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서울특별시의 4년제 대학교
국립대학서울과학기술대학교서울교육대학교서울대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육대학교---
공립대학서울시립대학교---
사립대학가톨릭대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건국대학교경기대학교
경희대학교고려대학교광운대학교국민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동국대학교동덕여자대학교명지대학교
삼육대학교상명대학교서강대학교서경대학교
서울기독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성공회대학교성균관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세종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숭실대학교
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장로회신학대학교중앙대학교
총신대학교추계예술대학교케이씨대학교한국성서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한성대학교한양대학교서울한영대학교
홍익대학교---
국민대학교 國民大學校
KOOKMIN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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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이교위가(以校爲家), 사필귀정(事必歸正)
분류사립대학
개교일자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관
총장제10대 유지수
국가대한민국
소재서울 캠퍼스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로 77
학생 수학부: 15,493명 (2014년)
대학원: 2,731명 (2014년)
교직원 수1,086명 (2014)
대학구조개혁평가 결과A등급(2015년 기준)
상징동물
교색KMU Sky BLUE
재단학교법인 국민학원
웹 사이트국민대학교 홈페이지
넓고도 아득한 배움의 바다

파도와 싸우며 배들을 저어
평화의 항구를 바라다 보고
바쁘게 바쁘게 나가는 우리
우리는 새로운 민주의 나라
사공을 기르는 국민대학교

이병기 작사, 이홍렬 곡
국민대학교 교가 #[1]

국민대학교 홈페이지[2]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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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최초의 사립대학교. 해방 후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 따라 당시 임시정부 내무부장이었던 해공 신익희 선생의 주도로 1946년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학교의 상징은 용두리(쌍용)이며, 교훈은 "이교위가(以校爲家),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2 재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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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사립대학 법인 수익용 기본재산 확보율
63.8%이다.(전국 평균 56.9%)


2014년 사립대학 등록금 의존율 현황
운용수입중 등록금 비율이 72.0%로...전국평균 63.2%보다 높다.

3 역사

3.1 국민대학설립기성회의 발족과 건학운동

돌아보건대 본 대학은 내가 일생을 통하여 과거 40년 동안 우리 국민 전체가 일제의 압박 아래 신음한 것은 우리 국민이 몰지각한데서 비롯한 결과임을 통감하고 이 나라의 중견 국민을 양성해야겠다고 일구 월심으로 생각한 그 큰 이상을 갖고 세운 것입니다. 목숨이 붙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이 정도나마, 고매한 학식을 갖춘 교수 여러분과 구지욕에 불타는 총명 호학의 생도 여러분과 국민대학 첫 입학생을 맞아 개강식을 갖게 되니 여러분들과 같이 일편 감개 무량하고 일편 감축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br>해공의 창학연설 中

해방 이후 1945년 12월 1일에 환국한 해공 신익희는 건국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이에 뜻을 같이하는 임시정부 인사와 국민대학의 설립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46년 1월, 백범 김구의 숙소인 경교장에서 대학설립문제가 논의되었고, 이때 건학의 목표를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여 독립국가건설에 필요한 인재의 육성으로 정하였고 3월 3일, '국민대학설립기성회' 를 발족시켰다. 기성회 고문에는 김구김규식이, 명예회장과 회장에는 조소앙과 신익희가 각기 선임됐다. 또 백낙준 등 교육계 인사들이 대거 이사진에 합류해 대학 설립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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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 18일자 동아일보

1946년 5월, 동아일보는 ‘국립대학 설립 준비’ 제목의 기사로 국민대학을 소개했다. '국립대학'이라는 표현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세운 대학이라는 것을 배경에 둔 것. 그러나 이 당시 미군정에서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고[3] 임시정부파에서 세우는 대학이 '국립'이라 칭해지는 것은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에 대한 쿠데타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불쾌한 상황. 실제로 불과 3달 후인 1946년 8월, 신익희는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감행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실패했지만. 흠좀무

1946년 9월 1일 국민대학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 서울대학교와 동시에 개교했지만 결국 이러한 미군정과 임시정부파의 갈등 때문에 미군정에서는 국민대학교를 정식으로 인가를 내 주지 않았다. 미 군정청은 개교한지 4개월여가 지난 12월 18일이 돼서야 국민대학관의 설립 인가를 허가했다.

이런 역사 때문에 학교에서는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 해방 이후 최초의 사립대학이라고 광고한다.

국민대학교는 민족의 대학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안고 설립되었지만, 재단을 확보하지 못하여 건학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중에서도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겪는 어려움이 가장 컸다. 설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고, 신학기에 맞추어 학생모집 광고를 냈지만 교사는커녕 원서를 접수할 사무실도 마련하지 못한 처지였다. 궁여지책으로 종로구 필운동 소재 한옥집 대문칸을 임시로 빌려 헌 책상 한 개를 놓고 흰 종이에 ‘국민대학교 신입생 입학원서 접수처’라고 써 붙이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사리 입학원서를 마감한 후에는 종로구 내수동에 있던 보인상업고등학교의 교실을 빌려 입학시험을 치르는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해공 신익희 선생의 명망 덕분에 국민대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의 열기는 뜨거워 당시 입학시험 경쟁률은 7대 1에 달할 정도로 높았다.

3.2 초창기의 국민대학

1946년 9월 1일 개교를 앞두고서야 어렵게 보인상업학교 별관 2층 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이 국민대의 첫 교사였다. 1층에는 학장실과 사무실, 강의실 하나를, 2층에는 넓은 강의실 2개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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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식 기념사진 (1947.2.18)

야간대학으로 출발한 초창기 국민대 학생들의 개교 당시 1회 학부생들의 나이는 20세에서 50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 중에는 다른 대학에 다니다가 입학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본의 교토대를 졸업하거나, 서울대에 재학하던 학생이 편입한 경우도 있었다고.

교사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국민대학교가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재단의 유치가 필요하였다. 보인상업학교 건물의 일부를 야간에 빌려 사용하는 안습한 상황 때문에(...) 설립 주체들은 재단 유치에 관심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당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 총무부장이며 해인사 주지인 최범술이 재단을 구성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해인사의 사찰 재산을 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직원 및 학생들은 크게 환영하였고, 1947년 10월 16일 신익희 선생을 이사장으로 하는 이사진은 사임하였고, 최범술을 이사장으로 하는 새로운 이사진이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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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교사로 사용했던 남산의 구 동본원사[4]

1947년 10월 3일 서울 중구 남산동에 있는 구 동본원사(현 남산초등학교 뒤) 건물을 교사로 쓰도록 미군정 관재처로부터 허가를 얻어냈고 10월 5일에는 동본원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달도 못간 10월 30일에 미군정은 동본원사에서 철수하라 통보했고(...). 이때부터 4달간 학교당국과 학생들은 미군정에 반발하며 교사를 사수하였다, 결국 남덕우를 비롯한 학생 대표들이 미군정청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과 담판을 벌여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있는 옛 체신요원양성소 건물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문교부는 1948년 8월 10일자로, 재단법인 국민대학(이사장 최범술)의 허가와 국민대학(학장 신익희)을 인가하였다. 이로써 국민대학교는 각종학교에서 정규대학으로 승격했다. 최범술 재단의 허가로 국민대학교는 정규대학이 되었으나, 재정적 뒷받침은 바라던 바와 같지 않았다. 기부하겠다던 해인사 재산은 최범술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것. 게다가 신익희가 학장에서 물러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최범술 이사장이 자금 출자자를 새 학장으로 선임하면서 생긴 일인 것이다. 신익희 선생의 명망을 보고 입학한 학생들은 당연히 이 상황에 반발했고 재정적 어려움과 학생들의 반발이라는 악재가 겹친 결국 최범술 재단은 쫒겨나게 된다. 그 이후부터 재단의 분규가 시작되면서 재정난은 더더욱 심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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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성동 신축교사 낙성식 기념 (1949.9.5)

옛 체신요원양성소 건물은 비가 오면 물이 새는 등 총체적으로 부실한 상태였지만 재단과 학생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재단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 결과 1948년 10월 학생건축위원회가 결성되어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교사를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재단 측에서는 오히려 공사를 방해하는 등의 횡포뒤끝를 부렸지만 끝내 교사를 완성시키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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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졸업증서 (1960.6.24)

최범술 재단이 쫓겨나고 다시 신익희가 학장으로 부임했지만 법적으로는 취임 승인을 받지 못했고 문교부는 신익희 학장 명의의 학위수여증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학생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고 결국 1회 졸업식에 신익희 명의의 졸업장을 받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후, 국민대는 6월 27일 휴교되었고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학교 당국은 1951년 4월 부산역 건너편 영주동에 있는 양재학원을 월세로 얻어 임시대학을 개강하였다. 52년에는 보수동에 있는 감리교회의 별채로 이전했고 절을 거쳐 교회를 학교 건물로 쓰는 아스트랄한 상황 , 53년에는 부민동의 한 산비탈의 밭을 구입하여 2층짜리 건물을 지어 교사로 삼았다. 2년여의 부산 피난 생활 중, 제2회·제3회·제4회 등 3차에 걸친 졸업식이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부산에서의 임시대학 운영을 마치고, 1953년 9월 1일 제2학기 개강을 다시 서울 창성동 교사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후, 재단의 분규[5]로 인한 재정난[6] 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의 대항마로 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 선생이 선거 유세 중 급사하는 바람에 구심점을 잃은 학교는 존폐 위기에 처했었다.

3.3 성곡의 학원인수와 정릉동 시대

국민대학은 내 생애에 가장 보람을 느낄 수 있는 투자라고 생각한다. 이익을 내는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투자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인재에의 투자, 국가에 필요한 지성들을 자유로운 분위기 안에서 길러내기 위한 투자라는 뜻이다. 국민대학교에 다니는 제군을 대할 때 나는 과거의 나를 대하는 것 같이 느끼곤 한다.
</br><<국민대학보>> 1968년 5월 20일자,「국민대학과 나」中

1959년 쌍용그룹의 창업주인 실업가 성곡 김성곤 회장이 해공 신익희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국민대학을 인수하면서 국민대학은 기적같이 명맥을 이어나가게 된다.[7] 그러한 이유로 국민대학교에서는 신익희와 김성곤을 학교 역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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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이 국민학원을 인수한 뒤에 준공한 창성동 교사(1959)

성곡이 국민대학을 인수한 후 신교사의 준공과 증축을 마친 결과 창성동 캠퍼스는 1,200여 평의 교지와 2,124평의 교사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규모로는 증가하는 학생 수에 비해 너무 협소한 것이었다. 더구나 창성동은 그 주변이 모두 주택가이고 바로 앞이 경복궁, 청와대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교지의 확장을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교사 이전의 필요성을 절감한 학교법인 국민학원은 새 캠퍼스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정릉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하기로 하였다.[8] 이 과정에서 학교본부와 초창기 졸업생들과 큰 마찰이 있었다.[9]

한편 1962년 군부가 집권하면서 대학 정비지침에 따라 학교가 폐교되거나 초급대학으로 격하당할 뻔 했으나 야간대학으로 간신히 살아남았고, 1964년에 다시 주간부가 부활하였다. 가끔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국민대학'내지 야간대학으로 기억하시는 이유가 이러한 이유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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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 제1호관(현 본부관) 기공식에서 연설하는 성곡(1969)

1965년부터 교지매입에 나선 국민학원은 총 44,100평의 교지 매입을 완료하고, 1968년 6월 정릉동 북악 캠퍼스 시대를 알리는 1호관(현 본부관) 교사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착공 후 2년 3개월만인 1971년 9월 준공식을 갖게 되었고 그 날 바로 2호관(현 북악관)을 기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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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 전경(1975)

1971년 9월 초순 현재의 정릉동 북악 캠퍼스로 이전하였으며, 새로운 교육환경을 바탕으로 1973년에는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하고 1976년에는 문교부의 실업대학인가를 받게 됐다. 실험대학인가는 문교부의 대학교육개혁 사업의 일환으로 엄격한 기준을 통과했어야했고 이를 통과했다는 것은 국민대학이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정부의 서울인구억제 정책에 의하여 한동안 단과대학체제를 그대로 유지해야했다. 결국 1980년 9월 29일에 가서야 문교부는 국민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허가했고 1981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함께 종합대학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3.4 중형대학을 넘어 대형대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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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대학승격을 축하하는 교문의 문구(1980)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국민대학교는 여러가지 변화를 시도하였다. 우수한 신입생을 유치하기 위해 입시전형 방법을 종전의 후기에서 전기로 전환하였다. 또한 공학관 증축, 3호관(현 과학관) 준공, 강의실 개보수, 단과대학 시설 및 사무실 증축 등의 시설을 확충하였다.

1980년대에는 한국사회에 민주화의 열기가 크게 고조된 시기였고, 그 결과 국민대 내에서도 여러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987년 11월 26일 교수협의회가 창립되었고 또한 이 해 12월 21일 국민대학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이 무렵 대학자율화조치와 함께 시행된 등록금 자율화 조치로 학교는 매년 학생측과 등록금 문제를 협의하게 됐고 생활협동조합이 탄생하여 현재까지 학내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교육부가 수도권 대학에 대한 정원 증원 억제 정책을 풀기시작했고 그 영향으로 국민대학교는 중형대학에서 대형대학으로의 발전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에 따라 여러 학과를 신설하고 정원을 늘렸으며 전임교원 수가 대폭 증가하게 되었다. 이같은 학교 규모의 전면적인 확대는 필연적으로 교육, 연구용 건물의 수요를 획기적으로 증대시켰고, 그 결과 성곡도서관 신축(1993), 본부관 · 조형관 · 공학관 · 학생회관(현 법학관)의 증개축(1994), 공학관 별관 · 영빈관 신축(1998), 국재교육관(현 국제관, 경영관) 신축(1999)이 이뤄졌다. 이러한 학교의 양적, 질적 성장으로 인해 국민대학교는 대형대학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3.5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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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이르어 국민대학교는 그 동안 쓰던 교표를 교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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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쓰이던 교표현재 쓰이는 교표

전통적인 교표는 세월이 흐르면서 약간씩 변화되긴 하였지만, '국민' 을 뜻하는 잎사귀가 대학이라는 글자를 받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국민대학교는 국민이 받들고 있는 대학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 성곡도서관의 오래된 책에는 이 교표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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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여의 준비과정을 거쳐 3가지 안 중 가장 높은 득표를 기록한 3안을 새로운 교포로 선정하고 2001년 5월 UI 선포식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의 전통적 五方正色(청,백,적,황,흑)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영문 머릿글자 (KMU)는 동쪽을 가리키는 청색이며, 이는 탄생, 어짊, 나무를 의미한다. 흙에 해당하는 황색과 남쪽을 가리키는 적색은 조형 하단부에 위치시켜, 전체의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은 흰 여백으로 남겨 놓았다. 오행에서 흑색의 서기(瑞氣)를 상징하면, 자존(自尊)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마음을 나타낸다.
</br>우리민족 至高의 美를 대학의 상징으로 승화시킨 조형으로서 전체적으로는 화합과 융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개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거대한 변화를 창조하는 과정을 시각화한 것으로서, 국민대학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이다.
</br>- 국민대학교 홈페이지

2000년 이후에도 조형관 증축을 시작으로 예술관, 생활관, 지하 대주자창, 7호관, 제2영빈관, 종합복지관, 국제교육관, 산학협력관을 신축하여 교사면적이 확대 되었다.

2008년 1월에는 국민대-파주시 제2캠퍼스 MOU 체결을 했으나 무산되었고[10] 그해 8월에는 로스쿨 유치에 실패하게 되었다. 지방할당때문에 탈락하게 된 것인데 자세한 내용은 로스쿨 항목 참고. 이 두가지를 이유로 등록금을 인상했으나 실패하여 학교는 망신만 사게 되었다.

인서울 대학교인데도 2012년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으로 선정되어 충격과 공포를 주고 있다. 이것이 화제에 오르자 학교측에서는 재빨리 사태를 덮기 위한 공지를 띄웠다. 하필이면 또 이 때 재학생들에게한 통화 5천원하는 ARS통화를 권하는 문자를 뿌렸고[11], 재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은 눈치가 그리도 없냐며 학교를 깠다.

취업률과 같은 지표가 문제[12]이지 재단이 돈이 없어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된 것은 아니다. 모기업인 쌍용그룹이 원래의 역할을 못한지 오래됐지만 국민대학교는 의외로 재정이 탄탄하다.2011년 대학적립금순위 물론 저게 예산은 과다 책정하고 결산은 적게 처리하면서 남긴 이월금이 십년 넘게 쌓인 결과물이다. 재단에 기업이 없는데 재정이 튼튼한 경우라면 거의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쉽게 말해서 저게 기부금이 아니라 죄다 학생들의 등록금. 그 쌓인 돈을 부실대의 오명을 벗기 위해 대대적으로 투입 중이다.

2013년 발표한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된 이후로 학교에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벌어졌고 그 결과 산학협력 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선정, 수도권대학 특성화 사업(CK-II) 최다 사업단 선정, 전자정보통신대학 컴퓨터공학부 SW 특성화 대학 선정, 대학구조개혁평가 A등급 선정이라는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문과대학, 사회과학대학 등의 정원·지원 축소와 평생교육원등 수익용 기관의 확대로 인한 학내 공간 재배치[13]와 같은 어두운 면이 있다. 결국 16년에는 프라임 사업으로 인한 문과대, 사과대, 자연대의 구조조정안이 발표되었다. 교육부의 대학 구조조정이 다시 강화되는 추세에서 국민대학교는 대격변기를 맞이했고 이 상황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국민대학교의 미래는 결정될 것이다.

4 학풍

유지수 총장 "모든 대학이 노벨상 좇을 필요 없어…사회가 원하는 실용인재 키울 것"
유지수 국민대 총장 “실용적 사고, 실용적 경험, 실용적 교육 돼야”

실용주의[14] 노선을 중요시 하며, 그러한 실용주의 학풍에서도 융합 학문을 강조한다. 따라서 복수전공이나 다전공, 부전공이 굉장히 널널하고(학점 제한이 전혀 없고, 그냥 수강신청을 해서 원하는 분야의 학점을 취득한 후에 일정 학점 이상을 취득하면 나중에 복수전공이나 다전공, 부전공을 인정해 주는 식이다.수강신청을 성공했을 때 말이다.

예체능 쪽에서는 수강신청 시에 복수전공 학생들에게 먼저 담당 교수의 허락을 받으라는 수업이 있는데, 본인이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체능/인문사회/이공계 간의 복수전공 시에는 담당 교수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만, 자신이 분명한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있다면 어렵지 않게 가능하다고.

다만 전과는 굉장히 어려운 편인데, 2학년 2학기 끝났을 때 단 한번 지원 가능하며 월기복학자는 제외된다, 전적과에서도 확실한 의지가 없다면 허락이 잘 나지 않고, 옮길 과에서도 이유가 합당치 않다면 경쟁률이 1:1 이하더라도 가차없이 불합격을 준다. [15]

교수들의 연구도 굉장히 자유롭다고 한다. 여러 교수들의 평을 빌리자면, '자신이 하고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준다'고. 그래서인지 일정 학풍이 있다기 보다는 자신의 주관이 확실한 교수님들이 많다. 정치/학문적으로 극과 극의 교수님의 연구실이 바로 옆에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학파'라고 불리는 학문 집단은 적지만[16], 학생 입장에서는 여러 관점에서 학문을 접근할 수 있으므로 결코 나쁜 일은 아니다.

결론짓자면, 실용주의 학풍을 가지고 있으며, 학문간 융합을 우선시한다. 이에 학생들의 수강을 폭넓게 인정해주는 학교이다.

5 학과

5.1 국민대학교/학부

국민대학교 학부
인문계열글로벌•인문지역대학사회과학대학법과대학경상대학경영대학
자연계열창의공과대학소프트웨어융합대학자동차융합대학과학기술대학건축대학
예•체능계열조형대학예술대학체육대학교양대학교직과정부

5.2 FM

FM
각 학부(과)별 FM 목록[17]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디자인/공예학과 관련 정보는 이곳으로.

(추가바람)

6 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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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북악캠퍼스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로 77에 위치한 국민대학교의 메인 캠퍼스.
북악캠퍼스에 대한 정보는 국민대학교/북악캠퍼스를 참고.

6.2 평창캠퍼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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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평창동에 들어서게 될 국민대학교 제3캠퍼스 조감도

6.2.1 개요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147-12일대에 조성 예정인 신 캠퍼스이다. 2015년 10월 21일 서울시에서 도시계획시설 변경결정을 가결되어서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갔으며, 제3캠퍼스에는 2~5층 3개동을 건축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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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보도가 나면서 평창동 "제3캠퍼스"라는 명칭이 사용됐는데, 많은 학생들이 '우리학교에 제2캠퍼스가 있었나'하며 당황해했다. 제1캠퍼스는 당연히 정릉동에 있는 캠퍼스를 지칭하며, 제2캠퍼스는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거 도로로 분리되어 있는 명원민속관 일대를 지칭하기 때문.

어느 단과대, 학과가 들어갈지는 2016년 현재 확실하지 않다. 종로구 아트벨리 사업과 연계되는 만큼 예술 쪽 분야라는 것만 정해져있다.

6.2.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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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림과학대학 실습장

2005년, 국민대학교는 교지를 확장한다는 목적으로 약 8200평 규모의 평창동 부지를 매입하게 된다. 본캠에서 북악터널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데 버스로 5분 이내로 갈 수 있기에 최적의 입지. 그런데 그 땅은 매입 당시 초·중학교 부지로 묶여있는 상태(...). 학교는 당초 부지 용도를 전환해 교지로 사용할 의도로 매입했으며 실제로 2007년, 학교는 서울시교육청을 설득하여 평창동 부지를 교지로 사용해도 좋다는 답변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부지 일부를 비오톱(biotope)[21] 1등급으로 지정하고 종로구에서도 캠퍼스 건립이 교통 혼잡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해 개발을 추진하지 못하고 결국 삼림과학대학 실습장으로 쓰고 있는 상태. 망했어요

2010년, 박진 국회 외교통상통일 위원장이 종로구 평창동 147-1에 위치한 건설폐기물장을 시찰하고 이 일대에 부지를 소유한 국민대학교 단과대를 유치하는 방안을 논의한적이 있으나 그 이후로 감감무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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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4년 4월, 종로구청과 평창동 캠퍼스 이전과 관련 상호 업무협약을 맺었다! 종로구의 예술마을 육성사업인 ‘아트밸리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것이다.

기존에 있던 삼림대 실습장은 어떻게 되냐는 학내자치언론의 질문에 유지수 총장은 땅을 갖고 있으면서 사용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실습장이라 이름 붙여놓은 거다. 저기서 무슨 실습을 하겠나.(...)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거기서 실습하고 있던 산림대생들은 이 말을 접하고 굉장히 분노했다고. 총장이 얼마나 산림대에 무관심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16년이 되자마자 산림대는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2015년 3월 서울시의회가 초·중등학교 부지를 국민대 부지로 변경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땅산지 10년만에 2015년 10월 21일 서울시는 제15차 도시계획위원회를 열어 국민대학교 제3캠퍼스를 조성할 수 있도록 하는 도시계획시설 변경안을 최종 통과시켰다.

6.3 김포캠퍼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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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캠퍼스 건립기획단 규정

그렇게 위에 서술한 평창캠퍼스가 만들어지는가 했더니 2016년 4월 29일, 뜬금없이 경기도 김포시에 캠퍼스를 만든다는 기사가 나왔다. 평창동에 만드려는 캠퍼스 계획이 어려워 김포캠퍼스를 추친한다는 언론보도가 났지만 학교 측에서는 평창캠과 김포캠은 별개의 일이라고 밝혔다. 파주캠퍼스도 MOU를 체결하고 취소된 적이 있고, 바로 위의 평창캠퍼스도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기에 이 김포캠퍼스도 지금 상황으로선 확실히 생긴다고 할 수 없는 상황.

인서울 대학교의 메리트를 의식해서인지 학생들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인 편. 페이스북 계정 '국민대 대신 전해드립니다'에서는 어느 과가 가느니 마느니를 놓고 서로 싸우고(...) 아예 북악캠퍼스 전체가 이전하는 걸로 오독하여 분개하는 사람이 나오는 등(...) 각종 촌극이 벌어졌다.

학교가 이렇게 뜬금없이 캠퍼스 확대 정책을 펴는 것은 정부의 대학구조개편과 무관하지 않다.

본래 국민대학교는
첫째, 돈은 몰아서 한방에 지르고
둘째, 부동산 투기는 절대 하지 않는 다는 나름의 불문율 하에 자금을 움직여 왔다.

하지만, 정부의 대학관련 정책 변경으로 인해 더이상 이러한 안일한 재정운영행태가 먹혀들지 않게 되자 적립금이 산더미처럼 불어나기 전에 일단 지르려는 성향이 비교적 강해졌으며,
캠퍼스 등 부동산 투자를 통해 학내 인원 감축에 따른 수입원 감소를 돌파해보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이다.

말인 즉슨, 정말 만에하나 김포나 평창동 프로젝트가 결과적으로 무산된다한다 하더라도, 학교는 결코 캠퍼스 확장정책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아마 반드시, 어떻게든 다른 곳을 새로 물색해서라도 새 캠퍼스 조성을 하려 들텐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평창동과 김포가 비교적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있다. 뒤늦게 부동산 시장에 뛰어든 국민대로서는 현재 다른 대학과의 경쟁에서 이보다 나은 입지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일전에 파주캠퍼스가 취소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국민대가 새로운 캠퍼스 조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하필 운좋게도 파주시장이 '국민대출신'이었던 것. 시장 뿐 아니라, 시의원이니 뭐니, 그 동네 행정세력 주축이 죄다 국민대 출신이었다는 썰이 있다. 따라서 파주에서는 전폭적으로 국민대를 지원할 예정이었고, 학교입장에서는 거의 '공짜'로 파주에 입성하는 쾌거를 맛볼뻔 했었다. 그런데 파주시장이었던 우리의 선배님께서 뇌물수수혐의로 잡혀가시는 바람에... ...

6.4 교외시설

그 외 각종 교외시설들은 국민대학교/교외 시설문서를 참고.

7 고시반·연구실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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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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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에서 운영되는 고시반 및 학부급 연구실은 다음과 같다.

7.1 우진재 (회계·세무)

운영목적은 공인회계사시험(CPA)이다.
세무사시험(CTA) 응시자도 입실은 가능하고 실제로 고시반 내 그 수도 상당하지만 공식적으로 CTA에 대한 제반지원은 없다. (동영상 환급 등에서 불이익을 받게된다.)
경영대 소속이지만 타과생도 입실이 가능하다.
국민대학교 고시반 중에 가장 체계화된 시스템과 지원라인을 갖추고 있다.
입실시험은 정기와 수시로 나뉘며, <http://cafe.naver.com/kmucpa> 에 시험일정이 공지된다.

글로벌센터 5층에 위치해 있다.

7.2 CPIM 연구실 (생산관리)

운영목적은 생산재고관리사(CPIM)이다.
사실 고시반이라고 불리기엔 그 규모가 너무 작은데다가 CPIM이 고시급 시험인 것도 아니라서 애매한 위치에 있다.
규모가 작은 이유는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애당초 소수정예를 지향하여 소수인원만 발탁하기 때문이다.
경영대 소속이다.

7.3 경상대고시반 (금융·통상)

운영목적은 관세사, CFA, FRM 등 실질적으로 경영·경상 계열의 모든 시험을 총 망라한다고 볼 수 있다....고는 하는데...
사실 이 고시반이 실존하는지의 여부도 확인이 안되고 있다.
경상대 소속이며, 타과생 가입 불가라고 한다. (이 조차 확실하지 않음)

경상대생이 확인 후 추가작성 및 수정 바람.

7.4 법고연 (법제)

운영목적은 본래 사법고시였으나 사법고시는 2017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 謹弔 法大
현재 각종 법관련 자격증(LEET, 행정고시, 노무사, 감평사, 공무원 등)을 목표로 한다. 단, 변리사 수험생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법대 소속인 만큼 나름 유명한 고시반이었지만, 어째 갈수록 정체성을 잃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실원들의 응시시험 종류가 다양해진 만큼 지원제도의 표준화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법학관 504호, 505호에 위치해 있다.

7.5 학언재 (언론)

운영목적은 각종 언론시험이다.
본래 '오리스'로 불렸으나, 2015년부터 '학언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학교의 관리하에 있지 않은 언론정보학부의 자치 '학회'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고시반이 아니다.
그러나 체계적인 시스템을 자발적으로 도입하고 꾸준한 스터디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가는 등, 고시반들의 그것에 준하는 활동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전공 구분 없이 실원을 받으나 4학기 이상(초과 아님) 재학한 학생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매해 3월, 9월에 신입을 모집한다.

그 외 정확한 운영시스템은 알 수 없다. 추가바람.

7.6 행정외무고시반 (행정)

운영목적은 행정고시와 외무고시였으나, 외무고시는 2013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사회과학대 소속이다.
사실 얘네도 현존하는지가 의심된다. 분명 2013년까지의 활동내역은 확인되고 있으나, 그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열람실이 존재하는건 확실한데 꼴을 봐서는 도무지 학교에서 제대로 관리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고 아마도 운영을 중도 포기 후 방치하는 상황에서 남은 시설만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이용중인 것으로 보인다. 그치만 아닐수도 있다.

확인 후 추가바람.

7.7 임용고시반 (임용)

2015년 개설. 매학기 초, 교직과정부 홈페이지에 모집하는 공지사항이 올라온다. 재학생만 가능하다.

8 총학생회

해방의 함성으로 진군하는 국민대학교 총학생회
</br>- 총학생회 현판

비권이 매우 강성인 학교다. 서울 시내 대학중 몇 안되는 '운동권 절멸 수준' 학교. 탄압이 심하고 아무리 지리멸렬이란 대학도 보통 문과대, 사회대, 정외과는 운동권이 잡기 마련이지만 국민대는 그런거 없다. 단 한 군데의 과에서도 운동권이 잡고 있지 못한 상황. 사실 과 단위에서 활동하는 운동권 자체가 없다[23]. 중앙동아리에 PD계열 단체 두어개가 있고, 지하에 숨어있는(?) NL이 일부 있지만 학생회를 수권할 만한 능력은 되지 않는 듯. 일부 NL은 쪽수는 많지만 수권 의지가 없다고 보는게 정확하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던 건 아니다. 다른 학교에 비하면 약하지만 나름대로 학생운동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캠퍼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성곡도서관, 국제관/경상관은 학생들이 데모로 얻어낸 건물이다. 그러다 2003년 조현실 학생회장 이후로는 운동권의 계보가 끊겼다. 조현실은 한총련 대의원 소속으로 학생회장 당시 난소염으로 투병하는 바람에 제대로 학생회가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로는 대개 비권들이 잡고 있는 듯.

2009년에 촛불집회를 나갔던 인원들이 주축이 된 '날개를 달아' 총학생회가 수권했지만 계속 계보를 잇진 못했다. 축제에 '조중동 밟기' '미친소 체험' 행사를 넣어서 학생들에게 욕을 엄청나게 먹었지만, 전반적인 평가는 괜찮은 편. 학교 커뮤니티에 누가 운동권 까려고 2009년 총학을 깠다가 역관광을 당한 사례도 존재한다.

2009년을 제외하곤 비권 총학이 쭉 잡고 있는데, 평가가 좋은 총학은 거의 없다. 다른 학교처럼 운동권이나 제3의 세력이 견제하고 있는 게 아닌, 기존 총학라인이 쭉 이어나가는 형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 축제나 기본적인 행사 몇개 빼곤 하는 게 없다. 단적인 몇 가지 사례가 2008년 총학은 교내 진입 시내버스 노선이 없어지는 걸 보고만 있었어야 했고, 2011년 총학은 전산실 프린터 인쇄비가 올랐음에도 별 대책없이 있다가 학생들이 들고일어나서야[24] 학교와 협상을 시작했다.

이런 경험 탓에 학생들 사이에선 운동권 학생회를 바라는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고 # 득표수도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 전반적으로 수권하기엔 세력이 미약한 상태.

하지만 2012년, 정부재정지원대학 지정 이후, 운동권(다함께)의 지속적인 병크폭발과 비권 학생회의 예전과는 다른 유연한 움직임으로 인해 운동권 세는 다시 줄어드는 상태.

그러나 2012년 본부관점거를 통해 총장이 학생들 앞에 끌려나온 사건이나 2014년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들고일어났던 사태를 생각하면 전투종족의 모습을 가끔 보여줄 때도 있다.

2013년까지만 해도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25]으로 일당독재급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2014년 9월 단과대 학생회장들의 궐기와 2015년 총학생회의 심각할 정도의 대대적인 무능으로 인해 총학생회의 힘이 엄청나게 약해졌다. 쉽게 말하자면 중앙집권제 국가에서 지방 호족들의 국가로 바뀌었다고 보면 될 듯.

8.1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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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된 '날개를 달아'와 기존 총학 라인인 '열정으로 그린'이 출마했지만, 결과는 날개를 달아 압승. '열정으로 그린'은 공대 학생회장이 정후보로 나왔는데.. 돈 관리를 개판으로 하던게 학교 게시판에 공개되고 기존 총학라인에 대한 거부감이 학생들에게 너무 컸던 터라 '날개를 달아'에 몰표가 갔다. 최대 선거구인 북악관에서 82:18로 '날개'가 이겼으니 말 다했다. 당시 총학생회나 단과대 관련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2008년 총학 라인이 얼마나 개판쳤는지 다 안다.

등록금 동결을 주 공약으로 삼았는데, 총학 취임 3일만에 학교에서 동결을 발표해버렸다. 총학입장에선 당황. 인하 투쟁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당시는 동결만 해도 감지덕지인 분위기라 동력도 안실렸고 총학생회 차원에서도 실수가 많아서 결국 흐지부지.

축제에선 '조중동 신문 밟기', '미친소 체험'이란 일반 학우들 입장에선 어이 없는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기로 해서 엄청난 반발을 샀다. 이걸로 아직까지도 까이고 있는 모양. 다만 시작 직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해서 축제가 취소되는 바람에 실제로 행해지진 않았다. 그래도 임팩트는 영원하다

전반적으론 학생복지위원회를 분리시키고 운동권 스러운 총학치곤 복지사업을 무리없이 잘 추진한데다가 돈관리를 매우 깨끗하게 해서(처음으로 학생회 결산내역을 학생식당 앞에 게시했다)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 최근 10년 간 총학중 2005년 '진짜 학생회' 다음 혹은 그와 버금가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26]

8.2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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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권 성향의 '우리 사이' 선본이 당선됐다. 날개를 달아 라인에서도 후보가 나왔지만, 상대적으로 인물이나 여러 측면에서 밀렸다는게 평.

비권이 되면 등록금이 오를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2010학년도 등록금도 동결됐다. 삭발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통에 학교측에서 걍 타협한 듯.

현재 셔틀버스 노선 확충에 나름대로 기여한 공로가 크다고 한다. 1112번 시내버스 없어진 이후 셔틀버스 확충 속도가 느렸는데, 많이 늘렸다고.

전반적으론 '크게 잘 한것도 없고 못한 것도 없는 학생회'란 평가다.

8.3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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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단선이나 잘해봐야 2팀이었는데 간만에 3팀이상 나왔던 선거였다.
'플러스 알파'가 당선됐는데, 공청회 당시엔 제일 발언이 어눌했다고 하나, 상대편 후보 '호감'(2012년의 그 호감 맞다)의 정후보 병역문제가 예비역들의 표심을 움직이면서 당선.

2년동안 동결시켰던 등록금을 2.5%인상하기로 합의해서 시작부터 욕을 미친듯이 먹었다. 동결이 대세가 돼버린 상황에서, 별 얘기도 없다가 갑자기 덜컥 인상에 합의해 버리고 발표하는 바람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더구나 학기 들어와서도 별 활동은 안하고 스폰만 줄창 받아서 광고부스만 늘리는 걸 보며 학생들이 불만 폭발. 게시판에서 심심하면 성토글이 올라왔다. 한번은 커뮤니티에 총학생회장을 취업 관련 수업에서 봤다는 학생글이 올라올라왔는데 엄청난 악플들이 달리는 일도 있었다고. 교수님들에게도 평가가 좋지 않았다. 올해 총학만큼 일 안하는 것도 첨봤다고 말씀하신 교수님도 계셨다고.

여름방학엔 단체로 놀러간 사이, 갑자기 전산실 프린터가 유료화된다는 공지가 떠서 또 까였다. 게다가 학교측에선 4월부터 총학과 협의했다고 발표했다. 결국 커뮤니티에서 6명정도가 총학생회와 중운위에 찾아가 진상해명을 요구했다. 총학생회의 해명은 '우리는 협의를 한게 아니라 계속 거부해왔다' 인듯. 실제로도 그런듯하지만 총학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이 커서 불만이 잠재워 지진 않았다.

불길이 확산되자 중운위에서 부랴부랴 협상에 들어가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봄으로서 불만은 수그러들었지만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결국 마지막 총학생회 선거까지 파행으로 이어지며 끝까지 욕만 먹다가 물러났다.
그런데 부총학생회장 페북엔 '니들이 한번 해봐'란 류의 글을 올리는 패기를 보여주셨다는 소문이

그리고 총학생회장이었던 사람은 2014년에 학교 본부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8.4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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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후반에 치뤄진 44대 총학생회 선거는 대파행. 선거 등록 4일만에 운동권 소속 선본이 경고 3번먹고 짤렸다(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정파에 따라 해석이 워낙 다르다). 이에 항의해서 해당 선본은 삭발[27]후 선거 거부 운동. 이 운동의 여파인지 선거가 막장이었는지는 모르지만, 1차선거에선 예년보다 투표율이 10% 가까이 하락했다. 결과적으론 '선거 연명부엔 사인했지만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지 않은 인원'이 전체 투표인원의 3%가 넘어가서 재투표 조치. 2차선거에선 3개 선본(물론 짤린 선본은 포함안됨)중 2개선본이 결선 진출해서 그럭저럭 넘어가나 했지만, 3차 선거에서 무효표가 쏟아져 나와 결국 선거 자체가 무효 처리됐다.
무려 1달간 진행된 선거(보통은 2주다)와 그 동안 벌어진 중앙선관위/각선본 vs 짤린 운동권 선본 간의 다툼덕에 학생사회에서 서로의 골이 깊어져만 간 상황.

2012년 3월까지는 단과대 학생회장 연석회의 형식(44대 총학생회 협의체, 회장은 경영대학 학생회장)으로 운영되었고, 3월에 보궐선거를 통해 비운동권 성향의 '호감'이 당선됐다. '다함께'소속으로 불리는 '99%의 역습'선본은 모두가 꼴찌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4팀중에 2등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4월부터 '호감'이 활동중인데 나름 열심히 한다는 평가가 우세한 듯. 특히 위에 서술된 복지관 열람실 문제 해결을 위해 뛰는 모습이 학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듯 하다.

6월엔 단식투쟁도 했는데, 학생자치권 보장, 등록금심의위원회/북악발전위원회 재개, 국민대장정 예산 보장을 요구했다고. 학교측에서 21시간만에 요구사안을 받아들여 단식을 풀었다. 고생한다는 의견이 다수지만, 한 편으론 '국민대장정 예산을 따내기 위한 쑈'라고 평가하는 쪽도 있음(사실 국민대장정 이외 다른 요구사항에 대해선 별 진전이 없지만 총학에선 따로 불만제기가 공식적으론 없는상황).

복지관 열람실 좌석시스템기를 설치하였다! 그동안 외부인의 잦은 출입과 일부 학생들의 자리 맡아놓기로 인해 문제가 많았는데 복지관 열람실을 이용하던 학생들의 오랜 염원을 해결한 것. 그러나 복지관 열람실은 2년 후에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병크도 존재하는데, 한 졸업생이 만든 시간표 프로그램을 총학생회 홍보국장이 자기가 다 만들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가 원 프로그램 제작자와 학우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선정시 발빠른 대응을 하지 못해 학우들에게 미친듯이 까였다. 이제까지 따놓은 점수를 단방에 잃었다는 느낌. 게다가 우연인지 뭔지는 몰라도 제한 대학 선정 발표시, 농활 사진을 대거 업로드 하는 바람에 학생들에게 더 까였다.

학생회에서는 토요일 입장 발표, 일요일 긴급 중앙운영위원회 소집, 화요일에는 북악발전위원회(대학본부와 총학생회의 대화채널)를 개최했으나, 학생들에게 만족스러운 대안을 내놓진 못하고 있다. 뚜렷한 입장 없이, 대책만 세우라고 몰아부치는 내용이 많아서 시원하지 못한듯.

게다가 이 상황에서 사물함 신청도 매끄럽게 처리되지 않아 더 까였다. 보통은 인터넷신청이었으나, 총학에서 총학생회실 방문신청으로 바꿔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많은 사물함을 신청하러 엄청난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나, 총학생회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 컴퓨터 한대, 학생 한명으로 수많은 학생들을 응대했고, 학생회비 납부자 확인 등 복잡한 과정을 한군데서 하려니 부하가 걸리는 바람에 커뮤니티엔 총학 까는 글로 폭주했다. 거기다가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그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옆에서 총학 간부 몇명이 신경도 안썼다고 하여 학생들은 더 분노폭발.

결국 부실대학 사태때 총학의 대응은 용두사미로 그쳤다. 되려 일부 운동권 학생들이 단독으로 10월말에 본관을 점거했는데 이때 지대로 운빨이 맞아떨어지면서[28] 교원 확충에 대한 약속을 받아냈다.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그야말로 찌질함의 극을 달렸는데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선거 도중에 의견차이로 경영대 학생회장이 법대 학생회장을 폭행[29]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법대 학생회장이 당시 선거관리 문제(잡음이 많았다)와 이 문제를 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장(총학생회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렇게 되자, 총학생회장과 일부 중운위원이 그 법대 학생회장을 모함하는 글을 공식 페이스북에 올려버렸다! 그 내용에 따르면 법대회장은 중운위 몇번 빠졌고.. 뭐 이러한 자잘한 신변잡기 내용들. 결국 법대 학생들을 중심[30]으로 여론이 대폭발해서 항의댓글만 300개가 넘게 달리는 대형 사태가 발생해버렸다. 결국 몇시간만에 글은 지워지고 개망신당하면서 깨갱.

8.5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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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선거에선 비권 성향의 '오픈투게더'와 운동권인 '99%의 반격'(다함께), '희망설계사'(민대협-NL) 3개 선본이 나섰다. 부실대학 사태 등으로 운동권 선본들이 어느 때 보다 당선가능성이 높은 선거였으나, 본인들의 삽질로 결국 오픈투게더 선본이 무난하게 당선.

학교가 나름대로 위기였고, 그 이유가 운동권들이 지적하던 문제였기 때문에 적절한 복지공약만 들고 나왔어도 운동권들이 쉽게 이길선거였다. 하지만 운동권들은 정세파악을 잘못하고 오로지 학교와 싸우겠다는 공약만 들고 나오고 복지공약은 거의 전무했던 터라 중도층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게다가 '희망설계사' 선본은 현재 학교상황과 별 관계 없는 남북문제에 관한 공약을 다수 들고나와서 압도적인 표차로 꼴지 확정. 심지어 여성을 위한 생리휴가제를 학교에 도입하려 했으니 대토론회에서 학생들에게 까인건 덤. 다함께 선본은 자신들 최다인 약 35% 지지를 받았을 정도이니, 만약 중도층을 잡을 수 있는 공약만 들고왔으면 충분히 이겼을 것이다.

오픈투게더는 1년 동안 나름대로 조용한 가운데, 큰 문제 없이 이끌어왔다. 등록금도 약 3% 내렸으며, 복지사업도 무난하게 했고, 공약이행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 총학생회 어플도 만들어져 배포 되었다.[31] 특히 축제의 경우 부총학생회장이 대중음악 작곡가라서 그런지 라인업이 꽤 괜찮았다[32]. 축제 프로그램도 구성이 '역대급'이란 평이 많았다. 다만 축제기간에 비가 오는 바람에 똥망...

총학이 열심히 했다기 보단 학교가 알아서 정신차리고 일을 해서 나름대로 지표도 개선됐고 학내도 조용조용하게 1년이 지나갔다. 이때문에 상대적으로 학내 운동권 세력들은 상당히 악화. 최근 서울 주요 대학 비운동권 학생회 스타일이 운동권의 의제를 받아들이면서 급진적이 아닌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유행이기 때문에, 우리학교도 이를 받아들인 결과 조용하게 1년이 지나갔다.

다함께의 '수장'이었던 법대 모 학우가 학내 운동을 그만두고 다함께 중앙조직으로 옮겨가면서 한동안 총학생회 선거도 상당히 조용해질 줄 알았으나 역시나 선거는 파행. 실상은 이랬다. 원래 중앙선관위가 구성되면 위원은 원칙적으로 위원직을 사퇴하더라도 선거출마는 불가하다. 그런데, 중선관위 구성과 단대 학생회장이었던 한쪽 후보자들의 사퇴시점이 엉키면서 선거세칙을 위반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상대방 후보가 후보자격없음을 주장했지만, 중선관위에서 문제없다고 얘기하면서 선거는 속행. 그러자 법대 출신[33]이었던 상대방 후보는 법원에 '선거 후보자 자격 확인 소송'을 걸어버렸다. 하지만 이 심리 결과가 선거 끝나고 나오는 바람에 유야무야. 그 상대방 후보는 법원 판결을 믿었던지 선거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으나 결과가 저렇게 나와버려서 낙동강 오리알 행.

8.6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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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필.

개념을 리필해야 할 필요가 있는 총학생회. 역대급 병크의 종결자.[34]
관련링크. 그냥 답이 없다.
병크가 얼마나 많은지 누군가 이렇게 정리도 해놨다.

본래 총학의 활동에 별반 관심이 없는 국민대학교 학생들의 타고난 성품으로 인해 1분기 평판은 그냥저냥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2014년 4월 중순경
학생예비군에게 제공 지원하던 버스지원제도를 철폐하려 시도하여 물의를 빚었다.국민대학교에는 3,906명의 학생예비군이 존재하는데, 이중 버스를 탑승하려는 예상 소요인원이 500~1000여 명 정도에 불과하여 전체 학생 수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이 작년 대비 학생회비가 300만 원 정도 적게 걷혀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논리 자체에는 그다지 큰 무리가 없으나, 전적으로 남성 학생들에 대한 차별로 비추어질 수 있는 일을 너무 가벼이 처리했다는 지적이 있다. 안 그래도 여성휴게실 문제에 대한 남학우들의 잠재적인 피해의식이 깔려 있는 상황에서 군대에서 개고생하고 돌아온 복학생들에 대한 복지를 삭감하려 하다니... 결국 이는 실질적 수혜자의 수와는 상관없이 남학생 전체에 대한 도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2014년 4월 말경
희대의 사태가 발생한다. 학생들에 대한 사전 동의절차 없이 단원고 학생들에게 학생회비 1000만 원을 기부해버리고 만 것. (정확히 말하자면 단원고의 사고자 유족이 아닌 단원고등학교에 기부를 하였다) 사실상 절차의 문제는 없었다. 총학생회가 독단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전체학생대표자회의를 통해서 결정했던 사항이기 때문에 회칙 상으론 전혀 문제될게 없었다.[35] 다만 이번 사건으로 인해 학부/과 학생회가 제대로 의견수렴을 하지 않는다는 여론이 확실하게 퍼져버린다.

좋은 뜻에서 기부했다는 점은 참작할만 하나, 돈이 없다는 이유로 예비군 버스도 없애버리려고 한 총학의 행태를 비추어 보면 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의견이 다수. 이후 총학은 급히 관련 회계내역을 공개하고 여론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2014년 7월 초경
총학이 죄다 농활 감독하러 빠져있을 때, 우리의 자랑스러운 국민대학교는 학생들의 학비를 바탕 삼아 콘서바토리 증강 계획을 실행할 꿈을 펼친다. 학교측이 종합복지관 열람실을 싹 걷어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크고 아름다운 평생교육원 강의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을 발견한 총학은 급히 회의를 소집하였으나, 리필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소통"의 부재로 학생들의 의구심과 불만은 계속 증폭되어가기만했다. 너무 두루뭉실한 대책방안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관한 학생들의 질문에는 제대로 대답하지도 않았기 때문. 심지어 한달간 대답을 못 받은 경우까지 등장했다.

이 와중에 계속되는 복지관 박해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지 동아리연합회 부회장(권태환)이 총장과의 면담과 학교 측의 각성 및 결정사안 시정을 요구하며 1인 단식시위를 하는 사건이 발생했고,링크 거기다 관리처장, 학생처장, 교무처장을 비롯 총장이 직접 동아리연합회 부회장을 만나서 "앞으로 열람실을 비롯한 학생자치공간에 대해서는 학생자치기구와 사전 협의를 거치도록 하겠다"고 약조, 총학생회는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36]

더욱이 종합복지관 열람실 철거는 학생들에게 본격적으로 소식이 알려지기 약 한 달전(6월) 학교 옴부즈 오피스 홈페이지에 "복지관 열람실 냉방 문제"에 대한 요구사항의 답변으로 최초로 알려졌으나 총학에선 당시 이를 인지하지 못하였고 결국 농활 중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변명과 함께 손 쓸 사이도 없이 일이 진행되고 말았다. 또한 위에서 기술한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권태환이 학생처장과의 면담과정에서 성곡도서관 바로 옆에 똑같은 모양으로 찍어내고 있던 건물이 도서관이나 열람실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될 것이라는 오프-더-레코드 사실을 알아내고, 이를 국민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폭로함으로써 이 과정에서 총학은 다시 한 번 무능력함을 보여줬다.

2014년 8월 말경
학교측이 종합복지관 열람실을 폐쇄해 버리고, 전산실 인쇄비까지 올려버리는 사건이 발생. 그리고 총학은 부재중이었다! 알고 보니 총학은 그간 노고를 스스로 치하한다는 학교측의 포상을 받아서 말레이시아로 휴가를 떠났고, 그 사이에 학교측이 중요 사안들을 다 처리해 버린 것(!!).

총학이 간 말레이시아여행은 단순 포상이 아니라 우리학교와 말레이시아 학교 간에 국제교류프로그램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정식으로 공고를 내고 국제교류프로그램에 참가할 자격이 되는 학생들을 선발해서 해외로 보내줬어야한다. 그러나 학생지원팀은 공고를 내리고 학생을 선발하는 대신 총학을 말레이시아에 그냥 보내줌. 등록금으로. 총학은 이런 학생지원팀의 제안을 받아들임. 총학 집행부와 교직원 등이 말레이시아로 떠남. 2013년 총학생회 오투가 말레이시아 학교에서 찍은 사진으로 인해 끝까지 발뺌하다가 국민저널에 들킴.

총학생회가 포상 겸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익을 대변해 학교와의 교섭을 담당하는 총학생회가, 학교와의 싸움이 한창 진행 되어야 할 시점에 스스로의 노고를 치하한답시고 놀러간 것도 웃기는 일이고, 그걸로 모자라서 싸워야 할 학교측에게 돈을 받아서 갔기 때문에 더 까였다. 이에 총학은 귀국 하자마자 칼같이 사죄문을 공지했다.일단 읽어나 봐라. 보다시피 사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시 한번 공약하였으나... 학생들은 이미 댁들은 임기 끝나가잖아요, 하면서 계속 깠다.

이 문제에 대해 국민저널은 2009년 총학생회 '날개를 달아' 관계자의 인터뷰를 통해 "총학의 교비지원 말레이시아 여행은 그동안 관행적으로 있어왔으며 학교와 대립각을 세우는 총학에겐 학교 학생처에서 관련된 지원이 없어 (09년 총학은) 여행을 가지 못했다"라는 주장을 실은 기사를 내기도 하였다. 관련링크

결국 이 시점에서 학생들의 불만은 정점에 달했고, 총학은 장소불문(국민인닷컴, 국민대갤러리, 총학페이스북) 레알 지구종말이 연상될정도로 까였다.

하필 등록금 시즌과 맞물려, 학생회비를 안내는 학생도 다수 발생. 낸 놈도 환불받겠다고 으름장 놓는 판이다. 학내 신문사들은 물론, 오마이뉴스에서도 이에 관한 기사를 썼다.

그제서야 위기를 느낀 학생회는 소통의 부재를 개선하겠다며 무려 국민대 갤러리에 고닉을 파고 공지문을 올리셨다.관련링크

그리고 결국 2014년 11월, 새로운 총학생회를 뽑는 선거가 벌어졌고, 모든 후보의 공약엔 우린 말레이시아에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 등 후임들에게까지 현재진행형으로 까이는 중.

이렇게 보면 도대체 1년동안 뭐했나 싶긴 하지만 잘한게 없는건 아니다. 그동안 문제가 많았던 선거세칙을 선진적으로 깔끔하게 바꿔서 정책선거가 가능하도록 했다.[37] 물론 제도가 바뀐다해서 무조건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바로 아래에 서술될 학생회가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8.7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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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학생회를 가장한 축제 기획단
무능한 리더를 뽑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준 사람들.
공약에 대해선 항상 알아보고 논의해보기만 하는 총학.
등록금이 동결되고 계절학기 비용이 인상되는데 학교편을(!) 들어주는 기괴한 집단[38]
사상 초유의 예산안 3회 연속 부결 신기록

2014년 11월 말에 치뤄진 소통 vs 역전 대결에서 소통이 44.19%의 지지율로 35.56%의 역전을 이기고 총학생회로 당선되었다. 법대 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중 참고로 경영대도 문제긴 했다. 이번 소통 당선에 가장 큰 캐스팅보트는 법대와 경영대였다. 예상외로 미필에 대한 인식이 나쁘다는 공대에서조차 역전의 지지율이 높았다.!!![7]

불행하게도, 2015년 총학의 1학기 평가는 불통의 시대였다.

1학기 불통의 역사는 학기초부터 시작됐다. 3월부터 시작되었다. 3월 19일 전학대회에서 예결산승인이 부결되었다. 총학은 3월 예결산 심의도 대충 준비했다.. 국민저널에 따르면 이월금 예산을 잘못 적었다고 한다. 기사참조[8] 그 결과 부결되었다. 또한 4월 새내기 문화제에서 단과대 회장들이 불참했다. [9] 심지어는 5월 총학 지인이라는 사람이 국대전을 통해 '학생들에게 잘못을 물었다.' [10] 이건 뭐하자는 건가... 그리고 엄청나게 심각한 사실이 발견되었는데, 1학기동안 옐로우 아이디 발송 내역이 1건이었다. [11] 일해라 총학!

결국 6월 총학단독 시위를 기점으로 논란이 가속화되었다.

6월 초 기말고사 기간에 갑작스럽게 총학이 본부관 앞에서 시위를 했었다. 이유는 등록금 문제가 아니라 국토대장정 행사 예산 지원 중단에 대한 피켓시위였다. 사진까지 올라왔다 참고적으로 필요한 예산은 1억 5천만원이다. 당연히 이 시위는 많은 학생들의 동감을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 학교 내 학생들에게 민감한 사안(계절학기 등록금 및 초과학기 등록금 인상 등)이 아니라 국토대장정 행사에 대한 피켓시위였다. 총학은 이를 학생들의 권리라 주장하면서 시위를 했지만 일반 학생들이 보기에는 총학이 준비한 행사가 뒤틀려진데에 대한 불만의 표시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고로 국민대장정의 참가인원은 2013년 기준 약 100여명.

총학 측은 총장과의 면담결과를 통해 2015년 삭감된 국민대장정 예산의 "재편성 요구" 아닌 "삭감된 예산의 장학금 편성 및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를 요구"한다고 발표하였다. 관련링크

총학의 국토대장정 시위 이후 각 단과대별 학생회장들 명의로 학교의 일방적인 정책 및 예산집행의 중단과 총학의 일방적인 행보에 대해 항의하는 성명을 밝표했다. 댓글로 다른 사례가 제보됐다 또한 사회과학대학 회장 이우람이 지금까지 총학의 행보를 국민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12]


또 총학은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았다. 등록금 인상에 대해서 총학은 아무것도 안했다. 진심으로 이것들이 총학이 맞는가? 학교 측은 '계절학기 등록금이 수 년간 동결', '타 학교와 비교해서 저렴한 금액'의 이유로 학점당 9만원(1만원/11% 인상)을 제시하였고 초과학기 등록금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인상을 발표하였으나 총학은 학교측의 입장을 전달하고 일부 학생들의 의견만 청취하였을 뿐 인상 반대나 저지를 위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총학 측 게시글
(위에 적은 학교측 통보입장은 총학 측 게시글을 보고 적은게 맞다.)

더 웃긴것은, 학생의 편에 서야 할 총학이 페이스북 계정에 카드뉴스를 올려 학교측의 입장을 대변해줬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진짜로 일각에서 어용 총학을 의심해야 한다는 시선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2학기에는 그래도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건만...

총학생회 예산안이 무려 3회 연속 부결되는 대형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이전의 2014년 총학도 무능으로 인해 욕을 먹었지만 예산안만은 별 이견없이 통과된 것에 비해 이번에는 무려 3회 연속 부결. 심지어 첫째와 둘째 표결에선 찬성이 단 한 표도 나오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13] 여기에서.[39]

8.8 2015년 학생회칙 전면개정

그나마 소통의 유일한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대대적인 회칙개정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200페이지가 넘는 양의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양도 많고 세세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것을 작성할때 법제처 발간 법령입안지침서를 참조하였고, 각종 법과 타학교 회칙을 참조하였다고 한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기록물관리위원회라는 기구를 신설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과거에는 회칙을 대의원이나 소수의 인원만이 볼 수 있었는데 비해서 이제 회칙을 그 누구라도 볼 수 있게 공개되었다. 이는 학생회의 투명한 운영을 위한 조치라 볼 수 있다. 회칙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있다.

  • 의결기구

국민대학교 총학생회 회칙에 따르면 의결기구는 학생총회, 전체학생대표자회의, 중앙운영위원회가 있다.

학생총회의 개회정족수는 이 회의 회원 과반수로 규정하고 있다.[40] 그러나 너무 인원이 방대하기 때문에 보완책으로 비상총회가 있고, 비상총회의 개회정족수는 1000명 이상이다. 또한 학생총회의 성립의 어려움을 보완하기 위하여 학생총투표가 있다. 비상학생총회는 최근 프라임사업관련 학교 학사개편안을 두고 2016년 비상대책위원회가 개최하였다.[41]

전체학생대표자회의는 대의원으로 구성되어있는 의결기구로, 학생총회 다음의 의결기구라 명시되어 있다.[42] 여기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고 있으며, 의결할 수 있는 사항은 광범위 하다. 회칙상 매 분기별로 1회칙 개최하도록 명시되어있으며, 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졸업생이나 일반학우들의 참관이 많은 편이다.

중앙운영위원회는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동아리연합회장,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졸업준비위원장으로 구성된 의결기구이다. 회칙상으로는 매주 1회씩 개회되도록 되어있으며, 개최일자는 중앙운영위원회가 정하기로 되어있다. 통상적으로 월요일에 개최되어 왔다. 국민대학교 총학생회의 특성상 총학생회장단의 권한이 방대하여 사실상 총학생회장에 의해 움직이는 기구였으나……2014년, 2015년 항명사태를 계기로 지금은 거의 총학생회장의 독주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과거에는 의정부였다가 지금은 비변사 정도

  • 집행기구

국민대학교 총학생회의 집행기구는 총학생회장단과 중앙집행부로 구성되어 있다.

총학생회장은 회칙에 의하면 이 회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고 중앙집행부의 장이 된다. 총학생회장의 임기는 1년에 1회에 한해 중임이 가능하다. 또한 총학생회장은 회칙에서 정하지 않는 중앙집행부서를 정하는 중앙집행부운영내규를 중앙운영위원회의 동의를 받아 개정 할 수 있다. 중앙집행부의 구성은 총학생회장 맘

부총학생회장은 대내적으로 이 회를 대표하고 총학생회장을 보좌한다. 과거에는 그 존재감이 없었으나 2015년 개정을 통해서 존재감이 부각되었다. 대표적으로 부서장 및 중앙집행부원 임명 거부권이 있다. 뭐 설마 그럴 일이 생길거라고는 생각도 안되지만 [43]

탄핵 이번 개정에서 가장 획기적으로 변한 부분이었다. 과거 총학생회장단의 탄핵은 학생총회를 통해서만 가능했었는데 이는 그냥 사조항이었다.[44] 2015년 개정으로 인해 탄핵요건이 학생총회에서 전체학생대표자회의 재적대의원 5분의 4로 감소되었다.[45] 당연히 이로 인해서 과거처럼 총학생회장이 배째라 나 몰라 하는 방식은 없어졌다.

중앙집행부는 회칙에 따라 3개의 부서를 강제하고 있다. 사무국, 정책국, 성평등국이 그것이다. 사무국은 회계출납을 담당하고, 정책국은 각종 정책을 수립한다. 마지막으로 성평등국은 교내의 젠더문제를 담당한다. 이 3개 부서를 제외한 나머지 부서는 총학생회장이 정하는 내규에 따라 구성한다.

  • 산하기구

총학생회 하위에 산하기구를 둔다.[46] 단과대학학생회, 학부학생회, 학과학생회, 전공학생회, 동아리연합회가 이에 속한다. 각 기구는 독립적인 회칙과 회장을 구성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 특별학생자치기구

말은 거창하지만 그냥 졸업준비위원회밖에 없다. 졸업준비위원회는 각종 업무를 수행하는데, 졸업사진 촬영 등의 업무가 있다. 거기에 졸업준비비가 매년마다 걷히기 때문에[47] 돈이 제일 많은 기구라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1년에 1억원을 돌린다는 애기가 있을 정도다.

당연히 돈이 많이 돌면 이런 저런 구설에 시달리기도 한다. 2013년에 졸업준비위원장이 비리를 저질렀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중앙감사위원회가 소집된 적이 있다. 감사 결과 대규모로 헤쳐먹은 정황은 없었지만, 회계가 방만하게 운영되어온 사실이 확인되어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집중포화를 당했다. 이후 2013년 가을에 당선된 졸업준비위원장이 회계 부정 의혹을 씻기 위해 자진해서 중앙운영위원회에 출석하고[48] ,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결산 심사를 받기로 하여 그 이후론 별 문제 없이 잘 운영되고 있다.

  • 독립기구

독립기구란 학생회 내에 설치된 상설독립기구로 총학생회의 어떤 조직과 연계되지 않는 기구를 말한다. 지금은 기록물관리위원회 하나만 있다.

2015년 하반기에 발촉한 기록물관리위원회는 학교의 모든 기록물을 종합 및 정리를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자료라는게 남아있는게 없어서 자료를 모으는데 고생했다고 한다. 그래도 기존자료를 정리하고 체계와 양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초대 위원장이 기구만 만들어 놓고 외국으로 날라버려서[49] 해체될 뻔 했으나, 미남 2대 위원장의 특출난 능력으로 기구가 안정화되고 있다고 한다. 다만 만성적인 인력부족이 문제가 있다고 한다.
  • 특수기구

특수기구는 한시적으로 특정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를 말한다.[50] 특수기구는 임시기구라 보면 이해하기 쉽다. 대표적인 기구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규정개정위원회, 감사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총학생회장단 선거를 관리하는 기구로, 선거업무를 중점으로 본다.[51]

규정개정위원회는 2014년과 2015년에 한시적으로 설치된 적이 있는데, 엄청난 개정을 이루어냈다. 2014년에는 선거세칙을 전면 개정했으며, 2015년에는 전체 회칙을 싹 갈아 치웠다. 지금은 해체되었지만 기존의 70개 밖에 되지 않았던 회칙을 무려 300개 조항으로 만들었다. 양만 방대해진 것만 아니라 행정시행세칙이라든지 각종 서식을 규정으로 만들어 놓아서 정말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물론 과연 그렇다고 좋은 회칙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타와 비문이 많고, 학생회의 체계를 완전히 바꾼 것은 아니기 때문

감사위원회는 2013년 졸업준비위원회 감사를 진행하기 위해 1번 설치된 적이 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총학생회가 구성되지 않았을때 임시로 설립되는 기구다. 2010년 이후로 2번 운영된 적 있다. 2011년 가을 선거(윗 항목 참조)가 무산되서 경영대 학생회장이 비대위원장을 맡아 이끌었으며, 2015년 말에도 선거가 파토나서 자연대 학생회장이 비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특히 2015년 말에 설립된 비상대책위원회는 설립직후 총장 부정연임에 반대해 농성을 진행하고, 학기 초엔 구조조정에 반대해 1주일동안 본부관을 점거해 총장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 냈다.[52]

8.8.1 학생회칙의 문제점

대대적인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1. 전학대회 대의원 대표성 문제
전학대회 대의원당 대표하는 학생숫자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조형대는 대의원 7-8석을 차지하는데 비해 그에 비해 규모가 큰 사과대는 6석에 그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법대도 마찬가지인데 법대는 겨우 3-4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대의원의 자격을 각 과별로 할당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이다. 물론 과거에는 법대 학회장도 전학대회에 참여했지만 사실 전학대회 대의원 자격에 대한 명시가 정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랬다 저랬다 했던것도 사실이다. 결국 전학대회의 대의원이 대표하는 학우들의 격차를 줄일 필요가 있고, 당연히 이를 위해서 정확히 대의원의 숫자를 배정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금 학생회는 학과 내의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지 못하고 있다. 학생회의 성격의 변화도 있고, 학생회구성원들의 책임도 있지만 또한 학우들의 시선이 바뀐것도 크다. 일명 과내 아싸를 학생회가 커버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당연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까지 커버하는 대안을 마련할 필요도 있어보인다.

2. 부서설립권한의 위임
총학생회 부서장은 각 학과 학생회장에 준하는 대우와 장학금을 지원받는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학생회장에게 전면 위임하면 당연히 학생회장이 자기 마음대로 부서를 설립해 막대한 장학금을 타갈수 있다. 정부조직법도 국회의 승인을 받는데, 당연히 이는 문제가 있다.

3. 대의원의 책임 규정권한 전무
현 회칙에 의하면 전학대회 대의원은 회의에 참여하지 않든, 회의 중 난동을 피우든, 같은 말을 또하든 ,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제재하는 수단이 없다. 당연히 이때문에 대의원이라는 자들이 전학대회에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전학대회에 상정된 안건을 미리 검토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현장에서 안건을 검토하는 경우가 대다수, 결국 당연히 회의는 길어지고 늘어질 수 밖에 없다. 학우들의 등록금으로 마련된 장학금을 타는 학생회장이자 전학대회 대의원이라는 자들이 말이다. 인간은 견제가 없으면 방종해진다

4. 총학생회장의 전학대회의장직 겸직
이게 왜 문제냐면 의장이 제대로 회의 진행을 감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장이란 의사진행을 총괄하면서 적절하게 대의원들의 발언을 통제해야한다. 사실 과거에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식물전학대회였으니 그러나 2014년 2015년의 총학의 병크로 인해 대의원과 총학생회장간의 각을 세우면서 의장이 의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해버렸다. 문제는 2016년 운동권이 당선되면서 이는 계속 유지되는 듯하다. 결국 총학생회장과 대의원들간에 대립각이 세워지면, 의장이 이를 중재해야 하는데, 총학생회장이 의장직을 겸직하면 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증명된 상황이니 의장직을 분리할 필요성이 있다.

5. 감사의 필요성
모든 학생회의 문제점은 그놈의 민주집중제로 인해 견제서력이 없다는 것이다. 자세한건 민주집중제참조. 일개 비영리단체부터 시작해서 모든 단체는 감사라는 직책이 있다. 이 감사는 현 집권세력 또는 운영진이 제대로된 업무를 진행하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학생회에는 그런 감사라는 직책이 없다. 당연히 학생회가 잘못을 해도 이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53]. 당연히 이를 아는 학생회장들은 맘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배째라는 방식을 많이 취했는데, 결국 이는 학생회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를 하락시켰다.[54]. 그러니 감사라는 직책이나 기구는 필요하다.[55]

8.9 2016년

2015년 가을 총학생회 선거는 무산됐다. "메아리" 선본이 단독으로 출마했지만 찬성률 50%를 넘기지 못하여 재선거를 하게 됐다. [56]

2007년 가을 선거 이후 무려 8년만의 단선이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당선되고 끝날 것이라는 것이 당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후보의 경력문제와 정후보 본인의 잘못된 처신, 외부적 상황 등 3중고를 겪으며 국민대 총학생회 역사상 최초로 찬성 과반을 얻지 못해 탈락하고 말았다.

먼저 후보의 경력문제가 선거를 휩쓸었다. "메아리" 선본의 정후보는 2014년 총학생회 “리필”의 국제교류국장이었을 당시 말레이시아를 교비로 다녀온 것이 문제가 됐다. 당시 총학생회를 탄핵 일보직전[57]까지 몰고갔던 당사자가 선거에 출마했으니 문제가 안되는 것이 이상했다.[58][59]

그런데 여기에 2015년 가을 선거는 총장 연임 문제로 홍역을 앓던 시기였다. 그 당시 2015년 총학생회가 정말 위에 보면 죽도록 까이지만, 11월 데모는 총동문회와 잘 기획해서 500명이 넘는 인원이 본부관에 모이는 등, 학교에 대한 투쟁이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60]. 이런 상황에서 교비로 말레이시아를 갔다왔다는 메아리 정후보의 경력은 더 크게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선거 당일 '국민대 대신 전해드립니다' 계정에 올라온 중국어 욕설 파문의 영향도 컸다. 안그래도 부정적인 이미지에 결정타를 날린 것.

결국 개표결과 찬성이 50%를 얻지 못해 탈락했고, 선거는 무산됐다.

이에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자연대 학생회장을 비대위원장, 사회대 학생회장을 비대위 부위원장으로 뽑아 총학생회를 대신했다. 비대위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12월 18일에는 총장 연임에 반대해 본부관을 일시 점거하고, 3월에는 구조조정을 반대하며 1주일 동안 본부관을 점거하는 활약을 펼쳤다. 근 10년간 제대로 된 점거[61]가 없었던 상황에서 무려 1주일이나 버티며 투쟁을 이어나갔다. 결과는 비록 만족할 만한 수준이 못됐지만, 어려운 여건을 생각하면 선방했다는 평가[62]

2016년 3월 30, 31일에 재선거가 치뤄졌다. 그 결과 "다온" 선본을 꺾고, "공감" 선본이 당선되었다.

"다온" 선본은 2015년에 단과대 학생회장을 했던 사람들이 출마했고, "공감"은 운동권[63]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다온의 압승이 예상[64]되었으나, 모두의 예상을 꺾고 공감이 당선되면서 개표장을 충격과 공포로 몰고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

구조조정으로 인해 본부관 점거를 이어나가던 상황이 운동권 색채가 강했던 공감선본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운동권 선본임에도 남학생 휴게실 신설이라는 공약을 신설하는 등 복지 공약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비권 지지세가 강한 공대 표심을 잡았다는게 개표 후의 분석. 개표 당시엔 예상치 못한 결과에 언론 3사와 양 선본, 관전하던 학생처장까지 단체 멘붕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8.9.1 2016년 축제 라인업 논란

5월초 축제 라인업이 공개된 이후, 총학이 무능하다는 논란이 시작되었다. 특히 올해는 예년과 다르게 축제라인업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는데, 국대전에 계속해서 다양한 가수섭외요청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5월 16일 드디어 총학의 라인업이 공개되었다. 문제는 총학의 라인업에 유명그룹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65] 결국 이는 몇몇 학우들의 불만을 일으켰고, 결국 그 불만은 국대전에서 터졌다.

국대전에서 언제부터 시작된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라인업이 공개된지 일주일동안 끊임없이 올라온 주제였다. 국대전에서 폭발한 학우들의 불만을 요약하자면 타 대학은 유명그룹을 잘만 불러오는데, 왜 우리학교는 그렇게 하지 못했냐!!였다. 그러면서 2014년, 2015년 축제 라인업을 비교하였다.[66] 문제는 해당년도 학생회의 업적(?)이 정말 크고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문제는 축제라인업 구성에 대한 현 총학에 대한 문제에서 "학생회는 학내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도 축제만 잘하면 되는 것인가?"라는 문제로 이어졌고 이를 두고 수많은 학우들의 갑논을박이 지속된다. 그 와중에 상호비방까지 하면서 국대전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고 오픈투게더는 1패를 당했다.[67]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축제도 총학의 업무이니 제대로된 라인업을 구성하지 못한 건 실책이다. 아니 정확히는 라인업에 대한 뭔가 타당한 이유만 제시했더라면 뭔가 이렇게 논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몇가지 옹호를 하자면

첫째로 총학이 당선된 다음 축제준비하기까지 시간이 한 달 반밖에 없었다. 보궐선거로 인해 4월 1일에 당선됐고, 집행부 구성과 인준이 4월 중순이 되서야 끝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준비가능한 기간은 1달뿐이었다. 보통 겨울부터 연예인 섭외를 비롯해 컨셉 준비에 들어가는 것에 비하면 시간이 한참 모자랐던것

그리고 이건 뭐 매년 있는 이야기지만, 현재 총학이 관할하는 업무가 방대하다.

기본적으로 총학은 협동조합 당연직이사로 회의해야하며 주기적으로 학교당국과도 회의를 거듭해야한다. 거기에 등록금심의위원회 회의, 중앙집행부 회의, 중앙운영위원회 회의, 전체학생대표자회의 그렇다 회의의 연속이다. 거기에 행사관련한 브로커 접촉과 담당자 간의 회의까지.......거기에 전에는 여기에 수업도 들어야했다. 최근 학생회칙 개정으로 인해 휴학생도 총학생회장이 될 수있어서 수업부담은 줄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2014년부터 축제업무를 전담하는 기구를 만들자든지 또는 홍대처럼 할일없는동연[68] 이 축제를 담당하자든지 애기가 나왔다.[69]

여담으로 동아리연합회에서 홍대와 같은 축제기획단구성계획안이 추진되었다. 구체적인 방안이 오갔는데......동연회장이 행불되어[70] 무산되었다고 한다

9 교내 언론

국민대 역시 어느 학교들처럼 대학 언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관심도는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학교 곳곳에 배포 스팟들이 존재해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읽고 학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도록 하자. 위키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국민대학교 항목부터가 이들 신문방송사에서 나온 자료를 근간으로 하는 것이 많다는 걸 생각해보자.

9.1 국민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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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신문》은 1948년 12월 18일에《국민대학보(國民大學報)》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었다. 3호까지 발간 후 정간했다가 1959년 7월에 《국민대학월보(國民大月報)》로 명칭을 바꾸어 복간, 29호까지 발간되었다. 그 후 1962년 5월에 국민대학보로 제호를 환원하여 2003년 1월까지 발행되었다. 이어 2003년 3월에 현재의 이름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2012년 1월 1일 신년호부터 국민대신문의 판형을 학내 구성원의 여론을 수렴하여 기존 대판에서 베를리너판으로 지면의 크기를 변경하고 제호 디자인도 현대 감각에 맞게 새로이 제작하였다. 한편 정기적인 신문 발간 이외에도 1976년에는 자체적인 문학상인 국민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기 시작, 1979년에 북악문화상으로 개칭 및 시상범위를 확대하여 매년 문학·학술 분야에 걸친 현상 공모를 하고 있다. 페이스북 계정도 운영중이다.

최근 수년 간 단순 사실만을 전달하는 보도 또는 밋밋한 문체 등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는 저조한 편. 학교본부 측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4년부터 경쟁지인 국민저널에게 대부분의 이슈를 많이 선점당했고, 이 때문에 '단순 기관지 아니냐'라는 비판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국민대신문의 발행인은 총장이며 편집의 최종권한을 교수와 교직원으로 이루어진 주간실에서 맡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옹호론도 있다.

매년 3월에 모집하는 신입기자 모집에 지원하면 한 학기는 수습기자로, 그 다음 학기부터 정기자로 직위가 주어지며 활동비와 원고료, 편집비, 장학금이 지급된다. 또한, 각종 기자교육 및 연수를 받을 수 있다. 2010년도 초반까지만 해도 지원자가 지나치게 많아 걱정할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상당히 저조한 편, 이례적으로 학년에 구애받지 않고 추가모집까지 몇 번 진행했으나 큰 실적은 없는 것 같다.

9.2 국민리뷰(The Kookmin Review)

《국민리뷰(The Kookmin Review))》는 1975년 3월 15일 《국민타임스(The Kookmin Times)》를 제호로 창간된 영자신문을 모체로 한다. 1976년 9월호(제12호)부터 제호를 《국민타임스헤럴드(The Kookmin Times Herald)》로 변경하였고, 1980년 5월 19일 계엄 확대에 따른 휴교 조치에 즈음하여 제호를 《국민트리뷴(The Kookmin Tribune)》으로 변경하였다. 1987년부터는 신문의 판형을 기존의 타블로이드판에서 스탠더드판으로 바꾸면서 지면의 크기가 확대됐다. 그 후 1993년 8월부터 슈퍼 타블로이드판으로 판형을 바꿔 발행했다. 1995년 3월호(제145호)부터 발행을 월간에서 계간으로 바꾸고, 판형도 슈퍼 타블로이드판에서 32쪽 매거진판으로, 제호를 오늘날의 《국민리뷰(The Kookmin Review)》로 바꾸고 전체 36쪽의 잡지를 연간 4회, 호당 5천 부씩 2002년 6월(164호)까지 발간하였다. 2002년 10월(165호)부터는 판형을 슈퍼 타블로이드판으로 변경하여 한 학기에 3회 발행하고 있다.

9.3 북악방송국(BBS; Bukak Broadcasting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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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방송국》은 1973년 4월에 발족하였으며 1976년 3월 방송국의 직제 개편으로 호출부호 《KUBS》를 《BBS(Bukak Broadcasting Service)》로 개칭하였다. 1975년 5월 방송국 출력을 300w, 1978년 9월 1kw로 증설하였다. 1984년 9월에는 대담용 고성능 기재 등을 도입 보강하였고 완전방음 스튜디오 및 네트워크를 신설하였다. 이어 1993년 6월 방송국 출력을 1.5kw로 늘리는 등의 기술적 개선을 이뤄냈다. 2002년에는 교내 네트워크 설비를 교체하고, 방송기기도 새로이 구입하여 교내 전역에 양질의 방송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2013년 3월 2일 현재 방송 시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방송(오전 8시20분~8시50분), 낮 방송(오후 12시10분~12시50분), 저녁 방송(오후 4시40분~5시10분)으로 하루 세 차례에 걸쳐 100분간 교내 스피커를 통하여 정규방송을 하고 있다. 저녁 방송이 끝나고 나서는 국민대학교 교가를 틀어주니 교가가 뭔지 궁금한 사람들은 들어보도록 하자. 2014년, 학내 뉴스를 전하는 페이스북 계정 'KMU BBS news'를 신설하였다. 2015년 2학기부터 법학관 학생식당과 페이스북을 통해 영상방송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국민대학교 북악방송국 페이스북>

[14]

9.4 국민저널(The Kookmin Journal)

《국민저널》은 국민대신문사와 북악방송국에서 해직 또는 면직된 기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2012년 9월 12일 창간한 학생 자치 언론이다. 학교 본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주간교수가 존재하는 신문방송사와 달리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편집권을 행사하며, 재정 운용·기획·취재·기사 교정·인쇄 감독·배포·홍보 등 운영의 전 과정을 직접 담당한다. 초창기 타블로이드판 단색 8면으로 발행하다가 2013년 3월부터 타블로이드판 단색 16면 형태로 발행하고 있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여 평시 사안별, 이슈별 기사를 생산하며 심층 보도 기사, 분석 기사를 추려 학기 중 매월 말(1년에 약 8회) 인쇄 신문을 발행한다. 2013년 6월 현재 《국민저널》제작위원회 휘하에 편집국과 운영국으로 나뉘어 총원 10명의 구성원이 활동하고 있다. 2013년 2월 5일 대학언론의 단결과 발전에 공헌한 노력을 인정받아 제4회 시사in 대학기자상 특별상 부문을, 2014년 1월에는 예술대 지 모 교수 비리 사건 연속 추적보도로 제5회 시사in 대학기자상 학내보도부문 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국민저널은 초창기엔 민주당 기관지가 아니냐고 까였지만[71] 2013년 언론사 기자 출신 재학생[72]이 편집장을 맡으면서 평가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특정 정파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학내 언론이 전혀 다루지 못했던 학내 정치, 학교의 숨겨진 문제를 하나하나 발굴해나가면서 학생들의 지지를 얻어 나갔다. 위에 언급된 2014년 총학생회 말레이시아 사건때는 말레이시아에 가지 않았다는 2013년 총학의 거짓말을 말레이시아 대학 홈페이지를 뒤져가며 현장 사진을 발굴해 뒤집어버리면서 2013, 2014 총학을 일타쌍피로 안드로메다에 보내버렸다. 2013년 이후로는 국민대신문과 함께 학교의 양대 언론으로 부상했으며, 현재는 영향력 면에선 국민대신문을 앞질렀다고 봐도 무방한듯.

국민저널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면은 창간 이후 학생 사회가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 그 이전에는 총학생회가 온갖 미친짓을 해도 학내 언론에서 제대로 보도되지도 않고 소식이 공유되지 않으니 학생들의 불신만 커지고 학생 사회는 자연스레 개판이 됐다. 하지만 창간 이후 학생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면서 학생들의 관심이 올라가고 피드백도 많아졌다. 그래서 2014, 2015 학생회가 연속으로 말아먹고 있지만 학생 사회의 전반적인 역량은 강화되고 있다는 평가.[73] 3년치 총학생회 예결산을 통째로 분석한다던가, 위에 언급된 비리사건 추적보도 등을 보면 기획취재, 탐사보도의 능력도 매우 뛰어나다. 또한 기존에 학내 언론이 그닥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학내 스포츠 리그나 학교 주변지역에 대한 기사[74]도 내면서 단순히 학내 정치를 알리는 신문을 넘어서 종합지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총학생회 선거에 엄청난 역량을 발휘한다. 기성언론을 흉내내는 수준이라 할 수도 있지만, 기존에 국민대신문에서 지면으로 인터뷰 1개면 할애되는 수준을 넘어, 공약을 검증하는 기사, 심층 인터뷰, 개표 실황 중계 등을 통해 학생들의 관심을 혁신적으로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2011년 개막장 총학선거로 인해 떨어진 투표율이 2012년 창간이후 다시 회복세로 돌아섰으며 3년 연속 상승중.

아래에서 언급될 카톡방 사건에서는 자극적인 속보경쟁 대신, 기성 언론 기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피상적인 해결책이 아닌 근본적인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는 5부작 기사를 연재해서 큰 호평을 이끌어냈다. 진보적인 일간지라 평가받은 한겨레, 경향 등도 쉽게 빠지는 허점을 잘 피해서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고 차분하게 해결책을 제시해 학내에서 뿐만 아니라 기성 언론 기자들이나 오피니언리더들에게도 굉장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4년을 끝으로 창간맴버들이 졸업, 취업준비, 군입대등으로 모두 떠났으나 그 이후에 들어온 기자들이 잘 이어받아 나가고 있다. 뿌리를 내리는 데엔 성공한 듯.

물론 정치 성향이 완전한 중립이라고 하기는 어려운지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싫어한다.

10 사건/사고

사건사고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주로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많이 서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사건 및 사고에 대한 내용은 국민대학교/사건사고 항목을 참고.

11 기타

  • 웹툰 무한동력에서 주인공 '장선재'가 다니는 학교가 '민국대학교'인데 이는 국민대학교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실제로 1화에 보면 장선재가 학교를 설명하는 컷에 국민대학교 사진을 그린 그림이 나온다. 동 작가의 웹툰 신과함께에서도 저승편과 이승편에서 민국대학교로 등장한다. 저승편에서는 김자홍의 출신대학[76]으로 나오고, 이승편에서는 학교 무한동력에서 사용한 학교 그림이 다시 나온다.
  • MBC 시트콤 논스톱5의 후속작인 레인보우 로망스의 촬영지였다. 다만 학기가 진행됨에 따라 시트콤 촬영때문에 어수선하고 면학분위기를 해친다는 학생들의 항의로 인해 시트콤 후반부는 부천대학에서 촬영. [77]
  • 대한민국 4년제대학교 중에서 자동차공학과를 가장 처음 만든 학교이기도하다. 기계자동차공학부가 개설되어 현재까지도 이 학교를 대표하는 학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그 이후, 기계시스템공학부와 자동차공학과로 분리되었다.
  • 남녀 비율이 거의 50대 50으로 성비균형이 이상적인 편에 속하는 대학이다.공대랑 전통대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 원래 국민대학교 설립에 재정을 지원하려던 사람은 단국대학교를 세운 장형과 조희재 여사였다. 김구이승만의 해방 후 정치적 이견차에 따라 김구 계열이었던 장형이 이승만계로 분류되던 신익희의 국민대학설립기성회에서 손을 떼고 이듬해 1947년 독자적으로 단국대학을 세웠다.
  • 개교기념일을 10월 18일로 기념하고 있는데, 맨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국민대학교의 개교일은 1946년 9월 1일이다. 그러나 미군정청이 국민대학관의 설립인가를 내주지 않고 1946년 12월 18일에 허가하는 바람에 학교측에서는 이에 12월 18일을 개교기념일로 지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방학기간이라(...) 날씨가 좋은 가을인 10월 18일을 개교기념일로 지정했다고 한다.
  • 경상남도 창원시(구 마산시) 소재 사립대학인 경남대학교와 창학 뿌리가 같다. 국민대학관이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재단이 필요했고 조선불교 총무부장이었던 최범술이 해인사 사찰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나서면서 1948년 최범술을 재단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최범술 재단이 국민대학의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 초대 학장이었던 신익희를 임의로 해고하자,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반발하여 '학장 유임운동'을 벌여 재단을 축출한다. ㅎㄷㄷ 해공 신익희 학장의 국민대학에서 떨어져 나간 최범술 재단은 마포에 똑같이 '국민대학관' 간판을 달고 학교를 운영하다가 1952년 '해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변경, 현재의 경남대학교가 되었다. 관련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당시 경복궁 옆 종로구 창성동에 있었던 국민대학의 현판을 인민대학으로 바꿔버린 흑역사가 있다.
  • 2010년 당시 이재오 특임장관의 이력서에 '국민대학교 농업경영학과 졸업'이라고 쓴 항목이 청문회때 논란이 되어 이재오 특임장관 후보자가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졸업증명서에는 중앙농민학교로 기재되어 있었기 때문인데[79], 중앙농민학교와 국민대학교는 같은 재단이나 별개의 대학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후 정권을 잡은 군부가 대학정비령 및 통폐합을 나서는 바람에 1962년 당시 국민대학을 폐지하고 초급대학으로 격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초급대학으로 격하되지는 않았지만 주간부가 폐지되고 야간대학으로 전환되는 수모(...)를 겪었다. 안습 이런 일을 겪으면서 학교 시설이 남아버리자 재단에서는 자구책으로 '국민여자초급대학'을 설립하고,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해서 국민산업학교[80]으로 전환한 일이 있었다. 1964년 폐지된 국민대학 주간부가 부활하면서, 국민여자초급대학은 1968년에, 국민산업학교는 1972년에 각각 폐지되었고 폐지 후의 학적관리 업무는 국민대학교로 이관되었다.
  • 그런데 2012년, 이길영 KBS 신임 이사장이 이력서에 '국민대학교 농경제학과 졸업'이라고 표시했는데 알고보니 중앙농민학교 졸업...이었고, 학위 허위기재 논란으로 또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어 이거 어디서 겪은거 같은데? 2010년 중앙농민학교 졸업기재 논란이 2012년에 똑같이 재현된 것. [81]
  • 학교 지리와 건물구조가 무척 복잡한데, 일단 다른 학교들에도 있는 몇층을 가던 지상(...)은 당연히 존재하며, 예술관과 경상관, 국제관이 연결되어 있다. 특히 예술관은 그 복잡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마치 미로처럼 연결된 통로와 곳곳에 숨겨진 방은 신입생으로 하여금 눈물을 뿜게 만든다. 이에 비하면 경상관은 양반.
  • 농구대잔치 대학부 창립 멤버 6개교(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 경희대학교, 단국대학교, 국민대학교)아니 중앙대가 없다니 중 한 곳이었다. 한때는 강호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측의 엘리트체육 지양 방침에 따라 농구특기생 선발을 92년부터 중단하였고, 농구 특기자로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는 해부터 대학2부리그로 편입될 운명에 처한다. 결국 95년 10월 30일, 연세대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학농구 예선탈락으로 대학1부리그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연세대학교에 이기면 팀의 생명이 하루 이틀 더 연장되기에 국민대 농구부 학생들은 사력을 다했지만 109-57로 패배. 창단 2년만에 연세대학교와 추계대학농구연맹전에서 공동 우승을 하는 등 화려했던 국민대 농구부의 추억들은 22년의 역사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지금 국민대에 농구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실업농구 시절 현대전자에서 활약하고, 국가대표까지 했던 혼혈선수 김성욱이 국민대 농구부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였다.[82]
  • 수강신청 때 인기강좌는 목요특강. 학점에 상관없이 들을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신청하면 용자라고 칭송받는다. 남자랑 여자랑 짝을 지을 수 있는 부모연습도 인기강좌. 단, 남자학생 수가 많아 남자끼리 커플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Ang? 그 외에 공연관람 수업인 '공연줍기' 등도 인기 강좌에 속한다. 반대로 안습한 강좌는 전인교육의 사서삼경의 이해와 주역의 현대적 이해가 꼽힌다.
  • 학교에 청설모랑 까치랑 까마귀, 비둘기가 옹기종기 모여사는데, 사람을 많이 무서워하지 않는다. 북한산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학교공기가 맑다. 삼육대학교와 비슷하게 자연과 더불어서 사는 학교.
  • 조형대학 참조. 시각디자인학과와 공업디자인학과가 유명하며, 홍익대학교를 넘나드는 수준을 유지한다. 순수예술 분야는 홍익대가 우수하나, 공업,시각디자인은 비등하거나 좀 더 높다는것이 중론. 자동차공학과는 과거에 들어가면 바로 취직이었으나 쌍용자동차가 망하면서 주춤했다. 허나 자동차공학과를 필두로 공대 끝판왕이라는 현대자동차 입사자 수가(2012년 기준) 한양대, 고대에 이어 3위를 기록하면서 재조명되었다.[83]
  • 예술대학 연극영화과와 공과대학 건설시스템공학부가 유달리 '똥군기'가 세다. 연영과는 신입생이 초등학생처럼 이름표를 달아야하고 90도 인사. 목소리도 크다. 인사를 안하면 불이익이 센지[84] 긴가민가하면 다 인사하기 때문에, 타 단과대생들도 예술대 앞을 지나다보면 영문도 모르는 연영과 신입생에게 인사받기도 한다. 또한 예술대 내 극장에 신입생과 2학년을 모아놓고 기합도 심심치않게 주는 모양. 참고로 타 단과대 생들은 이걸 매우 싫어하는데, 한번은 답답했던 타 과생이 학교 커뮤니티에 이 문화를 대놓고 깠을 정도였다. 정말 쪽팔린줄을 알아야지. 당하거나 목격하면 고민 말고 즉시 경찰에 신고하도록 하자
  • 건설시스템공학부도 연영과만큼은 아니다 뿐이지 답이 없는걸론 매한가지다. 가끔씩 지하세계 술집에 가보면 선배들이 후배들을 폭행하거나 뺨을 때리거나 심지어 대가리 박기도 시키기도 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십중팔구는 건설시스템공학부. 한번은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학교앞에 술마시러 왔다가 건설시스템공학부 고학번들이 술집에서 후배들에게 행패부리는 걸 보고 빡쳐서 훈계하려는걸 90년대 학번들이 기를 쓰고 말렸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거의 사라졌지만 09학번이 성곡동산을 재활용하면서 다시 부활했다. 10학번 OT때는 눈오는 설원에서 웃통을 벗고 뛰었...그 뒤학번으로 몇년간 학생과 학부모들의 오랜 신고를 거듭한 끝에 과송을 부르며 단체로 줄지어 성곡동산아래로 뛰어다니는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아예 없어지진 않는다. 원래 토목쪽이 이런 성향이 있기도하고, 술마시는게 일상 다반사다보니... 그렇다고 용납되는건 당연히, 절대로 아니다. 역시 경찰에 신고하도록 하자
  • 학교를 거닐다 보면 가끔 내가 중국에 유학을 온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로 중국인 유학생들이 많은 것을 거의 단번에 알 수 있다. 중국인 특유의 응집력으로 서로 뭉쳐다니며 큰소리로 얘기를 하기 때문에... 글로벌화를 하겠다는 취지로 많이 홍보해서 유학생들을 데려는 왔지만 사실 중국에만 치우쳐져 있고, 그 기준은 무엇인지 그들은 간단한 한국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 특히 팀플이 중요시되는 교양과목에서는 거의 중국 학생들은 발을 빼며 한국 학생들에 피해를 주는 일이 허다하다. 한국어 잘 모르니 나몰라라하는 식으로 수업 참여도가 제로에 가깝고 또 잘 들으려는 열의도 없다. 이쯤 되니 학교 재정을 중국 유학생으로 충당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대학 글로벌화+머니의 일석이조 어찌됐든 타학교보단 사정이 괜찮은지 유학생 관리 부실 대학에 선정 되진 않았고, 2013년 '조선일보·QS 아시아 대학 평가'의 국제화 순위에서 44위라는 괜찮은 순위를 기록하였다. 또한 사우디 유학생 유치에 상당히 적극적이다. 2010년 기준으로 한국에 유학 온 사우디 학생의 25%가 국민대를 다니고 있을 정도. 흠좀무... 김동억 전 수단 공화국 대사가 초빙교수로 있어 총장과 함께 몇차례 사우디를 다녀왔다. 사우디 교육부장관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고 본부관 2층에는 사우디 학생 클럽이 있다. 2014년에는 본부관 학술회의장에서 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문화원이 주최하는 제1회 아랍어권 외국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했다. 이런 국민대의 사우디 사랑을 보고 국민인닷컴에서 '만수르 같은 사람이 재단을 인수해 맨체스터 시티처럼 되는게 아니냐' 는 농담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럴리가 없잖아
  • 국민대 학생들조차 이런게 있는지 잘 모르지만 공식 학교 캐릭터가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무려 3가지 버전이 있다(...). MNU02_201101_%EA%B5%AD%EB%AF%BC%EB%8C%80QR%EC%BD%94%EB%93%9C.jpg 그 중에서 그나마 가장 많이 쓰이는 건 위 그림의 '용룡이'. 2011년 EBS 인터넷수능 문제집 뒷면의 국민대 광고와 2013년 개정판 지성과 글 교재(우리 시대의 글쓰기), 국민대 정시 모집요강 팜플렛 등등에서 용룡이를 볼 수 있다.
  • 콘서바토리가 2014년 설치되었으나 논란이 굉장히 많다. 졸업장이 똑같이 학장의 이름으로 수여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신설된 학과도 연극영화과-연기미디어과 시각디자인 등 학교의 간판이였던 학과들과 거의 완벽히 겹쳐 조형대생과 예술대생의 불만이 상당하다. 학점은행제와 대학교육의 차이가 엄연하고, 가뜩이나 들어오기 힘든 조형대학인데 졸업장을 똑같이 발급해주면 입시의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불만부터 종래에는 질 낮은 인재들이 사회에서 국민대의 이름으로 활동하게되면 학교에 악평을 끼치게 되고, 결국 제 살 깎아먹기이기 때문. 처음에는 모델학과 등 다른 학과들과 겹치지 않고 특성화된 학과만을 신설하겠다 이야기했으나....결과는 아 망했어요. 그러나 경영, 경상, 경제대에서는 옹호를 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종종 콘서바토리에 이코노미학과 등 이름도 비슷하고 졸업장 똑같이 주는 사태를 겪어봐야 한다며 곱지않은 눈초리를 보내는중. 경영대는 이미 일찍 부터 평생교육원이 존재한다 경영/경상은 애초에 경제성논리로 따지는 습관이 들어 학교정책옹호론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 2014년 말부터 학교에 고양이가 굉장히 많아졌다. 각 건물 주변마다 상주하는 고양이들이 있어서 학우들, 특히 여학우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쯤되면 고양이가 부러워진다사람을 경계하기는커녕 오히려 개냥이 수준으로 제 발로 와서 발라당 드러눕는다든지 다리에 부비적댄다든지 하는 폭풍애교(..)를 보여준다. 심지어 만질 수도 있다(!)[85] 특히 공학관 고양이 "공냥이"는 강의실에 들어와 수업도 듣고 간다. 3년 뒤엔 여러분보다 미적분을 잘할지도 모른다. 이에 공대학우들이 뭉쳐서 고양이 집을 만들어주고 사료도 챙겨준다. 학교 곳곳에 이런 좋은일 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보면 인사라도 해주자.
  • 2015년 여름부턴 본부관 주변에 토끼도 사는중이다. 다만 고양이가 토끼를 노린다는 소문도 있어서 토끼의 안위가 걱정된다. 그런데 목격담에 의하면 고양이가 아무리 쫓아가도 토끼가 도망치는 걸 잡을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걸로 보아 토끼는 고양이가 노리는걸 다 알면서 모른척 놀아주는 것(...)인듯 하다. 애초에 토끼쪽이 덩치가 더 크다. 토끼를 보면 살이 많이 찐 것을 알 수 있는데. 잘먹는다. 오늘도 본부관 앞 잔디를 예초하고 있다. 고양이, 토끼.... 이젠 사슴을 키워볼까? 그런데 이번엔 멧돼지가 출몰하고 있다 국립공원의 위엄 한두차례 학교에서 문자로 주의를 주었다.
  • 안철수가 12년 대선에 출마선언하고 방문한 첫번째 대학이다. '국민'이라는 교명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었다. 훗날 국민의당을 만든걸 보면 이 이유가 맞는거 같다(...)

12 커뮤니티

12.1 국민학생들

인터넷 포탈서비스 다음에 개설된 카페로 국민대학교 학생이니까 국민학생들이란다. 흠좀무

국민대학교 학생들의 대표적 커뮤니티로 유서가 깊었으나, 2010년 국민인닷컴이 개설되면서 운영을 잠정 중단하였다.

12.2 국민인닷컴 kmu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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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의 대표 커뮤니티.

2010년 말부터 디시인사이드 국민대 갤러리 고정닉을 중심으로 커뮤니티 이야기가 나오더니, 전자과의 능력자와 몇몇 갤러리 고정닉 유저들이 만들었다.(현재 확인된 운영진 4명) 자유게시판, 사랑방, 강의평가, 장터 등이 있다. 과거 다음까페에 있던 '국민인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민학생들'을 통폐합하여 규모도 꽤 되는편.(유저수가 약 1만명정도) 강의평가 게시판에서 강의정보를 미리 알아보고, 장터 게시판에 자주 올라오는 중고책 거래를 잘만 이용하면 아주 알찬 한학기를 보낼 수 있다.

정치적인 성향은 우파성향이 강했다. 다함께 등 학내운동권의 글들은 '비추'세례를 먹기도 하며, 중간에 아주아주 간혹 나름 합리적으로 보이는 문제제기도 도매금으로 욕먹는 경우가 있다.
총학생회 선거에선 많은 유저들이 극좌파 성향 '다함께'의 압도적인 꼴지를 예상했으나, 4팀중에 2등을 하는 파란(?)이 일어났다. 다함께 활동가들이 이 사건 이후, 학내커뮤니티 의견에 대한 우려를 덜 한다고 카더라
2013년 여름, 국정원 사건 시국선언 관련 이슈를 계기로 커뮤니티는 또 다시 혼돈의 카오스 상태로 들어섰으나, 우파 유저들이 몇몇 운동권들에게 썰리면서 다시 조용해진 상태.
그러나 이렇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 떡밥일 떄를 제외하고 평상시에는 글이 하루에 5개 정도 밖에 안 올라오는 심각한 정전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그나마 조회수가 100은 기본으로 넘기는 것으로 보아 보는 사람은 어느정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디시인사이드 국민대 갤러리 고정닉들이 국민인을 살려보자면서 글을 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익명게시판에서 병크가 너무 터져서 한때 익명게시판이 폐쇄되기도 했다. 신상털이부터 시작해서 욕설, 특정 지역 비하 등 눈뜨고 봐주기 힘든 상황이 많이 연출됐다. 특히 토론게시판에선 특정 지역 비하 및 특정 정치세력의 확인되지 않은 유머등이 사실인양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8월 말에 다시 익명게시판인 '사랑방'이 개설됐다.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선정 이후에 사랑방이 다시 폭주하자, '임시토론게시판'을 개설. 하지만 괜찮은 글들은 대부분 자유게시판에만 올라오고 익명게시판인 토론게시판엔 배설글이 많이 올라온다.

그래도 운영자분은 완전 개념이라 운영 자체는 문제가 없는 편. 시험기간에 학교나 주변 음식점과 연합해서 이벤트를 열기도 한다. 학교 곳곳에 치킨가게 쿠폰을 숨겨놓고 그것을 찾는 이벤트를 한 적 있는데, 상당히 호응이 좋았다.

사랑방이라는 곳이 지역이나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자 중단시켰었는데... 결국 다시 살아났다.

2015년 , 페이스북 계정 '국민대 대신 전해드립니다'의 성장으로 인한 유저 수가 급락하고 그 시기에 맞물려 운영자가 졸업을 하게 되면서 커뮤니티로서의 수명이 끝에 달하고 있다.

운영자의 마지막 글.

한동안 광고글만 올라오다가 다행히 2016년 1학기 수강신청을 앞두고 다시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쌓여온 강의정보, 교수님정보 등등의 자료를 찾기엔 국민인닷컴이 최적이기 때문.

12.3 디시인사이드 국민대 갤러리

친목질이 꽤 심한 대학 갤러리 중 하나이다.[86] 다만 뉴비나 비친목파에게 배타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학교 커뮤니티라는 특성상 친목질이 교내로 이동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갤에 신상이 퍼지면 학교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긴다(...). 사실 국민대학교 자체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갤러들은 금세 서로의 신상을 확인할 수 있다.

유독 다른 디시 대학갤러리에 비해 타대학 훌리가 없는데 이는 갤러들이 훌리가 뜨면 그냥 무시(...)해버리기 때문.

형저오국가란 말이 타대 훌리들과 일부 국갤러들에 의해서 4년제 대학 갤러리와 국민대 갤러리에서 유행했었다. 뜻은 '형 저 오등급인데 국민대 가능한가요?'(...). 국민대의 입시성적이 비슷한 수준의 대학들보다 낮게 나온 것을 그러나 비슷한 수준의 대학도 빵구난 것을 찾아보면 거기서 거기라는게 함정 놀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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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런던 올림픽 선수단 환영행사인 KBS 국민대축제 때문에 갤이 털렸다.


'국민대축제' 때문에 갤이 털리고 나서 불과 며칠 후, 2012년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되면서 갤이 또 다시 털렸다.[87]

부실대 선정 이후, 갤이 털리는 과정에서 고정닉들이 많이 사라졌으나 대학갤 특성 상 매년 새로운 갤러들의 유입으로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는 돌아가고 있다.

페이스북 '국민대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국민대 갤러리를 비판하는 글이 종종 올라오곤 한다. 보통 국민대 갤러리에 올라오는 지역, 성차별 같은 각종 비윤리적인 글들이 비난의 대상이다.

2009년과 2014년에 갤러출신 학생회장을 배출해냈다. 2009년엔 부총학생회장, 2014년엔 동아리연합회 부회장.

12.4 학교 관련 페이스북 계정

2012년 2학기에 갑자기 학교 건물을 의인화한 계정이 만들어졌다. 타대에서 유행하던 것을 국민대 학생들이 만든 것. 거의 모든 지명이 등록되어 있었다.

처음엔 우후죽순처럼 늘다가 최근엔 민주광장 외에는 별 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민주광장은 '여러분들의 게시판'도 만들고 자신의 계정으로도 학교의 많은 소식을 알려주고 있었고 질문도 잘 받아줬다. 그러나 졸업 이후 활동이 뜸해졌다.

국민대봇은 학교나 총학의 행태를 비꼬는 글을 자주 올리는데, '시원하다'는 평과 '별로 좋지 않게 보인다'는 의견이 양분. 몇몇 단대를 깠다가 학생회 임원들과 댓글논쟁을 벌인 후 2012년 초 잠적했다.

2014년, 국민대 대신 전해드립니다라는 계정이 등장했다. 보통 줄여서 국대전이라고 많이들 부른다. 익명으로 글을 올릴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이 역시 타대에서 유행하던 것이 국민대에 생긴 것. 점점 성장하다 결국 2015년 들어서 국민대 제 1의 커뮤니티로 등극했다. 국대전 killed the 국민인닷컴 이러다보니 총학이나 학교 여러 기관들도 국대전에 공지사항을 올리고 있다.

12.4.1 여러분들의 게시판

페이스북 계정 '민주광장'이 개설한 페이스북 그룹. 국민대학교 학생들이 가입되어 있으며, 학내 이슈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다. 회원수는 많지만, 올라오는 글은 적은 편. 경상대 동문인 박정혁씨가 취업멘토로서 많은 글들을 올려주고 있다. 박정혁씨는 한국은행 및 각종 연구기관에서 활약하신 분으로, 경영/경상대 학생들이 유용한 정보를 많이 올려주시니 해당 학생들은 참고바람. 총학생회 페이스북 계정도 여기에 글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13 출신인물

13.1 정치,관계

  • 남덕우 (정치학) : 서강학파 창시자, 전 재무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부총리, 제 14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故 유상근(법): 명지학원 설립자, 전 명지대학교 총장
  • 故 박성상(경제): 前 한국은행 총재
  • 박맹우(행정) : 前 울산광역시 3선 시장, 현 새누리당 울산 남구을 국회의원
  • 문희갑(법학) : 전 대구시장,경제기획원 차관,청와대 경제수석
  • 이태복(법학) : 제 12대 대한민국 보건복지부 장관
  • 이철성(행정) : 전 청와대 사회안전비서관, 경찰청 정보국장, 제 20대 대한민국 경찰청장
  • 강영구(정외) :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 보험개발원 원장,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현 메리츠화재 사장
  • 채일병(법학) : 전 부패방지위원회 사무처장,국회의원
  • 김옥전(법학) : 전 부산경찰청장(경찰 치안정감)
  • 오세정(행정) : 전 민주평통자문회의 사무처장
  • 배기선(정외) : 전 국회의원,KBS사장
  • 서갑원(법학) : 전 국회의원
  • 조용기(법학): 여의도 순복음교회 당의장
  • 정두언(정외) : 전 국회의원, 전 KBS사장
  • 손건익(행정) : 전 보건복지부 차관, 현 국민대학교 겸임교수
  • 김보현(법학) : 전 국가정보원 제3차장
  • 장다사로(행정): 전 대통령실 총무기획관
  • 시민석(행정) : 현 고용노동부 대변인
  • 임득문(무역) : 현 중소기업진흥공단 부이사장
  • 송성각(시각디자인): 현 한국콘텐츠진흥원장
  • 장영달(행정): 前 국회의원, 민주당 원내대표
  • 김철주(행정):전 인천지방경찰청장(경찰 치안정감)
  • 김희천(행정):현 한국전력공사 본부장
  • 조규열(무역):현 한국수출입은행 부행장
  • 신흥식(경제):현 한국자산관리공단 본부장

13.2 언론계

  • 故 송인득(경제): 前 MBC 아나운서
  • 손석희(국문 76): 전 MBC 기자, 전 성신여대 교수, JTBC 보도 담당 사장
  • 문철호(중문): 前 MBC 보도국장, 현 부산 MBC 사장
  • 윤정식(정외): 전 충주MBC 사장, KT 부사장, 현 OBS 사장
  • 배재성(경영): 전 KBS기자, 스포츠국장,현 KBSN 사장
  • 신선철(경영): 경기일보 회장
  • 백화종(행정): 국민일보 부사장, 게임물등급위원회 위원장
  • 김형철(경영): 이데일리 대표이사
  • 이영철(행정): 전 연합뉴스 기사심의위원, SK네트웍스 이사
  • 박래부(행정):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 신현상(국문): 헤럴드 동아TV 대표이사
  • 백용하(경영): 경향신문 국장
  • 김석진(정외): CBS 보도국장
  • 박태호(정치외교): PD, 전 KBS 예능국장
  • 이명우(경영): SBS 드라마본부 PD
  • 임경진(무역): 전 MBC 아나운서, 현 프리랜서
  • 최인희(영문): KBS청주 아나운서
  • 고윤아(언론): HCN아나운서
  • 강경윤(국사 03) : SBS 미디어넷 연예부 기자
  • 유성애(언론 05): 오마이뉴스 기자
  • 황인성(임산 05): 연합뉴스 아나운서
  • 이재성(언론 06): KBS 아나운서
  • 신의석(국문 07): 평화방송 아나운서
  • 김세희(사법 08): SBS SPORTS 아나운서
  • 이남규(중국학 09) : 연합뉴스 아나운서

13.3 법조계

  • 문종술(법학): 법무법인 MK 대표 변호사
  • 강수림(법학): 성심법무법인 대표 변호사
  • 홍순기(법학): 법무법인 한중 대표 변호사
  • 김진한(법학): 법무법인 아주 대표 변호사
  • 나도연(법학): 법무법인 서현 대표 변호사

13.4 재계

  • 김혁수(국사) : 한국 야쿠르트 사장,대표이사
  • 배동현(경영): 아모레퍼시픽 사장
  • 민장성(물교): 동아에스티 이사, 동아오츠카 사장
  • 박관호(경영) : 위메이드 대표이사, 의장
  • 한태근(무역) : 아시아나 자회사 에어부산 대표
  • 윤종웅(경제): 국민대 총동문회장, 진로 고문, 하이트 맥주 대표이사
  • 이택하(경영): 한맥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
  • 김용휘(경영) : 전 현대 유니콘스 사장
  • 배인식(금속공학): 곰플레이어 개발자, (주)그래텍 이사회 의장
  • 윤상규(경영): 전 네오위즈게임즈 대표이사, NS스튜디오 대표이사
  • 박청일(경제): 동양건설산업 대표이사 사장
  • 고재일(경제): 동일토건 대표이사 회장
  • 홍사승(경영): 대한시멘트 회장, 쌍용양회 회장
  • 정남기(경제): 현대모비스 부사장
  • 유재은(행정): 국제신탁 회장
  • 김영순(의상):롯데홈쇼핑 고문
  • 박유진(경영): 위메프 홍보담당이사

13.5 디자인

13.6 연예계

  • 윤조(성악): 가수, 연예인(그룹 헬로비너스)
  • 이효리(연극영화 98학번): 가수, 연예인(그룹 핑클)
  • 탁재훈(연극영화): 가수, 연예인
  • 이세창(시각디자인): 탤런트
  • 표인봉(연극영화): 개그맨(틴틴파이브)
  • 정경미(연극영화): 개그맨
  • 윤아정(연극영화): 백년의 유산, 김주리 역
  • 서승만(연극영화): 개그맨, 연출가
  • 박혜나(연극영화): 뮤지컬배우
  • 김소향(연극영화): 뮤지컬배우
  • 박두식(연극영화): 배우
  • 김가은(연극영화): 배우
  • 조승희(연극영화): 가수(다이아 前멤버)
  • 장현철(경제): 가수
  • 정성한(기계): 개그맨, 전 컬투 멤버
  • 엄태웅(연극영화): 배우, 연예인
  • 이완(체육): 배우, 연예인
  • 신소율(연극영화): 배우, 연예인
  • 임백천(건축): 방송인
  • 방은진(의상디자인): 배우, 영화감독
  • 김한국(공업디자인): 방송인
  • 최정호(경영): 성우
  • 세븐(스포츠경영 대학원): 가수, 연예인
  • 오도함(미술): 가수. 밴드 파블로프 보컬. 공연기획팀 '더 아웅다웅스' 공연기획자.
  • 김사월(미술): 가수. 솔로와 김사월X김해원이라는 그룹으로 활동중.
  • 맹세창(국문 10): 배우
  • 김지선(국사 11): 배우
  • 조정민(피아노):가수
  • 이규한(연극영화):배우

14 유명교수

  • 안경봉(법학): 금융조세포럼 수석부회장
  • 정진석(법학): 대한국제법학회 부회장
  • 한창희(법학): 한국보험학회 이사,한국손해사정사협회 회장
  • 고현숙(경영): 코칭경영원 대표코치
  • 백기복(경영): 한국윤리경영학회 회장, 조직관리
  • 김도현(경영): 국제인명센터(IBC) 등재
  • 류재우(경제): 前 한국노동경제학회장, 前 국회입법조사처 경제산업조사실 실장
  • 안드레이 란코프(교양): 북한 전문가, 김일성종합대학교 수학
  • 이창현(언론): 서울연구원장
  • 서정우(경영): 前한국회계기준원장, 現세계 회계기준원 의원
  • 김도연(언론): 한국미디어경영학회장
  • 김병준(행정): 前 교육부총리, 노무현 정부 정책수석
  • 목진휴(행정): 한국정책학회 회장, KBS 1Radio '라디오 중심 목진휴입니다' 진행
  • 홍성걸(행정): 국민대 행정대학원장
  • 김개천(실내디자인): 前 한국실내건축가협회(KOSID) 회장
  • 변추석(시각디자인): 국민대 조형대학장, 前 새누리당 선대위 홍보본부장
  • 김두진(국사): 前 진단학회 회장
  • 정도성(공업디자인): 한국 산업디자이너협회(KAID) 회장
  • 금누리(금속공예): 前 한국미술협회 아시아미술가협회추진위원회 이사, 前 한국미술청년작가회 회장, 예술가

15 관련항목

  1. 국민대학교 교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자료가 없다. 다만 그 작사자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교가를 작사하신 분은 시조 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 이병기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마련하시고, 그 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다. 이러한 그가 국민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48년.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국민대로 출강하신 것이 계기였다고.
  2. 교표를 비롯해 KMU를 영문 약자로 활용하고 있으나 특이하게 정작 웹사이트 주소는 kookmin을 쓰고 있다. 현재 KMU는 계명대학교가 웹사이트 주소로 사용하고 있다.
  3. 미군정이 경성제국대학을 국립 서울대학교로 전환한 국립종합대학안(국대안)을 7월 13일 공표하고 강행하자 민족세력을 중심으로 소위 '국대안 파동'이 일어났고 많은 반발이 있었던게 당시 상황이다.
  4. 일본식 절
  5. 최범술 재단에 이어 대건기업주식회사의 대표인 정병조가 재단을 맡았지만 등기이전 문제로 갈라섰고, 그 이후에는 당시 국회부의장이던 조경규를 이사장으로 삼았지만 얼마 못 가 조경규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망했어요.
  6. 당시 문교부에서는 대학의 무분별한 설립을 억제하고 질적 증가를 꾀하기 위해 1955년 「대학설치기준령」을 공포했는데 국민대도 이 기준을 맞추기 위해 재정 확보 없이 무리하게 신축 교사 건설을 하게 돼서 재정난은 더더욱 심해졌던 상황이었다.
  7. 김성곤이 보성전문학교를 다닐 무렵 김성수를 보며 육영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8. 국민대학교/북악캠퍼스 참고
  9. 창성동 캠퍼스는 초기 재학생들이 수많은 노력을 통해 얻어낸 곳이기에 창성동을 버린다는 것은 졸업생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10. 같이 파주에 캠퍼스를 설립하기로 한 서강대와 이화여대가 철회를 한 영향이 컸다
  11. 기사에 나와있는 이유가 황당 그 자체인데, 학교에 대한 애정을 가지도록 하고 학교에 대한 관심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한 거라고 한다.(...)
  12. 보통 대학들은 졸업생을 학사조교로 돌리는 등의 꼼수를 써서 취업률을 올리는데 국민대는 이 쪽 방면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결국 이 사단을 겪은 뒤에 그제서야 신경을 쓰게 되었다.
  13. 2014년부터 시작된 복지관 열람실 축소, 신도서관으로 건립되던 건물이 국제교육관으로 변경, 경상대 이전 등의 학내문제가 이와 관련있다
  14. 상경계에서는 경영학, 그중에서도 재무/회계를 중요시하고, 인문사회계에서도 행정학과와 언론학과가 가장 크고 커리큘럼도 많이 열려있다. 공학계열에서는 자동차학과로 대표되는 융합학문을 중시하며, 예체능에서도 디자인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15. 비슷한 4점 중반대의 학점인데도 합격, 불합격이 갈린다. 3점 중반대의 합격자도 있는것으로 보아, 전과의 이유나 해당 과의 수업 수강여부등의 보이는 '의지'가 중요하게 여겨지는듯 하다.
  16. 대표적으로 일본학계의 핵심인 이원덕 학파가 있다. 이 학파가 얼마나 강력하냐면 한국에서 일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상당수가 이 이원덕 학파에 소속되어있다. 그래서 일본학부 교수진을 보면 굳이 왜 이 학교에 왔는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17. FM은 최근엔 잘 안쓰기 때문에 고학번들 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보통은 '자주북악'으로 시작하지만, 총학생회 현판은 '해방의 함성으로 진군하는' 이라고 붙어있다. 서울대학교 등 다른 학교의 예를 볼때는 전자는 NL계열이 만들고 후자는 PD계열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통은 '자주북악'을 쓰는 편이다.
  18. 야간
  19. 야간
  20. 가칭
  21. 자연환경의 보전을 위해 절대적 보호가 필요한 구역으로서 개발이 불가능하다.
  22. 가칭
  23. 그런데 2014년 가을 선거에서 사회학과에 운동권 학생회가 들어섰다! 그것도 강성계열에 속하는 변혁모임 소속
  24. 이때, 총학실에 쳐들어갔다!
  25. 학생회비 총예산의 65%를 실질적으로 관리하는데다가 보통 나이가 제일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 총학생회장을 했기에 권위로 찍어누를 수 있다.
  26. 학교 커뮤니티에서 누가 어느 학생회가 제일 나았냐고 물어봤는데, 대부분이 05년 진짜학생회와 09년 날개를 달아를 꼽았다
  27. 정부후보가 모두 여자였는데, 경상관 콘서트홀 앞에서 점심시간에 삭발했다. 사상 초유의 사태인데다가, 여성 2명이 삭발해서 당시 학우들은 대충격. 아직도 저 두사람은 "총학생회선거에서 삭발한 그사람?"이러면 11년도에 학교 다니던 사람은 다 안다
  28. 재단/본부와 총동문회 사이는 앙숙에 가까운데, 부실대학 사태로 인해 총동문회의 입김이 엄청나게 강해졌던때였다. 그런데 그 점거날이 하필이면 총동문회 정기총회 날이었다! 처음에는 점거학생들을 무시하던 학교였으나, 총동문회장 한마디에 학생처장이 운동권 학생들 앞으로 끌려나와서 협상에 임해야했다
  29. 병원에 입원을 했다! 경영대 학생회장의 리치가 길어서 거의 일방적으로 폭행당했다고.
  30. 법대 학생회장은 당시 학생회장들 중에 일을 잘해냈던 몇안되던 학생회장 중 한명이었다
  31. 안드로이드만 지원한다. iOS는?
  32. 이 글을 직접본 총학생회장이 "2013년 라인업은 자신의 공"인데 부총이 다한 것 처럼 작성해놔서 매우 빡쳤다는 후문
  33. 2012년에 기록된 그 얻어터진 법대 학생회장이다!
  34. 종결인줄 알았건만 더 심한놈들이 있었다. 아래 총학을 꼭 참조하길 바란다.
  35. 위에서 서술된 부분은 총 투표를 의미하는 듯.
  36. 이 사건은 굉장히 즉흥적으로 벌어졌는데, 동아리연합회장이 포천으로 동원훈련을 간 사이에 부회장이 단독으로 나선 것. 당시 동아리연합회장의 증언으로는 동원훈련버스가 서울을 벗어나자마자 부회장에게 전화가 와서 "오늘 본부관 뒤집으러 간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37. 사실 그것도 총학이 만들었다기 보단 동아리연합회장이 만들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38. 학생회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자.
  39. 기사내에선 2회부결이지만 기사 작성되기 전날 밤에 1번 더 부결됐다.
  40. 약 6000명
  41. 그건 그냥 데모한거지 비상학생총회가 아니다. 공고문도 안냈고 집회명도 학생총회가 아니었다
  42. 국민대학교 총학생회칙 제29조
  43. 하지만 2009년에 총학생회장이 발의한 전학대회 안건에 대해 부총학생회장이 반대표를 든 적이 있다!
  44. 학생회장의 탄핵이 학생총회에 있는 이유는 과거에 운동권이 비권인 학생회장은 전학대회에서 해임시켜버리는 등의 일이 빈번했고, 그 역도 빈번했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방지하고 총학생회장의 임기안정을 위해 학생총회를 통한 탄핵임 만들어졌는데.....문제는 총학생회장이 무능하면 배째라는 식의 이용이 가능해져버린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전학대회가 총학생회장 탄핵권이 돌아온 것이다.
  45. 전체학생대표자회의 대의원의 숫자가 약 90명 이므로 60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46. 여기서 산하의 의미는 총학생회, 즉 학생총회 산하의 기구를 말한다.
  47. 졸업준비비는 10만원 정도 되고 거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납부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돈이 모인다고 한다.
  48. 이전까지 졸업준비위원회는 총학생회에서 완전히 독립된 기구였기 때문에 총학생회에서 견제할 어떠한 수단도 없었다
  49. 그래도 이 사람이 학생회칙을 싹 갈아엎은 장본인이다
  50. 국민대학교 총학생회칙 제135조
  51. 그러나 중앙선관위원과 중앙운영위원이 겸직을 하기 때문에 선거기간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중앙운영위원회의 업무도 같이 한다.
  52.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 높은 투쟁력을 보인 것은 사실이며 학생회가 일반적으로 학교본부를 논리로 압도하긴 어렵다
  53. 불가능은 아니다. 이에 대한 학생들의 서명을 받아 소송을 진행하는 방법도 있긴 있는데, 문제는 그렇게 인력을 모으는게 쉬운게 아니다
  54. 물론 이것뿐만 있는게 아니지만....
  55. 뭐 그놈의 대표성 대표성 운운하면서 학생들 눌러버리고, 학교에는 기는게 요즘 학생회장이니 말이다.
  56. 재선거는 다시 처음부터 선거를 진행하는 것으로, 투표만 다시하는 재투표와는 구별된다.
  57. 당시 세월호때문에 축제가 9월로 연기되서, 축제에 지장이 있을까봐 탄핵상정이 안됐지 당시 분위기론 탄핵 안되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58. 이 때문에 졸업한 2014년 당시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은 또다시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59. 이 부관참시가 두려워 2014년 당시 총/부총은 메아리 정후보에게 선거 출마를 간곡히 말렸으나, 출마해버렸고......
  60. 2015년 총학이 딱 두개 잘했는데 회칙개정과 11월 데모였다
  61. 24시간 이상 지속된 점거가 한번도 없었다
  62. 점거가 좀 더 지속됐으면 3월 총학생회 선거마저 파행으로 치닫을 뻔 했고, 솔직히 총학도 학교본부에는 말빨로 밀리는 판에 단과대업무와 총학업무를 같이보는 비대위가 제대로 된 협상을 하긴 어려웠다
  63. 세월호 관련 모임이 중심
  64. 총학 선거도 나름 인지도 싸움이 중요하고, 단대 회장쯤 했으면 인맥도 넓다
  65. 공개된 라인업이 스웨덴세탁소, 10cm, 데이브레이크였는데....그냥 인디밴드축제라고 홍보했으면 이런 논란도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66. 왜 2014년이고 2015년인지......자세한건 상위 문단 참고
  67. 2013년 오픈투게더의 경우 등록금인하에 거기에 힙합을 주제로 역대최강의 라인업을 보여주었다. 빈지노라든지 도끼라든지
  68. 정말로 딱히 일정이 없는 조직이다. 그렇다고 불필요한 조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동연의 업무는 주로 동아리를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연산하에는 직접통제해야 하는 학우들이 없다. 당연히 이는 매학과에서 진행하는 각종행사등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학기초에는 정말로 할일이 없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국민대만의 사항이 아니다. 서울대의 경우 비상대책연석회의 의장은 "업무가 없는" 동아리연합회장이 당연직으로 맡는다.
  69. 재밌는건 홍익대는 동연이 주도하는 축제준비위원회에서 축제를 전담관리하는데 이 아이디어를 홍대 총학생회장한테 준게 국민대 동아리연합회장이다
  70. 사고로 행불된건 아니고 무슨이유에선지 갑자기 잠수를 타버렸다
  71. 실제 창간당시 취재부장을 맡은 이는 당시 민주당 대학생위원회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고, 2012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와 대학언론 기자간의 만남을 주선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72.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휴학 연한 초과로 제적(...)되었다가 대중문화비평 매거진 텐아시아에 특채되어 기자로 활동했었고, 학위 취득을 위해 다시 재입학했다가 후배들에게 코가 꿰였다고 한다. 현재도 한겨레신문 등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73. 총학생회가 잘못해서 단과대 학생회장이나 일반 학생들이 들고일어나는 것은 이전엔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74. 2015년 3월 후문 주변에 카츠동집이 생겼는데, 굉장히 긴 사연이 있는 곳이었다. 그것을 추적 보도하면서 학생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75. 극중 한국대학교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76. 1990년 민국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6화 참조
  77. 2011년 오작교 형제들의 촬영도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촬영했었다.
  78. 지금의 정릉 고려대 보건대학캠퍼스 부지가 옛 국학대학 부지였다
  79. 당시 기사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3398674 참조
  80. 1965년에 재단법인 국민학원이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1969년에 전환
  81. 관련 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5623
  82. 한국인과 백인간의 혼혈선수였는데, 수려한 외모로 여자팬들이 많았다. 자유투를 백보드에 바운드 시켜서 넣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83. 쌍용과 관련되었는데 IMF이후로 쌍용 쪽을 생각해보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현대자동차와 한국GM 등이 지원하는 몇 안되는 대학중 하나고, 취업률도 상당히 높은 편.
  84. 입학식 전에 신입생들을 불러다놓고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이 때 학과 선배들에게 무조건 인사를 하라고 가르친다. 얼굴을 몰라도 인사를 해야하기 때문에 신입생들은 일단 예대 근처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다 인사를 하게 된다. 인사를 하지 않으면 작든 크든 '집합'으로 연결된다. 후배는 선배의 얼굴을 몰라도 선배는 이름표가 달린 것을 보고 후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점은 신입생들이 한 학기가 지나기 전까지도 예대 내부에 있는 매점을 잘 갈 수 없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85. 산골짜기(..) 고양이라 캠퍼스 안에서만 서식하는지 야생고양이 치고 굉장히 깨끗한 편.
  86. 서강대, 부산대, 인하대 갤러리가 친목이 활발하기로 유명하다.
  87. 이때 숭실대 갤러들이 이 대열에 동참하여 숭실대갤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 그전까지는 국숭동맹이라 불리며 함께하던 숭실대였기에 국민대 갤러들의 배신감은 더욱 심했다. 그리고 불과 몇달 후, 644사태가 터지며 숭실대갤이 털리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