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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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두관 (金斗官)
출생일1959년 4월 10일
출생지대한민국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최종 학력동아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소속 정당더불어민주당
지역구경기 김포시 갑
의원 선수1
의원 대수20
소속 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현직제20대 국회의원
약력남해농민회 사무국장
남해신문 대표이사 사장
경상남도 남해군
행정자치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경상남도지사
종교불교(법명 : 웅기)
역대 대한민국 경상남도 도지사
32~33대 김태호34대 김두관권한대행 임채호
35~36대 홍준표

이장을 시작으로 군수 - 장관 -도지사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정치인
리틀 노무현[1]
한 때, 최고의 상황에서 최악의 패착으로 악수를 두었지만, 운 좋게 묻혀지고 본인도 재기에 성공한 행운의 사나이
런두관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주요 경력으로는 행정자치부 장관과 경상남도지사가 있다.

2 남해군수가 되기까지

가난한 어부의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해외로 돈벌이를 나간 형들[2]을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는 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해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국민대학교 어문계열에 합격했으나 등록금 문제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고, 이 후 경북전문대학교 행정과를 거쳐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편입해 졸업한다. 대학 시절 동생 김두수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고향 남해로 낙향해 민중의당 후보로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경남 남해-하동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5%도 채 되지 않는 득표율로 낙선하기도 했다.[3]

이 후 고향 이어리의 이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기반을 쌓아나갔고, 1995년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남해군수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당시 만 36세로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선거로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으로는 최연소 기록이 깨지지 않는 중이다. 이어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당선에 성공하여 재선 남해군수를 지냈다.

남해군수 재임 시절인 1998년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서 무소속에 젊은 나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군수로 당선된 그의 이력이 소개된 적이 있다. 당시 방송으로 그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3 더럽게 안풀리는 재야 탈출기

민선 2기 남해군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경상남도지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노무현을 만난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상태에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났고 결국 17%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상대 후보였던 한나라당김혁규넘사벽이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당시 김혁규는 무려 74% 이상의 득표율로 김두관을 개발살냈다.[4]

이후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참여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문재인 당대표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당시 장관직 수행평가에서 1위를 여러차례 차지할 만큼 장관직 수행을 잘 했다고. 그러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그의 장관직 수행에 대해 크게 부정적이었으며, 한총련이 미군기지에 침투하여 불법시위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을 제출했고, 결국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임건의안을 거부하고 그의 장관직을 지킬 것이라고 했으나, 계속 논란이 되자 그는 스스로 사의를 제출하면서 결국 장관직에서 퇴임하였다. 사실, 그동안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경우는 여야를 불문하고 스스로 사임해야되는 것이 관례다. 승복하지 않으면 역풍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불명예스럽게 퇴임한 셈이 되었으나, 민주당계에서는 그는 한나라당의 딴지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이라는 시각이 강해지면서 차츰 민주당계에서는 떠오르는 정치인으로 올라섰고, 열린우리당이 생기자 바로 합류했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남해군-하동군 지역구로 출마하였고, 당시 탄핵 논란으로 열린우리당에 상당히 유리하다는 평이 있어 어느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박희태[5][6] 후보가 워낙 막강하다보니 박희태에게 7000표 차이로 석패했다. 2년 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남지사에 다시 도전했으나, 한나라당의 김태호[7] 도지사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며 낙선.[8] 2년 뒤에는 지역주의를 의식했는지 무소속으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같은 지역구로 출마했지만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의 여상규 후보에게 밀리며 40%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

이로서 2년 주기로 걸친 4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2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회창의 뒤를 잇는 정계의 콩라인이라 카더라

4 경남 도지사: 5수 끝의 당선

그러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경남지사에 도전했고, 무소속 신분이었던 그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후보와 단일화되어 대통합 야권후보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3% 득표율을 얻으며 당선에 이달곤[9] 후보를 꺾고 성공했다. 본인으로선 도지사 선거만 3번의 도전 끝에 당선되었다. 중앙에서 활동하던 이달곤에 비해 오랫동안 PK에 몸담아온 김두관이었기에 지역밀착형 후보라는 태그가 승리의 큰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2006년을 기점으로 세를 보이기 시작한 PK의 진보층도 큰 활약을 하기도 했다. 이로서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 되면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4대강 반대 등 도지사 도정에 관해서는 추가바람.

5 무리수를 두다

도지사 취임 후 다시 민주당에 입당하여 무난히 도정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재임 2년차인 2012년 경남지사직을 돌연 사퇴하고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에 출마하였다. 이로 인해 경상남도 진보층 사이에서는 배신감(?)이 쌓이게 되었다.

경선 결과, 손학규에게도 밀리며 14%의 득표율로 3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아야 했다. 자세한 경선 과정은 이곳을 참조. 같은 PK를 기반으로 하는 문재인 후보가 월등히 지지율이 높은 상태라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애초에 높지 않았는데, 도지사직을 뛰쳐나와 무리하게 경선에 참여하여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꼴이 되어버렸다는 비난을 받았고,[10] 결국 대선과 병행하여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홍준표가 당선되면서 어렵게 얻은 경남지사 자리를 다시 새누리당쪽에 헌납한 꼴이 되어버려, 야권 지지자들에서까지 평생까임권을 얻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거꾸로 발음한 '관두김' 이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생긴 것은 덤이다. 경선에 참여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고 왜 경남지사직을 사퇴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11][12]

6 다시 재야로

졸지에 다시 재야가 되어버린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독일에서 1년 간 연수를 받은 뒤, 경남지사 사퇴에 대해서 사과하고 나서 2014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지역구는 당초 활동했던 PK가 아닌 경기도 김포시로 정해졌다. 애초에 경상남도엔 자리가 없었지만...[13]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나서자 낙하산이나 뜨내기라는 비판이 생겨났지만, 본인으로선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수도권에 힘을 뻗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수였다.

거주지도 김포로 완전히 옮기고 본인은 분투를 했지만, 지역 토박이들은 PK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그를 좋게 볼 리가 없었고 그나마 지역 정체성이 덜한 신도시 지역에 승부수를 둬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승리여부에 의문을 둬야 했다. 결국 경쟁상대인 새누리당홍철호[14] 후보에게 밀리며 4년만에 낙선의 쓴맛을 맛봐야 했다. 예상대로 농촌지역에선 홍철호에게 몰표가 쏟아졌고, 신도시에서도 패배하여[15] 40% 득표율로 선거를 마감했다. 경남지사 당선 배경에는 PK 지역밀착형 후보였던 점이 상당히 먹혔던 것에 비해 이번 선거에서는 오히려 그 점이 낙선의 큰 요인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7 20대 총선: 두번째 재기에 성공하다

이후로도 경남으로 주소를 옮기지 않고 계속 김포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이분 페이스북이나 블로그를 보면 그동안 쭈욱 김포의 각종 행사에 뛰어다니신다. 점점 김포사람으로 되어가는 중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포에서 출마하기 위해 준비해오고 있는 듯했다. 마침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포시 선거구가 갑/을로 분리되면서 자리가 하나 더 늘었고, 김포시 갑 선거구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었다.[16] 새누리당측의 상대는 김동식 전 김포시장.서울 지하철 5호선 김포 연장을 좌절시킨 원흉 더불어민주당에서는 PK 출마를 기대했지만, 본인은 대권도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걍 PK에 출마해서 지역주의나 타파해라[17]

현재까지 나온 관련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새누리당의 김동식 후보보다 5~10% 안팎의 우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포시(갑)이 도시 인구가 많아 야권세가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 결과를 두고볼 일이지만, 일단 2014년 재보궐 선거때보다는 해볼만한 승부로 여겨진다.

여담으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지역 출마자 중 91년 이후 역대 공직선거 출마횟수가 8회로 가장 많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포함하면 9회이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면 10회가 된다. 승률이 3할대라는 게 함정

결국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원내에 진입하게 되었다.

8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군/하동군)
민중의당9,783 (8.2%)낙선 (3위)
1995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남 남해군수)
무소속21,605 (55.6%)당선 (1위)민선 최연소 자치단체장
1998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남 남해군수)
무소속18,612 (55.7%)당선 (1위)2002년 4월 13일 사퇴
(경남지사 선거 출마)
2002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남도지사)
새천년민주당315,008 (26.5%)낙선 (2위)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군/하동군)
열린우리당26,747 (40.8%)낙선 (2위)
2006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남도지사)
열린우리당343,137 (25.4%)낙선 (2위)
2008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남해군/하동군)
무소속24,966 (40.6%)낙선 (2위)
2010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남도지사)
무소속807,698 (53.5%)당선 (1위)2012년 7월 1일 사퇴
(제18대 대통령 선거 출마)
2014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김포시)[18]
새정치민주연합38,858 (43.1%)낙선 (2위)
2016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김포시 갑)
더불어민주당49,758표(59.3%)당선 (1위)

경남에서 당선될 때는 무조건 무소속이다. 경남에서 민주당계 정당 하기 참 힘들다는 반증. 그리고 경남을 탈출하고 나서야 당적을 가지고서 당선되었다.

9 기타

  • 영화 이장과 군수의 두 인물이 그의 행적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1.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주의 구도 타파를 위해 민주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극히 낮은 영남에 계속 도전했던 것처럼 김두관 본인도 고인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2. 큰 형은 서독 광부였고, 셋째 형은 사우디 건설 노동자였다고 한다.
  3. 그래도 꼴찌는 아니었다! 꼴찌는 신민주공화당의 한춘기 후보. 그가 군소 진보정당 소속에, 지방대 운동권 출신의 서른도 안 된 젊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꼴찌에 성공한 것만 봐도 외려 엄청난 선전이다.
  4. 그런데 한나라당 소속의 김혁규는 그 다음해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도지사를 사퇴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5. 2014년 캐디 성추행으로 핫이슈가 된 그 인물 맞다.
  6. 현재까지 남해군에서 배출된 정치인 중 김두관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검사 출신의 의원으로 남해-하동 지역구를 김두관이 처음 출마한 13대부터 20년간이나 꿰차고 있던 인물이었다. 당은 다르지만 같은 고향 출신이라 그런지 김두관과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었다고 하며 하지만 김두관을 이장 출신이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장관 해임건의안 제출 때는 한나라당 소속으로는 드물게 반대를 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박희태 참조.
  7. 김두관이 최연소 민선 자치단체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면, 이분은 최연소 민선 광역 자치단체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8. 당시는 지역주의뿐만 아니라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현저히 낮아서 압도적으로 패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9. 창원 출신의 이름있는 행정학자며 이명박 정부한나라당 18대 총선 비례대표 국회의원행정안전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로써 이 선거는 전직 행정안전부 장관(김두관 시절에는 행정자치부) 끼리의 대결이 되는 셈이기도 했다. 하지만, 출마할 당시 중앙에서 내려온 낙하산 후보라는 비판을 들었고 나름대로 상당히 분투했으나, 낙선. 통합창원시 아이디어를 낸것도 이분이었다. 2012년에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발탁되어 근무했다.
  10. 이때 차라리 도지사직을 유지하고 같은 PK출신인 문재인을 지지하면서 PK의 진보층을 결집시켰더라면 문재인에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 분석도 있었다. 다만, 도지사직을 유지했을 경우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에 이대로 했더라도 그가 진보층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었고, 그런 이유로 정치활동에 제한이 많은 도지사직을 내놓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11. 김문수 전 경기지사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지만 경선출마는 지사직을 유지한 상태에서도 가능하다. 문재인 또한 본선에 진출하고 대선에서 낙선하고도 의원직은 유지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박근혜가 대선 출마때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승부수를 던진 것처럼 그저 일종의 승부수가 아니었나 추측할 뿐...
  12. 2010년도 이후부터 일부 매체들을 통해 특정 정치평론가, 혹은 여권의 유력한 관계자라는 불분명한 출처를 통해 김두관이 야권의 차기 대권주자(일 지도 모른다)라는 말이 계속해서 흘러 나왔었는데, 이를 근거로 그의 뜬금없는 대권 도전 선언이 여권 혹은 그 쪽과 가까운 정치평론가들의 지속적인 프레임 설계였으며 여기에 제대로 낚인 것이다는 추측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13. 경남에는 자리가 없긴 했지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울산광역시 남구에서는 재보선을 치르는 지역구가 있었다. 이 중 부산의 경우는 아무 연고도 없는 김포와 달리 출신 대학과 민주화 운동, 막노동을 했던 연고가 있고, 게다가 지역주의 타파, 결자해지의 의미도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부산에 출마했다면 근소한 차로 이겼을지 모를 일이고, 졌더라도 도지사 사퇴라는 병크를 만회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리 국회의원이 좋아도 그렇지, 당선이 되야 본전일 김포 출마를 왜 선택했는지 참으로 의아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14. 굽네치킨 창업주라고 알려졌지만, 정확히는 계육 가공 중소기업인 (주)크레치코 창업주라고 한다. 기업뿐만 아니라 김포 지방의 자잘한 단체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선된 후에는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로도 활동하는 중.
  15. 전부 패배한건 아니고 김포2동, 구래동에선 400~500표 정도 앞섰다. 하지만 해당 지역들은 아파트 밀집 지역에 비해선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고, 나머지 신도시 지역에선 많게는 2000표 이상 뒤지는 등 참패했다.
  16. 2014년 재보선에서 대결했던 새누리당의 홍철호는 김포시(을)에 공천받았다.
  17. 실제로 더불어민주당이 PK출마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지역주의 타파이다. 왜냐하면 경남 창원, 양산, 김해같이 동부경남인 경우는 어느정도 해소가 되었지만, 서부경남은 아직도 해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좀 묘한 부분이, 동부경남은 YS의 통일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던 곳이라 야권 입장에서는 '빼앗긴 곳' 정도의 위치라면, 서부경남은 80년대에도 TK와 별다르지 않은 민주정의당 우세지역이었다.
  18. 전임자 유정복 인천시장 선거 출마로 사퇴
  19. 실제 김두관은 목소리가 다소 허스키한 편인데 배도환은 매우 맑아서 약간 위화감이 드는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