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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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이름노장진(盧長震 / Jang-jin Noh)
생년월일1974년 8월 10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충청남도 공주시
출신학교공주고등학교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3년 빙그레 고졸우선지명
소속팀빙그레-한화 이글스(1993, 1997~1998)
삼성 라이온즈(1999~2004)
롯데 자이언츠(2004~2006)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4번(1999)
성준(1986 ~ 1998)노장진(1999)훌리오 프랑코(200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8번(2000 ~ 2004)
변대수(1997 ~ 1999)노장진(2000 ~ 2004)박석진(2004)

1 소개

원조 파이어볼러
삼성 라이온즈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마무리이자 최고의 강속구 투수 중 하나였으나 자기관리 실패 등으로 일찍 망가져버린 비운의 선수.
KBO 리그 선수. 등번호는 28번 - 14번 - 18번.

오승환이 나타나기 이전 원조 돌직구였다.묵직한 직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평균 140km대 중반, 최고 150km대의 엄청난 속구를 팡팡 뿌려대었다. 게다가 중계화면으로 보면 공이 살짝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수직 무브먼트도 대단했다. 요즘처럼 회전수나 궤적 분석이 가능한 시대였다면 최강 직구 이야기에 반드시 등장했을 선수. 슬라이더와 커브도 준수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내구성도 대단해서 사생활 문제, 현역 군복무등 기량이 떨어질만한 사태가 계속 벌어졌음에도 강제 은퇴 직전까지도 140km대의 직구를 계속 뿌려대었다. 물론 선수 생활 말기에 제구력이 많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는데 훈련 부족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임선동과 함께 프로야구계의 풍운아로 더 유명하다.[1]

박찬호의 공주고등학교 1년 후배이다.

2 프로 시절

2.1 빙그레-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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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그의 프로 데뷔이자 임종을 맞이한 빙그레 이글스의 현역 선수시절 포부가 참 야심차보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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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임의탈퇴 이후 4년만에 다시 돌아온 한화 이글스의 현역 선수 시절 근데 의욕이 없어보인다

공주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인 1992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무려 노히트노런으로 승리하여 팀의 우승을 견인했다. 이듬해인 1993년 1월 원광대학교 합숙훈련 도중 뛰쳐나와 계약금 4천만원의 조건으로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 것도 이러한 활약에 따른 기대를 반영했던 것이었다.

1993년 빙그레 이글스에서 데뷔하여 그해 100이닝 3승 10패 평균자책점 4.41로 공주고 시절보다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놀기 좋아하는 성격과 지속적으로 선수단을 이탈하는 등 불성실한 생활 태도로 인해 1994년 초 임의탈퇴 공시되었고, 현역으로 입대하여 유격 조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군 복무를 마친 1997년 임의탈퇴가 해제되어 한화 이글스에 복귀했지만 별 다른 활약은 없었고, 1998년 말 최익성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어 고향 팀 한화를 떠나게 되었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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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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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되어 뿌듯했던 삼성 라이온즈 현역 선수시절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1999년 최익성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트레이드되었고, 트레이드된 첫 해인 1999년 188⅓ 15승 9패 평균자책점 4.35로 삼성의 선발 에이스로 활약하며원조 탈칰효과 잠재력을 대폭발시키며 한화 시절 사고뭉치 만년 유망주 이미지를 벗어나며 환골탈태하였고, 임창용이 2001년 선발로 전향한 뒤 마무리 자리에 공백이 생기자[2] 2002년부터 팀의 마무리로 자리잡았고, 63경기에 출장해 127⅓이닝 11승 4패 23세이브 평균자책점 2.54로 활약하였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멤버와 삼성 라이온즈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활약하며 프로 데뷔 처음이자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그러나 2002년 중무리로 굴려지며[3] 너무 혹사당했던 탓인지, 이듬해인 2003년에는 9승 10패 21세이브 평균자책점 4.12로 구원투수로 시즌 10패를 찍는 등[4] 전년도에 비해 상당히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마무리에서 부진을 보이자.[5] 이듬해 임창용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다시 선발로 전향하게 된다.

그러나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환하였던 2004년에는 시즌 초부터 다시 잡음에 휘말렸다. 그 해 4월 7일 고지행과 함께 음주 사건으로 원정 숙소에서 무단 이탈하여 크게 물의를 빚었고[6], 2004년 7월 12일 김승관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어 삼성과의 마지막을 좋지 못하게 끝내고 말았다. 이 때 그와 같이 이탈하였던 고지행은 2004 시즌 후 방출당했고 한화 이글스로 갔다. 그의 트레이드 상대는 김대익박석진이었다. 여러가지로 보면, 양쪽 모두 손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다.[7]

2.3 롯데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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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을 보냈던 롯데 자이언츠의 현역 선수시절

트레이드 이후엔 잠시나마 정신차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롯데의 솔리드한 마무리로 활약한다. 팀 창단 이래 현재까지도 마무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롯데는 그가 활약했던 2004년 말~2005년 초까지 잠시나마 마무리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시즌 도중에 부인이 사망했고[8] 2006년 시즌 개막 전 윤학길 당시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긴 후 또 다시 팀을 무단 이탈하여 징계를 받고 복귀했다. 2006 시즌을 마치고 FA를 선언했으나 그가 무단 이탈한 전력 등 강하게 이미지가 남은 사생활 문제 때문에 롯데를 포함하여 다른 팀들과 계약하지 못해 FA 미계약 선수로 남으면서 은퇴하고 만다.

3 은퇴후

빙그레 입단 시절 한솥밥을 먹은 바 있는 장정순 세한대학교 감독의 부름을 받아 세한대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있었지만, 장정순 감독이 청주고 감독으로 옮길 때 따라가지 않았다. 2016년에는 부산에서 노장진의 야구교실을 운영했었다가, 삼성중공업 협력사에서 일하는 중이다.

4 기타

  • 사생활 문제로 말썽이 많았던 선수로 이와 같은 일이 없었으면 흑역사가 아니라 한 시대를 풍미한 투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로라는건 결국 자기 관리와 절제가 필요한 것이라 결국 그 사적 문제를 참지 못하고 잦은 무단이탈을 한 것이 결국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잡음 많았던 선수로 기억된 것이다. 이 문서에서도 노장진의 투구 이야기보단 사생활로 인한 무단 이탈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는걸 보면...
  • 선수시절 무단이탈등의 행보때문에, 당시 수비코치인 류중일에게 혼났다. 류중일의 회고에 의하면 자기는 선수에게 손을 안 대는(때리지 않는) 스타일인데 선수 코치 생활 통틀어 때린 사람이 딱 2명 노장진이랑 김진웅이었다고 한다... 알 만하다. 제 버릇을 못고쳤고 결국은 FA미아가 되어 은퇴했으니.... 선수 본인이 문제였던셈.
  • 2011년 1월 24일 200km/h로 광란의 폭주를 한 혐의로 입건되었다.
  • 은퇴 후 한 번씩 언급될 때마다 불리는 별명은 노잦이(...)이다.
  • 살려조의 여파로 다시 알려진 사실은 2002년도 불펜 2천구 투구가 있다.
  • 기아 타이거즈 투수 김진우의 무단이탈 당시, 노장진과 김진우가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루머들이 돌며, 노장진이 후배를 버려놨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5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93빙그레 이글스261003103-4.41886293
1994군복무(유격 조교)
1995
1996
1997한화 이글스35133⅓6100-5.471249181
199835149⅓7100-5.2415084104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1999삼성 라이온즈33188⅓
(5위)
15
(5위)
90-4.35180116173
(4위)
200028138⅓118004.2914289103
20012285⅔72114.62886757
200263127⅓11423
(3위)
12.549854146
2003538391021
(4위)
14.12735387
연도소속팀경기수이닝ERA피안타사사구탈삼진
2004삼성 / 롯데34461017
(4위)
14.11513055
2005롯데 자이언츠35331218
(4위)
02.4519952
20064248⅓34654.66443932
통산4061132⅔74708994.351057694983
  1. 그 사람 좋다는 류중일이 노장진의 행패를 보다 못해 손을 댄 적도 있었다(!) 자세한건 류중일 항목 기타 문단 참고.
  2. 2001년에는 외국인 투수 벤 리베라가 마무리를 맡았으나, 허리 부상과 개인 사정 등을 이유로 시즌 중 임의탈퇴 처리되었고, 후반기에는 선발 요원이었던 김진웅이 마무리를 맡았다.
  3. 2002년의 노장진이 현재까지 풀시즌을 중무리로 굴린 마지막 사례라고 한다.
  4. 같은 해에 롯데 자이언츠임경완임작가백인천백골퍼 아래서 마구잡이로 굴려지며 구원 10패를 찍었다.
  5. 2002년 우승 당시 김응룡 감독에 의해 중무리로 무지막지하게 혹사당했던 여파가 컸다. 불펜으로 나와 2천구를 던졌으니...
  6.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밤새 술 마시고 새벽 6시에 들어오다가 산책 중이던 김응용 감독에게 걸렸다고 한다. 김응용 감독은 자체벌금 300만 원에 비공개로 결정했는데, 노장진이 무단 이탈하면서 기자들도 알게 되어 파문이 커졌다고 한다.#
  7. 박석진은 2006년 다시 롯데로 돌아갔고, 김대익 역시 2006년에 은퇴했다. 노장진은 2006년 FA미아가 되어서, 김승괸은 리빌딩 차원에서 2007년 방출됐다.
  8. 부부싸움 이후 부인이 음독하여 병원 입원 치료 중 사망했다. 그러나 음독 이전 부부싸움에서의 폭력의 강도에 대한 의문도 있으며, 이는 KBO 홈페이지에 부인 김씨의 가족을 주장하는 자의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