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무

金永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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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7월 19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법조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설립변호사(Founding Partner).

법조계의 이건희라고도 불린다(...).

2 생애

1942년 7월 19일에 태어났다.

1960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63년 제2회 사법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했다. 1966년 현 사법연수원의 전신인 사법대학원을 마치고 미국에서 유학해 1967년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에서 비교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하여 1970년 J.D.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미국 로스쿨에 들어간 한국 유학생들이 1년 남짓한 해외 법률가 전용 LL.M.(법학석사) 과정을 밟는 것과 달리, 미국 학생들과 같이 3년간 빡세게 공부하여 한국인 최초로 정규과정 학위인 J.D.(법무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하버드 로스쿨 J.D. 과정 졸업 후 일리노이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일리노이 주 변호사 자격도 취득하였다.

1970년 하버드 로스쿨 졸업과 일리노이 주 변호사 시험 합격 후 국제 로펌인 베이커 앤 맥켄지의 시카고 본사와 일본 도쿄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귀국한 후 겨우 31세의 나이로 1973년 1월에 김앤장을 설립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전문 로펌시대를 본격적으로 개척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후 40여년 동안 강력한 리더십과 탁월한 판단력으로 김앤장을 명실상부하게 아시아 최고의 로펌으로 만들었다. 오늘날의 김앤장은 김영무 대표가 없이는 불가능한 길이었다는게 국내외의 일관된 평가다.

3 논란

3.1 국회 증언 거부 논란

2011년 박한철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김영무 변호사가 증인으로 채택되자.[1] 증인을 공동대표인 이재후 변호사로 변경해 달라는 김앤장 측의 로비가 있었고,# 결국 김영무 변호사는 청문회 이틀 전인 4월 25일 돌연 미국으로 출국하고서는 다음 날 외국 출장을 구실로 국회에 불출석 사유서를 내 버렸다.

이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김영무 변호사를 고발하였으나, 검찰은 김 변호사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하는 것에 그쳤다.

3.2 세습 논란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장남 김현주에게 김앤장을 승계하려 한다는 소문이 요즘 파다하다.[2]

사실 김앤장을 제외한 우리나라 모든 대형 로펌에는 오너가 없다. 법무법인 형태인 이 로펌들은 파트너(구성원) 변호사와 어소시에이트(소속) 변호사로 나뉘는데, 파트너는 지분을 공유하고 어소시에이트는 월급을 받는다. 구성원 변호사가 되려면 소속 변호사로 경력이 쌓여야 한다. 파트너들은 법무법인을 공동으로 소유해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를 고용하고 이익을 나눈다. 자기 지분만큼만 권한을 행사한다. 대표변호사도 타이틀에 불과하고 설립자들도 특별한 힘이 없다.[3]

하지만 김앤장은 다른 로펌과 달리 김영무 대표가 오너이다. 모든 변호사가 김 대표와 계약을 맺는 방식이다. 김앤장은 법무법인이 아닌 공동법률사무소로서, 변호사들은 일종의 월급을 받는다. 월급을 주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김영무다. 그리고 김영무 대표가 7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포스트 김영무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관련 기사

3.3 배금주의 논란

한쪽 의견에 따르면 어지간한 기업가들을 포함시켜 보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인데도, 개인적으로 기부나 그 밖의 공익활동을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여러 모로 비슷한 인물인 이건희와의 가장 큰 차이점. 물론 세상에 기부에 관심 없는 부자들은 쌔고쌨지만, 문제는 하필 그가 설립하고 평생 키워 온, 그래서 그의 분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앤장이라는 곳 자체가 '돈만 많이 주면 악마라도 변호해 주는 데 아니냐'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쪽 의견에 따르면, 김앤장의 조직 문화 자체가 워낙 비밀주의이다 보니, 정말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 인권변호사 조영래를 후원했다.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인해 사법연수원에서 퇴소당한 조영래를 김앤장에서 비공식 사무원으로 채용했고, 조영래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되서 수배를 받던 때에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조영래의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대주기도 했다고 한다.
  • 1997년부터는 김앤장의 공익활동 기록이 확인된다. 하지만 그건 김영무가 고용한 변호사들이 한 거지 김영무가 한 게 아니잖어.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부친이 이승만의 주치의를 할 정도로 이승만 정권에 속한다는 인물로서는 이승만 정권을 부정적으로 까내리려는 후임과 그 후임이 독재라는 것을 이용한 공경 무기를 확보한 셈이라 볼 수 있다.

4 트리비아

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김승현(金承鉉)(1911~1993), 이현경(李賢卿)(1999년 사망) 사이의 4남 2녀 중 3남이다. 형제 중 4남 김영욱(金永旭)(1948생)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같은 대학 석좌교수이다.

2005년 한 해 570억원을 벌었고, 그 금액은 삼성 이건희 회장을 제치고 개인 소득 국내 1위라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2006년에도 600억 원의 소득신고를 하였는데, 역시 이건희보다 많은 액수였다.[4]
  1. 박 후보자가 김앤장에서 근무하였는데, 그곳에서 근무한 불과 4개월 동안 재산이 4억 원 넘게 증가하여 전관예우 논란이 있었다.
  2. 김현주는 1972년생으로,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사법시험에 몇 차례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대학 졸업 후 미국 뉴욕 대학교 로스쿨에서 LLM(법학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유학 시절 만난 GS그룹 허창수 회장의 장녀 허윤영씨와 2006년 결혼해 화제가 되었으나 2011년 이혼했다. 한편 1974년생인 딸 김선희씨는 현대비앤지스틸 정문선 부사장의 부인으로, 노현정 전 KBS 아나운서가 아랫동서다. 승계대상이라고 얘기가 나오는 사람은 아들 김현주 이다.
  3. 예를 들어 법무법인 태평양을 1980년에 설립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김인섭 변호사다. 태평양 법무법인 영문명 배김앤리(Bae, Kim & Lee)에서 김이 바로 그다. 2002년 김 대표변호사는 65세에 은퇴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면서 태평양을 떠났는데, 당시 본인 소유 모든 지분을 로펌에 귀속시켰다. 2012년 아들 김재승 부장판사가 법복을 벗고 태평양에 입사했지만 다른 파트너 변호사와 다를 게 없는 맨손이었다. 여기에는 김인섭 변호사 개인의 결단도 있었지만, 지분이 나뉘어 있는 로펌의 지배구조상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4. 다만 이는 임직원으로서 받는 급료만 비교한 것으로, 삼성 기업들의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배당금까지 합하면, 배당금만 연 500억씩 받는 이건희 회장이 실제 가처분소득은 더 많이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