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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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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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No.73
김재걸(金在杰 / Jea-Gul Kim)
생년월일1972년 9월 7일
출신지서울특별시
학력영일초-우신중-덕수상고-단국대
포지션내야 유틸리티(2루수, 3루수, 유격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5년 2차지명 2라운드(전체 14번)
소속팀삼성 라이온즈 (1995~2009)
지도자삼성 라이온즈 1군 트레이닝 코치 (2010)
삼성 라이온즈 1군 주루코치 (2011~)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번
윤용하(1991~1993)김재걸(1995)이중화(1996)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번
이정훈(1995)김재걸(1996~1998, 2001~2004)박진만(2005~201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번
고지행(2004)김재걸(2005~2009)손주인(2010~2012)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3번
나가시마 키요유키(2009)김재걸(2010~ )

1 소개

가을의 전설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백업요원

삼성 라이온즈내야수였으며 2015년 현재 삼성 라이온즈의 주루코치. 등번호는 데뷔시절엔 9번, 1996년부터 2004년까지 7번, 2005년부터 2009년까지 6번이며 2010년부터 코치로는 73번을 달고 있다. 1999년과 2000년에는 군복무로 인해 뛰지 못했고 7시즌밖에 달지 못했다.

현역 시절 전상렬과 마찬가지로 야구계의 노안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분에 비하면 상대도 안된다. 여담이지만 삼성의 3김(김한수-김종훈-김재걸) 타자 중 키가 제일 작다.(175cm) 실제로 중학생 시절 겨우 150cm밖에 안 되어 한때 야구를 포기할까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2 프로 입단 전, 김재걸 파동

김재걸이 단국대에 재학하고 있었던 당시 현대그룹은 프로야구단 창단을 위한 밑떡밥으로 실업야구단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며 문동환, 박재홍 등 유망한 고졸, 대졸 선수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단국대 시절 국가대표를 했던 김재걸도 1994년 11월 현대 피닉스와 1억원에 계약했다. 그러나 몇 달 전 열린 1995 신인지명 때 김재걸을 지명했던 삼성에서 김재걸에 대한 소유권은 자신들에게 있다며 김재걸과 계약하며 이중계약 파동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현대와 삼성은 김재걸을 두고 법정 공방까지 벌였으며, 1995년 3월에서야 김재걸은 삼성 선수가 맞다고 판결이 났다.

여담으로 당시 여론은 현대 피닉스 편이었다. 아무래도 김재걸이 현대 피닉스와 먼저 계약을 했기 때문. 또한 이전에 비슷한 이중계약 파동 때는 프로야구쪽이 힘의 논리를 앞세워 이겼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

3 선수 생활

입단 당시에는 계약금 2억 1천만원이라는, 당시 심재학과 함께 신인 역대 최다 계약금을 받아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김재걸의 실력은 팬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사실 김재걸의 계약금은 현대 피닉스의 아마선수 수집으로 인해 폭등하고 있던 당시 계약금 실정에 현대와 삼성의 자존심 싸움에서 더욱 부풀려 진 것이었다.

활동적인 풋워크를 바탕으로 한 괜찮은 수비를 가지고 있었고 발도 빨랐으나, 결정적으로 타격이 시망. 1995~1996년의 주전 시절에도 꾸준히 2할대 초반의 타격을 보이며 스스로 주어진 기회를 걷어차고 말았다. 심지어 1996년 5월엔 비록 어깨가 강한 선수인걸 감안하더라도 땜빵 포수로 나온 이종범에게 도루저지를 당하는 굴욕도 겪는다.

1997년 팀에 새롭게 부임한 백인천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1루수 이승엽, 3루수 김한수, 2루수 정경배, 유격수 김태균을 주전으로 낙점하면서 파격적인 내야 리빌딩에 나섰다.[1] 김재걸이 이들에게 밀린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타격이였다. 이승엽은 이제 막 시즌을 시작하는 처지였지만 백인천 감독이 열심히 밀어주었고(그리고 1997시즌에 이승엽은 국내 홈런왕을 차지했다.), 김태균은 정확도만 놓고 보면 김재걸과 큰 차이는 없지만, 홈런을 16개나 친 시즌이 정도로 한 방이 있는 유격수였다. 그렇다고 외야로 전향하자니, 양준혁, 최익성신동주까지... 이 때 삼성 타선은 참 화려했다. 부정배트 사건도 내보고

결국 자신보다 나은 방망이를 가지고 있는 선수들에 밀려 벤치워머(benchwarmer)로 강등되었으며, 군 복무를 마친 2001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수비 요원으로 뛰게 된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 때 프로 주전선수라는 자만심에 휩싸여 연습을 게을리했다고. 이후 백업요원으로 떨어지자 자신의 자만을 깨닫고 죽어라 수비연습을 하면서 스스로를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나이 막 서른이 지났을 무렵부터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한 모든 한국시리즈에서 당당한 주연으로 떠오르는 것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팀이 처음 우승한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6차전 9대6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9번 타자로 나와, 당시 혼신의 힘을 다해 마무리 투수로 뛰던 이상훈에게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큼지막한 중월 펜스 직격 2루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1번 강동우 삼진, 2번 틸슨 브리또 볼넷, 3번 이승엽과 4번 마해영의 백투백 홈런.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은 김재걸의 방망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2003년과 2004년은 언제나 그렇듯이 별 특징 없는 중고참 후보 선수로 시즌을 보냈다.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석패한 삼성이 거액을 들여 심정수박진만FA로 영입하면서, 18인 보호선수명단[2]에 변변찮은 공격력을 가진 김재걸과 김종훈은 집어넣고 150킬로대의 빠른 공을 던지던 지역 유망주 투수 이정호를 제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삼성팬들은 왜 김재걸은 보호하면서 이정호는 가게 내버려 두었냐며 불만을 토했다.[3]박진만은 삼성으로 넘어오면서 김재걸이 달고 있었던 자신의 기존 등번호 7번을 요구했고, 김재걸은 박진만이 후배였음에도 불구하고[4] 등번호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김재걸의 팀 내 입지가 어느 수준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2005년은 김재걸의 선수생활에서 가장 화려한 한 해가 되었다.

시즌 초 박진만의 부상으로 유격수에 공백이 생기자 선동열 감독은 아쉬운 대로 김재걸을 선발출장시켰다. 초반에는 김재걸 선발출장을 지지하는 팬들이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2004년에 쏠쏠한 유격수 수비실력을 보이면서 타격에서도 잠재력을 과시한 조동찬이 3루수에서 유격수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재걸은 이런 반대여론을 수비도 아니고 미칠 듯한 공격력으로 메꿔 버린다. 이 놀라운 활약에 사람들은 김재걸을 욘사마양신에 빗대어 걸사마, 걸신이라 부르며 열광하기 시작했고, 그는 박진만이 복귀한 중반 이후에도 백업 선수로 종종 출장하며 팀의 승리에 여러 차례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한 예로 1위 삼성과 2위 SK의 미리 보는 한국시리즈라 불렸던 그 해 8월말 문학 야구장 3연전에서, 김재걸은 팀이 1무 1패로 몰려 있던 마지막 경기에 선발출장해 솔로홈런을 날렸다. 그리고 그 경기는 삼성이 1대 0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맞이한 2005년 한국시리즈는 말 그대로 김재걸을 한국시리즈의 사나이로 만드는 경기가 되었다. 이번에도 출발은 백업요원이었으나, 1차전에서 박종호번트를 대다가 공에 손가락을 맞아 시리즈 아웃되면서 바로 그 자리에 들어간 김재걸은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12타수 6안타 5볼넷 4득점 2타점이라는, 말 그대로 MVP급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삼성은 이런 김재걸의 활약에 힘입어 두산 베어스를 스윕하고 두 번째 우승컵을 가져갔다. 시리즈 MVP는 철벽투구를 선보인 오승환이 가져갔지만, 팬들이 뽑은 한국시리즈 최고 선수의 영예(구단 별도시상)는 김재걸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2006년에는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로 발탁, 김민재와 함께 주전 키스톤 콤비였던 박진만, 김종국의 백업을 맡으며 팀의 4강행에 기여했다. 또한 2006년 시즌에는 전체적으로 예의 그 물방망이로 돌아갔으나, 이 해에도 역시 한국시리즈에서 천금같은 동점타를 날리는 등 팀의 3번째 우승에 기여한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2007년에는 3루수의 구멍을 막기 위해 또다른 노장 김한수와 함께 고군분투했으며, 신명철이 들어오고 박석민이라는 걸출한 신예가 복귀한 이후에는 조용히 은퇴를 준비하게 된다. 참고로 당시즌 5월 8일엔 1이닝에 실책 4개를 범하여 한이닝 최다실책 공동 1위 자리에 올라가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기게 된다. 2009년에는 선수로 등록했지만 사실상 플레잉코치 역임을 했으며,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을 때는 2군에서 뛰면서도 후배들의 훈련을 도우며 코치 수업을 쌓기도 했다.

2010년 4월 10일 은퇴식을 치렀다. 삼성 구단의 5번째 은퇴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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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은퇴식을 한 건 좋은데, Linos 가 뭐냐? Dinos 삼성 프런트는 이 건 때문에 영어도 못 하는 프런트라고 빈축을 샀다.

실력으로 경기를 압도하는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그의 발견은 백업 요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국 야구의 체계적인 면을 한층 더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KBO에서 내야백업 유틸리티로 가장 유명한게 꾸준함은 LG 트윈스의 이종열, 임팩트는 한국시리즈의 사나이 김재걸일 것이다.

연도별 성적을 보면 전혀 은퇴식을 치러줄 만한 성적을 기록하진 않았만(…) 삼성의 한국시리즈 콩라인 탈출의 밑바탕이 되었을 뿐 아니라[5] 삼성의 V3, V4를 견인한 주역이기도 해서….

4 은퇴 후

은퇴 이후 2011 시즌부터는 삼성 라이온즈의 주루코치를 맡고 있으며, 3루쪽 코치석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루코치로써는 평가가 영 좋지 못한데, 유지현 등 준족류 출신들 주루코치가 으레 그렇듯이 선수들 주력을 철저히 자기 눈높이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 뭐 배영섭이라든가 김상수같은 선수들이야 주력도 되고 센스도 뛰어난 선수들이니 막 돌려도 보통 문제없이 사는 편이지만, 진갑용을 그렇게 돌리면 뭐 어쩌라고(...)

2013년 들어서는 김태한, 김한수와 더불어 삼성 라이온즈를 망치는 3김 코치라고 까이고 있다.근데 김한수는 감독이 됐다....

앞에서 말한 문제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수들이 간혹 김재걸의 사인을 무시하고 주루 플레이를 하는 경우가 보인다. 예를 들면 201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강명구가 했던 주루플레이 오버런이라던가근데 이게 SK의 허를 찌르며 성공 2013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박한이가 사인 없이 단독으로 성공시킨 3루 도루라던가.. 심지어 2014년엔 어느 용병에게까지 무시당했다(...) 그리고 2015년에 또 한번(...)

게다가 삼성의 도루왕 역사를 새로 쓰신 분 때문에 존재감이 엄청 없어졌다(...) 도루관련 공이든 과든 모두 저 분에게 돌아가다 보니, 뉴비팬들에겐 아예 인지도가 없거나 간간히 사고치는 3루코치 정도 이미지가 되셨다(...)

5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
1995삼성 라이온즈109281.24970115
(5위)
3323210
1996115320.228731222283140
(3위)[6]
19973017.1763101271
199872100.25025200589
1999군복무(공익근무)
2000
200170138.261365119186
20028392.2071910210175
200385161.1993271010232
20046464.188122003122
2005103231.2475770123228
2006115171.2113661011359
2007116314.232731202224017
200899187.2304343111196
20096452.21211201474
통산11252128.230490721314170271119
  1. 사실 KBO에서 단기간에 이런 식의 리빌딩을 성공시킨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2. 다른 팀의 FA를 영입하는 팀은 기본적으로 FA의 전 소속팀에 전해 연봉 300%에 해당하는 보상금에다가, 150%의 추가 보상금 혹은 보상선수 한 명으로 프리미엄을 얹어 줘야 했다. 여기에서 FA 영입팀은 상대팀이 절대 데려갈 수 없는 핵심선수 18명을 보호선수로 지정할 수 있다.
  3. 그 이정호는 군대를 갔다오고 나서 1군에서 활약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4. 김재걸은 1995년 단국대 졸업, 박진만은 1996년 인천고 졸업(1년 유급). 참고로 김재걸과 함께 단국대 타선을 이끌던 선수가 바로 이병규강동우였다.
  5. 이해가 안 가면 위로 올라가서 2002년 코시 부분을 읽어보라.
  6. 2013년까지 역대 삼성 라이온즈 선수 중 한국인 선수로서 한 시즌 최다 도루 기록. 2013년 당시 최다기록은 99년에 47도루를 기록했던 외국인 선수인 빌리 홀. 2015년 현재 삼성 라이온스 선수 중 한 시즌 최다 도루 보유자는 박해민의 60도루. 물론 굳이 도루할 필요가 없이 홈런쳐서 다 불러들일 수 있는 사기타선의 존재 덕분이기는 했는데... 그리고 이 팀에서 주전에서 밀린 누군가신생팀에 가자마자 도루왕을 먹었다. 흠좀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