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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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기춘(金淇春, Kim Ki-choon)
생년월일1939년 11월 25일
출신지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1]
본관김해 김씨
거주지경기도 의왕시
종교천주교(세례명: 스테파노)
학력경남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경력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 부장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
제22대 검찰총장
제40대 법무부 장관
제15대 국회의원(경남 거제시)
제16대 국회의원(경남 거제시)
제17대 국회의원(경남 거제시)
제2대 대통령비서실장
링크[대한민국헌정회]
박근혜 정부의 역대 대통령 비서실장
1대 허태열2대 김기춘3대 이병기
역대 법무부 장관
39대 이종남40대 김기춘41대 이정우#s-6
역대 검찰총장
21대 이종남22대 김기춘23대 정구영
KBO 역대 총재
7대 권영해8대 김기춘9, 10대 홍재형

1 개요

1. 야간의 주간화
2. 휴일의 평일화
3. 가정의 초토화
* 라면의 상식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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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본인의 메모에서)[#]
김기춘 증인, 당신께서는 죽어서 천당 가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3]
(김기춘 증인은 정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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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국민의당 국회의원)[#][#][#]
현대사에서 수많은 ‘법비’(法匪)[4]가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 하의 ‘육법당’(陸法黨) 법률가들이나, 우병우, 조윤선, 김진태 등 박근혜 부역 법률가들이 그 예이다. 그런데 김기춘은 급이 다르다. 그는 ‘법비’가 아니라 ‘법마’(法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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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유신시대부터 박근혜정부까지 40년 넘게 권력 근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신헌법 설계, 공안사건 조작, 지역감정 조장, 문화계 블랙리스트 등 한국 사회에서 흑역사로 치부되는 굵직한 업보(?)에 꽤나 큰 족적을 남긴 장본인. 그리고 정권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이런 사회 분열책을 남발한 결과, 2010년대 들어선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자신이 모신 정치지도자를 파멸시키고 한국 사회의 퇴행을 불러온 간신 취급받고 있다.

2 생애


출처 : [김기춘은 어떤 검사, 어떤 정치인이었나?][5]


2.1 초년 시절

1939년 11월 25일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통영군(거제도)[6]에서 태어났다.

외포초등학교, 마산중학교를 거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부친은 태평양전쟁(!?)[7],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군인이지만,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서민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어린 시절을 가난했다고 묘사하듯이, 김기춘이도 집안이 가난하여 가정교사 일을 하면서 고학했다고 말해 왔다.

가정환경이나 출신이 어떻든 아무튼 그는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여,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60년 고등고시[8] 사법과에 합격해서 출세길이 열리게 된다. 거기다 재학시절 5.16 군사정변에 공을 세운 부친 덕에 5.16 장학회[9]의 장학금을 받아서 학업을 했고, 입대전 합격했기 때문에 해군 법무관으로 군복무를 마친다. 군복무 시절 대학원에 재학했고, 대위로 전역하였다.

이후 검사로 법조계에 입문하여, 광주지검 근무 시절 지금의 부인 박화자와 결혼했다. 이어 부산지검, 서울지검에서 검사로 근무했고 대구고검의 검사장을 지냈다.

초임 검사 시절부터 그는 출세지향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기질을 보였는데, 심재륜[10][11]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검사 때 법무부 장관 신직수의 눈에 띄려고 날마다 장관 집 앞 언덕을 오르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남들 잠자는 시간에 일찍 일어나 출세를 위해 상관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신직수는 또 하나의 독재정권의 법률부역자로 부친이 박정희의 군 선배인데다 5.16 때 박정희의 부대에 법무관[12]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서경대학교로 이름이 바뀐 한국대학교를 나왔는데, 당시 대학이 드물긴 했지만, 그 당시조차 이 학교는 학벌의 위상이 그다지 높지 못하였다. 지금도 출신 학부가 중요한 스펙의 하나로 취급받는 법조계에서, 그는 5.16이 없었다면 법조계 비주류인 군법무관 경력 변호사로 끝났을 것이다.

2.2 유신체제 시절

2.2.1 유신헌법 저작권자

체육관 선거로 국민의 참정권을 차단하는 새 헌법을 만들려고 했고, 신참 검사이던 김기춘에게 개헌을 맡겼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이후 갈봉근, 한태연과 같은 헌법학자들이 합류하여 헌법 개정작업을 진행하기는 하지만, 갈봉근과 한태연의 회고에 의하면, 이미 김기춘이 만들어 놓은 뼈대는 손도 못 대게 했다고 한다. 즉, 유신 헌법은 김기춘의 손에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김기춘은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되자, 검찰 기관지에 다음과 같이 기고한다. (1972.12 <유신헌법 해설>)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 당시 묵비권을 행사하던 문세광을 하루 만에 설득했다고 주장하면서[13] 이 사건을 수사하는데 공을 세워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박정희는 김기춘을 김똘똘이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법무비서관 시절 박근혜-최태민 관계를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부터 최태민-박근혜와 김기춘이 밀착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즉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이런 부적절한 관계를 근절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편승하여 출세를 도모한 것.

2.3 제5공화국 시절

70년대에는 엄청 잘나갔지만, 80년대 들어서는 된통 깨졌다. 그것은 김기춘이 중정에서 근무하던 1970년대 후반, 대통령의 명령으로 보안사를 크게 손보았다가 보안사를 권력기반으로 하는 전두환 일당, 즉,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보복을 받기 때문이다.

그 발단은 1977년 20사단 예하 62연대 1대대장 월북 사건이었다. 보안대가 전방 대대장 유운학 중령을 과도하게 갈구는 바람에 유 중령이 참다못해 월북한 사건이다.[14] 보안대 관계자는 유운학에게 진급심사에 관련된 뇌물을 요구했으나, FM적인 성격의 유운학은 이를 거부헀고, 이를 괘씸하게 여긴 보안대 소속 장교들이 유운학을 괴롭혔다. 유운학은 보병학교에서 전술교관으로 근무했을 만큼 한국군의 전술을 꿰뚫고 있었으며, 장성진급도 유력한 인재였다고 한다. 이런 유운학이 무전병을 포섭해 월북하여 한국군의 작전교범뿐만 아니라 암호체계까지 모조리 북의 손에 넘어감으로써 한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이후 최고 계급의 현역 군인이 월북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의 진상을 듣고 분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의 대공국장으로 있던 김기춘에게 그 처리를 지시하였다. 김기춘은 보안사 조직 축소안을 마련했고, 관련된 보안사-보안대 간부들을 여럿 중정에 끌고와 혼을 내주기도 했다. 이 사건은 명백하게 보안사 잘못이어서 사실 김기춘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독재국가에서 필연적인 정보기관 사이의 암투 때문에 김기춘은 보안사 간부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10.26 이후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가 중앙정보부를 접수했을 때, 중정에 들이닥친 보안사 요원들이 가장 먼저 한 말이 "김기춘 어딨어!"였다. 하지만 김기춘은 가까스로 몇 달 전 청와대로 전직한 상태여서 보안사로 체포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김기춘이 만약 중앙정보부에 계속 있었다면 코렁탕을 먹었을 보복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 운빨은 기가 막히게 터진다.

그나마 검찰에서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한때 검찰에서 부하로 두고 있었던 노태우의 처조카 박철언에게 줄을 댔고, 당시 보안사 비서실장이던 대령 허화평에게 충성 맹세 편지를 써 보냈기 때문. 이 일화는 박철언의 회고록에 나온다.[15] 박철언은 나이로는 김기춘보다 3살 어리고, 고시합격은 8년 정도 늦은 사법시험 8회이니 기수를 중시하는 검찰로서는 까마득한 후배다.[16]

그리고 그 다음해 장영자-이철희 사건이 터지자 국회에서 사건 축소가 전두환의 지시라는 뉘앙스를 갖는 증언을 했다가 전두환의 노여움을 사지만, 이것도 박철언이 무마해줘서 옷을 벗지 않고 법무연수원으로 좌천되어 연명할 수 있었다. 이때 찾아오는 손님이나 이전에는 여럿 거느렸던 부하들도 거의 없이 밥도 항상 혼자 먹는 등 갖은 수모를 당했다고 한다.[17] 유신시절 무소불위를 저지르던 과거를 감안하면 몰락의 극치였다. 문제는 이렇게 한직에 있을 때도 육영재단 등, 최태민-박근혜 일에 개입했다고 한다. 최태민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5공시절인 1980년대 남매-자매간 갖은 분쟁때문에 바람잘날이 없던 육영재단 일에 현직 검사이던 김기춘이 최태민-박근혜를 위해 자주 나타났다던 증언이 나왔다.

어쨌든, 공안검사들의 전성시대였던 제5공화국 때 70년대까지 고시 선두주자였던 김기춘은 요직이 아니라 계속 한직으로 돌았다.


2.4 제6공화국 시절

전두환이 물러나자 그는 다시 출세가도를 달린다. 박철언이 6공의 황태자 노릇을 하면서 자신과 친분이 있는 김기춘을 적극 밀었기 때문이다. 5공 때 먹은 찬밥은 6공에서 전화위복이 되는데, 그는 5공 때 한직으로 돈 사실을 가지고 깨끗하고 강직한 검사로 연극했다. 1988년에 검찰총장이 되는데, 이는 박정희의 또 다른 가신이었던 신직수[18]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최연소 취임 기록이다. 이때 5공화국 세력을 개박살 내려고 5공비리 사범 50여 명을 구속시키는 등, 5공청산에 앞장선다. 정작 6공세력까지 얽힌 비리, 5.18을 비롯한 중요 사안은 냅둔다.

13대 국회 때 여소야대로 정권이 수세에 몰리자 적절한 시기에 굵직굵직한 공안사건을 터뜨려 정권의 위기를 해결해주는 구원자 역을 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서경원 의원 간첩사건 의혹인데, 이때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가 연루되어 있다는 언플을 하면서 김대중의 이미지에 흠집을 냈으나, 결과적으로 김대중은 결백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1년 5월 27일부터 이듬해 10월 8일까지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였다. 이때 노태우 정부는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과 힘을 합친 후 6월 항쟁 이후 국민의 요구로 이루어졌던 많은 개혁조치를 되돌리는 반동정책을 행하면서 학생운동권의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여기에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전경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자, 386세대 최후의 항쟁이라는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이 벌어져 정권은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때 매주 분신자가 나오면서 전국민 항쟁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김지하[19]는 5월 5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우라"라는 글을 기고해 운동권이 기획분신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와 동시에 서강대 총장이던 박홍 루카 신부가 "분신을 부추키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5월 27일 막 법무부 장관으로 등판한 김기춘은 주작 솜씨를 발휘, "김지하박홍 신부의 말이 근거 있다"며 검찰에 특별 수사를 지시하여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킨다. 즉, 재야단체 전민련에 소속되어 있던 운동권 강기훈이 운동권 동지였던 김기설씨의 분신자살(1991년 5월 8일)을 부추기고 유서를 대필해 줬다는 플롯을 짠 것이다. 정부가 이러한 내용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면서[20] 분신정국은 급속히 공안정국으로 반전되었으며, 그 직후인 91년 6월 4일 국무총리로 지명된 정원식 한국외대 교수 퇴임식에서 운동권 학생들에게 계란세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된다. 김기춘은 자신의 솜씨를 발휘해 정권의 위기를 찬스로 전환시켰고, 운동권은 치명타[21]를 입었으며 이 사건기점으로 공안검사 출신들이 승승장구하는 결정적인 계기[22]가 되었다. 강기훈은 무려 24년 만에 2015년 재심절차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를 지휘한 김기춘이나 관련 공안 검사들은 전혀 사과나 반성을 한 바가 없다.[23]


2.5 문민정부 시절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당연히 청산 대상이 되어야 정상이었는데,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운빨이 터진다. 어처구니없게도 김영삼과 동향 및 동문이라는 이유였다.[24] 5공, 6공 시절 김기춘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박철언은 김영삼과의 불화로 정치보복을 받아 소위 "슬롯머신 비리"사건으로 감방에 갔는데[25][26] 김기춘은 박철언과 가까이 지냈음에도 무사했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운빨과 보신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할 듯.

김기춘은 3당합당이후 여당정치인이 된 김영삼에 일찌감치 줄을 서왔으며, 법무부장관에서 물러난 1992년 12월 11일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지역감정 조장을 음모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킨다. 그런데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측은 거꾸로 정주영측의 도청을 문제삼았고, 부산 민심은 김영삼에 기울어, 김영삼은 대통령선거에서 낙승했다. 정말 이 인간 줄은 잘 선다

김기춘은 초원복집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재판이 진행되는 중 당시 대통령선거법 규정을 위헌제청신청하는 기발한 수를 낸다. 그러니까 법률적으로는 도저히 선거법 위반 혐위를 피해나갈 수 없자, 본인이 당시 야인이었음을 이용하여, "나는 공직을 퇴임한 일개 시민인데, 이렇게 선거운동할 수도 있는 게 아니냐"는 기발한 개소리를 개발하여 대통령선거법을 위헌 제청 신청한 것.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선거법의 해당 조항이 위헌결정되면서 검찰의 공소가 취소되고, 김기춘도 겨우 처벌에서 벗어난다. 위기에서 벗어나는 실력이 아주 뛰어나다.

이후 서울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다가, 1995년 2월에는 KBO 총재에 임명된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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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선수들과 악수하는 KBO 총재시절의 김기춘.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거제도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다. 당시에도 유신헌법의 초안자라는 점, 초원복집 사건의 주범이라는 점이 결격사유로 지적되었는데, 김기춘은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나와 관련된 얘기에 대해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유신이 이뤄진 1972년에 나는 당시 임용된 지 7년된 만 32살의 평검사였다. 나는 내가 역사를 왜곡하는 데 직접 참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복국집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내가 경남 분들이 표를 몰아줘야 한다고 얘기는 했지만 호남을 비방한 적은 전혀 없다.

선거 결과 김기춘은 압도적인 표차로 다른 후보들을 누르고 당선된다. 거제는 김영삼 대통령의 고향이었던 만큼, 여당 후보로 출마한 이상 국회의원 당선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2.6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시절

김영삼을 적극 지지하여 따낸 국회의원이라는 직위는 정치적 방탄복이 되었고, 그는 재심에서 무죄로 밝혀진 유신-5공시절의 여러 조작사건에서 검사나 수사관으로 활약했음에도 아무 법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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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국회 법사위원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의결서를 보여주는 김기춘. 왼쪽은 당시 새천년민주당[28]에 있다가 참여정부 말기 친박으로 전향한 함승희. (낙선 후, 강원랜드 사장으로 있다.)

과거 공안 조작사건 기획과 지역감정 유발, 공작정치의 전력으로 시민단체에 의해 총선 낙선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3선 국회의원이 되었고 법제사법위원장으로 선출되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탄핵심판 청구인이 되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을 기각했다.

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을 싸이코라고 지칭하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너는?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선후보 캠프의 좌장노릇을 했으며, 원로 친박 정치인으로 구성된 7인회의 일원이었다.[29][30]


2.7 이명박 정부 시절

2008년에 공천권을 쥔 이명박 측이 친박 대숙청을 할 때[31] 너무 고령이다라는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해서 야인이 되었다.

이후 2009년부터 2013년 8월 박근혜정부 비서실장이 되기까지 한국에너지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이 당시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최순실 일당과 가까이 지낸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2009년 10월, 미공개 회고록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을 남겼다. 이 회고록에서, 김기춘은 1970~80년대 사고방식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사정부 시절 국가범죄에 대한 과오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은 전혀찾아볼 수 없었으며, 노골적인 극우반공주의 의식, 편협한 정치적 시각도 여과 없이 표출돼있다. 요컨대 ‘극우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김 전 실장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2.8 박근혜 정부 시절

2.8.1 비서실장 재임 : 기춘대원군

드물게 보는, 사심이 없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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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2015년 신년기자회견에서 김기춘에 대한 평) [JTBC]

2013년 8월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이 윤창중 성추행 사태가 터지자 인사 실패를 책임지고 물러났다. 한 언론인터뷰에서 익명의 청와대 관계자는 “인사와 관련해 허태열 전 실장과 보좌진 그룹이 나뉘면서 두 그룹 간 마찰이 생겼다”고 말하여 허태열 전 실장과 3인방과의 알력이 있었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2013년 8월 5일에 제2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허태열 전 실장에 이어 새로 취임한 김기춘 비서실장은 부속실로 쏠리던 힘을 비서실로 당겨왔다는 평을 듣는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이재만 총무비서관을 포함해 5명으로 구성된 청와대 인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평소 인사 문제에 있어서 뜻을 강력히 관철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듯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기에 붙은 별명이 기춘대원군.

2013년 9월 13일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문제가 불거지며 사퇴를 결정하자, 이의 배후에 김기춘 실장이 거론되며 사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당시 야권에서는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을 덮기위해 조선일보를 통해 채동욱의 개인정보를 흘려 수사 중이던 검찰 총장을 찍어내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언론에서 김기춘 비서실장 경질설 등의 보도가 자주 나오자 상부에서 이에 대해 조사하라는 지시가 박관천에게 하달된다. 박관천은 조사 도중 정윤회에 관한 제보를 입수하고 이에 관해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때 작성된 보고서가 언론에 유출되며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에 휘말리게 된다.

2013년 11월 5일에 시작된 통합진보당 위헌정당해산 사건황교안 총리와 함께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2]

2014년 4월 청와대 7시간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 대통령의 행방에 관해 모른다고 답변하면서 대정부질의 중이던 박영선 의원조차 어이를 상실해 몇번이나 추궁했고, 이로 인해 세월호 7시간이 급속도로 확대된 빌미를 제공했다.


2014년 7월 7일에는 최태민 일가의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과 관련해서, "맹세코 비선라인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해명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거짓말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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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 하라고 지시했다.

2015년 3월 자원외교 비리 조사에 따른 성완종에 대한 사정이 본격화하기 직전 비서실장직에서 사퇴한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해서 해명하는 곤란을 겪어야 했다. 후임은 이병기.

이미 2014년부터 보수진영에서도 비서실장으로서는 평가가 극악이었다. 당연하지 보수가 아닌데


2.8.2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역시 등장하며, 최순실에 대해 모른다고 말했다. 그런데 청와대 재직 시절, '최순실을 주의하라'는 구두 보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순실 소유의 건물에 김기춘이 활동하고 있는 증언이 나왔다.[#]

최근에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뒤 차움병원에서 줄기세포 치료를 받아서 논란이 되고 있다. 가명인 KKC를 써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기사] 김기춘이 김종 문화체육부 제2차관에게 최순실을 소개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당초에 최순실을 모른다라는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때 생긴 별명으로는 줄기춘이 있다.

게다가 성완종 자살 직후 일본에서 반값’ 면역세포 치료했다는 것이 드러났다.[기사]

세월호 7시간 동안 김기춘은 수석들의 입과 귀를 막았다고 한다. 그것들과 관해서도 모른다고 발뺌했다. 게다가 최 씨 일가 국정개입에 대해 몰랐고 그것에 대해 자괴감이 들 정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김종 전차관이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차은택이 최순실의 지시를 받고 김기춘과 만남을 가졌다고 주장하면서 김기춘이 최씨 일가를 몰랐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차은택을 모른다고 발뺌하다가 차은택이 구속된 후 김기춘을 만났다는 것을 자백하자, 마지못해 인정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최순실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80년대부터 육영재단 관련 사안에 개입해온 그가 모를리 만무.) 하지만 워낙 빠져나가는 게 능한데다가 운빨이 상당하고, 여기에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거쳤기에 전관예우(검찰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이번에는 법적 처리가 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결국 문화체육관광부 고위 공직자들의 집단 사표를 받는 데 관여한 혐의로 [피의자]로서 수사하게 되어 그의 불패신화가 흔들리고 있다.

김영한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에 의해 통진당 해산을 헌재 결정 이틀 전에 알고 있었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화에도 손을 썼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기사] 심지어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유가족과 동조 단식을 하는 문재인 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당시 의원)와 가수 김장훈씨 등의 행동을 ‘자살방조죄’로 규정하고 ‘언론지도’를 통해 비난 여론을 조성하려고 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기사]

2013년 말 개봉했던 영화 변호인을 본 직후 혀를 차고 못마땅해하며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는 회사들을 제재하지 않느냐유진룡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말했던 사실이 당사자인 유 전 장관의 인터뷰릍 통해 드러났다. 그는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순수 문화예술 쪽에서도 반정부적인, 반정부적인 행동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왜 지원을 하느냐? 왜 제재를 하지 않느냐는 요구를 김기춘 실장이 직접 또는 모철민 교육문화수석, 김소영 문화체육비서관을 통해서 다각도로 문체부에 전달했다"며 이것이 이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2.8.3 최순실 청문회에서의 증인출석

모릅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미꾸라지 김기춘. 미꾸라지라는 명성답게 요리조리 피해가다 마지막에 자신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던 시민들의 힘과 집요한 추궁에 의해 무너지다.

2016년 12월 7일, 2차 청문회에 출석했다. 주요 증인이 대부분 핑계를 대고 불참한 가운데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출석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렇게 빠질 수 있음에도 굳이 나온 이유에 대해 김어준은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려 했다"고 평가했다. 즉 자신이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면서 도피 중인 우병우나, 아직 구속되지 않은 문고리 및 관련자에게 입다물라는 암시를 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과연 법률전문가 답게 대부분 법률지식이나 수사경험이 없는 의원들의 여러 질문을 요리저리 피해나가면서도 오후 늦게까지 헛점을 보이지 않았다.[33] 자신이 실수한다 싶으면, 노령으로 인한 기억력 쇠퇴나 오래전에 발생한 일에 대한 기억착오라고 주장하며, 미꾸라지처럼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치매라고 요양원에 평생 가둬두면 되는데 구속되었다 합니다 글 내려주시죠

특히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수첩(비망록) 내용을 전면 부인했으며, 본인이 내린 "(비판 여론 무마를 위해) 시신 인양을 늦추라"는 지시에 대해서도 사실상[34] 고인이 된 아들까지 들먹이며 사실을 부인했다. 이를 보다못한 국민의당 김경진 의원[35]은 거의 울분에 찬 비판을 하였다. 이 문서 맨 위에 해당 문장이 그 내용. 발언내용이 속기록에 남는 공식적인 자리이기에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말을 정중하게 에둘러 표현하였고, 밑에 말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아들을 거의 능욕하다시피 하는 김기춘을 비판하는 말이다.

Uman (토론)모릅니다Uman (토론), Uman (토론)저는 알지 못합니다Uman (토론)
그런 사실 없습니다 오해입니다
박영선 : 흐-뭇

하지만 10시경 박영선 의원이 주갤발 [제보]를 바탕으로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제시하여 최순실을 모른다는 것도 거짓말로 들통 났다. 청문회에서 계속 최순실을 모른다고 하다가는 빼도박도 못하게 위증죄로 고발될 처지였기 때문에, "최순실을 못 들었다고 볼 수 없다"는 표현으로 위증죄를 피해나가려고 한 것. 과연 [법비(法匪)]라고 할 수 있다. 아래 취소선이 청문회 당시 그의 무적 논리인데 그것이 깨진 것이 큰 충격이었던 듯. 청문회가 끝나고 퇴장한 장면이 나왔을 때를 잘 보면 거의 부축을 받다시피해서 걸어 나갔다.

게다가 당시 후보 토론회에서는 주갤의 추가 제보로 정윤회에 대해 당시 행적까지 언급하는 발언까지 들어 있었던 게 확인되어 정윤회를 몰랐다는 말이 도저히 사실일 수가 없게 되었고 김기춘은 정윤회를 몰랐다는 게 개인적인 접촉이 없었다는 의미였다고 버티려 했으나 새누리당 황영철 의원이 이어서 질의하면서 "지금 증인이 유신 시절부터 해당 영상은 물론 박근혜 정권 비선실세 관련 보고서까지 최씨 일가에 대한 정보를 질리도록 반복해서 들은 위치인데 증인은 청문회 이전에는 존재를 아예 모른다고 말 해놓고 이제 와서 개인적 접촉이 없었던 의미라고 하면 사람들이 믿겠는가?"하고 힐난하자 오전 청문회 때와는 달리 제대로 대답을 잇지 못했다. 여기서 기껏해야 몇년 전 일은 기억도 못하면서 수십년 전 일은 또렷이 기억하는 김기춘을 보고 "그건 또 기억나시냐??"고 냉소한 건 덤.

의학적 치료 없이 치매가 실시간으로 치료되는 기적의 순간.

청와대 재임 시에는 문고리 3인방의 전횡을 차단하기는커녕, 그들을 적당히 봐주어 권력을 공유, 비서실장으로서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 그는 최순실-문고리3인방의 조력자다. [월간중앙]

청문회에서 주갤의 제보로 크게 털린 것이 매우 큰 충격이었는지 채널 A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김기춘의 부인 박화자가 직접 "남편은 현재 청문회에 나간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사] 부창부수라고 남편은 잘못이 없다고 하고 있다. 꼬투리 잡힐까봐 걱정하는지, 옆에서 그만하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과거에도 자신을 결정적 위기에서 여러 번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부활을 만들어 준 박철언이 감옥에 갈 때도 김영삼에게 붙어서 모른 척 했듯이, 현재 보신을 위해서라면 의리충성심도 없는 듯, 차은택을 만난 사실을 극구 부인하다가 차은택이 자백하자 이를 박근혜 지시라고 하며 차은택 관련 비리 혐의를 위기에 몰린 박근혜에게 전가하는 추태까지 보이고 있다.[36]

법을 훤히 꿰뚫었으며, 처신에도 능숙한 사나이라서[37] 이것으로 실형 선고까지는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정치가로서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과거처럼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재기를 노리는 것도 어려운 것이, 그의 나이 이미 78세다(2017년 기준).


2.8.4 특검 수사

법마의 몰락

평생을 미꾸라지처럼 자신을 덮쳐온 위기와 법률망을 요리조리 피해다니다가, 결국 인생 말년에 법의 심판 앞에 서게 됐다.

2017년 1월 18일, 특검팀은 직권남용과 위증 혐의로 조윤선 문체부 장관과 함께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 밖에도 여러 혐의를 비롯해 [증거인멸까지 저지른 정황까지 밝혀졌다].

2017년 1월 20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에 들러 수사관들과 함께 법원으로 이동해] 3시간 반의 영장실질 심사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옮겨져 항문검사를 당한 뒤 수의를 입고 수감됐다.[#] 진정한 똥꼬쑈 현재 서울구치소의 최고령 수감자라고 한다.

이 즈음,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은 신랄한 비판 글을 올렸다.
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701/1484905088814f64c5a53f48b1ae6548e7df3f474emn700284w480h194f26250__Ym201701.jpg?width=400

2017년 1월 21일, 결국 새벽 3시 48분 조윤선과 함께 구속되어 말년을 꼴사납게 장식하는 개굴욕을 당한다.

2017년 1월 22일, 특검에 소환되어 수갑을 찬 채 출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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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검은 김기춘 전 실장이 직무를 벗어난 광범위한 국정 개입에 나서고, 비선실세 최순실 등을 비호한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결국 구속영장 실질심사 과정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작성 및 실행 지시를 주도했다는 것을 시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은 이게 불법인 줄 몰랐다고 진술했다. 조금만 나이가 들어도 알 만한, 중대 헌법 위반 사항을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의 법률가가 몰랐다고 진술해서, 많은 사람이 망연자실했다. 그야말로 법마의 추잡한 마지막이다.

구속된 후에는 블랙리스트가 특검의 수사 대상이 아니라며 법원에 이의 신청을 했지만 2017년 2월 3일 기각되었다.

법원: 기춘아! 정신차려!!! 넌 이제 법마는 개뿔이고 아무것도 아닌 그냥 범죄자야!!!"

차라리 국회의원 3선으로 끝내고 대통령 비서실장직을 맡지 않고 무난히 정계에 은퇴하였다면, 이렇게까지 몰락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검사 시절부터 품고 있던 출세욕과 권력욕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과 본인의 인생을 파멸시키고 더러운 오욕으로 후세에 남겼다.


3 관련 사건

3.1 1975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있던 김기춘이, 납북 어부를 간첩으로 만들거나 재일동포 학생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다는 의혹이 있다. 학원간첩단사건에 연루되었던 21명 중 2016년 현재까지 재심 신청자 12명 모두 무죄 판결이 났다.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에서 잠시 출연한다. 이 영화에서 1970년대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취재하던 최승호 기자는 아주 우연히 김포공항에서 일본으로 가는 김기춘을 마주쳐서, 그 사건의 조작여부에 대해 추궁하는데, 김기춘은 아는 바 없다고 모르는 척 한다.[38] 최승호 기자의 회고에 의하면 화장실로 도망쳤다가 한참 지난 후 나왔는데, 그때까지 최 기자가 대기하여 질문하자 난감해했다고.


3.2 1989년 우지 파동

1989년 우지 파동이 벌어지자, 검찰총장이던 김기춘의 특별지시를 받은 검찰이 삼양식품을 대대적으로 수사해서 거의 파산직전까지 몰아간 적이 있다. 가뜩이나 1988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농심그룹[39]에게 업계 1위를 뺏겼던 삼양식품을 제대로 빅엿을 먹인 셈이다. 이후 삼양식품은 한때는 후발주자인 빙그레오뚜기에게도 위협당했다. 물론 지금은 2세 경영체제로 들어서고서 계속 추락하고 있다. 이 사건은 1997년 삼양라면이 무죄를 받음으로써 결백이 밝혀졌다. 문제는 김기춘은 퇴임 후에 이 사건으로 엄청난 수혜를 입은 농심의 비상근 (출근 안 하는) 고문변호사[40]를 맡으면서 매달 천만 원씩의 급여을 수년간 받아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죄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나 특별수사를 지시한 김기춘은 파산할 뻔한 삼양식품에 대한 사과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3.3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노태우 정권 시절,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 재직시 일어난 국가적 차원의 조작 사건. 그 모든 지휘를 했다는 의혹이 있다.


3.4 1992년 초원복집 사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지 2달 된 김기춘이 주도하여 부산의 기관장들이 모여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지역감정을 유발하고 돈과 권력을 이용하자고 불법 관건선거를 모의했다.[@]

믿을 데라고는 부산 경남이 똘똘 뭉쳐 주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데,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 일으켜야... (우리는 지역감정 좀 일어나야 됩니다.) 일어나야 된다. 야, 지금 이번에 뭐 제대로 부산놈들 뭐 본때를 못 보이면 다 죽어야 된다. 요새 부산놈들이 정주영 운운하는 놈들이 쓸개가 있는 놈이냐 어떤 놈이냐 이런 식으로 하면서 이번에 이거 제대로 못 하면 부산놈들은 창자 쓸개도 없는 놈들이다 라는 어떤 그런 식으로.. 이건 부산 운동본부에서도 아이디어 한 번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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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 부산 초원즉석복국집에서 김기춘
나는 그것을 잘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늘 반성하고 내 생애에서 가장 부끄러운 추억 중에 하납니다. 지우고 싶은 것 중에 하나에요. 난 깨~끗한 비단옷을 입고 달밤에 길을 가는 그런 아낙네였는데, 그냥 구정물을 한 바가지 옷에 덮어쓴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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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한겨례 TV와의 인터뷰에서 김기춘

3.5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결의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탄핵소추위원장을 맡았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청구를 기각하자,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탄핵의 찬반 여부를 실명으로 공개하도록 "심판에 관여한 재판관은 결정서에 의견을 표시하여야 한다."(헌재법 제36조 제3항)고 헌법재판소법을 개정하였다. 따라서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된 이후 헌재 재판관들이 국민의 여론에 반하는 반대의견을 내놓기가 부담스러워지면서 본의아니게 팀킬을 하게 되었다.

이후 2008년 서울대 법학과 제16회 동창회가 엮은 ‘낙산의 둥지 떠나 반백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탄핵소추위원으로 참여한 경험에 대해 글을 기고 하였는데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크게 이슈화 되면서 재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기춘이 쓴 대통령 탄핵 소추의 의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제헌국회 속기록을 보면 대통령의 실정법 위반뿐 아니라 지휘·감독 관계에 있는 공직자에 대한 지휘·감독을 소홀히 한 것과 국정을 불성실하게 수행하는 경우 모두 헌법 위반으로 탄핵 사유가 된다 2. “탄핵 사유는 기소가 가능한 형사적 범죄일 필요는 없고 헌법이 부여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 부패 행위를 한 경우, 공중의 신뢰를 깨뜨리는 경우도 탄핵 사유가 된다 3. “직무를 태만히 하거나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경우에도 탄핵 사유가 된다 할 것이다. 4. “형사재판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는 공무원의 직권이 정지되지 않는 데 반해 탄핵심판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는 유죄 내지 유책 추정의 원칙을 적용한다” 이는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반대 입장을 대리하는 변호인측의 주장과 상반되는 주장들이다. [출처: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8년 전 글로 쓴 ‘대통령 탄핵사유'는 매우 놀랍다"]


3.6 2012년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박근혜 정부는 이 사건으로 정권 초부터 그 정당성이 크게 위협받는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국가정보원이 조직적으로 박근혜 후보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야권후보를 비방한 사실, 김용판 서울지방경찰청장이 대선 직전 수사에 외압을 넣고 허위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사실 등을 밝히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기소한다.

하지만 당시 검찰을 이끌던 채동욱 검찰총장은 돌연 사퇴하게 된다. '혼외자녀' 의혹에 휩싸이며 여론이 반전된 것이다. 김기춘은 채동욱 총장을 비롯한 '검찰 길들이기'를 주도하고 대선개입사건의 법원 판결에 대한 검찰 항소를 무마하는 데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3.7 2014년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

사실상 이 사건이 발생한 원인이자 흑막이다. 사건의 수습방식도 초원복집 사건과 굉장히 흡사하다.


3.8 2015년 경남기업 회장 자살 사건

이명박 자원외교 비리 조사를 받던 성 전 회장은 이날 서울 청담동 자택을 나온 직후인 오전 6시부터 50분간 경향신문과 전화 인터뷰를 통해 [“김 전 실장이 2006년 9월 VIP(박근혜 대통령)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며 “당시 수행비서도 함께 왔었다.]고 알려왔다.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자살하였고, 이후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애초에 수사선상에서 제외되서 그 어떠한 조사도 받지 않았다.[41][42]


3.9 2016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 장관의 증언에 의하면, 문화 예술계 인사와 단체의 탄압을 수차례 직접 종용했고, 블랙리스트 작성의 흑막이다.[유튜브1][유튜브2]

또한, 김희범 전 문체부 차관에게 블랙리스트에 반대한 문체부 1급 공무원 6명의 사표를 받아오라고 지시를 한 의혹도 있다. 사실이면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를 비판한 영화 <다이빙 벨>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부산국제영화제 정부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문체부 관계자의 진술이 나왔다.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과 직접 대면해서 블랙리스트 관련 지시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구속 중인 김종덕 전 장관이 특검 조사에서 "김기춘 전 실장에게 블랙리스트에 대해 대면보고를 했다"고 진술했다.[#]

결국 구속되었다. 전직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을 역임한 사람으로써, 수갑을 차고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어, 수감되는 치욕을 맛보았다.
[#]


4 기타

  • 부인 박화자는 김기춘의 서울대 법대 동기 동창의 여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장인은 광주광역시 지역 법조계의 원로였던 박찬일 변호사(1906년~1989년. 1931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이다.
  • 김기춘이 결혼식을 올리던 1965년만 해도, 아직 영호남 간에는 지금과 같은 험한 지역감정이 없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추악한 지역감정을 조장한 사례인 1992년 초원복집 사건의 주역 김기춘은 광주 출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지금까지 해로하여 같이 지내온 부드러운 남자였다고 한다. 마치, 이완용이 최고의 학식과 인품과 교양을 갖춘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 외아들이 2013년 12월 31일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의식불명이 되었고, 천벌 결국 2016년 8월 22일 며느리와 공동으로 아들의 성년후견인이 되었다.
  • 6공시절(노태우 시절) 검찰총장을 맡았을 때, 운동권을 악의 세력이라고 지칭한 바 있다. 적반하장 그 당시 별명이 미스터 "법질서" 인데, 그의 행적을 보면 매우 가소로운 일이다. 법질서가 아니라 법비켜
혼자 있을 때 더욱 조심하라는 신독의 자세를 강조해온 김 총장의 임기만료를 앞두고 인천 조직폭력배 전과누락사건, 대전 조직폭력배와 현직 검사의 술자리 합석사건 등 검찰의 체면에 중대한 타격을 가한 「추문」이 연이어 터져 후배 검사들은 총장 볼 낯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김 총장은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3분여의 짧은 퇴임사에서도 『정의를 지키려는 검사의 직무는 태산보다 무겁고 크다』며 『이는 말로서가 아니라 반드시 행동으로 지켜나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해 후배들을 숙연케 했다.
김 총장은 또 단호한 목소리로 후배들에게 『강력한 검찰이 되고 싶은가』라고 질문을 한 다음 곧 『그러려면 높은 도덕률과 탁월한 실력으로 무장하라』고 뼈아픈 충고의 답을 밝혔다.
김 총장이 「충고의 퇴임사」를 하는 동안 대부분의 후배 검사들은 다소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맨 뒷줄에 서 있던 한 부장검사는 『후배들이 김 총장의 생활태도를 반만이라도 따라간다면 절대 국민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총장의 퇴임사를 마음에 새기고 검사 개개인이 도덕 재무장을 해 범죄와의 전쟁에 나서야만 한다』고 곤혹스러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퇴임사에서 "학생시절의 순수성 정의감이 끝까지 퇴색되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말도 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훗날 한홍구 교수는 "남다른 흑역사를 간직한 김기춘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학생시절의 순수성과 정의감은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비웃었다.[#]
  • 키는 165cm 내외로 추정된다. 나이대를 감안하면 보통키. 몸무게는 62kg이라고 본인이 부산일보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 바둑실력은 8급인데, 한국기원 부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 2013년 비서실장 취임 당시 재산을 공개했는데, 당시 재산이 39억 원이었다. 야인시절에는 거물급 변호사로 일했기 때문에, 예금성 자산(약 30억 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평창동 자택과 바로 옆집인 아들네 집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불성실 신고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 시간관념이 매우 철저하다고 한다. 법무장관에서 물러나 집에서 야인으로 지낼 때도 짜놓은 시간에 맞춰서 움직였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집 2층 서재로 출근했는데 이 때도 정장을 했다고 한다.
  • 본인이 맡은 자리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자리로 KBO 총재를 들었다. 이 당시 한일 슈퍼게임 참관차 일본을 방문하고는 도쿄돔을 보고 감명을 받아, 돔구장 설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용병 제도도 검토하긴 하지만, 본격적인 용병수입은 그가 물러난 이후에 도입되었다.
  • KBO 총재 시절 선동열주니치 드래곤즈에 보내는 것을 꺼리던 해태 타이거즈 구단주를 설득, 일본에 진출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선동열이 김기춘을 고맙게 생각하고, 교분이 있다고 한다.
  • 정치 행보는 매우 음험하고 교활하며 사악하지만, 사람 자체는 매우 예의바르고 교양[44]이 있다고 한다.[45] 더불어민주당의 이철희 의원도 썰전 패널 시절 그렇게 증언한 바 있다. 영화 자백에 출연한 모습에서도 잠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부부동반 일본 나들이를 위해 온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끈질기게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조작사건을 캐묻는 최승호 피디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모릅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라고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끝까지 분노를 감추었다. 같은 영화에 비슷하게 강제 출연한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의 피의자인 전 국정원장 원세훈이 역정을 내는 것과는 대조적. 이 점이 바로 김기춘이 오랫동안 버틴 비결이다. 김기춘과 비슷한 정치검사-출세주의자 우병우는 평소에도 오만방자해서 수없이 많은 잠재적인 적을 만들었으며[46] 결국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해서 검찰을 떠난다. 김기춘은 적어도 겉으로는 주위에 친절하여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암흑기 때 한직에서나마 살아남았고, 검찰총장과 법무장관까지 지낼 수 있었던 것. 처신에도 능하다니 본격적으로 스마트한 천하의 개쌍놈
  • 검찰후배이자 같은 친박 정치인의 전 대법관 안대희는 "내가 아이큐 130인데, 김기춘은 170이다"라고 김기춘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다른 검찰 후배이지만, 정치적 성향으로 정반대인 금태섭"김기춘은 항상 권력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2인자에 만족했기 때문에 장수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즉,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최순실의 전횡을 막지 않고, 최순실에 이어 2인자 노릇을 하면서 권력을 공유했기 때문에 비서실장으로 오랫동안 재임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포스코 회장을 뽑을 때 자신이 추천한 인사를 접고 최순실이 미는 인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 조응천이 초임검사 시절(1992년)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이었는데, 그 당시 조응천에게 김기춘은 "검찰에서는 거의 레전드급"같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의 발언 하나하나를 교과서 같은 말로 여겼다고 한다. 김기춘과 조응천은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으나, 2014년 정윤회 문건파동을 계기로 조응천이 쫓겨나면서 둘은 완전히 원수지간이 된다. 그리고,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국회의원이 된 조응천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김기춘을 디스하고 있다.[동아일보] 김기춘 본인 퇴진설의 실상을 조사하라고 조응천에게 지시했는데 조응천이 보고한 바로 그 문건을 누군가(...)에게 넘겨버렸다고 한다.
  •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합류하기 전, 야인 시절에 전립선 비대증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야인시대? 청와대가 구입한 약물 중 전립선 비대증 치료제인 프로스카는 김기춘이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탈모증에도 약효가 있기 때문에 온갖 억측이 나오는 모양이다.
  • 2016년 12월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여러 의원의 질문공세를 피했으나, 막바지에 주갤의 지원사격을 받은 박영선 의원에게 크게 털리면서, 마지못해 최순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기사]에 따르면 청문회 이후에 박영선에 대해서 울분을 토했다고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문회가 끝나자 박영선 의원석을 찾아가 공손히 악수를 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기 속내를 100% 감출 수 있고 속마음과는 정반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매우 흠험하고 위험한 남자다. 2017년 시점에서 78세인데도, 정치권의 핵심 인사로 계속 살아남은 것에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 2014년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들어왔던 '우병우'의 일처리 방식이 김기춘과 비슷하다고 해서 청와대 내에서는 별명을 '리틀 김기춘'으로 붙였다고 한다.
  • 더민주의 한정애 의원은 김기춘이 최저임금 7% 인상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는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 2014년 6월 26일자의 내용을 거론하며 박근혜 정부의 최저임금을 김기춘이 사실상 결정했다고 비판했다.[#][47]
  • 2017년 1월 27일 방영된 썰전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과 바른정당 이혜훈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김기춘이 국회의원 시절에 박근혜도 같은 국회의원이었는데, 박근혜에 대해서 호칭이 주군, 하명(下命)를 높여서 썼다는 것이다.
  •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당시 박근혜와 김기춘의 발언이 재조명되었다. 당시의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는 "대통령은 탄핵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헌법재판소 결정을 수호할 의무가 있는 것이 대통령이다." 등의 발언을 했으며,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 김기춘은 "대통령이 헌재에 불출석하는 것은 탄핵 사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탄핵 사태는 국회의 잘못이 아니라 대통령이 자초한 잘못이다." "나라가 잘 되는 것도 대통령의 공로이고, 이 같은 사태를 오게 한 것도 대통령의 책임이다." 등의 발언을 한 전적이 있다. [기사] 그리고 13년 뒤인 2017년 2월 27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통과되고 직무정지가 된 박근혜는 헌재에 불출석하고 서면으로만 입장을 전달하는 패기를 시전했는데, 이 때 본인들이 직접 지껄였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되돌려받았다는 점에서 사필귀정이라는 비웃음을 당하는 중이다.

5 관련자료


6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거제시민 : 내가 이러려고 김기춘을 뽑았나 자괴감이 들어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거제)신한국당47,989 (76.53%)당선 (1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거제)한나라당33,379 (47.50%)당선 (1위)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거제)한나라당34,729 (43.50%)당선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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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관련 인물박근혜 김기춘 · 우병우 · 정호성 · 안종범 · 이재만 · 안봉근 · 조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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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관련 사건 · 관련 집회
기타 관련 문화 및 여담 · 박근혜 퇴진 운동 ·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
  1.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2. 라면을 주식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김기춘이 꿈꾼 헬조선 한국은 밤에도 낮처럼 일하며 휴일도 반납하고 평일처럼 일한 결과 가정은 붕괴되어 초토화되고 함께 쌀밥을 먹을 시간도 없어 각자 라면이나 겨우 끓여 먹는 비참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건 식민지 노동자를 대하는 총독의 태도이지 자국민을 대하는 정치인의 태도가 아니다.
  3. 이 말을 한 뒤에도 김경진 의원은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김기춘의 세월호 관련 혐의에 대해 울분을 드러내며 김기춘을 질타하는 모습을 보였다.
  4. 법률(法) + 비적(匪). 법률을 절대시하여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관리나 법률가, 혹은 법률을 궤변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멸칭. 유래는 중일전쟁 당시 중국을 침략한 일본 제국이 현지를 다스릴 때 악랄한 법 체계를 만들어 수탈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조]
  5. 사진을 보면 가슴에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하고 있는데, 정작 김기춘은 세월호와 관련된 여러 사항을 은폐하고 있는 장본인이다.
  6. 1914년 통영군거제군을 흡수함. 그후 1953년 거제군이 다시 분리되었다.
  7. 그렇다면 일본군 출신이라는 얘기인데.....?? '활약'했다는 것이 걸리긴 하나 단순히 강제징집 당한 것일수도 있다.
  8. 사법시험은 1963년부터 생기고, 그전에는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들여온 고등고시라고 해서 붙기만 하면 판검사로 임용되었다.
  9.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던 정수장학회의 전신
  10. 공안 쪽으로 돌았던 김기춘과는 달리 특수부 쪽의 수사통이지만, 김기춘과 마찬가지로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다. 2002년 당시 TV에서 이회창 지지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회창 지지는 사실 그가 국민의정부 시절, 고검장을 하다가 검찰 수뇌부와 마찰을 빚어 인사에서 물먹었기 때문이지만 검사 개인으로 평가했을 때는 매우 유능하고 청렴강직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참여정부조차 그를 법무부 장관으로 스카웃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춘을 안 좋게 봤다.
  11. 김기춘에 대한 심재륜의 악평은 법조계에 흔히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특수와 공안이라는 검찰 내부조직 간 라이벌 의식의 소산이라고 볼 수도 있다.
  12. 신직수는 정통 고시출신도 아닌 군법무관 시험 출신이다. 대체로 군법무관 시험 출신은 당시나 지금이나 법조계 요직으로 빠지기 힘들다.
  13. 김기춘은 회고에서 문세광에게 "'내가 소설 <자칼의 날>을 읽었는데, 당신이 자칼이 아니냐'고 추켜세우자, 문세광이 여기에 감명 받아 술술 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어쨌든 저런 무용담보다는 오히려 고문이나 고문 위협으로 불게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즉, 문세광은 김기춘의 설득으로 조총련 조직의 지령을 받았음을 자백했다고 했지만, 문세광은 전혀 공작원 훈련을 받지 않고 조총련과도 관계가 미약한 재일교포 운동권에 불과했다. 장거리에서 표적을 맞힐 수 있는 권총사격을 포함한 특수공작훈련은커녕 가벼운 고문에도 쉽게 술술 불 정도로 나약한 인물이었다.
  14. 물론 대외적으로는 유운학을 PX 공금을 횡령했다가 수사망이 조여오자 조국을 배신한 파렴치범으로 보도하였다.
  15. 김기춘 본인은 "충성편지는 물론 5공 실세로부터 도움을 받은 일 자체가 일절 없다"며 부인한다.
  16. 훗날 김기춘이 검찰총장으로서 5공세력을 단죄할 때, 보은인지 허화평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차피 6공세력의 주류가 5공세력과 거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6공시절 단죄받은 5공세력은 전두환의 최측근들이나 친척에 불과했다. 허화평을 비롯한 허삼수, 허문도 등의 3허도 모두 무사했다.
  17. 검찰 고위직은 당시 안기부 요원에 의해 근황이 일거수 일투족 체크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밥을 혼자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친구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기피인물이라는 뜻이다. 즉, 김기춘과 얽히면 5공정권의 요주의인물이 된다는 뜻.
  18. 1963년에 36세로 임명된다.
  19. 이분은 유신시절 고초를 당했지만, 5공시절 이미 변절했다는 설이 있다. 이미 그 당시부터 기관원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20. 여기에 정보기관이 퍼트린 듯한 유언비어도 돌았다. 즉, 운동권이 김기설을 "강제분신", 즉 태워죽이고 이를 자살로 위장했다는 것. 이런 유언비어는 보수개신교계와 택시운전사들을 통해 살포되었기 때문에, 이 또한 안기부의 공작의 가능성이 있다.
  21. 이 사건 이후로 386이 주동이 된 학생운동권의 현실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하며, 1996년 여름 주사파 학생들이 장악한 한총련연세대 사태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하는 것을 끝으로 학생운동은 사실상 종말을 맞는다.
  22.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수사 기획자였던 당시 법무부 장관 김기춘을 비롯해 대검찰청 강력부장 강신욱과 그 밑에 당시 담당 수사를 맡았던 검사들인 남기춘, 신상규, 윤석만, 곽상도, 임철 등 전부 공안통 검사출신으로 이 사건 이후로 연일 승승장구하고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23. 강기훈 씨는 출소 후, 전민련 운동권 선배였던 정봉주 전 의원의 주선으로 정봉주가 운영하던 학원에 1990년대 잠시 전산담당으로 취직하지만, 정봉주가 정계로 입문하면서 학원 경영을 그만두자 이후 (전과자 전력 때문에)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여러 번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실제로 재심에 들어간 것은 2007년이었고, 재판과정에서 홧병으로 간암이 발병하였다고 한다. 결국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안정을 위해 언론접촉도 피했다. [JTBC] 정봉주는 자신이 진행하는 한 팟캐스트에서 2016년 말 현재 강씨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밝힌 바 있다.
  24. 단순히 동향 동문 정도가 아니라, 김영삼이 매우 아꼈다고 한다. 근데 김기춘과 거의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문재인도 김영삼-김기춘과 동향(거제)-동문(경남고등학교)임은 함정. 이미 문재인과 김기춘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대통령 측과 국회 측을 대리해 법리로 맞붙은 적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국회의 탄핵안은 헌재에서 기각되어 문재인이 승리한 바 있다.
  25. 이때 박철언과 같이 얽혀서 감옥에 간 사람이 김승연 한화 그룹 회장과 이건개 당시 대전고검장. 이건개는 사시 1회로서 김기춘보다 2살 어리고, 고시로는 1회 후배로서 여러모로 김기춘과 비교될 만 하지만 김기춘만한 운빨은 없었던지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에게 줄을 댔어도 이 사건으로 사법처리가 되어 관직으로는 끝나고 말았다. 이분도 여기서 안 끝났으면 김기춘처럼 검찰총장까지 갈 수 있었다는게 정설.
  26. 박정희의 군내 후견인이었던 이용문 소장(1916-1953)의 아들로서, 한때는 육영수박정희는 그를 박근혜의 남편감으로도 고려했다고 한다.
  27. 2009년 2월 취임한 유영구 총재 이전까지 KBO총재는 은퇴 정치인이나 퇴역 장성들이 낙하산으로 앉던 자리였다. KBO/역대 총재 문서 참조.
  28. 열린우리당이 분당되어 나간 잔류민주당
  29. 강창희 전 국회의장,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김기춘 전 비서실장, 현경대 전 의원, 김용갑 전 의원, 김용환 전 의원, 안병훈 전 조선일보 기자가 이 친박 7인회의 구성원이다.
  30. 이 중에서 김용환과 김기춘은 유신시대의 인물이며, 김용갑, 최병렬, 강창희, 현경대는 5공-민정당 출신이다.
  31. 이 시기에 친박계는 친이계가 주도권을 잡자, 한나라당에서 내쫓기다시피 했는데, 김기춘을 포함해서 이해봉, 박종근, 이규택, 김무성, 서청원, 홍사덕 등의 중진의원들이 공천과정에서 갈려나갔다. 그나마 정치경력이 짧은 편이었던 한선교, 김세연 등도 줄줄이 잘려나갔다. 결국 이 중에서 상당수는 무소속이나, 친박연대로 가서 당선되서 돌아온다만 김기춘은 아예 불출마했다. 중진 중에서 그나마 살아남은 인사가 허태열 정도.
  32. 두 사람 모두 공안통 출신, 한 명은 유신헌법저자, 또 한명은 국가보안법통이다. 자세한 내용은 황교안 참조.
  33. 비슷한 나이의 정몽구(1938년) 현대차 회장이 청문회장에서 거의 질문이 없었음에도 답변에서 횡설수설 한 것을 보면 김기춘이 얼마나 영특하고 교활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줄기세포 치료의 효과인가 정몽구 회장이 원래 눌변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34. 본인이 아들의 성년후견인이므로 사망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35. 둘 다 천주교 신자다.
  36. 자신은 오직 박근혜 대통령이 시켰기에 비선들을 만난 것이라며, 사태에 관한 조그마한 책임까지도 전부 박근혜 대통령 1인에게 죄다 떠넘기는 식의 변명만을 하고 있다.
  37. 청문회 나간 것 자체를 크게 후회할 정도로 박영선 의원에게 영혼까지 털렸는데도, 예의바르게 "본인이 먼저 악수를 요청"할 정도로 자신에 대한 적대 측들의 적대감을 최대한 줄이려던 사나이다.
  38. 김기춘은 이 사건에 대해 수사기획 지휘 책임자로서 반드시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김기춘은 이 사건을 기획, 수사지휘했던 '공로'로 훗날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에 '5.16 민족상' 안보분야에 훈장을 받았다.([#])
  39. 초창기 이름은 롯데공업주식회사다. 이후 롯데그룹에서 분리독립해 농심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40. 이런 고문 자리는 사실 거의 일이 없다. 결과적으로 사실상의 뇌물이나 다름 없다. 특히 농심이 김기춘이 현직일 때 스폰을 했는지도 조사할 필요가 있다. 검사들이 재력이 두둑한 스폰을 두는 것은 상당히 잦았으며, 2000년대까지 근절되지 않던 악습이었다. 이미 이명박 정권시절 검찰총장 후보였던 천성관이 스폰의혹으로 물러난 바 있다.
  41. 수수정황에 대해서 검찰측에서 아예 사실여부 확인조차도 거부하였다.
  42. 반면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도 같은 공소시효인데도 받은 정황은 있었다고 발표하는등 같은 공소시효임에도 한쪽은 확인 자체를 거부하고 다른 쪽은 정황이 있었다고 발표함으로서 전 정권 때리기 박근혜 정권 실세에 대한 노골적인 봐주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43. 사시 31회 차석. 김앤장 근무
  44. 엄청난 독서량과 부지런함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특히 동서양 고전을 꿰뚫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박사논문은 독일어로 초록을 썼을 정도였다. 구글 번역기가 있던 시대가 아닌 1980년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학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형법을 연구한 저서는 고전 한문 해독 능력이 없으면 쓰기 힘든 것이다. 엄청난 재능과 부지런함으로 갈고 닦은 학문을 출세를 위해 악행에 쓴 나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45. 근데 이런식으로 장점만을 보자면 아돌프 히틀러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조용하고 온화하며 예술감각이 뛰어난 사람이고, 전두환도 호탕하고 유능하며 지인과 부하를 아끼는 인망있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애초에 진실로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저렇게 살지도 않는다. 저건 예의가 바른 게 아니라 '예의 바른 코스프레'를 시전하는 고도의 처세술에 불과할 뿐이다.
  46. 예를 들면 본인보다 연상인 서울대 법대 선배들이 자기보다 늦은 기수로 검사가 되면 오만방자하게 반말을 했다고 한다.
  47. 실제로 2014년 최저임금 인상률은 7.2%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