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 노부스케

역대 일본 총리
55대 이시바시 단잔56.57대 기시 노부스케58.59.60대 이케다 하야토

岸(きし) 信介(のぶすけ)
생애 : 1896년 11월 13일 ~ 1987년 8월 7일(90세)
총리 재임기간 : 1957년 2월 25일 ~ 1958년 6월 12일(56대) 1958년 6월 12일 ~ 1960년 7월 19일(5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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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통일교 회의장에서.

1 개요

일본의 정치인이자 제56.57대 총리.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쟁 범죄 용의자(평화에 관한 죄)로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야마구치타부세정 출생으로 친 동생은 비핵 3원칙으로 유명한 61.62.63대 총리 사토 에이사쿠.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는 외조부 성인 사토를 이어받아서 형제끼리 성이 다르다. 외손자는 90+96,97대 총리[1]가 되는 아베 신조다. 자기 딸 이름은 기시 요코(아베 신타로와 결혼한 뒤부터는 아베 요코로 이름이 바뀜), 아베 신조에게는 친어머니다.

별명은 쇼와(昭和)의 요괴.

2 생애

2.1 관료 입문에서 전쟁 종료까지

본디 성씨가 사토오 였지만 다른 집안으로 입양되어 기시(岸)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도쿄대 출신이 그러했듯이 중학교 때 매우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영화(당시 활동 사진이라고 했음)에 빠져 도쿄의 구제(舊制) 제1고등학교[2] 입학시험에 꼴찌에 가까운 성적으로 입학하였으나 맹렬하게 공부하여 공동수석으로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때 일본의 극우파로 2.26 사건의 정신적 지주였던 기타 잇키의 사상에 매료되었었다고 한다.

그후 도쿄대 법대에서 독일법학을 전공해 우등생으로 졸업[3]한뒤 정부 관료의 길을 걷게 되는데 묘하게도 당시 일류 엘리트들만 간다는 외무성이나 대장성을 가지 않고 2류 부서로 취급받던 농상무성으로 가서 동향의 정치인인 카미야마 미츠노신에게 넌 왜 2류 부서로 갔니라고 질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행보를 보면 레드오션인 외무성보다 블루오션인 농상무성을 의도적으로 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농상무성으로 들어가 상공관료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운뒤에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하면서 만주국 경영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된다. 이때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도조 히데키를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39년 상공차관으로 임명되었지만 상공대신에 새로 취임한 코바야시 이치조와 갈등을 빚었고 그 직후 일어난 소위 기획원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1941년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면서 도조 내각에 상공대신으로 취임하고 1942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국회로도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절친했던 도조 히데키와의 관계는 1943년에 틀어지는데 상공성을 폐지하고 군수성으로 재편한데다 도조 자신이 군수대신이 되고 기시를 군수차관에 임명해 불만이 생겨났다. 1944년 사이판이 함락된 가운데 도조는 난국의 타개를 위해 내각 개편을 추진하려 하자 기시는 짜르려면 너도 같이 물러나야지!라고 물귀신 작전을 펴는 바람에 결국 내각 총사퇴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도조가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했다.

2.2 전후 전범기소에서 총리 취임까지

전쟁이 끝난후 고향 야마구치현에 은둔해 있다가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도조가 목이 달아난것과는 달리 경제통이었던 기시나 코다마 요시오를 써먹으려는 GHQ의 의도에 따라 도조가 처형된 다음날에 불기소 처분을 받고 공직추방조치만을 받게 된다.[4]

이후 한동안 동양 펄프라는 회사에서 회장으로 재임하다가 1952년 공직추방조치가 풀리면서 정계로 복귀해 자주헌법 제정, 자주군비 확립, 자주외교 전개를 슬로건으로 일본재건연합을 결성하고 1953년 중의원 선거에 임했지만 일본재건연합이 선거에서 대패하자 일본 사회당에 입당하려고 했지만 너 같은 보수는 즐이염로 거부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해 자유당 후보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54년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기시의 의사에 반하는 경무장,대미협조 정책으로 나가자 이에 반발하다 자유당에서 출당되었다.

이후 11월에 하토야마 이치로(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할아버지)와 함께 일본 민주당을 조직했다가 좌우분열이 극심했던 일본 사회당이 재통합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자유당과 보수대연합을 주창해 자유당과 합당하여 자민당(자유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55년 체제)

이후 1956년에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 했지만 이시바시 단잔에게 7표차로 패배해 이시바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맡았다가 2개월후 이시바시가 뇌연화증으로 총리직 수행이 불가능해지자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때 기시는 스가모 형무소에 투옥중이었던 일본 우익의 행동대장인 고다마 요시오의 자금및 인맥 지원을 받아 이시바시로 하여금 총리직을 계승하게 한다는 지명을 받아내는데 성공해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2.3 총리 재임 시절

총리 취임 기자회견에서 부정부패, 가난, 폭력의 삼악을 척결하고 싶다고 밝혀 삼악척결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또한 이시바시 총리의 공약이었던 1천억엔 감세도 시행했다.

1958년 의회 해산뒤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287석의 절대안정 과반의석을 확보해 사실상 자민당의 초장기 집권의 서막을 알렸다. 그러나 미일 안보조약 개정 과정에서 주일미군 재판권 포기 밀약사건이 터지면서 자주외교를 부르짖던 기시의 노선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미국이 공식적으로 재판권 포기를 천명하라고 요구했지만 기시는 국내여론 악화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을 개정한 미일 안보신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국회에 비준동의를 받으려 상정했지만 야당인 사회당이 강력반발해 안보투쟁을 부르게 되었다. 안보폐기를 부르짖던 사회당이 미일 안보신조약 처리를 막으려 하자 1960년 5월 29일, 국회본회의장에 사회당 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한채로 미일 안보신조약을 통과시켰다.

이로인해 반정부 투쟁이 극에 달하자 기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명분으로 극우 행동대는 물론 야쿠자들까지 모조리 동원해서 반정부 투쟁을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기시의 정책은 병크를 터트려 1960년 6월 15일, 야쿠자가 시위대를 공격해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일어났는가 하면 국회에서도 폭력사태가 발생해 국회에서는 국회로 진입하려는 학생 시위대와 이를 막는 경찰들의 충돌 과정에서 도쿄대 여대생 간바 미치코가 압사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기시는 "국회 주변은 시끄럽지만, 긴자나 고라쿠엔 구장은 언제나 그대로이다. 나에게는 소리없는 소리가 들린다"라는 발언으로 물타기를 시도했다. 여기에서 소위 침묵하는 다수라는 드립이 나왔다. 그러나 전임 총리 세명(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가타야마 데츠, 이시바시 단잔)이 기시에게 그대가 책임지고 사퇴하는게 좋겠소라고 하는 사퇴권고까지 나오고 말았다.

기시는 최후 수단으로 자위대의 치안출동을 명령했지만 방위청 장관 아카기 무네노리[5]가 이를 거부했고 시위대는 수상관저를 포위해 기시와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가 죽음 직전의 위기로까지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된 미일 안보 신조약은 자동으로 성립되었고 국회 비준뒤에 히로히토 덴노가 공인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이후 기시는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7월 15일 내각이 총 사퇴했다.

2.4 총리 퇴임 이후

총리 퇴진 이후에도 만주 인맥을 활용해 만주군 경력이 있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교분을 쌓았고 이후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도 기시가 중요한 역할을 한것으로 알려졌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서 기시 노부스케는 대한민국정부로부터 수교훈장 중에서 1등급인 광화대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끝발 아래로 취급 받았던 고다마 요시오가 2등급인 광화장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주요 국가에서 다소 격이 떨어지는 관리를 사절로 보내거나 아에 경축 사절을 보내지 않았지만,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사절단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國葬) 때에도 참석하였다. 당시 한국의 주류 언론들은 기시 노부스케를 친한파로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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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친한파'는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세력과 밀접한 연관을 한 '친한파'를 의미한다. 7~80년대 한국의 언론매체들은 '친한파'내지 '지한파'로 표기했었기 때문. 이들은 한국의 군사독재정권 세력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여러차례 정치적인 조언을 넣어주곤 했었다.

자신의 직계인 후쿠다 타케오와 다나카 가쿠에이의 소위 자민당내 권력투쟁(각복전쟁)이 일어나자 후쿠다의 편을 들었다. 1963년에는 자신의 지역구인 야마구치 제1구를 사위인 아베 신타로[6]에게 넘겨주었다가 낙선되자 야마구치현에서의 영향력 감소가 아니나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기시는 자신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야마구치 1구의 슈토 에이유 의원의 후원회장이던 후지모토 만타로를 직접 영입해 아베 신타로의 후원회장을 맡게 하여 1967년 선거에서는 기어코 당선시켰다.

1969년의 중의원 선거에서는 측근의 비서를 맡고 있던 인사가 자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이시카와 1구에 출마했을때 지원 요청을 받고 지원해주어서 당선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후에 총리가 되는 모리 요시로였다.

1972년 친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 헌법개정을 목표로 은밀히 총리 복귀를 노렸다. 그러나 자신의 대리로 내세운 후쿠다 타케오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패하자 낙담하고 만다. 결국 1979년 중의원 해산을 계기로 정계를 은퇴하고 보수 논객으로 활동하다가 1987년에 사망했다.

3 평가와 여담

그의 별명은 쇼와의 요괴 였는데 본인도 이 별명을 웃으면서 인정했을 정도였다. 그의 별명답게 전후 일본 정치체제의 틀을 만든 사람이라는것은 부정할수 없다. 55년 체제를 확립하고 자민당의 초장기 집권의 서막을 열었기 때문. 그러나 그만큼 문제도 있는데 일본 정치의 흑막,밀실정치의 원조라고 할수 있기도 하다. 물론 그만 흑막,밀실정치를 한건 아니긴 했지만. 사실 흑막,밀실정치는 2차 대전 패배로 공민권이 정지된 일본 지도층 요인들이 자기 아들을 내세우기도 했었다. 사실 이런 정치의 진짜 원조가 덴노뒤의 쇼군이다.

한국의 입장에선 껄적지근한 사람인데 일본 보수의 평화헌법 개정과 정상국가 구현등의 일관된 흐름의 원조가 바로 기시라고 볼수있다. 기시의 영향은 사위인 아베 신타로와 외손자 아베 신조로 이어졌다. 아베 신조의 극우 보수의 원조는 기시라고 할수 있는 셈.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에 등장하는 키리하라 타이조의 모델이 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박정희가 롤모델로 삼았던 인물이라고 한다. 기시 본인도 박정희를 꽤나 좋게 평가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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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961년 박정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 가운데가 박정희, 왼쪽이 기시, 오른쪽이 당시 수상이었던 이케다 하야토.

재일교포 학자인 강상중 교수와 현무암 두 사람이 같이 저술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도 유명하다. '귀태' 발언이 이 책에서 나온 것.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58년에 한국에 야츠기 가즈오 특사를 파견한 적이 있다. 이때 야츠기 특사는 기자회견에서 기시 총리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한국에 범했던 과오를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총리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 왔다. 이런 노력을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기시 총리의 결심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기시 총리는 이토 히로부미와 우연히도 동향인 까닭에 그의 선배인 이토가 저지른 과오를 씻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다고 밝힌바 있다. 물론 일본 극우의 선조격인 그가 진심으로 이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의문이기는 하나, 수십년뒤에 그의 외손자인 아베 신조가 침략사실을 부정하고 일본을 우경화의 바다로 이끌고 있는 가운데서 수십년전에 외할아버지가 립서비스로 나마 침략사실을 사죄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할수 있겠다.

아베 내각의 우경화 이후 한국 언론 기관에 그의 외할아버지로서 종종 언급된다. 물론 'A급 전범'이라는 수식어는 꼭 붙는다. 그리고 순국7사묘의 비문(碑文)을 작성한 장본인이다. PD수첩에서는 아베 신조가 지금처럼 극우의 끝을 보여주고 있는 데에는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와 함께 제국주의의 시작을 알린 요시다 쇼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방영했다.
  1. 한번 퇴임한 후 노다 요시히코 전임 총리대신의 뒤를 이어 다시 취임했다.
  2. 일본의 구제 고등학교는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3학년과 대학교 1~2학년에 해당하는 학교였다. 중등교육기관인 고등학교와 확연히 다르다.
  3. 당시 유행하던 미노베 학설이 아니라 천황주권론을 주장하는 우에스기 신키치의 학설을 추종했다.
  4. 물론 이것도 공짜는 아니었다 기시와 코다마는 일본이 점령지에서 약탈한 보물들과 자신들만이 알고있던 국가기밀정보를 넘기는 조건으로 사법거래를 해 풀려난것이다.
  5. 전쟁 전부터 기시의 부하였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조차 기시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에 직면하게된 기시는 이때부터 정권포기를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6. 아베 신조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