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마 시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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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X맨.. 물론 다리가
풀스윙하다 헛스윙 후 스텝이 꼬인 모습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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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모습.

성명나가시마 시게오(長嶋 茂雄)
생년월일1936년 2월 20일
출생지치바 현 인바 군 우스이 정
학력사쿠라 제1 고등학교(현 사쿠라 고등학교)-릿쿄 대학
투타우투우타
포지션3루수
선수 경력요미우리 자이언츠(1958~1974)
지도자 경력요미우리 자이언츠 플레잉코치(1972~1974)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1975~1980, 1993~2001)
195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신인왕
후지타 모토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와타 다케시
(다이요 웨일스)
196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아키야마 노보루
(다이요 훼일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1963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무라야마 미노루
(한신 타이거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6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1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MVP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호리우치 츠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3년 일본시리즈 MVP
도바시 마사유키
다네모 마사유키
(도에이 플라이어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조 스탠카
(난카이 호크스)
1965년 일본시리즈 MVP
조 스탠카
(난카이 호크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9,70년 일본시리즈 MVP
다카다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에츠구 다미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카와카미 테츠하루(1961~1974)나가시마 시게오(1975~1980)후지타 모토시(1981~1983)
후지타 모토시(1989~1992)나가시마 시게오(1993~2001)하라 타츠노리(2002~2003)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결번
134141634
오 사다하루나가시마 시게오쿠로사와 토시오사와무라 에이지카와카미 테츠하루가네다 마사이치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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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의 前 야구 선수 겸 감독. 팀 동료이자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오 사다하루, 카와카미 테츠하루와 함께 일본 야구의 먼치킨으로 평가되는 인물. 그의 대중적 인기는 놀라울 정도여서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의 등 번호 3번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결번.

여담으로 소년 선데이의 창간호 표지를 장식하였다.

별명은 미스터 베이스볼. 위 별명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전설, 스탠 뮤지얼의 별명이기도 하다. 또는 미스터 자이언츠. 이 별명은 요미우리 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를 기념하는 말이다.

195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데뷔 첫해에 153안타, 29홈런, 92타점으로 타격 3관왕에 오르며 신인왕을 수상.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3루 수비는 발군이었고, 1974년까지 타격왕 6회, 홈런왕 2회, 타점왕 5회, 베스트 나인(한국으로 따지면 골든글러브) 17회를 수상했다. 베스트 나인 17회도 대단한 기록이지만, 타격왕 6회는 충격과 공포다. 한국에서 타격의 신으로 통하는 장효조와 양준혁이 4회, 이대호가 3회인 것에 비교하면 대단한 기록. 그러나 장훈이 7회, 특히 이치로가 7년 연속 타격왕을 달성하면서 위치가 미묘해졌다. (물론 장훈과 이치로는 홈런왕은 한 번도 없다.)

2 선수 시절

대학 졸업 후 대학 동료이자 "언더핸드 투수"로 유명한 스기우라 타다시와 당초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나가시마 혼자만 요미우리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릿쿄 대학의 합숙소 식당에서 스기우라의 난카이 입단 제의에 거절했다는 것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이후 스기우라는 그대로 난카이에 입단하면서 나가시마는 시범 경기 도중 난카이의 감독인 츠루오카 카즈토에게 직접 찾아가 난카이 입단을 거부한 것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으며, 이에 대해 츠루오카 감독은 "간토 출신인 사람은 간토 지방의 연고지가 있는 팀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 라고 웃으며 쿨하게 나가시마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대학 졸업한 해인 1957년 11월 20일부로 요미우리에 전격으로 입단하면서 등번호는 치바 시게루가 달았던 3번으로 배정을 받았고, 계약금은 당시 최고 금액이었던 1,800만엔이었다.

도쿄 6대학 리그에서의 맹활약했던 것을 발판 삼아 입단 당시부터 골든 보이(ゴールデンボーイ), 또는 허리케인(ハリケーン)이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등 많은 기대를 받았다. 1958년 4월 5일, 개막전인 고쿠테츠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3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개막전 데뷔를 완수하였지만 고쿠테쓰의 에이스 투수인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2] 다음날의 경기에서도 역시 상대 투수였던 가네다에게 삼진을 당했다. 그러나 2일 후인 4월 7일 고쿠테쓰전에서 첫 안타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4월 10일의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첫 홈런을 기록하여 본래의 힘을 발휘했다. 시즌 도중부터 현역 시절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대신하는 4번 타자가 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9일에 행해진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신인 신기록(당시)이 되는 28호 홈런을 때렸지만, 1루 베이스를 실수로 밟지 않은 바람에 결국 홈런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당시 기록은 투수 땅볼이었음). 만약 1루 베이스를 밟았다면 신인으로서의「트리플 스리(타율 3할, 홈런 30개, 30 도루)」의 기록이 달성될 수 있었다. 덧붙여 나가시마는 다음 9월 20일에 있은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28호 홈런을 기록하여 신인 신기록을 달성했다(현재의 신인 기록은 1959년의 쿠와다 다케시와 1986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각각 기록한 31개 홈런).

이로써 데뷔 첫 해인 1958년 시즌의 타격 성적은 홈런 29개, 92타점, 3할 5리의 타율과 153안타였다. 타격왕 타이틀 자리를 놓고 오사카 타이거스의 다미야 겐지로와 경쟁을 하였지만, 다미야가 시즌 종반에 결장하는 동안 전 경기 출장을 계속하던 나가시마는 타율이 떨어지면서 최종적으로 타격 2위인 3할 5리에 그쳤다. 그러나 나가시마는 시즌 최다 안타를 기록하는 한편 도루 부문에서도 리그 2위인 37개를 기록하여 신인왕 타이틀을 석권했다.

1962년에는 팀 내 절친한 사이이자 동고동락을 하며 지내온 오 사다하루가 홈런왕과 타점왕 등 연거푸 타이틀을 기록하여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이 된 일명 ON포(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메이저 리그인 뉴욕 양키스의 미키 맨틀로저 매리스가 MM포에 비유되기도 했다. 나가시마는 이 애칭의 표현대로 요미우리의 간판 4번 타자로 맹활약을 했다. 1965년~1973년에는 오 사다하루, 다카다 시게루, 시바타 이사오, 가네다 마사이치, 호리우치 츠네오 등과 함께 팀의 일본 시리즈를 9년 연속 우승(일명 V9) 하는 쾌거를 이루어내 팀의 우승 멤버 중 한 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71년에 통산 6번째의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이듬해인 1972년에 갑작스런 타격 부진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타석수를 늘리는 등 부진을 극복하려고 생각한 카와카미 감독은 나가시마의 타순을 1번으로 하는 등 특단의 대책을 세웠지만 결과적으로 타격 21위인 2할 6푼 6리의 타율과 2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또, 14년간 팀의 감독을 맡은 카와카미의 후계자로서의 기대가 커지면서 코치를 겸임하는 등 현역 은퇴 후의 진로가 정해졌다. 1972년~1973년에는 2년 연속 골든 글러브 상을 수상했고, 프로 선수로서의 나가시마는 타격 뿐만 아니라 3루수로서의 수비도 큰 주목을 받았다.

1974년 10월 12일, 주니치 드래곤즈가 리그 우승을 제패하면서 팀은 10년 연속 리그 우승과 더불어 일본시리즈 진출-우승에 실패했지만 나가시마는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그 후 10월 14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리그 우승팀 주니치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홈런을 기록, 이것이 자신의 현역 생활 마지막 홈런(통산 444호)이었다. 은퇴 기념식에서 "저는 오늘 은퇴하지만 우리 자이언츠는 영원히 불멸입니다!(私は今日引退をいたしますがわが巨人軍は永久に不滅です)"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 대졸 출신으로서의 통산 2471안타는 일본 최다 기록을 수립해 개인 통산 2186경기 출장, 2471안타, 444홈런, 1522타점, 타율 3할 5리의 통산 성적을 기록해 선수 생활을 은퇴하여 가와카미 감독의 사임으로 차기 감독으로 취임했다. 선수 시절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MVP)를 5차례 석권한 것을 포함해 1959년~1961년에는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인 3년 연속 타격왕에 등극하는 위업을 달성, 일본 시리즈 MVP를 일본 프로 야구 사상 4차례를 석권하는 등 요미우리의 대표적인 간판 타자로서의 숱한 대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3 은퇴 이후

이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을 두 차례에 걸쳐 지냈고 5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뒤 2001년 용퇴했다. 이 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다가 2004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야구계를 떠났다.

다만 1970년대의 1기 감독 시절 땐 그 V9으로 대표되는 자이언츠의 전성기에 비하면 그닥 좋다곤 볼 수 없는 성적을 기록했다. 각각 6-1-1-2-5-3등을 찍었는데 취임 첫해인 1975년의 리그 꼴찌는(그것도 창단이래 최초였다!) 그야말로 나가시마에겐 빼도박도 못하는 흑역사.[3][4]

그래도 다음해와 다다음해엔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문제는 일본시리즈에서 과거 V9 시절 5차례나(67~69, 71~72) 일본시리즈 우승의 제물로 삼았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2년 연속으로 깨지며 역관광당한 것(...) 그 뒤 한번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고, 거기다가 지휘력에 관한 논란과 여러 구설수까지 나오게 되며 결국 나가시마는 사임(이라지만... 사실상 해임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하게 된다.

그 뒤 해설가 등으로 일하다가[5] 1993년 다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었다. 그 뒤 사임하는 2001년까지 리그 3-1-3-1-4-3-2-1-2위[6]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1997년을 제외한 나머지 연도 때 팀을 전부 A클래스로 올려놨다. 거기다 1994년, 2000년엔 1기 감독 시절 이루지 못한 일본시리즈 우승도 했다.[7][8][9]

1975~1980 1기 감독 시절에는 등번호로 90번,[10] 1993년부터의 2기 감독 시절에는 자신의 현역 시절 영구결번 3번이 두 개 들어간 33번을 사용했다. 2000년부터는 히로시마에서 강타자 에토 아키라를 영입할 때 그가 히로시마에서 쓰던 33번을 넘겨주고 자신은 현역 시절의 3번을 사용했다. 스프링 캠프에서 현역 시절과 똑같은 3번이 박힌 유니폼을 점퍼 속에 최대한 숨기다가 3번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는 여론이 고조될 때 '짠~' 하고 공개를 해서 당시 전 일본이 장안의 화제였다. 나가시마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올드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감격 두 배의 순간. [11]

2001년까지 감독생활 후 은퇴함과 동시에 종신 명예 감독으로 승진했고, 수석코치로 후계자 수업을 받은 하라 타츠노리가 나가시마로부터 감독을 물려받아 2002년부터 2003년, 2006년부터 2015년까지 감독을 맡았다.[12] 2016년 시즌부터는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교진군의 감독을 맡게 되었고 나가시마 1기 시절을 연상시키는 불안한 경기운영으로 팀을 전투력 측정기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2013년, 제자인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일본 최대의 영예인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실명으로 타이거 마스크 II세에 등장한 적이 있다. 어? 또한 사무라이 자이언츠에도 가와카미 감독과 왕정치 그리고 가네다 마사이치와 더불어 등장한 적이 있다.

4 트리비아

현역 시절 한신 타이거즈에이스 무라야마 미노루 와는 불꽃튀는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다. 나가시마는 무라야마를 상대로 통산 302타수 85안타, 타율 0.281, 21홈런, 39삼진을 기록했는데, 무라야마 에게 프로 통산 1500 탈삼진(1966년 6월 8일), 2000 탈삼진(1969년 8월 1일)을 헌납하기도 했다(...). 사실 이 라이벌 관계는 무라야마가 고교 졸업 후 릿쿄 대학이 자신의 영입을 거부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것을 릿쿄대의 스타인 나가시마 에게 발산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정작 나가시마는 당초 무라야마 에게 아무런 해코지를 한 적이 없었으니... 이뭐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도 아니고 그러나 나가시마와 무라야마는 인간적으론 서로 호감을 넘어서 존경하는 사이였고, 무라야마는 평소에 나가시마를 언급할 때 언제나 이름에 "상(さん)"을 붙이며 예우 하였으며, 나가시마 또한 무라야마에 대해 "그는 나에게 한번도 빈볼이나 위협구를 던진 적이 없다. 무조건 정면 승부였다" 라면서 대놓고 그의 인간성을 칭찬하길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8년 8월 22일, 무라야마가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나가시마는 원정 경기 중임에도 먼 길을 마다않고 빈소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애도한 바 있다.

요미우리뿐만 아니라 프로야구계에 큰형님격이다 보니 무슨 고민이 생기면 나가시마에게 먼저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선수들 부터 코칭스테프까지 물론 나가시마 하는말이 거의 맞는 경우가 많다.

야구 선수 외적으로도 독특한 캐릭터성으로 유명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건망증과 기상천외한 언어 생활. 건장한 체격,남자다운 외모와는 달리 하이톤의 목소리로 여자같이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것 자체도 웃긴데, 말의 내용도 정체불명의 의성어와 의태어, 상황에 맞지 않는 외국어의 남용, 앞뒤 안 맞는 문장들로 범벅되었기 때문에 그의 언어는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이용되곤 했다. 그의 기행들을 몇개 살펴 보면...

1. 비싼 돈 주고 BMW 승용차를 구입했지만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고 '핸들이 무거운데?'라고 생각하며 달리다 엔진에 불이 붙어 열흘도 안 돼 폐차!

2.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하는데 자기 집을 몰라서 당황한 나머지 공중전화로 자기 집에 걸어 가정부에게 말했다. "저희 집이 어디였죠?" 그나마 자기 집 전화번호는 기억하고 있군

3. 후배에게 만 엔짜리를 주고 음료수를 사오라고 하고, 후배가 음료수를 사오고 거스름돈을 주자 놀란 눈으로 물어보며 하는 말. "어? 잔돈이 있었어? 내가 천엔짜리 주지 않았던가?"

4. 팬과의 대화를 하다가 한 열혈 팬이 '저는 나가시마 선수와 생일이 똑같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생일이 몇월 며칠이신데요?'

5. 경기 중 타임을 요청하고 '대타 고토!'라고 외쳤지만, 고토는 이미 루상에 나와 있는 주자였다.

6. 04 아테네 올림픽 예선에서 한국 대표팀과, 일본 대표팀을 헷갈려 일본 감독의 신분으로 한국 대표팀의 타격을 지도. 팀을 혼동해서 한국 팀을 가르쳤다는 건 우스갯소리이고 원래 나가시마가 자기 팀이건 다른 팀이건 타격지도 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타격지도시엔 매우 열성적으로 가르치지만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써 가며 가르치기 때문에 지도받는 타자는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7. 불펜에서 투수에게 몸을 풀라고 하고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투수교체를 하지 않아, 불펜에 있는 투수는 주구장창 연습볼만 던지다 어깨에 과부하가 걸려 실신. 나가시마는 그제서야 자기가 투수교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됨.

8. 투수에게 "포크야 포크!"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름. 당연히 홈런 맞음. 홈런 맞은 후엔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후일담이(..)

9. 번트하는 흉내를 내며 "대타! 우에다!" 당연히 실패. 나가시마는 경악, "사인이 읽히고 있는 건가!"

10. 대타를 내세우면서 "번트! 도이!"라고 외침.

11. 타격 지도에 관한 지론: "공이 뷰우츠 하고 날아오면 바싱 하고 친다." 무슨 뜻일까(...)

12. 아테네 올림픽 감독 중 일본 팀이 위기에 처하자 투수 교체를 시도. 누가 나갈까 코치들에게 물어보며 덕아웃을 둘러보던 중 오노 유타카가 눈에 띄자 "음, 오노, 오노 나가라!"고 외침. 그런데 오노 유타카는 대표팀의 투수코치였다. 뭐지 이건...

13. 12번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 등판 지시를 받은 오노 코치는 당연히 "감독님, 전 던질 수 없습니다."라 대답. 이를 들은 나가시마는 "에, 오노 (웜업 아직) 되지 않은 거냐?" 라고 대답해 버렸다... 간신히 정줄을 잡고 있던 오노가 다시 "미스터(실제로 이렇게 불렀다. 위의 미스터 베이스볼의 줄임말), 저는 코치라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가시마 왈 "코치는 못 던지는 거야??" 오노 유타카 의문의 플레잉코치 선임

14. 요미우리의 에이스 마키하라 히로미[13]가 1994년 5월 18일, 후쿠오카 돔에서[14] 열린 対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에서 퍼펙트 행진을 벌이자 선수들을 불러서 "마키하라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퍼펙트 얘기는 하지 말자."고 선언. 그런데 나가시마는 마키하라까지 불러서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15].

15. 대학교에서 영어 시험을 보는데 "I live in Tokyo(나는 도쿄에 살고 있다.)"를 과거형으로 바꾸는 문제가 있었다. 나가시마가 쓴 답은 "I live in Edo(나는 에도에 살고 있다.)[16]

16. 경기장에 아들 나가시마 카즈시게를 데리고 갔는데, 집에 와 보니 아내가 카즈시게는 어딨어요? 라고 물었다. 즉 아들을 데려온 것을 잊어먹고 경기장에 두고 온 것!(...) 가 보니 아들은 다행히 심판실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후문.

17. 매일 가던 사우나를 아침 8시에 감. 참고로 그 사우나의 개점시간은 오전 11시. 근데 일단 들어가긴 한듯 하다(...)

18. 사우나 가서 샤워하는데 거품 씻는 걸 잊고 그대로 욕탕에 들어갔다. 당연히 욕탕은 거품범벅.

19. 1기 감독 시절 원정경기를 하러 우에노역에 차를 타고 갔는데, 차 시동을 끄지도 않고 내려서 그대로 가버렸다!!! 거기다가 집에 올때도 차를 타지 않고 돌아왔다!!(...) 근데 집에 돌아오고 나서 나가시마는 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근데 나가시마는 "내 차 없는데..?" 라고 아내에게 말하고.. 아내가 나가시마가 차를 끌고 갔다고 일깨워주자 나가시마는 "증말?" 이라 하며 의아해했다는 후문. 아니 이 양반, 아니 거인이(...)

20. 여러 의성어, 외래어를 남발하는 걸로 유명했지만, 그 중 유명한 건 하나(ひとつ)[17]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남발한 걸로 유명하다(...) 나가시마의 말의 대부분엔 무조건 들어가 있었을 정도. 덕분에 질문 시간 때 어떤 꼬마에게 "그거 말버릇이냐" 며 일침을 당했다(...) 그리고 나가시마는 "제 흉내를 내는 분이 계시네요. 그 분의 하나의(ひとつの)"라고 화답(?)했고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훈훈한(?) 후문.

그 외 다양한 일화는 이곳을 참조.

이제 곧 여든을 바라보는데 치매 생기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음반 레코딩에 참여한 적이 있다. 1993년에 발매된 ZYYG, REV, ZARD&WANDS의 싱글 果てしない夢を에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것. 후반부의 후렴구를 반 소절 정도 부른 게 전부지만 임팩트는 강렬하다(...) 싱글 앞표지 구석에도 조그맣게 사진이 실렸는데, 레코딩 중에 찍었는지 마이크 앞에서 헤드폰도 착실히 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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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나가시마 카즈시게(長嶋一茂)도 야구선수였다. 릿쿄대를 졸업하고 1987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지명되었으나 영 좋지 않은 컨택능력과 불성실한 훈련태도로 노무라 카츠야 감독에게 찍혀[18] 1993년 아버지가 감독으로 다시 부임한 요미우리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요미우리에서도 활약이 미미했고 1996년 수비 코치였던 故 도이 쇼죠[19]에게 폭언을 하는 등 아버지 이름에 먹칠만 하다가 결국 1996년 방출, 그대로 은퇴했다. 은퇴 후엔 야구평론가 및 배우로 활동 중이다.

차남인 마사오키는 환경문제 연구가, 딸인 미나는 스포츠 캐스터를 맡고 있다.
  1. 굉장히 유명한 사진으로, 이 사진을 모티브로 한 스태츄도 발매된 바 있다. 파일:Attachment/nagashima.jpg모자는 뭐지
  2. 가네다 마사이치는 귀화한 재일교포 선수인데, 당시 언론에서 '가네다도 나가시마에게는 상대가 안 될 것'이라며 나가시마를 띄워준 데 열받아서 '그런 애송이한테 당하면 이 가네다의 이름이 운다. 전 타석 삼진으로 때려잡아 프로의 매운 맛을 보여 주겠다.'라고 말했고... 그의 호언 그대로 그대로 나가시마는 자신의 프로 데뷔전을 4연타석 삼진으로 즈려밟혔다. 가네다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직구만으로 나가시마를 상대해주겠다고 해 놓고 경기에선 커브로 삼진을 낚는 약간의 꼼수를 부리기는 했다. Welcome to NPB
  3. 이게 어느정도나면 1975년 말 일본 언론사들이 꼽은 10대 뉴스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셨다. 사이공 함락, 킬링필드의 시작, 지명타자 제도 도입, 한큐 브레이브스일본시리즈 V1, 히로시마 도요 카프센트럴리그 V1를 모두 묻어버린 나가시마의 위엄.
  4. 굳이 옹호를 해주자면 이전 해에 유구치 사건 때문에 팀 분위기가 망가졌기 때문에 한 해로 수습하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5. 이 시기에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세이부 라이온즈, 야쿠르트 스왈로즈, 치바 롯데 마린즈간토 지역 구단의 감독직 제의를 한 차례씩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6. 굵은 글씨 1은 일본시리즈 우승년도의 성적.
  7. 1994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주니치 드래곤즈와 리그 우승을 걸고 치룬 10.8 결전이 유명하다.
  8. 특히 2000년 일본시리즈 우승은 오 사다하루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4승2패로 무찌르고 달성했는데, 이 일본시리즈는 나가시마와 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전에서 감독으로 맞붙은 것으로(교류전은 2005년부터 도입되었고, 나가시마는 2001년 은퇴) 일본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일명 ON 시리즈.
  9. 그러나 1996년엔 스즈키 이치로, 다구치 소, 히라이 마사후미 등을 필두로 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4승1패로 깨지며 우승 실패. 참고로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바로 한큐 브레이브스가 오릭스에게 팔린 뒤 바뀐 이름.어째 한큐-오릭스만 만나면 탈탈 털린다
  10. 현역 때 3번을 단 3번 타자 3루수로서 이 숫자를 모두 더하고 0을 붙인 것으로 아들인 나가시마 가즈시게의 아이디어로 달았다고 한다.
  11. 하지만 안티 거인 팬들로부터는 스프링 캠프에서 선수들의 모습은 안 전하고 매일같이 "오늘은 벗을 것인가 아닐 것인가"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미디어들을 겨냥하여 "벗나 안 벗나가 뉴스 거리라니 무슨 포르노 배우냐?(...)"라면서 비아냥 대기도 했다. 하기사, 그 미스터 베이스볼이라 해도 저렇게까지 지나치게 주목 받는 건 타팀 팬들이 싫어하겠지
  12. 2003년 물러난 후, 호리우치 츠네오가 2년간 감독을 맡으면서 교진을 밑바닥으로 몰았고, 호리우치가 물러난짤린 2006년부터 다시 감독을 맡았다.
  13. 1980년대의 교진군의 에이스이자, 한신 킬러이기도 했다. 1985년 한신 클린업 트리오인 랜디 바스-카케후 마사유키-오카다 아키노부에게 백스크린 삼연발을 맞은 투수이기도 하다.
  14. 남의 홈구장에서 경기하는 게 이상하겠지만, NPB는 가끔씩 다른 팀 홈구장에서 홈경기를 갖기도 한다.
  15. 다행히, 마키하라는 그 날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퍼펙트 게임 기록이 현재 일본 프로야구 마지막 퍼펙트 게임 기록이다.
  16. live의 과거형인 lived를 써야 하는데, 도쿄의 과거형인 에도를 썼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I live in Korea를 I live in Joseon으로 쓴 셈
  17. 발음은 히토츠
  18. 노무라가 라쿠텐 감독 퇴임 후인 2011년 자신의 감독 시절 현역이던 선수들 사진을 보고 누군지 맞추는 TV프로에 나온 적 있는데, 이때 나온 선수 중에 카즈시게가 나오자 대놓고 야쿠르트의 짐 이라고 깠다(...) 심지어 다른 선수들은 다 이름 정도만 부르는 정도였는데 나가시마 카즈시게는 "슈퍼스타의 아들 나가시마 카즈시게", "아버지도 자길 싫어하니까 집에 가서 내 험담 실컷 했을 걸" 이라고 강조할 정도(...) 이쯤이면 찍혀도 단단히 찍힌듯.
  19. 土井正三. 선수 시절엔 이적없이 요미우리에만 활동했고 은퇴 후 요미우리의 수비주루 코치를 맡았으나 요미우리 감독 자리엔 오르지 못하고 1991~1993 시즌에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감독을 역임했다.(근데 이때 스즈키 이치로의 특유의 타법을 맘에 안들어해 그를 후임감독이 부임할 때까지 계속 2군에만 처박히게 했다.. 지금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병크라고밖엔..) 오릭스 퇴임 후 다시 요미우리에서 1996~1998년까지 코치를 역임. 2009년 9월 25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