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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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노 전투 상황을 그려낸 병풍. 오른쪽이 다케다군, 왼쪽이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이다.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이지만, 나가시노 전투 100년 후에 그려진 그림이라, 현대에 새로운 발견된 학설과는 맞지 않는다.

長篠の戦い

동양판 파비아 전투

덴쇼 3년 5월 21일(1575.6.29), 미카와 북쪽의 나가시노 성(현재 아이치현 신시로 시 나가시노)을 둘러싼 다케다 카츠요리의 1만 5천과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만 8천 명의 군사 사이에서 일어난 전투. 연합군이 대승하였다. 이 전투의 본격적인 결전 장소가 성 앞의 시타라가하라(設楽原, 設楽ヶ原)였기 때문에, '나가시노 시타라가하라 전투(長篠設楽原の戦い)'라고도 부른다.

長篠合戦・実際は 攻城戦だった・その時歴史が動いた

1 전쟁 전

1.1 신겐의 죽음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도오토우미 북쪽의 지배권을 확보한 다케다 신겐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를 공략하며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가문은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주력병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고, 끝이 나는 듯 했는데...
신겐이 1573년, 52세의 나이로 급사한다.[1] 신겐의 죽음으로 다케다 군은 발이 묶이게 되었고, 도쿠가와 가문과 오다 가문은 그 사이에 오다 포위망을 정리하고 다케다와 결전을 벌일 전력을 모을 수 있었다.

1.2 오쿠다이라 부자의 배반

1573년 8월, 다케다 가신단 중에 하나였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奧平定昌)은 아버지 사다요시의 제안으로 다케다 가문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항복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가문으로부터 함락시킨 지 얼마 안된 키타미카와(北三河)의 나가시노 성에 사다마사를 파견하고 다케다 군의 침략에 대비케 했다. 이에 다케다 카츠요리는 2년 뒤인 1575년에 1만 5천의 군사를 친히 이끌고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2 전쟁 발발

2.1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의 우주방어급 농성

당시 나가시노 성 안에서는 500명의 군사밖에 없었으나, 성의 구조가 3중 해자를 설치한 난공불락이라 최강의 다케다군도 성을 포위한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사다마사는 부하인 아시가루 토리이 스네에몬을 도쿠가와측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로 파견했다.[2]
이에야스는 동맹군이었던 오다 가문에게 구원군을 요청했고, 오다 노부나가 역시 5월 13일 3만의 군사를 친히 이끌고 미노(美農)의 기후 성을 떠나 도쿠가와의 본성 오카자키 성에 도착했다.

2.2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원군의 도착

오다 군 3만과 도쿠가와 군 8천은 나가시노 앞 시타라가하라 평원에 도착했다. 노부나가는 이 곳을 결전지로 정하고, 철포대를 중심으로 수비하면서 다케다 기마대를 공격하는 전술을 짜고, 3중 울타리를 치고 다케다군을 기다렸다.
새롭게 발견된 조사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평원에 울타리를 친 것이 아니라, 지형을 이용해 산에 해자를 파고 다케다 군을 유인할 요새를 만들었다.

이를 들은 다케다 가문은 군사회의를 열었다. 다케다 4천왕이라 불리던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 야마가타 마사카게등은 철수를 주장하였으나, 카츠요리는 결전을 강행한다. 사실 신겐의 미카와 진공 당시는 오다가 전체적인 가용 병력 면에서는 신겐보다 우세했으나 "노부나가 포위망"으로 불리는 적들을 상대하느라 신겐의 거의 올인에 가까운 대군을 막을 병사가 없었다. 그러나, 교토와 오우미를 모두 정리한 후에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은 결전을 걸고자 가용 병력을 모두 끌고 왔고, 반대로 연합군과의 결전을 예상못한 다케다 군은 수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철수가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카츠요리는 굳이 결전을 선택했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2.3 결전의 맛보기, 도비노스 산 전투

5월 20일 밤, 도쿠가와 군 사카이 타다츠구의 동미카와 무리, 오다 군 가나모리 나가치카의 500 철포부대로 이루어진 3000명의 군사[3]가 은밀히 도요 강을 도강하여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들어가, 새벽녘에는 다케다군의 나가시노 포위의 요점 도비노스 산의 성채를 기습 공격하였다, 도비노스 산 성채는 본성과 4개의 성채로 이루어진 요새였으나, 농성하던 오쿠다이라 군대+후방의 4000명의 연합군에 의해 샌드위치 포위공격을 당해 농성하던 다케다 병력 모두가 전멸한다. 이로 인해 다케다군은 주요무장인 가와쿠보 노부자네를 포함, 여러 유명한 무장들을 많이 잃고, 퇴로까지 차단당하고 만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프레스 망치와 모루의 모루 완성

2.4 카츠요리의 공격 명령과 다케다군 괴멸

5월 21일 이른 아침, 도비노스 공방전 결과 퇴로를 차단당한 것을 인지한 다케다군은 전방의 오다, 도쿠가와 연합군을 선제 공격하여 일대 결전을 벌인다. 전투는 낮 즈음까지 계속 되었고, 연합군의 압승이었다. 연합군도 6000명의 희생자가 생겼지만 다케다군은 무려 1200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연합군의 사상자는 대부분 하급 졸병인 아시가루(足軽)들이었던데 비해(특히 오다군), 다케다군은 다케다 4천왕 중 3명(바바, 야마가타, 나이토), 사나다 노부츠나, 마사테루 형제(사나다 유키무라의 큰아버지), 쓰치야 마사쓰구 등 다케다 24장으로 일컬어지는 유력 무장과 사무라이들을 거의 잃게 되었고, 이 손실은 괴멸적인 것이었다. 카츠요리는 간신히 퇴로를 뚫어 고후로 퇴각하는 데 성공하지만 나가시노의 패전은 곧 다케다 가 멸망으로 이어진다.
이 전투에서 대마왕노부나가는 3000명 철포부대를 1000명 씩 한 조로 나누어 교대로 발사하여 재장전의 시간차를 없애는 삼단 발사 전법을 시전하여 다케다 기마대를 전멸시켰다는 속설이 있으나 당시 3000정이라는 철포수[4]와 3단 발사 전법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사실로 확인 가능한 것은 철포를 중점적으로 운용했다는 것과 다케다 군의 돌격을 막아내기 위해 울타리가 사용되었다는 것 정도. 3천명의 철포부대가 있었다면, 그 이후에도 오다 군은 그들이 활약해야 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은 없다. 최근에는 3천명의 철포부대의 3단 쏘기나 다케다 가의 기마군단도 후대의 창작이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가신한테 쓰게 한 신장공기에 쓰인 1만명 이상 다케다 군이 죽었다는 기록도, 제 3자의 기록에 의하면 천 여명 정도로, 도쿠가와 가문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주도한 쪽은 도쿠가와 측이고 오다 노부나가 군은 거들 뿐이었다라는 등 지금까지 알려진 나가시노 전투 자체에 대한 의문점이 많다.

歴史ミステリー 長篠の戦いは存在しない?

애초에 나가시노 전투에 임하는 양군 간의 전력에는 꽤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 쪽의 천재적인 전략으로 승리한 것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결전을 택한 카츠요리가 어리석었던 것. 특히 다른 나라의 기병대가 보병, 포병과 같이 합동 공격했다면 제아무리 연합군의 총병이라도 짤없이 아작났다.[5]
이후 극소수의 병사로 일만여 다케다 대군을 막아내며 나가시노 성을 끝까지 지킨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노부나가에게 포상으로 이름 한 자(信)를 하사받아 오쿠다이라 노부마사(信昌)라 이름을 고치게 되었다.

3 전쟁 이후

카츠요리는 이후 궁지에 몰린 나머지 철천지 원수였던 에치고(越後, 오늘날의 니가타 현)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와 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동맹이었던 사가미의 호죠 가문과 사이가 나빠지게 되고[6] 북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프레스 샌드위치협공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애초에 가신 간의 단결이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니었던 다케다 가에서는 많은 소속 무장들이 모두 오다, 도쿠가와 가문측에 성을 바치고 항복하였으며 (다케다는 중앙집권이 아닌 호족연맹 맹주), 기대했던 우에스기 측에서도 다케다 가의 신의 문제를 들어 별다른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 결국 키소(매제), 아나야마, 오야마다 등의 다케다 소속 장수들이 하나하나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배신해서 카츠요리를 추적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카츠요리는 덴모쿠 산으로 쫓겨 들어가 가족들과 함께 자살로 험난했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향년 36세.[7]

4 다른 매체에서

  • 태합입지전5에서 이벤트로 구현되어있다. 다케다부대는 5부대가 모두 기마대고, 도쿠가와-오다 연합군은 족경대와 철포대가 혼합되어있는데 병력차부터가 5000~6000:14000~20000정도로 일방적. [8] 도쿠가와나 오다로는 손쉽게 이길 수 있지만 카츠요리로는 그저 암울하다. 모두를 조종할 수 없는 부하 장수로 승리하는 건 말도 안되고, 카츠요리로 할 경우 팁이라면 1575년 시나리오로 시작했을 경우 첫 평정을 열 때 이벤트가 발생하므로 평정을 열지 말고 잠자코 사나다 마사유키를 찾아가서 군학을 4까지 올리고 풍림화산을 배워야한다. 이후 평정을 열면 나가시노성에서 공성전이 펼쳐지는데 이벤트성 전투라 2턴후 바로 공성전은 종료되는지라 에딧을 하지 않는이상 여기서 승리는 일단 불가능,[9] 이후 야전에서 풍림화산을 첫턴에 쓰고 적을 유인하든지[10] 빙 돌아가든지 해서 설치되어있는 함정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총대장인 이에야스에 접근해 적비돌격러시로 털어버리는 게 답. 아군 병력자체가 적은 편이고 노부나가의 철포난사는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카츠요리는 풍림화산만 써주고 얌전히 후방으로 튄다음 나머지 4명이서 특기로 이에야스를 일점사해야한다. 다케다 4명신중 3명이 들어가 있고 이들은 모두 기마기능 4에 적비돌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들이 개별 병력 500~1000정도를 보존하고 이에야스에 붙을수만 있다면 한턴에 이에야스를 보내버릴 수 있다. 패배할 경우 같이 참전한 명장들이 모두 전사하지만, 승리할 경우 노부나가와 이에야스가 전사하고 아들들이 뒤를 잇는다. 아들들은 관직이 없기 떄문에 영토엔 변동이 없으나, 세력치가 깎인다. 물론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게 더 힘들겠지만 노부나가나 이에야스로 플레이시 패하면 전사하면서 게임오버가 된다. 토리이 스네에몬으로 플레이할 경우 노부나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다케다군에 발각되는데 개인전에서 승리할 경우 포위망을 뚫고 나가시노성에 들어와 이후 나가시노전투에서 아군이 승리하면서 무난히 죽음을 피할 수 있지만 개인전에서 패할 경우 예의 책형이벤트가 나오고 게임오버가 된다.
  •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에서도 전국전으로 구현되어 있다. 오리지널 판에서는 오다가 전국전이 존재하며, 무장록으로 나이토 마사토요, 바바 노부후사,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부대를 격파 시 각 무장의 최후가 이벤트씬으로 나오며 각 무장마다 특기를 입수하게 된다. 파워업키트 판에서는 이벤트 회전으로 전국전이 변화하며 이벤트 회전 돌입 시, 역사대로 오다가는 3만에 가까운 대병력이며 다케다 부대는 그에 훨씬 못미치는 숫자로 이기는게 당연한 싸움이나 새로운 방식으로 이겨야한다는 노부나가의 쓸데없는 고집으로 이벤트 조건이 붙어 약간은 까다로운 편. 이벤트 조건은 1. 목책 앞으로 오다가 부대가 나가지 말 것, 2. 1부대도 퇴각하지 말 것, 3, 노부나가 부대를 움직이지 말 것인데 좌익 쪽의 사쿠마 노부모리가 능력치가 낮아 바바 노부후사의 부대의 닥돌에 휘말려 쉽게 전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좌익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해당 조건을 클리어한 채로 이기면 전국전 클리어. 해당 조건을 1개라도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전국전 실패가 된다. 해당 조건을 틀리는 경우, 전투에서 패하는 건 아니며 새로운 방식으로 이기는걸 실패했다며 아케치 미츠히데가 비웃으며 원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 파워업키트 판에서는 다케다 가문 쪽에도 해당 전국전이 생기게 되며, 나가시노 전투 시나리오는 다케다 카츠요리가 처하게 된 현실 (스와 가문 혈통으로 인한 정통성 부재, 오다가와의 경제력 차이로 인한열세, 오다가와의 화평을 원하는 가신들과의 갈등) 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카츠요리가 나가시노 전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입장을 보여주게 된다. 실제 역사하고는 다르게 사나다 마사노부가 우에스기가와 호죠가와 일시 화평하며 우에스기 군을 막고 있었던 고사카 마사노부의 군대를 동원하자는 계책을 내놓으며 이벤트 회전에서 조건 클리어 시, 고사카 마사노부와 사나다 마사노부의 부대가 원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벤트 회전 승리 시, 나가시노 성이 다케다 영지로 변경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가문에 종속된다.

  • 센고쿠(만화)에선 천정기 5권, 6권에 걸쳐 그리고 있다. 그야말로 다케다가 무장들이 처절하게 죽어나간다. 온몸에 총알을 맞았으면서도 기어이 돌격을 감행하여 적들이 베어 넘긴 후, 다시 총격을 받아 전사한 야마가타 마사카게나 자신을 찌른 오다군을 껴안으며 죽은 바바 노부하루, 동생인 사나다 마사테루가 죽자, 그 시체를 몸에 묶고 싸우다 전사한 사나다 노부츠나 등... 그리고 나이토 마사토요는 1줄로 사망처리 되며 끝까지 안습을 못벗어난다...
  • 영화 카게무샤#s-2.에서는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전투가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호수 아래 가라앉은 풍림화산 군기는 다케다 가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1. 전투 중에 적군이 쏜 유탄에 맞아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2. 토리이 스네에몬은 어찌어찌 포위망을 탈출해 도쿠가와 군까지는 당도했지만, 아군에게 지원군이 온다고 알려주러 다시 돌아오는 도중에 다케다군에게 잡혀 끔살당한다. 다케다군이 그를 잡아서 "나가시노 성에 대고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해 오쿠다이라 군을 항복하게 만들면 살려준다."라고 하자 오히려 나가시노 성 앞에서 큰 소리로 "지원군이 곧 온다!"라고 외쳐 책형에 처해지는데, 일본에서는 전형적인 무사도 미담으로 이름높다. 한편 이런 행동에 감격한 다케다 군의 무사인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히사가 사형대에 묶인 스네에몬을 그린 깃발을 자신의 가문의 하타지루시로 삼았는데, 실물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
  3. 신장공기(信長公記)에 의하면 4000명
  4. 당시 철포는 엄청나게 비쌌다. 철포 1정의 가격은 아시가루 1년치 봉급과 비슷.
  5. 실제로 임진왜란 때 투입된 명나라 기병대한테 일본군은 야전에서 붙을때마다 박살이나서 명나라 기병대와의 야전전투를 기피할 정도였다.
  6. 우에스기 가문은 겐신 사후 두 양자 카게카츠, 카게토라(호죠 우지야스의 아들)이 에치고 수호 자리를 두고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다케다 가문은 카게토라를 지지하지 않고 카게카츠를 지지하여, 결국 카게카츠가 승리했으니, 호죠가문이 뿔이 돋힌건 당연한 일.
  7. 이전 문서에서는 타케다 가문이 멸망했다고 되어있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타케다 신겐의 차남은 살아 남았으며 그 후손이 에도시대에 다이묘로 복권되어 영지를 받았고 현재 야마나시에 있는 타케다 신사는 그 후손들이 운영하고있다.
  8. 다케다, 도쿠가와, 오다 어느 진영으로 플레이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양측 병력이 달라진다. 가령 오다로 플레이할 경우 도쿠가와6000+오다8000=14000 vs 다케다 6000.
  9. 여기서 일부러 카츠요리의 병력을 1로 둔뒤 첫턴에 사격받고 져버리는걸로 나가시노전투를 아예 일어나지 않게 하는는 꼼수도 있다.
  10. 사실 적에 철포대가 있고 아군은 붙어야되는 기마대인지라 유인도 그다지 효율적이진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