징후가 보이면 주저없이 친국을 통해 이를 가차없이 눌러 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이이첨 등 대북에 다대한 권력이 집중된다.[15]

선조의 사망에 허준과 광해군이 관여했다는 독살설 음모론을 미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열거해보면, 우선 선조가 의외로 건강했는데도 불구하고 돌연사했으며, 당시에 어의였던 허준이 광해군의 비호로 인하여 그에게 내려졌던 형벌이 귀양에서 그쳤다는 점, 심지어는 북인의 신하들도 허준에게 더한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내렸으나 광해군은 이를 모두 묵살했다는 점, 이후 광해군의 전폭적인 지원아래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했다는 점들이다.

그러나 독살설과 관계없이 광해군이 허준에게 호의를 보일 만했던 점은 광해군이 왕자였을 때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와중에 자원하여 치료를 해주고 마침내 완쾌시킨 사람이 허준이었다는 것이다. 허준은 그 공로로 당상관에 오른 적도 있었는데, 실록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 치료에 대한 포상이 너무 과하다고 신하들이 따지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왕이 죽었다고 무조건 어의들을 때려잡듯이 벌을 주고 귀양을 보낸 것은 절대 아니다.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의 경우 거의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병사한 경우에도 형식적인 귀양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유배에도 급이 있어서(가령 자기 땅 많은 곳에 보낸다든지, 자원부처라든지..), 누가 봐도 형식적인 귀양이라면 그냥 휴가보내듯 갔다가 돌아올수도 있다.[16] 따라서 음모론은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며, 오늘날 허준은 당대 조선의 민중을 구원한 위대한 의술가로 높이 평가된다. 게다가 이 음모론 자체도 인조반정 당시 인목대비의 주도로 광해군의 죄상에 포함시키려다가 바로 그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들이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여 빠진 부분이다. 말 그대로 "찹쌀떡밥".[17] 애초에 이러한 독살설들은 대부분 심증에 불과하다.

2.4 붕당 간의 균형을 망치다

위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광해군은 초기부터 선조인조의 실책에 버금가는 극심한 왕권 노이로제를 보여준다. 수많은 옥사들은 붕당간의 밸런스를 흔들어놓았고, 특히 대북이 인조시절의 서인들에 맞먹는 패악을 부리게 된다. 특히, 대신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대북파의 힘이 너무 커져 광해군은 이이첨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윤선도의 상소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여러 옥사들을 주도하며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대북은 이후 각종 국가기관들과 심지어 과거시험까지 조작해가면서 권력을 다지게 되었고. 광해군 초기 실세 그룹이었던 소북파인 박승종과 유희분마저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광해군이 총애하였던 허균이 죽기 직전 할 말이 있다고 외쳤고 광해군 또한 허균의 말을 들어보려 하였으나 이이첨이 광해군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독단으로 허균을 처형하는 등 대북에게 왕권이 잠식되어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옥사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이귀 및 김류등 서인 세력들은 광해군의 잦은 옥사때문에 피해를 입는 바람에 광해군에게 원한을 품어 잠재적 불만론자들이 되어버렸고 그들에 대한 경계를 거두고 오히려 권신인 이이첨 등 대북파로부터 권력을 거둬들이기 시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경계를 푼 결과는 거사 당일날의 밀고마저 일축함으로써 인조반정이 성공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2.5 폐모살제

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축출하기 위해 세운 명분 중의 하나가 소위 폐모살제라 불리는 친족에 대한 견제였다. 형인 임해군을 독살시키고, 조카인 능창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보내 살해했으며,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하여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폐륜을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을 죽이도록 광해군이 직접 교사했다는 사료는 없다. 사실 실록에 등장하는 영창대군 살해진상은 그 때 그 때 다 다르다. 또한 영창대군 사사에 연루된 인사들 중 영창대군 살해에 가담했던 정항 등 상당 수는 훗날 인조반정 공신들에 의해 복권된다. 어느 쪽이든 당시 정황상 심증으로 광해군이 그랬을 거라 취급하는 것이며, 또한 반정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처럼 몰아간 면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유배지의 현지 관리가 왕명과 무관하게 임의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이첨 등 대북 강경파의 소행이라는 견해가 있다.[18]

다만 영창대군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부사 정항 등 의심자들에 대해 딱히 이렇다할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것이 광해군이 내심 이들의 행위를 두둔했다는 것이 근거로 꼽히기도 한다. 임해군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따른다'면서도 가족과 노비까지 혹독히 수사하면서 몰아붙였고[19], 처음 임해군이 병사했다고 보고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재조사 도중 노비가 "독약을 올렸다가 임해군이 먹지 않으니 목을 매어 죽였다"고 증언한[20] 대상인 이정표라는 인물은 임해군 사후 전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영창대군을 감시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런 미온적인 대응과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혹한 조치가 표면적으로 극형을 꺼린 광해군의 입장과는 앞뒤가 맞지 않다며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진짜 의중과 이면에 감춰진 진실은 본인과 연루자들 밖에 모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권을 뒤엎고 집권한 인조 자신조차 영창대군 살해 관련자(이정표, 정항)들에 대한 처벌 요청에는 시큰둥하다 못해 아예 화를 내면서 막았다.

그리고 거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이 증살설, 굶어죽은 것, 양잿물을 먹여 죽게 했다는 등 일관되지 못하고 광해군 시대에는 병사설이 정설이었다가 인조 후 다양한 죽음설들이 돌며 광해군이 살해한 것으로 묘사되고 인조 측도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재조사는 없었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은 병사가 맞고 살해했다는 것은 누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광해군 대에 영창대군이 죽었을 때의 상소의 내용은 역적을 국법으로 죽여야 하는데 정항 놈이 제대로 관리를 안해서 국법으로 처벌을 내리기도 전에 죽어 종묘사직을 욕되게 하였으니 정항에게 벌 주세요 정도로 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나 정항이 살해했다는 말은 인조나 서인 측에서도 단순히 소문일 뿐이라며 정항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았었고, 본래 인조 대에 편찬된 광해군일기의 중초본에 "정항이 영창대군에게 밥을 주지 않아 영창대군이 기력이 다해 죽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21] 정항이 영창대군을 증살하였다" 등 일관되지 못한 내용에 인조 대의 영창대군의 비문에는 불을 피우지 않아 영창대군이 얼어죽게 만드려고 했다가 안 죽으니 양잿물을 먹여 죽였다고 되어있으며, 이 양잿물설은 인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양잿물을 먹인 것은 정항이 아닌 이정표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덕형 등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신료들이 역적이라고 하는 영창대군을 어린 아이를 섬에 보내 중병에 걸려 죽게 한 자신의 책임이라며 영창대군을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한다.

영창대군이 죽기 며칠 전에도 중병에 걸렸다고도 하는 등의 내용이 있고 정항이 급한 서신이라며 보낸 서신도 있긴 하지만 정설은 없이 수많은 추측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으로 영창대군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반론이 있다. 이정포가 별장 홍유의에게 영창을 죽이자고 했지만 홍유의는 반대했고 교체되었다. 그리고 강화부사 기협도 파직됐는데 그 이유는 "강화 수령으로 있을 때 역적 의를 비호하여 하지 않는 짓이 없었으며, 음식 공급을 그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었다는 게 이유였다.[22]

능창군의 경우는 '신경희의 옥'이라는 반역죄의 핵심 인물로 연루되어 즉결 처분해도 상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또한 이 죄목을 적용하면 광해군은 능창군의 형인 인조(능양군)과 그 아비인 정원군도 굴비처럼 엮어 숙청할 수 있었고, 결국 인조는 왕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다만 패륜 여부를 떠나서 신경희의 옥사 자체가 평소에 소명국과 친했던 신경희가 소명국을 간통죄로 고발하자 옥에 갇힌 소명국은 뜬금없이 신경희가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한 것이다. 둘의 대질에서 소명국의 말에 신경희는 우물쭈물했다고 하고 광해군은 이에 분노해 신경희를 엄하게 신문할 것을 명령하였다.

문제는 이 신경희가 바로 이이첨의 사람이었다는 것으로. 박승종은 이 말을 듣고 "과연 역적이 가까이에 있었다"고 외쳤다고 하며. 박승종이 이이첨을 잡으려고 침소봉대한 사건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전에 지나친 고문으로 신경희가 옥사해버리면서 흐지부지된 감이 있다. 정확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기도 전에 용의자가 죽어버렸으니 그걸 빌미로 마구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관련자들을 즉결 처분하는 건 실제로도 무리한 감이 있었다. 결국 이게 나비효과를 만들게되었다. 능창군은 유배간 후 자살, 아버지 정원군은 그 충격으로 죽었고 이에 분노한 능양군이 복수를 다짐하였고 반정의 주역인 신경진은 신경희의 사촌동생이었다.

폐모론 수용과 관련해서, 광해군 5년 당시 이위경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정조, 윤인 등을 비롯한 태학생 19명을 대동해 폐모소를 올리자 처음에 광해군은 그 주된 근거인 신덕왕후 및 이방석, 방번의 전례를 상고해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대사헌 이지완과 최유원이 이에 반하여 상소하자 "국모를 동요하니 그 죄가 윤리와 기강에 관계된다"며 이위경 등 20명 모두에게 정거(停擧)[23] 조치를 내렸다. 여기서 일단락 될 뻔했던 폐모론은 4년이 지난 광해군 9년 11월에 다시 유생들(박몽준, 한보길, 윤유겸 등등)의 빗발치는 상소로 불거져 의정부에서 논해졌는데, 당시 광해군일기 11~12월자를 보면 온통 유생들의 폐모 상소 관련 내용이다. 결국 유생들의 상소 러시로 촉발된 폐모정국 과정에서 조정은 허균, 이이첨 등 대북을 위시한 찬성파와 기자헌, 이원익, 이덕형 등의 반대파 두 패로 갈라졌고, 심지어 양사까지 나서서 폐모를 주청하는 등 몇 년을 끌다 광해군 11년 무렵에야 겨우 서궁에 안치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이런 와중에 선조 생전에 영창대군을 지켜달라는 말을 들은 여러 노신들이 김제남의 가족들과 함께 잡혀왔었는데 그 중 박동량이 서궁에서 왕에 대한 저주가 이루어졌다고 고변하였다. 그 내용은 대군 궁방의 사람들은 선왕께서 병환에 시달리게 된 이유를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에게 돌렸고 그리하여 수십여 명이 요망한 무당들과 함께 잇따라 유릉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것이다.

다만 사관은 그들이 저주한 게 의인왕후가 아닌 광해군의 어미인 공빈 김씨의 능에서 했다고 적고 있고 그마저도 임해군이 노비들을 동원해 막아서 실제 하진 못 했다고 적고 있다. 이 말로 인해 대비전의 궁녀들이 줄줄이 불려와 고문을 가해 새로운 증언이 나왔고 그 증언에 따라 선조의 능까지 파보았다. 하지만 증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역모에 휘말린 김제남은 6월 1일에 사사되었고 이즈음 궁중에서는 과거 작서의 변 때와 같은 유사한 일들이 많았다. 실록의 사관은 인목왕후의 어미 정씨의 소행이라 주장하였다. 결국 광해군일기 11년 1월 13일자에선 이를 조보에 내지 말라고 굳이 덮어두는 조치가 눈에 띈다.

광해군은 폐모론 주창자 중 정조, 윤인 등을 삭직했다가 복귀시켰고, 폐모론 반대 주창자 중 이원익은 한동안 유배 후 고향인 여주로 돌려보내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유배 당시 이원익은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지금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머리를 맞대고 흉흉하게 하는 말이 ‘이로 인해 장차 대비에게까지 미칠 것이다.’고 합니다. 신은 그만 놀라서 간담이 철렁 내려앉아 자신도 모르게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어미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자간이란 그 명분이 지극히 크고 그 윤기가 지극히 중합니다. 성인은 인륜의 극치인데, 성명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만일 조정에 과연 이 논의가 없었다면 신이 경솔히 항간의 말을 믿고 사전에 시끄럽게 한 것이니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그러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겠습니다."

광해군은 이 말을 듣고 어디서 들었냐고 따졌고, 이원익은 그냥 걱정돼서 한 거라면서 남에게 들은 게 아니라고 답한다. 결국 이 일은 이원익의 유배로 마무리되었다.

이창록이라는 이는 7년 8월에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가 죽기도 하였다. 그 내용이 좀 과격하긴 했지만.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였으니 이 일을 어떻게 차마 하였는고. 내 어찌 착하지 못한 이를 임금으로 여기랴?"

실록에서는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야사에서는 그가 평소에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고 적고 있다. 다만 앞부분 형과 아우를 죽였다는 건 실록에서도 나온다. 다만 야사에서는 정인홍이 이를 고발했다. 하는데 정작 정인홍은 광해군과 만났을 때 이걸로 그 고을까지 벌 준 걸 좀 까는 뉘앙스의 말을 하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광해군은 폐모론에 대해 여론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다. 세종대왕의 공법 여론조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여론조사는 광해군일기에도 나오지만 <추안급국안>이라는 사료에 좀 더 자세히 나오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이 조사에 참가한 인원은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고 그 결과는 소수의 관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찬성 의견을 냈다.[24] 그러나 폐모론에 대한 인목왕후 폐비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찬성으로 나왔다지만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이첨이 자파세력을 동원해 여론 조작을 했다는것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또 신료들 대부분이 찬성할 수 밖에 없는것이 폐모론에 반대한 서인 남인 원로대신을 광해군이 다 쫓아내 대북세력만 남은 상황에서 여론조사를 했으니 당연히 찬성이 높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광해군 재위기에 터진 이런저런 일들은 반정 세력의 좋은 명분이 되었음도 사실이며, 임해군 사사건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까지 얽혀 대중국 외교에 상당한 무리를 주게 되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예도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리긴 하지만, 여하간 유교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북을 제외한 붕당들의 반발이 있었다. 대북 내에서도 곽재우, 기자헌 유몽인 같은 이이첨 일파가 아닌 대북이나 유희분 박승종 남이공 같은 소북 공빈김씨의 남동생으로 광해군의 외숙인 김예직마저 폐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광해군이 폐비하라고 정식으로 교서를 내린 일은 없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 인목대비는 폐비 취급을 당하긴 했으나 공식적으로 폐모가 된 것은 아니었다.[25]

하지만 페모살제는 결국 광해군의 목을 조른 것이다. 서인, 남인, 대북파, 소북파, 친척까지 광해군에게 반대하고 나서는데 결국 광해군은 이를 단행했다. 비록 폐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설사 좋은 궁궐에 가두었다고 해도 결국 아들이 어머니는 강제로 묶어두었다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 이는 유교가 아니라 윤리적으로 큰 문제다. 특히 위에 서술 되었든 영창대군 죽음 이후에도 광해군을 지지하는 비 이이첨 일당[26] 사람들이 폐비를 결사 반대하는 데 이를 유배와 숙청 등으로 이룬다. 그런데 이로 인해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 일부가 권력을 차지해 자신과 격렬하게 대립함에도 광해군은 이들을 숙청하지 못한다. 서인, 남인을 다시 끌어들이려면 대비의 유폐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일 것 이다. 결국 광해군은 즉위한지 14년이 되고 나서야 겨우 서인, 남인들을 다시 포용하기 시작했다.[27] 광해군이 유폐를 단행한 것은 선조의 지나친 견제에 따른 불안감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대비 유폐는 광해군 스스로 좌초한 것이다. 후술될 박시백의 말처럼 선조에게 받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회복해 포용력 있게 나갔다면 대북의 일당 독재로 벌어진 빈 틈 없이 정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폐모살제는 단순 명분을 넘어 광해군 자신에게 목을 조르게 만들었다.

3 정책

3.1 대동법 시행과 반대

광해군 즉위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로 경기선혜법으로 대동법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하지만 , 광해군 본인은 이 법의 시행 건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개인적으론 부정적이었고 일찍이 시도나 성공 전례가 없었으므로 이 법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겠냐며 강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범 실시 지역인 경기권 밖으로 선혜법을 확대하자는 주장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분명히 했다.

광해군이 대동법 최초 시행자는 맞다. 하지만 확산 과정에서 하지만 과거에는 신하들이 반대하는 대동법을 광해군이 주도했다 잘못 알려졌으나 이정철 교수의 대동법 연구가 공개된 이후 이런 주장은 쏙 들어갔다. 오히려 광해군은 대동법에 미적거리고 반대했다. 대동법은 인조대에 시험적용을 거쳐 미비했던 점을 파악하고 행정에 필요한 인력과 자료를 확보하는 과정을 거친다음 효종 때부터 자리잡는다.

자세한 건 대동법/광해군 시기 참고.

3.2 전후 복구

호적과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복원했으며 동의보감을 발간했다. 또 창덕궁 등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또 임진왜란 과정에서 한양이 생각보다 방어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일찍부터 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지관 이의신의 견해에 따라 임진강한강이 만나는 요지인 파주의 교하로 천도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정으로 실각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외에 광해군 시기 적상산성과 남한산성 석성 개축, 북방 성벽 강화, 강화도에 진지 구축, 수군 훈련 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다만 광해군대부터 인조대까지 반란과 호란으로 소실된 기록이 많아 구체적으로 얼마의 병사들이 전방에 배치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실한 편이다.

반정 세력은 집권 후 궁궐공사를 중지하는 제스쳐를 내보여 민심을 사려 했다. 물론 이괄의 난과 호란으로 인조대에도 공사를 하긴 했지만 인조대의 그것은 광해군 지지자들의 물타기와 달리 광해군대의 그것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

3.3 기록물 편찬과 보존 사업

일반적으로 광해군은 동의보감의 편찬과 완성을 후원했던 것으로 특히 유명하나, 그 외에도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재간 및 보급했다.

조선왕조실록과 관련해서는 재위 2년차에 무주군의 적상산성을 수리하면서 적상산 사고를 새로 설치한 것이 유명하다. 그는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줄곧 새로운 외침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특히 후금의 침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훗날 호란 때의 실제 침공 루트까지도 거의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기존 사고의 불안성을 보완할 새로운 실록 사고 건축을 명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괄의 난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마니산, 춘추관 사고에 보존되어 있던 사료들 태반이 소실됨으로써 이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참고로 적상산 사고본은 정묘호란 당시 그곳을 지키던 승려 상훈이 재빨리 인근 굴 속으로 숨김으로써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고, 현종 때 소실된 실록들을 보완했던 작업에서는 적상산 사고본이 주된 참고 사료가 되었다.

3.4 옥사

광해군 4년(1612) 2월 13일, 역모 보고가 들어온다. 장소는 황해도 봉산으로 그 장본인은 김제세로 공문서를 위조해 군역을 피하려 하였다가 엉터리로 만들었기에 '위조한 흔적이 현저해 의심의 여지가 없어서' 그를 붙잡아 추궁하였는데 그의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나온다. "평산의 대장이 군내에서 반역을 일으키고자 우리 형제로 하여금 허실을 염탐하게 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 김제세가 대장이라고 고한 김백함은 바로 붙잡혀왔고 이름이 나오는대로 굴비 엮이듯 줄줄이 들어왔으며. 광해군은 이를 직접 심문(친국)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사건이 이상해져갔다. 일단 맨 처음 황해병사 유공량의 장계에서도 그런 부분이 나오는데 이런 내용이다. "그의 꾸며대는 말이 괴이하여 다시 국문을 가한즉 말이 혼란하여 믿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17일, 황해 감사 윤훤과 병사 유공량은 각기 장계를 올리면서 공초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고 보고하였다.

"그자는 이미 어보와 인장을 위조하고 체포된 뒤 틀림없이 사형이 될 것임을 스스로 알고는 평소에 일면식이라도 있고 조금이라도 원한이 있는 사람은 다수 끌어대어 묻는 대로 대답하는 말들이 마치 미리 외워놓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니 또 무어라 끌어댈지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중략) 앞뒤로 말을 바꾼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풍병이 들었거나 정신나간 사람은 아닌 듯한데, 형제가 같은 말로 공초를 하였으니,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 윤훤
"역적이 끌어대는 숫자가 점점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며 민간에서는 소요하여 뜻밖의 변란이 이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도 있겠기에, 신의 어리석은 염려도 아울러 장계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중략) 심문하여 전일의 공초를 가지고 힐문하니 대개 앞뒤가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모든 역모를 꾀한 사실을 마치 심상한 보통 이야기 하듯 하고 두서 없고 혼란한 말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 유공량

현장에서 이들을 심문한 병사와 감사가 거짓을 말했다고 본 것이었고 이 일을 듣고 이덕형이 급히 들어왔는데 그 역시 죄인들이 다 잡혔으니 더 일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말하지만 광해군은 그럴 생각이 없어 매일마다 친국했다, 붙잡혀 온 이들이 부정하면 곧바로 압슬형을 행하였고 그렇게 죄인들은 압슬형을 당하면 이런저런 이름을 댔다가 다시 부정했고, 또 압슬형이 시작되면 다른 이름들을 끌어내는 식으로. 여기서 나온 이름이 그냥 아무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가 원한이 있는 이였을 수도 있었지만 참 많은 사람들이 또 끌려오게 되었다. 대장이라는 김백함은 2월 22일에 다른 이들과 함께 거열형에 처해지는데 이 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나라가 나에게 속았다!" 이런 것을 근거로 박승종 등은 계축옥사 때 적당히 하라는 쪽으로 광해군에게 말하지만, 광해군은 이렇게 답한다. "역적을 국문할 때에는 엄히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러다 보면 국맥을 실제로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옥사가 확대되는 가운데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봉산 군수 신율의 지인 유팽석도 끌어온다. 그는 황혁, 정경세 등의 대신부터 정인홍까지 끌어들였고 여기에 류영경의 자식들까지 끌어들였다. 원수사이인 정인홍과 류영경이 같이 같이 역모를 꾸몄다는 고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정인홍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붙잡았고, 황혁은 죽고 정경세는 파직되었다. 실록의 사관평에서는 이게 신율이 꾸민 것으로 적고 있다. 지인인 유팽석을 희생시켜 자기의 원수였던 황혁과 정경세를 숙청하려 했다는 거였다. 애초에 신율에 대한 평은 좋지 않았다. 고문으로 더 큰 범죄를 만든다는 식으로. 옥사에는 죽은 이들의 처첩과 어린아이들까지 연루되었다. 보통 이들은 관비로 가지 고문을 하진 않지만, 광해군은 이러한 과정에 개입하였다. 9월이 되어서야 이 모든 게 끝이 난다. 이른바 봉산 옥사로 이로 인해 100여 가문이 멸문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지인과 허위 역모를 꾸민다음 그 지인을 고발해버린 일이 벌어지는데 안위라는 자로 임해군이 잡힐 때 수문장이었던 김위를 본받은 것이었다. 김위는 임해군이 무기를 들고 갔다는 걸 고발했고, 원래라면 수문장이 막지 않은 것이므로 벌을 받아야 하지만 상을 받았기때문에 그 일을 본받은 것이다. 안위는 거짓 고변을 하더라도 상을 받으려고 음모를 꾸며놓고는 같이 꾸민 이 또한 고발하였다. 그렇게 같이 의논해놓고 역모의 대상이 된 조극신, 그의 아비는 이 모든 것을 꾸민 일이라 자백하라고 하였고 조극신은 이를 모두 자백했지만 광해군은 조극신은 유배보내놓고 안위는 집으로 보내주었고. 거짓이라 해도 알리기만 하면 아무 죄를 묻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나중에 폐모론이 일때 어떤 사람은 "범죄를 저질러 놓고 벌을 피하려고 고변을 한다"며 깠다. 사실 상식적으로도 광해군이 잘못한것인데 역모죄라는게 걸려서 사실로 드러나면 집안 망치는 것이라서 역모를 무고로 고변하면 거의 다 죽이게 되어있다. 하지만 안위의 사례를 보면 자기가 먼저 저질러놓고 남을 끌어들여 그 남을 망쳐놓았다. 누가봐도 안위가 잘못한것이고 설령 광해군이 안위를 보호하고 싶다 해도 처벌하는 척쯤은 했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것도 안했으니 앞서 지적대로 고변이 면책 방법이 될 수밖에

3.5 지나친 궁궐 건축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조차 과오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어물쩍 넘어가는 광해군의 가장 큰 실책. 인조 측의 영향인지 광해군일기에는 광해군이 군사력에 신경쓰는 모습을 보여도 징발을 했다는 기록 등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정작 인조 2년에 바로 광해군 시대 때 5,6년간이나 군사 징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이 가능하며 동시에 광해군일기에서도 궁궐을 수도 없이 지으면서도 죄다 변경에 군사를 밀어넣어서 도성 내에 군사가 3,000 이하로 떨어질 지경이 되어 업무를 수행할 수도 없어 호위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도성 내의 군사들까지 죄다 변경에 투입하는 짓을 제발 좀 그만하라고 만류하는 내용이 있다. 궁궐병과 군사력 강화병이 이중으로 발동되었으니 백성들의 고난은 알만한 수준.

또 악소배(惡少輩)를 시켜 백성들의 소와 말을 빼앗아 자재를 운반하게 하고, 개경 근처의 각 군(郡)에서 장정을 징발해 벌목한 후 목재를 강물로 떠내려 보냈다. 이로 인해 인마(人馬)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주(州)·군(郡)이 소란하니 농민들은 아예 농사를 작파해버렸다. 당시 개경 백성들에 사이에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다가 새 궁전의 주춧돌 밑에 묻으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집집마다 놀란 나머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는 사람이 많았다. 악소배들은 이 틈을 타서 겁탈과 도둑질을 자행했다.

왕은 완공이 지연되자 노하여 김선장과 박양연 등에게,
“만약 10월까지 완공하지 못하면 반드시 중형을 받게 될 것이고 또 하사했던 물품과 공사비용도 추징할 것이다.”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에 김선장 등이 밤낮으로 쉼없이 공사를 독촉하면서,
“재상으로부터 권무(權務)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재를 실어 나르되, 기한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베 5백 필을 징수하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낸다.” 는 방을 붙이니 자재를 실은 수레가 길을 메웠다. 신궁(新宮)의 처마와 문을 모두 놋쇠와 구리로 장식하면서, 백관으로부터 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분부해 두 사람당 오종포(五綜布) 1필 씩을 주고 놋쇠와 구리(鍮銅) 2근씩을 징수하니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했다.
또 각 도(道)로부터 구리와 철을 거두어 세 발 달린 솥과 발이 없는 큰솥 및 가마솥을 만들어 신궁에 들여 놓았으므로 민간의 농기구는 아예 남아나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왕은 공사가 지연되는 것에 노해서 몸소 김선장·박양연·민환에게 장형을 내리니 민가와 사원의 재목·기와·주춧돌·섬돌이 모두 뜯겨져 나갔다. 그 궁실의 구조는 왕의 거소와 사뭇 달랐다

고려말 암군의 대명사인 충혜왕도 궁궐을 짓는답시고[28]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덕분에 농업 국가에서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하는 현상(작파)이 발생했다!

광해 114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4월 18일(임자) 4번째기사

호조가 궁궐의 건축으로 인한 재정의 부족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정에 이미 궁궐을 짓는 큰 역사가 있으니 백성들이 포목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그러니 만약 달리 조치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전결에 따라 포목을 거두는 것을 정지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세입(稅入)이 1년의 쓰임새를 다 대지 못하여서 10월등(十月等)의 반록(頒菉)과 다음해 정월등(正月等)의 반록은 매년 계속해서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부득이 계청해서 경기와 공홍도의 전세(田稅)를 미리 끌어다가 썼습니다.

광해 155권, 12년(1620 경신 / 명 만력(萬曆) 48년) 8월 7일(임자) 3번째기사

공명첩을 만들지 않은 해조의 색낭청을 추고하게 하다
“방추(防秋)할 시기가 이미 다가왔는데, 공명첩(空名帖)을 아직도 만들어 보내지 않았다고 하니, 해조의 색낭청을 추고하라.”

공명첩 -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매관매직 수단 - 을 발행 안 했다고 조사한다니

고금에 토목공사를 자주 벌였던 임금치고 말로가 좋은 경우는 드문데 광해군은 역대에서 유례가 없을만큼 새로 짓고, 꾸미는데 열심이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불타버린 종묘의 중건을 마쳤고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 중건사업을 재개하여 1611년 완성하고 창덕궁으로 옮겼다. 중건 뒤엔 다시 창경궁을 중수했고 정원군[29]의 사저가 있던 자리에 왕기가 있다는 풍문을 이유로 돈의문 안에 경덕궁[30]을 짓고, 풍수에 따라 또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며 인경궁을 짓고 북학 자리에는 자수궁을 짓는 등, 궁궐을 짓고 또 지었다.

임진왜란 때 궁궐들이 다 불탔으니 원래 있던 궁궐을 짓는다면 신하들도 반대하기 힘들었겠지만 광해군은 그런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선조때 이미 창덕궁 공사가 시작되어 거처할 궁궐을 확보했는데도 새로운 궁궐들을 대규모로 건설했다. 인경궁은 아예 옛 정궁 경복궁 10배 크기였다. 또한 인경궁과 자수궁은 청기와를 사용했는데 이 청기와 재조의 주 재료가 화약의 원료인 염초다. 앞의 선조나 후대의 인조 시기는 말할것도 광해군대에도 화약이 크게 부족했다는걸 고려하면 국방에 신경을 썼지만 그러면서도 궁궐을 짓는데 너무 과도한 힘을 소비하여 군사력 강화까지 합쳐져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되졌다.

심지어 궁궐병 못지 않게 변경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도 정신병적인 집착을 보이는데 당장 광해군일기에서 광해군 14년대를 보면 훈련도감에서 도성 내의 군사가 3,000도 채 안되고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들이 너무 힘들어하는데 이 상태에서 또 변경으로 보내면 궁성을 호위할 병력도 없어질 것이라고 광해군을 만류하는 내용이 있다.[31]자신을 호위할 병력까지도 전쟁 대비랍시고 변경에 보내 배치시키는 것인데 이게 왕권강화를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짓인지도 의문이 들 정도. 궁궐을 짓는 이유가 왕권강화라고 하지만 정작 하는 행동을 보면 왕권강화와는 거리가 먼 행동들만 하고 있어 정말 PTSD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또한 이 때에서 7개월 전 훗날의 청태종이 되는 홍타이지가 병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보고를 받았던 광해군은 홍타이지에게 권력싸움에서 밀려난 누르하치의 장남인 따이샨[32]의 행방을 찾으라고 정충신에게 다급히 명하기도 했고 홍타이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도성 내의 호위를 거의 포기하면서까지 저렇게 닥치는대로 병력을 모아다가 보내던 것은 홍타이지가 병권을 잡은 것을 경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궁궐을 짓고 나서의 행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즉위 초에 이미 창덕궁 중건을 마쳤는데도 그곳에 계속 거처하지 않고 수시로 '좁고 불편한' 정릉행궁(덕수궁)으로 옮겨가서 거처했다. 반대를 뿌리치고 경덕궁을 중건한 다음에도 그랬다.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광해군의 이런 행동은 세자시절 겪은 전쟁 후유증[33]이 주된 원인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을 통해 '죽고, 다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굶어죽고, 병에 걸리고, 사람이 사람을 먹고, 강간을 목도'하면서 사람들은 운수에 병적으로 집착하거나 미신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적극으로 나서 싸웠던 세자였으니 당연히 이런 것에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운수에 집착이 심했고 술사들을 가까이 했다.

광해군은 일찍이 이의신에게 '창덕궁은 두 번이나 큰 일을 치러서 머물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의신은 "고금의 제왕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변란들은 궁궐의 길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로지 도성의 기가 쇠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속히 옮길 곳은 점쳐야 합니다"고 했다. 광해군은 이후에도 창덕궁에 거처하지 않았다. 이의신의 주장에 신료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광해군은 이의신의 주장에 동조했다. 광해군 7년 5월 23일, 머물고 있던 창덕궁 대조전을 떠나 창경궁이나 정릉동 행궁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대조전은 유암불편하여 오래 머물 수 없으니 창경궁으로 옮기고 싶다'고 한 것이다. 두 궁궐을 수리하라고 지시한 것은 이런 이유였다. 그리고 이건 수리에 그치지 않고 새 궁궐을 짓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왕권의 위상을 높이려는 욕구도 역시 그 원인 중 하나라고 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부왕 선조의 권위가 무너지는 걸 직접 보았다. 평양에서는 군민들이, 북상하려던 선조일행을 막고 시위를 벌였다. 숙천에서는 선조의 행방을 알려주려고 벽에다가 낙서를 해놓은 백성도 있다. 그렇게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국왕으로서 권위를 구겼다. 명군 지휘관들한테도 수모를 당했다. 선조는 명군의 최고 지휘관인 병부시랑 송응창이나 이여송은 물론, 연대장 급 정도인 장교들과도 맞절을 했다. 선조실록에는 선조를 면담했던 명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의 처소보다 국왕의 거처가 누추해서 송구스럽다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34] 이것 역시 임진왜란의 PTSD의 일부로 볼 수 있겠다.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당시 궁궐공사에 따른 부가세까지 얹은 것. 그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파병 요구를 해왔다. "전쟁과 토목공사를 병행한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 없다"는 상식적인 지적이 당시 신료들 내부에서 터져나왔다. 그런데도 광해군은 궁궐 공사에 계속 집착했다. 일부 지방관들은 잘 협조하지 않아 자재 수습과 재정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 특별 어사들을 지방에 파견했다. 조도와 독운별장이다.

광해군은 궁궐공사 재원마련을 위해 전국에 영건도감 소속 조도사를 내려보내 면포를 걷었다. 영건도감 자체가 왕의 지대한 비호 아래 부패, 권력기구화하여 정해진 수량[35]에다 방납가를 적용, 최대 100배까지 징수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던 것이다. 지방에 내려간 조도사들은 어명을 내세워 마구잡이로 징색과 횡포를 벌였다. 한가지 예로, 서자 출신인 김충보는 광해군 15년 1월, "경주부윤 김존경이 궁궐영건을 못마땅해하고 자신한테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울로 소환하여 옥에 가두라 상소했다. 조도사가 종2품의 "고간을 잡아넣어야한다"고 직보한 것. 그런데도 광해군은 "조도사가 취한 건 별비(別備)지 백성들에게 취한게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지방수령들의 탄원을 무시하고 조도사들의 수탈을 지원했다(!).

한명기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이런 것들이 인조반정의 빌미의 싹을 텼을 수 있다고 한다. 적어도 내정면에서, 광해군의 나라는 그야말로 망국 직전의 아노미였다.

1619년 결국 원정군을 파병했는데도 궁궐공사는 이어졌다. 원정군에게 필요한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또 다른 조도사가 삼남에 파견됐다. 영건 비용 + 원정을 위한 증세조처가 더 해진 것! 또다시 궁궐영건을 중단하라는 요구들이 나왔다. 하지만 광해군은 꿈쩍도 안 했다. 원정군이 후금군에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경덕궁의 공사는 광해군 12년 11월경에 거의 끝났다. 하지만 인경궁 공사는 끝이 보이자 않았다.

이 무렵 호남 등지에는 심각한 기근이 생겨 농민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이였다. 파견된 조도사들 사이에서도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예로 호남에 파견됐던 조도사 이창정은 농민들의 참상을 목도했다. 그래서 죄책감을 크게 느꼈다한다. 심지어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도둑질하는 신하이고 하루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루의 죄악을 더할 뿐". 조도사조차 이런 죄책감을 느꼈다. 당시 서인과 남인들은 쫓겨났다. 대북파도 광해군한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창정 같은 실무관료들은 광해군의 권력에 중요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조차 자신들을 '도둑질하는 신하'라고 했다. 한명기 교수는 여기서 '광해군 정권을 몰락을 예고'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인경궁의 건설을 끝내지도 못하고 인조반정을 맞았다.[36] 한명기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광해군이 왕권강화 차원에서 집착했던 궁궐영건 사업이 농민들을 병들게 하고 광해군 자신을 몰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37]

사실 형편을 도외시한 궁궐공사 자체는 조선왕조 기간 동안 가끔 있었다. 예로 태종은 재위 초기에 흉년 중에도 궁궐공사를 감행할 정도였고 반대하는 대간들을 투옥시킬 정도로 강압적이었고, 성종도 흉년 중 세자궁 공사를 감행하였고, 문정왕후는 사찰 건립공사로 재정과 민생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선조는 재위 말기 왜란으로 피폐한 상황에도 고려치 않고 창덕궁 중건 공사를 강행하여 대간들의 지탄을 받을 정도였다. 조선 말기인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도 경복궁 중건을 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쟁으로 나라가 완전히 피폐해진 상황에서 광해군 정도로 토목공사를 집중시키진 않았다.

광해군이 처음에 말한 대로 경운, 창덕, 창경궁까지 짓고 말았으면 임진년 이전처럼 3궁 체제를 복구한 것이니 그렇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그치지 않고 더 크게 궁궐공사를 벌리고 심지어 교하 천도까지 생각했었으니 가히 "궁궐병"이라고 할만 했다. (그나마도 죄다 풍수가,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 결정한 것이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재정이 회복되지 않았고 심지어 한 궁궐이 다 지어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황기와와 청기와로 지붕을 덮도록 지시하는 등의 조치는 위에서 언급한 PTSD가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다른 시기에 비해서도 분명 과한 감이 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광해군의 지나친 궁궐공사와 수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해군 12년 여름을 기점으로 농민 경제는 확실하게 붕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하여 이 무렵에는 이렇게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아예 백성들은 공정하고 관대하게 행정업무를 수행하는 지방관이 탄핵받거나 임기가 만료되어 교체될 경우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그의 연임 운동을 펼치기까지 했다.

광해군 14년 (1622)10월 전라도 나주 백성들이 목사 유석증의 유임을 위해 쌀 1,000석을 바치거나 함평 백성들이 현감 이홍망의 재부임을 위해 쌀 300석을 바친것이 그 사례로 유석증은 임지에서 근신하면서 잘 다스렸고, 이홍망도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기록한 사관은 "백성들의 마음이 무척 감동적이다"면서 감탄하고 있다 목사와 현감의 공정가격이 각각 쌀 1000석 · 300석이라면, 백성들이 돈을 바치고 그들의 수령을 스스로 구입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관련기사

여담으로 광해군의 이 궁궐 많이 짓는 일은 후금까지 소문이 나 유명했다. 누르하치는 조선 통사 박경룡(朴景龍)에게 "듣건대 너희 나라에 궁궐을 많이 짓는다고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묻기도 했다.

이 당시 실록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광해 44권, 3년(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8월 8일(을해) 1번째기사

호조 판서 황신이 재정의 고갈을 아뢰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대비할 것을 청하다
호조 판서 황신(黃愼)이 아뢰기를,
“신이 얼마 전의 계사에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어 보니 ‘구임(久任)시켜 성취를 책임지운다.’는 뜻으로 유시하셨기에, 신은 진실로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죽을 곳을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나름대로 생각건대, 임명을 받은 이래 벌써 3년이 되었는데도 재주와 국량이 부족하고 일을 처리함이 생소한 까닭에 제대로 조획(措劃)하여 구원(久遠)한 규모를 마련해내지 못하고, 전후로 힘을 들인 바라고는 소소하게 보철(補綴)하여 목전의 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정도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는 국가의 재정이 점차 탕갈되어 관아에 저축해 둔 것이 없고 해관(該官)은 실직(失職)한 채 단지 허명(虛名)만 남았습니다. 이미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지 못한 데다, 또 지출을 헤아려 거둬들이지도 못하므로, 비유하자면 원천이 없는 물이 당장 말라 버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이미 말라 버린 것이야 어련하겠습니까. 진실로 지금 당장 변통을 하여 국가의 큰 규모를 세우지 아니하면, 몇 년 가지 않아서 공사(公私)간에 모두 바닥이 나서 제아무리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또한 능히 그 뒤를 선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삼가 우려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어, 감히 구구한 견해를 하나하나 별지에 적어 아룁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만일 가능하다고 하거든, 근거없는 논의에 흔들리지 마시고 착실하게 시행하소서. 그렇게 해주시면 신이 비록 재직하다가 말라 죽더라도 조금도 한스러워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니하고서 신으로 하여금 그저 남의 뒤만 따라 오락가락하면서 의례적으로 책임만 때우도록 하신다면, 이는 실로 신이 평소 원하던 바가 아니고, 후일에 누적된 폐단이 더욱 고질화되어 대세가 지탱하기 어렵게 될 경우, 하는 일 없이 벼슬에 있으면서 일을 그르친 죄가 반드시 돌아갈 데가 있을 것이니 신은 삼가 안타깝습니다.”
하니 왕이 따랐다.【황신은 대체로 양전제(量田制)의 운용을 변통하고자 한 것인데, 후에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

광해군 3년에 경제를 담당하는 호조판서 황신이 국가 재정이 파탄났음을 알리고, 이에 대한 대비책 마련이 시급함을 광해군에게 강조한다. 황신은 대동법 시행을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광해군의 반대로 실패.

광해 11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3일(기사) 6번째기사

호조에서 재정이 탕진되 선혜청의 방법으로 운영하기를 청하다
호조가 아뢰기를,【호조 참의 장세철(張世哲)의 상소를 지난 병진년 4월 4일에 특별 전교를 인하여 입계하였었는데, 정사년 1월 3일에 비로소 내리면서 점련(粘連)하여 비변사에 계하해서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판하(判下)하였다. 】
“영의정은 의논드리기를 ‘나라의 재정이 이때보다 더 심하게 탕진된 적이 없는데, 선혜청이 이미 성과가 있었으니, 이 상소의 내용 역시 선혜청과 마찬가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만약 혹시라도 자질구레하게 방해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 가서 처리해도 됩니다. 다만 지금은 대신이 혹 외방에 있기도 하고 혹 정고(呈告) 중에 있기도 한데, 이와 같이 크게 경장(更張)하는 일은 수의(收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널리 조정의 의견을 거두어서 결정하소서. 삼가 상께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우의정 정창연은 병으로 인해 수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우선은 대신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려서 널리 의논을 모아 처리하라.” 하였다.

광해 114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4월 18일(임자) 4번째기사

호조가 궁궐의 건축으로 인한 재정의 부족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조정에 이미 궁궐을 짓는 큰 역사가 있으니 백성들이 포목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묵은 곡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조석조차도 급급합니다. 그러니 만약 달리 조치할 만한 형세가 있다면 전결에 따라 포목을 거두는 것을 정지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서는 세입(稅入)이 1년의 쓰임새를 다 대지 못하여서 10월등(十月等)의 반록(頒菉)과 다음해 정월등(正月等)의 반록은 매년 계속해서 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에 부득이 계청해서 경기와 공홍도의 전세(田稅)를 미리 끌어다가 썼습니다.
금년에는 신들이 이에 대해 미리 염려하여, 애써 수합한 여러 가지의 작미(作米)와 작목(作木)을 이미 받아들인 것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통계내어 보니, 금년부터 내년까지 쓸 잡차하(雜上下)와 녹봉으로 반급(頒給)할 것을 제외하고도 상수(常數) 외에서 나온 나머지가 마땅히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가운데서 포목 5백 동과 쌀 1만 석을 선수 도감으로 이송(移送)해서 조금이나마 보태어 써서 백성들의 힘을 늦추어 주고, 그 이외에 부족한 숫자에 대해서는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아마도 마땅할 듯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광해 126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4월 3일(임진) 6번째기사

호조에서 신설한 관원의 녹봉을 지급하는 일로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근일 병조가 부장(部將) 10인을 원록체아(原祿遞兒)로 더 차출하고는 비교해 보아서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移文)하였으며, 또 무신 겸선전관 30인을 체아직으로 더 차출했는데 부사과(副司果) 2인, 부사정(副司正) 5인, 부사맹(副司猛) 8인, 부사용(副司勇) 15인으로 계하(啓下) 받아 녹봉을 지급하라고 이문하였습니다. 또 병조의 관문(關文)을 보건대, 그 안에 ‘별장(別將)과 위장(衛將)은 모두 정원 외에 남아도는 관원을 신설한 것이므로 현재 남아 있는 녹체아로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사과와 부사정으로 각각 10인, 부사맹 20인을 균등하게 부록(付祿)하는 체아직으로 더 차출하고 가위장(假衛將) 이하 다관(多官)은 돌아가며 부록할 것으로 승전을 받들었다.’ 하였습니다.
그런에 요즘 으레 녹봉을 지급하는 규정을 보건대, 통산 1년 사등(四等)의 녹봉이 미두(米豆)로 도합 1천 7백여 석입니다. 현재 국가 재정이 고갈될 대로 고갈되었다는 것을 상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녹봉을 나눠줄 시기가 이미 박두했는데, 정박한 세선(稅船)은 한 척도 없습니다. 예로부터 양호(兩湖)의 세선이 4월이 되었는 데도 강에 도착하지 않은 때가 언제 있기나 했습니까. 소문에 의하면 양호에서 세금으로 미두를 전혀 거두지 못했다고도 하고 유민(流民)이 길에 깔려 봄 초에 납부해야 할 미곡도 지금까지 반이나 넘게 납부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다고도 합니다. 여기에 다시 겨울과 봄의 빗물 때문에 봄 보리도 갈지 못한 채 보리와 밀이 시들어 버리고 말았으니 앞으로 참혹한 광경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경비를 철저히 절감해서 줄이는 것은 있어도 늘리는 것은 없도록 해야만 그런대로 지탱해 갈 수가 있는데, 지금 졸지에 1백 명에 가까운 관원들을 더 두고는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라 하고 있습니다. 정례적으로 나누어주어야 할 녹봉도 넉넉하지 못한데 더구나 이렇게 천만 뜻밖에 더 설치한 인원에 대한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들이 감히 구구하게 비용을 아까워하는 유사(有司)의 행태를 융통성 없이 지키려고 해서가 아니라 정말 바짝 마른 나무에서 물을 찾듯이 어찌해 볼 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금방 실시했다 금방 그만둘 성격의 것이 아니고 형세상 오래도록 시행될 것이 분명한데 혹 그만한 액수만큼 더 백성에게 부과하든가 아니면 양전(量田)하는 정사를 급히 행하여 세입(歲入)을 증가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을 지은 뒤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 129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6월 21일(무인) 7번째기사

호조에서 징병 군사들의 군량 조치 문제에 대해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지난번 비국의 계사를 인하여, 징병된 군사들이 머지않아 올라올 테니 군량을 조치해두라고 분호조 당상 및 각도 감사에게 이미 하유하였습니다.
각도의 군사를 점검하여 보낼 때에는 으레 초면(初面) 고을의 점고를 받게 되는데, 가령 공홍도(公洪道)는 직산(稷山)에서, 전라도는 여산(礪山)과 익산(益山)에서 점고를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전라도의 군대는 은진(恩津)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공홍도의 군대는 수원(水原)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경상도의 군대는 영동(嶺東)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해(平海)에서 급료를 주거나 공홍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황연도(黃延道)의 군대는 양덕(陽德)을 통해 들어올 경우 평안도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고, 강원도의 군대는 고산(高山)에 도착했을 때 급료를 주는 것으로, 을사년에 크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이미 이렇게 예가 굳어졌으니, 이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평안도 군대의 경우 역시 그때 가서 변경에 도착하면 급료를 주어야 할 듯합니다. 다만 원수가 군대를 모아 조련시키는 곳의 경우는 꼭 일정한 규정에 구애받을 필요없이 분호조로 하여금 원수의 분부를 받아 시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이 많이 들어간 뒤에는 조금이라도 허비되는 폐단이 없도록 방량관(放糧官)이 지급하는 규정을 두지 않을 수 없는데 이것은 분조(分曹)가 알아서 처치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방량관은 윤수겸(尹守謙)으로 하여금 도내의 강명(剛明)한 문관이나 경관(京官)인 문음(文蔭) 중에서 엄선하여 자벽(自辟)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대체로 각도가 똑같이 재정이 고갈되었는데 그야말로 옛 곡식이 다 떨어지고 새 곡식은 아직 익지 않은 날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마련해 낼 대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고을 수령들도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니 그 누가 기꺼이 없는 가운데에서 그래도 마련해내어 국가의 급한 수요를 충당하려 하겠습니까. 지나는 길에서 급료로 줄 양식마저도 부족하다고 하소연할 걱정이 없지 않은데, 본조에서 미리 분조를 내어 제때에 내려보내기로 한 것은 대체로 이 때문입니다.
평안도의 군량을 계속 조달할 계책을 생각하노라면 더욱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도내의 원곡(元穀) 가운데 미곡(米穀)의 숫자가 본래 적다고는 하나 그래도 추수 때 적곡(糴穀)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만분의 일이나마 지탱해 나가겠지만 지금 묘가 자라기만 할 뿐 아직 익지도 않았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사신들이 바삐 오가고 장사(將士)의 왕래가 끊임없게 되면 계속 접대하기 어렵게 되어 하졸(下卒)이 놀라 흩어질텐데 이렇게 관가(官家)가 먼저 엉망이 된 뒤에는 설령 원곡이 있다 하더라도 수습하기가 지극히 어렵게 될 것입니다. 전일 안응형(安應亨)의 장계 가운데 ‘정확하게 어느 곳에 얼마나 양식이 비축되어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윤수겸은 어떻게 조치했는지의 형세를 점검하여 현재 어느 정도나 되는지 치계해야 마땅한 데도 지금까지 보고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조의 생각에, 군대가 요양(遼陽)으로 들어갈 경우 신속히 수송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중국 조정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면 혹 은(銀)으로 미곡 값을 환산해 무역해야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미곡 값이 얼마인지 그리고 중국 조정에서 양식을 지급해 줄지의 여부를 재자관 일행으로 하여금 세밀히 알아오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경략의 자문 내용을 듣건대 ‘한 달 가량의 양식을 아울러 마련하고 진병할 날짜를 기다리라.’ 하였고, 또 ‘불과 2, 3백 리 정도 떨어진 지역에서 몇 길로 나누어 일제히 공격할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따라서 도로를 이미 예측하기 어려울 뿐더러 우리로 하여금 양식을 싸들고 오도록 하는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할 것이니, 군대가 갈 때 군량도 따라가는 문제를 아울러 미리 헤아려 생각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변경에 머물러 주둔할 때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고, 진병한 뒤에 소요되는 양식은 얼마이며, 도내 원곡 숫자 안에서 가식미(可食米)1096) 를 덜어내고 지급할 예정인 것은 얼마이고, 장사에게 주어야 할 급료는 얼마이며, 군병에게 지급할 양은 얼마이고, 말먹이 콩으로 들어갈 양은 얼마인지 모두 계산하여 미리 아룀으로써 처치할 근거를 마련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번 병화(兵禍)를 입게 되면 1, 2년 사이에 끝날 수는 없을 듯한데 그럴 경우 군량을 계속 조달할 걱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쪽 백성들이 만약 하루 아침에 모조리 결딴이 나버린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따라서 오늘날의 계책 가운데에서도 서쪽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폐해를 덜 받도록 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급무라 할 것이니, 대관(大官) 이하로부터 모두에 대한 접대 비용을 가능한 한 줄여 간소하게 하고 그릇 수를 정할 것이며, 군관 이하에 대해서는 전에 군사를 일으켰던 때의 예에 의거하여 산료(散料)1097) 를 지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이 한 조목에 대해서는 비국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고, 상기 각 조항의 일들을 모두 분조 당상 및 각도 관찰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3.6 등거리 외교

  • 이 파트에서는 광해군 시기 외교정책을 다룬다.

3.6.1 긍정적 평가

일본의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들어선 에도 막부조선과 선린 관계를 구축하길 원했다. 광해군은 즉위 이전부터 이미 그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쓰시마의 영주 소 요시토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결국 즉위 직후 남방을 안정시키고자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 기유약조(1609, 광해군 1년)를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과의 관계 및 교역은 급속도로 호전되었고, 조선왕조는 일본 에도 막부와 250여년에 걸친 평화를 영유하게 되었다. 조약 과정에서 조선은 국서(國書) 요구, 범능적(범죄인)의 압송, 포로와 피로인(被虜人)의 송환을 확약받는 등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 아울러 일본측에게 왜란 이전보다 더 큰 제약을 가하게 되었다.

국방정책에 있어서는 조총수 및 포병을 양성하고 후금에 밀정을 투입하여 정보를 수집했으며 진법 훈련이나 성곽 수축에도 진력했다. 이 정책은 선조 말엽부터 이어지던 국방 대책의 연속이자 확장이라 할 수도 있다. 선조는 왜란으로 의주에 피난갔을 무렵부터 여진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간첩을 파견해서 '건주기도정기'라는 건주여진(뒷날 후금)의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광해군 역시 선조의 북방 대책을 계승하여 북방 방비를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선왕의 정책을 계승, 성공적으로 확장시켜 나간 것도 분명 그의 업적이라 할 만하다.

광해군은 신무기의 도입도 적극 추진했다. 누르하치의 철기군의 위력에 주목한 그는 화포조총의 전력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기존의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전격 개편해 파진포라는 개량형 화포를 생산시켰다. 또한 전보다 더욱 무과 등용을 늘려 쓸만한 장교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광해군은 직접 전투훈련과 방어진지를 참관하며 현장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했다.

또한 정충신을 만포첨사에 임명하기도 하며 직접 후금에 다녀오게 하여 후금의 상세한 정보들을 알아오게 하고, 또한 방비하게 하였으며 인조실록 2년 9월 1일의 내용에 따르면 5, 6 년간 남쪽의 병사들을 징발해서 배치하는 바람에 민심이 나빠지고 나라가 피폐해졌다고까지 언급한다. 인조 정권에서 광해군을 비판하는 식으로 언급한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과 인조 2년 3월 14일의 남이흥이 한 “금년에는 남방의 군사를 징발하지 않았으므로 변장(邊將)이 군사가 적은 것을 걱정할 것입니다.”과 합쳐지고 광해군이 수도 없이 군사력을 강화시키라고 화약 무기를 준비하라고 명을 하기도 하며 이런 행동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 10년대로 인조실록 2년에 (광해군 대에) 5,6년간 병사들의 징발을 계속했다고 언급되는 것과 기간이 일치한다.

또한 명에 구원병을 보낸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자, 이후 그로 하여금 계속 연락을 취하게 하여 후금의 정탐에 활용했다. 이것을 근거로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강홍립 밀지설'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김응하 등 주요 장수들과 파병군의 절반이 사르허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을 보아[38] 서인의 밀지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다만 이후 강홍립과 연락을 주고 받은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르허 전투까지는 후금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진짜로 명을 도우려다 크게 당하고 뒤늦게 밀지를 전했다는 설이 있고, 10만에 달하는 명군과의 합동 작전이었기 때문에 적당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움직이기 불가능했다는 견해도 있다. 근데 서인에게는 밀지 자체가 아주 적당한 명분감이었다.

어떤 경위로든 강홍립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광해군이 후금의 실체를 파악하고 무익한 충돌을 막으려 한 정황은 분명해 보인다. 사르후 패배 이후로도 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은 후금에 응전해 복수하길 원했으며 이를 위해 조선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광해군은 그 때마다 이를 번번이 회피한 것이다. 가령 후금에 대한 반격을 논의코자 명의 사신이 칙서를 들고 찾아올 때마다 광해군은 조선이 엮이지 않게끔 잘 구슬려 보냈으며, 심지어 명의 황제가 군사 조련에 쓰라며 막대한 을 하사할 때조차도 이를 몽땅 창고에 박아두고 기어이 쓰지 않았다. 그 자금에 손을 대는 순간 명에 재차 군사가 동원당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적어도 후대 인조 시기 모문룡 사건이 비화되기 전까지 주변국간 충돌의 빌미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에 관련된 광해군일기 중 이런 부분도 있다.

광해군일기(증초본) 13년 6월 1일

“적의 형세는 날로 치열해지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병력과 인심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고상한 말과 큰 소리만으로 하늘을 덮을 듯한 흉악한 적의 칼날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적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마구 짓밟는 날에 이들을 말[談鋒]로 막아낼 수 있겠는가. 붓[筆翰]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널리 조정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무슨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대개 중국 사람들이 비록 귀순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란 천리에 퍼지고 듣고 보는 이가 매우 많은데 하필이면 이 길을 통해서 나오겠는가. 하물며 중국의 사신은 이웃 나라에 편지나 가지고 오가는 사람이 아니다. 이후로 글의 격식을 고치고 만포(滿浦)를 경유하여 나오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유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도록 하고 뒤에 절대로 중국 사람들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파견되어 나온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자세하게 답장을 보내되, 다만 강홍립 등의 서장(書狀)만을 받아서 올려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오중고(吳仲庫) 등에게는 말하기를 ‘이 적의 세력이 크다. 옛날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임금들 중에는 역시 자신을 낮추어 후한 예를 차리는 경우가 있었으니, 이 적이 어찌 이러한 의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나라는 이미 요양을 상실하여 중국에 조공하는 길이 끊어졌으며 군대는 보잘것없이 약하니 임시로 둘러대는 말로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른바 ‘조서의 글’이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면 몰래 베끼도록 하고 받지 않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종묘 사직의 존망에 관계되는 것이니 경들은 다시 더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하여 좋은 방법으로 잘 처리할 것을 〈비변사에 말하도록 하라.〉”

아무튼 광해군의 외교는 양측 모두와 각을 세우는 것보다는 양쪽 모두의 부탁을 적당히 들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를 중립 외교로 칭하며 교과서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다만 당시 동아시아의 질서상 이 중립이라는 말이 영세중립국인 스위스처럼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보긴 어려우며 양쪽과 적절한 선에서 맺고 끊는 양면 외교라는 표현이 보다 더 적절할 것이다.

또한 명에게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염탐이라고 말하면서 후금과 사신교환을 하던 것도 있고 정충신이 이로인해 후금의 막대한 정보들을 가져와 보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충신은 훗날 이것을 인조 2년에 인조에게 직접 설명했고 수비전으로 나갈 필요성과 그 준비를 말했지만 "오랑캐 추장(누르하치)은 하찮은 자에 불과한데 수비할 생각만 하고 싸울 생각은 안하냐? 한심한 놈."이라는 말만 들어야했다.[39]

충돌보다 외교를 통한 안정을 중시하는 그의 국제 감각은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난다.

“이 적들이 요동성에 들어가 버티고 있으므로 중국의 장관들이 차례로 적에게 항복하고 있다. 심지어 요동 지방의 인재들 2백여 명이 원 경략(袁經略)을 결박하여 넘겨 주었다고 한다. 비록 30만 명이나 되는 군사가 나온다 하더라도 이는 모두 일찍이 오랑캐를 경험하지 못한 군사들이다. 영솔하는 대장들이 과연 이목(李牧)이나 이정(李靖)과 같은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들의 갑옷과 무기가 파손되어 형편이 없다고 한다. 멀리에서 온 군사들이 어떻게 정예롭고 건장하겠는가.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高麗)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리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차관을 만포(滿浦)로 옮겨가게 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과연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받아들이겠는가. 대체로 이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니 다시 더 의논해서 잘 처리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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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외교론과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그가 하려던 외교가 현실주의 외교라 해서 고려 중기 그 유명한 서희의 외교와 비교해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남송금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여 살아남은 고려를 통해 명, 후금에게 등거리 외교를 하려고 한 것이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개인만의 정책이 아닌 아버지 선조의 정책을 계승해나간 것이다라는 주장도 새겨들을 만 하다. 광해군 긍정론을 집대성한 한명기 교수는 저서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등을 통해 이런 입장을 펼쳤다. 인조 대에도 이런 외교정책은 어느 수준 이상 이어졌다.

명에 대한 사대주의와 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유생들은 이 상황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 등이 있던 대북이 열렬하게 광해군의 현상유지론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는 인목대비 문제로 윤리적 논란에 휘말린 것에 대해 관심을 돌려보겠다는 포석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유희분 등의 소북이나 훗날 반정을 일으킨 일부 서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소북 중 영의정 박승종 정도만이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 역시 이이첨이 싫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일설에는 1622년 신하들 대부분이 그리 반대하는데도 후금의 지도자를 ''으로 호칭하는[40] 국서를 보냈는데, 저 국서를 보낸지 1년 2개월만에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저 국서가 인조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하는 주장도 있다.

사실 서인은 집권 후 숭명배금을 주장했으나, 비변사 내부에선 광해군의 기조가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다. 대신 집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대외적으론 친명배금을 표방했으며 이에 따라 후금과의 외교를 아예 단절한 것은 치명적이었다.[41] 더불어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이괄 휘하의 북방의 강병이 온전했을 거라는 점, 광해군이 말년에 "후금이 성을 치지 않고 한성으로 바로 내려올 경우를 방비해야 한다"라고 말한 점[42]을 감안하면 피해나 삼전도의 굴욕 등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청의 공격이 불안했던 인조 정권도 총융청수어청을 두고 북방에 진을 설치하는 등 신경을 쓴다고 썼고 조선군의 전투력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지만[43][44], 하필 병자호란을 앞두고 인조 진영에서 믿을만한 군사 전문가들이 다 세상을 떠나버리거나 인조의 눈에 찍힘으로서 병자호란시 지휘관 인선에 김자점이나 김경징을 기용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후금과 아예 외교단절을 하여 정보를 얻는 것이 느렸던 인조와 달리 정충신 등을 꾸준히 파견하면서 후금의 내부의 사정을 알아오고 강홍립에게 편지도 받는등 긴밀한 연결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정충신 등에게 후금 내부를 흔들려는 공작을 펼치라 명하기도 하는등 단순히 후금에게 밉보이지 말자라는 외교가 아닌 다양한 방식을 했던 것은 인조와 차별적이었다. 또한 광해군은 군사훈련의 부분에서는 인조와는 달리 관심이 많았고[45] 그로 인해 북방의 경계선에는 상당한 방어병력이 모이기도 했으며 결정적으로 인조와는 달리 모문룡에게 무력하게 끌려다닐 상황은 되지 않았다.

또한 광해군은 홍타이지가 반조선파라는 사실을 진작에 파악하고 따이샨을 지원해서 홍타이지의 대항마로 세우고 둘을 이간시켜 서로 싸움에 빠져 내분을 일으키게 하려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홍타이지에게 뇌물을 보내서 친조선파로 포섭을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며 홍타이지를 미리 경계하며 주목하고 있었다.[46] 실제로 홍타이지가 후계자가 되었을 때 광해군 본인도 전쟁의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며 도성 내 군사들까지 상당수를 북방으로 보낼 정도로 방비에 철저했었다.[47]

또한 광해군이 해놓은 방비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괄의 난 1달 직후 정충신이 한 평가에 따르면 광해군이 준비해놓은 후금에 대한 방비의 절반만 되어도 후금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충신이 이렇게 평가할 정도로 후금에 대한 방비는 견고했었던 것.[48]

3.6.2 비판적 평가

광해군의 외교능력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청 태종 홍타이지는 청 태조 누르하지와는 달리 조선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당시 청이 조선침략을 통해 물자를 확보해야만 하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중립외교도 오래가지 못하고 청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친명배금정책이 아니더라도 조선과 청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았다. 약소국의 대외정책이 강대국의 대외정책을 결정짓는 독립변수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나 오만이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전쟁을 방지한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으며, 독립변수는 후금이 봉착한 체제 위기, 그리고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대외정책 성향 차이였다.

피터 C. 퍼듀(Peter C. Perdue) 교수의 『중국의 서진, 청의 중앙 유라시아 정복사(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ural Eurasia)』는 당시 후금의 조선 공격에서 경제적인 이유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준다. 1621년 이후 후금의 만주족과 한족 사이에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불평등한 대우을 받은 한인들이 식량 공급에서도 심각한 위협을 느끼자 폭동의 가능성을 보였다. 1621년에서 162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먹을 곡식이 없었던 한인들은 식량을 은닉했고, 만주족은 그것을 빼앗으면서 갈등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경제적 압박 아래서 만주족의 착취가 이어지자 1623년, 1625년 연이어 한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1627년에 이르면 후금의 경제는 재앙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한계에 달한 인구를 부양할 방법이 없었다. 군사를 보급할 수도 없었고, 1627년의 곡물값은 4년 전에 비해 무려 여덞 배 폭등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생겼으며 곡식 창고는 비어버리고,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할 수 없었다. 랴오시에서 농업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이 당시 만주족 정권은 정권 붕괴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약탈은 후금 입장에선 아주 매력적인 옵션이었으며, 사실상 필연적이다는 주장이다.

한편 이에대한 반박으로 1620년대 한족과 만주족의 충돌의 원인은 1616년 후금의 건국이래 누르하치는 처음에 통합까지는 아니지만 만주족 지배하에서 한족과 공존하려는 시도가 실패한것의 유래이기도 하다. 그후 후금이 전시경제 체제로 돌입하면서 피지배층인 한족과 생산을 담당하는 만주족 평민(보오이)들에대한 수탈이 증가하는데, 1620년대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이 겹쳐서 돌림병까지 돌자 만주인들은 "한족이 우물에 독을 탔다!. 한인들이 식량을 숨긴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고 한족들은 먹을것이 모자르면 한인들 먼저 굶겨죽인다는 소문이 퍼져서 여러번의 폭동이 일어났고, 이같은 시도는 계속 진압당했다. 결국 만주인과 한족의 한 거주지에서의 공존시도는 실패하고 1644년 이후 명 멸망후 입관해서도 이런 거주지 구분은 엄격히 시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누르하치 생존시 1626년까지는 후금은 조선 침입에 부정적이었기에 이런 주장은 시기적인 차이가 있다. 1636~7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시기에는 이미 만주를 통일하고 몽골을 정복하고 어느정도 경제적 위기를 넘긴 상황이었다.

또 광해군은 명나라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천조국이라 스스로 망하지 않으면 답이 없는 규모였고, 반대로 청나라는 문앞에서 서성거리는 강도떼에 불과했다. 몇몇 사학자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명나라의 선양질에 꽁해있던 선조의 임진왜란 직후 외교 정책을 이어받은 걸로 보고 있다. 물론 중립외교 자체는 한 거맞다. 그러나 선조부터 광해군까지 외교 정책은 실상 달라진게 없다는 의견도 있다.[49]

오히려 광해군 정권의 구성원들은 세 임금의 정권 중 가장 친명파였고, 이건 광해군이 스스로 자초한 부분이었다.[50] 광해군은 조선왕조에서 단기간내 옥사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신하를 숙청했고 이는, 이 과정에서 선조가 만들어놨던 인재풀과 붕괴를 가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강경 북인 친명파들만 조정에 득세하게 된 것. 이때 항복한 강홍립을 통해서 후금과 내통하려고 해보려고 했으나, 홍타이지는 그냥 협박용으로만 사용해서 이득은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51] 하지만 정충신을 통한 파견 등으로 얻어낸 제일 큰 성과는 후금의 군사배치와 내부사정을 소상하게 알아내 후금에 관한 막대한 정보를 알아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파병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선조는 임진왜란 직후 여진족 야인들이나 잔존 왜구집결지를 불태우면서 책임을 안 잡히도록 일본과 명나라와 후금을 넘나드는 외교를 했다. 이 상황에서 광해군은 중립외교가 의미없게 대규모 군사파병을 했다. 한마디로, 중립외교는 실효정책이 없었고, 홍타이지는 광해군의 파병을 두고두고 외교명분으로 써먹으며 압박을 가했다. 실제로는 홍타이지의 외교정책에 조선을 언젠가 처야한다는 인식만 남겼을 뿐이라는 것.[52][53][54]

거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대규모 공사를 하는 엄청난 모순을 일으켰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그리고 중앙군 병력도 매우 부족했다. 자신을 호위할 군사를 극도로 줄인 탓에 인조반정이 성공할 수 있던 듯으로 보이고, 인조 대와 광해군 대의 도성 내 군사의 숫자가 4배 이상의 차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또 훈련대장이던 이흥립이 박승종과 연줄에도 불구하고 박승종과 광해군을 배신하고 인조에게 합류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또 이흥립의 경우는 1년 후 이괄의 난 때 이괄에게 투항했다가 이괄의 난이 진압되자 자결한 인물이다. 배신의 달인...

더구나, 이순신한테 시호를 내릴만한 입장이 충분했음에도 이러한 점은 시행하지도 않았다. 결국 시호는 인조가 내렸으나, 그 직후에 일어난 소헌세자의 죽음이 인조가 한 것이란 음모론이 사라지지 않았고, 그 처시조가 되는 이의 무덤이 사실상 소실되어, 최소한 1960년대에서야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시작된 원흉으로 인조가 지목되기에 이러한 비판이 주목되지 않았다. 따라서, 세자시절 업적을 비교하여, 비운이란 말은 한마디로 위선이다.

게다가 위에 등거리 외교 긍정편에 광해군이 명의 황제가 군사 조련에 쓰라며 막대한 은을 하사할 때조차도 이를 몽땅 창고에 박아두고 기어이 쓰지 않았다라고 서술했다고 써있는데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은 만력제가 유가족들에게 주라고 준 은 1만냥을 착복해 용보,겸금,주옥,사라,능단이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을사라고 한 기록이 존재한다 문제는 저기 있는 물품들은 염초나, 포, 쌀등 같이 군사적,생활적으로 중요한것들이 아닌 보석과 비단 등으로 모두 왕실에서 사용하는 것들이다

지금 중국 황제가 내려준 은 1만 냥을 내림에 호조 참판과 색낭청이 받아가지고 갔다. 허술하게 하지 말고 십분 단단히 보관하라.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을 우선 값을 주고 일일이 서계하라. 그 가운데 용보(龍補)·겸금(兼金)·주옥(珠玉)·사라(紗羅)·능단(綾緞)은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이니, 먼저 내어 팔지 말도록 하는 일을 십분 상세히 살펴 하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76권, 광해 14년 4월 27일 임진 7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oa_11404027_007

3.7 폐위

광해군은 재위 초부터 서자라는 불안정한 위치와 수시로 후계자 선정을 번복하는 부왕 선조의 견제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자연히 자신을 지지해주는 남명학파(조식의 문하) 인사들과 친교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이 훗날 북인(대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다만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실세는 대북이 아니라 소북이였고 여기에 대북과 서인 남인이 공존하는 체제였으나 광해군의 잦은 옥사로인해 광해군이 정인홍과 이이첨 같은 대북 인물들에게 힘을 몰아주게 되자 이 때문에 이이첨 일파의 독주를 불러오게 되었고 자연히 권력 핵심에서 멀어진 서인과 남인 소북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광해군의 끝없는 옥사는 광해군의 불안감이 너무 컸다는 걸로 설명이된다.물론 옥사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긴 했다. 류영경과 임해군은 모든 당파가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신하들은 광해군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충성경쟁을 했다. 하지만 강해진 왕권으로 광해군은 대북만을 키워주면서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부왕 선조만 해도 정여립의 난으로 동인이 많이 당하긴 했지만 곧바로 정철을 숙청하면서 동인을 다시 키워주었지만. 광해군은 이걸 하지 못함으로써. 피해자들의 분노는 대북은 물론 그 자신에게로 향하고 말았다 실제로 인조반정의 주역들은 그 동안의 옥사에 연루돼서 겨우 벗어나거나 유배된 상태였고. 계속되는 옥사에 그들 자신의 목숨부터 걱정해야 했고, 이는 당하느니 먼저 치자는 것으로 바뀌었고 이는 반정의 가장 근본적인 단초가 된다.#

물론 부왕인 선조 때에도 중기 이후 서인, 동인이 번갈아가면서 권력을 독식하긴 했으나 기축옥사와 같은 대규모 옥사 및 견제를 통해 대대적인 물갈이가 종종 이뤄져 정권재창출을 꾀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광해군 집권 15년간은 꾸준히 대북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물론 대북 영수급의 거물인 정인홍조차 성균관 유생들의 반발을 제압하지 못할 만큼 당시 붕당도 나름대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기는 했다. 그런데 광해군 중기부터 이이첨이 실세로 부상하여 권력을 휘두르면서 변두리로 밀려난 서인이 잦은 옥사와 친국으로 생존 위기의식까지 느낄 정도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은 광해군조차도 더 좌시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광해군 집권 후반기에는 대북을 견제하며 국정을 주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서인 일부 세력은 권력 회복을 위해 반정을 획책했으며 끝내 이를 막을 수는 없게되어 소북이 방관하고, 남인이 방조하였으며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을 당하게 된다.

이이첨에 대한 광해군의 불안은 다음 대목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반정 당시 변장하여 안국신에 집에 머무를 때 안국신의 처에게 건넸던 말.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

광해군 15년, 이귀, 김류, 최명길을 위시한 서인들의 반정 계획은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고, 심지어 발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귀는 대질심문까지 주장하며 교묘하게 반정과 무관한 척 연기를 벌였고 광해군의 의심을 (잠시나마) 거둘 수 있었다. 여기에는 김자점에게 매수된 상궁 개시의 조언도 한 몫 했다. 훈련대장 이흥립이 내통해 있었던 것도 반란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정은 발각되었기에 더욱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결행되었다.[55] 어쨌든 급작스런 변고에 궁을 탈출한 광해군은 의관인 안국신의 집에 상주로 변장한 차림으로 피신해 있다가 의원 정남수의 밀고로 발견되어 끌려나왔다(실록의 기록). 혹은 한강 나루터에서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다. 폐위 직후 도성의 남녀들이 왕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담장과 지붕에 올라가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은 욕하기를 돈 애비야 돈 애비야 거두어 들인 금은은 어느곳에 두고 이 길을 가는가라며 조롱했다고 한다. #

광해군은 파란만장한 즉위 과정 때문에 점쟁이와 지관, 운명을 신봉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그 수많은 시도 가운데 일부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조반정의 요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반정 세력이 주장한 명분들 이면에 인조가 반정을 주도하게 된 계기가 그러한데, 왕기가 있다는 이유로 정원군의 가택을 몰수하였으며 이는 정원군의 아들이자 능양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로 유배당해 죽은 사건까지 겹쳐져 인조로 하여금 정권 찬탈의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 (참고로 민담에 따르면 광해군이 가족계획을 위해 만든 부적들도 있는데, 낙태에 효험이 있다는 명성이 드높아 심지어 구한말까지도 고가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아무튼 붙잡힌 광해군은 곧장 서인으로 강등당해 부인,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이이첨 등 당대 권신들은 모조리 참수당함으로써 반정은 성공리에 끝났다. 이 때 왕족으로서 반정을 주도한 능양군이 비어있는 왕좌를 접수하니 그가 바로 삼전도의 치욕으로 유명한 인조다.

4 폐위 이후

광해군은 처음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나 호란 즈음에 청에서 광해군 폐위를 명분으로 내정을 흔들어보려는 공작 시도가 있자[56], 유배지를 제주도로 옮겼다. 광해군은 결국 제주도 생활 4년 4개월만에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허나 수명으로 보면 조선 역대 국왕 중 네 번째로 장수한 임금이다.[57]

이처럼 장수했던 이유로 일부 신하들이 그를 사사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으나, 이원익 등 광해군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중신들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고, 인조 본인도 선왕을 죽이는 것은 선례[58]가 없다는 판단 하에 거부함으로써 무산된다. 이후 그의 심복들이 여러번 역모에 걸려들어 처형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광해군이 복위와 연루된 것이었다. 심지어 북인인 유효립을 비롯한 일부 심복은 광해군의 친필 편지를 보유하기도 했고, 실패로 돌아가자 광해군은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 풀고 울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인조도 할아버지 선조와 삼촌 광해군처럼 왕위에 대해 극심한 노이로제를 보이게 되었으며, 결국 인조 자신도 애먼 삼촌 인성군을 역모 혐의로 엮어 죽이는 짓을 저지르게 된다. (인성군은 사후에 무고함이 인정되어 다시 복권되었다.)[59]

이럼에도 광해군 자신이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이미 그의 세력에 대해 거의 씨를 말렸을 뿐더러, 유교의 예법으로도 '폭군을 내치는 법은 있어도 주륙하는 예는 없다' 는 것이었고 인륜을 기치로 든 인조 정권이 광해군을 죽일 경우 명분이 꺾일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연이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무능 인증까지 한 상황에서 동정을 받는 광해군을 죽인다는 것은 한마디로 지지기반까지 무너뜨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목을 배고 살을 씹겠다."란 말을 했을 때도 이들은 계속 반대했다. 인목대비(혹은 그녀의 나인)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를 보면 인목대비가 얼마나 편집증적으로 광해군을 저주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60]

사실 명에게 큰 지지조차 받지 못한 반정이었다는 점도 그의 사사를 꺼리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조정에서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국왕은 충순한데 왜 폐위 시켰냐?" 라는 반응을 보냈다.[61] 반정 이후 책봉을 받으러간 사신들은 배를 타고[62] 도착한 산동에서 등주자사에게 "임금을 시해한 짐승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시원하게 바가지로 퍼먹고 북경으로 가는것도 방해받았다. 또한 당시 명 황제는 "왜군 3000명을 동원해 조선왕을 쫓아내고 능양군이 찬탈했다."는 소문을 듣고 있어서 조선사신단은 이를 해명하는데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 결과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22개월동안 책봉을 받지 못했다.[63] 결국 인조정권은 예전 임해군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명 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대량으로 썼으며 이 과정에서 가도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64]. 인조가 명에 쓴 뇌물의 양은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쓴 의 총량을 능가했다.[65] 그리고 모문룡은 책봉을 도운 것을 인조 정권의 아킬레스 건 삼아서 갖은 행패를 부려댔다.

인조 15년(1637). 인조는 왕위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감지하고 왕권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광해군을 죽이지는 않고 다시 제주도로 보내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데서 끝냈다. 이후 제주도로 이송된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가시울타리 안에 위리 안치되었고, 감시하는 군인과 계집들에게 영감이라 불리는 수모를 받았지만,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공사견문록'에 의하면 유난히 광해군을 모질게 대하는 궁녀가 있어서 참다못한 광해군이 질책을 한마디 하였다. 그러자 그 궁녀는 광해군에게 영감이 제대로 왕노릇을 했어도 이런일은 없었을 것 아니오 하면서 되려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는데, 광해군은 모든 것을 달관한 듯, 아니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는지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감시하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광해군을 하방에 두는 등의 모욕적 처사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 시점에서 이미 인생무상을 느끼고 달관했던 것일지도. 그러한 성품은 그가 유배지에서도 천수를 누리는데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해당 유배처는 현재 제주시 중앙로의 국민은행 중앙점 자리로 비정되며 현재 그곳에 광해군 적소 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제주도로 가기 직전 광해군이 남긴 시가 전해지고 있다. 인조실록 42권의 인조 19년 7월 10일 1번째 광해군 사망 기사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해가 (강화도) 교동에서 제주로 옮겨 갈 때에 시를 짓기를

風吹飛雨 過城頭 / 풍취비우 과성두
바람 불고 비 날림에 성머리를 지나네
瘴氣薰陰 百尺樓 / 장기훈음 백척루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滄海怒濤 來薄暮 / 창해노도 래박모
푸른 바다에 파도 사나운데 땅거미가 내리고
碧山愁色 帶淸秋 / 벽동수색 대청추
푸른 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 띠었네

歸心厭見 王孫草 / 귀심염견 왕손초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客夢頻驚 帝子洲 / 객몽빈경 제자주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주에 깨이누나

故國存亡 消息斷 / 고국존망 소식단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烟波江上 臥孤舟 / 인파강상 와고주
안개 낀 강 위의 외딴 배에 누웠노라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비감에 젖었다.

다만 위의 시는 그가 제주도로 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지은 것은 아니다. 보안을 위해 교동도에서 이송하기 전부터 이송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이동 과정에서는 배에 장막을 둘러쳐서 향하는 장소를 알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도착한 후에야 이원로의 말을 통해 새 유배지가 제주도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광해군은 매우 당혹해하며 "어째서 이런 곳에! 도대체 어째서!"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참고로 당시 제주도는 말 그대로 오지였다.

이후 제주목사였던 이시방(반정공신 이귀의 아들)이 광해군의 신변을 맡았으며, 결국 광해군이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애석해하면서 만류를 뿌리치고 손수 염습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제주도에서는 음력 7월 1일을 광해우(光海雨) 내리는 날이라고 부른다. 광해군의 숨이 끊어지던 날 맑은 하늘에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와 비를 흩뿌린 것에서 유래한다고 하며[66], 이후 음력 7월 1일마다 돌연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생겼다.

연산군과 대조적으로 유배지에서 보낸 여생이 재위기간보다 더 길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인지 천수를 누린 것으로 보며 연산군처럼 독살당했다는 음모론은 잘 나오지 않는다. 다만 노년 들어 제주도로 이송된 뒤엔 척박한 환경 탓에 급속도로 몸이 쇠해져 얼마 살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의 나이가 제주도로 이송될 당시에 이미 60이 넘었고 왕의 자리라는 게 원래 건강을 해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미 이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광해군은 죽기 직전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근처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다만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무덤 바로 곁이 아니라 그 아래 위치에 자신의 비였던 문성군부인과 합장되었는데 문제는 광해군의 묘 위치가 풍수지리적으로 워낙 좋지 못해서 유언이 날조된 것 혹은 유언을 악용한 것이 아닌가 보는 시각도 있다.

선대왕이자 같은 폭군으로 폐위되어 축출된 연산군과 함께 종묘 신위에도 제외되어 종묘에까지도 모셔지지 못한 임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인조와 그 후손들이 왕위에 올랐기에 복권이 불가능해서다. 이전까지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도 마찬가지였던 입장이었으나 숙종에 의해 단종으로 추존복위되어 종묘 신위에 뒤늦게 포함됨으로써 빠졌다.

현재도 종묘 신위에 다시 모시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미 조선 왕조가 멸망한지 100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광해군을 복권시켜 주고 싶어도 시킬 수가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20세기 이후 역사책에 그의 치적이 제대로 기록됨으로써 최소한 역사적으로는 복권될 수 있었다.중화인민공화국이 묘호가 없었던 푸이1967년, 2004년 두번에 걸쳐 묘호를 추증하였던 사례가 있었지만, 이것 역시 공식 묘호가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5 평가

외치는 뛰어났지만, 내치는 궁궐병에 사로잡힌 광인의 폭정.[67]

대체로 세자시절 20살 약관의 나이로 펼친 초특급 업적이 후광이 되어, 자질 자체는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현대에 들어와 반정을 일으켜 왕에 오른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 때문에 이미지가 너무 안좋아서 후광 효과도 상당히 받았다.그때문에 내치는 별로지만 외치는 뛰어났다는 평이 많다.

조선 내내 연산군과 양대 폭군으로 손꼽혔다. 애초에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이 인조반정으로 씨가 말라 버렸고, 인조반정으로 정통성을 확보한 서인 세력이 조선 말까지 정권을 잡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광해군 자체에 대해 근대 이후 학자로서 처음 긍정적인 평가를 시도한 것은 1920년대 간행된 《만선역사지리보고》에 실린 일본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의 논문이었다. 이 책에서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아 후금에 투항했다고 하는 강홍립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립 외교를 수행하려 했던 식견 높은 군주로 평가했는데 책 자체는 만주사와 한국사를 연결시키려는 일제의 만선경영을 목적으로 두고 있고 조선이 문약하고 당파싸움에 시달렸다라는 식의 시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이 주장이 식민사관과 만선사관의 일환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다. 이 이케우치 히로시의 평가가 식민사관과 무관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명기 교수의 책에도 식민사관이 광해군의 평가에 영향을 주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68]

실제로 그와 비슷한 시기인 1920~30년대 국내에서도 광해군 치세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 중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로 잘 알려진 신채호는 광해군 치세 실권당인 대북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 중에서도 사상적 기반이자 핵심적 인물인 정인홍을 을지문덕, 이순신과 같이 조선 3걸로 꼽으며 옥중에서 홍명희에게 전달한 친서에서도 필생의 저서인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이 세상에 빛을 보이지 못함을 아쉬워했을 정도였다고.

그러나 궁궐 공사 등으로 인한 재정과 민생의 피해는 조선에 있어 정말 심각한 것 이었다. 실록인 광해군일기의 사료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비록 광해군일기가 서인 측에 의해서 집필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치더라도 그들도 사관인만큼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쓰지는 않았다. 광해군의 궁궐 공사가 그 당시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쨌든 한국에는 광해군 재평가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꽤 있다. 실제로 그런 면이 반영되어 국사 국정 교과서에서의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서술 대신 외교에 중점을 둔 왕으로 나온다. 또한 임진왜란 후의 전후 복구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대동법을 경기지방에 실시하는 등의 세제 개편을 보여 조선이 근대로 가는 첫 관문을 연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선조가 세자인 광해군을 괴롭혀 광해군에게 심리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는 하나[69] 광해군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왕이 된 상황이라서 세자 시절의 활약으로 대신들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물론 기대를 많이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군주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또 흔히 서인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로 서인이 광해군을 경계해 왕이 되는데 방해했다는건데 광해군에게 반대하는 세력은 대북과 같은 북인인 소북이었으며 그 소북중에서도 광해군의 처남인 류희분이 소속되었던 청소북은 광해군에 우호적이었다. 남은 반 광해군파인 류영경의 탁소북조차도 선조 사망 후에는 죄다 청소북을 자처하면서 자멸하는 등 광해군 즉위 초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쁜 환경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악조건에서 성군이 된 케이스도 많았으며 중립 내지는 광해군에게 동조하였던 서인과 남인[70]을 내몰면서 적으로 만드는 실수를 하였다.

물론 광해군도 이이첨의 권력이 급격히 강해지고 이이첨와 사사건건 대립하였다.[71] 그리고 마침 소북인 박승종이 이이첨의 뒷통수를 후려쳐[72] 이이첨의 제 이이첨이 인목대비를 죽이려 하면 박승종이 가솔들까지 이끌고 나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말년의 광해군은 분명 균형을 시도했다. 광해군이 총애하던 신하가 서인 중 그 유명한 윤두수의 아들인 윤휘였다는 점이 증거다.[73] 하지만 바로 그 균형감각 때문이었을까? 박승종의 고변 역시 크게 신뢰하지 않으면서 (어쩌면 옥사에 질린 탓인지) 느린 대책을 보여서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했다.

게다가, 이이첨의 반대급부로 중용된 임취정같은 인물은 임진왜란 때는 파천 길에 사초를 태우고 도망갔다고 비판받고, 광해군과의 인연도 조카가 후궁이란 탓이었으며, 제2의 이이첨이 되어 권력을 농단하는 등 막장이었다.[74]

어쨌든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도성을 버린 부왕을 대신해 일본군에 맞서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돌보고 분조를 이끌어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들을 조달했다. 이런 세자 시절의 모습은 선조나 인조가 전쟁이 터지자 구국보다는 일신 보전에 급급했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물론 국가원수로서 국가가 사분오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옥쇄보다는 피하는 것이 낫다는 점은 명확하다.)

물론 왕자 시절의 공과 군주 시절의 업적으로 실책까지 덮이는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상당히 잘 해 나갔지만 15년 집권을 하는 동안그 숱한 옥사(김직재의 옥, 칠서의 옥, 신경희의 옥, 계축옥사)를 거치면서 점차 비대해진 김개시와 측근들의 전횡을 충분히 제어하지 못했고, 폐모로 반정의 구실을 만들었으며, 필요 이상의 궁궐 공사로 인한 치명적인 재정난과 민생난을 초래했다는 부정적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광해군일기 편은 전반부는 세자 시절의 활약과 이에 따른 선조의 질투심 및 후계 과정의 어려움, 재위기의 이런저런 치적들, 후반부는 인조반정에 이르는 과정과 광해군 시대의 옥사가 주로 서술되어 있다. 임해군 옥사, 봉산옥사부터 시작해서 계축옥사, 허균의 옥사 등. 아무튼 광해의 총명함을 흐리게 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바로 광해가 벌였던 옥사를 들고 있다. 불안했던 광해의 입지를 강하게 만든 것도 옥사였지만 반대로 옥사로 타 정파와 사대부가 소외되고 이이첨의 힘이 커지게 되자 광해의 입지는 약화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심지어 '인사에 관한 한 광해는 부왕 선조보다 하수'라고까지 쓰고 있다. 최근 광해가 재평가되면서 광해를 '세종에 버금가는 명군'까지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여기서는 '광해가 대책을 세웠고 효과를 본 것도 많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다'며 광해의 한계점도 제시하고 있다. 광해의 중립외교에 대해서야 흔히 잘 알려진 대로 적고 있지만 광해'와' 집권당 대북이 중립외교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광해'만'이 중립외교를 주장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조정 내에서 광해군의 외교를 도운 것은 박승종이나 윤휘 등 극소수였고, 아내인 중전마저도 광해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 광해군은 고립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정작 광해군 외교의 핵심은 중앙정부 쪽에 아니라 정충신 등 광해군이 변방에 파견한 능력 있는 엘리트 무장들이었다. 그리고 광해군 10 년 이후의 이 외교의 시작을 기반으로 하여 사대만을 강조하는 이이첨을 향한 경멸이 시작되었다.

영창대군의 죽음을 접한 광해가 "내가 부덕하여 이 아이로 하여금 섬에서 병으로 죽게 했으니 비통하다.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줘라."고 말은 하지만 비정하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장면은,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유일한 파스텔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장면은 광해군이 신선처럼 구름을 걸으면서 '세자 시절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빛나는 외교에서 보이듯 열린 이성과 현실감각, 유려한 솜씨로 내치도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상황을 만든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 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이라는 글로 마무리하는데, 명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주어진 조건과 내면적 불안으로 인해 그것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광해군에 대한 기대와 안타까움이 동시에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공중파 교양 프로의 인터뷰에서 박시백 화백이 가장 좋아하는 조선 국왕 3위로 광해군을 꼽았던 것#은 그의 긍정적인 면모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결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1. 대중의 의식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 된 복권론을 이어받은 사극이나 창작물의 영향으로 매우 긍정적이다.
2.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광해군은 대동법에 반대하고 확대를 저지했다.
3. 세자 때는 민심 수습과 전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지만 즉위 후엔 궁궐병과 재정 파탄 사태으로 조선 내정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미쳤다. 외교란 결국 국가의 내적 역량을 레버리지로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단순히 외교는 잘했다고 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4. 광해군은 정충신 등에게 첩보를 명하여 후금의 권력 구도나 병력, 군수물자 등을 세세히 파악하게 하면서도 강홍립에게 따로 편지를 받아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인조는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와 대동법 등 성공한 정책들을 수용했으며, 호란은 외교적 실패가 아닌 청 내부 상황의 문제, 특히 경제적 문제 때문에 촉발되었다. 조선은 이때 최대한 청의 비위를 맞춰주려 했다. 하지만 외교적으로도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할 뿐 제대로 대처하지를 못하고 외교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심각하기도 했다.[75]
5. 외치는 단순히 후금과 화친하려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온갖 첩보 활동과 후금을 뒤흔들려는 공작들을 펼치고, 또 홍타이지를 포섭하려 하는등 다양한 활동을 보였다. 단순히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등 후금의 요구를 들어주던 것은 인조였고, 광해군은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다양한 외교를 펼쳤다. 또한 내정의 어려움 속에서도 1만 정병을 육성했다.[76][77]

6.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키워준 세력이 자신의 뜻과 정면으로 대치했다는 점이다. 즉위 초에는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영창대군 즉위에 찬성하는 사람은 소북파 정도이고, 인목왕후는 그냥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무슨 이유인지 영창대군을 죽여버렸고, 인목왕후를 폐비하며 대북파를 극단적으로 키우는 무리수를 범했다. 자기를 지지하는 중신 이원익을 필두로 반대가 넘치는 데도 모두 쫓아내는 자승자박을 한 것. (당장 광해군의 외교의 협력자인 윤휘, 정충신은 서인이고 박승종은 소북인사다.) 결국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부배신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장점이 명확하지만 반대로 한계도 명확한 인물. 뛰어난 감각과 현실판단으로 전란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정작 후금의 침입을 대비하려면 재정을 확충해야 하는데, 군량 부족의 상소가 올라와도, 궁궐 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약한 국력에 병력을 확충해 북방을 방비하려 했지만 정예 병력들은 사르후 전투에서 날려먹었고 동시에 궁궐공사에 과도하게 매진했으며 이로인해 국민들은 피폐해졌으고 정권을 보위하는 중앙군은 더더욱 약해졌다. 그야말로 왕이 되기 전까지만 명군에 가까웠지만 왕이 된 이후에는 암군에 가까운 셈. 뭐, 그래도 임해군이 왕이 되는 것 보다야..

6 특이 사항

왕으로선 꽤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최다 공신 배출, 최다 존호 보유, 친국(親鞫) 참여 등이 있단 거다. 존호 보유는 그의 나름대로 강력했던 왕권을 입증한다고 한다.

그의 탯줄을 묻은 곳이 대구광역시 연경동의 산이라고 한다. 동네에 도는 이야기 중에는 폐위당한 왕이라서 관리가 안 되다 보니 탯줄을 묻은 위치에 있던 석상 등을 집 지으려고 부숴서 가져갔다가 돌 조각을 부숴서 가져간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을 몇번 겪자 조각을 다시 다 모아서 원래 있던 위치에 던져놨다고 한다. 지금도 산에 올라가 보면 비석이나 거북이 조각 등의 잔해가 남아있다.

그를 재평가 하는 사람 중에 그를 추존하는 경우도 꽤나 많은데, '광'해군이란 이유로 '광종(光宗)'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덧붙여 역사기반 가상 사회 사이트인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는 2002년 11월 15일부로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그의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는 혜장왕후(惠章王后)로 추숭복위했다. 묘는 열릉(烈陵)이 되었다.[78]

#(사이버 조선왕조 사이트의 혜종대왕 행장)

담배 냄새를 몹시 싫어하여 궁중은 물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예절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고기를 먹을 때 익힌 고기는 먹지 않고 육회나 살짝 불에 익힌 정도로만 해서 먹었다고 한다.

광해군일기 1년 9월 25일에는 강원도에서 미확인비행물체가 나타난 기록이 있다! 해당 실록 국역링크 해당 내용을 설정에 써먹은 드라마나 작품이 많다. 기찰비록이나 설희. 그리고, 최소한 아시아에서 많이 알려진 별에서 온 그대.

7 가족 관계

폐비 유씨(문성군부인)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고 장성했던 아들인 폐세자 이지는 부인인 폐세자빈 박씨와 함께 유배지인 강화도에서에서 동반 자살시도를 했으나 죽지 않았다. 마침 한양에서 가위를 보내온 걸 보고 유배지 탈출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음력 4월, 26일 동안 숟가락과 가위로 땅굴을 파며 바깥으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박씨는 파낸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옮겼다. 불행히도 폐세자 지는 도주 3일만에 인조의 감시자들에게 붙잡혔는데, 폐세자빈 박씨는 폐세자의 도주 당일 나무 위에 올라가 남편이 안전하게 도망치는지 망을 보다가 그만 군졸들에게 들켜 떨어져 몸을 상했고 이후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절망하여 스스로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끊었다. 이어서 붙잡힌 폐세자 이지도 자결을 명령받아 죽음으로써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79]

광해군과 같이 유배당한 문성군부인 유씨는 아들 내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하고 홧병으로 죽었다. 야사 대동야승에서는 아들 부부가 죽자 스스로 식음을 전폐해서 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참고로 유씨는 광해군 재위기에도 숭명배금을 주장했을 정도로 강단이 강한 여인이었다.[80] 그녀가 아직 정비였던 시절 사찰을 돌아다니며 "내생엔 두번 다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81] 그녀의 형제들도 반정 직후 모두 처형되었으니 실로 비극의 가계라 할 만하다.

광해군은 숙의 윤씨에게서 딸도 한명 낳았는데 박징원에게 시집갔고 인조반정 이후 폐서인되었다. 그 딸은 박징원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낳았고 광해군의 아들 지가 후손이 없었으므로 박징원의 후손들이 광해군의 묘를 돌보았고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손자녀 로는 폐세자와 폐세자빈 사이에서 자식이 없고[82] 후궁 소생의 군주가 한명 있었고 김문거에게 하가 한걸로 기록되었다.

8 광해군을 다룬 영상 매체

★은 주연

허장강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안현철 감독 작품으로 옛날 영화라 여기선 광해군이 단순한 악인으로 나온다. 재위 중 행적이 연산군 비슷하게 묘사되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실각했는데, 인목대비에게 자비를 청하자 인조가 그냥 사사하자고 하니 인목대비가 "그러면 저 자와 내가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 라면서 너그럽게 살려주는 위엄을 보이지만 현실은 시궁창. 실제론 오히려 반대로 인목대비가 열렬히 나서서 죽이려고 했으나 다른 이들이 뜯어말렸다. 이 영화는 흥행도 평가도 좋지 않았다.
  • MBC 여인열전 서궁마마 (1982)
이덕화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황치훈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이희도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김규철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특기할 점으로 악역 캐스팅이 꽤 화려하단 거다. 이영애김개시 역을, 서인석이이첨 역을 맡았다. 심지어 유영경 역으로는 임혁이 나왔다. 사실 악역 외에도 연기력이 후덜덜한 분들이 많이 출연하는데 선조 역으로는 원로배우 김성옥, 이원익 역으로는 신구가 출연하였다. 그 외에 김보성이 이영애(김개시)를 짝사랑하는 호위 무사 겸 친구이자 내시로 등장한다.
김승수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김주승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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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광해군을 다룬 작품 중 그의 인간적인 내면 묘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시청률대장금이라는 매머드급 경쟁작 때문에 안습. 사강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 중이던 홍유진이 모처럼 드라마로 복귀해 비극의 왕비 문성군부인 유씨 역으로 출연했다.
이준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임진왜란 중 세자 자리에 오른다.
이호성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극 초반까지는 버진이네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미치광이 영감처럼 페이크를 취했다. 그러다 박규에게 제주도에 유배중인 말년의 광해군이라는 게 들통나고, 그 후로 그에게 권력의 무상함을 말하며 여러 가지 현명한 조언을 해주며 상담역으로 활약한다.
이병헌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참고로 이병헌은 이 영화에서 광해군과 똑같이 생긴 천민 '하선' 역도 맡았다. 광해군의 인식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진 영화.
인교진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1999년판 허준과 마찬가지로 왕자 시절의 인연을 통해 허준에게 호의를 보였으며, 동의보감 집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상윤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국왕으로서의 냉철함보다는 왕자 시절이 중심이 되어 한 인간으로서의 감성적인 모습을 조명했다. 여기서 그는 주인공 문근영이 배역을 맡은 도공 유정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는다.
서인국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서자 출신으로 세자에 올라 16년간 내부의 적과 외부의 난으로부터 끊임없이 군주의 자질을 시험 받으며 끝내 왕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세자 광해군의 성장 스토리를 보여준다.
불의 여신 정이에서도 아역 광해군을 맡았던 노영학이 다시 같은 역을 맡았다. 다만 이쪽은 임진왜란기가 중심이다.
차승원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초반부 선조와의 갈등 속에서 세자 자리마저 위태로웠던 광해군의 상황과 이복 여동생 정명공주에게 따뜻한 인간적인 모습이 함께 그려졌으며, 군주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국왕으로써의 카리스마 넘치는 위엄을 갖추지만 김개시의 계략 앞에서는 다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실상 적대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강주선과도 손을 잡으려 하는 냉정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군주의 모습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역사의 냉혹한 모습은 가고 감성적인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
원래 역사에서 직접 친국을 단행해 무고한 자들도 죽였던 광해군이 반대파 숙청을 머뭇거리거나 명나라 파병에 조성하에게 협력을 부탁하는 등[83] 여러모로 실제 광해군의 비해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정명공주가 주인공이라 이 이상의 부각은 무리겠지만, 광해군이 얼마나 고단하게 권력을 유지하고, 외롭게 중립외교를 지지했는지 나름 잘 묘사하였다. 폐위된 광해군의 쓸쓸함을 보여주며 마지막까지 나라를 걱정하는 멋진 모습으로 퇴장하였다.
  1. 폐위되었기 때문에 묘호, 시호, 능호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재위기간 중에 썼던 존호가 이것이다. 물론 폐위된 후 이 존호 역시 무효화되었다.
  2. 폐위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린다.
  3. 광해군 즉위 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삭탈되었다.
  4. 연산군묘처럼 폐위당한 임금이기 때문에 능(陵)이 아니라 묘(墓)이다. 당연히 묘역 관리는 다른 임금들의 능에 비해 조악한 편이다. 그의 시신은 왕자의 예로 안장되었기 때문에 그의 묘의 규모는 초라하다. 더불어 난간석, 무인석, 동물상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옆에 같이 안장된 사람은 그의 왕비였던 문성군부인 유씨다. 다른 폐군인 연산군의 묘는 상당히 찾기 쉬운 위치에 있는데 반해서 광해군의 묘는 찾아 들어가기가 복잡하고 규모도 작은 편이다. 광해군과 그의 아내 유씨의 묘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 안내문은 주변의 교회가 운영하는 공원묘지 앞의 식당 간판과 같다. 공원묘지 너머 숲 속에 이 두 묘가 있는데, 제대로 된 길이 없으므로 산등성이를 타고 돌아가야 닿을 수 있다. 만약 찾아가고 싶다면 금곡역(경춘선)에서 64번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남양주시의 공영버스 참조.
  5. 광해군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려다가 파탄낸 조선의 재정은 인조 치세 후반에야 간신히 복원되며, 그 사이에 굵직굵직한 조선의 위기들에는 광해군도 크나큰 악영향을 끼쳤다. 또 선조와는 달리 당파간의 알력을 부추긴 결과, 핍박받던 서인들의 피의 복수를 불러 남인과 북인들이 궤멸되고 서인들의 인재풀도 함께 바닥난다. 광해군이 광적으로 집착한 궁궐 공사와 북방군 양성 또한 무수한 증오를 불러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진다.
  6. 노산군일기는 후에 단종실록으로 개수되었으나 알맹이까지 바꾸진 못했다.
  7. 사실 연산군도 즉위 초반까지는 나름대로 나라를 잘 이끌어갔다.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다.
  8. 하지만 전쟁영웅으로서 광해군의 이미지는 이후 거의 부적격에 가까운 광해군의 실책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원흉이다. 왕으로서의 광해군과 영웅으로서의 광해군은 거의 다른 인물로서 평가해도 무방할 정도로 딴판이다.
  9. 참고로 다른 왕자들의 답변을 보면 의안군은 , 인성군은 , 순화군고기와 같은 지극히 평법한 대답을 했다 한다. 공교롭게도 이 일화 속 왕자들은 대부분 말로가 비극적이었는데, 의안군은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괴질에 걸려 결혼도 못한 채 일찍 요절했고, 인성군은 엄정한 기강 덕에 인망이 높았지만 결국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속에서 반역 혐의로 몰려 유배 뒤 자결을 명령받아 죽었다(사후 명예회복). 순화군은 앞서의 두 동생들과 달리 인간성 자체도 막장인지라 줄기찬 탄핵에 따른 유배와 연금생활 끝에 역시 제 명줄에 못 죽었다.
  10. 그때 당시 기준으로 치자면 성인이긴 했지만 결코 분조를 지휘할 정도 연륜, 경험이 많을 나이도, 상황도 아니었다. 현대랑 기준이 현저히 다르다고는 해도 이때 광해군이 지금 기준 겨우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였다고 생각하면...
  11. 전란 때문에 갑작스레 세자 책봉, 부왕은 어려운 일 맡겨놓고 튐
  12. 흥미로운 것은 새어머니인 인목왕후의 나이가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다는 사실이다.
  13. 실제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떠난 직후인 선조 25년 6월 17일의 실록에서의 기록에 의하면 정철과 류성룡이 선조가 요동으로 건너간 다음 소식이 통하지 않으면 어찌되겠냐며 선조에게 하야를 촉구하려는 내용이 있다.
  14. 사실 이 사건들은 과장, 허위성 고변이 상당수 있다. 대표적인 게 봉산옥사. 아무래도 광해군은 이를 알면서도 왕권 확립을 위해 이용한 듯 싶지만...
  15. 부왕 선조가 기축옥사 당시 정철을 내세워 동인을 제거하면서도 류성룡, 이산해 등 동인의 영수는 지켜주었고, 옥사 후에는 반대로 이용가치가 떨어진 정철을 숙청하면서도 목숨은 살려주는 등 능수능란하게 양쪽 파벌을 쥐락펴락하며 특정 세력에 의한 권력 집중을 막고 본인이 정국을 주도한 것과는 확실히 비교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와 광해군을 비교하며 이런 면에서 선조보다 확실히 하수였다고 평한다.
  16. 물론 정조 사망시 추궁 끝에 맞아 죽은 강명길과 같은 예외 및 극단적인 경우는 있다.
  17. 정확히는 반정 직후 서인 세력들이 인목대비를 찾아가 광해군의 처사를 결정했는데, 그때 인목대비가 광해군이 간접적으로 정인홍의 상소 등으로 쇠약해진 선조를 홧병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인목대비는 당시 극도의 흥분 상태로 말이 아니었다.
  18. 선조 후기에 북인은 여러 갈래로 쪼개져서 대북은 광해군을, 소북 중 탁소북은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실제로 권신 류영경이 영창대군을 선조의 후계로 앉히려 노골적으로 왕위 계승을 교란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에 대북은 영창대군에 대한 경계가 상당했다.
  19. 그러나 임해군은 실제로 말종이었던 인물이었다. 내키는 대로 살인조차 가볍게 여겼던 인물이었던지라 그에 대한 뭇 여론 자체가 정말 좋지 않았다.
  20. 단, 조선시대식 재조사에서는 위의 분들의 심사와 어긋나는 결과가 나오는 일이 별로 없게 마련이다. 죽을 정도로 패서라도 의도한 결과를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21. 중초본 때만 있고,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었다고 한다.
  22. 다른 케이스인 단종의 경우 금부도사 왕방연으로 하여금 사약을 전달하게 했는데 왕방연이 사약을 갖고 오는 것을 안 단종이 그 전에 스스로 목을 맸다는 게 정설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전에도 수차례 사약이 갔는데 수행역을 맡은 이들이 차마 따를 수 없어 줄줄이 자결했다고도 한다. 이후에도 세조는 노골적으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으며, 이 때문에 동강에 그대로 내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엄홍도가 몰래 수습해 장례했고 이후 숙종대 들어서야 능이 정비되었다.
  23. 과거 응시자격 박탈. 사실상 관직에 빨간줄을 긋는 것.
  24. 어떤 사람은 이것이 공신력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왕권정치 시절에서 왕위와 관련된 민감한 문제를 백성들이 언급할 수 있을리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5. 보통 유폐라는 설명만으로는 저 서궁이라는 궁궐이 도성 변두리에 있는 초라한 전각 비슷한 이미지로 느껴지기 쉬운데, 사실 이 서궁 건물은 본디 경운궁이라 하여 저래봬도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궁궐들을 신축하기 전(선조 후기)까지 조선의 정궁에 해당했으며, 지금은 덕수궁이라고 불리는 상당히 대규모의 궁이다. 즉 광해군이 궁궐을 신축하지 않았으면 서궁이 아니라 그대로 계속 정궁으로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26. 이이첨 일당을 제외한 대북까지도 극렬히 반대하고 소북, 서인, 남인 모두가 반대하던 것
  27. 이런 것이 가능해진 것은 더 이상 옥사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면서도 이이첨이 옥사를 일으키거나 인목대비를 살해하지 못하도록 박승종이 가솔들까지 이끌고 필사적으로 막은 덕분.
  28. 물론 이 궁궐은 단순 거주용이 아닌, 상업용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29. 광해군의 이복동생, 인조의 아버지
  30. 후에 영조경희궁이라 했는데, 공교롭게도 정원군이 후에 추숭될 때 "경덕"이란 시호가 있어서 이를 피해 이름을 새로 지은 것이었다. 광해군이 능창군을 죽이지 않고, 경덕궁 등의 궁궐공사를 하지 않았다면 인조반정도 없었을지 모르고, 또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정원군이 팔자에도 없는 추숭왕이 되지도 못했을 테고, 그럼 "경덕"이란 이름을 받을 일도, 후에 영조가 그 이름을 피할 일도 없었을 테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31. 인조는 이 탓인지 광해군과는 정반대로 도성 내의 군사를 기르는데 주력했고, 또 이괄의 난까지 합쳐지자 광해군과는 달리 변경에 군사를 배치하려는 일을 정묘호란 직전까지 심하게 꺼려했으며 군사훈련 역시 막았다.
  32. 실록에는 귀영개로 나오고 사실 차남이지만 장남인 추잉이 죽었기에 차남인 그가 적장자였다. 또한 반조선파인 홍타이지와는 달리 그는 친조선파였고 그렇기에 주목했다.
  33. 의학적으로 PTSD라 표현하는 그것
  34. 한명기, 광해군, 142~146
  35. 1개도에서 50~100필 가량
  36. 한명기, 광해군, 149~154
  37. 한명기, 광해군, 154
  38. 원정군 1만 3천명은 명의 반복되는 요구에 따라 대부분 조총병 편제로 이루어졌는데 사르허 전투당시 앞서가던 명군은 후금 기병대의 포위섬멸 당하고 뒤이어 가던 조선군은 대 기병전을 위해 언덕에서 야전축성을 하려고 했으나 그전에 청군이 양쪽에서 들이닥쳤다. 때마침 불어닥친 모래바람으로 시계마저 최악인 상태에서 맨몸으로 기병돌격을 받은 조선군 좌, 우영의 조총병들은 괴멸되었고 핵심지휘관들도 모두 전사했다. 이미 명군의 홀대와 시원찮은 보급으로 사기가 떨어져있던 강홍립의 중군은 결국 투항했다. 이 당시 강홍립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일부러 투항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39. 물론 그 후 정충신은 10만의 군대를 1, 2년만 훈련시키면 요동도 함락시킬 수 있다로 되받아쳤다.
  40. 이는 사실상 후금의 위상을 국가적으로 인정하겠다는 소리다.
  41.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두 번 이상 사신교환을 하며 후금과의 외교를 유지했다.
  42. 이 예상은 실제 병자호란의 침공 루트로 적중했다. 애초 장기전이 불가능한 후금으로서는 왕을 생포하는 속전속결 밖에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43. 이미 선조 말엽부터 광해군 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군비 증강 덕에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의 기량은 일방적으로 썰릴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44. 그렇지만 인조가 이괄의 난 이후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하지 못하게 하고 할 시에는 의금부로 끌고가 반역죄를 씌워 죽이기도 했기에 병자호란 때의 조선군은 훈련 부족이었음은 명백하다.
  45. 인조와 광해군이 정 반대인것이 인조는 군사훈련을 금하고 자신을 호위하는 병력들만 크게 늘렸지만, 광해군은 자신을 호위할 병력들까지도 죄다 변경에 보내면서 군사훈련을 시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는데 집중했다.
  46. 광해군일기 13년 8월 28일, 그리고 13년 9월 2일에 정충신을 시켜하는 홍타이지 포섭 계획 및 따이샨과의 이간 계획이 명나라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첩보활동으로만 알려지게 하려는 명령도 내렸다.
  47. 이 때문에 인조가 광해군이 준비해둔 이 군세를 보고 자신만만해하며 후금을 향해 무력압박을 놓기도 했다. 그 후에 이괄의 난 크리...
  48. 이것은 광해군일기에도 나오지만 그만큼 홍타이지를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경계했음을 보여준다.
  49. 인조도 그런 의견이 있지만 당장 정충신 부분도 그렇고 윤휘와의 대화 등을 보면 광해군 대의 외교를 계승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 당장 첩보 등도 없애버린데다가 외교 전문가들을 중앙 정부에 있는 사람들만 남겨두고 현장업무원들은 다 해고시키거나 처형시켜버린 것을 계승이라고 볼 수는 없다. 또 중앙 정부 쪽에 있는 외교 전문가들의 의견마저도 들어주지 않아 인조가 병조호란 당시 윤휘에게 그 동안 말 무시한 것들을 사과까지 했을 정도.
  50. 물론 후대의 인조 역시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한 만큼 친명에 더욱 얽매이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51. 그러나 강홍립을 통해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 외에도, 당장 정충신을 파견해서 홍타이지의 회유 시도를 하면서 동시에 따이샨과 싸움을 붙이려고 들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후금 내의 정보들과 군사 배치 등을 자세히 손쉽게 얻어낸 것이 큰 이득이었다. 광해군도 홍타이지를 크게 경계해 회유하려고 하면서도 전쟁 가능성을 높다고 생각했기에 홍타이지를 전문적으로 마크하며 홍타이지에게 광적인 경계심을 보이며 사실상 최대 숙적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52. 따이샨과 홍타이지의 갈등을 광해군은 그래서 주목하고 홍타이지와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였다. 북방에 파견한 정예군들은 홍타이지의 공격에 대항하기 위한 준비였고, 후금을 직접 염탐하며 수많은 정보들을 얻어낸 정충신은 후금의 정보들을 조합하며 광해군의 군사 배치의 절반만 복구해도 후금의 공격에 대해 방어전이 가능해진다고 이괄의 난 1달 후 인조 앞에서 평가했다. 정충신이 이런 평가를 남겼을 정도로 후금과의 전쟁시의 대비는 철저했고, 엘리트 장수들 상당수가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던 만큼 훗날 인조에게 지휘관들 대다수가 썰려나가고 이괄의 난으로 완전히 증발하지 않았더라면 많은 것이 변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조 최대의 실책.
  53. 그러나 선조 때와 광해군 때가 상황이 다른 것도 염두해야 한다.선조 때 경우는 명이 직접 대놓고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고 광해군때 경우에는 요청을 받은데다가 신하들과 백성들도 원군을 보내는게 맞다는 주장이 많았고 이때 광해군의 위치등도 생각한다면 즉,선조처럼 했다거나 선조라면 안보낼수 있었다고 단정할수도 없었다.
  54. 사실 선조 시절에 왜란 이후 여진족들을 초기 진압한다고 보냈다가 실패해서 사실상 친 조선파 여진족들에 대한 지배권과 6진을 포기하는 상황이 되었다.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선조는 왜란이후 6진쪽 여진 흘라운 우디거가 방패막이를 하던 친조선여진추장들을 흡수하고 조선을 침략하자 군대를 보내 토벌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대패했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여진족은 6진쪽 여진들을 흡수한후 사실상 지배하다시피 커졌고 똑같이 성장하고 있던 누르하치와 부딪히게 되고 종성도호부(조선 6진)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가 패배당하고 그의 세력 전부 흡수하는 상황을 만들었다.6진은 이미 누르하치 세력권이나 다를바 없었다.
  55. 당시 반란의 주도자 중 하나였던 김류는 실패 가능성이 커지자 거사 참여를 미루는 등 홀로 내빼려던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56. 실제로 정묘호란 의 명분은 "광해군의 복수"였다. 강홍립을 같이 파견하기도 했다.
  57. 1위는 영조(83세), 2위는 태조(74세), 3위는 고종(68세).
  58. 세조 때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보냈으나 그 전에 단종이 눈치채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는 설도 있고, 다른 전설에서는 자살을 주저하는 단종을 종이 대신 죽였다고도 전한다.
  59. 사실 인성군의 경우에도 당시 법으로 보면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당시로는 왕족이면 개입하지 않아도 역모에 이름이 올라도 죽어야 했는데 인성군은 이미 여러번 올라 있었다.
  60. 인목대비 입장에서는 무난하게 광해군에게 정권을 주었고, 뚜렷한 반목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영창대군을 죽이고, 유폐와 정명공주의 서인 강등까지 원한이 안 맺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이다. 그리고 광해군 몰락의 단초가 궁궐병과 인목대비 유폐라는 점에서 인목대비의 저주는 성공했다고 볼 수있다. 물론 그 복수를 성공하게 만든 사람은 인조지만.
  61. 옛날의 전례를 복기해서 연산군이 폐위됐을 때를 살펴보자면 반응이 좀 달랐는데 우선 명나라에 연산군이 폐위당한 게 아니라 아들을 잃고 정신병이 생겨서 동생에게 선위하고 놀고 먹는 중이라고 보고를 해서 명나라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긴 반정이 아니었고 명나라는 정보력이 시망이었는지 아님 워낙 막장짓한 연산군 폐위한걸 굳이 물고넘어질 이유가 없어서인지 연산이 죽은지 30년이 넘도록 연산군 잘 지내냐?란 소리나 했다.
  62. 광해군 말엽에 후금이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으면서 명나라로 통하는 만주의 육로가 차단되서 해로밖에 길이 없었다.
  63. 명나라의 유교윤리에 충실한 동림당 계열은 책봉에 반대했지만 환관세력의 결탁한 조정의 현실파들이 은혜를 베풀면 보답할 것이라는 현실론으로 결국엔 책봉한다. 물론 정작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광해군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한데다 군사력도 재건하지 못하여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64. 정확히 말하면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문룡에게 은을 빌려온 것이다. 당시 모문룡은 조선-명-만주간의 교역 중심지에 걸터앉아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상태였기에 가능했떤 것. 일설로는 이 때 약 은 10만냥에 달하는 사신 접대비용 및 뇌물 중 모문룡에게 은 8만냥을 빌려왔고, 이는 나중에 인삼등으로 갚았다는 설도 있다.
  65. 여기서 명지대 한명기 교수는 <병자호란 다시읽기>에서 애초에 허울뿐인 반정 명분도 쇠퇴했다고 평가한다. 사실 조선이 청에게 쉽게 굴복한 것도 실상은 이 과정에서 명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상한데다 명나라 스스로가 막장 상황을 거듭하면서 재조지은을 외쳤던 이들조차도 하나 둘 등을 돌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광해군 때와 달리 인조 때에 이르면 오히려 주화파가 더 늘어났으니까. 의외로 이이첨을 비롯해서 대북 정권은 매우 강경한 주전론자들이었다. 주화론자야 해봐야 소북의 박승종과 서인 출신들 정도가 고작이었다.
  66. 제주도 민요해설(성문사)에 의하면 관련 민요 가사까지 있다. 발췌하자면 ‘칠월도 초하루는 대왕이 돌아가신 날, 볕이 쨍쨍한데도 비가 내리고 있다.’
  67. 이것은 대중적인 평가다.그러나 위의 말대로 외치에서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자세한 건 위의 비판 항목을 참조.
  68. 참조.
  69. 아비가 아들을 괴롭히며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는건 꽤나 심각한 일이다. 사도세자의 일만 봐도 알수있다. 거기다 대국인 명나라 한테마저 외압받은 일도 보면 아무리 신하들의 지지를 받고있다 하더라도 흔들릴 수 있는건 당연지사.
  70. 실제로 서인의 영수인 이항복은 광해군의 폐세자에 반대하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
  71. 앞서 "허풍쟁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이첨의 대북당이며, 아예 광해군은 이이첨더러 "네가 붓으로 한번 싸워봐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72. 이이첨의 딸과 박승종의 맏아들이 혼인을 맺은후 방심하던 이이첨의 손발을 묶어버린 것. 여차하면 자기 가솔들까지 동원하여 이이첨에 극한의 대립을 보여주기도 했다.
  73. 윤휘는 인조반정 강경파에 속한 서인들에게 이 때문에 배신자로 취급되기도 해서 살해위협도 받았다.
  74. 임취정은 반정 이후 의외로 파직에 그쳤으나, 1628년 임경후(任慶後)·박동기(朴東起)·이종충(李宗忠)·오현(吳玹)·이후강(李後崗)·안대홍(安大弘)·고경성(高景星) 등과 함께 광해군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75. 당장 정충신 등을 비롯해 후금의 정보를 얻어내던 현장 실무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와 중앙에서 외교를 담당하던 윤휘 등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알아보면 알 수 있다. 후금 내의 상황을 수시로 첩보하며 받아내던 광해군과는 달리 핫라인과 정보라인을 다 끊어버려 소식을 얻어내는 것이 느려진 것이 특히나 패착이었다. 인조에게 정보전의 개념은 없었다.
  76. 문제는 중앙군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반정과 이괄의 난에서 맥없이 쓸리는 것에서 드러난다.) 중앙군 강화는 국경 방어 못지 않게 중요하다.
  77. 사족으로 사실 지방군은 인조도 육성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몸소 겪으시며 필요성을 인식해 산전수전 고생끝에 함경도의 정예 2만을 구축해 두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인사를 김자점에게 맡겼다...
  78. 이건 말 그대로 사이버 사회에서 이루어진 가상의 일인데 이 때문인지 외국 쪽(특히 중국어판)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광해군의 묘호가 혜종이라 소개되는 오류도 벌어졌다.
  79. 만약 광해군이 실제 수명대로 만 66세까지 왕에 있었다면, 폐세자 지는 (사도세자 같이 되지 않는다면) 만 42세 7개월의 나이에 즉위를 할 뻔 했다. 이는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영조가 죽었을 때의 나이인 만 41세보다 많은 것이며, 문종은 만 36세, 광해군과 순종 황제는 만 33세에 즉위했으니 이 기록을 갱신했을 나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연산군이 동생 중종만큼 오래 살았다면 폐세자 이황도 만 37세에 계승하게 된다. 하지만 연산군이 그렇게 반정을 겪지 않고 장수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은가? (흥미롭게도 소현세자 역시 순조롭게 계승했다면 만 37세였을 것이다)
  80. 이 때문에 광해군의 고립됨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당장 중전부터가 현실을 보지 못하는 판국이었으니.
  81. 이전에 거의 유사한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중국 유송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 유준이었다. 그는 "내세에는 제왕의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82. 사산 혹은 유산후에 불임이었다고 전해진다.
  83. 실제 역사에서 광해군은 대북파의 대명배금의 결사적으로 혼자! 반대했다. 그럴 만큼 강단도 있는 광해군의 모습이 잘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