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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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역대 국왕
루이 16세 (루이 17세[1])나폴레옹 1세루이 18세
프랑스의 역대 국왕
루이 18세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2세
프랑스 제1제국의 역대 황제
프랑스 공화국나폴레옹 1세프랑스 왕국(제정 폐지)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앵그르, 1806년
이름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생몰년도1769년 8월 15일 ~ 1821년 5월 5일 (51세)
재위기간1차1804년 5월 18일 ~ 1814년 4월 11일 (9년 328일)
이탈리아의 왕1805년 3월 17일 ~ 1814년 4월 11일 (9년 25일)
2차1815년 3월 20일 ~ 1815년 6월 22일 (94일)
대관식프랑스황제1804년 12월 2일
이탈리아의 왕1805년 5월 26일
장례식1840년 12월

전쟁 황제

유럽을 지배한 프랑스의 꼬마 부사관.

현대전에까지 영향을 끼친, 인류 역사상 손꼽히는 군사전략가.[2]

"역대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를 따질 때 반드시 등장하는 불세출의 군사적 천재.

1 개요

당시 육군의 모든 부분을 전반적으로 선진화시켜 프랑스 육군을 전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주역. 코르시카 출신의 하급귀족으로 시작해 당대 최강대국들의 모임인 유럽을 석권하고 프랑스의 황제가 된 전설 그 자체. 프랑스 혁명기에 등장하여 일약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된 프랑스 제국황제, 군인. 보통은 천재적인 군사전략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덤으로 서양인들 중 성이 아닌 이름이 우선시 되는 드문 인물

19세기 유럽의 외교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이런 인간이 다시 튀어나와 유럽 전체를 다시 삼키는 걸 어떻게 방지하는가?"라는 질문 하나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영향이 컸던 인물이다.

"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 그 절대정신을 - 나는 보았다." - 게오르그 헤겔
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자주 비교되긴 하지만, 그러한 비교는 허상에 불과하다. 히틀러는 12년간 권력을 행사한 뒤 군대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독일에 해골과 쓰레기만 산더미처럼 남겼다. 반면 나폴레옹은 단 한 번도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프랑스에 남긴 행정체제와 시민개혁만으로도 여전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의 하나로 평가될 것이다.” - 영국의 역사학자 앨리스테어 혼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보나파르트(Bonaparte franchissant le Grand-Saint-Bernard),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3] 1801년
나폴레옹과 함께 전설이 된 그림. 흔히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4]이라고 부른다. 멋있다 그림에는 멋있어 보이라고 백마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에는 지구력이 뛰어난 노새사용했다고 한다. 멋없다 작게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루브르[5] 말메종과 부아프레오 성에 있는 원본 그림은 그야말로 신고전주의의 극한이라 칭할 만하며, 그야말로 크기와 포스 모든 면에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위와 오른쪽의 초상화는 이상화된 나폴레옹의 모습과 동시에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들은 선전을 위해 미남 대역을 고용해 그려진 것들이 대다수라고도 하는데,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의 외모는 그린 화가에 관계없이 매우 일관된 편[6]이기 때문에 대역들은 얼굴보다는 포즈를 위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나폴레옹은 수려한 미남이었다. 특히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기 이전의 초상화들만 봐도 나폴레옹은 젊었을 때는 준수한 미남이었다. 나이 들어서 체중이 좀 늘어난 모습도 있지만 이러한 그림은 적대국인 영국 등에 의해 다소 왜곡된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는 굉장한 미소년이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몇 개를 제외하면 대부분 거의 같은 얼굴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다비드가 그린 얼굴이 본인과 닮은 편이라고 한다.

참고로 우측의 초상화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별의 별 고생을 다하고 막 프랑스로 돌아온 러시아 원정 후 나폴레옹을 상상해 그린 상상화다. 당장 러시아에서 손실할 병력을 복구하고 민심을 달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야 할 판국에 태평하게 초상화를 그리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저렇게 찌푸린 얼굴을 초상화로 그려달라고 할 사람이 있을까. ???, ???, ??? : 그럼 우린 뭐냐...

2 생애

2.1 유년기

본명은 나폴레오네 부오나파르테(Napoleone Buonaparte). '나폴레오네'로 쓰든 프랑스어인 나폴레옹으로 쓰든, 이름의 뜻은 '황야의 사자'로 간지폭풍이 느껴지는 이름이다.[7] 한문으로는 음차하여 나팔륜(拿破崙)이라고 표기한다. 나폴레옹이 태어난 코르시카는 1768년까지 제노바의 소유였으며 나폴레옹의 집안도 토스카나 출신의 이탈리아 혈통이다. 코르시카 독립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여기에 참여했던 나폴레옹의 가문은 프랑스로 전향해 보나파르트家가 되었다.

출세하려는 하급 귀족이 대체로 그렇듯이 나폴레옹도 유년 사관학교에 보내져 자랐다. 물론 코르시카에서는 나폴레옹의 집안도 명문가지만, 이 시기 사관학교는 프랑스 혁명 이전 대귀족 자제들의 경연장이었다. 당연하게도 사관학교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코르시카 사투리를 쓰는 시골뜨기로 놀림을 받기도 했다. 동기들에게도 죄다 무시당했는데 유일하게 동기생에서 브리엔이라는 학생이 그와 친하게 지냈고, 이 인연으로 브리엔은 밑에서도 서술하듯이 나폴레옹의 부관이 된다. 이렇듯 이 시절, 괴롭힘도 당하고 힘들었지만 못생겼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잘 먹지 못해서 창백하고 야위긴 했지만(...) 나폴레옹의 통령 시절이나 그 외 젊은 시절의 초상화들을 보면 나름대로 잘 생겼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반항심으로 더욱 독하고 끈기 있게 자라난 듯하다.

이 없어서 학교 앞에서 파는 사과 한 조각 사 먹기 힘들었는데, 사과 파는 아줌마가 오죽 불쌍했으면 나폴레옹이 지나갈 때마다 공짜로 사과를 하나씩 줬다고 한다. 훗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을 때 조용히 돌아와 아줌마에게 그 동안의 감사의 표시로 금화를 가득 전달해주고 사과 파는 아줌마는 금화에 새겨져 있는 황제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왠지 한신의 일화를 오마쥬한 것 같다면 기분 탓이다. 이원복의 만화 사랑의 학교에 등장해서 유명해진 내용인데, 해외자료나 웹사이트에서는 도통 이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나폴레옹이 국내에서만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이 정도 인물의 에피소드라면 해외에서도 알려져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예를 들면, 사랑의 학교에서 나온 크리스마스 휴전 같은 경우는 외국에도 알려져 있다.) 그러니 나폴레옹과 사과 이야기는 국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아래에도 나오지만, 프랑스 본토에서도 귀족 자제들만 모인 사관학교 내에서야 촌동네 섬자락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좀 없어 보였던 거지, 원래 부오나파르테 집안은 코르시카에서는 잘나가는 명문가 집안이다. 사과장수 아줌마가 무슨 북유럽 조세제도마냥 상류층이라서 돈을 배로 받았을 리도 없고, 사과 한 조각도 못 사먹을 만큼 나폴레옹은 가난하지 않았다(...).

또한 하급 장교 시절 말 많고 월세를 독촉하던 하숙집 여주인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는데, 황제가 되어서 찾아온 적이 있다고 한다. 뒤끝 장난 아니네. 뒤끝황제 나폴레옹 이때도 하숙집 주인은 나폴레옹을 몰라봤다고 한다.

군유년학교 재학 당시, 나폴레옹은 시골뜨기, 촌놈으로 대귀족의 자녀들에게 왕따 당하고 있었다.[8] 한번은 폭설이 내렸고, 유년학교 재학생들은 두 편으로 갈려 눈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나폴레옹의 편은 몰리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자기 편이 위기에 몰리자 스스로 지휘관을 자처하여 "지금 상황이 긴박하니 내가 우리 편을 지휘하겠다.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눈덩이를 뭉치기만 하고, 나머지는 눈덩이를 던지기만 하라. 내가 가리키는 쪽을 집중적으로 공격해라" 나폴레옹은 선택과 집중을 이용하여 적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부터 유년학교에서 나폴레옹의 이름은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위 일화들의 진위는 사실 확인하기 어렵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나폴레옹은 지배계급 내의 비주류로서 앙시앵 레짐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분적으로는 비주류였을지언정 나폴레옹의 학업성적은 특출하게 우수했다. 그런데 기준이 모호하지만 졸업석차로 보면 낮은 편이었다. 58명 중 42등.[9] 오히려 지금도 그렇지만 포병은 수학과 물리 지식이 상당히 요구되기 때문에, 단순한 용맹보다는 두뇌가 필요한 병과였고, 나폴레옹이 여기 배치된 것은 그 머리를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10] 또한 초급장교 시절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하며, 쥐꼬리만 한 월급의 상당 부분도 책을 사는 걸로 탕진했다고 한다. 그가 단순히 군사적 재능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후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샤를이 부관으로 재직하면서 잘 알던 코르시카 독립운동 거물인 파올리(1725~1807)와 갈등을 빚게된다. 독립운동이 무력으로 프랑스에게 막히자 영국으로 망명한 파올리는 아버지 샤를이 요절한 뒤, 그는 프랑스를 증오하여 친영파로써 코르시카에 돌아왔다. 그러니 프랑스 총독과 사이좋게 지내던 전 부관 샤를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꼈고 보나파르트 가를 박대하여 할 수 없이 나폴레옹 일가는 완전히 코르시카를 떠나 프랑스로 가게 된다. 나중에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파올리에 대하여 이 앙금을 잊지않아 코르시카로 쳐들어갔고 어제 애송이로 무시하던 나폴레옹이 오늘 당당하게 프랑스 황제가 되어 온 것에 파올리는 데꿀멍해야했다. 게다가 코르시카 여론도 나폴레옹에 대하여 감탄하고 이제 프랑스 놈들이 우리 코르시카 무시못하겠다라며 기뻐하니 파올리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결국 파올리는 믿었던 영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죽는다. 그래도 코르시카에서는 코르시카를 생각한 위인이었던 만큼, 파올리도 흉상이나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위인으로 대우받고 있다.

2.2 군인 복무


16세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으며, 프랑스군 포병 대위로 근무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터졌다.

Bonaparte_in_the_18_brumaire.jpg

이 그림은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진행하다가 500인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하던 때를 그린 것이다. (이때 나폴레옹을 호위한 저 두 쌍둥이척탄병은 조세핀에게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오른쪽 척탄병이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 굳어있다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유럽의 여러 군주제 국가들은 이를 두려워해서 대(對)프랑스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프랑스는 홀로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의 군사강국과 맞서게 되었다. 영국군을 등에 업은 왕당파는 항구도시인 툴롱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나폴레옹은 여기서 포병을 집중적으로 운용하는 전법으로 영국군을 몰아내고 반란군을 진압했다.

뭔가 느닷없는 이 데뷔는 기존의 장군들이 왕당파로 몰려 망명하거나 처형당해 많은 장군 보직이 공석이 된 것도 한몫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나폴레옹이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는 것이다.

툴롱 포위전 이전의 나폴레옹은 장군은 커녕 부대 참모도 아니었고, 보케르라는 작은 도시에서 보급대를 이끄는 하급 지휘관이었을 뿐이었다. 이 때 나폴레옹은 '보케르에서의 저녁식사(Le Souper de Beaucaire)'라는 짧은 정치 팜플렛을 작성했다.[11] '왕당파와 공화파가 서로 사상논쟁을 하다가 결국 공화파가 이긴다'자폭라는 내용의 이 팜플렛을 나폴레옹이 만든 이유가 혁명에 대한 지지 때문인지, 출세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12] 하지만 이 팜플렛을 보고 감탄한 인물이 등장했으니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1763~1794), 즉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이다. 이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가 나폴레옹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어준다. 나폴레옹이 툴롱포위전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의 빽 덕분이었다.

툴롱포위전에 참여한 이후의 나폴레옹은 또다시 가까운 군대에서의 빽을 만드는데, 역시 코르시카 출신으로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던 살리세티(Antoine Christophe Saliceti)였다. 살리세티는 툴롱포위전의 총사령관 카르토에게 배속된 정치장교였고, 당시 부대의 포병지휘관이 부상당하자 그 자리에 나폴레옹을 천거해서 낙하산으로 꽂아준다. 이후 툴롱 포위전에서 나폴레옹은 사령관 카르토와 공적을 다투었고, 결국 정치적 빽을 동원해서 카르토가 파리로 소환되게 만들었다. 이후 사령관은 한번 더 바뀌고, 3번째 사령관이 임명되었을 때, 나폴레옹은 툴롱 포위전을 사실상 지휘하게 된다. 이후는 나폴레옹의 전략이 맞아들어가서 툴롱을 점령하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왕당파를 학살하였고, 나폴레옹은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오귀스틴은 파리 수비 사령관을 제안했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거절하고 이탈리아 담당 포병 사령관을 맡았다. 첫번째 사망플래그 분쇄

그런데 여기서 정치적 대격변이 벌어지는데,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서 국민공회가 몰락한 것이다. 오귀스탱 드 로베스피에르는 형인 막시밀리안, 동료인 생쥐스트 같은 이들과 단두대로 갔고, 나폴레옹은 자기가 자코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처지로 몰렸다. 이때 한발 더 빠르게 움직였던 살리세티는 나폴레옹을 자코뱅주의 혐의로 감옥으로 집어넣었다. 이때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나폴레옹에게 탈옥을 권유했는데, 나폴레옹은 좀 더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투옥된지 2주 만에 살리세티에 의해서 풀려났다. 두번째 사망플래그 분쇄 하지만 목숨만 건진 상황이었고, 이탈리아 담당 군으로 돌아갔지만 단지 부대참모로 왕따를 당하는 처지였다.

자코뱅 문제는 이후에도 꾸준히 남아서 코르시카 원정군 참여 요청을 해봤으나 거절당했고, 방데반란 진압에 참여하라는 정부의 요청은 나폴레옹이 거절[13]하면서 나폴레옹은 직위해제 당한다. 이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은 인맥을 만드는데, 툴롱포위전 이후 왕당파를 학살했던 대표적인 장군 중 하나로 당시 실권자 이면서 조세핀의 정부였던 바라스였다.[14]

이런 나폴레옹을 복권 시킨 것이 바로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이다.

1795년 9월 아르투아 백작이 영국군과 망명귀족의 병력을 포함하여 약 3000여 명을 이끌고 프랑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친카톨릭-반혁명 왕당파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왕당파 시위대는 3만까지 그 숫자가 불어나게 된다. 이에 당시 중앙정부는 방데 반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고 평가를 한 므뉴(Jean-François, baron de Menou)를 진압사령관으로 임명했으나, 당시 파리의 병력은 5천이었고 므뉴는 이 상황이 어렵다고 본 것인지 원래 왕당파 성향이 있었는지[15] 타협안을 제시하고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정부는 다시 므뉴를 파면 및 구속하고,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라스였다. 나폴레옹은 바라스에 의해서 현장지휘관이 되었고, 므뉴에게 얻은 정보에 착안, 한 기병 장교를 시켜서 파리 외곽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파리로 끌고 오게 된다. 이 기병 장교가 바로 조아생 뮈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끌고온 40문의 대포를 튀르리 궁 인근 교차로에 배치해서 파리 시내에서 포도탄을 쏴대는 강경진압을 시작했다. 이후 왕당파 시위대는 300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해산했고, 나폴레옹은 중장 진급과 동시에 이탈리아 방면군 총사령관이란 직위, 그리고 포도달 장군[16]이라는 멸칭을 동시에 얻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선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당시 왕당파 반군의 병력과 기세가 워낙 드세서 대포라도 쏘지 않는 이상 진압은커녕 혁명정부가 전복될 상황이었다. 나폴레옹이 아니었다면 파리의 혁명정부가 이때 전복되었을거라는 평가가 중평. 그런데 본인이 뒤집었습니다! 그래서 왕정이 재실시 사실 본인이 선수뺏기는게 싫었다 카더라

이후의 내용은 나폴레옹 전쟁 항목에도 정리되어 있다.

2.3 통령 등극


이 전공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쳐부수고, 그 결과 체결된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으로 프랑스는 벨기에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인도에 식민지를 가진 영국을 견제하고자 이집트 원정을 원했고, 혁명정부도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아지자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이를 수락한다. 당시 이집트를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를 쉽사리 격파하며 카이로까지 승승장구하는 와중에, 프랑스 해군이 호레이쇼 넬슨의 영국 해군에게 박살나 퇴로가 끊기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투르크가 이집트 재탈환을 위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요격을 겸해 내친 김에 시리아 원정까지 감행했으나 결실 없이 물러났고, 프랑스 본국이 다시 오스트리아의 위협을 받게 되자 이집트를 탈출해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시에예스와 손잡고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혁명정부를 뒤엎어, 3통령에 의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다. 물론 나폴레옹이 제1 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산악파와 대비되는) 평원파(지롱드)라고 불리는 온건 부르주아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1년마다 쿠데타가 터져 정권이 뒤바뀔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혼란을 종식시켜줄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폴레옹 중심의 새 정부는 곧 인기를 얻었고, 곧이어 종신 통령에 취임했다.누구와 닮은 것 같다[17]

국민 교육 제도의 확립, 훈장 제도의 도입, 프랑스 은행 설립 등이 이 시절의 업적으로 꼽히지만, 본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이었다. 나폴레옹의 원정과 법전의 편찬으로 자유주의가 널리 확산되었다는 평이 국내에서 현재 사용되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렇지만 반 나폴레옹 민족주의도 급속도로 확산되었다(특히 옆 동네[18])[19]

2.4 황제 즉위

대관식 복장을 한 나폴레옹 1세, 프랑수아 제라르, 1805년나폴레옹의 대관식(부분), 자크 루이 다비드, 1807년

그 이후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는 등 여러 차례의 승리를 거두고, 이러한 승리를 바탕으로 루네빌 조약과 아미앵 조약을 통해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의 인기는 크게 높아졌지만, 한편으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속군주의 일원이 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1804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교황에게 대관 받아 나폴레옹 1세에 등극한다. 자유, 평등, 박애권리(박애를 기치로 내걸었다고 하지만 그건 나중에 갖다 붙인 거다. 여기서 말하는 권리는 소유권, 즉 사유재산권을 이야기한다.)를 기치로 내건, 소위 근대 공화정의 출발을 알렸다는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는 좀 허무하지만, 안정적인 정권의 성립을 바라던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804년에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에 관한 국민투표가 있었는데, 찬성이 3,521,675표, 반대가 2,579표였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정으로 바뀐 것을 근거로 삼아서 제정의 성립을 합리화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며 거친 대관식에서 보인 행보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통해 황제가 되려는 군주들은 로마로 건너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이 관을 머리에 씌워줬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자기가 로마에 가서 대관식을 거행한 게 아닌, 교황(즉, 오른쪽 끝의 하얀 옷을 입은 채 앉아 있는 사람)을 직접 파리까지 데려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진행했을 뿐 아니라, 교황이 황제에게 부여해주는 관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을 집어 자신의 머리에 썼다. 위의 오른쪽에 있는 쟈크 루이 다비드의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 왕관을 쓰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그림'이 그 장면.

이 사건은 왕권신수설의 완전한 몰락 즉, 더 이상 신의 권위로 정치를 행사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을 붕괴시켜서 신권 정치를 종식시켰다. 그림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문서를 분리했으니 여기에 가서 읽어보도록 하자.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는 프랑스 혁명이념을 지지하던 이들에게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만민의 평등을 꿈꾸며 일어난 혁명이 곧 한 독재자의 황제즉위를 위한 쿠데타가 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때 느낀 충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베토벤이 그에게 헌정하려 했던 교향곡에 관한 일화이고, 두 번째는 식민지의 독립이었다.

베토벤은 3번 교향곡을 나폴레옹을 위해 작곡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이끌고 스스로를 제1 집정관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나폴레옹을 "가난한 사람들의 영웅"이라 칭했고, "나는 나폴레옹과 같이 독재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출판업자에게 보낸 초본에서, 그 첫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이 교향곡을 정말로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음악가들은 궁정에 소속된 하인이었다. 하지만 베토벤은 스스로를 하인으로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는 자기가 작곡한 곡을 팔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다. 그는 이러한 모든 불합리를 나폴레옹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라고 써져 있는 표지를 찢어버렸다. 표지에 덧붙여진 말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영웅 교향곡은 위대한 사람의 추억을 축복하고자 써졌습니다."

후일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의 웰링턴 공작에게 패배하자, 황제 나폴레옹을 증오하던[20] 베토벤은 웰링턴을 찬양하는 "웰링턴의 승리"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왕 나폴레옹, 안드레아 아피아니[21], 1805

이탈리아 왕국은 나중에 외젠 드 보아르네에게 맡기게 된다.

베토벤도 그랬지만, 나폴레옹은 유럽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희망이었다. 오죽했으면,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수도인 베를린에 입성하는 나폴레옹을 보고, 독일의 대철학자인 헤겔이 "저기 절대정신이 간다."[22]라고 말했을까..? 근데 배신 그래서 헤겔도 같이 흑화

이와는 별개로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은 프랑스 제국의 속국들에 퍼졌다. 당시 나폴레옹 제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스페인, 동북부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역, 크로아티아(일리리아), 아이티 등을 다스렸다.

2.5 대불동맹 격파

그렇다고 해서 유럽의 전제군주들에게 프랑스 혁명의 끝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를 포함한 유럽 군주들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를 새로운 세속군주의 탄생이라기보단 일종의 찬탈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이대로 유럽 대륙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 중심의 체제로 고착되어선 안 된다는 정책적 판단까지 더해져, 결국 3차, 4차 대불(對佛)동맹의 결성 요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나폴레옹은 이들의 저항을 모두 격파했다. 1805년 제3차 대불동맹에 맞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결국 말빨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캐바르고 단번에 승리를 거둔 뒤 라인동맹을 만들었고, 1806년 제4차 대불동맹과의 전쟁에서는 러시아, 스웨덴, 프로이센을 박살내버렸다. 오스트리아를 억누르려고 그 황녀 마리 루이즈를 황후로 삼고, 조세핀과 이혼했다. 이걸로 내부의 적이 생겼을 것이다.
이후에는 폴란드 지역에 바르샤바 대공국을 세우고, 이에 폴란드 왕족의 후예 포니아토프스키는 프랑스의 원수가 되겠다고 나서 스스로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보이겠다고 했다.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에게만은 원수 중에서도 특별원수로 칭하여 그 예우 자체를 장군이 아닌 으로 대해줬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측근 중에 딱 4명에게만 의 예우를 허락했는데, 자신의 형 조제프(나폴리 → 스페인), 절친 조아생 뮈라(나폴리), 베르나도트(스웨덴), 그리고 포니아토프스키(폴란드) 뿐이다. 스웨덴은 프랑스 육군 원쑤원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를 왕위에 앉혀 자신의 영향권에 넣었다(고 믿었으나 나중에 배신 크리). 여기에 덴마크도 동맹에 가담하는 등 대륙을 제패하고 그야말로 위세가 하늘을 찔렀으나, 영국만큼은 어떻게 하지 못했다.

2.6 몰락

자세한 내용은 나폴레옹의 몰락 항목 참조.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에 맞서 프랑스도 급히 해군력을 강화했다. 그 일환으로 스페인 해군을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당시 스페인군은 육군이고 해군이고 머릿수만 채우고 있을 뿐 참담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에스파냐 해군은 영국에게 패배한 적이 있어서 승리는 장담하지 못했다. 따라서 영국 해군에 비해 수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무엇보다도 경험 면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물론 프랑스 해군은 유럽 2위로 유일하게 영국에 맞설 만한 해군이 있었고, 특히 미국 독립전쟁 당시에는 각고의 노력과 개혁 끝에 여러 차례 영국이 큰 낭패를 보도록 했다. 문제는 혁명이 터지면서 왕정 시절의 장교단이 소멸하면서 나왔다.
혁명 초기에는 육군도 개판이었지만, 육군은 어떻게든 머릿수 채우고 주변 국가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유능한 인물이 올라가고 경험을 쌓고 해서 절대왕정시대의 유산과의 조합으로 나폴레옹의 대군단이 될 수 있었지만, 해군은 평소에도 수급이 힘든, 경험 있는 뱃사람이 많아야 하고, 제대로 된 함선도 다수 건조하고 유지해야 하며, 정교한 보급체계까지 있어야 하니, 육군처럼 임기응변으로 능력이 상승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1805년까지는 아직 이전의 강력한 해군이 모습이나마 남아있어서, 영국에서 '프랑스가 상륙하면 어떻게 하나'라고 두려워하던 상황이긴 했지만(...).

결국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에게 해군력을 상당히 상실한 이후 영국 점령은 포기하고 만다. 대신 영국을 고립시키려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렸으나, 영국은 압도적인 해군력과 식민지와의 무역으로 대유럽 무역중지로 인한 피해를 간신히 상쇄시킬 수 있었다. 오히려 이때 러시아스위스(헬베티안 공화국)가 가장 많은 타격을 받았다. 급기야 러시아는 밀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대륙봉쇄령을 강화하기 위해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스페인 왕위를 빼앗아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넘겼지만, 이것이 오히려 스페인 전역에서의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켜[23] 프랑스군은 게릴라와의 싸움에 끝없이 시달리게 된다. 나폴레옹은 최대한 빨리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상대적으로 비옥한 독일과 이탈리아의 평원에서 나폴레옹의 군대가 지금까지 이겨왔던 방식은 험난한 산지로 가득한 스페인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이렇게 발생한 스페인·포르투갈과의 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약 30만 명을 잃는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의 무역에 경제가 좌지우지되던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무시하고 계속 통상에 나서자, 이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1812년 당시로선 유례(類例)없는 61만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스페인 전역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침공함으로써, 동시에 두 개의 전선을 만들어 메우기 힘든 틈이 생겨버린 것이었다.후일 다른 독재자가 교훈을 얻지 못하고 비슷한 짓을 벌여 폭망했다.

이전까지 프랑스에 맞서 수없이 전투를 치렀던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은 청야(淸野)전술을 펼쳐서, 러시아 국토 내부로 프랑스군을 깊숙이 끌어들이며 꾸준히 반격을 가해 차츰 프랑스군의 희생자를 늘렸다.[24] 텅 빈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이후 한 달 동안이나 모스크바에서 차르가 항복해오길 멍하니 기다리고 있다가,(...) 결국 10월 18일에서야 퇴각을 시작, 이후 식량도 없고 보급품도 떨어진 상태로[25] 11월의 추위 속에서 게릴라와 싸우며 수많은 병력을 잃고 말았다. 동시에 러시아군의 반격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고, 이후 베레지나 강을 건너면서 수천 명이 익사하는 등 캐안습의 절정을 보여주며 퇴각한 뒤에 12월에는 파리에서 쿠데타 소식이 전해지자 병사들마저 버리고 근위대 200명만 데리고 도망...40만이 전투&비전투 손실로 희생되고 10만여가 포로로 잡히면서 사실상 위대한 군대는 이름만 남고 몰락한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부대가 개발살난 틈을 타 프랑스를 족치려는 대불동맹이 또다시 결성되었음은 불 보듯 뻔한 일.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스웨덴 등이 동맹을 맺었고,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까지 동맹에 가입한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 동맹에 맞서 나폴레옹은 고작 몇 달 만에 새로운 군대를 기르려 시도했고, 일부 병력은 나폴레옹의 의도대로 성장했다. 초반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전쟁은 피차의 소모전으로 흘러가며 나폴레옹의 입지를 좁혔다. 더군다나 대불동맹군은 워낙 센 나폴레옹 본인과의 교전을 피하고, 다른 장군들을 각개격파하며 프랑스군의 총전력을 약화시져 나갔다(트라헨베르크 작전).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패배를 기점으로, 프랑스 제국은 1814년 1월쯤에는 이미 파리까지 밀리고 있었다. 물론 나폴레옹 본인은 여전해서 갓 징집한 15만 남짓의 병력으로 동맹군의 38만 병력과 맞서며[26] 3만의 기동대로 러시아의 5천 병력을 덮쳐서 전멸시키고 이후 2만 남짓 병력으로 블뤼허가 이끄는 3~4만의 프로이센군을 3차례에 걸쳐 일시적으로 격파하는 위엄을 보여주지만[27] 사방팔방에서 밀려드는 동맹군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2달이 지나고,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부대의 승리 기념 퍼레이드가 파리에서 열릴 정도로 개관광을 당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아직 싸울 생각이었으나, 거기에 동의할 사람이 없었고, 결국 1814년 4월 퇴위를 선언한 나폴레옹은 지중해 이탈리아 반도 근처의 엘바 섬(고향 코르시카와 가깝다.)에 갇히게 된다.

이후 프랑스 혁명 때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1살 아래 동생인 루이 18세가 왕좌에 앉게 되는데[28] 프랑스를 혁명 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평판이 매우 안 좋은 왕이었다. 거기다 혁명으로 쫓겨났던 왕당파들이 귀국해서는 보상을 챙기려드는 통에 프랑스는 어수선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왕당파는 나폴레옹에게 약속했던 연금을 지불하지 않고, 오히려 암살자를 고용해 끊임없이 그를 암살하려 했고, 영국은 이를 조장하거나 방관했다. 게다가 그가 다스리던 엘바 섬은 고향 코르시카와는 다르게 황제 나포레옹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어 모욕적인 언사는 물론 나폴레옹이 내리는 명령도 다 거부하거나 반항하기 일수였다. 그 와중에 차츰 유럽 제국들의 밥그릇 싸움이 심각해지자, 영국은 유리한 패를 가지기 위해 나폴레옹이 탈출하는 것을 방조했고, 그 틈을 타 나폴레옹은 탈출에 성공한다. 이때 당시의 일화들은 "백일천하" 항목 참조.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돌아온 나폴레옹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 연합군을 보냈다. 나폴레옹군은 상당히 선전했지만, 러시아 원정 이후로 잃어버린 것이 너무 컸기에 결국 워털루 전투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연합군이 간신히 이겼다. 나폴레옹이 그렇게 삽질을 많이 했음에도 말이다.

어찌되었든 패배하여 나폴레옹의 백일천하는 끝이 나고, 이후 그는 아메리카급 전열함 노섬벌랜드에 태워져 아프리카 적도 근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두 번째 유배길을 떠난다. 세인트헬레나로 유배지가 결정되었다는 통보에 나폴레옹 본인도 탄식을 금치 못한 모양이다.

세인트헬레나 섬은 대서양 한 가운데 위치한 절해고도라 세인트헬레나 헤라클레스 집게벌레 같은 특이한 생물이 살 정도로 험악한 곳이었고, 평소에도 사람이 편안하게 살기엔 문제가 많은 곳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에서 세인트헬레나총독으로 파견된 허드슨 로(1769~1844/Sir Hudson Lowe)가 인간말종이였다. 찌질한데다 오만한 소인배 허드슨은 초반부터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나폴레옹을 정말 싫어하여[29] 나폴레옹이 거주하던 롱우드 하우스 주변에 감시병을 배치해 가택연금 했으며[30], 병사들로 하여금 황제라는 칭호 대신 장군이라고 부르게 시키는 등광해군?[31] 모욕적인 조치를 취하였고[32], 의사를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고 땔감 공급을 제한하는 등 여러 가지 불합리한 처우를 하였다. 이외에도 본인이 직접 썩은 포도주에 침을 뱉어서 대접했는데 나폴레옹이 이를 마시지 않자 빡쳐서 나폴레옹의 얼굴에 부었다. 나폴레옹이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책을 빼앗아서 나폴레옹의 머리를 세게 내리친 후 그 책을 나폴레옹이 보는 앞에서 갈갈이 찢어버리면서 히히덕거렸다. 더군다나 허드슨 로는 자신의 업무 중 스트레스가 조금만 쌓여도 무조건 나폴레옹에게 찾아가서 손바닥으로 나폴레옹의 뒤통수를 때리는 화풀이를 했다.[33]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영국 내에서도 비판이 있었으며, 특히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상대한 웰링턴 공작은 총독에 대해 "질투심과 시기심에 가득 찬 한심한 인간[34]"이라고 까기도 했다. 참고로,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과 한 소녀와의 이야기를 다룬 벳시와 황제라는 소설이 유명한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소설이다.[35]

나폴레옹은 그렇게 세인트헬레나섬에서 6년간의 여생을 마치고 위장병, 혹은 위암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가 1821년 5월 5일 죽던 순간 최후의 말은

France, armée, tête d'armée, Joséphine.
(프랑스, 군대(육군), 선봉, 조제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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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36]나폴레옹의 관

그리고 그의 유해는 사후 19년만인 1840년 파리 앵발리드(Les Invalides)로 옮겨져 이곳 지하에 안장되었다. 이장 당시의 상황은 영문위키를 참조할 것.

2.7 독살설

영국이 세인트헬레나 섬이 again 엘바 섬이 될까 싶어 비소독살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는데, 남아있는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을 분석해 보면 비소 함유량이 상당히 많다는 이유로 독살설을 지지하는 설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반박하는 설도 만만치 않다. 단적으로 관이나 내장재 등 죽은 다음에도 비소가 축적될 이유는 많다는 이야기다. Cupric Green으로 인해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014년 10월 26일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폴레옹의 심복이었던 몽쏠롱 장군이 자신의 부인 알비느와 나폴레옹이 외도하는 것을 알고는 충격을 받아 몽쏠롱이 나폴레옹을 비소를 탄 와인으로 죽였다는 주장을 다루었다. 당시의 부검과 기록을 검토한 결과 나폴레옹의 사인은 위암으로, 할아버지, 아버지, 세 명의 동생도 위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몽쏠롱 장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난 2000년 몽쏠롱이 그의 아내 알비느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편지의 내용에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나폴레옹을 병자로 만들려고 계획했다는 사실이 적혀있어, 그가 나폴레옹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극적인 삶을 살다 허망하게 죽은 인물이기에 암살설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3 평가

3.1 영웅 또는 전쟁광

현대 프랑스에서는 국가의 영웅이라는 찬사[37]와 나라를 망친 전쟁광이라는 비난, 두 시각이 공존하고 있는 논란의 대상이다.

그래도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봉건주의의 잔재를 종식시키고 근대 유럽의 시작을 알리고 미래를 내다본 인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만든 '나폴레옹 법전'으로, 현재도 대륙법 체계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전까지 프랑스 법률 체계는, 고대로부터 잔존한 로마법의 잔재를 기초로, 지역과 상황에 따라서는 교회법이나 지방의 관습법이 통용되고, 거기에다가 왕이 공표하는 칙령이 뒤섞인 아주 복잡한 구조였다. 단지 복잡할 뿐만 아니라 너무나 방대하고, 지방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기도 해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이걸 전부 다 나폴레옹 법전 한방으로 완전히 갈아엎어버렸다.[38] 또한 이 나폴레옹 법전의 편찬으로 절대왕정의 요람이던 유럽에 시민평등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가문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관료제를 확립하고, 이러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한 그랑제콜 제도를 도입하였으며, 국내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나폴레옹 지적법(Napoleon's Cadastre)을 제정하여 토지측량 및 관리 체제를 확립함으로서 근현대적인 지적측량 및 부동산등기 체제의 효시를 세웠다. 또한 현대 정치체제의 근간인 정교분리 역시 나폴레옹 시대에 비로소 완전히 확립되었다.

군사 면에서도 기동력을 중시하고 국민군의 전투력을 애국심의 고취로 끌어올리는 등 19세기 전쟁의 개념과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지금도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실패하긴 했지만 대륙봉쇄로 물가를 최고점[39]으로 끌어올리는 등의 결과로 당시 최강국으로 성장했던 영국을 얼어붙게 하기도 했다.

그의 몰락을 기회삼아 메테르니히 등의 유럽의 구세력들은 유럽을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로 돌려놓으려고 발악했지만, 나폴레옹의 비전이 실현되고 왕정 체제는 붕괴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폴레옹이 근대 유럽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나폴레옹의 역사적 위치는 영국의 역사학자 칼라일에게 영향을 주어 영웅이 역사를 만들고 이끌어간다는 영웅사관을 창시할 정도였다.

나폴레옹은 백일천하 동안 불리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여 "자유 제국"을 약속했었다. 짧은 지배기간 때문에 사실상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실제로 나폴레옹은 몰락 이후 "내가 그런 헌법 만든다고 시간이나 낭비했다니! 어차피 다시 유럽의 지배자가 되면 전부 없애버릴 의회였는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약속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 황제"라는 하나의 환상을 추가하게 된다. 특히 부르봉 왕조 복고 왕정의 무력함과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려는 퇴행성은 나폴레옹에 대한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켰고, 결국 군국주의민족주의, 자유주의, 혁명과 일인독재가 결합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프랑스 특유의 기묘한 정치사상을 만들게 된다.[40] 그 과실을 나폴레옹이 죽은 이후에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따먹게 되지만, 나폴레옹 3세의 실패로 보나파르티즘도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된다.

혼란스러웠던 프랑스 초기의 공화정이나, 무기력하고 퇴행적인 부르봉 왕조의 복고 왕정과 비교해보면, 나폴레옹 시대는 문제도 많았지만 번영도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번영은 무수한 전쟁을 통해 주위 나라들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며 일구어낸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법전의 완성을 위시하여 여러 선구자적 정책들을 도입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당시 사회의 난맥상은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것들이었다. 결국 정부재정의 문제나 당대 사회의 혼란들을 해결한 것은 그런 선구자적 정책이나 제도 개혁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승리였다. 그 승리가 계속되었을 때는 아무 문제도 없어보였지만, 지속적인 전쟁은 착실히 국력의 소모를 불러왔고,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그는 너무나 쉽게 몰락했다.

3.2 군사적 재능

"전쟁의 신 그 자체(der Kriegsgott selbst) "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말년의 아서 웰즐리(월링턴 공작)에게 한 기자가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공작님은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이겼는데, 공작님의 군사적 재능이 나폴레옹보다 훨씬 낫지 않나요?" 웰즐리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최고의 전략가 한 명을 꼽으라면 바로 나폴레옹일 것이오.("In this age, in past ages, in any age, Napoleon.")"

그의 전술적 능력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것이었고, 다른 나라들은 그의 용병술을 모방하기 바빴다. 군재(軍才) 하나만은 역대 최고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던 그를 잡기 위해, 프랑스를 제외한 전 유럽의 강국(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스웨덴, 러시아 등)들은 7차례에 걸친 동맹(대프랑스 동맹)[41]을 해야만 했다. 그가 일으킨 전쟁들에 대해선 나폴레옹 전쟁을 참고.

예나 지금이나 포병장교는 수학적 계산능력과 탄도학 등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똑똑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인재들이 많았고, 당시 프랑스 포병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히 그 엘리트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포병 장교들이 혁명이 발생하자 외국으로 망명해서 조국을 향해 포를 돌렸지만, 나폴레옹은 드물게도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케이스였다. 게다가 군사 유년학교와 사관학교를 거치며 제대로 훈련받은 엘리트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하기를 주저함이 없었기에 인망이 높은 편이었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적어도 휘하 병사들을 장악하는 데에는 거의 어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포병장교 출신이지만, 나폴레옹의 전술은 포병/기병/보병의 조화와 협동을 이용한 것으로 포병이 먼저 공격하고, 기병이 휩쓸고, 그리고 보병이 공격하는 형태를 이루어 병과간의 협력이 매우 중요했다. 그런 이유로 병과간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워털루에서 패배했다는 게 인기 있는 분석이다. 게다가 당시 나폴레옹은 지병인 치질이 악화되어 하루 종일 엎드려있어서 잠도 자지 못하여, 정상적인 지휘가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기병대를 맡은 미셸 네는 포병과의 협력 없이 혼자 돌격해서 기병을 박살내고, 엠마누엘 그루시도 나폴레옹이 원한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싸우는 등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어쨌거나 나폴레옹이 익힌 군사 기술과 제병 합동 전법의 재능은 아직도 정치적, 제도적 봉건제의 잔재를 떨치지 못한 다른 나라에 비해 선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거기다 사기 또한 높았던 혁명기 프랑스의 병참 제도 하에서 카리스마를 갖춘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대육군은 당시 유럽에서 당해낼 장군이 어디에도 없었고, 나폴레옹의 적들도 인정했다.

결국 , 뮈라, 마세나, 베시에르, 베르티에, 모르티에, 다부 등 나폴레옹을 훌륭하게 보좌했던 유능한 원수들이 전부 빠지고[42] 나폴레옹이 지병으로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던 때에 이르러서야 기병과 포병이 따로 놀게 되어, 기병은 사지로 돌격하고 포병은 같은 편의 기병에게 포격을 가하는 촌극이 연출되게 되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참모장이었던 술트는 참모로서 재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프로이센 군을 추격, 섬멸하는 임무를 맡은 그루시는 처음부터 원수감이 아니었다. 기병을 지휘한 는 용맹한 장군이었지만 기병의 천재였던 뮈라와 달리 기병 운용능력이 평범했다.[43] 아무리 나폴레옹이 제대로 활약을 못했다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뮈라가 나폴레옹의 기병을 다뤘다면, 오히려 프랑스가 이겼을 거라는 의견이 큰 힘을 얻고 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진정으로 돋보이게 하는 건 전술보다 전략 및 작전술에서의 능력이다. "작전술"이라는 개념자체를 정립한 것은 나폴레옹인데. 작전술이란 <전략지침에서 제시된 군사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일련의 작전을 계획하고 실시하며, 전술적 수단들을 결합 또는 연계시키는 활동.>으로 쉽게 설명해서 전략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술들을 결합하여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는 것으로, 손자병법의 이상적인 조건인 "이겨놓고 싸운다"를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다. 즉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 부대를 빠른 속도로 이동시켜 유리한, 원하는 장소에서 적보다 많은 병력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을 가장 잘 실천했고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당대에 전술적인 면에서 나폴레옹과 맞서볼만한 인물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전략과 작전술에서는 그를 따라갈만한 인물은 사실상 없었다. 심지어 그가 완전히 몰락하고 건강마저 잃었던 백일천하 때조차 전략 및 작전술 단계에서는 아주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웰링턴마저 나폴레옹에게 완전히 낚여 허겁지겁 병력을 집결했을 정도. (문제는 미셸 네가 카트르브라에서 이 상황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고, 이것 때문에 시간을 번 웰링턴이 워털루에서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 능력을 쌓기 위해 나폴레옹은 건강을 희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토막잠 전설에서도 알 수 있지만, 군무로건 공부로건 소싯적으로 워낙 과로하는 편이었던 데다, 성장 환경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경과민 증세도 있었고,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당시 병영 생활이라는 것이 원체 개판이었던지라, 열병, 위궤양과 탈장, 치질 등등의 여러 가지 병을 앓아, 사관학교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던 소년 장교 시절부터 내내 아프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한 것을 생각하면 체질적으로 위가 안 좋았던 모양. 이때문에 나폴레옹의 초상화에서 한쪽 손을 배 부위에 넣고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배가 아파 초상화를 그리는 도중에도 문지르는 모습이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지만 이는 다른 역사적인 인물의 초상화에도 등장하는 당시의 유행하고 있던 포즈로, 관련없는 낭설이다.

그리고 새로운 과학 기술을 통해 만든 '신무기'에는 큰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소리.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등장한 그 '신무기'들 중에는 몽상가들의 장난감 수준이 아니라, 이후 전쟁의 개념을 크게 뒤바꾼 장비들도 있었음에도 말이다. 한 예로 미국인 발명가인 로버트 풀턴이 기초적인 수준의 증기선, 잠수함을 소개하며 이것으로 영국 해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나폴레옹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1782년 개발되어 정찰용 등으로 군에서 시험용으로 사용하던 비행 기구에 대해서도 단순한 유흥거리 정도로 여겼다고.

다만 보존이 용이하고 휴대가 간편한 전투식량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병조림을 도입하기도 하였고 훗날 통조림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보면 보급부문은 모르겠으되 자신의 특기인 전투분야와 그에 사용되는 장비에 대해서 매우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은 장점이라고 하기 어려운 성향이지만 나폴레옹은 워낙 이 보수적인 군대운용에서 기본기가 탄탄했고 전술이 신묘한 수준이었기에, 여기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줄 수 있는 신무기를 도입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군대를 우직하게 강군으로 밀고가는 스타일이었던 듯. 특히 본인부터가 신무기를 실험하고 양산할 새도 없이 계속 전쟁을 벌여댔던지라(...) "신무기 개발하고 양산할 돈이면 기존 군대를 더 증강시켜서 빨리 승리할 수 있다"는 주의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입장이 틀렸다고 보기도 힘든 것이,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고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유럽의 패권을 유지하던 나폴레옹으로서는 언제 상용화될지도 모르는 신무기보다는 다른 데다 자원을 투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할 법 했고, 실제로 그 생각이 옳았다. 그 신무기들이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빨라도 50년은 지나야했다. 증기선은 외륜이 피격되기 쉬운데다 일단 외륜이 피격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으므로 스크류 추진장치가 발명될 때까지 주력으로 쓰이지 못했다. 프랑스가 1850년 마침내 증기 전열함을 도입하여[44] 일시적으로 영국에게 쇼크를 주긴 했지만 영국인들은 금세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증기선을 양산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해군 전력비는 더 벌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잠수함은 전략적으로 유의미한 병기가 되려면 증기선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오히려 청년학파 때문에 프랑스 해군력을 박살내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오 그거슨 선견지명 열기구 역시 여러가지 약점 때문에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실전에서 정찰용으로 쓰기도 어려웠다. 어딘가의 얼리 어답터랑은 확실히 다르지[45]

3.3 "우리의 꼬마 부사관"

나폴레옹의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웰링턴 군대에서도 '나보(나폴레옹의 별명)가 프랑스 놈들과 함께 있으면 4만 명의 군대와 맞먹는다.'고 논평했을 정도였다니 당대에는 인정받는 이야기였던 듯, 심지어 나폴레옹의 대를 이은 원쑤(…) 메테르니히 조차도 "황제와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매혹당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나폴레옹이 사람 다루는 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도 있다.

한 포병장교가 4년 동안 똑같은 계급을 달고 있는 것에 불만이 생겼는데, 나폴레옹이 군대 점검을 위해 한 요새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나폴레옹에게 승진을 청원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폴레옹이 시찰을 위해 요새에 도착하였는데…장교는 새삼스레 쑥스러워져서 나폴레옹에게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나폴레옹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제야 장교는 허겁지겁 달려가 떠나려는 나폴레옹을 불러세웠다.
>장교: 폐하, 폐하!
>나폴레옹: 왜 그러는가?
>장교: 14년 동안 복무했으나 4년 동안 대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소령.
그리고 나폴레옹은 무심한 듯 시크하게 다시 갈 길을 갔다고 한다.(...) 수행원으로 데려온 소령의 계급장을 떼서 손수 달아줬다는 말도 있다.
한번은 숙영하는 야전 부대를 순시하던 중 졸고 있는 초병을 보았는데 깨우는 대신 자기가 잠깐 그 자리를 맡아 보초를 섰다. 잠시 후 초병이 깨어났지만 그를 질책하는 대신 조용히 자리를 돌려주고 돌아갔다. 즉 초병의 중요성은 졸병이 아니라 총사령관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라는 걸 몸소 보여준 셈. 더불어 지친 병사를 대신해 임무를 수행했다는 이미지 역시 장병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저 초병의 입장에서는 호러 그 자체. 군대에서 보초 서다가 깜빡 존 사이 투스타가 나 대신 근무 서다 갔다고 생각해 봐라!!! 현실의 투스타는 대대장한테 말한다
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배치된 군을 시찰하면서 병사 및 하급 장교들을 일일이 만나며 신상명세를 확인해 주고 고충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만나다니 오랜만이네. 자네는 지난 이집트 원정 때 피라미드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운 용사가 아닌가? 그런데도 훈장을 받지 못하다니 내 잘못이네. 당장 훈장을 수여해 주겠네!" 이런 식. 이 때문에 장병들의 사기 및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도는 크게 올랐다. 물론 나폴레옹이 처음부터 이런 내용들을 기억했을리는 없고 사전에 장병들을 뒷조사(?)했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 장병들의 나폴레옹에 대한 인망이 높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의 이런 행사(?)가 진정성을 얻긴 힘들었을 것이다.
장 란 원수와는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는데, 직설적인 편이었던 란 원수는 황제에게 화가 날 때마다 "내가 저런 매춘부에게 애처로운 열정을 품었으니 죽어도 싸지!"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슬쩍 자리를 피한 뒤, 그 다음 날이면 언제 싸웠냐는 듯 사근거렸다고 한다. 심지어는 '병사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엉덩이에 입이라도 맞추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조아생 뮈라 원수와도 너, 나 할 정도로 말을 낮춘 사이였다. 조아생 뮈라는 185cm에 달할 정도로 키가 컸으며 위너 힘은 엄청 장사라 나폴레옹이 맨 처음 출세하게 된 계기가 된 왕당파, 즉 부르봉파의 반란을 진압할 때 혼자 대포를 짊어지고 뛰었을 정도로 괴력을 갖고 있었다. 임진록2 이령이냐? 뮈라는 나폴레옹 측근 중에서도 눈에 띄게 용맹하여, 각종 전투에서 작전을 성공시킨 공로는 물론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한 적도 많았다.

그 때문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여동생 카롤린을 조아생 뮈라의 아내로 내주었다. 무엇보다 뮈라가 왕 하고 싶다니까 나폴레옹은 바로 나폴리에서 왕노릇 잘 하고 있던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돌연히 스페인으로 옮겨버리고, 뮈라를 나폴리의 왕으로 봉해줬다.[46]
그러나 세상 웃기는 게 나폴레옹이 뮈라를 좋아해서 뮈라에게 시집보낸 그 여동생 카롤린은 뮈라에게 자신의 오빠를 배신하고 오스트리아로 붙으라고 꼬드겼다. 오이치? 나폴레옹 자신은 뛰어난 군인이자 군주였으나, 그 집안은 이토록 콩가루였던 것이다(…). 흥 오빠도 큰오빠 배신했잖아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끝난 직후 승장인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보고를 위해 나폴레옹을 찾아왔다. 승리를 치하하는 나폴레옹에게 다부는, 자신의 는 나폴레옹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꺼이 폐하를 위해 제 피를 흘리겠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인정해주시고 따뜻함을 베풀어주시는 그것으로 저는 족합니다." 후에 다부는 이날의 공로로 아우어슈테트 공작이 되었다.
폴란드 출신인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에게는 나폴레옹이 비록 포니아토프스키가 자신의 휘하 원수이긴 했으나 프랑스군 원수로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황제로 대우해주었다. 비록 포니아토프스키가 나라를 빼앗기고 독립운동을 하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에게 폴란드를 되찾아주겠다고 했으며, 포니아토프스키에게는 항상 황제로서 존중해줬다. 이에 감동받은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서라면 죽을 힘을 다했다.
세인트헬레나 시절에도 나폴레옹을 수행한 시종들이 나폴레옹의 총애를 다투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대놓고 "내가 늬들 마누라도 아니잖니? 늬네랑 내가 잘 수는 없잖아?"라고 투덜거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오 마성의 황제 오오

여담으로 나폴레옹은 장교인데 왜 부사관이냐 하면, 당시 유럽의 육군유년사관학교나 사관학교의 생도들은 생도 계급이 따로 있던 게 아니라, 상병이나 병장 등의 병 계급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3.4 외교력

나폴레옹의 외교 능력에 대해 혹평하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나폴레옹 개인의 성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근본적으로 1)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공화국과 그 공화국을 승계한 자신의 프랑스 제국이 기존 유럽 질서와 화해하는 것. 2)유럽 질서를 프랑스의 주도하에 재편하는 것이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영국과도 통령 취임 직후 계속 화해를 시도했고, 실제로 아미앵 조약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내었다.[47] 그런데 화해조약이 아직 유효하던 중에서도 영국은 구 부르봉 왕족들을 계속 후원했고, 나폴레옹에 대한 중상모략을 계속했으며, 나폴레옹에게 접근하는 러시아 제국의 궁정혁명을 지원 또는 방조하여 러시아의 반(反)프랑스 정책을 고착화시킨다. 이후의 일이지만, 프로이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폴레옹은 가급적 전쟁을 피하려 했고,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히는 러시아 원정조차도 러시아 제국과의 화평 시도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차적인 문제는 영국의 대륙 정책에 있었다. 해상대국으로서 당대 최강을 자부하던 영국으로서는 아직 경제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러시아나 약소국이 된 스페인, 지역 강국들의 군집체에 불과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나 다 망해가는 오스만 제국은 경계할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3천만에 육박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당대 유럽 문명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던, 게다가 기존 질서에 도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까지 확보한 프랑스라는 강적이 유럽 대륙의 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허용할 수 없었다. 프랑스가 유럽 대륙 전체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고 가공할 인적자원을 활용하여 영국과 맞서게 된다면, 영국으로서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였던 것. 실제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행해진 대륙봉쇄령에 의해서도 영국이 겪은 고생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러했으니, 안 그래도 강력한 적수인 프랑스에 나폴레옹 같은 지도자까지 나타난 상황을 영국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영국의 입장에서 유럽대륙은 고만고만한 강국들이 병립하면서 균형을 유지해줘야 했다는 것이고, 그 균형을 깨뜨릴 잠재력을 지닌 프랑스, 그리고 그 프랑스를 이끌어 다른 유럽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지도자라면, 나폴레옹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또한 유럽의 다른 제국들에 있어서도 프랑스 제국에 의한 유럽 질서 재편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할 사태였다. 프랑스 혁명은 시민세력에 의한 구(舊)질서의 붕괴라는 당대 기준에서는 묵시록적인 사태의 실현이었고, 그런 프랑스 제국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국 내에 있던 시민 세력들에게도 왕조 타도의 명분을 쥐어주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나폴리, 네덜란드, 베스트팔렌, 스웨덴, 나아가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보나파르트 일족이나 그 인척들을 왕으로 앉히기 시작한 나폴레옹의 방식도 반감을 샀다. 물론 그건 원래 타오를 불에 기름 끼얹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나폴레옹 개인의 실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은 군사력의 우위와 천재적인 지략을 바탕으로 계속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와 같은 승리가 계속되면서 자신과 프랑스 제국의 역량을 과신하게 된다. 무엇보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정립된 프랑스 군 특유의 현지보급 및 프랑스 제국의 경기 회복을 위한 가혹한 배상금과 무자비한 약탈 정책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 정책의 가장큰 피해자가 바로 훗날 프랑스의 원수가 되는 프로이센이였다. 프로이센은 기본적인 약탈로 1000억원대의 손해를 입었는데 2조가량을 합법적,공식적으로 뜯겼고 프랑스의 속국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괜히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에 그짓을 한게 아니다. 이러한 약탈은 처음에 나폴레옹을 환영하던 주변 나라의 시민 세력들이나 학생들이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에 군주로서 그렇게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던 자신의 형, 동생과 친척들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앉히는 무리수를 감수했던 것도 한몫 했다. 이런 짓을 시도하다가 당초 프랑스 제국에 우호적이었던 스페인도 결국 적으로 만들어 버렸고[48], 러시아 원정은 그런 나폴레옹 체제의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이나 다름없다. 통령 취임 이전부터 이집트 원정 등으로 나폴레옹 개인의 군사적 야망이 지나친 수준이었다고 주위에 인식되었던 것도 문제. 원래 이집트 원정의 목적은 인도에 압력을 가해 인도를 비롯한 중근동 토후들의 반영 정서를 자극해서 영국을 뒤흔드는 것 정도였는데, 프로파간다로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한 고대 정복자들의 이름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측면이 크다고 볼 수 있다.

3.5 해외

스페인 등지에서의 평가는 거의 악마 수준이다. 여담으로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아프리카라고 깐 적이 있다. 정확히는 "피레네 산 아래에 있는 나라들은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다." 코르시카는?이 말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폭발했다. 참고로 그 당시 말하는 아프리카는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가 아닌 아랍을 말한다.[49]

하지만 요즘에는 그냥 관심이 없는 스페인인의 경우도 많은 듯 하다. 스페인에서도 자국인들을 상대로 나폴레옹이나 당시 프랑스군 피규어들을 잘만 팔아먹는다...물론 독립전쟁(반도전쟁)의 참혹함은 다들 잘 알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가 학살을 명령하여 흑인 노예 수만 여명이 학살당한 아이티에선 찢어죽일 놈으로 취급된다.(여기를 참조.) 온 세상에 자유를 전해야하지만 나는 황제를 해야겠고 노예는 인간이 아니지 서인도 제도를 여행하던 한 프랑스인 여행가가 아이티에서 나폴레옹 이야기 꺼내다가 현지인으로부터 싸닥션을 맞은 적까지 있다. 애초에 전술했듯 흑인 노예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등 결코 선행만 한 게 아니었다.

더불어 이집트 및 유럽 각지에서 문화재 약탈자라는 악명도 얻고 있으며, 때문에 모나리자를 약탈했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1798년 이집트 알 이즈하르 마스지드에서 무장반란진압도중 4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살되었기에, 이집트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학살자 및 침략자다. 이런 사태가 난 이유는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무리한 징발을 요구하고, 심지어 마스지드에 세금까지 매겼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 아랍인들의 저항과 적군에 대한 협력으로 이집트 주둔 프랑스군은 보급에서도 곤란을 겪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오스만의 술탄을 대신하여 역적 맘루크를 토벌하러 왔다고 선전했고, 여차하면 자신과 부하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할 수도 있다며 립서비스를 하며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현지 지도층을 포섭하려 했지만[50],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영국의 해상 봉쇄로 고생을 했고 팔레스타인 원정에서 영국해군의 방해와 중포의 부재로 결국 오스만의 견고한 요새를 뚫지 못하고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을 돌려주고 이집트로 돌아온 다음에,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는 수만 명의 오스만군을 바다로 처넣어 지위를 굳건히 했다. 하지만 한술 더 떠 페스트까지 발생한데다가 프랑스 내부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자신의 부재로 약화되는 것을 감지한 나폴레옹은 부사령관에게 이집트를 맡기고, 겨우 2척이라는 적은 수의 함선을 타고 몰래 프랑스로 돌아갔다. 남은 프랑스군은 1년 반이 넘게 견뎠으나 계속되는 오스만군과 이집트 저항군, 영국군 공격과 질병, 보급 문제로 결국 1801년 전면 항복한다. 덕분에 로제타석을 비롯한 문화재가 영국 손에 들어갔으므로 어딜 봐도 이집트 입장에서 좋게 볼 구석이 없다. 1980년대 KBS-1를 통하여 방영한 유럽 드라마 나폴레옹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심지어 오스만 포로들이나 민간인들에게 프랑스군이 총을 겨누며 스스로 바다로 들어가게 하여 빠져죽게 하는 장면도 나온다.

러시아나 영국에서는 '그런 엄청난 적을 이긴 우리는 더욱 위대하다'는 논리의 설파를 위해 치켜세워주면서도 악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영국에서 아기들 자장가에서 "망태 할아버지" 급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정말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하는구만!

하지만 영국에서는 비록 자국의 국익을 위해 나폴레옹과 적대했지만, 당대의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을 높이 평가했다. 나폴레옹이 사망한 직후, 아이반호를 지은 영국의 대문호 월터 스콧이 지은 "나폴레옹전"에서는 나폴레옹이 국가를 안정화시키고 자국에 진보적 개혁조치를 취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후 나온 토마스 칼라일 같은 경우는 아예 나폴레옹을 들어 영웅사관을 정립했을 정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나폴레옹이 침략한 러시아에서도 나폴레옹 빠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동맹국이였던 덴마크에서는 애증의 대상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덴마크도 의도하지 않은 전쟁에 휘말렸고 적어도공식적으로는 패전국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립국이던 덴마크를 선빵 때린게 영국이라서 나폴레옹을 미워할 이유가 없는데 다만 덴마크 일반인들 중에는 나폴레옹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 동화작가의 아버지가 그 일례이다.

유럽에서는 드물게 폴란드에서는 희한하게 구세주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 물론 나폴레옹이 1807년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워줘서 폴란드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로서 해방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바르샤바 공국은 35년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이는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주변국들이 공국을 해체했기 때문이므로 폴란드에서 나폴레옹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더 자세한 것은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항목을 참고해보자. 심지어는 폴란드 국가폴란드는 아직 죽지 않았다의 가사에도 '보나파르트가 우리에게 승리의 방법을 보여주었다'는 가사가 있을 정도.

아시아 쪽에선 애초에 나폴레옹이 뭔가 해를 끼친 것이 거의 없다보니 위인전에도 애들 교육상 안 좋은 얘긴 거의 안 나오니깐 인기가 좋은 편이다. 그리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나폴레옹도 중국은 잠자는 사자며 깨어나기만 하면 세계를 진동시킬것이라 평했으며 25년 더 살았다면 아편전쟁으로 영국에게 두들겨 맞는 걸 보고 뭐라고 했으려나 그리고 영국은 쪼그라들고 중국은 잠에서 깨어났다[51][1] 조선에 대해선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주간조선에서 나폴레옹에 대한 기사로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에서 영국 탐험선이 짧게 섬을 방문했을 때, 영국 탐험대 대장이 나폴레옹에게 조선 여행담과 삽화를 보여줬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삽화에 담긴 조선인의 갓과 담뱃대에 꽤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라는 평. 그리고 중국에 대한 발언도 오해가 있는데, 중국이 지금 당장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깨우면 중국인들이 언젠가 유럽을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잡을 것이고 제국주의의 보복을 할 것이라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독립운동가 김경천 장군이 나폴레옹을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업을 배우라는 아버지나 형의 권고에도 굳이 일본육사를 지원하게 된 것도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아서였다고...

앵발리드를 방문해 나폴레옹 묘를 참배하는 히틀러와 수행원들

세계 각국의 명사들 중에선 종종 나폴레옹 숭배자가 나타나는데, 문제는 이 중에 폭군이나 독재자도 있었다는 것. 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장 베델 보카사. 하지만 현실은 압제와 전쟁으로 나라를 대차게 말아먹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보카사가 나폴레옹이면 이디 아민알렉산드로스 3세냐? 여담으로 히틀러도 나폴레옹 광빠였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를 점령하고 나폴레옹 2세의 무덤을 나폴레옹의 곁으로 옮겨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똑같이 러시아에 뒷목잡혀서 망했다[52] 똑같이 영국 정복에 실패했다한국박정희 대통령도 나폴레옹의 엄청난 숭배자였다. 키가 160 조금 넘는 박정희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단신인 나폴레옹도 식민지취급은 프랑스 왕국도, 공화국도, 영토판 제노바도 안했다는건 함정 코르시카의 군인에서 지배국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면서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훗날 만주군에 들어간 것도 나폴레옹이 프랑스군에 들어간 것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똑같이 성공했다.그러나 부하 총에 권력 쟁점에서 퇴장,뭐 사후에 신으로 받아들이는 이들과 독재자로 욕하고 비난도 같이 받고 있지만,나폴레옹의 키가 170 가까이라서 그 당시로 그다지 단신도 아니었던건 잠시 잊자 중화민국장제스도 젊은 시절에 나폴레옹 빠였으며 나폴레옹의 혁명정신을 잡지까지 내놓으며 칭찬했었다. 게다가 리비아의 악명높은 철권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 역시 나폴레옹을 롤모델로 삼았는데 통치 체제등에서 나폴레옹의 통치 수단 비슷하게 운용했다.

4 개인적인 이야기

4.1 짧은 수면에 관한 진실


나폴레옹이 잠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세계를 정복했겠지 근데 왜 황제가 직접 돌격하는거지

나폴레옹은 잠을 효율적으로 자는 자의 대명사로 꼽히기도 한다. 3~4시간만 자고 부족하다 싶으면 위에서 토막잠을 자기도 했다는데, 사실 당시 장교들이 전쟁 중에 맘 놓고 자기 힘든 상황이었으니만큼, 좀 과장된 면도 없잖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항상 자기가 잔 것보다 적게 잤다고 생각했다는 식의 말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당대 기준에서 봐도 수면 부족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 젊은 시절부터 마치 발작하듯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바로 잠들어버린 적도 있다고 하니...

그러나 나폴레옹은 잠을 결코 적게 자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사관학생 시절, 다들 코르시카 촌놈이라고 무시했지만 브리엔이란 동기만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고 이 인연으로 부관이 되었던 브리엔이 남긴 기록을 봐도 불면증 때문에 못 잔다고 투덜거린 게 많았다고 한다. 브리엔은 나폴레옹빠였지만 늘그막까지 나폴레옹이 잠을 적게 잤다고 하면 왜곡하지 말라며 반론했다. 그 밖에도 프랑스 사학자 Roger Chartier의 연구에 의하면, 야간의 수면 시간이 2~3시간이었을 뿐, 1일 동안 토막잠을 잔 시간까지 합치면 최소한 6시간 이상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불규칙한 생활 덕분에 불면증까지 겹쳤기에 적게 잤을 뿐이지, 노력근성으로 졸음을 참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저렇게 수면이 불규칙적이다 보니, 한번 잠이 들면 주변에서 깨우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한다. 한 번은 연회 도중에 잠든 나폴레옹을 깨우려고 측근들이 그가 좋아하는 치즈를 가져다 줬는데, 그 냄새를 맡던 나폴레옹이 돌연 '오늘은 피곤하니 안 되겠소 조세핀'이라 잠꼬대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체취와 치즈 냄새도 구분 못할 만큼 넉다운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저 광고가 아주 엄청나게 중대한 실수를 하나 하고 있는데, 보나파르트 가문은 코르시카의 귀족이다. 나폴레옹의 직계 조상인 자코보 부오나파르테는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메디치 가문의 친구이자 측근이었고, 15~16세기에는 르네상스 피렌체의 상당히 힘 있는 명문가였다. 16세기 후반에 정권 다툼에 휘말려 코르시카로 망명을 갔으나, 코르시카에서도 지방 귀족 가문으로, 비록 섬 밖에서 크게 떵떵거릴 위세는 아니지만, 현지에서는 상류층에 속했으며, 경제적 사정도 아버지의 사치만 빼면 그럭저럭 잘 살았다.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코르시카 독립 혁명가 파스쿠알레 파올리의 동지였으며, 루이 16세의 궁정 내 코르시카 대변인이기도 했다. 가문이 살던 현지의 부오나파르테 저택은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하며, 인근에는 나폴레옹의 조상들이 매년 사용하던 가문의 여름 별장도 따로 있다. 이런 배경이 있었던 덕분에, 나폴레옹도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으며 일찍부터 큰 세상에 발을 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나폴레옹의 유년 시절은 결코 빈곤하지도, 처량하지도 않았다. 그가 활동한 프랑스 본토에서야 어찌 되었건 프랑스에 편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외딴 섬 촌놈이라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였던 거지, 나폴레옹의 배경을 현대로 치면, 한국에서는 판검사 집안 출신인 사람이 미국에 좋은 사립대학에 유학 가서 주변인들은 미국 국회의원 집안 출신이라 상대적 빈곤감을 느꼈던 셈이다. 경상도 지역유지 아들이 서울 유명대학 가서 한동안 서울말 하나도 안 배우고 자꾸 경상도 사투리만 써대고 다녀서 촌놈 취급 받는 거에 더 가까운데

포털 사이트에서 '나폴레옹 잠(혹은 수면)'으로 검색하면 나폴레옹 수면법이라는 것까지 나와서 마치 나폴레옹이 잠을 컨트롤해서 성공한 것처럼 포장하기도 하며, 이 수면법을 자신에게 정착시키는 동안엔 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규정해놓고는 하는데, 정작 이 중에선 나폴레옹이 즐겨 했던 목욕 역시 금지되어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요법이다. 일부 책에서는 나폴레옹이 바보는 6시간, 여자는 5시간, 남자는 4시간을 잔다는 말을 했다고 쓰기도 했다. 셀프 디스인가? 전 항목에선 애들을 바보 만든다 했지만 키 크고 건강해지고 싶은 어린이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열 시간 이상 자야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그런 부족한 수면으로 건강을 망쳐서 워털루 전투 같은 큰 전투에서 패인(敗因)이 되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숨긴다.

4.2 식사 습관

식사 습관도 지금 기준에서 보면 문제가 많은 편인데, 황제가 된 뒤에도 15분 이상 식사하는 법이 없었다고[53] 할 정도로 무척 빨리 먹는 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꾸벅꾸벅 졸면서 대충 먹어치우고 곯아떨어질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선천적으로 위장이 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식생활로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인트헬레나로 쫓겨났을 때 불과 46세였는데, 그로부터 6년밖에 못 살고 죽은 것도 이전부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데다, 제대로 관리도 하지 못한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독살설이 강하다. 결국 이러한 수면 부족과 급히 먹는 식습관이 훗날 건강에 악영향을 주고 몇몇 중요한 전투에서 패인으로 작용했다.

4.3 신체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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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용모

위에서도 나온 이야기지만 초상화뿐만 아니라, 사망 후에 남긴 데드 마스크를 봐도 얼굴은 확실히 보통 이상으로 잘생긴 편이다. 사실 나폴레옹이 못생겼다는 이미지가 돌게 된 이유는 영국의 풍자만화 때문인데, 프랑스 제국과 적대적이던 영국이 적대국가의 최종보스 나폴레옹을 당연히 잘생기게 그릴리가 없었으니,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대개 키 작고 못생긴 난쟁이로 널리 퍼진 것이다. 사실은 나폴레옹에 대해 결코 좋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키는 좀 작았어도(...) 얼굴은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아름답다", "그의 미소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6개의 나폴레옹 석고상이 괜히 나왔겠나 그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의 초상화를 봐도 그 유전자를 확인할 수 있다.

4.3.2 결코 작지 않았던

흔히 키가 155cm 정도로 작은 것으로 유명한데, 실제 나폴레옹의 키는 167.6cm였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평균 신장이 164cm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큰 편인 것이다. 167.6cm였던 나폴레옹이 160cm도 안 되는 난쟁이가 된 이유는 그때 프랑스에서 썼던 피에(pied)라는 단위를 영국에서 피트로 착각했기 때문이다.[54] pied가 피트보다 2cm 더 길기 때문에 거의 10cm에 가까운 오차가 생긴 것이다. 거기다 황제 근위대의 구성원인 척탄병들은 원래 178cm 이상으로 키가 큰 인원들을 차출해서 만든 부대인데다가, 특유의 셰코 모자 때문에 그들과 같이 있으면 나폴레옹의 키가 더욱 작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성장기 때에도 빈곤하게 지낸 탓에 잘 먹고 잘 살던 귀족들과 같이 있다 보면 키가 좀 작다는 인식도 있었다. 오히려 오늘날 프랑스 남성의 평균키(177cm)를 대입할 경우 180cm정도 되니 꽤 큰 편이다.

밑에서 말하는 키는 좀 작았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이다. 거기다 다른 병사들과 달리 삼각모를 넓게 쓰는 버릇도 있었고, 몸매가 약간 펑퍼짐한 면도 있는데다 숏다리였던 것도 있어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본인 스스로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라는 말까지 하는 바람에(...). 자업자득

마지막으로 이 낭설엔 나폴레옹 3세, 즉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정말 키가 작았던 게 한몫을 보탰다. 당시로서도 작은 키여서 160cm도 안 되었다고 한다.[55]

4.3.3 비만 등 각종 질병

30대 중반까지의 초상화를 보면 '나폴레옹은 유황을 끼얹은 것 같다'라고까지 얘기될 만큼 창백한 안색에 대단히 여윈 모습으로 묘사된다. 비서 부리엔에게 '나는 나이가 들어도 살이 붙을 것 같지 않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황제 즉위 이후부터는 급격히 살집이 붙게 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말년을 묘사한 초상화를 보면 그야말로 펭귄의 모습이다(...). 물론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을 직접 본 사람들은 초상화나 풍자화[56]에 묘사된 나폴레옹의 비만은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사후 부검할 때 복부에서 엄청난 지방을 걷어냈다는 걸 보면 확실히 비만은 비만이었던 듯하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수시로 입고 있던 조끼 등의 단추를 풀고 책상에 기대거나 왼손을 윗도리 밑으로 넣어 문질러 통증을 가라앉게 할 정도로 위장 건강이 좋지 않았고 이는 평생 나폴레옹을 괴롭혔다. 이 정도로 위장이 좋지 않은데다 식사량도 많은 편이 아니었고, 승마 등 운동을 너무 격렬하게 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고 함에도, 갑자기 비만체가 된 걸 보면 잘못된 식습관과 유전적인 요인이 같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

한편, 그에겐 피부가 가려운 피부염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시간이 있으면 장시간의 목욕을 즐기고 목욕탕 안에서 집무를 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 원정 때 부인인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기침과 편두통, 발열이나 배뇨 곤란, 치질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4.4 인간적 결점과 사생활

앞서 여러 가지 비범한 모습과 신화적인 전설들이 내려오지만 사실 인간적으로는 단점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의 실패는 무조건 덮으며 감추는 데 급급했으면서, 부하들이 실패할 경우엔 자신과는 관계없는 100% 부하의 잘못으로 매도해 몰락케 하는 모습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보잘것없는 시골 귀족 가문에 대한 스트레스와 전쟁에 너무 많이 참여한 관계로 주변에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사람이 적었다. 여성문제에 있어서는 조제핀과의 사랑으로 유명하지만, 서로 성격이 만만치 않은데다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결국 이혼해버리고 오스트리아 황녀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묘한 건 조제핀이 나폴레옹에게 다시 열중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나폴레옹 쪽에서 열정이 식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도 죽는 순간 마지막에 말한 단어가 조제핀의 이름이었으니 진정한 사랑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주변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아도 세속의 권력과 영화에 찌들기 이전에는 상당히 순수한 면이 있고, 인간성도 털털하고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조제핀과 헤어진 직후 한 배우가 나폴레옹의 이 역린(?)을 건드릴 뻔한 일화가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프랑수아 조제프 탈마라는 연극배우는[57] 로마 제국을 무대로 한 연극 '브리타니쿠스'에서 네로 역을 맡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용 중 네로의 아내인 옥타비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장면이 있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이전부터 브리타니쿠스의 내용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극을 계속 진행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폴레옹과 궁정 관계자들이 한 행동은 '쿨쿨 잠이 든 척 하기'였다(...). 나폴레옹 스스로도 탈마의 행동이 비의도적이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괜히 사건 만들어서 유명한 배우를 족친다며 여론을 흔들기는 곤란하므로 잠이 들어서 문제의 장면을 못 본 척 하며 넘어간 것이다.

당시 개방적 성문화를 가지고 있던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애정은 순수했다. 나폴레옹을 싫어하던 여인들도 나폴레옹과 연인이 되고 나서 나폴레옹의 진면목을 알 정도였다고 한다. 자식복은 많았지만, 마리 루이즈의 아들만 인정했다.

특히 재밌는 점은 나폴레옹의 친지들은 나폴레옹을 배신 혹은 이용만 해먹었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의붓아들인 외젠과 딸인 오스탕스는 나폴레옹을 끝까지 따랐다는 점이다.

제4차 대불(對佛)동맹전 당시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는 나름대로 훈훈한 일화도 남겼다. 베를린 총독 하츠펠트 대공이 간첩 혐의에 연루되었다는 증거인 편지를 입수한 나폴레옹이 하츠펠트 대공을 체포하자, 대공의 부인이 남편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못 된다며 총살당할 처지가 된 남편의 구명을 호소하러 왔다. 나폴레옹이 그녀의 눈앞에 편지를 들이대자 부인은 울음을 터뜨렸고, 임신 중이었던 부인의 부른 배를 보자 마음이 약해진 나폴레옹은 지금 이 편지를 곁에 있는 난로에 던지면 아무 증거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고 그녀에게 넌지시 귀띔했다. 결국 하츠펠트 대공은 목숨을 건졌다.

4.4.1 가족들과의 관계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특유의 혈통에 대한 집착과 가족주의 때문에 낭패를 본 바가 많았다. 물론 권력자가 혈연에 의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이고, 신분에 따라 재능을 단련할 기회가 차등적으로 주어지던 전근대 시대에는 권력자 주위의 혈연 집단이 의외로 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출신의 지방귀족이었고,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자신의 재능에 의지해 출세한 경우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의지했던 보나파르트 가문은 사실 당대 기준으로 보아도 능력 면에서는 영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었고, 그러면서도 야심들이 대단해서 권력자가 자신의 혈족에게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충성심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나폴레옹 스스로 "내 형제들 말만 들으면 내가 프랑스 황제의 자리를 우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서 혼자 꿀꺽한 줄 알겠다"라고 푸념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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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티치아 보나파르트(1750~1836) : 나폴레옹의 어머니. 뛰어난 미인이고 기질이 거세, 평범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남편 샤를 보나파르트에 비해 보나파르트 형제들의 독특한 개성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을 듣는다. 여담인데 14살에 결혼하여 15살에 아들을 낳았으나 1살도 못돼 죽었다. 모두 자식들을 7남 6녀를 낳았는데 그중 2남 3녀는 2살도 안돼 일찍 죽고 나폴레옹을 비롯한 8명만 어른으로 자랐다.
나폴레옹의 집권을 썩 반기지 않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며느리 조제핀과도 불화를 빚었다.(나폴레옹의 어머니는 보나파르트 집안에서 혼자 나폴레옹에게 황제가 되지 말라고 조언했다.) 대신 금전에 대한 집착이 강해 여러 은행가들을 곁에 두고 치부에 힘을 썼다고 하는데, 입버릇처럼 '내가 낳은 이 여러 왕과 공주들이 나중에 다시 내게 빵을 구하러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고, 실제로 나폴레옹 몰락 후 보나파르트 가의 재정을 상당부분 책임진 것은 나폴레옹 집권기 동안 레티치아 보나파르트가 열심히 치부했던 돈이었다(...). 아들의 유배와 죽음까지도 보고 아들보다 15년이나 더 살다가 당시에는 엄청난 장수를 누리고 86세에 죽었다. 그녀에 대한 책자도 세월이 지나 여러권이 나오고일찍 요절한 탓에 듣보잡이 되어버린 아버지와 차이가 크다 여장부로서 많이 재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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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를 보나파르트(1746~1785) : 나폴레옹의 아버지. 39살 나이로 요절했으며 죽을 당시 나폴레옹은 사관학생이었으니 아들이 황제가 된다는 걸 생각하지도 못하고 죽었다...하지만 위에서는 듣보잡이라고 나왔으나 고향인 코르시카에서는 제법 명문 집안 출신이고 코르시카 독립전쟁에 열심히 나선 인물이었다. 코르시카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파올리 부관이었을 정도. 비록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친프랑스파가 되었지만 그 덕에 코르시카 총독 빽으로 나폴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로 들어갈 수 있었기에 나폴레옹 인생에 그도 큰 다리를 놓아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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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제프 보나파르트 (1768~1844) : 나폴레옹의 형. 스페인 국왕인 호세 1세이기도 하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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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뤼시앵 보나파르트(1775~1840) : 나폴레옹의 형제들 중 정치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다고 알려진 인물. 재능보다는 열정이 두드러졌다고 한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당시 의원들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면서 일시적으로 패닉에 빠진 나폴레옹을 대신해 사태를 주도하여 나폴레옹 집권에 기여했지만, 이후 내무장관과 마드리드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며 금전적인 비리를 숱하게 저지른 데다, 나폴레옹이 반대한 결혼을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 집권기 동안에는 사실상 나폴레옹에게 협조하지 않았고, 영국의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나폴레옹 제정 기간 동안의 존재감은 전무에 가깝다. 형이 몰락한 뒤 유럽 여기저기를 떠돌긴 해도 그도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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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이 보나파르트(1778~1846) : 나폴레옹이 가장 아낀 동생. 네덜란드 왕국의 왕을 지냈고, 나폴레옹의 양녀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여 루이 나폴레옹을 비롯한 여러 아들을 보았다. 나폴레옹 2세 탄생 전에는 나폴레옹이 루이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을 만큼 총애했지만,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데다 부인 오르탕스와의 사이도 좋지 못해 개인적으로 계속 불행한 삶을 살았고, 나폴레옹 덕분에 군의 요직들을 역임했고 왕까지 되었지만, 군사적 재능도 썩 훌륭하지 못했고 군주로서도 존재감이 없었다. 형이 몰락한 뒤로 이름을 숨기고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를 번갈아가며 살아갔다. 그래도 1840년에 조국으로 돌아갔고 형의 무덤을 헌배하며 늘그막은 그럭저럭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막내아들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지만 최근 들어서 아닌 게 드러났다! 자세한 건 나폴레옹 3세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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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롬 보나파르트(1784~1860) :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해군과 육군에서 두루 활동했으며,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을 지냈고, 워털루 전투에서도 사단의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보나파르트 형제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폴레옹 3세 집권기까지 활동했다. 다른 형제들에 비해 비교적 나폴레옹의 뜻에 충실히 따른 편이었지만, 베스트팔렌 왕으로 재위하던 중에는 지나치게 사치를 즐겨 주위의 골치를 썩였다고 한다. 나폴레옹 3세에게 "폐하는 선대 나폴레옹 폐하와 하나도 닮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나폴레옹 3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과 마찬가지로 나도 친척들 때문에 골치를 썩이지 않습니까"라고 답한 일화가 있다고(...).친척들만은 진품이었으니까요.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제위하는 걸 봤으며 명예직이긴 해도 프랑스 제국 여러 요직에 오르며 늘그막을 지냈다. 손자인 찰스 조셉 보나파르트(1851~1921)는 미국에서 살면서 정치인이 되어 미국 법무장관까지 오른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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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롤린 뮈라 보나파르트 (1782~1839) : 나폴레옹의 누이동생, 조아생 뮈라에게 시집갔다. 정치적 야심이 대단해서 남편 뮈라를 나폴레옹의 후계자로 만들려 획책했고,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과 양녀 오르탕스에게 가장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폴레옹과 뮈라가 폴란드로 출정한 동안, 나폴레옹이 전사할 경우를 대비해 당시 파리 방위사령관이었던 앙도슈 쥐노를 정부로 삼아 남편 뮈라를 제위에 올릴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이후 남편 뮈라가 나폴리 왕이 되면서 왕비가 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해방전쟁 당시 오빠를 배신한다(...). 이후 오빠와 뮈라 모두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로 달아났으나 무수한 문전박대를 당하며 고생하게 된다. 그래도 늘그막에 재혼하여 어느 정도 넉넉하게 살다가 갔지만 죽을때까지 아이들에게 자신은 왕비로서 유럽을 호령했다는 말을 남기며 지나간 영광을 잊지못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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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리자 박치오키 보나파르트(1777~1820) : 카롤린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질이 거세고 야심이 많아 나폴레옹이 토스카나 일대에 영지를 주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남편 펠릭스 박치오키(1762~1841)가 자신의 눈에 차는 인물이 아니라고 하여, 당대의 유명한 문인 퐁탄과 연애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은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했고 오빠가 몰락한 뒤 오스트리아에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풀려나서 지방에서 작은 별장에서 연금을 받으며 남편과 같이 살며 평온하게 살다가 갔다. 죽을때 그녀 곁을 지킨건 남편 뿐이라서 그녀는 죽어갈 때, '나는 배신했지만 당신은 바보같이 나를 따르니 참 웃기네요...하지만 정말 고마워요...마지막까지 남은 게 오로지 당신 뿐이니...'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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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린 보나파르트(1780~1825) : 보나파르트 자매들 중 가장 미모가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여인. 르클레르 장군과 1797년에 결혼하여 아이티에 파견되었지만, 부부가 나란히 사복을 채우는 바람에 평이 좋지 못했다. 1802년 황열병으로 르클레르가 30세 나이로 요절하자 다음해인 1803년에 보르게세 왕자(1775~1832)와 재혼하여 나폴레옹의 정략에 충실히 따랐다. 낭비가 심했고 연애행각이 잦아 언니들만큼이나 말썽이 많았지만, 사적으로 봤을때는 나폴레옹에게 가장 우호적인 여동생이었다. 나폴레옹도 폴린을 가장 총애했는데, 이를 두고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황색선전이 나돌았다고 한다. 오빠가 죽은 걸 알고 형제 가운데 가장 슬퍼했었다...여담인데 아이티 바닷가에서 훌러덩 벗고 헤엄치길 즐기다 보니 현지인들에게 하얀 여신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이렇다보니, 나폴레옹이 그나마 믿고 의지했던 것은 아내 조제핀이 데려온 외젠 드 보아르네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였고, 외젠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을 지내면서 대체로 나폴레옹의 기대를 충족시킨 편이었다. 때문에 외젠이 나폴레옹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대체역사적 가정들도 종종 나오고 있지만, 보나파르트 가문이 조제핀과 그녀의 아이들에게 보였던 적의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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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 가문은 현재 코르시카 지방 정부에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58] 현재 가문의 수장은 1950년생인 샤를 나폴레옹(Charles Napoléon. 위 사진 오른쪽의 백발 신사)으로 위에서 소개한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의 후손이며, 코르시카의 시장을 역임했다. 그의 장남 장 크리스토프 나폴레옹(Jean-Christophe Napoléon. 샤를 왼쪽의 인물)은 1986년생으로 경영학을 전공한 후 뉴욕, 런던에서 금융 분야에 종사했으며, 가문의 차기 수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 20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가문을 대표해서 참석했을 정도.

4.5 나폴레옹의 정리

기하학 공식 중의 하나.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4.6 진짜 그 외

나폴레옹을 신으로 숭상한 니콜라 쇼뱅(Nicolas Chauvin)의 일화에서 맹목적인 애국심을 뜻하는 쇼비니즘(chauvinism)이란 용어가 나왔다. 다만 쇼뱅은 가공인물로 여겨진다.

번외격인 이야기로,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정찰을 하던 도중 잎이 네 개인 클로버를 발견하고 신기하여 고개를 숙였더니, 총알이 나폴레옹의 모자를 뚫고 지나갔다는 에피소드 덕분에 네잎 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저격수에겐 불행의 상징이 되었고, 나폴레옹이 항상 전장에 나설 때도 도서관 마차를 만들어 끌고 다니면서 책을 읽는 애독가였다는 사실은 뭇 책벌레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그 책들 중에 손자병법도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다만 한 번 읽은 책은 보관하지 않고 길가에 내던져 버리는 요상한 버릇이 있었다. 이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지나가던 사람이 주워보고 똑같은 감동을 느끼라는 의미의 행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책을 주운 사람이 까막눈이라면?

그리고 또 하나의 번외 격으로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집트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피라미드에 들어가 잤다고 한다. 오오 용자님!!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어떻게 된 일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무서운 듯이 피라미드에서 뛰쳐나와서 다짜고짜 하는 말이 "앞으로 피라미드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마라!"였다고 한다. 이후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당한 뒤 친한 친구들이 나폴레옹에게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봤냐고 물어보자 뭔가를 말하려던 나폴레옹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손을 저으며 '됐어. 어차피 말해봤자 안믿을게 뻔한데 뭐하러 말하겠냐'라고 했다고 한다. 여러 주장들 중 하나를 말하자면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안에서 본 것은 바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폴레옹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죽고 없으니까 사실인지 확인할 길도 없기에 학자들도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여하간 그냥 그런 떡밥이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수행비서였던 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의 글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7월 14일, 나폴레옹은 피라미드를 둘러보기 위해 카이로를 떠났다. 원래는 멤피스의 네크로폴리스 고대 유적을 삼사일간 조사하기로 되어있었으나 그가 갑자기 계획을 바꾸었다. 이때의 피라미드로의 여정은 전쟁과 맞물려 한 가지 로맨틱한 일화를 낳게 내게 되는데, 일부 원주민들이 나폴레옹이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접견한 것과 연관지었는지 이야기하고 다니길, 그가 피라미드 안에 들어서자 '알라께 영광을! 신은 오직 알라 뿐이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다!'라고 외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렇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에 들어 간 적도 없다. 심지어는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막에서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났던 적이 없으므로 만약 그가 피라미드에 들어가 보았다면 나 역시 따라들어 갔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밖에 있는 동안 몇 사람을 시켜 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가 보게 한 뒤 그들이 돌아오자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물었다. 그들이 보고하길 '아무 것도 볼 게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59][60]

수학과 과학에 상당한 조예와 관심이 있었던 듯, [61] 이집트 원정때도 동행한 학자들과 여러 차례 학술적 토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개중엔 "내가 군인 말고 학자를 했으면 뉴턴 정도로 대성하지 않았을까?"라고 던졌더니 학자들이 "ㄴㄴ 님이 아무리 잘났어도 뉴턴만큼은 아님"이라 대답해 빡쳤다는 일화도 있다(...).

체스를 좋아했지만 실력은 거의 양민 수준이었다고 한다. 특히 오픈 게임에 약하고 상대가 조금만 시간을 끌면 조급해했다고 한다. 전쟁에서도 똑같았다. 단기전에선 포텐셜 터지고 장기전 넘어가면 끙끙. 황제가 되고나선 승률이 높아졌지만, 유배 되고 나서는 다시 깨지기만 하는 것으로 봐서는 상대들이 알아서 져준 것으로 보인다. 안습한 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폴레옹을 탈출시키려는 추종자들이 체스판에 탈출계획을 숨겨서 보냈는데, 그걸 얘기해줘야 되는 장교가 가는 도중 죽어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탈출계획이 숨겨진 체스판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죽었다는 거다.

백년전쟁 당시 위기에 몰린 프랑스를 구한 업적에 비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듣보잡 취급 받으며 잊혔고, 공화파로부터는 더욱 천시 당하던 잔 다르크를 다시 부각시켜 영웅시한 것도 나폴레옹의 집권 시대 때이다. 자신과 잔 다르크가 벽지 출신이고, 대포를 주무기로 다뤘으며, 영국과 맞섰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내세웠다. 그냥 억지로 끼워 맞추기다 잔 다르크가 정말 별볼일 없는 수준이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조작되고 부풀려진 영웅이라는 일부 수정주의적 인식도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 자세한 건 잔 다르크 항목을 참조.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와는 거의 숙적 관계로 취급받지만, 사실 꽤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다.

에서 태어나서 에서 죽었다.

유배지에서의 공책이 경매에 올랐는데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잘하지는 못했다. run의 과거형은 ran인데 runned라고 우직하게 한 페이지를 채워놨다고 한다. 링크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프랑스 프랑 지폐에 등장한 인물 중 하나다.

파리를 여행하다보면 다리나 궁전 같은 건축물에 월계수 안에 N자가 있는 부조를 대단히 많이 볼 수 있는데 나폴레옹과 조카분이 열심히 새겨주신 덕분이다.

백괴사전에는 박로미, 플라톤과 함께 BL 3대 성인이라고 되어있으며 축구를 엄청나게 잘한다고 되어있다.

위에서도 항목을 따로 만들어 언급할 정도로 나폴레옹은 흔히 잠을 적게 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니시오 이신의 소설인 고양이 이야기 (백)에서 오시노 시노부는 "나폴레옹은 하루에 3시간 밖에 자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으로, 수 시간 이상 탕에 들어가 목욕을 즐겼다고 하는구나. "아니, 이거 묶어서 생각해보면 목욕하던 도중 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은근히 그럴 듯 한데?

2014년 11월 16일에 모나코 왕실에서 보유중이던 나폴레옹의 이각모를 경매에 내 놓았는데 하림 그룹의 김홍국 회장이 낙찰받았다.# 문제는 무려 26억원 가까운 돈을 주고 샀는데 하림 그룹 여러 문제로 투자자들 비난을 받던 중에 이런 것. 게다가, 나폴레옹이 쓰던 칼에서부터 여러가지까지 경매로 11억원을 주고 사서 이게 언론으로 알려지면서 투자자들에게 욕을 처먹었다.

4.7 대중매체에서의 나폴레옹

4.7.1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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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치가 안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항목 참조.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선악과를 가졌던 인물로 밝혀지며, 최신작인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 장교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4.7.2 그 외

일단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벌어진 최후의 국가 간 대규모 전쟁이므로 수많은 게임과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 소재로 쓰이고 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도 나폴레옹이 언급된다. 나폴레옹이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에드몽 당테스가 누명을 쓰고 인생이 망가지게 되는 배경이 나폴레옹의 편지를 외부로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현재까지 나온 나폴레옹이 주연인 영상매체로 가장 유명한 것은 1927년작 영화 '나폴레옹'과 70년작 워털루 및 2002년 제작된 프랑스의 TV 미니시리즈 Napoléon이 있다. 아벨 강스의 27년작 나폴레옹은 무성영화 시절 막바지 들어 영화에 대한 감독들의 권한이 극에 달해 있던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1부부터 6부까지 연이어 만들어질 계획이었으나 1부만 해도 그 내용이 330분(!!)에 달했고, 거기에다가 후반부의 전투 장면은 1.33:1 화면 세 개를 붙여서 만들어진 4:1 화면으로 상영해야만 했다. 이런 엄청난 길이와 전례 없는 기술적인 난제 때문에 영화는 일부 공간에서만 제한적으로 상영되었고, 영국과 미국에 가서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 할 때 즈음에는 유성 영화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묻혀버렸으며, 그나마도 4:1 시퀀스가 전부 1.33:1로 잘려나가고 러닝타임이 훨씬 더 짧아지는 등 수많은 부분들이 잘려나간 뒤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당연히 영화는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나폴레옹 2~6부는 촬영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이 영화는 1980년에 가서야 완전하게 다시 원래 형태로 복원되었지만, 이나마도 VHS레이저디스크로 발매된 이후 다시는 홈미디어로 발매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 1~2년에 한번씩 대형 오페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반주와 함께 상영되어야만 운 좋게 볼 수 있다. 영화 자체는 후기 무성 대작들 중에서 최고 수준은 아닐지라도 그 사치로운 세트 구성과 기술적인 대담함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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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시리즈는 크리스티앙 클라비에(나폴레옹 역) , 제라드 드 빠르디유(푸셰 경시총감 역), 이사벨라 로셀리니(조세핀 역) 등등 당대 프랑스 최고의 배우와 존 말코비치(탈레랑 외무장관 역)가 출연한걸로 화제를 모았다. 유투브에서도 나폴레옹 관련 검색어에서 빠지지 않은 작품. 특히 코미디 연기로 그동안 알려젔던 크리스티앙 클라비에가 열연한 나폴레옹은 그간 나폴레옹을 맡은 배우 중 실제인물과 가장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말코비치 역시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자 책략가로 유명했던 탈레랑의 모습을 훌륭히 보여주었다. 라 마르세예즈와 합성한 동영상도 유투브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라 마르세예즈

Commands and Colors Napoleonics, 줄여서 C&C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보드 게임이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다. 이외에도 나폴레오닉 워(The Napoleonic Wars), 나폴레옹의 승리(Napoleon's Triumph), Manoeuvre, 야전사령관-나폴레옹(Field Commander: Napoleon) 등등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보드게임은 정말 많다. 나폴레옹 전쟁 관련 보드게임만 모아놓은 자료

토탈워 시리즈나폴레옹: 토탈 워는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이유인지 플레이 도중 나폴레옹만은 부대가 전멸해도 죽지 않고 부상당해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메세지만 뜨고 나중에 다시 돌아온다. 그래도 부상당해서 본국 귀환하면 레벨이 떨어지니 조심해야 한다.[62] 캠페인하면서 경험치가 쌓여서 자동전투를 시키면 두 배 정도의 적은 간단히 이긴다. 문제는 만나는 적마다 기본 물량이 2배는 우습게 넘어간다는 것이지만

코에이에도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게임으로 1990년에 발매한 랑펠로(정확한 독음은 랑페뢰)가 있다. 다만 난이도가 모든 코에이 게임들 중 가장 어려운 데다[63] 후속작이 안 나온 관계로 삼국지 시리즈신장의 야망 시리즈에 비하면 인지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문명 5에서는 프랑스의 지도자로 나온다. 근육맨2세에 따르면 실은 시간초인이었다고 한다.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포켓몬 엠페르트는 나폴레옹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한칭, 영칭, 일칭 공통.

진정남 나폴레옹이라는 만화도 있다.(원제는 '사자의 시대 - 나폴레옹'. 초월번역?)
#링크
본 이미지는 나폴레옹의 실제 모습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는 않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보자. 이게 나폴레옹인지, 켄시로인지 싶어질 거다(…).

참고로 이 만화의 작가는 문명 5 출시 기념으로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문명 홍보 만화를 그혔다.

한국만 해도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 시리즈에 그가 나오지 않은 시리즈가 없다. 그래서 이고깽, 양판소, 영지물의 주인공들은 사이비 보나파르티스트거나 진시황 짝퉁인가?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1세대 판타지 소설 불멸의 기사 2부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당연히 등장한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정체를 다름 아닌 루이 16세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충격과 공포.

국내 웹툰 플린트 락 머스킷은 나폴레옹 전쟁을 배경으로 한 수인물이다. 주인공 로제타 듀베르는 용기병[64] 여성이지만 나폴레옹 본인도 수인화되어 출연한다.

역시 용을 다룬 대체역사소설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도 당연히 등장했다. 간지폭풍 절대군주로 나온다.

포켓몬스터엠페르트는 나폴레옹이 모티브. 이름의 조합이 황제를 뜻하는 영단어 Emperor+보나파르트다.

나폴레옹의 명성 때문에 19세기에서 20세기 초의 유럽 대체역사소설계에서는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든지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대체역사적 가정이 단골 떡밥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역사학자들이 다룬 대체역사인 What if에서는 나폴레옹이 중간에 전쟁을 그만두고 정치와 외교로 해결을 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을 하고 있다. 만일 나폴레옹이 틸지트에서 승리하고 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좀 더 너그러운 방향으로 조약을 맺었다면, 유럽은 나폴레옹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고, 결국 영국도 굴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챕터의 제목이 우주의 왕 나폴레옹이다.

해리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두 명의 조지"에서는[65] 프랑스 왕가가 1980년대까지 존속하게 된 영웅으로 묘사된다. 루이 16세의 목숨을 노리는 파리 민중들에게 대포 사격을 하는 바람에 소요를 진압한 장교가 바로 나폴레옹이다.

겁스 무한세계의 '보나파르트' 세계들은 나폴레옹이 승리한 평행세계들이다. 그 중에 하나인 보나파르트-6은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인으로 태어나 통일 이탈리아를 건국했다![66] 또한 레비아탄이라는 세계에서는 바다에서 딥원아틀란티스인들이 갑툭튀해서 프랑스가 시망하자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지대에서 모래제국(...)을 건국했다.

한국에서 나폴레옹 관련 영화를 하면 주로 양지운이 더빙을 맡는다.

코드 기어스 시리즈에서는 현실역사와 달리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 해군을 관광보내고 영국에 상륙[67],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신대륙으로 피난케 함으로써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건국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원래 설정으로는 전 유럽의 황제가 되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으나, 코드 기어스 망국의 아키토에선 황제가 되지 않고 공화정의 장군으로서 살았던 걸로 설정이 변경된 것 같다.

베르사유의 장미 5권에서 지나가는 포병장교로 잠시 등장한다. 스무 살의 소위로 나오는데 오스칼이 스쳐 지나가다 눈빛에 깜짝 놀라 관등성명을 묻고 그 이름을 기억해둔다. '사람의 몸을 얼어붙게 할 것 같은 그런 눈빛이야..! 보통 사람의 눈이 아냐!' 이후 에필로그에서 황제에 즉위한 모습으로 한 컷 등장한다.

그리고 이케다 리요코가 베르사유의 장미 연재를 마친 후 '황제 나폴레옹'이라는 만화책을 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찍은 이후 나폴레옹에 관한 대작을 찍기 위해서 고군분투했지만 세르게이 본다르추크 감독의 1970년 작인 워털루가 쫄딱 망하면서 투자를 못 받아 계속 연기했고 결국 죽을 때까지 꿈을 이루지 못했다. 나폴레옹 역으론 잭 니콜슨이 낙점된 상태였는데 잭 니콜슨은 큐브릭에게 나폴레옹 역을 제안받고 매우 기뻐했으며 큐브릭이 자신을 불러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그 전에 큐브릭이 죽었다.(...) 대신 니콜슨은 이 인연으로 샤이닝의 잭 토렌스 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대신 이것은 악연이 된다[68]

키아누 리브스가 이름없던 시절 나온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에서는 우연히대포 오발 덕분에 타임머신에 타게 되어 현대 미국으로 오는데 현대 세계에서 바로 수영장[69]의 미끄럼틀에 반해 종일 그것만 타고 논다(...). 두 주인공이 친척 아이에게 부탁하여 맡기는데 나중에 그 아이가 "형, 저 바보 남잔 대체 누구야?"라고 질문한다. 주인공 둘이 나폴레옹이라고 답변하자 "웃기지마! 미끄럼틀만 종일 타고 아이스크림만 신나게 먹는 저런 띨띨이가 나폴레옹이라고?"라며 전혀 믿지 않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위인들이 죄다 맛탱이가 가서 현대 미국에서 활약하긴 한다. 칭기즈 칸은 백화점에서 마네킹을 신나게 부수고 잔 다르크는 에어로빅 강사를 칭하며 신나게 에어로빅을 춤추듯 하다가 진짜 에어로빅 강사와 경비원들에게 끌려가며 빌리 더 키드는 백화점에서 미치도록 총을 천장에 쏘다가 경비원들에게 끌려가고 베토벤은 전자 키보드를 신나게 연주하며 프로이트는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정신분석학을 연설하는데 사람들은 어안이벙벙하게 바라보고 링컨은 백화점 안에서 연설하는데 사람들이 무슨 미친 놈 바라보듯이 한다...

나폴레옹 전쟁이 배경인 혼블로워에서는 주인공이 영국 해군이다보니 절대악으로 묘사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 혼블로워의 활약은 나폴레옹에게 치명타를 준다.

사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해병대에게도 진다 카더라

4.8 어록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 - "알프스 산맥을 넘기전 한 말이자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명언"
"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70]
군대는 배가 불러야 움직인다.
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내 손안에 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한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는게 낫다
  1. 루이 17세는 추존된 명칭이고, 공식적으로는 루이 17세는 왕이 아니다.
  2. 전쟁론으로 유명한 클라우제비츠를 비롯해 소련군의 아버지 투하체프스키, 거기다 독일군의 슐리펜 계획까지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았다!
  3. 1748~1825/ 신고전주의 화가. 천재적인 그림 실력과 그에 맞먹는 처세술프랑스 혁명 이전부터 나폴레옹 이후까지도 살아남아 천수를 다했다.
  4. 왼쪽 아래의 바위에 한니발샤를마뉴가 새겨진 것은 덤이다.
  5. 루브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박물관이지만, 이곳에 이 그림은 소장되어 있지 않다.
  6. 심지어 적국인 영국측에서 그린 초상화도 마찬가지. 나폴레옹을 유배 보낸 후 그린 초상화에서 나폴레옹을 깎아내리기 위해 작은 키에, 배가 나오고, 얼굴도 살찌고 머리숱도 적게 묘사했지만 미남인 본 바탕은 건드리지 않았다. 음 근데 M자 탈모는
  7. 그러나 그가 그의 이름을 코르시카 사투리로 발음하면 ‘라파이유 오네’(코가 없는 사람)으로 들려 많은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지못미.
  8. 코르시카어는 프랑스어보다는 이탈리아어에 더 가깝다고 할 정도로 사실 가까운 수준이 아니라 장기간 이탈리아 땅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어 사투리였고 프랑스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프랑스 표준어와는 달랐기 때문에 말도 잘 안 통했을 것이다. 당연히 우아하다고 여겨졌던 프랑스어를 쓰는 다른 귀족자제들이 무시했을 것이다.
  9. 하지만 이 성적은 나폴레옹이 1학년때 3학년들과 경쟁한 성적이다. 사실 나폴레옹은 학교생활 중 아버지 샤를이 위암으로 39살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장을 맡아야했고 1학년에 3년 과정을 마스터하고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압도적인 성적을 자랑하는 괴수들에게 비하면 부족한 건 사실이다.
  10. 여담으로 나폴레옹 본인은 사실 해군에 지원하고 싶어했었다.
  11. 참고로 이 팜플렛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다음에 전력을 다해서 없애려고 노력한 당대 최고의 금지 문건이 된다.
  12. 왜냐하면 툴롱포위전이 벌어지는 1793년은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13. 방데 지방은 가장 대표적인 왕당파 세력으로 이 지역의 반란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이후는 물론이고, 나폴레옹이 100일 천하로 집권한 시기까지 이어졌다. 말 그대로 답이 없는 상황.
  14. 이 시기에 나폴레옹은 현 조제프의 처제인 데지레 클라리(Desiree Clary)와 약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세핀과 결혼하게 되면서, 클라리와 파혼. 그리고 클라리는 나폴레옹의 추천으로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와 결혼해서 스웨덴 왕비가 된다. 그래서 스웨덴이??
  15. 본인도 이를 부정했고, 결국 재판에서 무죄방면된 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6. Général Vendémiaire. 방데미에르가 포도의 달이는 의미가 있으면서, 동시에 포도탄을 동족에게 쏘아댄 냉혈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7. 실제로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당하기 전에 한 유언이 카이사르가 등장할 것이라는 거였다!
  18. 프로이센 대 오스트리아의 게르만 패권 다툼이 있었고, 프로이센이 승리해 오늘날의 독일의 전신인 제2 제국을 만들게 되었다.
  19. 실제로,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과 함께 현재의 독일이나 스페인 등 프랑스에 점령당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급진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였지만, 이들 급진세력은 프랑스 혁명의 공화주의와 자유주의 이념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로, 자국을 짓밟은 침략·학살·약탈자였던 프랑스(와 나폴레옹)을 지극히 증오하였으며, 이는 민족주의 이념이 나타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의 급진세력으로부터 나타난 공화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이념은 19세기 유럽의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민족 국가의 탄생을 불러온 원인이 되었다.
  20.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감이 얼마나 컸는지 그가 황제가 된 프랑스까지 싫어했다. 뭐 자신의 팬이 프랑스인이라고 하면 그것까지 싫어하고 화내진 않았지만. 베토벤이 살던 오스트리아에 프랑스가 쳐들어오고 이후 프랑스군에 대한 연주회 강요가 들어오자 날 죽여봐라는 투로 혐오하며 거절한 일화도 있다.
  21. 나폴레옹을 신격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22. 헤겔은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절대정신을 들었다.
  23.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 혁명으로 교회에 심각한 타격을 준 프랑스와는 달리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때문에 스페인 국민들은 나폴레옹이 자기 나라의 교회마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역시 느끼고 있었다.
  24. 다만 이 후퇴작전을 총지휘한 것은 쿠투조프가 아니라 스코틀랜드계 조상을 둔 발트태생 바클라이 드 톨리였고, 쿠투조프는 보로디노 전투 전부터 러시아군을 지휘했다. 청야전술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는게 현재 중론이고 초기 경질된 바클라이 드 톨리의 공이 컸지만 외국계라 쿠투조프만 민족영웅이 된 것. 톨스토이 소설에서 쿠투조프 빠기질이라 까이지만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블로그 출처 카더라에서 연속생산된 헛소리가 대다수다. 자세한건 레프 톨스토이, 알렉산드르 1세, 미하일 쿠투조프, 러시아 원정 참조.
  25. 금방 끝날 줄 알고 방한복도 없이 왔고, 드넓지만 텅텅 빈 겨울의 땅에서 물자를 조달할 방법은 없었다.
  26. 별도로 프랑스 남부에선 이베리아에서 웰링턴이 12만 병력으로 쳐들어와서 술트가 8만 명으로 막고 있었다.
  27. 나폴레옹의 몰락 항목에선 10만. 이전문서 무려 12만이라고 써놨는데 나폴레옹의 최후의 불꽃 6일 전역(Campagne des Six-Jours)은 장거리 원정이라 행렬이 길어진 동맹군 일부를 기습으로 박살낸 것이고 사상자 수도 대단할건 없어서 대세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28. 루이 16세의 아들인 루이 17세는 10살 때 감옥 안에서 죽었다.
  29. 나폴레옹 역시 자존심이 강해서 죽을때까지 허드슨에게 굽히지 않았다.
  30. 그것도 덩치 좋은 병사들을 골라서 배치했고 나폴레옹이 외출을 하겠다고 나오기만 하면 심하게 때려서 연금시켰다.
  31. 광해군도 제주도로 유배이후 병사들이나 여종들이 영감이라고 부르는 등 모욕적인 조치를 했다
  32. 본인도 나폴레옹을 이런 식으로 욕했다.
  33. 나중에 나폴레옹이 다죽어가자 하지않았고 '죽게 돼서 축하한다'라는 폭언을 날린다음 관심을 끊는다.
  34. 아닌 게 아니라 허드슨 로는 영국군 내에서도 휘하 부하들한테 가혹행위를 하여 증오받았던 최악의 쓰레기였다. 게다가 이 양반은 능력도 없어서 한직만 전전한데다 개차반같은 성격 때문에 부임지마다 주변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킨 탓에 총독 되기전에는 장교에서 조기 퇴직대상이였다. 나폴레옹이 죽고나서 좋지않았는데 그의 주치의였던 오미라의 고발로 총독 자리에서 파면당한다. 이후 조지 4세의 배려로 한직인 Ceylan 지역의 부대장 자리만 전전했다. 그래도 영어를 보면 알겠지만 작위는 받고 늘그막엔 85세까지 장수하며 평온하게 적당히 살다가 갔다. 하지만 영국 왕 조지 4세나 뒤를 이은 윌리엄 4세도 로에 대하여 아부는 잘하는데 됨됨이가 영 아니라고 깠을 정도였다. 장례식에서도 식솔들이랑 극소수 친척들만이 참석했을 정도다. 즉 귀족 세계에서조차 철저하게 멸시당할 정도로 인망이 없었다.
  35. 실제로 나폴레옹이 벳시 발콤이라는 소녀와 친하게 지냈다는 것은 사실이고, 몇몇 에피소드는 당시 남아있던 문서에서 가져왔으나, 대부분의 내용은 창작이며 작가인 스태튼 라빈도 소설이라고 밝혔다.
  36. 사후 40시간 뒤에 의사 프란체스코 안토마르치가 본을 떠서 만들었다. 나중에 세 개의 복제품이 추가로 제작되어 나폴레옹의 데스마스크는 현재 네 개가 존재한다.
  37. 프랑스 역사에서 "자연적 국경선"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확보했던 시기가 나폴레옹 집권기다.
  38. 우리나라의 법 체계도 대륙법(나폴레옹에게 자극을 받아 정비된 독일법+그 독일법을 이어받아 나름대로 정리한 일본법)을 바탕으로 영미법을 받아들인 절충 형태이니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은 셈.
  39. 1위는 나폴레옹 시대, 2위는 2차 세계대전 때.
  40. 정확히는 원래 정의되었던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정의한 것이다.
  41. 1차 대프랑스 동맹은 애초에는 나폴레옹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나폴레옹이 혜성같이 나타나 대불동맹군을 격파하였고 결국 1차 대불동맹은 와해되었다.
  42. 워털루 전투 시점에서 란, 베시에르, 베르티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뮈라는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그의 몰락에 기여한 전력 때문에 합류를 거절당했다. 마세나는 나폴레옹에 합류하길 거부했고 모르티에는 신경통으로 쓰러졌으며 다부는 마르몽에게 배신당한 기억이 뼈아프게 남은 탓인지 전쟁장관직을 맡겨 파리에 남겨두었다.
  43. 뮈라는 지성은 보잘것 없었지만, 언제, 어디로 기병대를 돌격시켜야 할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어 기병지휘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면 네는 일선에서 부대를 이끄는 능력은 뛰어났지만, 전략적인 판단능력은 결여되어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게다가 워털루 당시의 네는 이중배신을 한 입장상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상태였다.
  44.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증기선의 이름은 "나폴레옹 호"였다.
  45. 그런데 그런 히틀러 조차 처음에는 탄도 로켓 등의 신 기술에 회의적인 반응을 낸 적도 있었다.
  46. 왕이라는 점도 굉장한 것이지만, 뮈라를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해 자신의 친형을 해임시켰다. 즉, 나폴레옹은 자신의 측근 서열에서 뮈라를 자신의 형보다도 우위에 뒀다. 이 정도면 말 다했다. 당대 유럽을 생각하면 정말 파격적인 것. 그것과는 별개로 낙하산 인사가 떨어진 스페인에서는 난리가 났다. 빌어먹을 나비효과
  47. 이 방침이 절정에 이르렀을때가 바로 틸지르조약때였다. 틸지르조약으로 유럽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동통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대불동맹을 주도하던 오스트리아는 적들로 묶인 식물인간, 프로이센은 국가의 국토가 반토막난걸로도 모잘라 경제적으로 파산난 프랑스의 속국수준으로 떨어졌다.
  48. 다만 이는 당시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 페르난도 왕의 반(反)프랑스 정서에서 기인한 바도 크다.
  49. 지금도 유럽과 가까운 북아프리카는 대체로 아랍국가다
  50. 이슬람교를 믿으면 술을 못 먹는데 우리 프랑스인들은 술 못 마시는 안 된다고 둘러대어 결국 개종은 안했다. 근데 일부 프랑스 장교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현지 여자들과 결혼하기도 했다.
  51. "중국은 잠자는 사자다. 만약 잠에서 깨기만 하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프랑스 수교 50주년 기념대회 강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실제로 200년 가까이 지난 21세기 현재 중국이 폭풍성장하여 미국과 함께 전세계를 뒤흔드는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을 보면 나폴레옹의 이 발언이 그의 정치적 안목을 가늠케 한다.
  52. 정말 웃기게도 러시아 원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전에 찾아가 다짐하고 왔는데 되풀이는 하지 않았다. 훨씬 크게 말아먹어서 그렇지
  53. 현대 프랑스인의 평균 식사시간의 1/4 정도다.
  54. 착각한 게 아니라, 차이가 있는데 난쟁이 똥자루로 폄하하려고 일부러 틀리게 측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55. 최근에 Lucotte 교수에 의해 나폴레옹 3세와 1세의 유전자 검사가 있었는데, 둘은 실제로 아무 혈연관계가 없음이 확인되었다. "Professor Lucotte tested the Y-DNA of Napoleon I, Napoleon III and their descendants, and was able to confirm that Napoleon III was not the biological nephew of the first Emperor of the French." http://www.eupedia.com/europe/Haplogroup_I2_Y-DNA.shtml 출처
  56. 주로 영국 측에서 그린
  57. 나폴레옹 본인도 그를 튈르리 궁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좋아했다.
  58. 이전 버전에서는 성을 아예 나폴레옹으로 바꾸었다고 기재했으나 그렇지 않다. 현재도 보나파르트 가문으로 불리고 있지 나폴레옹 가문이라고는 안 한다. 유럽의 황족, 왕족들은 이름을 적을 때 성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름 중 마지막 부분을 성이라고 단정하면 안 된다.
  59. http://www.strangehistory.net/2013/12/02/napoleon-and-the-great-pyramid/
  60. 왜 아무 것도 없었는지는 피라미드 항목 참고.
  61. 이건 별난 일이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1800년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수학과 과학에 정통했던 집단이 공병과 포병 장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한가락 했다 하는 프랑스 수학자나 물리학자들 명단을 보면 죄다 에콜 폴리테크닉(프랑스 혁명기에 설립된 공병장교 교육기관. 오늘날에도 프랑스 제일의 이공계 교육기관으로 남아 있다)에서 공부하고 군에서 공병이나 포병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 군대에서 응용되는 공학기술(축성술, 탄도학, 대포제조법 등등)의 기초로 수학이나 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기관이 공병/포병 장교 사관학교 뿐이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됐듯이 나폴레옹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정통 포병 장교 출신이다. 당연히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수준의 수학, 과학, 공학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62. 정확히 말해 당대의 5대 강국의 가장 유명한 지휘관 1명은 다 이런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고 영국은 아서 웰즐리, 오스트리아는 카를대공(항목 3번의 테셴의 카를), 러시아는 쿠투조프, 프로이센은 블뤼허.
  63. 징병이 1년에 딱 한번만 가능한데다가(게다가 승리 후 남은 적군의 예비병도 흡수 불가능하다.) 스페인, 러시아의 경우는 완전 점령을 못할 경우 게릴라의 습격으로 물자, 병사를 잃게 된다. 숨겨진 시나리오인 엘바 섬 탈출은(PC판만 있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깰 수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이 시나리오를 깰 수준이면 코에이의 모든 게임을 깰 수 있다는 말까지 있으니(...).
  64. 작품에선 용을 타는 기병. 본래 뜻은 용기병 항목 참조.
  65. 조지 워싱턴과 영국왕 조지가 극적인 타결을 거둬서 코드기어스? 미국 독립전쟁은 소요로 끝나고, 영국령 북미연방으로 남게 된 후 1980년대 찰스 2세 집권 시기를 다루고 있다.
  66. 코르시카의 혁명가 파올리가 없어서 코르시카가 제노바령이었다.
  67. 이 세계관의 호레이쇼 넬슨은 그냥 삼류 제독이 된걸로 추정.
  68. 샤이닝 촬영으로 두 사람은 상당히 안 좋은 사이가 된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촬영 일화들은 상당히 악명 높다. 같은 장면을 별 설명도 없이 다시 찍고 다시 찍고 해서 백번 넘게 찍었던(심지어 길거나 복잡하지도 않은 장면) 일화는 니콜슨을 질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큐브릭은 니콜슨을 놀리려고 쉬는 시간에 그에게 사진을 찍어준다면서 그 뒤쪽 거울에 비친 자신과 딸을 찍었던 적도 있다. 개개끼야 그냥 나폴레옹이나 찍어
  69. 이름이 Water loop다.(...)
  70. 실제로는 평균 이상으로 그리 작은 편은 아니고 오히려 크다면 큰 키였다. 하지만 항상 상당히 큰 키에 높은 곰털모자까지 쓰고 다니는 프랑스 제국 근위대와 다니다 보니 그런 인식이 생긴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