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기자)

金大中

1939년 9월 3일 ~

1 개요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이다. 한자표기조차 김대중 전 대통령과 똑같아, 언론에 다루어질 때 항상 조선일보 논설위원이란 타이틀을 붙이고 나온다. 물론 정치적 성향은 완전히 반대다.

2 생애

1939년 9월 3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이며 광산 김씨 '중(中)'자 항렬이다. 본관만 전직대통령[1]과 다르다. 광산 김씨의 자랑거리?

그의 아버지는 꽤나 잘나가던 일본 유학파 출신의 사업가였다. 그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 별 어려움 없이 부유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몇 년뒤에 그의 집안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10대 중반부터는 생활고 속에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진학했으니 공부는 상당히 잘 했던 셈이다.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딱히 사법고시에 응시할 맘이 없었고, 미술, 음악 등 예체능 쪽에 관심이 더 많아, 고시 공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서울법대생으로서는 아주 드물게도 ROTC에 지원하여 장교로 임관하였고, 제2군단 사령부 비서실에서 영어 통역장교로 군 생활을 하였다.

1965년, 조선일보가 기자를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시험에 응시해 제8기 공채 기자로 발탁되었다. 당시 리영희 외신부장이 지휘하던 외신부에 배치되었고, 리영희 아래서 수습기자 생활을 했다.[2]

당시 그를 지도했던 리영희는 김대중이 가끔 토론을 할 때 뜻을 굽히지 않아 곤란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편협하고 반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회장의 눈에는 이 오만한 젊은이가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1967년 8월, 충남 청양에 위치한 구봉광산에서 광부로 일하던 양창선씨 매몰사건 보도로 유명기자로 떠올랐다. 이후, 정치부 기자로 발탁되었고, 조선일보 공채 8기 라인의 선두로 쑥쑥 커갔다.

워싱턴 특파원을 거쳐 1980년에는, 공채 7기였던 허문도를 밀어내고 사회부장 자리에 올라 앉았다. 이 일 때문에 허문도는 김대중에게 엄청난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대중 입장에서 1980년 당시의 사회부장 자리는 그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를 남겨주게 된다. 바로 그때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광주를 '폭도가 점령한 무정부 도시'로 보도하며사진 참조 신군부의 편을 드는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3] 광주 민주화 운동 참가자들을 '폭도'로 평가한 것이야 자기 개인적 견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광주의 상황에 대해 “생필품의 품귀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기사를 쓴 것은 명백한 오보였다. 한 마디로 광주를 무법천지로 묘사하며 계엄군의 신속한 진압을 간절히 요청한 것이네...[4]

그런 엄청난 만행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던 데 힘입어, 5공 시절 조선일보 정치부장과 사회부장을 거쳐 조선일보의 야전사령관직인 편집국장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조선일보 편집국장 시절 딱히 큰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어차피 신문사에 안기부 요원이 상주하며 이것저것 다 간섭하던 시기 아니었나?

결국 그를 아끼던 방씨 가문의 영국 유학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 옥스퍼드로 건너가 1년 동안 연수를 마치고 왔다. 그리고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대선후보 토론회 패널로 참여하였는데, 이때 용감하게 총대 메고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이미 정계은퇴를 약속하지 않았느냐. 말바꾸기하지 마라." "목숨을 구걸하면서 정계은퇴를 거듭 다짐한 편지가 다 있지 않느냐. 거짓말하지 마라."는 핵펀치를 날린 것.[5] 이 한방으로 인해 정치인 김대중은 단박에 '거짓말쟁이'로 이미지메이킹이 돼버렸고, 반면에 언론인 김대중은 보수진영에서 '용자', '사이다' 언론인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때 두 명의 김대중이 벌인 공방은 TV 화면에 계속적으로 방영되었으며, 이로써 초반에 상승하던 정치인 김대중의 기세는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1989년, 드디어 조선일보 주필 직에 취임하였다. 이 때부터 조선일보의 전권을 장악, 조선일보 기사 전체의 논조를 설정할 권한을 가졌는데, 이것만 봐도 방씨 가문에게 얼마나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조선일보 주필로 있던 시절 조선일보의 발매 부수는 대폭 상승하였다.
조선일보 주필이 되기 전부터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인기 언론인이였고, 또한 동시에 가장 영향력 있는 기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러한 권력을 자기가 지목한 타겟의 '살인'에 꺼리낌 없이 사용했다. 그의 레이더망에 걸리는 인물들은 족족 파괴되었으며, 이로 인해 동료 류근일은 김대중 주필에 대해 "그 놈? 못 됐지. 아주 나쁜 놈이야."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조선일보 주필 시절 얼마나 편향되게 펜대를 휘둘렀는지는 간단한 통계자료만 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2000년에 기고한 26건의 ‘김대중칼럼’ 가운데 15건이 DJ를 비난한 것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야당 총재인 이회창을 비판한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렇게 1989년부터 무려 15년 동안 조선일보 주필직을 담당하다가 2003년에 드디어 주필 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2004년 11월에는 조선일보의 고문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주식 3%를 소유한 채 지금도 조선일보에 가끔씩 글을 올리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3 트리비아

  • 시사저널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조사에서 2004년까지 계속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2005년 조사에서는 손석희에게 1위 자리를 넘겨주었다. 어쨌든 지금도 가장 인기 있는 언론인 내지 영향력 있는 언론인 랭킹 5위권 안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 2001년에는 조선일보가 차명계좌를 통해 탈세를 했다는 혐의에 연루되어 검찰에 소환되었으나, 여기에 불응하였다.
  • 지금도 조선일보에 가끔 글을 올리는데, 조선일보 사이트에서 유일하게 이 사람의 칼럼란에만 댓글 기능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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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쪽은 김해김씨.
  2. 훗날 리영희는 김대중 논설위원에 대하여 "그는 내가 일구어낸 최고의 성과이자 최악의 상처다."라고 평하였다.
  3.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조선일보맨이라 할 만한 사람인 조갑제는 당시 반쯤 목숨걸고 직접 광주에 현장취재를 다녀왔고 제대로 된 르포기사를 썼다.
  4. 당연히 이는 그의 언론인 생활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았다. 훗날, 그는 이 일에 대해서 '5.18 특파원 리포트'라는 책을 출간해 직간접적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였지만, 이렇게 사과한 사실은 대중에게 그닥 알려져 있지 않다.
  5. 김대중이 자기를 죽이려 한 전두환에게서 빠져 나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썼던 거짓 편지를 갖고서 전후 맥락 다 삭제한 채 계속 '약속해놓고 안 지켰다' '다시는 정치 안 한다 해놓고 거짓말한다'고 몰고 갔으니, 모르는 사람들은 전부 다 속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