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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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槿泰
생몰연도 : 1947년 2월 14일 ~ 2011년 12월 30일

1 소개

재야 민주화 운동권의 대부

대한민국정치인. 종교는 원래는 무종교였으나, 2011년에 가톨릭에 귀의해서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즈카리아이다.

본관은 경주 김씨. 경기도 부천시 출생[1].

서울 도봉구 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열린우리당 의장(2006년 6월 9일-2007년 2월 14일로 8개월 5일에 걸쳐 재임, 단명한 의장이 대부분이었던 열린우리당 의장 중에서는 가장 길게 재임했다[2]), 원내대표(2003년 10월 27일~2004년 5월 11일로 6개월 보름을 재임) 및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보건복지부 장관(2004년 7월 1일-2006년 2월 10일, 1년 7개월 5일)을 지냈다.

언론에서는 주로 그의 마지막 직책이었던 '고문' 으로 호칭되지만 민청련 의장과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사람인 만큼 운동권 출신 쪽에서는 전(前) 의장 등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다.[3] 장관은 확실히 흔하고 상임고문은 사실 큰 의미는 없는 직위라.

2 민주화 운동

제4공화국제5공화국 당시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65학번으로, 대학 초년생 시절부터 경기고 동문이자 대학동기인 조영래, 손학규[4]와 더불어 서울대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며 한일회담 반대,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규탄 등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결과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의 사건에 관여되어 고난의 청년기를 보냈다.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초대 의장이 된 김근태는 이른바 깃발 사건이라 불리는 1985년 서울대 민추위 사건[5]으로 구속되어 풀려나는 도중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다. 이로 인해 받은 피해는 이근안 문서 참조. 그리고 이날 사건을 통해 소문만 무성하던 고문의 실체가 드러나며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고문 증언.

7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대학생들 모두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김근태는 그 중 가장 심하게 당했으며 그러면서도 며칠간 계속 버텨냈던 인물이다. 그 유명한 안 재우기, 날개꺾기,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겪으면서 버티었다는 사실만 봐도 이 사람의 정신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한 진중권의 증언. 앞서 말했듯 이 과정에서 버틸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실체까지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선 하기 힘든 일이다. 다만사망 직전..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살려달라는 애원을 하며 저들이 원하는 조서를 써주었으며 이는 고문의 기억과 함께 고인의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전기고문, 물고문 후유증으로 발병한 파킨슨병과 뇌정맥혈전증 등으로 건강에 큰 손상을 입었고 고문으로 생긴 PTSD 때문에 병원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전신 마취를 위해 눕거나 치과 치료용 드릴 돌아가는 소리만으로도[6] 고문에 대한 기억이 다시 살아날 정도로 지독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폐기종까지 걸릴 뻔했으니 볼 건 다 본 셈.[7] 고문당한 후에는 큰 소리로 연설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가 타계한 이후 인재근 의원과 함세웅 신부, 내과전문의 이화영 박사 등의 주도로 인권의학연구소와 김근태와 같은 고문피해자 및 국가폭력에 몸과 마음을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설립되었다.

3 정계 입문과 활동

1995년 자신을 따르는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당(1991년)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맡으면서 제도권 정치를 시작하였다. 그 해 연말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다음해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봉(갑)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당 주류인 동교동계를 겨냥해 호된 비판을 퍼부었고,[8] 동교동계가 그를 견제하면서 결과적으로 이 시기 정치적 성장을 그다지 하지 못한다. 기자들이 뽑은 대통령 후보로서는 조선일보부고논평에서 인정할 정도로 항상 1위를 도맡아 했던 인물이지만, 당내 세력과 권력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고 평가 받는다.[9]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도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받으며 중진으로 자리매김 했던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과 비교되는 대목. 아예 그쪽 편이던 이인제는 차치하고라도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결국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노무현과 비교해도 안타까운 점이다.[10]

2002년에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제주와 울산 두 번의 개표결과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자 운명의 광주경선을 앞두고 중도 사퇴하였다.[11] 훗날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상징색이라 할 수 있는 노란색은 원래 김근태 경선캠프의 상징인 노란 손수건에서 일부 차용 혹은 의미를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참여정부에서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공약 중 하나였던 주택 분양원가 공개 방침을 번복하자 "계급장 떼고 제대로 논쟁하자" 라고 요구하는 등[12] 대통령 당선 후 신자유주의적으로 변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였다. 또한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도 FTA를 통과시키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 점 때문에 재야 출신으로 정치권에 들어가 몇 안 되게 자기 목소리를 낸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국개론스러운 발언을 했다가 사과하는 등 말도 많았고 2006년 열린우리당이 쇠퇴 일로를 걷는 와중에 당 의장 직에 올라 당시 당정에 대한 여론의 뭇매를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다. 다만 다른 정당들이라면 단명 소리를 들었을 그의 재임기간 8개월은 열린우리당에서는 최장기(...)이다. 또한 여러 나름대로 의미 있는 법들을 조율해서 통과시키기도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도 다른 장관들보다는 비교적 긴 편이었다.

3.1 선거

3회에 걸쳐 국회의원을 지낸 다선의원이었지만 인생 마지막으로 도전한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1000여 표 차이로 석패했다.[13]

유세와 관련해서는 당의 지도부라는 중압감이 있어서인지 자신의 지역구보다는 다른 지역구에 지원 유세를 하러 가는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08년 총선은 이명박 정권 집권 직후에 치러진데다 뉴타운 개발공약의 여파 등으로 서울지역 민주당 당선자가 8명에 그쳤다.

생애 마지막으로 유세를 지원한 것은 2011년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

4 국회의원 퇴임 이후

2008년 17대 국회의원 퇴임 후에는 한양대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반도재단을 설립하여 연구 활동도 병행하였다. 위에 나온대로 2011년까지 서울시장 재보선을 도우며 개인적으로는 다음해 치러질 총선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1년 연말, 지병인 뇌정맥혈전증이 악화되어 종로구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투병 생활했다. 그리고 딸의 결혼을 전해들은 후[14] 2011년 12월 30일 새벽 5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향년 65세. 묘소는 남양주시 마석모란공원 내에 있다.

2011년 10월 18일, 자신의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 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의 마지막 논평으로 남게 되었다. # 자세한 것은 링크 참고.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촬영한 영상은 그가 미디어에 등장한 마지막 모습이다. # 자세한 것은 링크 참고.


고인의 일대기를 압축한 영상.

2001년에 딴지일보가 했던 고인과의 인터뷰.

유족으로는 부인과 두 자녀가 있으며 민주화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던 부인 인재근은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고인의 지역구였던 도봉갑에 출마하여 60%라는 높은 지지율로 당선되었다.[15] 이 때 개표방송 카메라를 통해 눈물바다가 된 인재근 후보 캠프가 전파를 타며 새삼 고인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인재근 의원은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도봉갑에서 지지율 60.1%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김근태 의원이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에게 패한 제 18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제외하면 15대~20대까지 부부 5선이라는 진기록.

5 일화

5.1 라이카 카메라 수증

복지부 장관 재직시 독일의 카메라 메이커인 라이카에서 우리나라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인장과 "大韓國人" 이 각인된 카메라를 딱 60대 한정 제작했는데 당시 1대의 가격이 1천만원 상당. 이 카메라의 1번을 김근태 장관에게 기증했다. #[16] 카메라랑 별 상관도 없어보이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준 이유는 안중근 의사와 가장 이미지가 닮은 사람이라서. 다른 곳도 아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의견이다. 본인은 과찬이라며 이를 국가에 기증했다 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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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석호필 박사의 제자

석호필 박사의 제자이기도 했다. 중학시절 가난한 학생이던 소년 김근태는 무료 영어강의 봉사를 하던 석호필 교수의 클래스에 수업을 듣게 되며 그의 제자가 되었다. 같이 공부를 한 정운찬 서울대 전 총장과는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 동문.

5.3 취미

생전에 축구를 굉장히 좋아한 축빠였다. 어렸을 때부터 새끼끈을 뭉쳐 만든 공이나 돼지 방광을 부풀려 만든 공을 이용해 동네 친구들과 노는 것을 시작으로 장성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조기축구를 즐겼다고 한다. 현역 의원이던 시절엔 국회의원들끼리 하던 축구 모임에서도 정봉주와 같이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파킨슨병 진단과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에도 조기축구 등을 통해 축구를 꾸준히 즐겼다. 고문으로 몸이 매우 허약했지만 축구를 즐길 때는 건강한 모습을 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병상에 누웠을 때 다시 금방 일어나서 공 차러 갈 것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여 그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동문수학한 후배인 이준구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농구도 잘 했다는 모양으로 한마디로 구기종목 매니아. 이준구 교수가 홈페이지에 쓴 김근태 선배를 추억하는 글

하지만 말년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그렇게 즐겨 마지 않았던 축구마저 못하게 된 것을 보면 고문이란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흔을 주었는지 알게 해준다.

6 흑역사

  • 2002년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 중에 당시 권노갑 의원에게 불법정치자금 2000만원을 제공받은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며 경선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 # 물론 발뺌하다 걸린 것은 아니고 본인이 먼저 돈을 받은 사실을 자백했지만 어쨌든 범죄는 범죄인지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 2006년 당시 북한 핵실험에 따른 안보위기로 국내외적인 혼란 상황일 때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개성공단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북한 여종업원과 춤을 춘 일이 있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 #, #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북측이 권해서 마지못해 했다고는 하나 북측의 미사일 발사 실험 등 국가적으로 뒤숭숭한 때 북한에서 여종업원과 춤판을 벌였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던 것이 사실.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지지선언을 발표해 통일민주당 당원들이 분열되어 단일화가 무산되었다" 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김근태는 통일민주당 당원이 아닌 재야 민주화운동가였으며 무엇보다도 1985년부터 1988년 6월까지 그는 감옥에 있었다.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이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7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도봉구 갑)새정치국민회의27,768 (38.9%)당선 (1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도봉구 갑)새천년민주당34,233 (50.9%)당선 (1위)2003.11 열린우리당으로 당적 변경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도봉구 갑)열린우리당42,583 (52.1%)당선 (1위)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도봉구 갑)통합민주당31,335 (46.2%)낙선 (2위)

8 그를 소재로 한 작품들

정지영 감독이 연출, 박원상, 이경영이 주연을 맡은 남영동1985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고 2012년 11월 22일 개봉했다. 다만 비슷한 시기 개봉한 26년 때문에 관객을 뺏겨 흥행에서는 전국 관객 30만(전산망 공식집계 기준)을 넘지 못하고 참패했다. 애초에 흥행성을 노린 영화기보다 사회고발 성격이 강한데다 독립영화로 구분되는 작품이라 어쩔수 없기는 했다.

시사만화가 박건웅이 2014년 6월 '짐승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남영동 사건을 만화화 하였는데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다.

9 관련 항목

  1. 당시에는 부천군 오정면.
  2. 지방선거 직후 정동영 의장의 사퇴로 2등이었던 그가 최고위원의 자격으로 비대위 체제하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최장 재임에 유일하게 임기를 채우고 물러난 인물이 되었다. 원 임기는 1년이다.
  3. 여담으로 70~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대학생이었던 386 인사들은 대개 김근태 선배라고 부른다. 빈소를 취재했던 한 젊은 기자는 빈소에 다녀간 사람들이 고인을 모두 선배로 부른다는 게 신기하다는 기사를 쓴 적도 있다. 물론 고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예외이다.
  4. 조영래와 손학규는 경기중 시절부터의 동기동창이다. 김근태는 광신중학교를 나왔다.
  5. 참고로 이때 같이 구속된 인사 중 1명이 바로 아프리카TV로 유명한 나우콤의 사장 문용식이다.
  6. 충치 치료를 위해 치과에 찾아갔으나 치료용 의자에 앉아서 드릴 돌아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박차고 뛰쳐나왔다고 한다.
  7. 어느 정도로 두려워 했냐면 수술대 위에 눕는 것마저도 괴로워할 정도였다. 수술대가 고문시 사람을 묶어놓는 일명 칠성판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 정도로 고문 범죄를 저지른 이근안은 훗날 목사가 되어 "고문도 예술이다" 라는 망언을 날린 바 있다. 결과적으로는 고인도 고문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해 원하는 조서를 쓰고 말았을 정도였으니.
  8. 특히 권노갑이 주 타깃이었다. 물론 권노갑은 김근태 외에도 당내 소장파 인사들이 주된 타깃으로 삼던 정치인이긴 했지만.
  9. 그의 사망 후 아내인 인재근 의원을 중심으로 그와 교류한 정치인들이 결집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
  10. 2000년 후반에서 2001년 연말까지는 이인제에 맞설 이른바 비주류 대표인사로 두 사람의 동정과 대권전략이 정가의 주요화제이기도 했다.
  11. 경선 과정에서 자신이 권노갑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양심선언'한 뒤, 경선 주자들에게(특히 권노갑이 지원하고 있던 이인제를 겨냥해) 정치자금 문제를 다 까보자고 말했다가 역풍이 분 것이(...) 치명타였다. 이인제 대세론을 흔드는 노풍이 분 것은 덤. 여담으로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정치가 정치자금 문제에서 얼마나 골때리는 상황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존경 받던 재야 운동가이자, 정계에서 가장 깨끗한 정치인으로 꼽히던 김근태마저 불법 정치자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12. 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맞섰다는 이유로 온라인상에서 굉장한 수준의 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13. 전 항목에 참패했다고 돼있는데 당시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와의 격차는 불과 1000여 표에 불과했다. 더구나 경기동부연합 계열 민주노동당 후보가 출마해서 1000여 표를 차지했다는 걸 감안한다면 대단히 아까운 패배이다.
  14. 단, 실제로 가지는 못하고 메세지만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이 메세지를 전달받은 식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15. 애초에 그녀의 출마를 권유하기 위해 또 그녀가 승낙할 것을 염두에 두고 당내 지역구 인사들은 예비후보 등록을 하지도 않았다. 즉, 그녀가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길 원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엿볼 수가 있다. 49재 이후 그녀의 출마를 설득했고 당내에서도 권유했으며 그녀가 출마를 승낙하자마자 바로 1호로 전략공천했다.
  16. 라이카 같은 메이커들은 이런 한정판 바디에 일렬번호를 붙이는데 그 1번이라면 가격은 둘째치고 평생 한 번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영광. 물론 가격은 몇십 억을 호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