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풍81

国風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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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시 군사정권의 홍보영상

허문도,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문도! 충무김밥 먹는다! 문도! 여의도로 와!

국뽕 81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관제축제.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했던 대규모 예술제. 3S정책에 이은 신군부정권의 대표적 우민화 정책중 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위 그림과 같이 고대부설 민족문화연구소가 국풍81을 후원했는데, 얼마나 욕을 많이 얻어먹었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이 당연했던 당시 대학가 분위기에서 대학 이름이 이런 관제축제에 올라가는 것부터가 학생들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쩌랴. 국내 유수 재벌이 세운 나름대로 세력 있는 방송국마저 단칼에 날아가는 시대인데 협조 안 했다가는 고대부설 민족문화연구소가 바로 그날 삼청교육대부설 민족문화연구소로 바뀌게 될 지도 모르는 시절이라(...)[1]

원래 국풍(國風)이란 유교의 경전인 사서삼경시경의 제1편의 제목으로써, 시경에 수록된 '지역사회의 풍속을 담은 노래 가사'들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이던 말이었다. 이 낯선 동양학의 전문용어가 엉뚱하게도 갑자기 군사정권의 관제 문화정책의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본래 정통성이 결여된 권력들은 스스로의 컴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 권위와 전통적 이미지를 차용하길 좋아한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는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전혀 다른 설로 일본 극우에 심취한 허문도 정무비서관이 일본의 카미카제(神風) 정신을 본따 이름을 붙이고 적극 밀어 붙여 국풍(國風)이고 했다고 한다.(<6공화국 언론조작>, 김종찬, 465쪽) 허문도가 시경을 읽는 유학자 출신이 아니라, 일본 특파원 출신 일본 전문가라는 것을 생각해 볼때 이쪽의 가능성도 높은 편.[2] 포스터에 있는 국 자가 정체자 國이 아니라 신자체 国인 것도 그렇고

더구나 여기에는 이 축제를 주관한 허문도의 간특한 책략 또한 숨어 있었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대학가에서는 마당극, 탈춤, 풍물 등 민족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상승해 왔으며, 1980년대 초반에는 당시의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적 지적 풍토와 결합되어 "민족민중예술"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하게 된다. 시인 김지하, 작곡가 김민기, 소리꾼 임진택 등이 이들의 리더였다.

따라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5공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관제축제를 주관한다는 것은 반체제와 저항의 상징문화를 관제로 포괄해 버리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방향은 좀 다르지만 일제가 조선사편수회와 조선어연구회 등의 (준)어용단체를 허용 혹은 설립함으로써 교묘하게 분열과 혼란을 조장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하필 축제 주제가 "전국 대학생 민속 국학 큰잔치"였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2 원래는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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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행사는 TBC에서 열기로 했던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가 모체였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국풍81에서 벌어진 가요제의 명칭이다. 젊은이의 가요제MBC 대학가요제에 대항해서 TBC가 주최하던 가요제의 명칭이었다. 그것도 원래는 1979년에는 해변가요제였던 것이 1980년에는 제2회 젊은이의 가요제라고 이름을 바꾼 상황이었다. TBC는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열면서 자신들의 가요제를 여기에 포함시켜서 인지도를 상승 시킬 계획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두환은 정권을 잡은 직후 소위 언론통폐합을 실시하였고, 이 때 동양방송(TBC)이 문을 닫고 KBS로 흡수되면서 KBS에서 주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별도의 가요제를 가지지 않았던 KBS는 젊은이의 가요제라는 이름을 변경시키지 않았다.

이 때 신군부 정권의 언론통, 쉽게 말하면 파울 요제프 괴벨스 역할이었던 허문도가 이를 정권의 선전도구 겸 엄청난 놀이판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허문도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출신의 조선일보 기자였고 일본 특파원이었다. 메이지 유신 관련 논문도 썼고. 군출신인 허삼수, 허화평과 더불어 전두환의 최측근인 속칭 '쓰리허'의 일원이었다.

허문도의 출신에서 짐작되듯 국풍81도 원작은 일본 것이었다. 소위 전공투 세대 및 기타 여러 사건으로 시끌시끌할 때 동일한 목적으로 개최했던 것.

3 행사

국풍81 동안에는 여의도광장 전체를 무대로 민속제, 전통예술제, 젊은이가요제, 연극제, 학술제 등 대규모의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당시에 얼마나 파격적인 지원이 이어졌는가 하면, 행사기간 동안 통행금지가 일시적으로 해제되었으며 행사에는 전국 198개 대학의 6천여 명의 학생과 일반인 7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참고로 통행금지는 1982년 1월 5일 부로 완전 폐지되었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은 16만명, 여의도를 찾은 관람객은 6백만명에 달했다. 국풍이 낳은 스타로는 파마머리 가수 이용(금상곡 바람이려오, 후속곡 잊혀진 계절)과 충무김밥, 춘천막국수 등이다. 이용은 가요제에서 '바람이려오'로 금상을 차지하며[3] 일약 국민 가수로 부상해 이후 수 년간 조용필에 필적하는 인기를 누렸다[4] 충무김밥은 원래 통영(구 충무시) 지역에서 먹던 간편식이었는데 국풍 풍물마당을 통해서 서울에 전해졌고 곧 전국적인 인기 음식이 되었다. 전국이 춘천 막국수를 알게 된 것도 여기에서다. 이런게 그나마 있는 순기능이라면 순기능이겠다.

http://blog.joinsmsn.com/usr/n/1/n127/1/국풍81-여의도.jpg

장소는 여의도광장[5]으로 지금의 KBS 앞에서 여의도공원과 그 일대 녹지, 그리고 경인로 등의 주변 도로까지 전부 포함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거기에 당시에는 유사시 비상 활주로로 쓰기 위해서 광장에 아무런 시설물이 없이 끝에서 끝까지 뻥~뚫린 아스팔트 바닥이었기에 광장 전체를 사용하며 사람으로 가득한 행사 규모는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세로로 길게 늘어선 것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인데, 충무김밥이니 막국수 같은 팔도 먹을 거리와 막걸리 등을 거기서 팔았는데, 사람이 워낙 많은데다가 주변에 변변한 식당 같은 게 없을 때이니 노점 음식은 순식간에 동나서 매 시간 보충하곤 했다. 군데군데 타원이나 둥그렇게 사람이 둘러싼 빈 곳은 마당놀이 등 여러 공연장과 행사 이전에도 있던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빌려 주던 곳이었고, 맨 아래 가운데쪽에 임시 야외 관람석이 있는 곳부터 오른편 끝 희게 보이는 무대까지가 메인 행사 (가요제)공연장이었다. 당시는 가게에서 술담배 팔 때 신분증 검사를 안 하던 때라, 미성년자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거나, 동네 양아치들이 행사장 주변에서 서울 각 지역과 지방에서 올라온 관람객과 청소년의 주머니 푼돈을 터는 일도 일어나곤 했다.[6] 사진에도 보이지만 광장엔 그늘이 없었다.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작렬하여 열기가 무지하게 올라오는 검정색 아스팔트 바닥에 햇볕 피할 데가 전혀 없어서[7] 실제 관람이나 행사 참여, 구경하기엔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요즘 같으면 한다 해도 고생하기 싫다고 안 갔을 행사였는데, 철통 군사독재로 숨이 막혀 있고 놀 데가 없던 국민들은 그런 날씨나 관람하기 나쁜 환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녀노소, 도시 지방 사람 할 것 없이 기차로, 버스 대절로 가득 몰려갔던 것이다.

위 사진에서 위쪽이 대방동 방향인 남쪽으로, 위 오른편 구석 건물이 KBS 본관이다. 현재 고층 빌딩으로 가득 차 있는 여의도 공원 주변도 당시는 KBS, 국회의사당, 전경련회관 등 큰 건물이 몇 개 없던 시절이라 사람이 들어갈 공간은 아주 넓었다. 게다가 이건 아래쪽 1/4 가량은 렌즈에 안 들어가 잘려 안 나온 사진이다.[8]

5월 28일 정오에는 30만, 오후 4시에는 50만, 이날 새벽까지 100만에 가까운 관객을 기록했고, 5월 29일 100만, 30일 200만에 육박하여 진행본부에서는 장내 방송을 통해 자녀를 대동해온 관객들의 귀가를 종용하였고, 라디오 스폿방송을 통해 관람을 만류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6월 1일 밤 10시, 화려한 불꽃놀이를 끝으로 종합 관객 동원이 1000만이라는 초대박 행사였다.

4 기타

당시 허문도는 김지하김민기 같은 문화인사도 적극적으로 국풍81에 참여시키고자 포섭에 나섰는데 거절당하기도 했다. 또 자신의 모교 후배인 서울대 풍물동아리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동아리 회원들도 거부하자 군인, 공무원을 동원해서 진행시키고 풍물패 출신 졸업생과 군복무 중이던 애들도 모두 데려와서 서울대학생이라고 위장시켜서 행사를 진행시켰다. 혹시 공연중 이 애들이 돌발행동을 할까봐 전경으로 둘러싼 상태였다.

운동권에서는 (아마 강제로 참여했을)군복무 중인 학생들까지 변절자로 매도해서 학생사회에서 제명시켰다. 그래도 나름대로 사정은 있는 것이, 학생/노동운동은 수십년 간 양지(제도권 정치)로 나올 기회 한 번 없이 그야말로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이들이 지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밀결사"에 준하는 조직력이 필수였다. 철통같은 규율을 가진 조직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적(군사독재)들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으면 모조리 내치는게 생존을 위한 방책이었다.

분명 비극이었고 배타적이고 경직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단체만 해도 그런 태도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가들은 한국에서는 (일부 일뽕제외) 까임방지권을 받는 존재라서 운동권처럼 소소한 모순도 철저하게 까이지 않을 뿐이다.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철저히 수단도 정당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 인권운동이나 평화주의, 군대무용론 활동가들이다. 그러나 이분들 보고는 몽상가라 하면서 운동권에는 아주 엄격한게 대부분이란게 아이러니.

다만 민주화 이후에도 남은 경직성은 두고두고 발목을 잠게 된다.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국풍81편"에 관련 인터뷰가 있다.

아무튼 대학가에서도 국풍 81에 내부갈등이 있었는데, 욕을 하기도 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예를들어 가요제에서 1위한 서울대 그룹사운드 '갤럭시'가 수상 기념으로 그해 10월 서울대 학생회관 라운지 2층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향락축제 거부투쟁'을 벌이던 운동권 학생들이 무대를 부숴 버렸다(...)

당시 여의도 주변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잇달았지만, 결국 82년 이후 시위가 잦아들면서 국풍 역시 한 해로 끝났다. 그러니까 국풍 81인거겠지

무한도전에서 언급된 바로는 박명수는 어린시절에 국풍81의 일반인 장기자랑에 나간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긴 하지만.

이 항목 맨 위에도 있는 국풍81 포스터는 롯데월드의 마스코트 '롯티'를 디자인한 정연종이 디자인했다.

왠지 국뽕81과 발음이 비슷하고 의미도 비슷하다.

여담으로, 1989년까지 쓰인 국민학교 미술 교과서에 포스터 그리기라는 주제로 나온 예시 자료가 몽땅 국풍81 포스터였다.

  1. 참고로 이 연구소 아직도 있다. 캠퍼스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고대병원에서 셔틀버스를 타거나 고려대역에서 성북20을 타면 접근 가능하다.
  2. 10월 유신도 무슨 유학의 책에서 따온게 아니라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따온 단어이다.
  3. 대상은 노래 수준과는 상관없이 명문대-가급적 서울대-에 주기로 했다.
  4. 여담으로 같은 해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정오차는 자신의 곡 바윗돌이 "그 전 해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이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리고 금지곡으로 처리. 그런 시대였다.
  5. 최초 명칭은 5.16광장이었지만, 신군부가 집권한 이후 여의도광장으로 개칭했다.
  6. 대신 어른들이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청소년을 보고 버릇 고친다며 두들겨 패도 아무 문제가 없던 때이기도 했다.
  7. 나무 심어 놓은 데는 조금 있지만, 그 땐 아직 어린 나무라 그늘다운 그늘이 없었다. 2016년 현재는 공원 숲이 꽤 우거져 있다.
  8. 이후 여의도광장이 사람으로 가득 뒤덮힌 경우는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과 정권이 조직한 관제 집회인 1983년 이웅평 귀순 환영대회, 1986년 금강산댐 규탄 대회 그리고 1987년 대통령선거때 주요 후보들의 선거유세, 이례적으로 교황이 직접 와서 집전한 천주교 103위 시성식 정도 뿐이다. 모두 100만명 이상이 여의도 광장을 뒤덮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