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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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賢

1935년 12월 6일 ~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이다. 호는 후농(後農)이다.[1] 종교가톨릭으로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1935년 12월 6일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상오리에서 출생하였다. 장성진원국민학교, 서울 한영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김대중이 정치인 지망생이던 시절 운영하던 웅변학원에 등록한 학원생으로 김대중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2] 곧 사이가 가까워져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김대중을 따라 민주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강원도 인제군 선거구에 출마한 김대중의 선거운동원으로 가두 연설을 담당했고, 이후 김대중이 민주당 선전부장이 되자 바로 밑의 직책인 선전부 차장이 된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여 김재광국회의원직을 사퇴하여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3]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의 기치를 내걸고 나서자 김상현이 김대중에게 대선 출마를 요청했다. 경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면서 대통령 후보자 비서실장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참고로 해당 총선에서 그와 맞붙은 민주공화당 후보는 임택근 아나운서.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조윤형, 최형우, 김한수, 김녹영, 이종남, 김경인, 나석호, 강근호, 이세규, 류갑종, 박종률 등처럼 모 군부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징역형을 복역하였다. 출소한 이후 재야에서 활동하였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박종태, 양순직, 함석헌 등과 같이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에 끌려가 고문당하였다. 1980년 신군부가 꾸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4]

1984년 당시 미국에 망명중이던 김대중을 대리하여[5]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고 공동의장권한대행을 맡았다. 1985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자 야권의 '선명야당' 창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신한민주당 창당에 앞장섰다.[6]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측이 김대중에게 통일민주당 입당 및 경선을 요구했고, 김상현 역시 이를 수용하자는 입장을 보였으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한다.[7] 이에 실망한 김상현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으로 따라가지 않고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였다.[8]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김대중의 저격공천(평화민주당 김학민 후보)으로 야권 표가 분산되어 민주정의당 강성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할 때 따라가지 않고 김정길, 노무현, 이기택과 같이 꼬마민주당에 잔류하였다. 1991년 꼬마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에 입당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리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에 따라갔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한보그룹 부도 직후 정태수와 연루되었으나 1999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에 실패하였다. 2001년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하였다.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광주광역시 북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으나, 이후 새천년민주당 분당열린우리당으로 옮기지 않고 잔류했으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는 탄핵소추에 찬성하였다. 이로 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열린우리당 강기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으며, 이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현재는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다. 아들 김영호는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서대문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야당 의원이었지만, 초선의원 시절 비슷한 연배였던 차지철과 매우 친했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김형욱과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651965년 재보궐선거 (6대 국회 서울 9지역구)[9][10]민중당11,402 (36.5%)당선 (1위)
1967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7번) 신민당-당선
1971제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2지역구)[11] 신민당63,575 (62.4%)당선 (1위)1971. 10. 17 자격박탈
(10월 유신)[12]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갑)통일민주당30,598 (31.4%)낙선 (2위)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울 서대문 갑)민주당42,591 (45.5%)당선 (1위)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대문 갑)새정치국민회의29,979 (40.1%)당선 (1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2번)민주국민당-낙선
2002200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16대 국회 광주 북 갑)[13]
새천년민주당18,618 (55.8%)당선 (1위)
2004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북 갑)새천년민주당29,023 (33.9%)낙선 (2위)
  1. 고은 시인이 지어준 것이다.
  2. 당시 김상현은 대한웅변협회 학생회장이었다.
  3. 여담으로 이 때 당시 김상현이 내세운 이력 중 하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한 환영 국민위원장(...)이라는 아스트랄한 직책이었다. 인터뷰 기사
  4. 본래는 신군부에서 그를 포섭하려고 했다 전해진다.
  5. 단,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하는 민주화추진협의회 참여를 반대했다.
  6. 당시 민주헌정연구회 등 재야에서는 총선 보이콧론을 주장하는 등, 새로운 야당 창당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김대중의 의중도 비슷했다.
  7. 경선을 치르면 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 싶겠지만, 당내 기반이 없는 김대중에게는 불리했다.
  8. 김대중의 정치 커리어 초반부터 함께한 동지였으나, 이 때를 기점으로 사실상 둘의 관계는 끝난다. 이후 1991년 꼬마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에 합류하기도 하나 합류 후에도 동교동계의 견제를 받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심지어 1997년에 자신은 국민회의 총재 선거에 출마하고, 대선 후보로 정대철을 밀기도 했다. 물론 둘 다 김대중에게 박살났지만.
  9. 전임자 김재광 한일기본조약 반대로 의원직 사퇴
  10. 서울 9지역구는 현재의 서대문구 갑 선거구 지역이다.
  11. 현재의 서대문구 을 지역이다.
  12. 이와 동시에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
  13. 전임자 박광태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광주광역시장 출마로 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