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그리고 운명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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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안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갱플랭크가 몰락하면서, 대혼란에 빠진 빌지워터. 매일같이 해적단의 혈투가 벌어지고 도시는 분열된 가운데 미스 포츈은 복수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곧 그림자 군도의 검은 안개가 빌지워터를 집어삼켜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것입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2015년 해로윙 이벤트인 그림자 그리고 운명 : 해로윙 단편 소설 스토리를 집필해둔 항목이다. 빌지워터 : 불타는 파도의 후속작. 이곳으로 들어가면 원본 스토리를 볼 수 있다. 아아 정말 설정덕후들에게 단비같은 소설이다

2 1막

이제 갱플랭크는 없습니다. 지배자가 사라진 빌지워터에서는 매일같이 해적단의 혈투가 벌어지고 있죠. 미스 포츈이 거둔 승리의 여파는 굉장했고 복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갱플랭크의 동맹을 쫓고 있습니다. 해로윙이 다가오는 가운데 광전사 올라프는 학살의 부두에서 괴물을 처치하고, 정화의 사도 루시안그림자 군도악령을 쫓습니다.

2.1 1막 1장

피로 물든 거리,

영광스러운 죽음,
여왕 바다뱀의 품으로

칼날 도살자단이 잭도의 턱을 녹슨 작살 못에 꿰어 부둣가 짐승들의 먹잇감으로 매달아 두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오늘 밤에만 열일곱 번째로 마주친 폭력단원 살해 현장이었다.

빌지워터치곤 많다고 할 수 없는 수였다.

적어도 해적왕이 쓰러진 뒤론 말이다.

붉은 송곳니를 드러낸 부두 쥐가 매달린 잭도의 옆에 쌓인 바닷가재 통발에 올라앉아 연한 종아리 살을 물어뜯고 있었다.

후드 쓴 남자는 걸음을 재촉했다.

“도와… 줘…”

피로 막힌 목구멍에서 쥐어짜 낸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후드 쓴 남자가 홱 돌아서며 두꺼운 벨트에 매달린 무기로 손을 가져갔다.

놀랍게도 잭도는 뼈 손잡이가 달린 작살 못에 꿰인 채로도 아직 살아 있었다. 못은 크레인의 나무 기둥에 깊숙이도 박혀 있었다.
어떻게 해도 잭도를 죽이는 것 말고는 구할 길이 없어 보였다.

“도와… 줘…” 잭도가 다시 간청했다.

후드 쓴 남자는 멈춰 서서 어떻게 할지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소용이지? 지금 구해줘도 내일 아침이면 시체가 될 텐데.”

잭도는 조심스럽게 한 손을 들어 누덕누덕 기워 입은 조끼에 숨겨 놓은 크라켄 금화를 꺼냈다. 어두침침한 부둣가 조명 아래서도 진짜 금화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남자가 다가가자 부두 쥐가 날카롭게 쉬익 소리를 내며 목 털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몸집은 그다지 큰 놈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신선한 고기를 두고 쉽게 물러서진 않으리라. 바늘같이 길고 가는 송곳니 사이로 역겨운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남자는 쥐 한 마리를 바다로 걷어찼다. 또 한 놈은 발로 짓뭉갰다. 이어 나머지 녀석들이 달려들었지만, 남자의 재빠른 발놀림에 부두 쥐는 그에게 이빨 끝조차 대지 못했다. 남자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정확했다. 세 놈을 더 처치하자 나머지는 우수수 흩어졌다. 붉은 눈들이 어둠 속에서 그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잭도 옆에 섰다. 남자의 이목구비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 윤곽에서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음의 순간이 왔다. 받아들여. 내가 반드시 완전한 안식에 들게 해주지.”

그는 외투 안쪽에서 반짝이는 은제 스파이크를 꺼냈다. 두 뼘 길이의 스파이크에는 굽이치는 문양이 휘감듯이 새겨져 있었다. 가죽 세공인이나 쓸 법한 화려한 물건이었다. 그는 그 끄트머리를 죽어가는 남자에게 가져다 댔다.

잭도의 눈이 커지더니 한 손을 허우적거리며 후드 쓴 남자의 소매를 움켜쥐려 했다. 그의 눈은 저 멀리 대양으로 향했다. 무수한 촛불과 부둣가의 화톳불, 낭떠러지에 폐선박 자재로 지은 수많은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들이 검은 거울 같은 바다에 비쳐 흔들렸다.

“저 수평선 너머에 뭐가 도사리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지. 어떤 공포가 찾아올지 알고 있지 않나. 그런데도 미친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있군. 멍청하기 짝이 없어.”

그는 몸을 돌려 잭도에게 스파이크를 푹 꽂았다. 이윽고 시체의 마지막 떨림이 잦아들며 잭도는 육신의 고통에서 해방됐다. 금화가 시체의 손에서 굴러떨어지더니 퐁당 바다에 빠졌다.

후드 쓴 남자는 스파이크를 빼내 잭도의 누더기 셔츠에 닦았다. 그리곤 스파이크를 외투 속 쌈지에 집어넣고, 황금 바늘과 아이오니아의 샘물을 머금은 은 실을 꺼내 들었다.

수없이 해 온 일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는 죽은 자의 눈과 입술을 꿰맸다. 손을 놀리며 입으로는 아주 오래전에 익힌 주문을 읊었다. 오래전, 어느 왕이 잘못 사용했다는 그 주문이었다.

“이제 죽은 자들이 널 붙잡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일을 마치고 바늘을 집어넣었다.

“그럴지도. 그런데 우린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 없는데 어쩌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뒤로 돌며 후드를 내리자 잘 길들인 마호가니 같은 갈색 피부가 드러났다. 각진 광대뼈가 귀족적인 인상을 더했다. 검은 머리는 길게 땋아 늘어져 있었고, 가늠할 수도 없는 공포를 마주했던 두 눈은 낯선 자들을 훑었다.

피로 딱딱하게 굳은 가죽 앞치마를 두른 사내 여섯이 가시넝쿨 문신으로 뒤덮인 근육을 과시하며 서 있었다. 하나같이 톱니 갈고리를 들고 푸줏간 칼을 가지가지 벨트에 매달고 있었다. 빌지워터를 손에 쥐고 흔들던 폭군이 몰락하자 하찮은 건달 무리가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해적왕이 사라지자 여러 갱단이 새 구역을 접수하려 싸우면서 도시 전역이 혼란에 빠진 탓이었다.

놈들이 다가오는 건 벌써 눈치챘었다. 징 박은 부츠 소리와 썩는 내,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는 소리 덕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훨씬 전에 알고 있었다.

“금화가 여왕 바다뱀한테 가는 건 상관없지만 말이지.” 가장 덩치 큰 칼날 도살자단 놈이 지껄였다. 놈의 배는 너무 거대해서 대체 저 몸뚱이로 죽은 동물에 다가가 내장을 발라낼 수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우리가 죽인 해적은 엄연히 우리 거란 말이지. 그러니 그 바다뱀 금화도 당연히 우리 거였다고.”

“여기서 죽고 싶나?” 남자가 물었다.

뚱뚱한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누군 줄은 아나?”

“아니. 그런 넌?”

“그럼 말해 보시지. 수장할 때 이름이라도 새겨줄 테니.”

“내 이름은 루시안이다.” 대답과 동시에 남자는 긴 외투를 뒤로 젖히며 한 쌍의 총을 뽑아들었다. 정과 끌로 세공한 돌과 자운의 미치광이 연금술사조차 알지 못하는 번쩍이는 금속으로 정교하게 제작한 총이었다. 번뜩이는 빛줄기가 뚱뚱한 사내의 발치를 치더니 놈의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팍에 까맣게 탄 구멍을 내어놨다.

그리고 좀 더 작고 정교하게 세공된 두 번째 총에서 노란 불줄기가 뿜어나와 또 한 놈의 몸뚱어리를 갈랐다.

부두 쥐들처럼 남은 놈들이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루시안은 냉정하게 총을 겨눴다. 빛줄기가 한 번 터질 때마다 적이 하나씩 쓰러졌고 눈 깜짝할 사이에 칼날 도살자단 여섯의 시체만 남았다.

루시안은 총집에 총을 집어넣고는 외투를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다른 놈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때문에 다가오는 재앙으로부터 이들의 영혼을 구할 시간은 없었다.

루시안은 한숨을 쉬었다. 잭도를 도와주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옛날의 약해 빠진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나려 해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어.” 루시안이 중얼거렸다.

예전의 자신은 지옥의 간수를 쓰러뜨릴 수 없었으니까.

2.2 1막 2장

올라프의 서리비늘 사슬 갑옷은 피와 내장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툴툴거렸다. 도끼에 닿을 때마다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끊어져 나갔다. 프렐요드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서 구한 얼음 정수로 벼려낸 도끼날이었다.

지글대는 횃불을 한 손에 들고 올라프는 크라켄웜의 축축한 내장을 헤쳐나갔다.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쩍쩍 길이 생겼다. 바다 괴물의 거대하고 번들번들한 내장과 단단한 뼈를 쪼개며 여기까지 오는 데 세 시간이나 걸렸다.

그렇다. 이 괴물은 이미 죽었다. 한 달 동안 북쪽에서부터 추격한 끝에 일주일 전에야 잡을 수 있었다. 겨울의 입맞춤호 장정들이 굵은 팔로 던져댄 작살이 서른 개도 넘게 녀석의 비늘 덮인 거죽에 꽂혔지만, 결국 그 기나긴 싸움을 끝낸 건 올라프의 창이었다.

빌지워터 근처까지 와서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괴물을 사냥하는 건 정말 짜릿했다. 한 번은 배가 한쪽으로 기울더니 올라프의 몸이 녀석의 입속으로 튕겨 들어갈 뻔했다. 순간 그는 지금이야말로 저주를 깨고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할 기회라며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조타수 스바펠이 그 망할 탄탄한 어깨로 방향타를 돌려 배를 바로 세워버렸다.

실망스럽게도 올라프는 살아남았다. 이러다가 정말로 흰 수염 텁수룩한 노인네가 되어 평화롭게 숨을 거두는 끔찍한 말로를 맞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배를 빌지워터에 정박시켰다. 크라켄웜의 몸뚱이는 팔고 어마어마한 이빨이나 기름처럼 잘 타는 검은 피는 기념물로 챙길 셈이었다. 거대한 갈비뼈는 어머니 응접실 지붕으로 쓰면 딱일 듯했다.

부족 사람들은 사냥에 지쳐 배에서 잠들었지만, 지친다는 개념 자체를 모르는 올라프는 쉴 수가 없었다. 그는 번쩍이는 도끼를 쥐고 거대한 괴물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녀석의 안턱에 도달했다. 갈빗대로 둘러싸인 식도 같은 공간이었다. 사냥꾼 한 무리를 한꺼번에 삼키고 노가 서른 개나 달린 큰 약탈선도 한입에 우그러뜨릴 수 있을 만큼 엄청난 놈이었다. 흑요석 바위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눈에 들어왔다.

올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술사나 점성술사네 불 제단 주변에 두르면 딱이겠군.”

그는 횃불의 뾰족한 끝을 크라켄웜의 살점에 박아 넣고 도끼로 턱뼈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빨이 빠져나오자 그는 도끼를 벨트에 꽂고 이빨을 손으로 들어 올려 어깨에 들쳐 맸다. 이빨이 제법 무거워 입에서 불평이 새어 나왔다.

“서리 트롤이 집을 만들려고 얼음을 모으는 꼴이군.” 올라프는 무릎까지 찬 피와 부식성 소화액을 헤치며 괴물의 내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크라켄웜의 뒷구멍 쪽에 난 상처를 비집고 나와 바깥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쉬었다. 연기와 땀, 시체의 악취로 가득한 빌지워터의 공기는 괴물 내장 속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오물더미를 끼고 살아가는 돼지들처럼 빽빽하게 모여 살아서 공기조차 무거웠다.

올라프는 악취가 스며든 침을 한껏 뱉어냈다. “빨리 집에 가는 게 낫겠구먼.”

프렐요드의 공기는 뼈까지 시릴 정도로 차갑고 맑았다. 하지만 여기는 숨을 들이켤 때마다 썩은 우유와 고기 냄새가 진동한다.

“이보쇼!” 바다 너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올라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을 살폈다. 어부 하나가 죽은 새와 종이 기이하게 매달려 있는 부표를 지나 노를 젓고 있었다.

“지금 그 괴물 똥구멍에서 나온 거요?” 어부가 외쳤다.

올라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 탈 돈이 없어서 프렐요드에서 이 녀석 뱃속으로 들어가서 여기 남쪽까지 왔지 않겠소.”

어부는 씩 웃더니 금이 간 푸른 술병을 기울여 한 모금 마셨다. “그 정신 나간 이야기, 한 번 제대로 듣고 싶구려!”

“겨울의 입맞춤호로 와서 올라프를 찾으시오. 그라뵐 한 통 나눠 마시고 죽음의 노래로 이 괴물의 명복을 빌어줍시다.” 올라프가 외쳤다.

2.3 1막 3장

흰 선착장은 늘 갈매기 똥과 썩은 생선 냄새가 나는 곳이었지만, 오늘은 살점과 나무 탄내가 진동했다. 그 냄새를 맡으니 갱플랭크의 부하들이 죽어가는 모습이 더 생생히 떠올랐다. 재가 하늘을 검게 뒤덮었고 해적이 잔뜩 탄 채로 불타오른 배에서 뿜은 독한 연기가 학살의 부두에서 이 서쪽까지 흘러들었다. 입안이 미끈거렸다. 미스 포츈은 선착장에 쌓인 뒤틀린 목재에 한껏 침을 뱉었다. 바다는 오랫동안 이곳에 수장된 수많은 시체에서 떨어져 나온 찌꺼기로 뒤덮여 있었다.

“다들 어젯밤에 고생했어.” 미스 포츈이 서쪽 절벽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끄덕였다.

“그렇죠, 뭐.” 레이픈이 대답했다. “오늘도 갱플랭크 밑에 있던 녀석들을 수도 없이 쓸어버릴 겁니다.”

“얼마나 잡았지?”

“크랙사이드 쪽을 열 명 더 잡았고 뼈무덤 불한당 녀석들은 이제 귀찮게 안 할 겁니다.”

미스 포츈은 고개를 끄덕이곤 선창가에 놓인 화려한 황동 대포를 바라보았다.

그 속엔 영면에 든 잭나이프 번이 누워 있었다. 빌지워터 모두의 눈앞에서 데드 풀 호가 폭발한, 모든 것이 바뀐 그 날 밤. 잭나이프 번은 총을 대신 맞고 끝내 눈을 감았다.

미스 포츈을 노리고 발사됐던 그 총알을…

이제 번이 바닷속 망자들의 세계로 떠날 시간이었고 미스 포츈은 그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가 가는 길을 배웅하려고 족히 이백 명은 모인 듯 보였다. 미스 포츈의 부하나 번의 오랜 해적단 친구들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은 번의 예전 선원이거나 갱플랭크를 무너뜨린 여자의 얼굴을 보러 온 호기심 많은 구경꾼인 듯했다.

번은 한때 자기 배가 있었다고 했다. 한때 쌍돛대 범선을 몰고 녹서스 해안을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미스 포츈은 그저 허풍이려니 했다. 그게 진짜이건 아니건, 빌지워터는 뱃놈들의 무용담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는 곳이긴 했다.

“학살의 부두에서도 놈들끼리 싸우게 한 걸 봤어.” 미스 포츈은 옷깃에 쌓인 재를 털어냈다. 길고 붉은 머리카락이 삼각모자 아래로 흘러내리더니 긴 예복 외투 어깨에 내려앉았다.

“네, 쥐구멍의 개들이 부두 지배자단이랑 싸우게 만드는 건 별로 어렵진 않았습니다. 밴 갤러 녀석, 항상 그 구역을 노리고 있었으니까요. 10년 전에 자기 아버지한테서 트레이빈네 부하들이 뺏어 갔다고 이를 갈고 있었죠.”

“그게 정말이야?”

“아무도 모르죠. 그게 중요한가요? 갤러라면 그 구역을 손에 넣으려고 무슨 거짓말이라도 만들어 냈겠죠. 전 그냥 약간 도와준 것뿐입니다.”

“거긴 지금은 별로 손에 넣을 것도 없겠지.”

“그렇습니다.” 레이픈이 씩 웃었다. “서로 아주 몰살시켜 버려서 양쪽 모두 한동안은 조용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한 주만 더 지나면 갱플랭크의 부하는 하나도 남지 않겠지.”

레이픈은 그녀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미스 포츈은 모른 척했다.

“자, 이제 번을 보내주자고.”

두 사람은 대포를 바닷속으로 굴려 넣으려 다가갔다. 오물이 떠다니는 수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나무 표식들이 점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평범한 나무 원반에서 정교한 바다 괴수 조각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누구 할 말 있는 사람 있어?” 미스 포츈이 물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그녀는 레이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포를 바닷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찰나, 갑자기 선착장에 고압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할 말이 있네.”

미스 포츈이 고개를 돌리자 색색의 예복과 기다란 천을 걸친 거구의 한 여인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신을 새긴 사내 무리가 여인을 뒤따랐다. 열 명 남짓의 사내들은 톱니 창과 총구가 넓은 권총, 구부러진 몽둥이로 무장한 채였다. 그들은 마치 선착장이 자기네 구역인 양, 그 여 사제 옆에 거들먹거리며 섰다.

“젠장, 저 여자 여기는 왜 온 거야?”

일라오이가 번이랑 아는 사인가요?”

“아냐. 나를 알지. 갱플랭크랑 한 때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들었어.”

“정말입니까?”

“소문이 그래.”

“오카오네 애들이 요 몇 주간 왜 그렇게 걸리적거렸는지 알 것 같네요.”

일라오이가 손에 든 돌로 된 둥근 성상은 사이렌호의 닻만큼 무거워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 큰 키를 자랑하는 이 여 사제는 어딜 가든 그 성상을 지니고 다녔다. 토착 신앙의 상징쯤 되는가 보다 하고 미스 포츈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여왕 바다뱀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그들은 발음하기 어려운 이상한 이름으로 불렀다.

일라오이가 어디선가 껍질을 벗긴 망고를 꺼내 들더니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을 벌리고 망고를 요란스럽게 씹으면서 그녀는 대포를 내려다보았다.

“빌지워터 사람이라면 나가카보로스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지. 안 그런가?”

“당연하죠.” 미스 포츈이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 막 그분한테 가는 길인 걸요.”

“나가카보로스님은 바다 밑바닥에 사시는 게 아니야. 아둔한 이방인들이나 그렇게 착각하지. 나가카보로스님은 우리의 삶을 이끄는 모든 것에 깃들어 계신다.”

“그렇군요. 제가 멍청했네요.”

일라오이는 우둘투둘한 망고 씨를 바다에 뱉더니 구체를 거대한 대포알이라도 되는 양 미스 포츈의 눈앞에서 흔들어 댔다.

세라, 자넨 멍청하지 않아.” 일라오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누군지,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긴 하지만.”

“여기엔 왜 오신 거죠? 그자 때문인가요?”

“하! 눈곱만큼도 아닐세.” 일라오이가 코웃음 쳤다. “나는 오로지 나가카보로스님만을 위해 살아가니까. 고작 사내 하나가 신에 비할 대상이나 되는가?”

“맞는 말씀이시네요. 갱플랭크만 안됐군요.”

일라오이는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려 웃었다. 씹고 있던 망고가 그대로 보였다.

“자넨 틀리지 않았어.” 일라오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귀 기울이지 않고 있군. 칼날 장어를 풀어준 셈이야. 녀석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 뜯기기 전에 목을 짓밟고 물러나야 해. 한 번 물리면 영원히 옴짝달싹 못 하게 될 게야.”

“무슨 뜻이죠?”

“무슨 뜻인지 스스로 알게 되면 나를 찾아오게.” 일라오이는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가운데 부릅뜬 눈처럼 생긴 장식 주변으로 분홍 산호 줄기가 구불구불 퍼져 나오는 모양의 펜던트가 놓여 있었다.

“받게.”

“이게 뭐죠?”

“자네가 길을 잃었을 때 나가카보로스님이 이끌어 주실 게야.”

“그래서 이게 대체 뭐죠?”

“방금 한 말 그대로라네.”

내키진 않았지만 여왕 바다뱀의 사제가 주는 선물을 거절해서 모욕을 주기엔 바라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펜던트를 받아 들고 모자를 벗었다.

펜던트의 가죽끈을 목에 매는 미스 포츈에게 일라오이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난 자네가 멍청하지 않다고 보네. 기대를 저버리지 말게.”

“당신이 뭘 기대하든 알게 뭐죠?”

“폭풍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지.” 일라오이는 미스 포츈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지 않나? 그러니 싸울 채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

그녀는 몸을 돌려 번의 시신을 넣은 대포를 발로 찼다. 첨벙 소리와 함께 대포는 물속으로 떨어졌고 거품을 내며 가라앉는 것도 잠시, 수면은 다시 기름 낀 찌꺼기로 덮이기 시작했고 표식만 둥둥 떠다니며 무덤의 주인을 알렸다.

여왕 바다뱀의 사제는 절벽 분화구의 신전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미스 포츈은 바다 저 멀리를 응시했다.

먼바다에서 서서히 폭풍우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일라오이가 바라보던 곳은 거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그림자 군도를 향하고 있었다.

2.4 1막 4장

밤에는 그 누구도 빌지워터 만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다.

왜 그런지, 피트는 물론 잘 알고 있었다. 평생을 함께해 온 바다였으니까. 이곳의 물살은 변덕스러웠으며 단번에 배를 두 동강 낼 암초들이 수면 아래 도사리고 있었고, 밑바닥에는 선장이 바다에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아 난파된 배들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게다가 바다에 빠져 죽은 귀신들이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저승길 동무를 만들려 안달이란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피트도 물론 잘 알고 있었지만 가족이 굶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갱플랭크미스 포츈의 싸움에 얽혀 제레마이아드 선장의 배도 다 타버렸기 때문에 피트는 일자리를 잃었고 식구들 먹일 돈도 한 푼 없는 상태였다.

그는 바위게 사과주 반병을 마시곤 용기를 짜내어 밤바다로 배를 밀었다. 나중에 그 기골 장대한 프렐요드 사내랑 술을 나눠 마실 생각을 하니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그는 사과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키고 텁수룩한 턱수염을 잡아당기더니 뱃전으로 사과주를 콸콸 부어 여왕 바다뱀에게 예를 표했다.

술기운에 감각이 둔해지고 몸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피트는 위험 구역을 알리는 부표와 죽은 새들 너머로 노를 저어 어젯밤 재미를 봤던 곳으로 나아갔다. 제레마이아드 선장은 항상 피트가 물고기 냄새를 맡을 줄 안다고 말했었다. 그는 데드 풀 호의 잔해가 떠내려온 곳에 고기 떼가 모여들 거란 예감이 들었다.

피트는 노를 배 안으로 끌어당겨 놓고 사과주를 한 모금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모금쯤 남은 병을 바다에 휙 던졌다. 그리곤 지치고 술에 절은 손길로 어떤 시체에서 파낸 애벌레를 바늘에 끼우고 뱃전에 걸린 막대에 실을 매었다.

그는 눈을 감고 배 가장자리로 몸을 구부려 양손을 물속에 담갔다.

“나가카보로스님.” 피트는 여왕 바다뱀을 토착민들이 부르는 대로 부르면 조금이나마 은총을 내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요. 이 불쌍한 어부를 부디 도와주시어 여왕님의 저장고에서 먹을 걸 아주 조금만이라도 나눠주십쇼. 저를 지켜주고 보살펴 주십쇼. 그리고 제가 여왕님의 품속에서 죽는다면 저 아래 망자들과 함께 거두어 주십쇼.”

피트가 눈을 떴다.

창백한 얼굴 하나가 수면 아래에서 일렁이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는 죽음같이 싸늘한 불빛이 일렁였다.

피트는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배 안으로 몸을 끌어당겼다. 이내 낚싯줄이 하나씩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배가 빙빙 돌기 시작하더니, 물속에서 아지랑이처럼 안개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안개는 두꺼워지고 석탄처럼 검은 안개가 바다 저 멀리에서 밀려오면서 빌지워터 절벽에서 나오던 불빛이 모두 사라졌다.

부표에 매달린 죽은 새들이 귀를 찢을 듯 까악까악 울었고, 그 몸뚱이들이 덜덜 떨면서 부표에 매달린 종이 울려댔다.

검은 안개…

피트는 공포에 사로잡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를 집어 노 걸이에 끼우려 애를 썼다. 안개는 온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차가웠고 안개가 닿을 때마다 피트의 피부에는 죽음이 스쳐간 자국이 검게 남았다. 그는 무덤가의 냉기가 등골을 타고 오르는 걸 느끼며 흐느꼈다.

“여왕 바다뱀님, 깊은 바다의 어머니, 나가카보로스님.” 그가 흐느끼며 말했다. “제발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쇼. 제발… 이렇게 간청…”

피트는 기도를 끝내지 못했다.

둔중한 파열음과 함께 배 바닥에서 갈고리 달린 쇠사슬들이 솟아올랐다. 갈고리는 피트의 살갗을 파고들었고, 사슬이 그 몸을 결박해 밑으로 강하게 끌어당겨 바닥에 고정해 버렸다. 피가 사방에 흥건했다.

피트가 온몸을 쥐어짜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자 검은 안갯속에서 순수한 악의의 화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메랄드빛으로 타오르는 불꽃 속에 뿔 달린 해골이 웃고 있는데, 눈구멍 자리에서는 악의에 가득찬 영혼이 피트의 고통을 음미하며 타오르고 있었다.

죽음의 악령은 허리춤에 녹슨 열쇠가 매달린 고대의 검은 제의를 걸치고 있었다. 한 손에 꽉 쥔 쇠사슬 끝엔 묘지에서 쓰는 랜턴이 굶주린 괴물처럼 기괴한 신음 소리를 내며 매달려 있었다.

피트는 아직 식지도 않은 자신의 육체에서 영혼이 떨어져 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동시에 랜턴 뚜껑이 그를 향해 지옥문처럼 열렸다. 랜턴 안에 갇힌 채 영원한 고통에 시달리는 영혼들이 질러대는 분노에 찬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피트는 영혼을 붙들려 애썼지만 갈고리가 낫질하듯 바람을 갈랐고, 랜턴이 닫혔다. 그렇게 피트는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가엾은 영혼…” 피트의 목숨을 거두어간 자가 입을 열었다. 비석에 자갈이 부딪히는 듯 둔탁한 목소리였다. “오늘 밤 이 쓰레쉬의 손에 떨어진 첫 번째 영혼일 뿐이지.”

검은 안개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 속에 사악한 악령들과 절규하는 망령, 유령 기사의 실루엣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둠이 바다를 가로질러 육지까지 몰려왔다.

이윽고 빌지워터(리그 오브 레전드)|빌지워터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3 2막

해로윙이 닥쳐온 빌지워터에서 미스 포츈은 수하들과 함께 망자들에 맞서 싸웁니다.
악령들은 산 자의 영혼을 갈구하며 빌지워터의 어두운 골목 구석구석을 휩쓸고 있습니다.
올라프는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적수를 만나게 되고 루시안그림자 군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악령의 존재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직감합니다.

3.1 2막 1장

멍청한 짓,

붉은 장막,
전쟁의 전조

미스 표츈은 권총의 장전을 풀고서 탁자 위 단도 옆에 내려놓았다. 저 아래 아비규환이 된 도시에서는 종소리와 경보가 미친 듯이 울렸다. 그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해로윙.

곧 닥칠 폭풍이 두렵지 않다는 듯, 그녀는 새로 손에 넣은 저택의 창문을 모조리 열어 놓았다. 올 테면 와보라지, 망자들의 갈망과 뼛속까지 저려오는 한기가 윙윙대는 바람에 실려 왔다.

빌지워터 동쪽 낭떠러지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이 저택은 한때 악랄한 폭력단 두목의 거처였지만, 그는 갱플랭크가 몰락한 후 아수라장이 벌어지면서 잠결에 질질 끌려 나와 자갈밭에 머리를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

이제 새 주인이 된 미스 포츈이 같은 꼴을 당할 수도 있을까.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번의 장례식 때 일라오이가 주고 간 펜던트를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산호 장식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펜던트의 의미를 정말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장신구라고 생각하면 꽤 괜찮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자, 그녀는 쥐고 있던 펜던트를 내려 놓았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진 알 수 있었다. 감히 노크도 없이 들어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뭐하십니까?” 레이픈이 물었다.

“뭐 하는 것처럼 보여?”

“뭔가 끝내주게 멍청한 짓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네요.”

“멍청한 짓?” 미스 포츈은 탁자를 두 손으로 짚었다. “우린 갱플랭크를 쓰러뜨리려고 피를 흘렸고 훌륭한 동료도 잃었어. 그런데 해로윙 따위가…”

“해로윙 따위가?”

“여긴 네가 맡도록 해.” 그녀는 휙 하고 쌍권총을 집어 허리춤에 달린 정교한 무늬의 총집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날 막을 생각은 마.”

“누가 막는다고 그랬나요?”

미스 포츈이 마침내 몸을 돌리자 문턱에 서 있는 레이픈이 보였다. 레이픈 뒤의 복도에는 가장 용맹한 자들로 가려 뽑은 20여 명의 부하들이 다양한 머스킷 총과 톱니바퀴식 권총부터 점토로 빚은 파편 수류탄 묶음, 박물관에서 훔쳐온 듯한 커틀러스로 무장하고 서 있었다.

“너희도 뭔가 끝내주게 멍청한 짓을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걸.”

“당연하죠.” 레이픈은 창문 가로 다가가더니 덧창을 거칠게 닫았다. “선장님이 혼자 거기에 뛰어들게 둘 줄 알았습니까?”

“난 갱플랭크를 쓰러뜨리려다 죽을 뻔했고, 아직 놈의 수하를 모조리 죽이지 못했어. 오늘 밤은 날 따라오지 않는 게 좋아.” 미스 포츈은 무늬가 새겨진 호두나무 권총 손잡이에 손을 올려둔 채로 부하들 앞에 서서 말했다. “너희 싸움이 아니야.”

“당연히 저희 싸움이죠.” 레이픈이 대답했다.

미스 포츈은 깊이 숨을 들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해를 보지 못할 수도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이번이 처음으로 함께 맞는 해로윙도 아니잖아요, 선장님?” 해골 모양의 칼자루 끝을 톡톡 치며 레이픈이 말했다. “그리고 절대 마지막도 아닐 겁니다.”

3.2 2막 2장

겨울의 입맞춤 호에서 조금 떨어져 있을 때 올라프는 비명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빌지워터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부둣가를 달리는 모습을 보자 호기심이 생겼다.

사람들은 배에서 허둥지둥 빠져나와 잽싸게 구불구불한 길거리로 도망쳤다. 한 번도 돌아보지도 멈추지도 않았고, 동료가 넘어지거나 바다에 빠져도 돌아보지 않았다.

싸움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지만 이건 좀 달랐다. 이건 적나라한 두려움이었다. 얼음 마녀가 산다는 빙하에서 발견한 얼어붙은 송장의 얼굴에 새겨져 있던 그런 두려움이었다.

부두 곳곳에서 덧창을 닫는 소리가 울렸고 대문마다 새겨진 기괴한 문양에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흰 가루를 뿌려댔다. 거대한 윈치가 여러 선체를 붙여 만든 목재 구조물을 절벽 위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올라프는 트롤 오줌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 맥주를 팔던 주점 주인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뭔 일이 벌어지는 거요?” 올라프가 소리쳐 물었다.

주인장은 고개를 젓더니 바다를 가리키곤 바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 올라프는 크라켄웜의 이빨을 부두 돌 바닥에 내려놓고 대체 무슨 일인지 뒤돌아보았다.

처음에는 폭풍이 몰려오는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검은 해무가 자욱했다. 안개치곤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다가오고 있었다.

“아, 이제야.” 올라프는 벨트에서 도끼를 끄집어냈다. “이거 좀 죽을만 해 보이는군.”

도끼를 양손에 번갈아 쥐자니 수 없이 겪은 전투의 흔적이 새겨진 가죽 자루가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에 착 감겼다. 올라프는 어깨를 돌리며 근육을 풀었다.

검은 안개가 가장 먼 곳에 정박한 배를 집어삼켰다. 안갯속에 도사린, 악몽에서 튀어나온 듯한 혼령들을 본 올라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전투마인 거대한 공포의 기사가 유령을 이끌고 있었고, 그 옆에는 검은 사신이 푸른 불빛에 휩싸여 있었다. 이 망자의 주인은 무서운 속도로 빌지워터로 날아들며 유령들이 부둣가를 마음껏 휘젓도록 두었다.

올라프는 이곳 사람들이 해로윙이란 말을 속삭이는 걸 들어본 적 있었다. 죽음과 어둠의 시간이라는 해로윙. 그런데 운 좋게도 손에 이렇게 도끼를 들고 맞게 될 줄이야.

유령 무리가 신선한 먹잇감의 냄새를 맡는 곰처럼 흔들리는 갤리선과 상선, 해적선을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마구잡이로 쥐어뜯었다. 돛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밧줄이 썩은 힘줄처럼 툭툭 끊어졌다. 배가 서로 충돌하면서 육중한 돛대가 산산조각 나고 배는 한낱 불쏘시개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비명을 지르는 망령 무리가 겨울의 입맞춤 호로 날아들었고 얼음처럼 단단한 배의 용골이 출렁하더니 쪼개졌다. 올라프는 분노에 차 절규했다. 배는 마치 바위로 가득 찬 것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는 유령 같은 팔다리와 낚싯바늘 같은 입을 가진 괴물이 동료를 물속으로 끌어당기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

“이 올라프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마!” 그는 부둣가를 따라 돌진하며 외쳤다.

바다에서 유령 무리가 끓어 오르듯 나타나 얼음처럼 차가운 발톱을 그를 향해 휘둘렀다. 올라프의 도끼가 쩡 소리를 내더니 번쩍이는 호를 그리며 유령 무리를 갈라놓았다. 유령이 도끼날에 찢기며 날카롭게 절규했다. 얼음 정수가 담긴 도끼날은 그 어떤 마법 무기보다 치명적이었다.

유령은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며 울부짖었고 올라프는 죽을 때를 대비해 지어뒀던 노래를 우렁차게 불렀다. 가사는 단순했지만 그 기개는 얼어붙은 땅의 유랑 시인이 읊을 법한 영웅 찬가에 비길 만했다. 이 노래를 부를 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부르지 못하게 될까 봐 얼마나 걱정했던가.

딱딱거리는 턱 무리의 안개가 그를 둘러쌌다. 유령과 안개로 이뤄진 괴물이었다. 쇠사슬 갑옷은 거미줄 같은 서리로 뒤덮였고 탐욕스런 유령이 내미는 죽음의 손길에 올라프의 피부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올라프의 심장은 강했다. 심장이 광전사의 분노로 이글거리는 피를 뿜어냈다. 망령의 손길이 닿은 자리가 더는 아프지 않았다. 이성이 사라지고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뺨을 물어뜯는 듯 에이는 바람에 입가에는 붉은 거품이 일었다. 그는 포효하며 미치광이처럼 도끼를 휘둘렀다.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적을 벨 뿐.

상대가 이미 죽은 자들이든 뭐든 올라프에겐 아무 상관 없었다.

올라프는 도끼를 휙 들어 올렸다. 다시 내려치려는 찰나, 등 뒤에서 기둥과 지붕보가 산산이 조각나는 굉음이 울렸다. 새로운 적의 얼굴을 보려 뒤로 돌자 부서진 나무와 돌 조각이 부둣가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파편에 얼굴이 베이고 주먹만 한 돌이 양팔을 내려쳤다. 녹아내린 지방과 동물의 체액이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비처럼 내리고 검은 안갯속에서 끔찍한 신음 소리가 울렸다.

그때 그는 보았다.

크라켄웜의 유령이 학살의 부두 잔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거대한 유령이 분노에 차 촉수를 위로 들어 올리더니 진노한 신이 번개를 내리꽂듯 부두를 내려쳤다. 거리 전체가 눈 깜짝할 사이에 폐허로 변했고 드디어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만한 적수를 만난 올라프의 분노는 격렬히 타올랐다.

그는 자신을 죽일 녀석에게 예를 표하듯 도끼를 들어 올렸다.

“끝내주는구먼!” 올라프는 죽음을 향해 몸을 던졌다.

3.3 2막 3장

그녀는 아름다웠다. 고양이 같은 눈, 도톰한 입술, 데마시아인 특유의 도드라진 광대뼈가 돋보이는 얼굴이었다. 펜던트 속의 작은 초상화는 걸작이었지만, 세나의 강인함과 굳센 의지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했다.

루시안이 그녀의 초상화를 꺼내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슬픔에 심장이 죄어오면 자신이 약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슬픔은 곧 치명적인 약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죽음을 온전히 느껴서는 안 되기에, 그는 펜던트를 탁 닫아버렸다. 절벽 아래 자리한 이 동굴 모래 바닥 깊이 아예 묻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육신처럼 추억까지 땅에 묻어버릴 순 없었다.

그저 쓰레쉬를 무너뜨리고 세나의 복수를 할 때까지 슬픔을 묻어두는 편이 낫다.

그날, 오직 그날이 와야만 루시안은 비로소 눈물로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고 장막 뒤의 여인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 있을 것이다.

그 끔찍했던 밤 후로 대체 며칠이나 지났을까?

끝없는 슬픔의 심연이 저 밑바닥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걸 느끼고 루시안은 늘 그랬듯 감정을 더욱 깊은 곳으로 꾹꾹 억눌렀다. 그는 세나와 함께 결사단에서 배웠던, 감정을 차단하는 주문을 계속해서 외웠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의 평정을 얻고 상상을 초월하는 죽음의 공포와 맞설 수 있었다.

천천히 슬픔이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사라지진 않았다.

그는 항상 펜던트를 열길 주저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과 세나의 추억 사이에 거리가 벌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세나의 턱선이 어땠는지, 피부 결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눈이 정확히 어떤 색으로 빛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복수를 위한 추격이 길어질수록 그녀는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루시안은 고개를 들어 올려 가쁜 숨을 겨우 내쉬며 거칠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빌지워터의 절벽이 거친 파도에 깎여 만들어진 동굴 벽은 연한 빛의 석회암으로 이뤄져 있었다. 바다와 토착민의 돌 곡괭이가 함께 만들어낸 이 도시 밑의 미로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희끄무레한 벽면에는 소용돌이와 물결무늬, 그리고 부릅뜬 눈처럼 생긴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토착 신앙의 상징이란 건 알 수 있었지만 이걸 새긴 이들은 꽤 오랫동안 이곳을 찾지 않은 듯 보였다. 루시안은 발로란의 어느 곳에서든 은신처로 안내해 줄 결사단의 비밀 상징을 따라가다 이 동굴을 찾은 것이었다.

동굴 천장에는 희미하게 반사된 빛만이 어른거리고 있었지만, 소용돌이무늬를 눈으로 좇다 보니 어느새 손바닥에서 광채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지켜줄게요.

루시안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지금 곁에 서 있는 듯, 그녀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생생하게 울렸다.

펜던트는 은은한 녹색 불꽃으로 반짝였다.

그는 펜던트를 목에 걸고 고대의 마력이 깃든 총을 휙 뽑아들었다.

쓰레쉬…”

3.4 2막 4장

빌지워터의 길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여전히 바다에서 종소리가 울려 오고 저 밑에서 공포에 잠긴 비명이 메아리쳤다. 쥐구멍 구역은 완전히 검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적막에 잠긴 비통의 항구로 폭풍이 휘몰아쳤다. 불길이 도살자의 다리를 집어삼켰고 회색 항구 위로 절벽에 희미한 안개가 걸려있었다.

고지대에 사는 이들은 집에 숨어 해로윙이 자신을 피해가길, 슬픔은 다른 불운한 인간들의 몫이 되길 여왕바다뱀에게 빌었다.

용연향으로 만든 액막이 촛불 빛이 녹색 바다 유리창마다 은은히 새어 나왔고 집집마다 검은 숲의 여제 뿌리에 불을 붙여 문과 덧창, 못질해 놓은 널빤지에 매달아 두었다.

“사람들, 정말 여제를 믿는 거야?” 미스 포츈이 물었다.

레이픈은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짙어지는 안개를 살피느라 눈매는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그는 기다랗고 그을린 뿌리를 셔츠 안쪽에서 꺼냈다.

“뭐, 각자 뭘 믿느냐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미스 포츈은 쌍권총을 뽑아들었다.

“난 이 총과 우리 자신을 믿어. 그 뿌리 말고 다른 건 없어?”

“이 커틀러스가 여섯 번의 해로윙 동안 절 지켜줬죠.” 레이픈은 칼자루 끝을 두드렸다. “여왕바다뱀님에게 10년 묵은 럼주도 한 병이나 바쳤다고요. 그리고 이 칼날은 순도 높은 태양 강철로 만든 거라고 해서 샀단 말입니다.”

미스 포츈은 칼집에 꽂힌 칼을 바라보았다. 굳이 칼날을 살피지 않아도 레이픈이 사기당한 게 분명해 보였다. 데마시아 산이라기엔 가드의 마감이 너무 조잡했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장님은요?”

미스 포츈은 권총탄이 담긴 주머니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나하나 마이런의 흑주에 담가 준비해뒀지.” 30여 명의 수하가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망자들이 싸움을 건다면 우리의 혼을 제대로 담아 응수해야 하지 않겠어?”

무거운 공기에 눌려 웃을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몇몇이 살짝 미소 짓는 게 눈에 띄었다. 오늘 같은 밤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절벽을 가르는 구불구불한 계단을 따라 빌지워터로 향했다. 이윽고 밧줄이 반쯤 썩은 숨겨진 다리를 건너, 수년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잊혀진 골목길을 지났다.

그 길을 따라가자 수상 판자촌으로 이뤄진 커다란 광장이 나왔다. 물결에 흔들리는 판잣집들의 뒤틀린 처마는 서로에게 속삭이기라도 하듯 맞닿아 있었다. 바다에 떠밀려온 나뭇조각들을 마구잡이로 이어 붙여 놓은 판잣집의 서로 꿰어 얽은 목재에는 서리가 앉아있었다. 얼어붙은 바람이 얼기설기 엮인 판잣집 사이로 저 멀리로부터 흐느낌과 비명을 실어왔다. 건물 사이사이 연결된 밧줄에 불붙은 화로가 매달려 이상한 약초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물결치는 웅덩이에는 환영이 언뜻언뜻 비쳐 보였다.

이곳은 평소에는 붐비는 시장이었다. 뱃전에는 좌판이 늘어져 있고 푸줏간, 술 장수, 상인, 해적, 현상금 사냥꾼과 전 세계 곳곳에서 온 부랑자들까지 득시글거리는 곳이었다. 빌지워터 어디에서나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고, 그래서 미스 포츈이 이곳을 택한 것이었다.

튀어나온 목재 끝마다 안개가 매달려 있었다.

버려진 뱃머리 장식들이 얼어붙은 눈물을 흘렸다.

안개와 그림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소매치기 광장 아닙니까?” 레이픈이 말했다. “어떻게 여기로 온 거죠? 여기가 소매치기 시절 제 구역이었는데, 들고 나는 길은 죄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죄다는 아니었던 거지.”

양쪽에 늘어선 회계사의 집은 어둠과 적막에 잠겨있었다. 둥근 창을 덮고 있는 천이 찢어져 나풀거리고 있었다. 미스 포츈은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어떻게 저도 모르는 길을 알고 계신 거죠?”

“이 도시랑 나랑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야.” 광장으로 흘러들어오는 검은 안개를 보며 미스 포츈이 눈을 찌푸렸다. “비밀을 다 털어놓는 오랜 친구라고 할까? 그러니 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온갖 골목길을 다 알고 있는 거지.”

텅 빈 광장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레이픈이 툴툴거렸다.

“이젠 뭘 하죠?”

“기다려야지.” 광장 중앙까지 가자 적에게 노출된 듯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안개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움직이자 검은 안개가 꿈틀댔다.

희끄무레한 해골 형상의 혼령이 텅 빈 눈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턱이 기괴할 정도로 크게 벌어지더니 애끊는 통곡 소리가 목구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미스 포츈의 총알이 눈구멍을 하나씩 치고 지나갔다. 해골이 노여운 듯한 비명과 함께 사라지자, 두 권총에 달린 톱니를 돌렸다. 그녀가 설계한 기발한 장전 장치가 다음 탄환을 채웠다.

그리곤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검은 안개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솟아오르더니 망자들이 광장으로 밀어닥쳤다.

3.5 2막 5장

올라프는 오늘 저녁에만 두 번째로 크라켄웜의 내장 속을 뚫고 들어갔다. 정신 나간 나무꾼처럼 도끼를 휘둘러 좌우를 마구잡이로 베며 즐거워했다. 괴물의 거대한 촉수는 잡히지 않는 안개로 이뤄져 있었지만 얼음 정수로 만든 도끼날이 안개를 살덩이처럼 쪼개어 놓았다.

녀석은 촉수를 마구 흔들어 부두를 내리쳤지만, 올라프는 덩치에 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빨랐다. 프렐요드에서 느려빠진 전사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는 몸을 굴려 빨판이 달린 촉수를 베었다. 촉수가 괴물의 본체에서 떨어지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올라프는 붉은 기운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촉수가 사방으로 난무하는 와중에도 괴물의 두개골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녀석의 눈 속에는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짧은 순간 올라프는 죽어 날뛰는 크라켄웜과 기묘하게 교감했다.

녀석의 혼이 나를 알아봤구나.

올라프는 기쁨에 차 웃음을 터트렸다.

“네 목숨을 가져간 게 나다. 이제 우린 죽음으로 엮인 사이로군! 네 녀석이 오늘 나를 죽인다면 우리 영원히 저승에서 싸워보자꾸나.”

이렇게 강력한 적수와 영원히 싸울 생각을 하니 쑤시던 근육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녀석의 입으로 돌진했다. 크라켄웜의 촉수가 닿을 때마다 록파 해안의 따가운 바람보다 더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올라프는 도끼를 머리 위로 들고 하늘로 도약했다.

영광스런 죽음이 눈앞에 보였다.

그때 촉수 하나가 위로 들리더니 올라프의 허벅지를 후려쳤다.

올라프의 몸이 높이 떠오르더니 아찔하게 호를 그리며 날아갔다.

“어서 오라!” 올라프는 녀석과 엮인 운명에 예를 표하듯 하늘로 도끼를 휘둘렀다. “죽음이여, 내게 오라!”

3.6 2막 6장

갈고리 같은 발톱과 얼음 같은 송곳니를 드러낸 망령이 유령의 소용돌이에서 튀어나왔다. 미스 포츈이 얼굴에 총알을 관통시키자 놈은 바람 속의 연기처럼 사라졌다.

두 번째 총알에 또 다른 유령이 사라졌다.

그녀는 비바람에 마모된 강의 폭군 석상 뒤에 숨어 총을 장전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충동적으로 몸을 구부려 이를 다 드러내고 웃는 석상에 입을 맞췄다.

각자 뭘 믿느냐의 문제다.

신이냐, 총알이냐, 자신의 실력이냐…

쇠 긁히는 소리와 함께 권총 하나에 총알이 걸려버리자 미스 포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기억 저 깊숙한 곳에서 엄마의 꾸짖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남한테 화약 섞는 걸 맡기니까 그렇지, 세라.”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고장 난 총을 총집에 넣고 검을 꺼내어 들었다. 슈리마 해안으로 향하는 한 데마시아 갤리선의 선장에게서 약탈한 검으로,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훌륭한 물건이었다.

미스 포츈은 석상 뒤에서 몸을 돌려나오며 장전된 권총과 검을 유령에게 휘둘렀다. 총에 맞은 유령 하나가 공기 속으로 사라졌고 검날은 살과 뼈를 베는 듯 녀석들을 토막 냈다. 망자의 영혼도 육체적인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진 않겠지만 어쨌든 미스 포츈은 그들 속의 무언가에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런 걸 진지하게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한다면 어떤 힘이 있어도 이곳을 헤쳐나갈 수 없을 것이다.

절규하는 유령의 폭풍이 소매치기 광장을 가득 메우자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녀석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난무하자 사람들의 피는 얼어붙었고 심장은 공포에 찬 채로 뜯겨 나갔다. 적어도 예닐곱은 목숨을 잃었다. 미스 포츈과 그 용맹한 부하들은 검과 머스킷 총으로 무장하고 여왕바다뱀과 사랑하는 이의 이름, 심지어 까마득히 먼 곳의 신까지 부르며 싸웠다.

‘뭐든지 힘이 된다면야,’ 미스 포츈은 생각했다.

레이픈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굴은 잿빛이었고 바쁜 밤을 보낸 선창가 접대부처럼 지친 숨을 쉬고 있었다. 안개가 거미줄처럼 그에게 들러붙어 있었고 목에 두른 뿌리는 앵두처럼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일어서.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미스 포츈이 명령했다.

“누구한테 지금 그런 말을 하십니까?” 레이픈이 발끈했다. “해로윙이라면 쥐꼬리로 감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겪었다고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린지 미스 포츈이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옆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의 등 뒤에 있는 무언가에 총을 쏘았다. 늑대와 박쥐를 섞어 놓은 듯한 유령이 사라지면서 귀에 거슬리는 비명을 질렀다. 뒤이어 갈고리와 송곳니 모양을 한 유령이 레이픈에게 달려들었고, 미스 포츈이 바로 빚을 갚았다.

“모두 엎드려!” 미스 포츈이 벨트에서 파편 수류탄 한 쌍을 집어 들더니 울부짖는 안갯속으로 던졌다.

수류탄이 굉음과 함께 터지며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무 파편과 돌조각이 우수수 날아들었다. 부서진 유리 조각이 반짝이며 하늘에서 단검처럼 내리꽂혔다. 매캐한 연기가 광장을 메웠지만 유령은 완전히 사라졌다.

레이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한쪽 귀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대체 수류탄에 뭐가 든 거죠?”

“검은 화약에 코펄과 루타의 진액을 섞은 거야. 내 비밀 무기고에서 가져온 거지.”

“그런 게 유령에 효과가 있습니까?”

“내 어머니가 그렇게 믿었지.”

“그렇군요.” 레이픈은 활짝 미소 지었다. “이렇게 되면 쉽게…”

“그런 말 하지 마.” 미스 포츈은 경고했다.

광장 곳곳에서 안개가 뭉쳐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실 가닥 같더니 점점 괴물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한데 엉긴 다리와 날카로운 이빨로 가득한 턱, 갈고리나 집게발이 달린 팔이 드러났다. 죽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형태를 갖추더니 되돌아 왔다.

이 망할 상황은 뭐지?

“죽은 놈을 다시 죽이는 건 꽤 어려운 일인가 봐.” 미스 포츈이 말했다.

자질구레한 부적이나 맹목적인 믿음만 있으면 유령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니 너무 순진했나 보다. 그녀는 빌지워터 사람들에게 갱플랭크가 없어도 된다는 걸,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미스 포츈은 목숨을 잃고 도시는 폐허가 될 위기에 처했다.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굵게 광장에 울리더니 연달아 또 한 번 울렸다.

서서히 접근하는 폭풍 속에서 천둥이 울었다.

천둥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모루에 망치를 거세게 두드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천둥이 점점 빠르고 요란하게 치면서 땅까지 울려왔다.

“세상에, 저게 대체 뭐죠?” 레이픈이 물었다.

“나도 몰라.” 안갯속에서 유령 기사의 실루엣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기괴한 몸뚱이의 전투마에 올라앉아 있었고 투구는 이빨을 드러낸 악마의 형상이었다.

“공포의 기사.” 미스 포츈이 말했다.

레이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얼굴은 벌써 창백해져 있었다.

“그냥 기사가 아니에요.” 레이픈이 대답했다. “전쟁의 전조라고요.”

4 3막

전쟁의 전조 헤카림쓰레쉬와 함께 빌지워터에 상륙했습니다.
루시안올라프, 미스 포츈은 힘을 합쳐 그림자 군도의 악령들을 몰아내기로 하지만 망자의 분노를 피할 길은 없어 보입니다.

4.1 3막 1장

정화의 사도,

죽은 자의 도시,
피난처

끝없는 학살의 악몽과 한없는 분노를 뜻하는 그 이름에 미스 포츈의 부하들은 공포를 느끼며 몸서리쳤다.

전쟁의 전조.

한 때 헤카림이란 이름을 가졌다곤 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니면 옛 이야기꾼이 지어낸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어리석은 이들만이 녹서스의 전함을 침몰시킬 만한 양의 럼주를 마신 후에야 감히 그 어두운 전설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이 처음 멀리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땐, 그냥 말 탄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괴한 존재가 직접 눈에 들어오자, 공포가 한기처럼 미스 포츈을 둘러쌌다.

한때는 기사가 말에 타고 있는 모습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둘이 하나로 합쳐져 파괴밖에 모르는 거대한 괴물이 되었다.

“우리, 완전히 포위됐습니다.” 누군가 말했다.

미스 포츈은 잠시 그 반인반마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령 기사 무리의 실루엣이 투명한 녹색 빛을 내뿜었고, 그들의 손엔 어두운 기운을 뿜어내는 검이나 기병창이 들려 있었다. 헤카림이 무시무시하게 휘어진 날을 휘둘러 뽑자, 그 서슬 퍼런 날이 녹색으로 불타올랐다.

“여기서 나가는 비밀 통로 같은 건 없습니까?” 레이픈이 물었다.

“없어. 난 저 녀석이랑 싸워보고 싶은 걸.”

“전쟁의 전조와 싸워 보고 싶다고요?”

미스 포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갑자기 곡물 가게 지붕에서 광장으로 뛰어내렸다. 날렵한 동작으로 착지하자 낡은 가죽 외투 뒷자락이 길게 펼쳐졌다. 그가 쥔 권총 두 자루는 어머니의 총기 제작소에서도 본 적이 없는 종류였다. 무늬를 새긴 돌 같은 덩어리를 황동으로 감싼 물건이었다.

뒤이어 남자의 권총이 이글거리는 빛줄기를 빗발치듯 뿜어내고 환한 빛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데드 풀 호를 끝장낸 화력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남자는 제자리에서 휘돌며 날쌘 동작으로 적들을 쏘아 맞혔다. 빛줄기에 맞을 때마다 안개는 타들어 갔고 망령들이 괴성을 지르며 사라졌다.

안개가 소매치기 광장에서 물러나기 시작하면서 헤카림과 죽음의 기사들도 함께 후퇴했다. 하지만 미스 포츈은 이들이 곧 다시 올 거란 걸 직감했다.

남자는 총을 총집에 꽂더니 미스 포츈을 향해 몸을 돌리곤 후드를 내렸다. 어둠으로 물든 잘생긴 얼굴과 생기를 잃은 눈빛이 드러났다.

“그림자란…” 그가 입을 열었다. “빛이 밝으면 사라지게 마련이지.”

4.2 3막 2장

올라프는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라켄웜과의 영웅적인 싸움을 사람들이 대대손손 이야기하길 바랐지, 이렇게 볼품없이 떨어져 죽었다고 기억되긴 싫었다.

그 바다 괴물 녀석에게 돌진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만약 올라프가 녀석의 촉수에 잡혀 공중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본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 뒤 하찮은 쥐새끼처럼 내동댕이쳐지는 모습은 보지 못한 채 도망가 버렸기를 간절히 바랐다.

올라프는 절벽 경사면에 매달린 집들의 지붕을 뚫고 떨어져 내렸다. 배의 선체인 듯싶기도 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지나가니 알아볼 수 없었다. 건물에 그대로 곤두박질친 올라프는 부서진 목재나 흙 기와와 뒤섞여 굴러떨어졌다. 그 와중에 놀라 소리치는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바닥이 무너지면서 대들보를 들이받고는, 또 절벽을 따라 굴러떨어졌다. 튀어나온 바위에 맞고 튀어 오른 후 열린 창문으로 머리부터 처박혔다 싶은 순간, 다시 바닥이 부서져 내렸다.

구멍 위에서 성난 욕설이 들려왔다.

올라프가 마침내 떨어진 곳은 밧줄과 도르래, 깃발이 그물처럼 얽힌 곳이었다. 떨어지며 몸부림치는 바람에 팔다리와 도끼가 밧줄에 엉망으로 엉켜버렸다. 마치 운명이 그에게 돛 천으로 된 수의를 입혀 놓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젠장,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4.3 3막 3장

“당신, 뭐지? 그리고 그런 총은 어딜 가면 얻을 수 있는 거야?” 미스 포츈이 남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내 이름은 루시안이다.” 그는 주저하듯 미스 포츈의 손을 잡았다.

“반갑소이다, 친구.” 동료라도 되는 듯 레이픈은 남자의 등을 두드렸다. 레이픈의 스스럼없는 행동을 루시안이 아주 불편해하는 게 미스 포츈의 눈에 띄었다. 이 남자는 사람들이랑 어울려 지내는 법을 잊어버린 듯 보였다.

루시안의 시선은 광장 가장자리로 향해 있었고 손가락은 총 손잡이를 훑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군, 루시안.” 미스 포츈이 말했다.

“이동해야 해. 전쟁의 전조가 곧 돌아온다.”

“이 사람 말이 맞습니다.” 레이픈이 애걸하는 듯한 표정으로 미스 포츈을 바라봤다. “안으로 들어가서 문에 널빤지를 못질해 둡시다.”

“안돼. 우린 싸우러 나온 거야.”

세라, 그건 나도 알아요. 마침내 빌지워터를 손에 넣었으니 지키기 위해, 모두에게 우리가 갱플랭크보다 낫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싸워야 하겠죠. 그리고 지금까지 충분히 보여줬어요. 검은 안갯속으로 뛰어들어서 망자들과 싸웠다고요. 이 정도면 갱플랭크보다 더 큰 일을 해낸 겁니다. 창밖을 내다본 사람은 다 인정할 겁니다. 감히 보지는 못하고 소리만 들은 사람도 다 알 거라고요. 그런데 대체 뭘 더 바라죠?”

“빌지워터를 위해 싸우는 것.”

“빌지워터를 위해 싸울 수도 있지만 빌지워터를 위해 죽을 수도 있겠죠. 난 첫 번째는 하겠는데 두 번째는 그럴 생각 없네요. 여기 이 사람들 모두 당신을 따라 이 지옥까지 왔지만, 지금은 뒤로 물러설 때라고요.”

미스 포츈은 용맹스럽지만 지친 모습의 부하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천박한 장신구가 탐나서 자기 엄마를 팔아먹을 일은 절대 없을 믿음직한 이들, 이미 충분히 미스 포츈이 바랬던 것보다 더 많은 걸 해낸 이들이었다. 검은 안개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해도 정말 용감한 일인데, 이들에게 내 복수를 위해 사지로 뛰어들라고 할 순 없었다.

“네 말이 맞아.” 미스 포츈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여기까지 하지.”

“그럼, 행운이 함께 하길.” 인사를 남기고 루시안은 몸을 돌리더니 다시 총을 뽑아들었다.

“잠깐.” 미스 포츈이 외쳤다. “우리랑 함께 가지.”

루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처리해야 할 망령이 하나 있다. 지옥의 간수 쓰레쉬라는 녀석이지. 그 녀석을 죽여야만 한다.”

미스 포츈은 루시안의 눈가에 자리 잡은 주름이 깊어지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를 잃은 후로 자신도 줄곧 지었던 표정이었다.

“그 자식이 당신에게서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 갔나 봐. 그렇지?”

루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굳은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걸 이야기했다.

“망자와 싸워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지만, 혼자 있다간 내일 아침 해는 못 볼 거야. 뭐, 상관없어 보이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 쓰레쉬란 녀석한테 잡혀간 그 사람은 당신이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걸 바라지 않을걸?”

루시안의 눈길이 아래로 향했다. 그의 목에 매달린 은제 펜던트가 미스 포츈의 눈에 들어왔다. 혼자만의 착각인지 안개가 부린 마술인지는 몰라도 펜던트가 달빛에 빛나는 듯 보였다.

“우리랑 함께 가지.” 미스 포츈이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안전하게 있을 곳을 찾으면 살아남아서 다시 녀석들을 해치울 수 있을 거야.”

“안전한 곳? 이 도시에서 대체 안전한 곳이 어디 있지?” 루시안이 말했다.

“내가 아는 곳이 하나 있어.” 미스 포츈이 대답했다.

4.4 3막 4장

그들은 소매치기 광장을 떠나 서쪽 바다뱀 다리를 향해 올라가다가 한 프렐요드 출신 사내를 발견했다. 뒤틀린 돛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꼭 수의에 휘감겨 교수대에 매달린 시체 같았다. 하지만 시체라기보단 금방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팔딱거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조각난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미스 포츈은 고개를 들어 그가 어디에서부터 떨어졌는지 확인했다.

절벽에 자리한 마을에는 그가 굴러떨어지며 남긴 흔적이 길게 남아있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게 기적처럼 보였다.

루시안이 총을 뽑아들었지만 미스 포츈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자는 저승에서 온 게 아닐걸.”

얽힌 돛 속에서 고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른 나라에서 했더라면 죽을 때까지 얻어맞아도 쌀만 한 욕설이 누가 들어도 분명한 프렐요드 억양으로 들려왔다.

미스 포츈은 검 끝을 천에 대고 아래로 죽 그었다. 점박이바다표범 새끼가 태어나듯 수염이 텁수룩한 거구의 사내가 자갈밭으로 툭 떨어졌다. 생선 내장 냄새가 진동했다.

남자는 휘청거리며 일어서더니 얼어붙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도끼날을 치켜들었다.

“어느 쪽이 학살의 부두요?”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리며 남자가 물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머리는 커다란 혹과 멍이 자리 잡고 있었다.

“웬만하면 코를 믿고 따라가라고 할 텐데 말이지.” 미스 포츈이 답했다. “그런데 당신, 그 상태로 냄새를 맡을 수나 있을까?”

“그 크라켄웜 녀석, 내 열 번이라도 다시 죽일 거요. 그 녀석을 죽여야만 하오.”

“그거, 오늘 밤 유행인가 보네.” 미스 포츈이 말했다.

4.5 3막 5장

프렐요드 사내는 자신을 얼음의 정당한 여주인을 섬기는 전사 올라프라고 소개했다. 머리에 받은 충격이 가시자, 그는 검은 안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를 찾아 싸우기 위해 미스 포츈 일행에 합류하겠다고 말했다.

“당신, 죽고 싶나?” 루시안이 올라프에게 물었다.

“당연하고말고.” 올라프는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는 듯 대답했다. “난 전설로 남을 최후를 원한다네.”

미스 포츈은 이 정신 나간 남자가 어떤 정신 나간 죽음을 꿈꾸든 상관없었다. 어찌 됐든 저 도끼를 엉뚱한 곳으로 휘두르지만 않는다면 합류해도 좋았다.

올라가는 동안 안개가 세 번이나 몰려왔고, 그때마다 동료가 한 명씩 쓰러졌다. 건물 주변에서 녹슨 쇠를 숫돌에 가는 듯 귀를 찢는 웃음소리가 울려 왔다. 달빛 아래 지붕에선 까마귀가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순간을 기다리며 깍깍 울어댔다. 늪 위를 흔들흔들 떠다니는 도깨비불처럼 검은 안개 속에서 불빛이 춤추며 사람들을 유혹했다.

“쳐다보지 마시오.” 루시안이 경고했다.

하지만 어떤 부부에게는 이미 늦은 경고였다. 미스 포츈은 그들의 이름은 몰랐지만 두 사람의 아들이 바다 열병으로 죽은 지 1년도 채 안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환영을 따라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어떤 사내는 동료들이 말리기도 전에 갈고리 손으로 자기 목을 그었고, 또 누군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바다뱀 다리에 도착했을 때는 인원이 열 명 남짓으로 줄어 있었다. 미스 포츈은 쓰러진 동료들에게 미안해할 수 없었다. 이미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는가. 살아남고 싶었다면 굳게 닫힌 집안에 들어 앉아 목숨을 지켜준다는 상징물 뒤에 숨어 여왕 바다뱀의 부적을 손에 쥐고 아무 신에게나 기도하면 됐을 일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해로윙에서 살아남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올라오며 덧창과 문이 산산이 조각나 힘없이 매달려 있는 집을 수도 없이 보았다. 미스 포츈은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았지만, 얼어붙은 얼굴들이 집 안에서 보내는 원망의 눈길과 마지막 순간의 공포는 보지 않아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검은 안개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야 말겠어.” 시체 안치소가 되어버린 집을 또 하나 지나며 레이픈이 말했다. 안에 살던 가족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미스 포츈도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어쨌거나 그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다리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바다 괴물이 절벽을 한 입 크게 베어 문 듯한 분화구 한가운데 건물이 서 있었다. 빌지워터의 다른 건물처럼 바다에서 떠내려온 목재로 지은 건물이었다. 머나먼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나무나 나뭇가지로 벽을 세우고 창문은 해저에서 쓸려온 난파선에서 건진 유리로 만들어 놓았다. 그 어디에도 쭉 뻗은 직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구불구불한 모양새가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언젠가 다른 곳으로 가 뿌리를 내릴 것처럼 보였다.

건물의 첨탑마저도 뒤틀려 있었다. 일각 고래의 뿔처럼 나선으로 홈이 파인 첨탑 끝에는 미스 포츈이 목에 건 장신구와 똑같은 나선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둘레는 은은하게 빛났고 그 주변으로는 어둠조차 다가가지 못했다.

“저건 뭐지?” 루시안이 물었다.

“여왕 바다뱀의 신전, 나가카보로스의 집이지.” 미스 포츈이 대답했다.

“안전한 곳인가?”

“여기 있는 것보단 나을 거야.”

루시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일행은 구불구불한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 건너 보이는 신전처럼 다리 역시 울퉁불퉁하고, 발밑의 돌들은 살아 있는 양 굽이쳤다.

레이픈은 난간이 무너진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매년 높아지는군요.”

미스 포츈은 내키지 않았지만 레이픈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두와 쥐구멍 구역이 완전히 검은 안개 아래 잠겨 있었다. 건돌라 포대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빌지워터의 숨구멍을 완전히 조르고 있었다. 안개는 그 촉수를 점점 도시 깊은 곳까지 뻗었다.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여기 위쪽까지 울려 왔다. 비명이 들릴 때마다 목숨이 하나씩 사라졌고, 망자의 부대 머릿수는 하나씩 늘었다.

“몇 년만 더 지나면 빌지워터에서 안개가 닿지 않는 곳은 없겠군요.”

“그 몇 년 안에 또 무슨 일이 있을진 모르잖아?” 미스 포츈이 말했다.

“이게 매년 찾아온다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곳이건만 올라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난간에 한 발을 척 올려놓으며 물었다.

미스 포츈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주는군. 오늘 밤 죽지 못하더라도 검은 안개가 올 때마다 내 여기로 돌아와야겠군.”

“그러다 제삿밥 먹게 되는 수가 있어요.” 레이픈이 말했다.

“그 말 고맙네.” 올라프가 그 거대한 손바닥으로 레이픈의 등을 내리치자 레이픈은 다리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때 안갯속에서 유령의 촉수가 여럿 올라와 쥐구멍 구역의 집을 부수는 걸 보더니 올라프의 눈이 커졌다.

“저 녀석!” 올라프가 외쳤다.

누가 말리기도 전에 그는 난간을 뛰어넘어 다리에서 몸을 던졌다.

“저 미친...” 올라프가 저 아래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레이픈이 내뱉었다.

“얼어붙은 땅에 사는 녀석들은 다 미쳤지.” 미스 포츈이 말했다. “그래도 내가 본 중에는 저자가 최고야.”

“다들 안으로 들어가.” 루시안이 말했다.

미스 포츈이 루시안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니, 갈고리 쇠사슬을 달고 다 떨어진 검은 제의를 입은 거대한 형체가 서 있었다. 역겨운 녹색 빛에 둘러싸인 그 혼령은 창백한 손으로 랜턴을 흔들흔들 들어 올렸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살인마의 총구를 노려봤던 그 날 후로는 느껴본 적 없던 거대한 공포가 엄습했다.

루시안은 총을 뽑아들었다. “쓰레쉬는 내 몫이다.”

"당신 다 가져." 미스 포츈은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신전 주변으로 그림자가 다가오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순간 숨이 막혔다. 헤카림과 죽음의 기사 무리가 분화구 끝자락에 서 있었다.

전쟁의 전조가 불타는 검을 들어 올리자 유령 기사 무리가 지옥의 말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기사라면 그렇게 비탈을 내려올 순 없다.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망자들뿐이었다.

“뛰어!” 미스 포츈이 외쳤다.

5 4막

루시안이 일생일대의 숙적과 맞닥트리면서 미스 포츈과 동료들에게도 해로윙의 파멸이 닥쳐옵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악령을 피해 여왕 바다뱀의 신전으로 도망치지만 산 자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으러 달려드는 그들을 막아내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5.1 4막 1장

그녀는 죽지 않았다,

낯선 동료,
다시 움직이다

돌다리 끝에 불쾌한 녹색 빛이 짙어졌다. 지옥의 간수 쓰레쉬는 썩어가는 후드로 이미 시체에 지나지 않는 몸뚱이를 감추고 있었지만, 랜턴 빛 때문에 삐쩍 마르고 너덜너덜해진 살점뿐만 아니라, 가학적인 쾌감밖에 남지 않은 감정까지 희미하게 엿보였다.

망령답게 미끄러지듯 움직일 때마다 제의 밑으로 고통에 잠긴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고, 고개를 살짝 들자 날카로운 이빨이 소름 돋게 번뜩이며 지어내는 미소가 루시안의 눈에 비쳤다. 오래 기다린 순간이 다가왔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필멸자여.” 쓰레쉬가 입속에서 말을 음미하듯 굴리며 내뱉었다.

루시안은 무릎을 꿇고 전투에 앞서 영혼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주문을 외웠다. 수도 없이 이 순간을 그리며 준비해 왔건만, 막상 때가 오자 입이 바짝 마르고 손바닥은 땀으로 미끈거렸다.

“네놈이 세나를 죽였지.” 그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세상이 내게 허락한 단 하나뿐인 사람을.”

“세나?” 쓰레쉬의 축축한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울렸다. 교수대의 올가미에 졸려 어그러진 성대로 쥐어짜낸 듯한 소리였다.

“내 아내 말이다.” 입을 열면 안 된다는 걸, 자신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놈의 무기가 될 것이란 걸 알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도 슬픔이 밀려오면서 이성은 사라지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루시안은 목에 걸린 은제 펜던트를 들어 올려 뚜껑을 열었다. 자신의 상실감이 얼마나 깊은지 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쓰레쉬는 송곳 같은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누런 손톱으로 랜턴의 유리를 두드렸다.

“물론 기억한다. 그 발랄한 영혼 말이지. 아직 식어서 말라 비틀어지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지. 고문하기 딱 좋은, 새 삶에 대한 희망. 봄꽃처럼 신선했지만, 그래서 더 꺾어버리기 쉬웠지.”

루시안이 총을 들었다.

“그녀를 기억한다면 이것도 기억하겠지.”

다 해진 후드 아래로 드러난 쓰레쉬의 사악한 미소는 사라질 줄 몰랐다.

“빛의 무기로군.”

“빛은 언제나 어둠을 이기는 법이지.” 루시안은 증오심을 모두 끌어 모아 총에 담았다.

“잠깐.” 쓰레쉬가 외쳤지만 루시안은 더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눈이 멀 정도로 강한 빛 두 줄기가 발사됐다.

정화의 빛이 지옥의 간수를 활활 태웠고 놈의 울부짖는 소리가 루시안의 귀에는 노래처럼 들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울부짖음이 껄껄대는 웃음으로 변했다.

쓰레쉬 주변의 어두운 빛이 흐릿해지면서 랜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놈은 정화의 빛에도 전혀 불타지 않은 모습이었다.

루시안이 계속해서 눈부신 빛 줄기를 놈에게 명중시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빛 줄기는 랜턴에서 나오는 어두운 에너지 때문에 놈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로 사라져버렸다.

“그래, 그 무기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세나의 정신에서 그 비밀을 다 뽑아냈거든.”

루시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쓰레쉬는 씨근덕거리며 다 쉰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몰랐나? 결사단에서 나에 대해 배우고도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는 건가?”

루시안은 뱃속 한가운데 싸늘한 공포가 자리 잡는 걸 느꼈다. 받아들이면 미쳐버릴까 봐 끝내 인정하지 않은 공포였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랜턴을 들어 올리며 쓰레쉬가 말했다.

루시안은 랜턴 속 깊은 곳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영혼들을 바라보았다.

쓰레쉬는 씩 웃었다. “세나의 영혼을 끌어내서 여기에 넣어 두었지.”

“아냐… 세나가 죽는 걸 봤다고.”

“그리고 아직도 이 랜턴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지.” 쓰레쉬는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그 여자에겐 이곳에 존재하는 매 순간이 고통의 향연이다.”

“안 돼…” 루시안은 털썩 무릎을 꿇으며 흐느꼈다. 총이 돌바닥에 덜커덕 떨어졌다.

쓰레쉬는 루시안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허리춤에 달린 쇠사슬이 루시안의 몸을 뱀처럼 휘감기 시작하더니 갈고리가 부드러운 살점을 찾으며 외투를 뚫고 들어갔다.

“희망이 그 여자의 약점이었고 사랑은 파멸의 원인이었지.”

루시안이 고개를 들어 쓰레쉬의 뒤틀린 몰골을 바라보았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검은 구멍만 있을 뿐이었다.

본래 쓰레쉬가 무엇이었건 그때의 그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연민도 자비도 인간성도 조금도 없었다.

“모든 건 결국 죽음과 고통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인간이여.” 루시안의 목으로 손을 뻗으며 쓰레쉬가 말했다. “어디로 도망치든 간에 결국엔 죽음밖에 남지 않지. 그리고 그 죽음 앞엔 바로 내가 있다.”

5.2 4막 2장

신전으로 뛰어가는 미스 포츈의 목에 가쁜 숨이 차올랐다. 숨을 폐 끝까지 들이쉬기 힘들었고, 핏줄이 얼어붙어 피가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기력을 빨아들이는 안개가 신전이 자리 잡은 거대한 바위 근처까지 몰려왔다. 군주급의 언데드이나 출현한 탓이었다. 등 뒤에서 섬광이 번쩍했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바닥에 발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바닥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문득 목에 유령마의 숨결이 닿는 상상을 해보았다.

유령 기사의 창에 찔린다고 생각하니 어깻죽지 사이가 타오르는 듯했다.

‘잠깐, 유령인데 불꽃은 어째서 튀는 거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자니 웃음이 터졌다. 신전의 비틀린 나무 문에 다다랐을 때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레이픈과 부하들은 이미 도착해 주먹과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여왕 바다뱀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제발 들여보내 주십쇼!” 레이픈이 외쳤다.

레이픈은 다가오는 미스 포츈을 바라보았다.

“문이 잠겼어요.”

“봤어.”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일라오이에게서 받은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그리곤 손바닥으로 산호 장식 부분을 나무문에 강하게 눌렀다.

일라오이! 그 빌어먹을 장어의 목을 짓밟을 준비가 됐으니 어서 이 망할 문을 열어요!”

“장어? 무슨 장어요?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레이픈이 물었다.

“신경 쓰지 마. 뭔가 비유겠지.” 미스 포츈은 신경질적으로 나무문을 후려쳤다.

그러자 문이 언제 잠겨있었느냐는 듯 앞으로 활짝 열렸다. 미스 포츈은 한발 뒤로 물러나 부하들이 먼저 들어가길 기다렸다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순간 헤카림이 땅을 차고 뒷발로 일어서더니 불타는 검을 미스 포츈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손 하나가 미스 포츈의 옷깃을 낚아채 뒤로 잡아당겼다. 검 끝이 미스 포츈의 목 바로 앞을 휙 스쳤다.

그녀는 큰 충격을 느끼며 뒤로 넘어졌다.

문간에는 일라오이가 돌로 된 성상을 방패처럼 들고 서 있었다. 성상에는 하얀 안개가 작은 불꽃처럼 서려 있었다.

죽은 자는 여기 들어올 수 없다.” 일라오이가 말했다.

레이픈과 다른 부하들이 문을 당겨 닫고 육중한 참나무 빗장을 양 가장자리의 녹슨 닻에 고정시켰다. 그러자마자 밖에서 엄청난 힘이 문을 내려쳤다.

나무가 쪼개지며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일라오이는 몸을 돌려 조개와 점토 조각을 모자이크처럼 놓아 만든 바닥에 아직 뻗어있는 미스 포츈을 지나쳤다.

“세라, 쉴 만큼 쉬었는가?” 일라오이의 말을 듣고 미스 포츈은 몸을 일으켰다. 신전에는 200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토착민부터 해적, 상인, 온갖 인간 쓰레기들, 그리고 운이나 머리가 나빠서 하필 해로윙 때에 이곳에 온 여행자까지 빌지워터의 온갖 인간 군상이 모여있었다.

“저 문, 괜찮은가요?” 미스 포츈이 물었다.

“괜찮을 수도, 안 괜찮을 수도.” 그렇게 대답하면서 일라오이는 신전 끝, 촉수가 무수히 달린 조각상을 향해 걸어갔다. 미스 포츈은 그 답을 나름 이해해보려다 그만두곤 수많은 나선 문양을 쳐다보았다.

“그건 제대로 된 답이 아니잖아요.”

“내가 가진 유일한 답이라네.” 일라오이는 석상 오목한 곳에 성상을 놓더니 그 앞에 웅크려 앉아 주먹으로 허벅지와 가슴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렸다. 신전 안에 있던 사람들도 일라오이를 따라 손바닥으로 살갗을 치거나 발을 구르고 미스 포츈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세상에 움직임을 다시 불러오는 거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일라오이가 대답했다.

“그럼 제가 시간을 벌어 드리죠.” 미스 포츈이 약속했다.

5.3 4막 3장

루시안은 유령의 갈고리가 살 속으로 깊이 파고드는 걸 느꼈다. 북쪽 땅의 얼음보다 차갑고 두 배는 더 고통스러웠다. 목을 휘감은 쓰레쉬의 손이 조여들자 그 손에 닿은 살갗이 타들어 갔다. 놈이 기력을 빨아들이는 게 느껴졌다. 심장 박동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쓰레쉬는 루시안을 위로 들어 올리고는 영혼을 빨아당기려고 랜턴을 높이 쳐들었다. 랜턴 안에서는 신음하는 불빛이 동요하듯 소용돌이쳤고, 영혼들이 얼굴과 손을 랜턴 유리에 짓누르고 있었다.

“그림자를 사냥하는 자여, 내 오랫동안 네 영혼을 쫓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때가 왔구나.” 쓰레쉬가 말했다.

루시안은 시야가 점차 회색빛으로 흐려지며 영혼이 육신에서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영혼을 붙잡으려 애써봤지만 영겁의 시간 동안 영혼을 거둬온 지옥의 간수를 이기긴 무리였다.

“좀 더 저항해 보시지.” 괴물 같이 입맛을 다시며 쓰레쉬가 말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그 영혼은 더욱 환하게 타오르거든.”

루시안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입에선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영혼을 실은 따뜻한 숨결이 빠져나올 뿐이었다.

죽음의 기운이 흠뻑 밴 낫이 루시안의 눈앞에서 번쩍이며 둥둥 떠다녔다.

‘루시안…’

이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다.

‘내 사랑…’

낫의 굶주린 날이 육신과 영혼을 분리하기 좋은 방향으로 틀어졌다.

루시안은 랜턴 유리에 얼굴 하나가 나타나는 걸 보고서 숨을 들이켰다. 수없이 많은 얼굴이 떠 있었지만 누구보다 절실하게 바깥으로 향하는 얼굴은 하나뿐이었다.

도톰한 입술, 고양이 같은 커다란 눈으로 살아야 한다고 그에게 외치고 있는 그 얼굴.

“세나…” 루시안의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지켜줄게요.’

그게 무슨 뜻인지 그는 바로 느꼈다.

여전히 두 사람은 함께 그림자 군도의 괴물을 사냥하던 그때만큼 단단히 엮여 있었던 것이다.

루시안은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목에 걸린 펜던트를 열었다. 달빛 아래 목걸이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무언가 잘못된 걸 눈치챈 죽음의 간수는 분노의 외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루시안이 더 빨랐다.

그는 목걸이를 한 손에 잡고 돌리다가 랜턴을 들고 있던 쓰레쉬의 팔에 휘감았다. 그리곤 쓰레쉬가 목걸이를 떼어버리기도 전에 재빠르게 외투에서 은제 스파이크를 꺼내 놈의 손목에 박아 넣었다.

쓰레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울었다. 수 세기 동안 느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랜턴 속에 갇혀 있던 수많은 영혼이 갑자기 복수할 기회를 얻고서 아우성쳤다. 결국 쓰레쉬는 루시안을 놓치고 고통 속에서 허우적댔다.

루시안은 몸속으로 영혼이 다시 들어오는 걸 느끼며 물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듯 숨을 한가득 들이마셨다.

‘서둘러요, 내 사랑. 저자는 너무 강해요…’

루시안의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그 어느 때보다 밝아진 느낌이었다. 루시안은 바닥에서 총을 집어 들고 랜턴 속에 잠시 비친 세나의 얼굴을 가슴 깊이 새겼다.

이제 기억 속에서 세나의 얼굴이 희미해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으리라.

“쓰레쉬.” 루시안은 권총 두 자루를 쓰레쉬에게 향했다.

쓰레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둬둔 영혼들의 저항에 텅 빈 눈구멍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는 루시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랜턴을 내밀었지만 영혼들이 저항했기 때문에 랜턴의 마법으로 몸을 지킬 수 없었다.

루시안이 연달아 빛 줄기를 명중시켰다.

빛이 놈의 제의를 태우더니 몸뚱이가 불타는 빛에 휩싸였다. 루시안은 쓰레쉬를 향해 걸어갔다. 무기는 여전히 빛을 머금은 채였다.

지옥의 간수는 고통 속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고대의 마력이 담긴 무기에 맞서기엔 혼이 너무도 약해져 있었다.

“죽음의 순간이 왔다. 받아들여라. 내가 반드시 완전한 안식에 들게 해주지.”

쓰레쉬는 마지막 비명을 지르곤 다리에서 뛰어 내렸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운석이 도시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루시안은 그 모습이 검은 안개에 삼켜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곤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고맙소, 내 사랑. 나의 빛.”

5.4 4막 4장

지독한 공격에 신전 벽까지 흔들릴 지경이었다.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나무판자 사이로, 금이 간 창문 유리 틈으로 검은 안개가 스며들었다. 문은 문짝에 낀 채로 마구 흔들렸다. 검은 안개 속에서 나온 발톱이 나무를 마구 갉아댔다. 울부짖는 돌풍이 지붕 목재를 난타하면서 비명 같은 소리가 울렸다.

아이오니아산 차 상자가 잔뜩 널려있던 벽이 뚫리자 안개 괴물이 붉은 눈을 번뜩이며 쏟아지듯 들어왔다. “이쪽이야!” 미스 포츈이 외쳤다.

그녀는 망령의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빙하가 쪼개진 틈에 알몸으로 뛰어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망자의 손길이 아주 살짝 닿기만 해도 온기와 생기가 빨려 나가는 게 느껴졌다.

살갗에 닿은 산호 펜던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스 포츈은 검으로 망령을 베며 전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망자에게 총알은 소용없을지 모르지만, 이 데마시아산 검은 놈에게 고통을 선사해주었다. 유령 무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망자도 두려움을 느낄까?’

반짝이는 칼날을 피하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녀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놈들을 놓치지 않고 찌르고 베었다.

“지금이야! 도망쳐!” 미스 포츈이 소리쳤다.

아이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미스 포츈은 아이에게 다가가는 안개를 향해 돌진했다. 몸을 던져 아이를 낚아채며 감싸는 순간 등에 차디찬 발톱이 꽂혔다. 온 감각을 마비시키는 냉기가 사지로 퍼지면서 숨이 턱 막혀왔다.

그녀가 검으로 등 뒤의 무언가를 찌르자 망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넘어진 긴 의자 뒤에 숨어있던 여자가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고 미스 포츈은 아이를 안전하게 넘겨주었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사방에서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총성이 울리고 망자와 산 자의 비명이 뒤섞였다.

“세라!” 레이픈이 외쳤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세로로 쪼개지는 문을 억지로 고정하며 버티고 있는 참나무 빗장을 바라보았다. 레이픈과 열 명 남짓 되는 사내가 문에 등을 맞대고 엄청난 타격을 막아내려 애썼지만 문은 점점 안쪽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문에 틈이 점점 벌어지고 그 사이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와 사내 하나를 뒤로 낚아챘다.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애처로운 비명이 들리더니 갑자기 멈췄다.

그 사내를 도우려 손을 뻗은 남자는 팔을 잃고 말았다.

레이픈은 몸을 돌려 벌어진 틈 사이로 단도를 마구 쑤셔 넣었다.

그러자 갈고리 같은 손이 나타나더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단도를 낚아채 갔다.

이내 울부짖는 몸뚱이 하나가 벌어지는 문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더니 레이픈의 가슴 속으로 손을 처박았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미스 포츈은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짜내어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칼날이 유령의 팔을 반 토막 내자 놈은 괴성을 지르며 사라졌다. 레이픈이 그녀의 품으로 쓰러지면서 두 사람은 안쪽으로 나가떨어졌다.

레이픈이 숨을 헐떡였다. 미스 포츈만큼이나 레이픈도 기력을 잃고 늘어진 모습이었다.

“내 눈앞에서 죽을 생각 하지 마, 레이픈!” 미스 포츈이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그 정도로 죽진 않는다고요. 그 개자식 때문에 잠깐 숨이 막혔을 뿐입니다.” 레이픈이 툴툴거렸다.

천장 어딘가에서 유리가 부서져 내렸다. 머리 위에서 검은 안개 여러 줄기가 뭉치더니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탐욕스런 눈이 한데 얽힌 덩어리가 되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미스 포츈은 일어서려 애썼지만 팔다리의 기력은 이미 쇠진된 상태였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좌절감에 이를 갈았다. 남아 있는 부하는 이제 별로 없는데 여기 숨어 있는 사람들은 전사가 아니었다.

망자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미스 포츈은 고개를 돌려 일라오이를 바라봤다.

여사제와 그녀를 둘러싼 신도들은 여전히 주먹과 손바닥을 두드리며 의식을 치르고 있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어 보였다. 기괴하게 생긴 조각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필트오버의 그 덜거덕거리는 강철 골렘처럼 살아나 망자를 한 번에 날려버릴 줄 알았더니…

“대체 뭘 하는 건진 몰라도 빨리 좀 해요!” 미스 포츈이 외쳤다.

지붕 한구석이 뜯겨 나가더니 신전을 둘러싼 폭풍우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곤 폭풍 속에서 거대한 유령 무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소용돌이치며 내려왔다. 인간 세계에선 본 적 없는 괴물들과 망령들이 저승의 소용돌이를 휘몰아치며 산 자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문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망자의 손길이 닿은 목재는 썩어 비틀어졌다. 사냥용 나팔 소리가 귀를 찢어버릴 듯 신전을 울리고 그 메아리 때문에 미스 포츈은 손을 귀로 틀어막아야 했다.

헤카림이 신전 안으로 들어오며 온몸으로 문을 막고 있던 자들을 짓이겼다. 불쌍한 사내들의 영혼은 그의 불타는 검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칼날에서 타오르는 차가운 불길이 신전을 역겨운 광채로 가득 채웠다. 죽음의 기사 무리가 뒤따라 들어왔고 헤카림의 소름 끼치는 위엄에 이미 신전에 있던 유령들은 뒤로 물러났다.

“죽은 자는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거늘!” 일라오이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미스 포츈은 고개를 들어 장대같이 우뚝 선 여사제를 바라보았다. 강인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일라오이의 사지와 떨리는 양손으로 붙잡고 있는 석판에서 희미한 광채가 새어나왔다. 목에는 밧줄처럼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고 턱선에는 애를 쓰느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내렸다.

무슨 의식이었는진 몰라도 엄청나게 체력을 소모한 듯했다.

“이 하찮은 영혼들은 전부 내 것이다.” 헤카림의 강철 같은 목소리에 미스 포츈이 움찔했다.

“그럴 리가. 이곳은 망자들의 반대편에 서 계신 나가카보로스님이 머무는 곳이다.”

“우리 몫은 꼭 받아갈 것이다.” 헤카림은 검을 내려 그 끝을 일라오이의 심장에 겨냥했다.

여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안 될 것이다. 내가 움직이는 한은 안 될 것이야.”

“넌 날 막지 못한다.”

“죽은 놈이라 귀까지 먹었군.” 일라오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의 등 뒤로 광채가 커져가고 있었다. “내가 언제 직접 막겠다고 했느냐?”

미스 포츈이 뒤를 돌아봤다. 조각상이 눈 부신 빛에 잠겨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표면에서 하얀빛이 퍼져 나오자 그림자가 빛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빛이 휘황찬란하게 번지자 미스 포츈은 두 눈을 가렸다. 빛에 닿은 검은 안개는 발가벗겨진 듯 뒤틀린 영혼을 드러냈다. 빛이 망자들을 끌어당기더니 오래전에 그들을 언데드로 만들었던 사악한 저주를 모두 씻어냈다.

미스 포츈은 그들이 비명을 지를 거라 생각했지만, 저주에서 풀려난 망자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빛이 갈라진 벽까지 퍼지고 죽음의 손길에 마비되어 있던 몸에 온기와 생기가 돌아오자 미스 포츈도 울음을 터트렸다.

나가카보로스의 빛이 헤카림에게 다가가자 변화를 눈앞에 둔 헤카림의 얼굴에 공포의 기색이 서렸다.

대체 어떤 끔찍한 존재였길래 저주받은 채로 남는 게 더 나은 걸까?

“자네도 자유를 얻을 수 있네, 헤카림.” 일라오이의 목소리에서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일을 잊고, 그자의 슬픔과 어리석음 때문에 변하기 전에 꿈꾸던 그 모습으로 빛 속에서 살아갈 수 있네.”

헤카림은 포효하더니 일라오이의 목에 검을 내려쳤다.

미스 포츈의 검이 받아치자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도시에서 나가.”

헤카림이 또 한 번의 일격을 위해 검을 들어 올렸지만 다시 닿기도 전에 빛이 칠흑의 장막을 뚫어 버렸다. 그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뒤로 물러섰다. 촛불 빛에 흔들리듯 헤카림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빛났다.

순간 미스 포츈은 그 속에서 은과 금으로 된 갑옷을 두른 장대한 기사를 보았다. 훤칠하며 위풍당당한 청년이 영광스런 미래를 향해 검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대체 이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헤카림이 괴성을 지르더니 신전 밖으로 질주했다.

죽음의 기사와 어둠이 그를 쫓았고 그 뒤를 너덜너덜한 유령 무리가 비명을 지르며 따라갔다.

5.5 4막 5장

동이 트듯 나가카보로스의 빛이 빌지워터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폭풍이 몰아친 후 비치는 첫 햇살만큼, 차디찬 겨울을 이겨낸 후 찾아온 온기만큼 달콤한 광경이었다.

검은 안개는 물러났다. 당황한 유령들이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후퇴했다. 광란에 빠진 놈들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려 몸부림치는 놈이 있는가 하면 구원을 찾아 스스로 빛에 몸을 던지는 영혼도 있었다.

검은 안개가 바다 건너 저주받은 섬으로 물러가자 빌지워터에는 적막이 흘렀다.

동쪽 수평선에서 진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바람이 도시를 씻어 내리듯 훑었다. 마침내 빌지워터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로윙이 끝났다.

5.6 4막 6장

정적이 신전을 메웠다. 조금 전만 해도 아수라장이었던 곳이 완전히 침묵에 잠겼다.

“끝났네요.” 미스 포츈이 말했다.

“다음 해로윙까진 말이지.” 일라오이가 진력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안개의 탐욕은 병적이로군.”

“그런데 뭘 한 거죠?”

“해야 할 일을 한 거지.”

“뭐 어쨌든, 고맙네요.”

일라오이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건장한 팔을 미스 포츈의 어깨에 둘렀다.

"나가카보로스님께 감사하게. 공물을 잊지 말고. 넉넉하게 말이지.”

“그러죠.”

“꼭이네. 그분께서는 약속을 어기는 걸 싫어하시거든.”

그 은근한 으름장이 거슬렸다. 아주 잠깐, 미스 포츈은 여사제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권총에 손을 옮기기도 전에 일라오이가 찢겨진 돛처럼 푹 쓰러졌다. 미스 포츈이 붙잡으려 했지만 그 거대한 몸집을 지탱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둘은 그렇게 조개로 장식된 바닥으로 쓰러졌다.

“레이픈, 나 좀 도와줘.”

두 사람은 일라오이의 커다란 몸을 틀어 부서진 긴 의자에 기대어 놓으면서 툴툴거렸다.

“여왕 바다뱀님이 바다 밑에서 나오신 거군요.” 레이픈이 말했다.

“바보 같으니라고. 나가카보로스님은 바다 밑에 계시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일라오이가 역정을 냈다.

“그럼 어디 계시죠? 저 하늘 위에?” 레이픈이 물었다.

일라오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다. 레이픈이 아파서 움찔하며 구시렁거렸다.

“그분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있지.”

일라오이는 수수께끼 같은 답을 남기며 미소 짓더니 이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죽은 겁니까?” 레이픈이 멍든 가슴을 문지르며 물었다.

일라오이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폐병 든 부둣가 잡역꾼처럼 코 고는 소리가 울렸다.

5.7 4막 7장

루시안은 다리 가장자리에 앉아 물러나는 검은 안개 밑으로 드러나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빌지워터를 보고 질색했지만, 햇살이 수많은 점토 기와 지붕을 따뜻한 호박빛으로 물들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도시도 나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로윙이 끝날 때마다 이 도시는 새로 태어나는 듯했다.

해로윙… 부르기엔 편리한 이름이었지만 그것만으론 해로윙의 기원에 담긴 슬픔을 다 나타내진 못했다. 그림자 군도의 비극을 제대로 아는 자가 여기에 있기나 할까?

있다 하더라도 신경이나 쓰겠는가?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듣고 루시안은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서 내려다보면 꽤 아름답지.” 미스 포츈이 말했다.

“여기서 내려다볼 때만이겠지.””

“하긴, 여긴 악의 소굴이니까. 그래도 착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다고. 난 마침 나쁜 놈들을 열심히 제거하는 중이었지.”

“내가 들은 바로는 전쟁을 시작했다더군. 쥐새끼 한 마리 잡자고 제 집을 태워 먹는 꼴이라고도 하던데.”

미스 포츈의 얼굴 위로 잠깐 분노의 기색이 스치더니 이내 사라졌다.

“난 다들 더 잘살아 보자고 한 건데 말이지.” 미스 포츈은 말을 타듯 난간에 걸터앉았다. “뭐, 상황이 더 나빠진 건 사실이지. 그래서 지금부터 만회하려는 거야.”

“그래서 검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던 건가?”

미스 포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닐지도… 갱플랭크를 죽이면서 칼날장어를 풀어놨거든. 다시 붙잡아 놓지 않으면 선한 사람들이 많이 물리겠지.”

“칼날장어라니?”

“내 말은, 그 해적왕을 무너뜨리면서 그자가 사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을 못 했단 거야. 도시를 손에 꽉 틀어쥐고 있는 자가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번에 제대로 목격했어. 제 목을 스스로 조르더라고. 빌지워터엔 위에서 군림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해. 그게 내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고 내가 이기는 것만이 최대한 빨리 끝내는 길이야.”

둘 사이에 길고 긴 적막이 감돌았다.

“나는 사양하겠어.”

“아직 아무것도 안 물었어.”

“물어 본 거나 마찬가지지. 내가 여기 남아 전쟁에서 이기도록 도와주길 원하는 거잖나. 난 그럴 수 없다. 내가 뛰어들 싸움이 아냐.”

“당신 싸움이 될지도 모르지. 보수가 꽤 짭짤하거든. 나쁜 놈을 잔뜩 죽이고 무고한 영혼도 여럿 구할 수 있고 말이야.”

“내가 구해야 할 영혼은 오직 하나뿐이다. 게다가 빌지워터에선 그 영혼을 구할 수 없어.”

미스 포츈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쩔 수 없다는 손짓을 했다.

“정 그렇다면 여기서 작별을 고해야겠군. 행운을 빌어.” 그녀는 일어서서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찾고 있는 걸 찾길 바랄게. 복수만을 쫓다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단 것만 잊지 마.”

루시안은 미스 포츈이 다 부서진 신전으로 느릿느릿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신전에선 생존자들이 눈을 깜빡이며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루시안을 지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지만 제대로 알진 못했다.

복수? 루시안의 목표는 복수 그 이상이었다.

고통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고대의 언데드 망령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다.

미스 포츈은 그가 겪는 아픔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일어서서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에메랄드빛으로 넓게 물든 바다는 고요했다.

벌써 사람들이 부두에 나와 부서진 배와 집을 고치고 있었다. 빌지워터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해로윙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도 말이다. 루시안은 흔들리는 돛대의 숲을 훑어보며 그리 망가지지 않은 배를 물색했다. 돈이 궁한 선장을 찾아 잘 설득하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빛, 그대에게 가겠소. 그리고 자유를 찾아주리다.”

5.8 4막 8장

어부는 구시렁거리며 배 끄트머리에 달린 윈치로 바다에 떠 있던 거구의 사내를 끌어 올렸다. 밧줄은 해어졌고 크랭크를 돌리느라 지친 어부는 차가운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렸다.

“제기랄. 완전히 썩을 놈이구먼.” 그는 갈고리를 사내의 갑옷에 걸고 갑판 위로 끌어당기면서 수면 위아래로 약탈자가 있진 않은지 주의 깊게 살폈다.

검은 안개가 수평선 뒤로 물러나자마자 배 수십 척이 바다로 나섰다. 수면에는 챙길 만한 물건이 넘쳐났지만, 재빠르게 나서지 않으면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터였다.

어부가 먼저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사내를 발견했다. 이 자를 손에 넣기 전에 다른 약탈자 여섯을 물리쳐야 했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자기 물건을 빼앗아가게 둘 순 없었다.

이 거구의 사내는 거대한 크라켄웜의 몸뚱이처럼 보이는 덩어리에 누워 떠다니고 있었다. 괴물의 촉수는 완전히 걸레가 되어 독한 가스를 내뿜으며 부풀어 올라 있었고 그 덕에 무거운 갑옷을 입은 사내의 몸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이었다.

어부는 사내의 몸을 갑판 위에 길게 눕히고 전리품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고리와 미늘로 이뤄진 무거운 쇠사슬 갑옷, 튼튼한 털 장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갑옷 끈에 매달린 도끼가 아주 훌륭했다.

“자네 덕에 크라켄 금화 몇 닢 벌겠는걸.” 어부는 기쁨에 차 건들거리며 춤을 췄다. “크라켄 금화로구나!”

갑자기 거구의 사내가 검은 바닷물을 토해냈다.

“나 아직 살아 있는 건가?” 사내가 누운 채로 물었다.

어부는 환희의 춤을 멈추고 허리춤에 찬 긴 칼로 손을 가져갔다. 생선 배를 딸 때 쓰는 칼을 사람에게 쓰지 말란 법도 없으니. 다른 자들도 이렇게 재물도 손에 넣고 가련한 이가 여왕 바다뱀님의 품에 안기도록 도와주기도 하는 것 아니겠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내가 눈을 떴다.

“그 칼에 한 번만 더 손대면 저 망할 크라켄웜보다 더 잘게 썰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