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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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절대로 남북 시대가 아니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현재 분단시대가 제2 남북국시대가 될지 모른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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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시대 지도, 초록색은 각각 발해통일신라, 빨간색은 소고구려다.

넓게는 신라의 삼국통일전쟁부터 후삼국시대 이전까지, 좀 더 정확하고 좁게는 발해의 건국인 698년부터 발해의 세력이 쇠하고 통일신라가 후삼국으로 갈라진 900년까지를 말한다.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삼국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라고 칭했으나, 발해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면서부터 발해가 존재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통일이라고 말할 수 없고, 따라서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대세가 되었다.[1] 게다가 통일 신라라고 칭하게 되는 순간 중국의 동북공정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발해가 중국 역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당시 신라가 고백신 삼국을 통합했다고 당시에 스스로 인식했던 것은 사실이며,[2] 후술할 남북국시대 명칭은 그럼 적절한가[3]나 이전 삼국의 신라와 전쟁이 끝난 뒤 커진 신라의 구분 문제부터 시작해 여러가지 이유로 통일신라라는 명칭도 상당히 쓰이는 상태다.

2 "남북국시대" 개념의 역사

신라의 삼국통일론(삼국통일전쟁)에 있어서 반대적인 시각으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영토의 불완전성 문제다. 조선 중기의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에서 이런 면을 수도의 위치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정할 때는 그 규모가 크지 않으면 안 되며, 그 형세를 잘 살펴야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당군이 철수한 뒤 수도를 국토의 중앙 지역으로 옮겨 사방을 제압하였다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할 수 있어, 부여와 요양 심양 지역을 우리 판도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어찌 저 거란이나 여진(女眞)이 홀로 그 땅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신라의 군신이 일이 성사되자 쉽게 만족하여 한 모서리에 안주하여 당장의 안전을 추구하며 나날을 보내고, 서북 지역 태반을 헌신짝 버리듯 인접한 적들에게 내주어, 마침내 그 뒤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7백여 년간 계속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으니, 어찌 가히 탄식치 않으리오. - 《동국지리지》 中

 
한백겸은 신라 지배층이 안정책을 취해 고구려의 옛 땅을 방기한 것을 비판하면서, 고구려 영토의 태반을 포기한 점이 결국 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며 불만스러운 점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18세기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에서 9주5소경을 기술하면서, 위에 제시된 한백겸의 글을 인용하였다. 안정복도 고구려 영역 통합의 불완정성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신라 삼국통일론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것은 조선 후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면서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 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동쪽과 서쪽 북쪽을 개척하여 (고구려의 영역)보다 더 넒었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 유득공(柳得恭), 1784년, 《발해고(渤海考)》 서문

 
유득공은 남북국시대론을 개진하면서 고려 통일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결국 신라 삼국통일론을 부정하는것이나 다름없다.

신라 통일의 불완정성을 논하는것은 결국 고구려의 영토를 신라가 제대로 통합하지 못했고, 그것때문에 우리나라가 약소국이 되었다.는 식의 인식과 연결되었다. 이런 인식이 근대에 들어와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신라통일론을 비판하고 남북국시대론을 진전시켰다. 그러면서, 신라가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을 팔아먹었다는 식의 비자주성, 비민족성을 강조하여 비판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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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신채호가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그는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고, 신라와 발해의 양국 시대를 주장하였으며, 이종(異種)을 불러 동종(同種)을 멸함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임과 다를 바 없는 행위라면서 신라의 통합 전쟁을 비난하였다. 신라가 민족적 역량과 영토의 축소를 가져왔으며, 외세와 결탁한 반민족적 행위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독소를 심었다는 것이다.

삼국통일론과 남북국시대론을 둘러싼 논의에서, '민족'이 핵심 화두가 되었다.

역사의 도덕화, 이념화는 민족주의 사학의 주요 특성이고, 이에 따른 신라 통일론 비판과 남북국시대론의 강조의 사론은 20세기에 꾸준히 이어졌다. 그런가 하면 삼국시대에는 아직 민족 관념이 성립하지도 않았다면서 민족 관념으로 삼국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신라 통일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671년,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보낸 문무왕의 서한에서 언급한,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 영토로 한다는 김춘추(金春秋)와 이세민(李世民,)의 합의를 주된 논거로 하여, 신라 조정의 전쟁 목적이 삼국통일이 아닌 백제의 병합이었다고 파악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설에서는 신라가 고구려 영역을 온전히 통합하지 못한 것은 본래 의도부터가 그러한 만큼, 이에 대한 비판은 삼국통일론에 집착함으로서 야기된 자승자박적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남북국시대를 깊이 추구하다 보면 결국 통일신라라는 명칭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7세기 말 이후의 신라국가의 명칭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견해 등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시각이 7세기 이전의 이른 시기에 한국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삼국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 인식에 의거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죄악의 행위이며, 그나마 온전히 통합하지 못하고 남은 일부가 따로 나라를 세웠으니, 이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역시 상당하다. 삼국통일전쟁 항목의 해당 부분 참조.

3 현대 학계에서의 "남북국시대" 개념의 위치

남한 학계에서도 남북국론에 서서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이 시기의 역사를 서술한 개설서 등이 출간되었다.[(한명우「다시 찾는 우리 역사」,1997, 제3장 발해와 그 문화, 제4장 후기신라의 사회와 문화). 반면 북한 한계는 '후기 신라'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초기에는 신라가 당과 결전을 벌여 이를 몰아낸 사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다가 1960년대 이후부터는 발해사를 강조하고 신라 통일론을 부정하였다. 나중에 가면 오히려 더 발해에 비중을 두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

사실 발해의 정체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학계에서 첨예한 논쟁 중이긴 하지만, 국내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국가이며 한국의 역사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이므로 1990년대 후반부터 국사 국정교과서에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이 병존하고 있어, 이것이 모순적인 교육이라는 지적도 자주 있어 왔다. 물론 발해의 정체성에 대해 국내 학계에 회의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부하는 표현.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각각 통일신라발해 항목을 참고. 사실 '남북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면 신라와 발해의 당시 비중이 비슷하게 다루어져야 하겠지만, 발해에 대한 기록이 턱없이 적은 탓에 비중은 압도적으로 신라 연구 쪽으로 쏠려 있다. 서강대학교 이기백 교수를 위시한, 신라와 발해의 '남국 - 북국' 의식 주장에 대해 회의하는 입장에서는 아예 이러한 분류보다 '요동사' 개념을 도입하는 등의 시도를 하기도 했다. 신라가 발해를 '북국'으로 지칭한 기록은 분명하나(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등),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지칭했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게다가 이러한 표현 또한 단순한 방위 표시라는 주장이 제시되었는데, 예를 들어 발해는 일본을 남국으로 지칭하기도 해 신라만을 특별히 다룬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4 시대적 특징

어찌되었건 이 시대는 전반적으로 이슬람교 세계의 국제성에 힘입어 한반도 왕조에서도 국제적인 조류를 타, 아랍에 신라가 알려지고 발해는 모피 수출로 이름을 날리는 등의 족적을 남겼다. 8세기 후반 들어 당, 신라, 발해가 모두 정치적 혼란 속에 빠지면서 국제성은 쇠퇴하고 연안 무역이 발달하긴 했지만, 9세기 초 발해와 신라가 약간의 회복세를 보이면서(대인수흥덕왕 등) '신라도'가 뚫리고 청해진이 설치되는 등 교역은 오히려 더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9세기 후반 들어 발해는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신라는 진골의 소모적인 내전 상황에 이은 민란의 폭발과 지방 세력의 대두로 인해 900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후삼국으로 분열(후삼국시대)하며 남북국시대는 종결된다.

5 관련 창작물

후삼국시대와 같이 소외되고 있는 시대로 관련 창작물은 많지 않은 편이다.

  • 소설
    • 대발해 - 대발해(만화)
    • 대조영 - 위의 드라마 대조영의 원작.
  1. 과거엔 절대 다수로 통일신라시대라고 표기하던 것이 대세였지만 최근 학계와 출판물에선 남북국 시대를 언급이 늘어났다.
  2. 발해가 건국되기 이전인 7세기 후반부터 보덕국, 9주 5소경 행정구역 설정(옛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3주씩 부여해서 9주), 9서당 설치 등 '고구려도 이제 신라의 일부'로 간주하고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했고, 당시 신라는 보덕국왕을 고구려왕으로 칭했다.
  3. 서로 남국, 북국으로 불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발해일본을 남국이라고 부른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