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요제프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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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독일 총리
24대25대26대
아돌프 히틀러파울 요제프 괴벨스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1 개요

이름파울 요제프 괴벨스
(Paul Joseph Goebbels)
생물년1897년 10월 29일 ~ 1945년 5월 1일
출생지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라이트
사망지나치독일 베를린
정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신체165cm , O형
종교없음[1][2]
배우자마그다 괴벨스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자들이 의지를 갖고 몰입하는 것은 광신주의 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3]

미디어를 완벽하게 통제함과 동시에, 집단으로 구성된 대중이 어디까지 멍청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장본인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선전 장관. 선동과 날조로 승부해서 이겨본 적 있는 대표적인 사례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추종자로 각종 선전 전략을 만들어서 히틀러를 독재자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냉철하고 치밀한 선전 활동으로 유명하며 흔히 미디어를 통한 대중 선동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다. 또한 대중이 얼마나 선전 및 선동에 취약하고 멍청해질 수 있는가를 증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나치 붕괴 이후 선동 집단을 두들겨패는 기관을 전문적으로 만들고 운용까지 하는 것은 이 자가 집단 심리에 빠진 대중이 얼마나 멍청한 지를 증명한 것이 크다.

나치당 베를린 관구장[4], 중앙당 선전국장[5]으로 집권한 후 나치 독일의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을 지냈으며. 전시에는 총력전 전권대사를 맡았다.

당시 독일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보다 괴벨스를 더 싫어했다고 한다.[6] 지금도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 중에서도 그렇게 증언하는 사람이 있다. 하인리히 힘러도살자나 하수인에 불과했지만 괴벨스는 유대인 집단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여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게 만들었고 유대인들의 인격과 자존심을 벌레나 병균 취급하듯이 말살했다. 칼잡이보다 나팔수가 더 나쁘다 이 말이다

제국선전부 장관으로 유대인 탄압과 언론 출판 방송 등 문화계를 통제하고 나치 정권의 악행에 앞장선 인물이다. 전쟁 중엔 침략 전쟁을 미화하면서 전쟁범죄에 크게 일조했고 패전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간의 악행에 대해서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르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엉뚱한 부하 직원이 뉘른베르크 재판에 끌려나가 곤욕을 치러야 했고, 2016년 현재까지도 악랄한 독재자의 나팔수이자 선동가로 악명을 떨친다.

2 생애

해당 문서 참조.

3 개인적인 사항

신체장애는 괴벨스의 박사 학위만큼이나 잘 알려진 개인적인 특징이다. 어려서부터 성인 나치당과 장관에 이르기까지 정적들의 공격대상이었고 괴벨스 자신도 장애를 잊지 않았다. 군대는 면제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대학에 다닐 때 징집 된 적이 있다. 현역은 아니고 군대에 비품을 공급하는 보훈단체에서 행정병으로 몇 달 일하다가 높으신 분이 괴벨스의 꾀죄죄한 외모를 보고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유대인 초등학교 교사인 엘제 얀케와 결혼을 고민할 때도 여자측에서 괴벨스의 다리 장애가 유전이 될까봐, 괴벨스는 엘제 얀케의 어머니가 유대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대판 싸우는 원인도 되었고 나치당 관구장이 될 때도 말이 많았고 장관으로 출세했을 때도 정적들은 군 복무 경력과 신체장애를 빗대 '방구석 병사', '빼어난 외모의 게르만 청년' 이라 비꼬거나 '절름발이 악마' 라는 별명을 붙였다.

장관이 되고 나서는 다른 나치당 간부들만큼 흥청망청은 아니어도 꽤나 해먹었다. 우선 유대인 부호를 협박해서 땅을 헐값에 가로채고 괴링의 양해를 받아 산림구역에서 법을 어기고 주건물 방 개수만 21개, 욕실만 5개짜리 별도의 영화관과 연회홀이 딸린 저택을 300만 제국마르크를 들여서 만들었다.[7] 내부 장식도 가구나 식기는 물론이고 하나에 3만 마르크나 하는 루이 16세풍 양탄자를 까는 등 실내 장식에도 펑펑 써댔다. 물론 여기엔 재벌 출신 마그다의 취향도 한 몫 했다. 이 대부분의 돈은 당연히 영화계의 뇌물이나 선전부 예산을 삥땅쳐서 빼돌렸다. 나치당 베를린 관구장 시절에도 상당수의 베를린 관구 당예산을 빼돌려서 소송비용이나 여자들 만나고 다니는 데 썼다.

3.1 여자 관계

모든 여자들이 나의 피를 끓게 만든다. -1926년 일기-

볼품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많았다. 듣보잡 시절 학생 시절에도 여자가 꼬였고 고등학생 시절에도 시골 여자를 꼬셔서 사귄 적이 있다. 얀카 슈탈헤름슈탈헬름이라는 부자집 따님과는 신분 차이로 헤어지지만 오랫동안 진지하게 사귀는 사이였고 엘제 얀케라는 유대인 초등학교 교사와도 나치당에 들어가고 베를린 관구장으로 가기 전까지도 헤어지지 않았다. 한때 나치당에 있음에도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했고 베를린 관구장으로 부임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헤어질 정도. 베를린에 가서도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자주 바뀌었으며 아내 마그다와 결혼하던 시절에도 전 여자친구인 슈탈헤름과 양다리를 걸쳤으며 바쁜 와중에도 다른 여자들도 만났다. 권력을 잡은 뒤 선전장관이라는 직책상 배우들의 출세에 대해 최종권한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여배우들과 염문이 많았으며 그 문제가 불거져 정적이던 히믈러는 '우리는 여직원을 농락하는 유대인 사장에 대해 비난해왔는데 이제는 괴벨스 장관이 그 비난을 듣고 있다' 는 말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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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다 바로바.

특히 체코 병합 이후에는 체코 출신 여배우 리다 바로바(Lida Baarova, 1914~2000)와 상당히 심각한 수준으로 문제가 되어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는 이혼 직전까지 갔다. 리다 바로바는 원래 약혼자까지 있던 여자였는데 괴벨스가 데리고 다니면서 검열삭제하다가 남자 배우인 전 약혼남에게 주먹질을 당했다는 둥 멱살을 잡혔다는 둥 결투를 했다는 둥 루머가 돌았고 극장에선 리다 바로바가 나오면 '선전장관의 창녀' 라고 다들 수근대는 등 소문이 다 퍼졌다. 사회적 시각과 마그다 괴벨스의 인맥[8]을 생각한 히틀러의 불호령으로 사건을 대충 수습하고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참고로 리다 바로바는 2차대전 이후까지 살아남았고 전후 증언에서 "괴벨스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다" 라고 공언하였다고 한다. 정작 괴벨스는 대학 시절 연인 얀카 슈텔헤름이 자신이 진정 사랑한 연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신체적 장애에 대한 반발인지 여성관은 대단히 보수적이었고 마초 성향이었다. 여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고 히틀러처럼 여자는 집구석에서 애들 많이 낳고 남편 내조하는 데 충실해야 된다고 정작 자기 마눌은 전혀 안 그러던데 그러니까 더 그렇게 바랐나보지생각했다. 그런데도 여자들이 많았던 것을 보면 뭔가 치명적인 매력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3.2 마그다 괴벨스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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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마그다 괴벨스는 1900년 태생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처녀일 때 성은 '리첼' 로 어릴 때 어머니가 생부와 이혼하고 유대인 출신 부자 남편과 재혼했다.[9] 상류층 영양들이 다니는 기숙학교를 다녔고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 시험)에도 합격했으나 19세 때 나이가 40줄에 애 둘 딸린 재벌 크반트 가문과 결혼했다. 8년간 짧은 결혼 생활 동안 아들 둘(하나는 요절)을 낳았지만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바쁘다고 얼굴도 보기 힘든 남편을 두고 마그다가 젊은 남자와 당당하게 바람을 피우면서 자연스레 이혼한다. 이혼할 때 아들 하랄트 크반트를 데리고 나온다. 서양식 사고방식의 위엄인지 전 남편&전 시가(媤家)와 사이는 나쁘지 않았으며 이혼할 때도 풍족하게 한 보따리 챙겨서 나온다. 오히려 이혼하고 나서 전 남편&전 시가와의 사이가 더 좋아졌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이혼하고 할 일 없이 소일하던 마그다는 심심풀이로 베를린 스포츠궁에서 열린 나치당 집회에 놀러갔다가 깊은 감명을 받고 그 날 즉시 나치당에 입당한다. 매우 열성적이어서 재벌집 마나님 출신이면서도 무급으로 베를린 나치당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에 나섰고 이때 괴벨스를 만난다. 이미 이 시절엔 괴벨스는 국회의원도 되고 나치당 베를린 대관구장이 된 터라 대학 시절 애인에게 손 벌리는 것처럼 안습 상황은 아니었으나 출신 배경 차이란 게 있었기 때문에 괴벨스가 약간 꿀리는 감도 없지 않았다. 생부와 모친 옛 시가인 크반트 가문까지 모두 결혼에 반대했지만 첫 아이를 밴 상태에서 조용하게 결혼하고 이후 인맥과 영향력으로 괴벨스가 출세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고, 남편보다 더 열렬한 총통 추종자에다 히틀러도 마그다를 좋아했기 때문에 독신인 히틀러를 돕는 제3제국 퍼스트 레이디로 불릴 정도였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에 능통해서 다른 외국어[10]에 약한 괴벨스나 히틀러를 대신해서 외국 손님들을 접대하고 다리를 놓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괴벨스가 한때 권력층에 밀려나 찬밥이 되었을 때도[11] 히틀러의 마그다에 대한 신임은 탄탄했다. 괴벨스가 리다 바로바와 바람이 났을 때는 괴벨스의 오른팔 선전부 차관이며 연하인 카를 한케와 맞바람을 피운 여장부이며 이혼도 불사했지만 히틀러가 간곡하게 달래고 괴벨스가 아이들을 뺏는다는 으름장에 굴복하고 재결합한다.

제3제국의 다산정책을 몸소 실천해서 전 남편에게서 하랄트를, 괴벨스 사이에서 1남 5녀를 낳았다.

태어난 순서는 헬가(1932년 9월 1일), 힐데(1934년 4월 13일), 헬무트(1935년 10월 2일), 홀데(1937년 2월 19일), 헤다(1938년 5월 5일), 하이데(1940년 10월 29일). 아들 헬무트는 마그다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았다가 요절한 아들 이름 헬무트를 그대로 붙였다. 맏딸 헬가는 죽을 때 12세였는데 무척 영리하여 일찍부터 히틀러의 귀여움을 받았다. 참고로 전부 H로 시작하는데 총통을 기린답시고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아내 마그다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랄트 크반트[12]도 데려와 키웠다. 헬가는 똑똑해서 괴벨스가 기대하며 아낀 반면 외아들 헬무트는 자주 공상에 빠져서 '남자애 혼자 여자 형제들 사이에 키워서 저러나' 하고 괴벨스가 많이 걱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알려진 대로 나치 패망 직전 총통벙커에서 자살하기 전에 자기 자식들을 다 죽였다. 아이들의 시신(그냥 잠자는듯한 모습이지만 시신이다보니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으니 클릭시 주의 요망) 괴벨스 가족의 시신은 소련군이 입수했는데 맏딸 헬가는 얼굴에 저항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영화 몰락과 유사하게 예방 주사 놓는다고 몰핀을 투여하고 자고 있을 때 청산가리를 먹였다고 한다. 괴벨스는 아이들을 해치기 전에 망설였지만 마그다가 적극적으로 죽였다고.[13] 그 이유는 총통 각하가 없는 세상 따위 살 가치가 없다는 것. 역시 보통 나치 빠순이가 아니다. 마그다와 친한 알베르트 슈페어 회고록을 제외하고는 마그다가 나서서 죽였다는 증언이 일치한다. 슈페어 회고록에선 총통 벙커에서 마지막으로 마그다와 인사할 때 괴벨스가 질투해서 둘만의 이야기 시간을 주지 않았다고 원망도 한다.

의붓아들인 하랄트 크반트는 공군 상사로 복무했으며 나치 패망 전에 전선에서 부상을 입고 영국군 포로가 되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살아남았다. 마그다가 죽기 전 총통벙커에서 보낸 편지는 기적적으로 하랄트에게 전해졌다는 일화가 있다. 전후에는 크반트 가문으로 돌아갔고 196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여담으로 2014년 10월, 하랄트의 친족이자 BMW의 대주주인 요한나 크반트[14]가 독일 최고 부호 반열에 올랐다고 영국 일간지 타임스가 보도했다. 요한나 크반트와 그녀의 두 아들딸의 BMW 지분을 합하면 46.7%에 달하는데, 이에 따르면 크반트 일가의 재산은 245억 파운드(약 42조 2983억 원)에 달한다.#

4 저작과 어록들

괴벨스의 저작으로 가장 방대한 자료는 '괴벨스의 일기' 이다. 20대 중반(1923년)부터 거의 매일 꼼꼼하게 쓴 일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와 나치 시대, 괴벨스와 히틀러 등 기타 나치 인사들을 연구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1차 자료이다.[15] 2만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이라서 1~2년 또는 2~3년 정도의 양으로 나눠서 출판했고(시대순은 아니다) 전쟁 말기에 쓴 일기는 동독에 남아있어서 90년대에나 연구가 시작되었고 훨씬 늦게 발간되었다. 괴벨스의 인물평이나 당시 시대 여론이나 루머들이 솔직하게 적혀있다. 그렇지만 일기라고 해서 완전히 자신만의 생각을 쓴 것만은 아닌 게 나치 집권 후 출판사로부터 자신의 사후 20년 출판을 조건으로 막대한 선인세를 받고 팔았기에 히틀러나 나치 정권에 대해선 완전히 자기검열 없이 쓴 것이라곤 볼 수 없다.

저작으론 몇 차례의 개작을 거친 반(半)자전적 소설 <미하엘>이 있다. 자전적 소설이 아닌 반자전적 소설인 것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플리게네스가 노동자로 일하다 광산에서 사고사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집필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미하엘 포어만은 현실의 친구 플리게네스와 괴벨스 자신을 투영하여 암울한 환경에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저자 본인의 평도 그다지 좋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히틀러의 나의 투쟁처럼 집권 후 불티나게 팔려서 10쇄를 넘게 찍어냈다. 그 밖에 베를린 관구장 시절 공산당이 집회 때 연극을 이용하는 걸 따라한답시고 정치적인 희곡을 몇 편 썼지만 역시 평은 좋지 않다. 나치당 입당 하기 전 실업자일 때 언론사에 발표한 논문이 6편 정도가 남아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나치당 시절 정치적으로 쓴 글 모음(영문판). 1920년대~1933년, 1933년~1945년.

그 외 본문 항목에 소개되지 않은 단편적인 문구와 어록, 연설문.

※ 주의할 것, 이 어록들 중에는 실제로 괴벨스가 하지 않았음에도 유명한 어록들도 많다(출처 표기 필수).

  •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라고 말하면 괴벨스는 '그럼 국가는 사랑하지 않는가?' 라고 하며 반역죄를 씌우는 격. 괴벨스의 여론조작에 대한 자신감을 잘 볼 수 있다. 문제는 출처가 없는 말이라는 것.
  • '민주주의가 철천지 원수에게 자신을 파멸시킬 방법을 손수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민주주의를 비꼬는 풍자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될 것이다.'
앞선 항목에 '무임 승차자, 면책 특권자' 와 연계되는 문구로 민주주의가 보장한 자유에 무임승차해서 체제를 조롱하고 뒤엎는 데도 민주적 방식으로 뽑힌 면책특권(국회의원)을 가지고 이용하고 있다는 뜻.
  • '우리의 상대가 '그래, 전에 우리는 당신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잖아' 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당신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했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당신들에게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증거가 아냐! 당신들이 멍청하다는 증거일 뿐!' -1935년 12월 4일 연설.
  • 선전은 본질상 일종의 예술이다. 그리고 선전원은 엄밀한 단어상 의미에 있어 민중 심리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선전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매일 매 시간 민중의 맥박소리에 귀기울이고 어떻게 맥박이 뛰는지 듣는것이다. 그리고 그 맥박의 박자에 맞추어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1935년-
  • "한 민족! 하나의 국가! 단 하나의 지도자!(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 "이 얼마나 이상한 민족입니까!(...) 다른 민족이라면 저항하기 위해 대중들이 봉기했을 겁니다. 가련한 독일! 상놈의 나라! 불량한 나라! 유대인들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우리를 평가했습니다!!" -1928년 베를린 거리 연설-
  • 독일이여 깨어나라!(Deutschland Erwache!)
나치당 깃발에 적힌 글자다. 원래는 나치당 초기 멤버 시인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지은 투쟁가 '폭풍, 폭풍, 폭풍이여!' 의 가사에서 유래했다. 연설 시작할 때 많이 써먹었다.
  • 메마른 대지가 비바람을 갈망하듯 단 한 사람을 원합니다. 단 한 사람!! 민족이여 깨어나라! 폭풍이여 몰아쳐라!
원래 출전은 19세기 민족시인 테오도르 쾨르너이다.
  •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괴벨스가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는 얘기는 한국 사이트들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출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들마저 기사에 인용하는 수준으로 한국에서는 유명하다. 이 명언이야 말로 이 명언을 증명하는 하나의 예
괴벨스가 했든 안했든 현재에도 미래에도 각종 유언비어와 루머에 다 먹혀들어가는 명언(...) 어떤 사람들은 엘리트들이 이와 같은 선동의 블랙홀에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비아냥과 냉소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위트있게 비꼬면서 까는 것이 데이터를 잔뜩 들고 와서 논박하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는 이야기. 다만 이런 방식의 문제는 해당 선동이 실제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아는 입장(즉 선동가 본인과 반박하는 당사자)는 이게 통렬한 비판이라는 걸 알지만, 문제에 대해 잘 모르는 대다수의 일반대중들 입장에서는 그냥 정신승리하는 걸로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신뢰도가 높은 사람이면 모를까, 모르는 사람의 비아냥과 냉소를 듣고 "아 정말 그렇구나"라고 깨달음을 얻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아이러니한 건 이런 방식(비아냥과 냉소)을 보고 이게 통렬한 비판이란 걸 알만큼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은 애초부터 비판의 대상이 선동이란 걸 알 가능성이 높으니 이 비판에 의해 입장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16] 즉, 폭넓은 지식이 없으면서 선동에 대해 말려든 이들이나, 잘은 모르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제3자가 봐도 설득력이 있는 객관적 증거가 필요하다는 건 변함이 없다. 또한 단순히 비아냥과 냉소에만 의존하는 것은 실제로 선동을 반박하는 이들과 자기 맘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까는 찌질이들이 쉽게 구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곤란한 점.
  •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느냐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는다!"
  • "우리는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면서 한 말. 후에 이 말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후자의 의미로.
  • "게토(유대인 집단 거주지)를 가로질러 차를 몰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모든 것을 상세하게 둘러보았다. 무엇이라 형용할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도 없으며 짐승들 뿐이다. 때문에 이것은 인도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외과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칼로 절단을 하되 아주 사정 없이 잘라내야 한다. -1939년 폴란드 유대인 거주지역에서-
블라디미르 레닌도 "거짓말을 충분히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고 말한 적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이 위의 "선동은 한문장으로도~"가 이 말을 방증한다.
  • 100%의 거짓말보다는 99%의 거짓말과 1%의 진실의 배합이 더 나은 효과를 보여준다.
  • 인민 대중이란 작은 거짓말보다는 더 큰 거짓말에 속는다. - 출처 미상
  • 당신이 거짓말을 자주 하면 할수록 대중들은 그것을 믿게 되며 마침내 자기 자신도 믿게 된다.
  • "여론조사라는 것은 대상을 누구로 잡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지"
  • 거짓말도 천 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

그리고 괴벨스의 어록이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9월 모의평가 사회문화 문제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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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EBS 수능완성 연계 지문이다. 5번 맞지?

파일:Attachment/파울 요제프 괴벨스/test2.png

5 그를 다룬 것들

5.1 서적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가 지은 <괴벨스>가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김태희 역)' 으로 국내 발간되어 있다.

원서 제목은 그냥 <괴벨스>인데 국내판에서 대중선동의 심리학이라 써놔서 제3제국의 선동정책을 다룬 책인지, 심리학을 다룬 책인지 헷갈리게 만들어 놨다. 내용은 그냥 괴벨스 평전이다. 하지만 괴벨스를 깊게 다룬 책 중에 거의 유일하게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다. 괴벨스의 선동내용 중에 예나에 이은 라이프치히를 공간적으로 가깝다 식으로 번역한 사소한 오역[17]이 있지만 읽어볼 가치가 있다. 현재 나무위키 괴벨스 항목의 상당 부분이 이 책이 출처.

5.2 영화 몰락에서

  • 난 그들(국민들)을 동정하지 않아 ... 다시 말하지만 난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다고! ...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고. 당신에겐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겠지만 당신 스스로 멍청해지려 하지 마. 우리는 한 번도 그들에게 강요한 적이 없어. 우리는 한 번도 우리가 할 것을 감추지 않았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 우리에게 정권을 위임한 것이지. 그리고 이제 지금 그들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뿐이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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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론 패망 직전 4월 21일 선전부 직원들과의 마지막 회의에서 과거 국제연맹 탈퇴를 결정하는 국민투표에서 독일 민족의 절대 다수가 양보의 정치에 반대하고 명예와 모험의 정치에 찬성한 것, 즉 독일 민족 스스로가 현재와 같은 상황을 원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자신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부하가 되라고 강요한 적이 없으며, 이 모든 것은 당신들이 저지른 짓이니, 당신들은 곧 목이 잘릴 것이다. 라 하고 비웃으며 나갔다고 한다. 영화상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친위대 안에서도 열렬한 히틀러 숭배자들이 배속되는 '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LSSAH)' 출신의 친위대 소장인 빌헬름 몬케, 거기다 국민돌격대가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죽어가는 게 무의미하다고 했다가 저런 말을 들었다. 그야말로 그나마 남아있던 충성심마저 산산조각날 지경의 충격적인 신이다. 마지막에 같잖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라는 표정의 썩소를 짓는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 아이러니하게도 나치에 의한 비극의 책임이 나치당만이 아닌 그들에 동의한 독일 국민 모두에게 있다는 씁쓸하고 분명한 교훈을 남긴다.[19]

6 어떤 인간인가?

그는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주도면밀하고 냉철했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악마적이었다. -오토 야콥스, 속기사-

지금까지도 나치당 내에서 악명이 높은 건 당연히 히틀러, 괴링, 히믈러, 괴벨스 정도인데, 여기서도 괴벨스는 유별나다. 심지어 히틀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20] 애초에 히틀러는 나치당 최종보스라서 당연히 다른 쫄따구보다 악명이 높지만, 괴벨스는 나치당 내에서도 손꼽히는 악마였다. 사실 괴벨스는 나치당 내 여러 유형 중에서도 워낙 특별한 유형이였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21] 괴링은 흔해 빠진 부패한 유형이고 히믈러같이 광신적 충성심과 사명감에 불타 돌쇠처럼 기계적으로 나치에 충성한 인물은 한둘이 아니었다. 반면 괴벨스는 북독일 라인란트 출신 노동자 계층 출신이란 점에서 프티부르주아 출신 고등학교 중퇴자 히틀러와 통하는 면이 있었으며, 둘 다 반 자본주의적이고 반 권위적이며 현란한 선동가이며 연설가였다. 자신의 출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했으며 그것이 또 인기의 비결이기도 했다. 괴벨스는 권위는 혐오했지만 추구했고 지성인 출신이지만 연설은 지성적인 언어를 쓰진 않았다. 괴벨스에 대한 책을 썼던 롤프 호흐후트는 '스스로 열광했기에 타인을 열광시켰던 신도' 라고 했던 반면 요아힘 페스트는 '최후까지 마키아벨리스트였던 자' 라고 했다. 괴벨스를 다룬 다른 작가들은 '합리적인 선동가' 라든가 '장애에 대한 보상을 총통신앙과 세계관으로 대리 충족' 했다는 다양한 평가가 있다.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은 연구 대상이다.

7 참고사항

  • 윈스턴 처칠이 미국 방문 연설에서 사용해 유명해진 철의 장막이라는 단어를 창조해 써먹은 시초가 바로 괴벨스라고 한다.
  • 윈스턴 처칠이 군 부대를 방문해서 톰슨 기관단총을 써보는 사진을 이용해서 '저런 갱단 두목 같은 전쟁광이 여러분을 죽음으로 내몰려고 합니다. 처칠을 쫓아내고 우리 제3제국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겠습니까!' 라는 선전문구를 영국에 뿌렸는데 정작 영국 사람들의 반응이 '훗, 저래야 우리 수상답지', '처칠 형 보고 있지? 외쳐! CC!', '나치 놈팽이는 싹 쓸어야 제 맛', '우리 총리각하 간지폭풍!' 이라면서 대호평만 받았다. 결국, 이 건은 괴벨스의 선전선동에서 몇 안 되는 실패로 끝맺었다. 오히려 영국 사람들의 전의만 왕성하게 만들었으니... 언플의 제왕의 선전선동도 씹어버리는 윈저 패밀리 보스의 위엄그런데 이게 오히려 괴벨스가 영국이 광적으로 되도록 몰아간 언플이었다는 평도 있다.[22]
  •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연설이 위압감으로 사람들을 흡입시킨 것과는 다르게 괴벨스는 온화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 알베르트 슈페어는 괴벨스와 친했으며 괴벨스의 아내인 마그다와도 친했다고 한다.
  • 그는 어릴적부터 소아마비를 앓아서 양쪽 발 길이가 달라 보조구를 착용했는데 이 때문에 연합국에선 "거짓말쟁이는 발을 끌면서 온다"는 말로 괴벨스를 조롱했다고 한다.
  • 한국에서도 지식채널e에서 괴벨스의 생을 다룬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 TV와 라디오를 정치선전에 활용한 선구자이며 정치쇼의 원조, 공약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선거전략의 선구자이다. 또한 시장같은 장소에서 후보자가 유권자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선전하는 행위의 창시자이다. 그 덕분에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세계 최초로 정기적으로 TV 방송을 보낸 국가가 되었다.[23] 물론 방송 내용이야 뭐(...)

8 관련 항목

  1. 젊은 시절에는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나, 나치당원이 되면서 신앙을 버렸다. 아마도 히틀러 비스무리하게 숭배한듯 하다
  2. 영어 위키백과 배교한 로마 가톨릭 신자 목록에 괴벨스가 있다.
  3. NGC에서 만든 2차 대전 히틀러의 야망 독재자의 탄생 1화 인용. 42분 35초부터.
  4. 주지사급의 의전을 받는 지방당의 최고 지도자이다.
  5. 당수인 히틀러 휘하 최고 간부인 Reichsleiter의 일원이다
  6. 대표적인 사람으로 유대계 독일 언어학자인 빅토르 클렘페러가 있다.
  7. 첫 제국의원 시절 한 달 세비가 750마르크인 걸 감안.
  8. 상류사회 출신으로 친정과 전 남편 집안 양쪽을 통해 독일 상류사회에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히틀러가 독신이었으므로 괴링의 아내 에미 존네만과 함께 실질적인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했다. 국민적으로도 알려져서 나치에서 이상적인 이미지로 독일 어머니나 주부를 대표해서 방송 연설을 하기도 했다.
  9. 크반트 재벌가에서도 유대인 계부가 있는 걸 꺼려해 생부의 성을 쓰고 다녔다.
  10. 괴벨스는 외가 쪽이 네덜란드에서 몇 년 살았던 영향으로 네덜란드어를 할 줄 알았다. 학창시절에도 1차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하면 네덜란드는 독일 제국에 합병될 거라는 전망에 네덜란드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다.
  11. 히틀러의 신임은 변하지 않았으나 체코 위기 등 군사적인 정국이라 권력의 핵심에선 멀어졌다.
  12. 바이에른 지방에 기반을 둔 부호 가문 출신이다. BMW의 최대주주였던 헤르베르트 크반트가 바로 하랄트의 이복형이다.
  13. 여담으로 영화 몰락을 촬영할 당시 마그다 역을 맡은 배우 코리나 하르포히는 이 장면을 연기한 뒤 크게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4. 1926. 6. 21.~2015. 8. 3. 하랄트의 이복형인 헤르베르트의 세번째 부인이다. 즉 형수-도련님 관계.
  15. 다른 나치 고위직의 1차자료에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도 있다.
  16. 선동이란 걸 알면서도 해당 선동을 지지했다면 비판하건 말건 지지할 것이고, 알면서 비판했다면 비판을 계속할 것이다.
  17. 1807년 예나 전투에서 패하고 독일이 나폴레옹 치하로 들어갔다가 1813년 해방 전쟁에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승리로 독일이 나폴레옹 치하에서 독립한다. 상반된 사건의 시간적 연속성을 비슷한 사건의 공간적 연속성이라 잘못 써놨다. 초판인쇄 후 2012년에 나온 쇄까지도 아직 수정이 안 되어있다.
  18. 정확하게는 "이제 그들의 작은 모가지가 잘려나가게 되겠지" 정도의 해석이 될 것이다. 해당 영화 장면에서 괴벨스의 손동작은 이를 의미하는 것.
  19. 아닌게 아니라, 괴벨스의 말이 정당한 비판을 목적으로 인용되는 경우는 꽤나 많다.
  20. 괴링은 잔인함보다는 무능함과 멍청함으로 유명하고, 단순히 학살을 집행하는 힘러보단 그런상황이 되도록 만든 괴벨스가 더 악명높다.
  21.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괴벨스의 '특별함'은 고학력이 아니었다. 나치당 내 초기 멤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법학박사 빌헬름 프리크, 공학박사 프리츠 토트, 엔지니어 출신 고트프리트 페더, 변호사 한스 프랑크, 약사 출신 그레고어 슈트라서, 하버드 출신 한프슈탱글, 건축가 로젠베르크와 알베르트 슈페어, 농학 석사 출신 히믈러와 발터 다레, 언론인 발터 풍크, 폰 쉬라흐, 루돌프 헤스 등 의외로 대부분이 번듯한 집안 출신에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22. 다만 처칠 본인은 저 사진을 매우 싫어했으며, "손에 술이나 총을 든 모습을 찍히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난 술은 피했는데 그 몹쓸 사진,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 때문에 여태까지 곤욕을 치르고 있지. 다른 것도 있지만 그 사진이 나한테 입힌 손해가 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는 것을 보면 처칠의 다른 정적들도 문제의 사진을 이용해서 괴벨스가 했던 것과 비슷한 공격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23. 사실 그 이전에도 영국에서 시험 방송을 내보내기는 했었지만 정기적으로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한 건 1936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