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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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리승진

1923년 8월 4일~1950년 3월 20일.

1923년 8월 4일, 제주도 대정읍 영락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명근이 대구로 이사하면서 대구에서 유소년-청소년기를 보냈다. 부친은 술도가로 대구에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대구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인 명문자제의 출세코스인 교토 성봉 고등중학교를 거쳐 쥬오(중앙)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쥬오대학교 경제학과 2학년 재학중에 학병에 자원하여 일본 육군 예비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일본군 복무중인 1945년 1월 19일, 역시 제주도 성산읍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군수공장 납품업체를 운영하던 사장이자 일본공산당 비밀 당원인 강문석을 만나고 그의 장녀로서 오사카 고등여학교에 재학중이던 강영애와 혼인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혼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대구에 체류하며 장인 강문석을 통해 알게 된 조선공산당 경북인민위원회 보안부장 이재복과 손을 잡고 9월총파업에 이은 10월1일 대구폭동(대구 10.1사건)에 가담하였다. 여기서 천부적 선동능력을 발휘하여, 남로당 지도부의 신임을 얻었다.

1946년 12월 경북에서의 대대적인 좌익검거선풍을 피해 고향 제주도로 잠입하였다. 대정중학교 상업과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과 교사, 귀환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쳤고, 맑스-레닌주의 소조를 이끌며 좌익세력 규합에 나섰다.

1947년 3월 1일,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를 마친 후, 가두시위를 하던 군중들을 기마경찰에 진압하려 하는 과정에서 소동이 일어나 경찰이 발포하고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1] 이 과정에서 수습을 잘 지휘하여, 남로당으로부터 제주도당책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라산을 본거지로 삼아 본격적인 지휘부를 구성하고 군사부장까지 겸임하였다.

1948년 4월 3일, 부하들을 이끌고 제주도 내의 전 경찰지서 24개 중 12개를 공격하고 경찰 가족을 살해했다. 이른바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러자 제주도 경찰과 서북청년회 소속 토벌대는 한라산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양민을 무수히 학살하였다.

사태를 수습하고 강화하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서북 청년단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습격 사건이 이어지면서 화의가 깨졌다. 결국 1948년 8월, 사태 수습이 안 되고 자아비판을 요구받자,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1950년 3월, 다시 강원도로 침투하려다 매복에 걸려서 총살되었다. 시신은 참수-효수되었다.

참수 후의 모습 주의가 필요하다. 참수된 모습 그대로 나온다!
  1. 이 사건 이후로 제주도 관청과 경찰들이 파업에 들어가 66명의 경찰이 해임되었고, 그 자리는 육지(한반도 본토)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