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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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善太
1911년 08월 02일 ~ 1978년 11월 29일

대한민국의 전 친일반민족행위자, 법조인, 정치인이다. 전 광주광역시장과 3선 국회의원 박광태가 그의 비서 출신이다.

1911년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태어났다. 니혼 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되고 근무하였다.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변호사협회 후보로 전라남도 완도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장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국민당 정남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국민당 정남국 후보에 설욕하였다.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되자 민주당 인권옹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56년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기도 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 출범 후인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9월까지 무임소장관을 역임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구정치인으로 분류되어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다. 이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자 1970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정무위원 겸 인권옹호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 초 유진산 총재 체제에 반대해 신민당을 탈당하고 민주통일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제2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수한 후보와 민주공화당 정희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 부문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