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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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No.81
김인식(金寅植)
생년월일1946년 5월 1일[1]
출신지서울특별시 성북구
학력돈암초 - 배문중 - 배문고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소속팀크라운맥주 (1965)
해병대 (1966~1968)
한일은행 (1969~1973)
지도자배문고등학교 감독 (1973~1977)
상문고등학교 감독 (1978~1980)
동국대학교 감독 (1982~1985)
해태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1986~1989)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0~1992)
OB-두산 베어스 감독 (1995~2003)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2)
한화 이글스 감독 (2005~2009)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6)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9)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5~2017)[2]
종교무종교개신교
보유 기록
1995년, 2001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2006 2009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5 WBSC 프리미어 12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쌍방울 레이더스 역대 감독
팀 창단김인식
(1991~1992)
신용균
(1993)
OB/두산 베어스 역대 감독
윤동균
(1992~1994)
김인식
(1995~2003)
김경문[3]
(2004~2011)
한화 이글스 역대 감독
유승안
(2003~2004)
김인식
(2005~2009)
한대화[4]
(2010~2012)

1 소개

우리는 또 하나의 위대한 도전에 나섭니다.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출정식 중.

대한민국의 야구인이다.

1946년 5월 1일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5가 1번지에서 출생. 배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와 한일은행에서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으나 어깨 부상으로 26세의 나이에 조기 은퇴했다.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거쳐 1986년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프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쌍방울 레이더스(1991~1992)-OB 베어스/두산 베어스(1995~2003)-한화 이글스(2005~2009)의 감독을 역임했으며 2009년 이후 2선으로 물러나 KBO의 기술위원장과 규칙위원장을 맡고 있다. 국민 감독킬인식이란 상반된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평가가 심히 엇갈리는 감독이다.

두산 시절에는 구단 역사상 희대의 흑역사를 극복하고 통산 4회 우승 중 2회 우승을 일궈낸 미라클 두산이란 팀컬러를 만든 명감독으로 요약되지만, 한화 시절에는 부임 초반은 믿음의 야구와 혜성같이 등장한 스타를 기반으로 좋은 성적을 올렸으나 장기적으로는 투수 혹사 및 지나친 노장 선호, 유망주 홀대, 군입대 선수 관리 미비 등 근시안적인 팀 운영으로 최악의 암흑기를 초래시킨 암흑군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장 감독 잔혹사의 스타트를 끊은 인물이기도 하다[5]

그리고 통산 4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전부 4강 이상의 성적(우승 2번 포함)을 거둔 명실상부 국제전 최고의 감독이기도 하다.

프로야구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2009년까지 980승 45무 1032패 승률 .487.

2 선수 시절

1965년 실업 야구 팀인 크라운맥주를 시작으로 1967년에서 1968년까지 해병대 야구부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나 해병대 시절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어깨 부상으로 인해 25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이 당시만 해도 국내에 스포츠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시피하던 시절이라 피칭 뒤에 아이싱은 커녕 반대로 뜨거운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면서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찢어지고 해진 어깨의 모세혈관이 완전히 망가질 수밖에... 한일은행 당시 김영덕, 김응용 등 훗날 프로야구 1세대의 명감독들이 한 팀에서 뛰었으며 이 인연으로 훗날 김응용 감독이 이끄는 해태 타이거즈의 수석코치로 부임하게 된다.

3 지도자 시절

김인식/지도자 경력 문서로.

4 김인식에 대한 비판

김인식/비판 문서로.

5 기타

파일:Attachment/김인식/표정변화.jpg

  • 위의 짤에도 나오듯 오리고기를 상당히 좋아한다. 그래서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두산과 한화의 듀얼팀컬러 이름이 좋다! 오리고기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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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나지 않은 성품과 주변인들에 대한 배려가 좋아서 야구계에선 선후배를 막론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으며 TV카메라 앞에서도 늘상 찌푸린 표정으로 앉아있다 선수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곤 하지만 뒤끝이 없는 성격이라 선수들이 부담스러워하는 지도자는 아니다. 오히려 두산 감독 시절의 팀 컬러에서 알수 있듯 국내 출신 감독 가운데는 선수들에게 가장 많은 자율을 부여하는 감독이며, 두산의 후임 감독인 김경문은 김인식 감독의 자유방임에 익숙한 팀컬러를 바꾸기 위해 상당한 내부진통을 겪기도 했다.
  • 2004년에 발병한 뇌경색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사진을 찍은 결과 뇌경색으로 죽은 세포가 흔적마저 사라지자 의학계에서는 기적이라며 학계에 보고하려 한다는 뜻을 본인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뇌경색 발병 이후 완치되어도 혈관이 막혀 죽은 뇌세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종종 신문에서 야구 지면이 아닌 헬스&건강코너에서 인터뷰어로 등장하기도. 그래도 여전히 거동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듯하다.

6 종합적인 평가

위의 장문의 비판에서 알수 있듯이 한화 이글스에서 보여준 여러가지 문제들로 여러모로 한화 팬들과는 좋은 인연으로 남지 못했다. 그러나 전체 커리어로 보면 결코 무능한 감독은 아니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다섯 손가락안에 들어갈 유능한 감독.

해태 타이거즈수석 코치 시절에는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중재역이자 투수 육성의 역할을 맡아 해태왕조의 전성기를 만드는 데 공헌했으며, 감독 생활 초창기였던 1990년대 초중반에는 이광환, 김용희 등과 함께 자율훈련과 분업화로 대표되는 메이저리그식의 신사고(新思考) 야구를 주도했다. 1994년 선수이탈 파동으로 사분오열된 팀을 추스려 우승으로 이끈 점 또한 덕장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또한 1980년대 박영길이 내세웠던 빅볼 노선[8]을 이어받아 세밀한 작전보다 타자의 장타력을 극대화하는 공격야구를 추구, 관리야구와 스몰볼 중심이었던 한국야구의 스타일 다양화에 공헌했다. 베어스 시절의 트리오나 이글스의 데이비스-김태균-이범호(-김태완) 등 항상 중심타선 만큼은 파괴력있는 거포들로 대부분의 시즌 동안 평균 이상의 득점력과 장타력이 있는 타선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한국 야구에서 타선관리 능력은 손에 꼽히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단, 한화는 그가 오기 전부터 뻥야구 구단이었다. 한화의 뻥야구 컬러를 김인식이 만든건 아니다.

투수 육성에도 나름 노하우가 있어서 페넌트레이스 중반에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커버하는 즉시전력감의 불펜투수를 만들어내는 데 능했지만, 두산 시절이나 한화 시절이나 키워낸 투수를 너무 과하게 소모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이러한 강점을 스스로 깎먹었다. 투수 출신 감독 치고는 타자를 보는 안목도 좋은 편이고 한화에서의 이미지 때문에 퇴색되긴 했지만 두산에서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기도 했다. 다만 한화에서의 말년에는 08년에 기회를 붙잡은 김태완을 제외한 한화의 빅뱃 유망주들은 그의 재임기에 2군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것도 이도형, 윤재국, 고동진같은 선수들에게 밀려서.

김인식은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쥐어짜서 최대한 성적을 올릴수도 있고 리빌딩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구단이 성적을 원하는지 리빌딩을 원하는에 따라 맞추어주는 편인데, 쌍방울에서 지원이 없다고 때려치우고 나오자 같이 일했던 코치들이 다 해고당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그 이후부터는 최대한 구단의 요구에 맞추어주는 편이다. 한화 구단에서 가을야구를 선택하지 않고 리빌딩을 요구했다면 OB(현재 두산)에서 꼴찌까지 하면서 리빌딩을 했듯이[9] 한화도 젊은 선수 위주로 투수를 갈아넣지 않고 리빌딩이 가능했을 것이다.

비슷한 연배나 레벨의 다른 감독에 비해 통산 승률이 낮은 편인데(.487), 이건 김인식 감독이 맡았던 팀들이 대부분 재정과 인프라 지원 면에서 최하위권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우선 처음 감독을 맡은 팀이 쌍방울이라는 점에서부터 이미 말 다했다고 볼 수 있고 김인식 시절의 두산은 그룹 구조조정의 여파로 도무지 구단에 돈을 쓸 생각이 없어서 매년 주력 투수와 타자를 팔아 구단 운영비에 보태는 팀이었다. 심지어는 김동주까지 KIA 타이거즈에게 유동훈+현금 30억원으로 트레이드하려다 정보가 새나가서 포기했을 정도였다. 적어도 두산 시절의 김인식은 그런 최악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 꾸려낸 팀으로 꾸준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에서라도 평가받아야 한다. 김경문 감독 취임 이후 빠르게 세대교체가 된 두산 팬덤에서는 골수팬이 아닌 이상 새로 팬덤에 가세한 팬들 베이징유입이라든지, 꼬꼬마들이라든지 등등은 거의 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 한다.

'단기전의 마술사'라는 이미지와 달리 1995년 우승 이후 2000년대 초까지는 오히려 단기전 성적이 상당히 나빴지만[10] 2001년에 삼성을 상대로 업셋으로 우승하면서 단기전 능력을 드러냈다. 이후의 포스트시즌에서는 마지막 한 고비를 못 넘고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지만 정규리그 성적이 뒤졌다는 건 애초에 팀의 전력이 뒤진다는 뜻이기에 업셋이 쉽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2001년 한 번이라도 업셋우승을 해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 할 일. 한화에서도 2005년엔 SK, 2006년엔 현대를 업셋하고 3년간 플옵에 진출해서 한번도 업셋을 당하지 않는 등[11] 그 나름의 단기전 실력은 보여줬다. 그리고 만들어준 전력을 가지고 치르는 4번의 국가 대표감독에서 단 한번도 실패가 없었다는 것만 봐도(2002 부산아시안게임, 2006, 2009 WBC, 2015 프리미어12) 단기전에서의 능력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한화에서 안 좋은 말년으로 인해 한화팬들에게는 이글스 역대 감독 중 거의 흑역사 취급을 받는다. 이 시기에 한화 선수층이 고갈된 건 사실이고 결국 2012년까지도 한대화 감독이 재임기간 내내 리빌딩을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그 리빌딩조차도 절망적으로 얇아진 선수층에 선수들 자체의 기본기가 부족하고 제대로 된 2군구장도 없는 판이니 유망주가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기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팀을 손봐야할지 난감할 지경이었다.

다른 감독에 비해서도 유난히 원한 맺힌 장문의 비판에서 알수 있듯 한화 이글스의 팬들에게는 세대교체를 등한시하여 팀 체질을 악화시킨 부분에서 흑역사로 취급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비난과 원망의 대상이지만 이후 김인식감독보다 더 화려한 경력의 김응용 감독이 9년만에 복귀해서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꽤나 많이 주긴 했지만 끝에 가서는 킬끼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만 남기고 떠났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부임이후 김인식 부임시기에는 상상못했던 압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2016년, 백인천급으로 몰락해버려서 김인식 감독은 어쨌든 짜내는거라도 잘해서 21세기 이글스의 최다 가을야구를 이끈 감독으로 재평가받는 중. 강력한 언더독의 이미지를 구축했던 두산 시절의 팬들과 말년의 몰락을 악몽으로 기억하는 한화 팬들의 평가가 상반되는 감독.

김인식 관련 다큐

여담으로 노리타들이 툭하면 들고나오는 감독이기도 하다. 김인식에 비하면 김성근의 혹사는 아무것도 아니다, 김인식 시절에 기반을 엉망으로 쌓아서 그런거다, (비상식적 운용에 대한 썰이 나오면)그런건 김인식 시절에나 하던거다 등등. 김인식 감독을 들먹여 김성근의 잘못을 가리는것도 말이 안되지만 아무리 한화시절 실책을 크게 잡아도 야구인생 내내 선수들을 갈아넣고 야구 외적 요소로까지 선수들 억압한 김성근보다는 훨씬 낫다.

7 향후 행보

2011년 8월 OBS의 '명불허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야구감독 복귀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통산 980승을 거둔 상태에서 불명예 은퇴를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1000승을 채우고 싶은 바람이 있는 듯. 그러나 감독의 세대교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작금 야구계에서 기존의 낡은 야구관을 벗어나지 못해 팀을 망쳤던 노감독이 새로운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게다가 한화 감독 이후 1~2년도 아니고 5년 넘게 현장떠나서 쉬어버린터라 실전감각에 문제가 많을게 뻔하다.

유능하지만 구세대에 속하는 노 감독이 현장을 오래 떠났다 복귀해서 실전 감각에 문제를 드러낸 사례는 상당히 많다. 2002년까지 SK 감독으로 있다가 3년의 공백기를 가진 뒤 2006년 롯데 감독으로 돌아왔던 강병철은 실전감각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며 과거의 승부사 기질까지 완전히 사라진 모습을 보였고, 8년 쉬다온 김응용 감독은 한화 감독 기간동안 어메이징한 운용으로 한화팬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12] 김성근 감독이 SK에서 해임된후에 계속 프로팀 감독으로 물망에 오르다 한화 감독에 선임된 건 원체 열성팬이 많은 인사기도 하지만 독립야구단이라도 맡아서 현장에 계속 머무르며 감을 유지했다는 점도 크다.

그러나 2015 WBSC 프리미어 12 준결승 한일전에서 온갖 불리한 요소들을 떨쳐내고 승리, 결승에서는 미국까지 꺾고 결국 우승을 차지하면서 다시금 명장 반열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2016년 9월 5일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2년만에 다시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게 된다.

8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경기정규리그한국시리즈
1991쌍방울 레이더스126527136위-
1992126418418위-
통산252931554
연도경기정규리그한국시리즈
1995OB 베어스/두산 베어스126744751위우승
1996126477368위-
1997126576455위-
1998126616234위-
1999132765151위[13]-
2000133765702위[14]준우승
2001133656353위우승
2002133666525위-
2003133577427위-
통산116857955633
연도소속팀경기정규시즌한국시리즈
2005한화 이글스126646114위-
2006126675723위준우승
2007126675723위-
2008126646205위-
2009133468438위-
통산6373083218
총계2057980103245
  1. 호적상으론 1947년 생이지만 실제는 1946년 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기사에서 하일성이 (김인식) 본인고등학교 2년 후배라고 한 것으로 보아(하일성은 빠른 49) 1946년 생이 정확한 듯 하다.
  2. 2002는 부산 아시안게임, 2006, 2009는 WBC, 2015는 2015 WBSC 프리미어 12, 2017은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3. 2011시즌 도중 자진 사퇴.
  4. 2012시즌 도중 경질.
  5. 농담이 아니고 상기된 김인식, 김응용, 김성근 모두 프로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지만 한화에서 시대에 뒤처진 야구로 인해 말년의 커리어를 대차게 말아먹은 것과 똑같다. 사실 이 3명 말고도 빙그레 시절의 명감독이었던 김영덕을 비롯하여 LG의 신바람 야구를 불러일으킨 이광환과 롯데의 2회 우승을 달성한 강병철 등 명성이 자자한 감독들이 거쳐갔지만, 김영덕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한화에서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성공했던 김영덕도 한국시리즈에서는 번번히 물을 먹으면서 콩그레의 이미지를 굳혔지만.(...) 백골퍼는 이미 다른 곳에서 대차게 말아먹은 덕에 한화에 오지도 못하고 감독 커리어가 끝장났다
  6. 다만 추승우를 직접 불러들인 건 김인식 감독 본인이다. 덕 클락은 부상 이후 성적이 급락한 것이 반영된 것.
  7. 이유는 다들 짐작하겠지만 김인식이 OB와 한화의 감독을 맡았기 때문.
  8. 박영길은 1991년 태평양 돌핀스 감독 당시 전임 김성근 감독이 선수들에게 주입시킨 컨택 위주의 끊어치는 타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려다 실패하고 감독직에서 은퇴했다.
  9. 성적이 낮을수록 좋은 신인을 뽑을 수 있다. 또 꼴찌를 해야 하는데 나중에 쓸 투수들을 갈아넣을 필요가 없다.
  10. 1998년 LG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패, 1999년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에서 4연패로 연이어 탈락.
  11. 물론 두산에게 2번 다 무기력하게 스윕당한 건 조금 문제가 있다.
  12. 다만 한화 감독 재임 시절 이태양최영환 등 여러 유망주들에게 지속적인 기회를 주는 등 이러한 부분에서는 현 감독 김성근에 비교되고 있다.
  13. 드림리그, 8팀중 승률 1위
  14. 드림리그, 8팀중 승률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