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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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日秀

1946년 8월 26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형법학자. 1990년대에는 이재상과 더불어 국내 형법학계의 쌍두마차로 불렸다.

2 생애

2.1 초년 시절

강원도 강릉군 인근 시골에서 아버지 김병문과 어머니 함성녀의 2남 5녀 가운데 아들로는 첫째로 태어났다. 농사를 지었지만 한학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와 자식 교육에 남달랐던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보릿고개로 허덕이던 1950~1960년대 국민 대다수가 그랬듯이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컸다. 특히 초등학교 4학년때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해야 했다. 중학교때부터 급우들 대다수가 쉬는 시간이면 공놀이 등에 여념이 없었을 때에도 영어나 독어 단어를 외웠다고 한다. 그리고 1962년 강릉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수학여행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어렵게 공부한 끝에 1965년 고려대학교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서울대학교가 아닌 고려대학교에 진학한 것은 장학금때문이었다. 가세가 기울어 집에서는 등록금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2 고시생 시절

4년 간의 장학금 지급을 약속받은 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벌레로 불릴 정도로 학업에 매달렸다. 그 시절 일부 대학생들은 ‘하이칼라’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다녔지만 머리를 삭발에 가깝게 짧게 깎았으며, 그 흔한 구두도 신지 않고 고무신을 신었다. 대학 4년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고, 입학후 반년 정도 지났을 때부터 즐겨앉던 도서관 한켠의 자리는 누구도 앉지 않는 지정석이 돼버렸을 정도였다.

대학 3학년때 사법시험 1차 시험에 합격했고, 대학 졸업식 날이던 1969년 2월 25일에는 사법시험 2차 시험을 보았다. 최종합격자는 한달 뒤인 3월말에 발표됐는데, 결과는 의외로 쓴 잔이었다. 하늘이 노랗게 보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세상에서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며칠동안 방에 틀어박혀 바깥 출입을 삼갔다.

그때 손윗누이가 다가와 “고시에 떨어진 것을 감사히 생각하라”며 지금의 시련은 너를 좀 더 크게 쓰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자, 그 말에 감명을 받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유교적인 가풍에서 성장했지만,[1] 4월 첫째 주일에 스스로 교회에 나갔고, 다음날부터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으며, 다시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하였다.

하루 13시간 가량 각종 법률서를 보는 생활속에서도 가급적 하루에 한번은 신앙서를 펼쳐보려고 노력했다. 당시 읽던 워치만니의 로마서주석, 성경핸드북 등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그 중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에 특히 감동을 받았다. 이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고 교회행사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1년쯤 되자 기독교에 대한 의문점을 거의 해소하게 됐다. 교내에서 마주치는 선후배들에게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했다.[2]

1969년 12월 31일, 폭설로 표현할 만큼 눈이 많이 내린 날이자,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날이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가서 놀던 그 날에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공부를 한 뒤 밤 11시 30분 쯤 아무도 없는 도서관을 혼자 나서면서 눈쌓인 운동장을 걷다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수석합격을 허락하시면 법률가보다는 학생들을 복음으로 돌보는 교수가 될 것이고, 평범한 성적으로 합격한다면 사람낚는 어부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1970년 2월 마지막 주에 있었던 제11회 사법시험에 응시했으나, 결과는 또 낙방이었다. 그 당시 고대법대 학장이던 박재섭 교수가 “전혀 떨어지리라 생각하지 못했다”며 다시 시작하라고 다독였다. 형법 담당 남흥우 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남흥우 교수 연구실에서 수험준비를 다시 하였다.

마침 1970년 5월 사법시험령이 전면 개정되어, 법조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합격자 정원제를 도입하겠다 하였다.[3] 거기에 용기를 얻어 그 해 7월에 응시한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4] 합격증을 받은 1970년 8월 26일은 마침 24번째 생일이기도 하였다.

2.3 검사 임용 탈락과 독일 유학 준비

그 후 1971년 1월 사법연수원에 입학했고, 사법연수원을 졸업할 때에는 판사가 아닌 검사 임용을 희망했다. 현장에서 숱한 피의자를 만나는 검사야말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에는 제격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보로 검사임용 결격사유를 통고 받았다. 연좌제때문이었다.[5]

그래서 1973년 사법연수원 수료 뒤에는 변호사 개업을 택했다. 그해 5월에는 평생의 반려자인 이신자를 만나 결혼했다.[6] 그러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퇴근 후에는 TV를 보며 소일했다. 고심 끝에 그해 9월, 고대법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고, 2년여의 학업 끝에 1976년 2월 석사과정을 끝냈으며, 그해 3월 내친 김에 박사과정에 등록했다.

박사과정에 입문한지 두 달이 채 못되었을 때, 김형배 교수가 독일 정부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고 귀띔했다. 아데나워 장학재단에서 한국 학생 2,3명을 뽑고 있다는 것이었다.[7] 김형배 교수는 “현실에 안주해 2∼3년 더 변호사 생활을 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이라며 유학을 적극 권유했다.

그때부터 남산 근처 독일문화원의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초급반부터 다녔다.[8] 그리고 같은 교회 집사님 남편인 경희대 독어과 교수에게서 특별과외도 받았다. 그 덕에 장학생 선발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9]

"1977년 9월에 출국"이라는 통보를 받자, 1976년 12월 31일, 변호사 사무실을 닫았다. 사무실을 정리한 뒤 학원과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독일어 학습에 매달렸다.[10] 그리고 드디어 1977년 9월, 독일로 출국했다.

2.4 독일 유학 시절

독일에 간 뒤,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공부를 계속하였다. 처음에는 독어회화와 독일 사람들의 관습 익히기에 주력했고, 1978년 5월 정식 유학생활이 시작되자 과중한 학업부담으로 책에 파묻혀 지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독일의 법학이 신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이 모두 녹아든 총체적 학문임을 그때 알았다.

유학을 시작한 후 2년이 지난 뒤에는 박사과정에 진학해야 했다. 박사과정 입학시험에 떨어지면, 장학금도 끊기고 곧바로 귀국을 해야 했다. 이때 박사과정 입학시험에서 발표해야 할 논문과제는 ‘인간 존엄성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인간 존엄성이라는 게 말 그대로 너무 포괄적이어서 주제를 설정하기 어려웠고, 법학뿐 아니라 인접 학문을 두루 살펴보고 그 의미에 대한 정의를 명쾌하게 내려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당시 담당교수는 독일에서 형법으로 이름 높던 클라우스 록신(Claus Roxin) 교수였는데, 록신 교수는 학문적으로 매우 깐깐한 교수여서 단 한번에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서른 넘은 나이에 시작한 외국어는 한계가 있었으며, 법률용어나 학문적 개념은 자기 나라 말로도 의미 파악이 어려운데, 고작 3년 배운 외국어로 감이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이것때문에 너무 고민하다보니 스트레스성 위염에 걸렸다.

그래도 한 달 동안 하루 14시간씩 예비논문 작성에 매달리고 독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1980년 12월 23일, A4 용지 15장 분량의 논문을 제출하고 발표했다. 지도교수인 록신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매우 탁월했다”고 총평을 했으며, “당신이 지금까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지금 들어보니 연구방향을 제대로 짚었고 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지녔음을 알게 됐다”고 추켜세웠다.

그 후 박사 논문을 쓰기 까지는 대략 2∼3년의 기간이 소요됐다. 신기한 것은 논문의 진도였다. 한 눈 팔지 않고 하루를 꼬박 매달려도 논문 완성량은 겨우 2,3장 정도였다.

1982년 여름, 2년여의 노력 끝에 논문을 500장 정도로 완성했다. 당시 뮌헨대 법대를 졸업한 환경부 공무원과 고등학교 독일어 교수에게 교정을 맡겼다.[11] 그렇게 해서 1984년 초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제목은 '형법에 있어서의 인간존엄의 의미'였다.

2.5 교수 시절

박사학위를 정식으로 취득하기 전인 1983년 여름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리고 1983년 8월 18일,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12]

연구와 강의준비를 열심히 하면서도, 한국대학생선교회 등 각종 기독단체에 속한 학생들을 한데 모아 초교파적인 기도모임을 만들었다. 1987년에는 ‘예수믿는 고대인’ 행사를 개최했으며 그 무렵 하나님과의 정기적인 만남을 위해 교내에 채플시간을 마련했다. 또 고려대 기독인연합회를 통해 기독인 한마당을 이끌기도 했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기독교 전도를 너무 많이 하자, 학생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우리는 형법 강의를 들으러 왔지 특정 종교에 대한 선전이나 전도 대상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형법 강의를 예수의 논리와 접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형법 1,2,3,4권 시리즈를 써서 1988년부터 출간하였다.

초임 교수 시절이던 1980년대 중후반은 민주화 운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호헌 철폐 등과 관련한 시국 서명에는 꾸준히 동참했다.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느낄 때도 있었는데 결국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졌다.

노태우 정권기인 1989년부터는 사형폐지운동을 벌였다.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자, 이를 정면으로 반대하며 맞섰다. 그리고 1995년에는 낙태반대운동과 기독교 교도소 설립운동을 시작했다. 기독교 전도를 너무 열심히 한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어쨌든 당시 고대법대 교수들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띄었던 교수 중 하나였고,[13] 청렴한 원칙주의자인 데다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선행과 봉사를 계속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

교내 보직으로는 고려대학교 법대학장, 특수법무대학원장, 법학연구원장을 역임했다. 학교 바깥에서는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원장, 경찰위원회 위원장, 한국기독교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사형폐지위원회 공동대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의장, 한국낙태반대운동연합 대표 등을 역임했다.

3 저서

1992년에 '한국형법Ⅰ(총론 상)'과 '한국형법Ⅱ(총론 하)'를 펴냈다. 1994년에는 '한국형법Ⅲ(각론 상)'·'한국형법Ⅳ(각론 중)'을 출간했고, 1995년에는 '한국형법Ⅴ(각론 하)'를 펴냈다. 총론 두 권은 총 1526면이고, 각론 세 권은 1952면으로, 총·각론을 합쳐 ‘3478면의 초초대작’이다.

가독성이나 수험적합성은 심히 떨어지지만, 상당히 공들여서 쓴 책임은 분명하다.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정작 책 제목('한국')과는 걸맞지 않게도(...)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 최신 독일 이론이나 용어를 주장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나, 꼼꼼히 곱씹어 읽어보면 틀린 부분이 거의 없고 해설이 정확하다는 데 놀라게 된다. 오해가 가지 않도록 단어 하나도 정말 신경써서 골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14]

4 트리비아

  • 민주화 운동기인 1980년대까지는 학생들에게서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는 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종교적 독선이 너무 심하고, 학생들의 소중한 수업시간을 거의 자기 개인적 신앙 간증 시간으로 활용한다는 이유. 특히 법철학 수업은 사실상 개신교 선교시간이나 마찬가지여서 참다 못한 학생들이 강의실을 뛰쳐나가기도 하였다.
  •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대법대에서 비교적 강의를 잘 하는 교수로 꼽혔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는 지루한 강의를 하는 교수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외부활동이 많아지면서 휴강도 잦아지고, 강의시간 중의 설교도 더 늘었다는 평. 정년퇴임할 때까지 그러한 강의스타일을 계속 유지했으나, 어쨌든 강의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았고, 시험문제는 매우 어려운 편이었다. 말년에 법학 관련 교양 수업을 진행할 때에는 단 두 문제를 칠판에 써놓고 나간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법학과 학생들은 1번 문제인 '~에 대해 논하라' 만을 풀도록 하였고, 비법학과 학생들에게는 1, 2번 문제 중 선택하여 하나를 쓰라고 했는데, 2번 문제는 '법은 강물처럼'은 어떤 의미인가? 라는 문제였다. 참고로, 법은 강물처럼이라는 그의 저서가 존재하며, 종강 후 연구실에 찾아온 학생들에게 한 권 씩 나눠주었다.
  • 간통죄 관련하여 원래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나중에는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임을 감안한다면, 애초에 간통죄 반대론자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놀라울 지경이다.
  • 아들 김주은은 고대법대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법대로 진학하였다.[15] 그 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법무법인 태평양의 변호사로 있다.
  • 2015년 9월 17일, '흔들리는 로스쿨, 위기의 법학교육'이라는 제목의 시평을 써서 주목을 받았다. 고대법대 명예교수 가운데서는 보기 드물게도 로스쿨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출하였다. 칼럼 참조
  1. 1년에 아홉차례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2. 그때 2년 후배 채이식도 기독교 신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3. 시험령 개정 전까지는 총점 평균 60점 이상,과목당 40점이 넘어야 합격할 수 있었다.
  4. 수석 합격을 기대했지만 수석은 아니었고, 7위 합격이었다고 한다.
  5. 사법시험 합격 점수도 높았고 연수원 성적도 좋았지만, 연좌제로 신원조회에 걸려 검사임용에 탈락하였다. 아버지가 광복 이후 민청 면 선전부장을 지냈고,6·25 당시 좌익에 가담해 부역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돌아가신 데다 부역 정도도 가벼워 손을 쓰면 구제는 될 것이라고 했지만, 검사 세계에서 그 정도 흠이라면 인사상 불이익은 물론 공직생활 내내 불필요한 꼬리표를 달고 다닐 것이라서 결국은 포기하였다.
  6. 당시 숭의여고 음악교사였다.
  7. 아데나워재단이 인문 과학 예술 등 모든 학문을 총망라해 유망한 한국학생을 선발, 3년간 생활비와 장학금을 지급한다고 공고했다고 한다.
  8. 당시 '괴테 인스티튜트'는 초급반의 경우 선착순으로 수강생을 뽑았다. 그래서 초급반에 등록하기 위해 접수 시작 전날 괴테인스티튜트 인근 여인숙에 묵었고, 다음날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남산 골목길을 뛰어올라 괴테 인스티튜트 정문 앞에서 기다려 초급반 등록접수를 하였다. 접수번호는 1번이었다.
  9. 장학생 선발시험 면접일에 예상질문을 외웠으며, 살아온 과정, 장래 희망, 유학목적 등을 수백번이나 독일어로 암송했다고 한다. 면접일을 하루 앞둔 일요일, 대전에서 셋째 처제의 결혼식이 열렸으나 참석지 않았을 정도로 장학생 선발시험에 집중했다고 한다.
  10. 출국 직전까지 새벽 오후 저녁반 강의를 들으며 하루 내내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11. 법 전공자가 어색한 법률용어를 집어내고 독어학자가 맞춤법과 문장을 봐줬다.
  12. 1969년 12월 31일 복음을 전하는 교수로 써달라고 간구한지 꼭 14년만의 일이었다.
  13. 김일수 교수 외에 배종대 교수 역시 정치적으로 진보개혁 성향이었다.
  14. 참고로 신호진, 김정철 등 소위 잘 나가는 강사들의 교재들을 읽어보면, 오해의 소지 있게, 부정확하게 적혀 있는 부분이 매우 많다.
  15. 공교롭게도, 김 교수의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이재상 교수의 아들 이승호는 고대법대 및 같은 학교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