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헤이타로

일본군 삼간사우
삼간사우
스즈키 데이이치가토 하쿠지로시카타 료지기무라 헤이타로사토 겐료사나다 조이치로아카마츠 사다오


파일:Attachment/기무라 헤이타로/기무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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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 兵太郎
1888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23일

진짜, 인간이 아니다. - 시마다 시게타로(嶋田 繁太郎)가 그의 만행을 보고 경악하며 남긴 말.[1]

버마의 도살자.
일본의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

1 개요

일본군 사상 최악의 학살자
이시이 시로다치바나 요시오, 아사카 야스히코[2]의 인격과 도미나가 교지의 무능함, 하나야 타다시의 악랄함[3], 무타구치 렌야의 뻔뻔함까지 합쳐놓은, 말 그대로 폐기물이라는 말조차 아까운 일본군 최악의 광장(狂將).[4]

일본군 육군 장성. 삼간사우에서 사우에 해당되는 인물. 삼대오물무타구치 렌야도미나가 교지처럼 무능했지만, 그냥 팀킬과 전선 붕괴만 촉진했던 이 인간들과는 달리 이놈은 일본군 최악의 학살자다. 별명 자체가 버마의 도살자니 말 다했다. 그래서 다른 삼간사우들에 비해서는 물론이요, 심지어 삼대오물 들보다도 더 욕을 먹으며, 나아가 혹장(酷將)으로 유명한 하나야 타다시보다도 훨씬 많은 욕을 먹는다.[5]

2 출생과 성장

1888년 사이타마에서 출생한 기무라는 1908년에 육사 20기로 졸업한 후 야포병 제16연대에 소위로 부임했다. 1916년 육군대학 28기를 수료한 기무라는 1917년부터 참모본부에서 일했는데 1922년에는 독일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23년 귀국 후 소좌로 승진한 기무라는 1925년까지 육군대학에서 교관직을 맡다가 1926년에 포병 제24대대장으로 임명받아 현직부대로 돌아왔다. 1928년 중좌 계급이었던 기무라는 포병감 부원으로 일하다가 1929년 런던 군축조약에 일본대표의 일원으로 참석도 했다. 1931년 대좌로 승진해 야포병 제22연대장을 했는데 1935년 육군성의 정비국 과장을 거쳐 1936년 소장으로 승진해 육군성 병기국의 국장에 올랐다. 1939년 중장으로 승진해 제32사단장으로 부임한 기무라는 1940년 만주로 파견가 관동군 참모장을 지냈다. 1941년엔 육군차관이었다가 1944년 8월에 버마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현지에 부임했다.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여느 평범한 일본군 장교의 군대 커리어 이야기지만... 그 뒤 악귀각성했다.

3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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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김종원, 오스카 파울 디를레방어일본인 버전 난징 좆까! 난 100만이라고!

제32사단장 시절 산둥 지역에 근무할 당시, 중국인들을 끌고와서 2,000여명의 주민들을 강제 노동으로 혹사시키고 반항하는 8,000여명의 주민들을 대량학살하고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리고 만주지역 사령관시절, 만주지역 주민들을 강제 노동으로 쓰고자 수만명을 동원했으며 이중 저항하는 수천 명의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리고 끌려간 주민들에게 도망도 못가게 고압선을 치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수천명, 고문으로 수천명을 죽였다. 이때,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죽었는지,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팔로군을 진압한답시고 "다른 거 다 필요없고 팔로군이건 민간인이건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죽여버려라!"라는 명령을 하달해서 팔로군이건 민간인이건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버마 방면군의 사령관이 되자마자 버마에 철도를 세우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쟁 포로 6만여 명, 태국·인도네시아·미얀마·말레이시아 등지에서 끌려온 노동자 20만 명을 동원했고, 이 중 11만 6천여 명이 질병·부상·영양실조 과로 등으로 죽었다. 게다가 저놈들에게 들어가는 쌀이 아깝다며 기존에 있던 밥을 줄여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게다가 포로들에게 공명정대하게 대했던 사이토 리사부로[6] 소령을, 하나야 타다시 때문에 죽은 H대령보다 더 집요하고 잔인하게 괴롭혔다. 장장 8개월 동안. 이놈 때문에 사이토 소령이 자살도 생각했다 한다. 그러나 필립 투지 중령과의 약속으로 억지로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사이토 리사부로 소령은 1990년까지 천수를 누린다.
영국군 소위로 복무하다 포로가 된 철도 부설공사의 생존자 에릭 로맥스(Eric Lomax,1919~2012)가 1995년 출간한 책이 《레일웨이 맨》이고, 책을 바탕으로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 2013년작 《레일웨이 맨》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육군 차관시절 바탄 죽음의 행진을 비밀리에 명령한 것도 바로 이놈이다. 어느날 갑자기 14군 전체에 "미군 포로를 처형하라."라는 구두명령이 왔는데, 바로 츠지 마사노부가 자기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기무라 헤이타로의 비밀명령에 그대로 따라서였다. 그 때문에 수많은 포로들이 죽었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식량을 징발한답시고 버마에 있는 주민들의 식량을 강탈하거나 약탈했고, 이에 저항하는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처음에는 총칼로 살해하다가 나중에는 총알이 아깝다고 생매장시키거나 불로 태워 죽이는난징 대학살때 하던 그 짓거리를 명령한다. 이에 참모장이 기겁을 하며 반대하지만 역시 처형했다. 그리고 이 학살은 최대로 추산하면 100만명이 넘는 너무나 끔찍한 학살이었다. 심지어 하루에 12,000명씩 죽였을 때도 있었다.[7] 심지어 일설에 의하면 버마 전선 지역 주민이 90%나 학살 당해서 자그마치 300만 명이 학살 당했다고 하니 이놈이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알수있는 내용이다. 게다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통틀어서 최대의 학살 규모다. 난징 대학살이나 싱가포르 화교 학살, 마닐라 대학살과 버마 대학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는 최고 지휘관이 부재중에 벌어진 사건이고 후자는 최고지휘관이 직접 학살을 벌인 케이스라는 거다.

게다가 이놈 역시 위안부 범죄와 관련이 되어 있는데 원래 일본 여성 중에서 고용되어 장교들의 현지처 역할을 했던 위안부를 병사 대상으로 확대해, 현지 조달 방식을 채용하고 대량 차출로 바꾼 장본인 되겠다. 물론 창시한 건 오카무라 야스지지만 이것의 규모를 키워 전쟁범죄로 만든 것은 이놈이다.[8]

4 전술상의 실책

게다가 이놈은 민간인 학살엔 유능하면서 정작 전투 때에는 무능했다.

1945년 영국군버마로 진공을 개시하자 버마의 방위는 수세에 몰렸다. 기무라는 영국군버마 침입을 알고는 공포에 질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런 작전지휘를 못 내렸다.수전증?? 정말 어이없게도 학살을 저지를 때에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학살할 땐 구데리안, 전쟁할 땐 무타구치?

4월 13일에 버마의 수도 랭군 북서부의 방위선을 지휘하던 28군 사령관이던 사쿠라이 쇼조 중장은 현지에서 벗어나려는 기무라에게 "전쟁 진행 속도가 빨라 랭군이 전장이 되는 건 시간 문제다. 랭군이 공격받는데 방면군 사령관이 이동하거나 달아나면 작전상 곤란을 초래한다."라고 비판했다. 사쿠라이 쇼죠 중장은 다시 "방면군 사령부를 빨리 시암 고원으로 전진시켜 제1선에서 지휘하시오."라고 진언했지만 기무라는 이를 기각했다.

방면군 참모장이던 다나카 신이치(田中新一)(위에서 언급한, 학살 반대했다고 같이 처형당한 참모장의 후임)도 "방면군 사령부는 의연하게 랭군에 남아 현실적인 통제를 가하면서 정신적으로 중심을 잡아야 방면군 스스로가 랭군을 지켜낸다."고 주장했지만 기무라는 다나카가 출장을 나가 있는 때를 틈타서 사령부의 철수를 결정했다!

4월 23일에 기무라는 막료들과 함께 비행기로 랭군을 탈출해 태국 국경지대인 몰메인으로 철수(사실상 도주.)했다. 전선에서 고생하던 예하 부대 및 일본이 지원하던 버마 정부의 바 모우 수상, 자유 인도 정부의 찬드라 보스 주석 및 일본 거류민들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만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육지로 탈출했는데, 거기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5 어이없는 승진, 그리고 도망의 결과

그러나 황당하게도, 기무라 헤이타로는 도망 직후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 대목을 보면 임팔전투를 말아먹은 어떤 얼간이가 생각난다 독립군 장군을 이런놈이랑 비교하지 마라!기무라를 포함한 버마 방면군 사령부의 랭군 폐기로 방면군의 지휘계통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라와디 강 서부에서 영국군과 교전하던 제28군은 적진에 고립되어 여기서 탈출하려던 부대원의 반수 이상이 죽었다. 버마에서의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약 14만 4천 명이었는데, 비극이라 여기는 임팔 작전의 전사자는 1만 8천명으로 12.5%의 비율을 차지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 버마에서의 전사자 대부분은 기무라 헤이타로가 도망친 직후에 급증했다. 스스로 도망쳐 군인으로서의 지휘 책임도 저버렸고, 동맹국의 요인들도 깡그리 무시하며 달아난 기무라 헤이타로의 처사는 버마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의 격렬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도미나가 교지의 적전도주를 크게 징벌하지 못한 것도 이놈이 해먹은 짓 때문이다.

6 전쟁 이후

전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된 기무라는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기무라의 죄목은 제3차 고노에 내각, 도조 내각에서 육군차관을 지낸 일이 컸다.[9] 당시 일본의 육군장관은 총리대신이 겸했기에 실질적인 군사책임자로서 기무라가 지목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군국주의자 항목에도 볼드체로 지정했다.

그러나 버마 방면군 사령관의 행동은 기소되지 않았다. 그랬다면 무타구치처럼 풀려났을 거다 기무라는 육군차관 재직시의 책임으로 기소됐을 뿐만 아니라, 버마에서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10] 그리고 여기서 희대의 망언이 나왔다.

"버마 정부는 내게 훈장을 줘야 한다. 내가 버마 인구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지." 어이쿠, 그러시면 도쿄 HOT 및 여러 폭격으로 일본 민간인 인구를 줄여준 미국에게도 훈장을 줘야겠네[11]

그리고 이 개소리를 들은 검찰에서 어찌나 격분했는지 "이런 도살자 놈을 봤나! 반성해도 모자랄 판에 뭐? 니가 사람이냐?!"라고 일갈했다.[12] 끝내 기무라에 대한 11명의 판사투표는 인도인 판사[13]를 제외한 10명이 유죄로 인정했고 미국, 영국, 중국, 필리핀, 뉴질랜드, 캐나다, 네덜란드의 7명 판사들이 사형에 찬성했다.

기무라는 처음부터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부인에게 자신이 풀려날 것을 단념하라고 말했다. 끝내 1948년 12월 23일에 기무라는 교수형에 처해진다. 한 짓에 비해서 너무 편하게 뒈졌다. 기관총살형도 부족할 것 같은데...

7 기타

  • 기무라의 아내는 버마의 학살과 버마 죽음의 철도 사건을 상세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남편이 전범 재판에 올라갔는데 낙관적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게 중범죄라는 걸 아예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그녀는 전범자의 유족회인 <시라기쿠(白菊) 유족회>의 회장이 되어 전범자들의 명예회복에 나서기도 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 기무라의 묘는 현재 도쿄 아오야마 다테야마 묘지에 있는데, 사후 1978년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 게다가 이놈의 해골 중 일부는 순국7사묘전범을 우상화하는 무덤에도 들어가 있다.
  • 당연하지만 미얀마에서 친일 발언은 무기징역 또는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는 중범죄다. 물론 원인은 이 인간폐기물 때문이다.
  • 참고로 말하지만 기무라 마사토미하고는 절대 비교하지 마라. 차원이 다르다.

8 주요 이력

1929 육군포병학교 강사
1929 정식 임관
1929~1931 런던 군축 회의 당시 일본 대표단 일원
1931~1932 육군 22포병연대장
1932~1934 육군포병학교 강사
1934~1935 해안포병학교 조교수
1935~1936 통제부, 경제동원국, 전쟁수석장관
1936~1939 육군 전쟁기술부 책임자
1937~1939 육군본부 참모
1939~1940 32 사단 사단장
1940~1941 육군 만주 사령관
1941~1943 육군 차관
1943~1944 최고 전쟁위원회 위원
1944~1945 버마 방면 사령관

1948 전범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
  1. 시마다 시게타로는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해군 대신과 군령부 총장을 역임한 태평양 전쟁 수행의 최고 책임자로, 당연히 군국주의자로 유명하다. 그런 인간이 이렇게까지 디스할 정도로 기무라 헤이타로는 미쳐도 한참 미쳤다.
  2. 이 세마리 모두 인간이 아니다는 말이 붙어 있고 다치바나와 아사카는 같은 전범들과 가족들에게도 사람 대접 못 받았다.
  3. 학살 반대했던 참모장을 어떤 처벌을 내렸는지 아래 항목 참조.
  4. 그러나 행적을 대조해보면 무타구치 렌야도미나가 교지와 비교하기에는 뻔뻔함과 무능함이라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오히려 이들 둘보다 더했다. 괜히 일본군 중에서도 최악의 전범이라고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부정적인 면모만 나열했겠는가. 이 둘은 뻔뻔하고 무능하긴 했어도 인간을 포기하지는 않았다.(도미나가 교지는 마닐라 대학살 당시 제4항공군의 자기 담당 구역의 민간인을 학살하러 온 다른 군을 "우리와 싸우자는 거냐?" 라고 대놓고 막았을 뿐 아니라 세균전에 대해 이시이 시로와의 토론에서 무차별 세균전으로 민간인들까지 몰살하려는 의견을 낸 이시이 시로를 대놓고 비난했다. 그리고 무타구치 렌야도 학살을 막은 일이 있다.)
  5. 오죽하면 오카무라 야스지랑 같이 그 악명 높은 일본군 위안부 공동 창시자였던 오카베 나오사부로마저 "솔직히 이놈과는 말하기가 싫다."라고 학을 뗐을 정도다. 그 악명 높은 오카베 나오사부로가. 게다가 오카무라 야스지 역시 사람 취급을 안 했을 정도다.
  6. 콰이강의 다리에 나오는 사이토 대령의 모델.
  7. 가슴에 와닿지 않거나, 별 생각없이 넘어갈 수 있겠지만 시간당 500명, 분당 약 8명이 죽어나간 거다. 감이 안 온다면, 컵라면에 물 붓고 다 익을 때까지 25~26명, 어지간한 중고등학교 한 학급의 2/3~ 3/4 에 달하는 인원이 시체가 되었다는 이야기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8. 여기서 충격적인 일화가 있는데, 당시 상하이 일본군 참모장 츠지구치 게이시치로가 기무라에게 “위안부 50명 무사히 도착. 부족하니 20명 추가 요청. 앞으로 인원이 더 필요하면 다시 문서를 보낼 테니 양지 바람.”이라고 문서를 보내자 당장에 달려와서 뺨을 갈기면서 호통을 지르며 "70명 가지고 뭐하겠다고? 소꿉장난하냐? 적어도 1000명은 더 보내 달라고 해야 될 거 아냐!"라는 개소리를 했다는 거다.
  9. 당연하지만 그때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도 전부 기무라에게 보고했었다. 당연하지만 몰랐을리가 절대로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런 학살을 저지른 당사자들에게 크게 칭찬을 했고 학살을 권장했다.
  10. 심지어 이 증언은 미얀마 주민이 한 게 아니라 위의 사쿠라이 쇼조 중장이 했다.
  11. 그런데 정말로 당시 도쿄 대공습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는 후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물론 일본 민간인 인구를 줄여준 공로가 아니라 항공자위대 설립에 기여했다고 받았지만... 지금이라도 일본 민간인 인구 해결 명목으로 사후추서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커티스 르메이는 이후 미 공군 참모총장을 역임했고, 현재 미 전략공군의 아버지로 불리며 겁쟁이도 아니다. 베를린 봉쇄 당시에 자신이 수송기를 몰아가며 지휘했고 도쿄 대공습은 일본의 전투 의지를 꺾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제라면 똘기로도 보일 수 있는 폭격덕질(...) 베를린 봉쇄때도 소련을 폭격할 준비를 갖췄을 정도였다고.
  12. 심지어 이놈 변호인중에는 황국신민서사를 창시했던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이었던 시오바라 도키사부로라는 작자도 있었다. 근데 이런 놈마저 학을 떼고 변호를 포기해 버렸다. 그만큼 이놈이 정신이 나갔다는 증거다.
  13. 근데 이 사람이 친일파 속성이 있는 양반이었다. 그래서 일본 전범들에게 매우 관대한 대우를 주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자주 했다. 그나마 치치지마 식인 사건에서는 다치바나 요시오 등의 악마 새끼들에게 살다살다 이런 미친 놈들은 처음 본다며 사형을 주저없이 때렸지만.먹은 놈은 아니꼽고 100만 죽인 놈은 괜찮은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