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양키스

?width=40 MLB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소속구단
45px볼티모어 오리올스
(Baltimore Orioles)
30px보스턴 레드삭스
(Boston Red Sox)
40px뉴욕 양키스
(New York Yankees)
45px탬파베이 레이스
(Tampa Bay Rays)
55px토론토 블루제이스
(Toronto Blue J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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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로고팀 로고
뉴욕 양키스
New York Yankees
창단1901년
연고지뉴욕 주 뉴욕 시 브롱스
현재 연고지로 이전1903년
구단 연고지 변천볼티모어(1901~1902)
뉴욕 주 뉴욕 시 브롱스(1903~)
구단명 변천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 1901~1902)
뉴욕 하이랜더스(New York Highlanders, 1903~1912)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 1913~)
홈 구장오리올 파크(Oriole Park, 1901~1902)
힐탑 파크(Hilltop Park, 1903~1912)
폴로 그라운드(Polo Grounds, 1913~1922)
구 양키 스타디움(Yankee Stadium, 1923~1973, 1976~2008)
셰이 스타디움(Shea Stadium, 1974~1975)[1]
양키 스타디움(Yankee Stadium, 2009~)[2]
구단주양키 글로벌 엔터프라이즈(Yankee Global Enterprises)[3]
사장랜디 리바인(Randy Levine)
단장브라이언 캐시먼(Brian Cashman)
감독조 지라디(Joe Giradi)
월드 시리즈 우승
(27회)
1923, 1927, 1928, 1932, 1936, 1937, 1938, 1939, 1941, 1943, 1947, 1949,
1950, 1951, 1952, 1953, 1956, 1958, 1961, 1962, 1977, 1978, 1996, 1998,
1999, 2000, 2009
아메리칸 리그 우승
(40회)
1921, 1922, 1923, 1926, 1927, 1928, 1932, 1936, 1937, 1938, 1939, 1941,
1942, 1943, 1947, 1949, 1950, 1951, 1952, 1953, 1955, 1956, 1957, 1958,
1960, 1961, 1962, 1963, 1964, 1976, 1977, 1978, 1981, 1996, 1998, 1999,
2000, 2001, 2003, 2009
디비전 우승
(18회)
1976, 1977, 1978, 1980, 1981, 1996, 199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9, 2011, 2012
와일드 카드 획득
(5회)
1995, 1997, 2007, 2010, 2015
역대
한국인 메이저리거[4]
박찬호(2010)
약칭NYY
홈페이지
유니폼
20150202132802%21ALE-Uniform-NYY.png
1923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22-뉴욕 자이언츠뉴욕 양키스1924-워싱턴 내셔널스
1927년, 1928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26-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뉴욕 양키스1929-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
1932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31-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뉴욕 양키스1933-뉴욕 자이언츠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35-디트로이트 타이거스뉴욕 양키스1940-신시내티 레즈
1941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40-신시내티 레즈뉴욕 양키스1942-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43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42-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뉴욕 양키스1944-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47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46-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뉴욕 양키스1948-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49년, 1950년, 1951년, 1952년, 1953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48-클리블랜드 인디언스뉴욕 양키스1954-뉴욕 자이언츠
1956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55-브루클린 다저스뉴욕 양키스1957-밀워키 브레이브스
1958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57-밀워키 브레이브스뉴욕 양키스1959-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61년, 1962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60-피츠버그 파이리츠뉴욕 양키스1963-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77년, 1978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76-신시내티 레즈뉴욕 양키스1979-피츠버그 파이리츠
1996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95-애틀랜타 브레이브스뉴욕 양키스1997-플로리다 말린스
1998년, 1999년, 2000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1997-플로리다 말린스뉴욕 양키스2001-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09년 월드 시리즈 우승 팀
2008-필라델피아 필리스뉴욕 양키스2010-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 개요

"양키스만 이기는 이유를 아니?"

"미키 맨틀 때문에요?"
"아니, 핀스트라이프에 기가 꺾이기 때문이야."

영화캐치 미 이프 유 캔》 中

오늘도 당연히 양키스가 이겼을 거다.

양키스에는 그 위대한 조 디마지오 선수가 있잖니.
그러니 양키스가 졌을 리가 없어.

― 소설 《노인과 바다》 中

I want to thank the good lord for making me a Yankee.

내가 양키스 선수가 된 것을 신에게 감사드린다.

ㅡ 조 디마지오, 1949년 10월에.[5]

MLB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에 소속된 프로 야구단. 1901년 볼티모어에서 창단해 1902년까지 볼티모어 오리올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연고지를 뉴욕으로 옮긴 뒤 뉴욕 하이랜더스(1903~1912)를 거쳐 1913년부터 지금의 팀명을 쓰게 되었다. 팀명인 양키스는 뉴욕 프레스 기자가 붙인 것이라 한다. 연고지는 뉴욕 시 브롱스.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명문 야구 구단이자, 레알 마드리드, FC 바르셀로나, 댈러스 카우보이스 등과 함께 세계에서 지명도와 상품 가치가 가장 높은 스포츠 구단 중 하나이다. 메이저리그의 '악의 제국(The Evil Empire)'이라는 별명을 가진 메이저리그 최강팀,[6] 아니 최고 재력의 팀이라고 불러야 할 팀이다.[7] 세계에서 가치 있는 50개 스포츠팀에 항상 TOP 5안에 들어가며 야구 팀 중에서는 세계 최고로 가치 있는 팀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6년 현재 뉴욕 양키스의 가치는 약 6억 6100만 달러로, 한국 돈으로 약 7457억 원을 기록하며 세계 최고로 가치 있는 팀이 되었다. 이 금액은 기존 1위인 레알 마드리드보다 무려 2억 달러 많다.

역대 팀 성적 링크
월드 시리즈에서 27회, 아메리칸 리그에서 40회, 동부 지구에서 18회나 우승한 명문 구단으로 우승 횟수로만 따진다면 메이저리그에서 넘사벽으로 1위이고,[8] 미국의 메이저 프로 종목을 통틀어도 최다 기록이다. 최다 우승 2위는 내셔널 리그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11회이며, 내셔널리그의 3대 명문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11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8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6회)의 우승 횟수를 전부 합쳐도 양키스보다 적을 정도로(25회) 압도적인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9] 또한 아메리칸 리그 소속 팀 중에서 2016년 기준으로 유일하게 10000승을 달성한 팀이기도 하다. 양키스가 10000승을 달성했을 때, 해당 부문 아메리칸 리그 2위인 보스턴 레드삭스가 9224승이었으니 다른 아메리칸 리그 팀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메리칸리그보다 먼저 출범한 내셔널리그까지 포함하면 7팀이 양키스보다 많은 승리를 기록하고 있으나, 승률은 메이저리그 30팀 중 양키스가 압도적으로 높다(.569).
창단 이후 통산 114시즌 동안 5할 승률에 실패한 시즌은 단 22시즌뿐이다. 특히 베이브 루스의 전성기와 정확히 일치하는 1926년부터 2016년까지 91시즌만 따로 계산하면 5할 승률에 실패한 시즌은 단 11시즌에 불과하다. 1926년부터 1964년까지 무려 39년 연속 5할을 찍은 적이 있으며, 최근 5할 승률에 실패한 건 1992년으로, 이후 2016년까지 24년째 5할 승률을 달성하고 있다. 두 팀이랑 비교된다

또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영구결번을 가진 팀이며,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선수 및 감독 중 무려 43명이 이 팀을 거쳐갔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 팀이면서 YES 네트워크와 같은 새로운 사업 모델로 메이저리그의 시장을 개척하는 데 큰 몫을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심지어 2012년부터 양키스란 이름으로 향수까지 시판되고 있다.[10][11]

여담으로 2016년까지 통산 성적이 10084승 7648패 .569로, 승패 마진이 무려 +2436에 이른다! 이는 양키스가 앞으로 15년간 시즌 전패를 해도 5할 승률을 유지한다는 것을 말한다!

2 역사

2.1 초창기

지금보면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초기 양키스는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팀이었다. 원래 볼티모어에서 출발한 이 팀은 아메리칸 리그에도 뉴욕에 팀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편승해 바로 뉴욕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이 시기 이미 수 차례 우승을 거둬 뉴욕의 터줏대감이 된 뉴욕 자이언츠의 위세를 능가하지 못했다. 여기에 돈이 없어서 선수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뉴욕에서 완전히 밀렸다.

이 시기에 그나마 얻은 것이 있다면 팀 명칭인데, 원래 하이랜더스였던 팀 명칭을 뉴욕 프레스 기자가 양키스라고 부르면서 오늘날 뉴욕 양키스라는 팀 명칭이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키스의 그 유명한 NY 로고가 탄생하고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의 원형이 처음 도입됐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홈 구장도 없어서 뉴욕 자이언츠의 홈 구장인 폴로 그라운드를 빌려 쓰는 처지가 계속되었다. 성적도 좋지 않아서 세 번 리그 2등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 중 1904년에는 월드시리즈 문턱에서 폭투 하나 때문에 2위에 그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당시 양키스의 유명 선수는 '잭 체스브로(Jack Chesbro)'로, 그는 20세기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41승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고 있었지만 월드시리즈 진출자가 가려지는 마지막 등판 경기에서 치명적인 폭투를 저질러 월드시리즈 진출 기회를 놓쳤다.

그러던 그들에게, 제이콥 루퍼트라는 구단주와 밀러 허긴스[12]라는 감독이 등장하면서 변화의 서곡이 울리기 시작했다.

2.2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1): 루스게릭의 시대

새 구단주 루퍼트는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인물이었고, 새 단장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애드 버로를 영입했다. 버로는 보스턴의 속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었고, 마침 극장 사업에서 실패하면서 손해를 본 보스턴 구단주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돈으로 과감하게 보스턴의 선수들을 끌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결과물 중 최고의 결과물이 바로 왼손 투수 겸 타자인 베이브 루스다.

당시 보스턴은 루스의 자질을 과소평가하였고, 보스턴의 구단주 프레지(Harry Fragee)가 펜웨이 파크 건설자금 융자조건을 붙여 12만 5000달러라는 헐값으로 양키스에 트레이드를 시키게 된다. 루스의 트레이드는 보스턴에게 어마어마한 비극을 안겨다줬고, 2004년 월드시리즈까지 우승까지 무려 85년동안 보스턴은 우승하지 못하면서 밤비노의 저주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블랙삭스 스캔들로 야구가 위기에 처했던 시절, 루스의 홈런 포는 미국민들을 열광시켰고, 한 시즌 60홈런이라는 대기록도 이때 나왔다. 그리고 루스만이 아니라 보스턴의 주축 선수들인 웨이트 호이트, 허브 페녹, 칼 메이스 같은 선수들도 일제히 영입하면서 단숨에 팀 전력이 강해졌다. 여기에 루 게릭이라는 최고의 홈런 타자와 그들의 앞뒤에 포진한 외야수 얼 콤스, 밥 뮤젤과 2루수 토니 라제리, 아울러 빌 디키라는 명포수까지 가세한 데다가 밀러 허긴스 감독의 뛰어난 지도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팀 전력은 단숨에 정상을 넘보는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이 시기를 상징하는 가장 극명한 말이 바로 살인 타선(Murderer's Row)으로 1927년에 정점에 달했다. 1927년 양키스는 154경기에서 110승을 거뒀고, 루스는 60홈런을 쳤으며 게릭은 175타점을 기록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면서 아메리칸 리그와 월드 시리즈를 평정했다. 이 1927년 팀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 전력으로 평가된다.
루스가 팀에 합류한 1920년부터 팀을 떠나는 1934년까지 15년간 양키스는 리그 우승 7번, 월드 시리즈 우승 4번을 차지했고, 이 시기 팀 역사상 첫 리그 우승과 월드 시리즈 우승이 이뤄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뉴욕의 2인자, 3인자 신세에서 벗어나 뉴욕 1인자이자, 전 미국의 인기 팀이 되었다는 점. 물론 이는 루스의 공이 가장 컸고, 그의 홈런으로 인해 몰려든 관중 수입으로 지은 양키 스타디움은 '루스가 지은 집(The House That Ruth Built)'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2.3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2): 조 디마지오의 시대

루스가 팀을 떠나고, 명포수 빌 디키가 은퇴한 후에도 양키스의 전성 시대는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최고의 인기 팀으로 거듭나면서 드래프트가 없던 시기 우수 선수 확보가 훨씬 더 쉬웠던 것이다. 그리고 스카우트진도 그리 막장은 아니어서 우수한 선수에 대해서는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기어이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루스는 떠났지만 여전한 위력을 보여준 루 게릭이 있었고, 새롭게 떠오른 스타 조 디마지오의 활약도 컸다. 하지만, 루 게릭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월드 시리즈 4연패를 달성한 이후 루게릭병으로 인해 비운의 은퇴를 해야 했고, 그 뒤 양키스를 이끄는 책무는 디마지오의 것이 되었다.

비록 디마지오는 성적에 있어서는 동시대의 라이벌 테드 윌리엄스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 자신도 빼어난 선수였고, 56경기 연속 안타와 같은 이슈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팀으로서 양키스는 여전히 가장 강력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디마지오는 잠시 팀을 떠났고, 팀 성적도 주춤했지만 전쟁 후에도 여전히 양키스는 강했다.

디마지오가 본격적으로 데뷔한 1936년부터 그가 은퇴하는 1951년까지 양키스는 리그 우승 11번과 월드 시리즈 우승 10번을 차지했다. 이 시기 월드 시리즈에서 진 것은 딱 한 번, 1942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당한 패배뿐이었다.

2.4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3): 케이시 스텡겔과 요기 베라의 시대

디마지오의 은퇴 후, 미키 맨틀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팀을 상징한 것은 '노교수(Old Professor)'라고 불린 케이시 스텡겔 감독과 명포수 요기 베라였다. 요기 베라는 1950년대 전성기를 맞아 리그 MVP를 세 차례 차지했고, 또 다른 명투수이자 월드 시리즈의 사나이인 화이티 포드와 호흡을 맞추며 팀의 전성 시대를 이어갔다. 스텡겔 감독 역시 전력을 꾸준히 유지시키면서 디마지오의 은퇴 이후, 1950년대 중반 월드 시리즈 우승 4번과 리그 우승 6번을 기록했다.

특히 이 시기 동향의 브루클린 다저스를 거의 완벽하게 콩라인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다저스는 매번 양키스와 만나 거의 다 졌지만, 딱 한 번 1955년에 극적으로 승리하긴 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모두 졌다. 양키스는 강한 전력을 구축하면서 1950년대 10시즌 중 두 번을 제외하고 모두 리그 우승을 기록했고, 이때의 활약상으로 인해 스텡겔 감독과 요기 베라, 화이티 포드는 모두 쿠퍼스타운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부터 이미 팀의 붙박이 중견수로 활약을 펼치던 미키 맨틀이, 본격적으로 기량을 만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면서 베이브 루스에 거의 근접한 맨틀이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결국 루스를 넘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양키의 유연한 상황 대처이다. 1940년대 브랜치 리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했을 당시, 카디널스가 만들어낸 팜 시스템을 보고 이를 가장 먼저 모방한 팀이 바로 양키스였다.

2.5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4): M & M 포의 황혼

요기 베라의 노쇠화 이후 팀의 타선은 맨틀 혼자서 이끌어 갔지만, 또 다른 강타자 로저 매리스의 영입 이후 팀 타선은 더 강해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정말 좋았지만 문제는 언론. 뉴욕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였던 맨틀에게는 뉴욕 언론이 우호적이었지만, 매리스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1961년, 매리스가 베이브 루스의 60홈런 기록을 결국 깨뜨리면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경기 수가 루스보다 더 많았다는 이유로 기록에 점 표시를 해서 구분하자는 주장이 커미셔너에게서 나오지를 않나, 언론은 대놓고 맨틀이 깨야 했다고 하지 않나...[13]

어쨌든 이 시기는 1920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메이저리그를 제패한 양키스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살인 타선과 디마지오, 베라와 같은 스타들을 계승한 맨틀과 매리스 쌍포는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리그 5연패를 달성했다. 하지만 월드 시리즈에서는 그리 강력하지 못해서 1961년과 1962년 두 차례 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이때를 끝으로 양키스는 첫 암흑기에 돌입하게 된다.

2.6 1차 암흑기(1965~1975): 악덕 구단주 CBS와 시대의 변화

양키스가 암흑기에 빠져든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시기 구단주가 CBS로 바뀌었는데, 양키스의 명성에 의존해 방송 사업에서 돈을 벌어보려던 방송국 CBS는 장기적인 투자 대신에 단기적인 성적에 집착했고, 그것은 오히려 팀에 큰 독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1964년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월드 시리즈 우승에 실패하자 감독인 요기 베라를 경질한 것이 그 사례이다. 이런 우승에 대한 단기 집착은 결국 장기적인 플랜을 갖추지 못하면서 결국 팀의 안정적인 운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더 중요한 원인은 시대의 변화에 뒤쳐졌다는 것. 새롭게 도입된 드래프트 제도로 인해 양키스는 과거처럼 인기 팀과 강팀의 명성에 의존해서 스타급 유망주들을 입도선매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전력 보강이 그리 신통치 않았고, 팜 시스템은 비교적 빨리 구축했지만, 신인 수급에서 이제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게 된 이상 그리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아울러 인종주의도 문제였다. 비록 흑인 선수 도입에 있어서 라이벌인 보스턴 레드삭스보다는 빠른 편이었지만, 스카우트나 팀 수뇌부에 남아 있었던 인종주의로 인해 우수한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실패했다. 대표적으로 스카우트와 팀 수뇌부의 인종주의로 놓친 선수가 호타준족의 상징 윌리 메이스와 500홈런을 때린 유격수 어니 뱅크스였다. 반대로 1950년대까지 양키스에게 짓눌리던 LA 다저스재키 로빈슨의 영입 이후, 우수한 흑인 선수들흑형들은 우월하다을 대거 수급하면서 단숨에 1960년대 최강자 중 하나로 군림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런 문제로 인해 양키스는 팀 역사상 첫 암흑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암흑기는 1972년 조지 스타인브레너라는 사나이가 팀을 인수하면서 일단 끝나게 되었다.

2.7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등장과 짧은 부흥(1976~1981)

스타인브레너는 괴팍한 구단주이지, 인내심이 강한 구단주는 아니었다. 또, 장기적인 안목을 보고 팀원과 프런트를 믿어주는 타입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양반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투자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14] 초기 좌충우돌하던 스타인브레너가 정치 자금 불법 모금에 연루되며 팀을 떠난 사이 팜이 재건되어 서먼 먼슨과 같은 포수가 나타났고, 돌아온 스타인브레너가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아 최초의 FA 캣피쉬 헌터라는 에이스와[15] 레지 잭슨이라는 강타자를 영입하면서 팀은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급기야 1976년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접전을 펼친 끝에, 12년 만에 다시 월드 시리즈를 밟았다. 다만 이때는 당대 최고의 강타선인 '빅 레드 머신'을 구축한 신시내티 레즈에게 팀 역사상 처음으로 0:4 스윕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1977년1978년에는 LA 다저스를 2년 연속 누르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다시 전성기가 열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문제가 생겼다. 먼저 당시 팀의 수장인 빌리 마틴은 팀원 및 구단주 스타인브레너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따라서 해고와 재기용을 반복하고 있었다. 특히 레지 잭슨과 사이가 엄청 나빴는데, 결국 레지 잭슨은 말년에 애너하임 에인절스로 이동하게 된다. 두 번째로 팀의 리더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서먼 먼슨이 1979년 비행기 사고로 요절하면서 순식간에 팀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세 번째로 스타인브레너의 우승 조급증이 또 발동했다. 1981년 리그 최다 승을 거두면서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LA 다저스에게 먼저 2승을 거두고도 내리 4연패하며 패하자, 그 책임을 물어 감독인 딕 하우저를 해고한 것. 이때부터 다시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2.8 사상 최악의 암흑기(1982~1994)

감독을 자를 수는 있지만, 자른 후의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 이 시기의 결정적인 문제였다. 그렇다고 선수 수급을 못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리키 헨더슨이 입단한 것도 이 시기였고, 데이브 윈필드를 10년 계약으로 영입한 것도 이 시기였다. 아울러 방망이에 있어선 둘째 가라면 섭섭하다 하시는 잭 클락 역시 이 시기에 양키스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한 마디로 돈질은 꾸준히 했다는 뜻. 하지만 감독의 리더십이 안정되지 않았고, 장기적인 플랜 대신에 그때 그때 비싼 선수들을 사서 메우는 구조로는 도저히 강팀이 될 수 없었다. 이 시기를 비밀번호로 정리하자면 5332245575421.

결국 양키스는 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PO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한 번도 승률 5할을 넘지 못하는 최악의 암흑기를 겪었고, 특히 1990년에는 67승 95패 .414의 승률으로 1966년 이후 두 번째로 꼴찌를 차지하는 수모를 당했다.[16] 덕분에 죽어난 양반이 이 시기의 팀의 주장이었던 돈 매팅리. 매팅리는 양키스 주장 중에서 유일하게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가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월드 시리즈 한 번을 못 밟아본 주장이 되고 말았다.[17] 이 시기 양키스에 대한 이미지는 그냥 몰락한, 옛날에 좀 잘나갔던 팀. 사실 그럴 법도 한 것이, 1970년대 말 잠깐 반짝한 것 외에는 30년 가까이 거의 실적을 내지 못했다. 단적으로 그렉 매덕스시카고 컵스를 떠나 이적할 때, 돈은 양키스가 더 불렀지만 우승하겠다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떠난 것은 이 시기 양키스를 잘 상징한다.

또한 심슨 시즌 2에서도[18] 당시 양키스의 안습함에 대해서 묘사가 되는데, 지옥에 간 바트에게 악마가 "넌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넌 양키스가 페넌트 레이스에서 우승하면 죽게 되는데... 허, 거 참 그럼 100년도 넘게 걸리겠구먼"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2.9 뉴 그레이트 양키스(1995~2001)

행운이 따랐는지 전횡을 일삼던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데이브 윈필드의 뒷조사를 시켰다가 걸려서 구단주 자격이 정지되면서 희망의 서곡이 비치기 시작했다. 스타인브레너의 간섭이 사라진 동안 팀 프런트는 고액 연봉자를 정리하고, 유망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 버니 윌리엄스, 마리아노 리베라 등. 여기에 데이비드 콘, 웨이드 보그스, 폴 오닐, 존 웨틀랜드 등 외부 영입 선수들이 가세하면서 다시 강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리빌딩을 주도한 감독은 벅 쇼월터지만 정작 그는 1995년 디비전시리즈에서의 역전패로 인해 경질, 후임인 조 토레가 이를 기반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1992년부터 5할 승률을 회복하기 시작, 리그가 3개 지구로 개편된 1994년에 오랜만에 지구 1위를 달렸지만 이 해에는 파업으로 포스트시즌이 열리지 못했다. 마침내 1995년 와일드 카드로 PO에 오르기 시작하더니 1996년 월드 시리즈에서 먼저 2패를 하고 내리 4연승하면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누르고 18년 만에 우승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탄탄대로.

다시 돌아온 명가의 유니폼을 입고 싶어하는 선수들은 많았고, 예전과 달리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도 팀에 심하게 개입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는 조 토레가 기가 막히게 그의 비위를 맞춰준 탓도 컸지만. 어쨌든 로저 클레멘스도 영입하고, 기존의 선수들도 지켜내면서 전력을 강화한 그들은 마침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월드 시리즈 3연패에 성공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2001년에도 116승을 올린 시애틀 매리너스를 리그 챔피언십에서 누르고 월드 시리즈에 올랐지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원투 펀치의 호투에 눌리고, 7차전 끝내기 안타를 얻어맞아 두 차례 김병현을 두들겨 얻은 끝내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승을 내줬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다시금 우승 조급증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2.10 가을 야구의 비극(2002~2008)

케빈 브라운, 라울 몬데시, 랜디 존슨, 이가와 게이와 같은 선수들은 모두 우승이 잘 안 되자,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직접 사무실에서 전화를 때려 영입한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모두 망했다(...). 사실 암흑기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지구 우승은 차지했고, 2007년에는 와일드 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문제는 2003년을 빼고 월드 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과 이 시기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가 두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는 점, 특히 2004년 먼저 3승을 하고 내리 4연패를 당하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초유의 패배를 당했다는 점이 컸을 뿐이다. 마치 포스트시즌만 나가면 탈탈 털렸던 2000년대 중반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처럼...

일단 이 시기의 포스트시즌 성적을 정리해보자면...

  • 2002년: 디비전 시리즈에서 애너하임 에인절스에게 1승 3패로 탈락.
  • 2003년: 월드 시리즈에서 플로리다 말린스의 젊은 선수들에게 일격을 맞아 2승 4패로 패배.
  • 2004년: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리버스 스윕을 당하면서 떡실신.
  • 2005년: 디비전 시리즈에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에게 2승 3패까지 간 접전 끝에 패배.
  • 2006년: 디비전 시리즈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1승 3패로 탈락.
  • 2007년: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밀려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데 디비전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1승 3패로 탈락.

결국 이 때문에 2007년을 끝으로 조 토레와도 결별하게 되었다.

앞에서 서술한 이가와 게이를 영입한 것도 이 시기였다. 문제는 에이스를 들여온 줄 알았더니 똥을 들여오고 만 것. 포스팅비 포함 5년 4,600만 달러를 들였는데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2승 4패 평균 자책점 6.66(…). 결국 양키스는 1승당 2,300만 달러나 투자한 꼴이 되고 말았고, 여기서 피를 본 양키스는 다나카 마사히로를 영입할 때까지 일본인 투수라면 치를 떨게 되었다(구로다 히로키도 있지만 이 쪽은 기존에 MLB에서 뛰던 선수였으므로 제외).[19]

정작 문제는 2008년. 늘 그랬듯이 동부 지구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만 신경쓰면 될 줄 알았는데, 갑툭튀탬파베이 레이스에게 밀려서 지구 3위로 내려앉은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 이미 아들에게 구단주 자리를 물려준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놀랍게도 조 지라디 감독을 해임하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의 지름신을 가동하기에 이른다.

CC 사바시아A.J. 버넷을, 한화로 무려 3,000억 원이 넘는 계약금을 투자해 낚는 데 성공한 것(CC 사바시아는 7년 1억 6,100만 달러, A.J. 버넷은 5년 8,500만 달러에 계약). 거기에 타자 FA 최대어인 마크 테세이라까지 잡는 데 성공했다. 2008년 몰아서 지른 것 때문에 유망주 손실도 크지 않은 편이다. 사바시아, 테세이라, 버넷 3명 모두 영입시 FA 보상으로 다음해 1라운드 지명권을 양보해야 하는 A급 선수들이었지만 이들을 동시에 영입하였기에 1라운드 지명권을 1번만 포기하고 땡이었다. 투수 최대어인 사바시아를 보내고도 1라운드 지명권을 얻지 못한 밀워키 브루어스지못미.[20]

2.11 27번째 WS 우승

새 구장으로 이전한 2009 시즌 초에는 슬로 스타터인 CC 사바시아와 마크 테셰이라의 부진과 타선의 침체로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에 8연패를 당하고, 최악의 격전 지구인 동부 지구에서 보스턴과 탬파베이에 밀려 3위까지 떨어지는 등 2억 불 쓰고 그것밖에 못하냐며 무진장 놀림받았다. 그러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부상에서 복귀하면서부터 타선의 파괴력이 증대되고 시즌 초 부진하던 테셰이라 역시 5월을 기점으로 살아나기 시작,[21] 끝없는 질주를 시작하며 앞선 팀들을 근소하게 제치고 1위로 복귀했다. 후반기 첫 라이벌전인 레드삭스 3연전을 스윕하며 1위 체제를 강화하더니 레드삭스전 9승 1패로 상대 전적도 9:9로 맞추고 최종 103승을 기록하며 지구 우승을 확정지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사바시아-버넷-페티트의 막강 스리 펀치와 마침내 포스트시즌 울렁증을 떨쳐버린 했던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맹활약에 힘입어 미네소타 트윈스, LA 에인절스를 연파하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는다. 홈에서 치른 1, 2차전에서 로드리게스가 8타수 무안타 6삼진으로 다시 부진, 테셰이라 역시 정규 시즌에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1승 1패에 그쳤지만, 이후 마쓰이 히데키의 맹활약을 앞세워 4승 2패로 27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22]

2.12 흔들리는 시기(2010년~)

2.12.1 2010년~2011년

WS 우승 후 디트로이트의 호타준족 중견수[23] 커티스 그랜더슨, 애틀란타의 에이스가 된 하비에르 바스케스멜키 카브레라를 내주는 트레이드로 영입하고 FA로 '출루 귀신' 닉 존슨을 다시 불러들이는 등 실속 있는 오프시즌을 보냈다고 평가되었다.

2010년 2월 22일에 박찬호를 영입했다. 구단 입장에서는 불펜에 괜찮은 우완 베테랑을 추가했고, 박찬호 입장에서는 우승 반지를 간절히 원하는 만큼 양측 다 만족할 만한 계약이라는 평가였지만 박찬호는 1승 후 평균 자책점이 5점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진했고, 결국 데이비드 로버트슨을 육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시즌 중 케리 우드가 오자 방출한다.

2010 시즌은 300승 가능성을 쌓고 있는 사바시아, 포텐이 터진 휴즈를 주축으로 한 선발진의 강세로 아메 동부 1위를 지켰지만, 리베라 앞을 지켜줄 셋업맨의 부재와 A-로드가 나가떨어지는 등 부진한 타선으로 결국 탬파베이 레이스에 1승 차 1위를 내준다.

어찌되었건 일단 와일드 카드를 통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ALDS에서는 미네소타 트윈스를 가볍게 떡실신시키고 ALCS로 올라왔다. 상대는 텍사스 레인저스. 4-2로 패배했다.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리버스 스윕당한 뒤로 6년 만에 맞는 사상 3번째 CS 패배였다. 텍사스의 불타는 타선을 막지 못하고, 첫 경기 승리 후 내리 3연패를 당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WS 진출 가능성이 적었던 게 시리즈를 마지막까지 끌고 갔어도 그때 나올 선발 투수는 3차전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클리프 리. 양키스는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클리프 리 쟁탈전에서 패배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할지도. 결국 '보스'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구단주가 타계한 해에 그의 영전에다 우승 트로피를 바치려던 계획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2011 시즌을 대비하는 스토브 리그에서는 제국답지 않게 조용했다. 돈 좀 지르려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필리스에게 클리프 리를 뺏기면서 돈을 마땅히 쓸 데가 없어졌다.

별다른 전력 보강은 없었고, 지구 라이벌 탬파베이 레이스의 마무리 라파엘 소리아노를 셋업맨과 포스트 리베라로 활용하기 위해 영입한 정도에 그쳤다. 연봉 1000만이 넘는 특급 마무리를 마무리가 아닌 셋업으로 쓰기 위해서 데려왔는데도 돈을 별로 안 썼다는 소리를 듣는 제국 퀄리티 한때 미네소타 트윈스의 투수 칼 파바노 영입에 나선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파바노는 미네소타와 재계약했다.[24]

이로 인해 양키스의 선발진이 상당히 불안해졌다. CC를 제외하면 200이닝을 장담할 수 있는 선발이 전무해진 심각한 상황. 이로 인해 페팃에게 까칠하게 굴었던 구단이 갑자기 계약을 급하게 제시하며 조급해졌지만 페티트는 은퇴. 망했어요. 본래 리가 올 경우 사바시아-리-버넷-페티트-휴즈(좌우 균형을 맞춘다면)의 강력한 5선발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정작 리는 필리스로 가버렸고, 버넷은 2007년 만한 성적을 못내고 있었고, 휴즈는 겨우 풀 타임 첫 해였고, 페팃은 더 이상 없었다.

2011 시즌이 시작되고 휴즈가 정신 못 차리자 급한 마음에... 로또식으로 영입해뒀던 왕년의 에이스들인 더 락 프레디 가르시아바톨로 콜론을 로테이션에 올렸는데, 이게 의외로 대박이 나서... 일단은 근근이 선발진을 꾸려갔다. 따라서 트레이드 데드라인 전까지 선발 영입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놀랍게도 어떤 영입도 없었다. 일단 사바시아가 건재하고, 휴즈의 부활을 기대한 듯. 또 이반 노바라는 신예도 터진 상황이라 당장 급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계속하여 완디 로드리게스나 카를로스 잠브라노(...), 제임스 실즈 등 여러 선발 투수들과 염문설을 뿌렸다.

불안했던 시즌 초 예상과는 다르게 결국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타이틀을 따 내는 데 성공하였다. 가르시아, 콜론, 존스, 차베즈 등 로또를 긁는 심정으로 영입한 선수들이 대박을 쳐준 것이 컸다. 데릭 지터의 3,000안타와 마리아노 리베라의 올타임 세이브 경신 등 화젯거리도 넘쳐났던 시즌이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메이저리그 대표 얼짱 드미트리 영의 동생 델몬 영이 갑툭튀한 것은 막지 못해 5차전 접전 끝에 2승 3패로 ALDS에서 탈락했다.

2.12.2 2012 시즌

뉴욕 양키스/2012년으로.

2.12.3 2013 시즌

뉴욕 양키스/2013년으로.

2.12.4 2014 시즌

뉴욕 양키스/2014년으로.

2.12.5 2015 시즌

오랜만에 지름신 강림하고서도 결국 포스트시즌 진출을 또 실패한 상황에서 양키스는 결코 원치 않는 A-ROID가 복귀한다. 이리되면 사치세는 더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 이미 기량이나 몸상태 모두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판국이고, 양키스는 이미 그를 지명타자로나 활용할 방침을 진작 내세웠다. 공백인 3루는 후반기 양키스로 트레이드 된 체이스 헤들리와 재계약을 통해 채우고, 지터가 은퇴한 뒤 유격수 자리에는 역시 시즌 후 트레이드로 데려온 디디 그레고리우스로 채웠다. 그리고 백업으로도 이제는 활용가치가 떨어진 스즈키 이치로를 잡지 않았다.

다만 선발진은 들인 돈에 비해 계속 불안한 상태. 다나카 마사히로는 전반기에는 굉장한 페이스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후반기를 거의 날려먹었고, 부상이 언제 다시 크게 도지게 될지 모를 불안한 요소를 가졌다. C.C. 사바시아는 여전히 살아날 수 있다는 장담을 하지 못한다. 즉, 현 양키스의 원투펀치를 해줄 두 투수의 건강이 불안 상태. 시즌 중반 보스턴에서 방출된 카푸아노가 일본 진출 루머와는 달리 양키스와 재계약했지만 일명 디지털 투수라 불릴 정도로 호투할 때와 털릴 때가 극명하다. 마이클 피네다는 기대주지만 확실하게 선발 라인을 지켜줄 수 있느냐는 아직 미지수.
이 셋을 제외한 나머지 선발 자리는 사실상 허허벌판이다. 트레이드로 온 브랜든 맥카시는 다저스와 계약을 맺으며 떠나버렸다. 거기에 구로다 히로키는 히로시마 토요카프로 돌아가는 걸 결정하면서 양키스와 결별해 2014 시즌 유일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지킨 투수의 공백까지 생겼다. 에고, 지터도 없고, 구로다도 없고...

한편 A-ROD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양키스 수뇌부에 사과를 했으나, 여론은 싸늘.

2월 15일 2013 시즌 후 리베라와 함께 은퇴한 앤디 페티트의 등번호 46번을 영구결번 처리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양키스 제2 전성기 때 활약한 선수 중 한 명이라지만 약을 복용한 약쟁이 선수를 영구결번한다는 소식에 야구 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 시간 2월 17일, 호르헤 포사다의 20번, 버니 윌리엄스의 51번 역시 영구 결번으로 처리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약물 관련해서는 둘 다 깨끗한 선수이고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끈 주축 멤버이니 더 일찍 영구 결번을 했어도 당연했을 것이다.

4월 6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홈 개막전에서는 다나카가 선발로 나섰지만 4이닝 5실점 부진을 보였고, 타선도 전체적으로 무기력, 수비도 실책이 나와 6:1로 대패.
5월 10일 AL 동부 지구 1위를 유지했다. 크리스 영의 돋보이는 활약과 타선 먹튀라 불렸던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마크 테세이라가 타선에서 제몫을 하고, 앤드류 밀러와 델린 베탄시스가 있는 탄탄한 불펜진을 원동력으로 순항하였다.
허나 이후 페이스가 주춤거리면서 1위를 탬파베이에게 내주고, 5월 22일에는 피네다, 23일은 사바시아가 털렸다. 지터와 카노 이후 새로운 양키스 키스톤 디디와 드류는 공수에서 양키스 팬들의 뒷목을 잡게 했다. 드류는 돈이 너무나 아까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고, 디디 그레고리우스는 여러모로 지터의 말년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며 까였다.
7월 19일까지 2위 볼티모어와 3.5경기 차이로 지구 1위를 달렸고, 7월 31일에는 6경기 차이까지 벌렸다. 그러나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10연승 질주를 하면서 결국 현지 시간으로 8월 13일, 아메리칸리그 2위로 내려앉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8월 14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맞대결에서 카를로스 벨트란의 극적인 역전 스리런 홈런으로 승리하면서 다시 1위를 찾아왔다.

그런데 현지 시간으로 9월 12일, 양키스는 테셰이라가 부상으로 인해 올 시즌을 마감한다고 발표했다. 어쩐지 시망의 기운이 양키스에게로 향함을 느끼면서...

9월 13일 현재 토론토와의 홈 4연전 중 3개를 내주며 경기 차가 4.5개로 늘어나고 선발 투수가 3경기 모두 개털리며 굴욕을 당했다. 이제 믿을건 다낚아뿐. 그저 믿을 것이라곤 와일드카드밖에 없는 것 같으나... 텍사스 레인저스가 3게임 차로 바짝 추격하는 중이라 안심할 수가 없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 결국 토론토가 지구 1위를 빼앗고, 텍사스도 지구 1위가 되면서 급해졌다. 신에게는 아직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현지 시간 10월 1일, 숙적 보스턴 레드삭스를 4 대 1로 물리치면서 와일드카드 진출을 확정지었고, 아울러 아메리칸 리그 소속 팀 중 최초로 1만 번째 승을 달성하는 기록도 덤으로 세웠다. 확실한 이변이 없는 한,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와일드카드 단판 승부를 치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자세한 내용은 2015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 게임 문서를 참조.
와일드카드를 따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한때 여유있게 지구 선두를 달렸던 상황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데드라인 때 토론토가 적극적으로 전력 보강에 나선 것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이것이 정규 시즌 지구 우승 실패에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토론토와의 후반기 맞대결에서 부진했던 것이 매우 아쉬울 듯.
또 하나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사바시아가 10월 5일 알콜 중독 치료를 위해서라며 포스트시즌을 불참. 전성기 때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선발진에 있어야 할 선수가 와일드 카드 경기를 앞두고 이탈한 건 양키스에게 찜찜한 소식.

10월 6일 홈에서 펼쳐지는 와일드 카드 게임에 예정대로 다나카가 등판했지만 5이닝 동안 피홈런 2방을 맞으며 5이닝 2실점이라는 미묘한 피칭을 했고, 정규 시즌에 많이 등판한 여파인지 베탄시스도 실점을 한다. 타선은 3일을 쉬고 등판한 댈러스 카이클을 상대로 6이닝 동안 단 1점도 뽑아내지 못하고 3안타 영봉패. 가을마다 물빠따가 되는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이 단판 경기에서는 정말이지 해도해도 너무했다. 지터가 있을 때 그나마 물빠따질이라도 했지만 이제는 공기가 따로 없다. 유체역학으로 검증해야...

당장 프런트에 대한 비난이 급등할 전망이다. 그야말로 '시일야방성대곡'이다(...) 특히 우승을 위해선 큰 돈도 마다하지 않았던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달리, 자린고비 모드가 된 아들 할 스타인브레너와 행크 스타인브레너에 대한 문제점을 걸고 넘어질 공산이 크다. 아울러 동부 지구 우승을 위해 확실한 전력 강화를 시전한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단장 앤소니 앤소풀루스와는 달리 구단주의 알뜰살뜰(?) 경영으로 전력 강화는 고사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한 단장 브라이언 캐시먼의 무능에 대한 질타가 높아질 것이다. 또한 사바시아가 알콜 중독 재활로 들어가 당장 선발에 대한 공백이 생겼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다나카 마사히로마저 하향화를 겪는 대참사를 일으키면서 내년도 선발진 강화라는 과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포스트시즌만 되면 양키오적 고질적인 '물빳다화'가 되어버리는 타선에 대한 대대적인 손질 역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2015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 게임 경기였다. 큰 맘 먹고 영입한 선수들이 포스트시즌에선 공기화가 되어버린 것은 물론, 테셰이라는 부상으로 아예 뛰지도 못했다. 하긴, 뭐 있었다고 해야 무슨 도움이 되었으랴마는... 그리고 포스트시즌만 되면 이상하게 범한 자가 되어버리는 A-ROD는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평생까임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신세로 추락한 지 이미 오래다. 더 이상 예전의 거포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한 시즌만 월드 시리즈를 진출하지 못해도 야단법석인 극성 양키스 팬들이 이번 졸전을 그냥 지나칠 리는 추호도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이번 포스트시즌의 졸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할 것이니만큼 양키스의 시름이 깊어질 듯.[25]

그러나 무엇보다 양키스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소속 지구가 더 이상 만만하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타계 이후, 양키스가 아나바다 모드로 들어서는 동안 나머지 팀들이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강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내년 시즌 역시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없는 딜레마가 발생했다. 물론 템파베이 레이스 같이 하향세를 겪는 팀도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아직까진 조건만 맞고 충분한 투자가 이뤄진다면 얼마든지 강팀으로 떠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이미 보여줬고, 블루제이스나 오리올스 역시 구단이 마음만 먹으면 강팀으로 만들 수 있는 여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양키스의 앞날은 그야말로 암울한 미래화가 도래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 팀만 빼면 결국 구단 수뇌부의 팀 운영 전반에 대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양키스의 포스트시즌 진출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양키스를 초조함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될 것 같다.
더구나 양키스의 팜 시스템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점도 상당한 문제점이다. 버니 윌리엄스, 호르헤 포사다, 데릭 지터, 앤디 페티트, 그리고 불세출의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를 배출한 예전의 포스를 잃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더구나 마운드가 취약한 양키스에게 있어서는 선발 투수 양성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실정이지만, 구단주 양반들이 돈을 쓸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더구나 타선은 뭐 내다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 정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다.

어쨋든 그렇게 스탈린 카스트로를 영입하는 등 무난하게 스토브 리그를 보냈다. 특히 아롤디스 채프먼을 영입하면서 불펜진을 더욱더 공고히 했다.

2.12.6 2016 시즌

지난 시즌 2루를 책임졌던 스테판 드류 대신 스탈린 카스트로가 들어온 것을 제외하면 타선에 별다른 변화는 없다. 시즌 초반이지만 타선의 화력이 다른 팀들에 비해 약한 편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도 알렉스 로드리게스카를로스 벨트란, 마크 테세이라 등 중심 타선의 변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게 다 그놈의 장기 계약 때문이다...
선발진은 다나카 마사히로, 마이클 피네다, 네이선 이오발디, 루이스 세베리노, CC 사바시아로 로테이션이 돌아가고 있으며, 건강하기만 하면 사이영 상을 노려볼 수 있는 다나카는 시즌 초반 선전 중이다. 다만 후반까지 선발 자리를 지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불펜은 델린 베탄시스앤드류 밀러를 주축으로 막강한 불펜진을 가지고 있다. 5월에 채프먼까지 돌아오면서 캔자스시티의 불펜 3대장에도 밀리지 않을 막강한 MBC BMC 트리오를 구축했다. 엠스플 해설진이 정말 MBC 드립을 치기도...

그리고 5월 7일 10승 17패로 최악의 4월을 보내고 있다.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최하위를 유지하며 양키스 팬들이 뒷목을 잡게 하고 있다. 단체로 득점권만 가면 삽질하는 타격, 롤코 피칭도 못하는 선발들 때문에 최강의 불펜을 가지고도 못 쓰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아롤디스 채프먼이 돌아와봐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도 선발진들이 각성하면서 팀 성적이 조금 반등한 모습이다. 공격력은 여전히 암울하지만, 다나카를 주축으로 선발진이 안정적으로 로테이션을 소화하면서 bmc 트리오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클랜드 4연전을 싹쓸이하는 등 분위기를 타면서 잠깐 동안 5할 승률을 맞추기도 했다.

6월에도 여전히 타선의 침묵은 깨지지 않고 있다. 양키스가 선발에서 안정적인 피칭을 보여주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게임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을 수 없기 때문에 타선의 득점력이 필요하지만 이 부분에서 계속 어긋나고 있다. 2일 토론토전에 등판한 다나카 마사히로가 6이닝 2실점의 호투를 보여줬지만 타선의 무득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4일 오리올스전에서는 카를로스 벨트란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연타석 홈런으로 양키스의 불펜 승리공식으로 이어가나 싶었지만 베탄시스까지 넘어오기전인 6회를 다른 투수들이 막아내지 못하면서 리드를 지켜내지 못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7회 올라온 델린 베탄시스마저 실점하면서 볼티모어에게 리드를 빼았겼고, 9회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마무리투수 잭 브리튼이 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역전패를 당했다.

4일 역전패의 충격을 뒤로한 채 크리스 틸먼보다 무게감이 떨어지는 볼티모어 선발 타일러 윌슨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면서 6회까지 7점을 득점하며 무난하게 승리하나 싶었다. 그러나 벌어진 점수차이로 빠르게 승부에 들어가던 이안 노바의 패스트볼을 마크 트럼보가 받아치면서 솔로 홈런을 만들어내었고, 노바의 바깥쪽 꽉찬 싱킹 패스트볼을 페드로 알바레즈가 기막힌 타격기술로 투런 홈런을 따내면서 분위기를 볼티모어쪽으로 이끌게 된다.
더이상 지켜 볼 수 없었던 조 지라디 감독은 닉 구디를 등판시켰지만 애덤 존스에게 쓰리런을 허용하면서 무너졌고, 점수차이는 어느덧 7-6 한점차가 되고만다.

그러나 양키스에겐 앤드류 밀러가 있었다. 차원이 다른 슬라이더로 오리올스 타자들을 녹여내며 2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이어 9회에 양키스 타선에서 1점을 추가하며 아롤디스 채프먼에게 2점차의 여유를 가져다 주었고, 채프먼이 이닝을 마무리하며 힘든 승리를 따내었다.

6월 한달동안 다나카 마사히로CC 사바시아를 제외하면 여전히 선발진들의 아쉬운 피칭으로 어려운 경기들을 이어나갔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데릭 지터의 후계자인 디디 그레고리우스의 일취월장한 타격실력과 마크 테세이라가 조금씩 살아나면서 전체적으로 타선의 무게감이 좀 더 높아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볼티모어 오리올스보스턴 레드삭스 같은 타격능력은 아니기에 선발진들이 조금더 힘을 내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7월말에는 5할성적은 이루었으나 1위 싸움하는 토론토,볼티모어,보스턴과 7경기이상 차이가 나자 브라이언 캐시먼이 구단주 할에게 이번 트레이드 데드라인에서 셀러로 전향해야함을 주장하였고 그를 받아들여 아롤디스 채프먼 앤드류 밀러 카를로스 벨트란 이반 노바를 각각 시카고 컵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텍사스 레인저스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넘겨주면서 대거 유망주를 받아와 내후년을 기약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캐시먼이 중계투수들을 트레이드하였음에도 매우 값비싼 유망주들을 받아와 MLB.com 기준으로 프리시즌에는 10위권내에 있던 유망주순위가 2위로 껑충 뛰게되었다.

8월 5일에는 마크 테세이라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함을 밝혔다.

8월 13일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템파베이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4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했으며 이후 2017년 잔여연봉 보전을 바탕으로 유망주들을 조언을 위해 양키스에서 특별보좌 일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다음날 8월14일 콜업된 두명의 유망주 타일러 오스틴과 애런 저지가 루키 첫타석 백투백홈런을 쳤다! 이는 MLB역사상 처음으로 특히 애런 저지는 넘버원 유망주 답게 446ft의 홈런비거리를 보여주며 양키팬들에게 인상깊은 파워를 각인시켜주었다.

내년을 기대하는건 개나 주라는 듯이 신인 포수 게리 산체스의 엄청난 활약에 힘입어 와일드카드를 폭격하고있다.분명히 리빌딩은 뻥일 가능성이 높다.아니 주전선수들 팔아넘긴 팀이 이렇게 잘할수가... 3주만에 홈런 11개와 .400 타율을 유지하며, 스탈린 카스트로와 양키스 타선을 하드캐리하는중. 그 증거로 양키스의 8월달 홈런은 27일 기준으로 37개(!). 볼티모어와의 경기에서 승리로 와일드카드 2.5게임차.

이후 열려진 토론토와의 3연전 시리즈에서 막강한 토론토의 라인업을 상대로 3게임에 9점밖에 내주지 않으며 스윕에 성공하여 동부지역 1위를 끌어내렸다.[26] 역시 리빌딩은 구라였어 와일드카드 리더인 토론토와의 경기차이는 단 3경기. 2위인 볼티모어와는 2경기 차이고 지구 선두인 보스턴 레드삭스하고도 4경기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23경기가 남은 현재 시점, 아메리칸 동부는 사이어인들의 리그가 되서 서로 치고 박고 난리가 난 상태. 보통 시즌의 마지막 달이 오면 1위 2위중 누가 우승할까를 점찍어 볼 수 있는데, 아메리칸 동부지역은 네 팀 중에 누가 지구 우승을 거뭐쥘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중부 서부 내셔널리그 할거없이 2위팀이 동부에 오면 5등싸움(!) 을 해야한다. 중부지역의 디트로이트가 2위인데 동부의 4위인 양키스하고 단 1게임차(...), 내셔널리그 서부 2위 산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양키스와 동률 (...) 나머지 2위팀들은 동부 4위인 양키스보다 승률이 낮다! 탬파베이: 제발 딴데가서 싸워줘

9월 9일 탬파베이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와일드카드 1경기차. 볼티모어와 디트로이트가 1경기씩 나눠갖고 양키스가 탬파를 스윕한다면 세팀이 와일드카드 공동 2위가 된다. 최근 10경기 성적은 8승2패, 6연승. 여러모로 조 지라디 감독의 좋은 의미의 명장놀이가 돋보이는데, 매 경기마다 투수를 6명 7경씩 갈아넣으면서 1 2 점 차로 이기며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40인 확장로스터로 인해서 가능한 경기운영.

시즌을 포기한 줄 알았다가 8월에 선수들이 폭발하며 가을야구에 대한 희망고문이 이어졌지만, 9월 16일부커 19일까지 있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4연전에서 스윕을 당하면서 올시즌 가을야구의 꿈을 접게 되었다. 보스턴과의 4연전 이전까지만 해도 보스턴과 3경기 차였기에 여기서 잘 부비면 1위까지 노려볼만 했지만 스윕을 당하면서 보스턴과는 9월 20일 현재 8.5게임 차까지 벌어졌고 와일드카드 경쟁자들인 토론토와 볼티모어와도 4.5게임 차로 벌어져버렸다. 네 경기도 각각 2점 3점 1점 1점 차로 져서 매우 안타까운 상황. 그 전에 있었던 다저스와의 시리즈에서도 1승 3패를 기록한게 아쉬운 상황. 남은 토론토 4연전과 보스턴과 3경기를 반반씩 가져가고 최종 시리즈인 볼티모어와의 시리즈에서 스윕을 하면 가능할지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결국 오리올스와 블루제이스에게 밀려서 와일드카드 진출에도 실패하고 쓸쓸히 시즌을 마쳤다.

3 기록

/기록 문서 참고.

4 이모저모

4.1 라이벌들

화려한 역사만큼 라이벌들도 많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양키스가 자손 대대 단위로 처절하게 능욕했다. 가장 잘 알려진 라이벌들이라면 우선 과거 브루클린 다저스뉴욕 자이언츠. 과거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뉴욕 지역에 있을 당시, 초창기 양키스가 갓 탄생했을 때는 홈 구장도 없어 뉴욕 자이언츠의 홈 구장에 더부살이하는 안습함이 있었지만 양키스가 압도적인 성적과 인기로 인해 다저스와 자이언츠의 인지도를 밑으로 밀어내자 두 팀이 연고지를 캘리포니아 쪽으로 옮겼을 정도로 두 팀과 복잡하게 얽혔다. 다저스와 자이언츠가 내셔널 리그,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이기 때문에 인터 리그가 아니면 자주 만날 일은 없지만 큰 무대나 시범 경기에서 만났다 싶으면 50년대를 기억하는 나이 지긋하신 올드 팬들이 주축이 되어 양 팀과 양 팬덤은 모두 전투력이 상승한다.
물론 대등한 라이벌이라고 하기엔 자이언츠와 다저스가 양키스에게 정말 지독하게 당했다. 자이언츠와 다저스 두 팀이 양키스에게 헌납한 우승은 무려 13회. 2016년 기준으로 13회 우승 기록은 양키스 외엔 없다. 자이언츠는 명장 존 맥그로가 이끌던 시절 양키스를 2번 연속 물리치고 우승을 거뒀지만, 이후 5번 만나 5번 모두 패배했다. 다저스는 한술 더 떠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를 11번이나 만나 8패를 했다. 정규 시즌 인터리그 전적도 좋지 않은 건 덤. 월드 시리즈에 한 번 가는 데 십수 년, 혹은 수십 년 공백기가 흔한 메이저리그에서,[27] 똑같은 상대에게 자그마치 8번 우승을 내줬다는 게 얼마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경험인지 보통 팬들로서는 상상이 안 될 정도이다. 그 참혹한 역사는 1941, 1947, 1949, 1952, 1953년, 총 5차례 월시에서 양키스에게 모두 패배하며(...) 절정을 이루었다. 1955년에는 다시 만난 지겨운양키스를 드디어 꺾었는데, 이게 다저스의 첫 우승이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양키스와의 악연을 끊나 싶더니 바로 다음해 1956년에 또다시(...) 양키스를 만나 준우승을 추가한다.
양키스와 다저스는 메이저리그 대표 '타자 왕국'과 '투수 왕국'의 대결이라고 볼 수 있는데, 현재까지는 양키스 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셈이다. 1956년에는 오히려 다저스가 양키스의 돈 라슨에게 포스트시즌 사상 최초, 월드 시리즈 유일 퍼펙트 게임을 헌납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같은 지구에 속한 보스턴 레드삭스와는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내 최고의 숙적이다. 레드삭스 팬들은 레드삭스와 양키스를 상대하는 팀만 응원한다고 공언할 정도로 양 팀은 자주 만나는 빈도만큼이나 사건, 사고도 많다. 팬들 간 현피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다만 뉴욕에서는 레드삭스 모자를 쓰고 다녀도 무관심을 시전하지만, 보스턴에서 뉴욕 양키스 모자를 썼다간 알아서 하시길. 심지어 보스턴 지역의 미식축구 스타인 톰 브래디도 양키스 모자를 쓰고 외출한 모습이 신문에 실리자 '브래디, 너마저도?' 혹은 '진정한 하라구로'란 말을 들었다.
레드삭스 팬들이 밤비노의 저주를 깰 때까지 얼마나 엄청난 인고의 세월을 보냈냐면, 양키스는 레드삭스가 86년 동안 월드 시리즈 우승 0번, 페넌트레이스 우승 4번에 그칠 때 월드시리즈 우승 26번, 페넌트레이스 우승 39번을 휩쓸었다. 레드삭스는 월드 시리즈에 4번 진출해 모두 준우승했는데, 모두 7차전에서 패배해 엄청난 희망 고문을 당했다. 그래서 2004년 뉴욕 타임즈지에서는 "양키스와 레드삭스의 라이벌리는 망치와 못(...)에 비유할 수 있다"[28]며 디스하기도 했다. 그리고 보스턴은 그해 우승했다

4.2 스타

파일:Attachment/뉴욕 양키스/양키스의레전드들.jpg
앞줄 왼쪽부터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조 디마지오, 뒷줄은 데릭 지터, 미키 맨틀이다.

팀에서 활동한 유명 선수는 통산 714홈런을 치며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홈런왕 베이브 루스,[29]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지만 불치병으로 인해 일찍 은퇴해야 했던 루 게릭,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운 조 디마지오, 그외에 역대 최강의 스위치 히터 미키 맨틀, 명언 제조기 요기 베라 등 많다. '도니 베이스볼'이라는 별명으로 암흑기를 지탱한 최후의 자존심 돈 매팅리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선수로는 전설적인 유격수 호너스 와그너와 100년의 시간차를 두고 올타임 최고의 유격수 자리를 놓고 다퉜던 알렉스 로드리게스, 이제는 3루수로 더 많은 시즌을 보내면서 의미가 없어졌지만 역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꼽히는 마리아노 리베라, 캡틴 데릭 지터, 공격형 포수로 한 시대를 풍미한 호르헤 포사다, 빅게임 피처로 정평이 나 있는 앤디 페티트, 전성기에 안정된 수비력으로 외야를 지키고 호타준족을 과시한 버니 윌리엄스,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상 최고의 투수에서 제대로 흑화한(...) 로저 클레멘스 등이 있다.

워낙 명문 구단인 데다가 재정 또한 탄탄한 탓으로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거액 연봉으로 끌어들이는 탓에 악의 축 소리를 듣곤 한다. 당장 알렉스 로드리게스만 하더라도 약 2,750만 달러를 연봉으로 받는데, 지금이야 메이저리그 최저 연봉이 49만 불로 많이 오른 편이라 조금 덜하지만 2000년대 후반까지는 전체 선수 연봉 합계가 A-로드의 한 해 연봉보다 적은 팀도 간혹 있었다. 재밌는 것은 이런 '악의 제국'이라는 별명을 붙인 쪽이 당시 메이저리그 30개 팀 중 페이롤 2위였던 보스턴 레드삭스라는 점이다. 원래 아쉽게 못하면 더 기분 나쁜 법이다 쿠바 대표팀에서 던지며 각종 국제 대회를 호령하다 망명한 명투수 호세 콘트레라스 영입전에서 입찰 금액으로는 1위였지만 콘트레라스가 양키스 입단을 선택하자 보스턴 입장에서는 닭 쫓던 개 꼴이 된 뒤 레드삭스의 래리 루키노 사장은 양키스를 디스하며 악의 제국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페이롤 랭킹 2위가 1위를 돈 쓴다고 디스하는 것은... 더군다나 이 영입 건에서는 오히려 보스턴이 양키스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콘트레라스는 어릴 적부터 핀스트라이프가 꿈이었다며 본인의 의지로 양키스를 선택한 것인데 갑자기 돈 문제로 디스를 하니 양키스 입장에선 황당할 따름이었다. 한편 영입 경쟁을 위해 니카라과로 파견돼 있었던 테오 엡스타인 전 보스턴 단장은, 호텔에서 콘트레라스가 양키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유리창을 박살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베이브 루스 정도를 제외하면 양키스의 전설들은 양키스에 처음부터 입단해서 뛰던 선수들이 많았다. 거기에 90년대 말에 다시금 부흥기를 이끈 데릭 지터나 마리아노 리베라 역시 팜 출신. 물론 연봉은 무지 잘 챙겨준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유망주들을 키워보려고 노력했다. 로빈슨 카노, 브렛 가드너, 멜키 카브레라, 조바 체임벌린, 필 휴즈, 이안 케네디, 이반 노바, 데이비드 로버슨, 헤수스 몬테로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이들 중 트레이드로 이탈한 선수들도 있고 제대로 커주지 못한 선수들도 있다.

FA 시장에서 큰 손이지만, 유망주를 보호한다는 정책을 포기한 건 아니다. 트레이드 시장에 수많은 특급 선발들이 나왔음에도 오퍼를 하지 않고 FA로 사바시아를 기다렸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 가급적 트레이드는 자제하고 돈은 더 많이 들더라도 유망주 손실이 적은 FA 영입에 올 인하는 입장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과감하게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커티스 그랜더슨의 영입이 대표적인 사례다. 참고로 이때 내준 이안 케네디는 2011년 애리조나 디백스의 에이스로 성장했다가 지금은 망했어요.

선수 외 관계자 중에선 장내 아나운서 밥 셰퍼드가 유명하다. 미키 맨틀이 데뷔하던 1951년 4월 17일부터 시작하여 2009년 11월까지 57년간 장내 아나운서로 일해왔다. 그가 직접 불러온 스타들의 이름이 조 디마지오에서 시작하여 데릭 지터까지 이르는, 양키스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특히 데릭 지터는 밥 셰퍼드가 와병으로 경기장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2007년부터 녹음된 그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이 소개되기를 원한다고 해서 구단이 밥 셰퍼드의 녹음 테잎을 준비해 데릭 지터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틀어주곤 했었다. 그 외에도 마리아노 리베라도 양키 스타디움에서 치르는 마지막 경기까지 녹음된 목소리를 사용하였다. 은퇴 후 1년도 되지 않아 2010년에 타계하였다.

데릭 지터 헌정 "RE2PECT"에도 밥 셰퍼드 소개가 들어가 있다. 항상 "number 2, Derek Jeter, number 2"로 마지막에 등번호를 반복하는 버릇이 있다.

4.3 홈 구장: 양키 스타디움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4.4 용모 복장 규정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복장과 외모 규정이 철저한 구단이다. 잘생겼느냐 못생겼느냐가 아니라, 장발이나 수염 등을 단속한다. 정리된 콧수염 정도라면 허용되지만, 장발에 턱수염 기르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구단이다. 이는 '보스'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다시 말해,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의 보수적, 혹은 꼰대스럽다고도 볼 수 있는 개인 취향 때문에 생겨난 규정이다(...). 그래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선수가 양키스로 이적하면 '저 선수 수염 밀어야겠네' 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실제로 계약식에는 싹 정리된 선수가 등장한다. 또 심하게는 유니폼 상단 단추 푸는 것까지 단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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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메이저리그 구단별 수염의 덥수룩한 정도

물론 아주 드물게 반항하는 경우도 있긴 했는데, 이 경우는 상당한 제재가 들어온다. 돈 매팅리는 1991년 장발이 문제가 되어서 1경기를 벤치에서 보내기도 했고, 아프로 스타일로 유명했던 오스카 갬블은 스프링 캠프가 시작되었을 때, '머리 정리하기 전에는 유니폼 지급도 없다'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캣피시 헌터와 같이 장발을 기르거나, 구스 고시지가 중국인 수염을 기르는 등 실력 있고 고집 센 선수들은 열심히 반항을 하기도 했다. 다만 자니 데이먼은 입단 당시 구단으로부터 '면도할 필요 없다'는 파격적인 예외 조항을 줬음에도 자발적으로 면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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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리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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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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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지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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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니 데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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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스위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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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 버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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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유킬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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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맥켄

반면에 양키스에 있다가 다른 팀으로 이적한 선수의 경우는 수염을 기르는 예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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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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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유니폼(블랙 핀 스트라이프)어웨이

양키스는 유니폼이 딱 두 종류밖에 없다. 흰색 줄무늬(흔히들 핀스트라이프라 부르는) 홈 유니폼, 그리고 회색에 가슴에 'NEW YORK'이라고 적힌 원정 유니폼이 그것이다. 모자도 딱 한 종류. 다른 구단들은 저지 팔려고 얼터너티브 저지나 모자도 나오곤 하는데, 양키스는 그런 거 없다. 그래도 잘만 팔린다. 제일 잘 팔린다. 과장 안 보태고 세계에서 제일 잘 팔린다. MLB와 뉴욕 양키스를 잘 모르며 팬이 아닌 사람들도 이 N과 Y가 겹쳐진 심볼이 새겨진 모자를 알고, 쓰고 다닌다. 모자를 포함해 뉴욕 양키스 저지까지 힙합을 필두로 한 스트릿 문화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전통을 중시하는 구단이기 때문에 유니폼 자체도 예전이랑 달라진 게 거의 없다.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조 디마지오, 미키 맨틀 등 당대의 스타들 사진만 찾아 봐도 지금 유니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들의 사진에는 촌스러운 옛날 운동복을 볼 때의 느낌이 거의 없는 편이다. 얼마나 디자인 변화에 인색하냐면 키트 스폰서인 마제스틱의 로고조차도 허용치 않을 정도. 당연하지만 30개 구단 중 유일한 경우다.

또한 원 팀(one team)을 강조하며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이유로 유니폼 뒤에 선수들의 이름을 새기지 않는다. 홈 유니폼에 선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구단은 보스턴 레드삭스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도 있지만[30] 두 구단도 원정 유니폼에는 이름이 적혀 있는 데 반해 양키스는 원정 유니폼에도 이름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 라이트 팬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 양키스는 '진짜 양키스 팬이라면 등번호만 보고도 선수가 누군지 딱딱 알고 있어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앞으로도 바뀔 일은 없어 보인다.

4.6 자체 중계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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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부터 YES Network(Yankees Entertainment & Sports 네트워크)라는 자체 채널을 만들어 중계하고 있다. 이 채널에서만 중계하는 것은 아니며 ESPN이나 FOX TV에서도 중계한다. 다만 YES 네트워크를 틀면 항상 양키스 경기를 볼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브루클린 네츠, EPL 아스날 FC의 경기도 중계한다. 대체로 중계는 마이클 케이가 맡는데, 홈런이 나오면 항상 "SEE-YA!"를 외친다. 감칠맛 난다 상대 팀이 칠 때도 양키스가 칠 때도 항상 말하지만, 역시 양키스가 칠 때 그 샤우팅이 강렬하다.

원래 지역 케이블 채널인 MSG[31]에서 양키스의 경기를 중계했지만, 중계권료를 둘러싸고 마찰이 빚어지자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직접 채널을 만들었고, 이것이 대박이 터졌다. 현재 이 채널의 수입은 양키스의 주 수입원 중 하나이며, 양키스의 가치를 높이는 최고의 공신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지분 변화가 생겼고 이전까지 49% 지분만을 가지고 있었던 21세기 폭스가 2014년에 80% 지분을 가진 메이저 대주주가 되었으며, 양키스의 지주 회사인 Yankee Global Enterprises가 20% 지분을 가지게 됨으로써 채널에서 얻게 되었던 수익 지분도 줄어들었고 더 이상 의사 결정 주도권은 없게 되었다. 링크

4.7 계약 중인 마이너리그 구단

4.7.1 트리플 A

스크랜턴/윌크스-바레 레일라이더스
Scranton/Wilkes-Barre RailRiders
창단1919년
계약 연도2007년
소속리그/지구인터내셔널 리그 북부지구
연고지펜실베이니아 주 머식
홈 구장PNC 필드

4.7.2 더블 A

트렌턴 선더
Trenton Thunder
창단1980년
계약 연도2003년
소속리그/지구이스턴 리그 동부지구
연고지뉴저지 주 트렌턴
홈 구장암 & 해머 파크

4.7.3 싱글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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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파 양키스
Tampa Yankees
창단1994년
계약 연도1994년
소속리그/지구플로리다 스테이트 리그 북부지구
연고지플로리다 주 탬파
홈 구장조지 스타인브레너 필드
찰스턴 리버독스
Charleston RiverDogs
창단1980년
계약 연도2005년
소속리그/지구사우스 애틀랜틱 리그 남부지구
연고지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홈 구장조셉 P. 라일리 주니어 필드
스태튼 아일랜드 양키스
Staten Island Yankees
창단1999년
계약 연도1999년
소속리그/지구뉴욕 펜 리그 맥나마라지구
연고지뉴욕 시 스태튼 아일랜드
홈 구장스태튼 아일랜드 컬리지 야구 공원

4.7.4 루키

펄래스키 양키스
Pulaski Yankees
창단1942년
계약년도2015년
소속리그/지구애팔래치안 리그 동부지구
연고지버지니아 주 펄래스키
홈 구장캘피 파크
  • 원래 이 팀은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 중이었던 팀으로, 2014년까지의 팀명은 펄래스키 매리너스였다. 2015년부터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면서 펄래스키 양키스라는 팀명으로 바뀌었다.

4.8 영구결번 목록

뉴욕 양키스의 영구결번
1234567
빌리 마틴데릭 지터베이브 루스루 게릭조 디마지오조 토레미키 맨틀
891015162023
빌 디키 &
요기 베라
로저 매리스필 리주토서먼 먼슨화이티 포드호르헤 포사다돈 매팅리
32374244464951
엘스턴 하워드케이시 스텡겔마리아노 리베라 &
재키 로빈슨
레지 잭슨앤디 페티트론 기드리버니 윌리엄스


영구결번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팀이다. 전 구단 공통 영구결번인 42번을 제외해도 2015년 시즌 기준 무려 21명이다. 2014년을 마지막으로 팀의 주장이자 최고의 인기 스타인 데릭 지터(2번)까지 은퇴하면서 0번을 제외한 한 자릿수 백 넘버는 양키스에서 쓸 수 없다.

  • 1. 빌리 마틴(Billy Martin): 2루수로 1950년대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제패에 한몫한 경력이 있지만, 더 유명한 것은 감독으로서의 경력. 특히 1970년대, 일명 브롱스 주(Bronx Zoo)라 불렸던 양키스의 수장을 맡아 양키스의 암흑기를 끝냈다. 다만 전 구단주인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사이가 상당히 안 좋았다. 5번씩이나 해고를 당한 것으로 유명하고, 워낙 사이가 안 좋아서 멱살 잡이를 한 일까지 있었지만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마틴을 스타인브레너는 좋아했다고 한다. 츤데레 조 토레와 마찬가지로 스타인브레너 구단주 시기에 양키스 전성기를 만든 인물.
  • 2. 데릭 지터(Derek Jeter): 1990년대 유격수 자리를 지키면서 양키스의 중흥기를 이끈 뉴욕의 연인. 0번을 제외한 양키스의 마지막 한 자릿수 등번호를 가진 선수다. 양키 프랜차이즈 유일의 3000안타 타자이기도 하다. 현재는 비공식적 영구결번이지만 영구결번이 될 것이 매우 유력하다.[32] 월드시리즈 반지 5개.
  • 3. 베이브 루스(Babe Ruth): 간단히 말해 홈런 714개를 쳤고, 양키스를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만들었고, 야구의 모습을 완벽하게 바꿔 놓은 사나이.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 3개[33].
  • 4. 루 게릭(Lou Gehrig): 2131경기 연속 출장 기록과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만루 홈런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통산 타율 0.340에 493홈런을 쳐낸 강타자. 루게릭병으로 인한 비극적인 은퇴로 인해 더 유명하다. 그의 등번호 4번은 메이저리그 최초이자, 전 세계 스포츠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구결번 된 번호이다.
  • 5. 조 디마지오(Joe DiMaggio): 1940년대와 50년대 미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슈퍼 스타. 깔끔한 매너와 항상 웃는 얼굴로 실력과 함께 항상 인기가 많았던 4~50년대 양키스의 상징 그 자체인 선수. 우아하고 신사적인 태도로 인해 많은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56경기라는 역대 최다 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인물. 마릴린 먼로와의 로맨스로도 유명하다. 루스-게릭 시대를 잇는 후계자로서 타격의 달인인 보스턴의 테드 윌리엄스와 라이벌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야구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월드 시리즈 반지 9개.
  • 6. 조 토레(Joe Torre): 선수 시절에는 양키스에서 뛰지도 않았고, 지도자 시절에도 양키스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감독이었지만, 양키스에 와서 우승 4번을 차지하며 명감독 위치에 올랐다. 그렇다고 선수 빨로 치부하기도 그런 것이 구단주 스타인브레너의 성질머리를 감당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능력 입증. 월드 시리즈 반지 4개.
  • 7. 미키 맨틀(Mickey Mantle): 통산 536홈런을 때려낸 강타자이자 역사상 최고의 스위치 히터. 잦은 부상을 달고 뛰면서도 양키스의 중견수를 책임지며 맹활약했다. 이른바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Old Great Yankees)의 마지막 중심 타자로서 맹활약했고,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 올스타 20번과[34] MVP 3번을 기록한 슈퍼 스타다. 맨틀은 사실 입단 초기에는 6번을 달고 있었는데, 잠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간 사이 다른 선수가 6번을 챙겨갔다. 메이저리그로 복귀한 이후로는 결국 7번을 선택했고 이후 계속해서 7번을 달고 뛰었다. 만약 맨틀이 등번호 6번을 달고 있었다면 양키스의 영구결번은 지터-루스-게릭-디마지오-맨틀로 이어지는 올타임 라인업을 구축할 수도 있었다.
  • 8(공동)
    • 빌 디키(Bill Dickey): 1930년대와 40년대 양키스의 전성 시대, 양키스의 안방을 책임진 포수. 11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공적은 선수로서 8번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끈 점과 요기 베라를 키워 내면서 코치로서도 6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는 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요기 베라(Yogi Berra): 빌 디키의 뒤를 이어 양키스의 주전 포수가 된 선수. 포수로서 양키스의 전성 시대를 이어갔으며, 타격 실력도 빼어난 편이라 세 차례 MVP에 선정되었다. 훗날 양키스 감독도 잠시 맡았다. 거기에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만 10개로 최다 보유자이다. 당연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9. 로저 매리스(Roger Maris): 19'61'년에 '61'홈런을 달성, 루스의 기존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깬 선수. 양키스 슬러거 라인을 맨틀과 함께 이어갔다. 다만 양키스 팜 출신이 아닌 탓으로 차별을 많이 받았다. 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출전해 월드 시리즈 1홈런에 그치자 뉴욕 언론들이 꾀병이라고 디스 걸었을 정도. 하지만 오늘날 약물 파동 이후에는 진정한 홈런왕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다만 명예의 전당에는 끝내 헌액되지 못했다.
  • 10. 필 리주토(Phil Rizzuto): 타격 스탯은 별 볼 일 없지만, 당대 최고 수준의 수비를 자랑한 유격수.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며 7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은퇴한 지 38년 만인 1994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월드 시리즈 반지 7개.
  • 15. 서먼 먼슨(Thurman Munson): 양키스의 포수 계보를 이어가는, 파이팅과 리더십을 갖춘 당대 최고 수준의 포수였으나 비행기 사고로 안타깝게 요절했다. 양키스 역대 최연소 주장을 잃은 팀은 방향키를 잃고 그대로 침몰, 팀 역사상 최악의 침체기가 도래해 96년 우승할 때까지 약 20년간 우승 타이틀이 없었다.
  • 16. 화이티 포드(Whitey Ford): 월드 시리즈 통산 10승으로 WS 역대 최다승 기록을 가진 투수다. 일명 회장님으로 불렸다. 양키스에서만 뛰었으며 양키스 통산 236승을 기록한 투수. 메이저리그의 송진우 최강의 빅 게임 피처로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약간 적어 보이는 236승으로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다.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고 있다.
  • 20. 호르헤 포사다(Jorge Posada): 90년대 후반~2000년대까지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끈 '양키스 코어 4'의 멤버이자 당대 양키스의 안방마님.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공격력으로 양키스 타선의 주축이었고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던 포수였지만 포수라는 포지션이 워낙 단명하는 포지션인 만큼 '양키스 코어 4' 멤버 중에서는 가장 일찍 선수 생활을 마쳤다. 이후에는 포사다의 20번 역시 비공식 영구 결번으로 남아 있었으나 2015년 2월 17일, 버니 윌리엄스와 함께 영구 결번자가 되었다. 월드 시리즈 반지 5개.
  • 23. 돈 매팅리(Don Mattingly): 뉴욕 양키스의 최악의 암흑기인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팀의 주장으로서 양키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강타자. 별명은 안타를 잘 친다는 의미의 'Hit Man'이었다.[35] 양키스의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은 돈 매팅리(238, 1986년)가 가지고 있다.[36] 1루수로서 수비가 뛰어나 골드 글러브를 9번차지했고, 실버 슬러거 3회와 리그 MVP 1회(1985)를 수상했다. 다만 통산 성적은 222홈런으로 평범해서 명예의 전당 입성은 실패했다. 1시즌 만루 홈런 6개로 메이저리그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클러치 능력이 좋았다. 역대 양키스 주장 가운데 우승 반지와 월드 시리즈 경험이 없는 유일한 주장. 조 토레 감독을 따라 다저스에서 코치를 하다가 토레 감독이 잘린 후,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 32. 엘스턴 하워드(Elston Howard): 어쩌면 양키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양키스 최초의 "유색 인종" 선수였다. 포수와 좌익수를 맡으며 요기 베라의 후계자가 되기도 했다. 1963년에 리그 MVP로 선정됐다. 통산 성적은 다소 평범한 편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 37. 케이시 스텡겔(Casey Stengel): 양키스 역사상 최고의 감독을 고르라면 꼭 나오는 전설적인 명감독. 별명은 노교수님(Old Professor). 팀에게 우승을 7번 안겨준 명감독이다. 양키스 뿐만 아니라 같은 연고의 뉴욕 메츠에서도 영구 결번이 되었다.
  • 42(공동)
    • 마리아노 리베라(Mariano Rivera): '커터의 신', '야구 역사상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요약되는 위대한 투수. MLB 최다 세이브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3년 9월 22일에 시즌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42번이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이래 42번을 달고 있던 선수들이 모두 은퇴하게 되었다. 또한 이제 42번을 등 번호로 단 현역 선수는 앞으로 다시는 나올 수 없다. 별명으로는 리베라의 전용 테마곡 메탈리카의 'Enter Sandman'에서 따온 "The Sandman(잠귀신)", 'Mariano'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딴 'Mo'가 있다. 은퇴 이후에는 선교 활동을 다니고 있다.
    • 재키 로빈슨: 전 구단 영구결번.
  • 44. 레지 잭슨(Reggie Jackson): 별명은 '10월의 사나이(Mr. October)'로, 많은 삼진과 불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월드 시리즈 통산 타율 0.357, 장타율 0.755, 홈런 10개를 기록했고 특히 77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한 경기 3연타석 홈런을 비롯한 4홈런 8타점이라는 전설과도 같은 활약을 선보였다. 정규 시즌에도 통산 563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이자 2597삼진으로 메이저리그 올타임 삼진왕.
  • 46. 앤디 페티트(Andy Pettitte): 포사다, 지터, 리베라와 함께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끈 Core 4중 한 명으로. 통산 256승[37]을 거두었고 포스트시즌에서 19승을 올린 메이저리그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성장 호르몬 복용 이력이 흠.
  • 49. 론 기드리(Ron Guidry): '루이지애나의 번개(Louisiana Lightning)'로 불린 1970년대와 1980년대 양키스의 에이스. 팀의 두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 51. 버니 윌리엄스: 푸에르토 리코 출신으로 양키스 팜에서 성장해 1990년대 정교한 타격과 켄 그리피 주니어에 비견되는 중견수 수비로 양키스의 센터 필드를 책임진 선수. 기타리스트로도 유명하다. 명예의 전당 투표가 시작되면 머지않아 공식 영구결번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두 번째 해 득표율이 5%에 미치지 못해 헌액이 물 건너갔다. 그래도 아직까지 그를 기억하는 팬들이 많아서 버니와 함께 뛰었던 랜디 존슨은 물론 그 스즈키 이치로조차 다른 번호를 달아야 했다. 오랫동안 비공식 영구 결번으로 남아 있었으나 2015년 2월 17일 호르헤 포사다와 함께 영구 결번자로 확정되었다.

여기는 영구결번까지는 아니지만 팀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 비워 두고 있는 번호. 예를 들자면 2008년 당시 구원 투수인 라트로이 호킨스가 폴 오닐의 21번을 달자 양키스의 팬들이 벌떼 같이 일어난 바 있다. 결국 호킨스는 반 강제로 번호를 22번으로 바꾸게 되었다.[38]

  • 21. 폴 오닐: 신시내티 레즈에서는 비교적 평범했다가 양키스 이적 이후 대폭발. 클럽하우스에 폭발적인 승부욕을 심어 넣은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월드 시리즈 반지 5개.[39] 은퇴 후 YES 네트워크 해설자로 활동 중.
그리고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13번도 끝이 좋지는 않았지만 비공식적인 결번이다.
  1. 양키 스타디움 보수 공사가 실시된 관계로 뉴욕 메츠의 동의하에 2년간 사용했다.
  2. 2008년까지 사용한 이전 양키 스타디움과의 구분을 위해 '구', '(II)' 등을 달아 구분하는 경우가 많으나 정식 명칭은 똑같이 'Yankee Stadium'이다.
  3. 뉴욕 양키스의 모기업으로 할 스타인브레너(Hal Steinbrenner), 행크 스타인브레너(Hank Steinbrenner)가 공동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4. 마이너리거는 제외.
  5. 이 말은 뉴욕 양키스 선수 출입구에 동판으로 새겨져 있다. 이렇게.
  6. 이 악의 제국이라는 별명도 사실 앙숙인 레드삭스가 양키스가 소위 돈지랄로 좋은 선수들을 쓸어 모아 우승을 독식한다며 비난하자 양키스가 오히려 '악의 제국이라고? 그거 좋은 별명이구만.' 하면서 이 별명을 양키스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2000년대 초반 쿠바 국가 대표 팀의 에이스로 군림하던 호세 콘트레라스 영입전에서 패배한 후 레드삭스의 사장이던 래리 루치노가 인터뷰에서 했던 표현. 그런데 양키스한테 돈지랄한다고 비난하는 레드삭스도 돈지랄로는 양키스 다음가는 수준이다.
  7. 2003년 메이저리그에 사치세가 도입된 이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사치세를 납부하고 있다. 1년 사치세만 해도 스몰 마켓 팀의 페이롤에 비할 만하고 11년간 납부한 사치세의 총액은 양키스의 1년 페이롤에 맞먹을 정도. 여러모로 비범하다.
  8. 아시아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일본 시리즈 21회 우승으로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9. 특히 자이언츠와 다저스는 양키스에게 월드시리즈에서 호구 잡힌 팀으로 유명하다.
  10. 남성용, 여성용.
  11. [1]
  12. 뉴욕 양키스의 명감독, 양키 스타디움모뉴먼트 파크에 베이브 루스루 게릭과 같이 비석이 헌액되었다.
  13. 이런 상황은 20년 뒤 돈 매팅리-데이브 윈필드가 있을 때 그대로 재현된다.
  14. 하다 못해 잡겠다는 선수는 사비를 털어서라도 반드시 잡았다. 물론 이것은 훗날 '사치세'란 제도가 생긴 원인이 되지만.
  15. 그러나 뉴욕에 와서는 오클랜드 시절의 혹사 등의 이유로 부상이 깊어지며 조기에 은퇴하고 말았다.
  16. 이게 더 안습이었던 이유는 이 기간에 동향 팀인 뉴욕 메츠1986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1988년에는 내셔널 리그 최고의 성적으로 플레이 오프에 진출해 양키스 팬들이 피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또한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는 1986년 월드 시리즈 준우승, 1988년, 1990년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내다 놓은 동생이 어느 순간에 완전 간지에 공부까지 잘하는 엄친아로 변신한 모습을 보는 심정이 이럴 거야(...) 덤으로 공부 잘하는 라이벌이 전교 1등을 차지한 심정도
  17. 하필이면 은퇴를 월드 시리즈 우승 1년 전인 1995년에 했다(...).
  18.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방영했다.
  19. 다만 다나카도 양키스에 온 뒤로는 몸값과 비교해 미묘한 성적을 찍고 있는 편. 보스턴은 다나카 영입에 대해 이가와 게이 시즌 2가 될 거라는 저주를 한 적이 있다.
  20. 이 당시 LA 에인절스는 테셰이라로 얻은 픽으로 마이크 트라웃타일러 스캑스를 지명했다. 참고로 양키스는 2008년 드래프트에서 게릿 콜을 지명했지만 게릿 콜이 보라스와 짜고 양키스를 물 먹이면서 UCLA 대학 장학생으로 진학해버려 양키스 팬들에게는 금지어 취급.
  21. 티렉스는 원래 슬로 스타터로 유명해서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힘써야 될 포스트시즌에는 못쓰고 물방망이가 된 건 그대로더라..
  22. 이때 필리스에는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있었는데, 양키스 팬들은 그 옛날 레드삭스 시절의 악연을 기억하는지 "Who′s your daddy?"를 외쳤다.
  23. 버니 윌리엄스의 은퇴 후 자니 데이먼, 멜키 카브레라 등이 있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양키스의 중견수 포지션은 아킬레스 건이었다.
  24. 파바노가 양키스에게 먹튀짓하고 욕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서로가 서로를 원할 확률은 제로라 봐도 무방하다.
  25. 이들은 양키스가 한 번이라도 월드시리즈를 못 이루면 온갖 비난을 쏟아낸다. "OOO 따위가 타자냐? 내버려, 당장!", "감독 XXX나 코치 XXX는 병신 짱인 듯!", "단장 개XX는 X폼 잡으려고 그 자리 앉은 거냐?" 같은 원색적인 비난은 기본으로 나온다.
  26. 3경기에 9점 내준게 뭐 그렇게 대단한건가라고 생각한다면, 블루제이스는 메이저리그 중에서 상남자의 상남자 야구를 하는 팀이다. 좌익수가 20홈런, 중견수가 30개의 2루타, 우익수가 90경기 뛰고 17홈런, 백업 외야수가 20-20, 1루수는 홈런왕 경쟁중이고 3루수는 작년 MVP의 도날드슨. 유격수 툴로위츠키도 20홈런, 2루수도 타격이 수준급에다가 포수마저 최근 한달간 10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이런 팀을 상대로 3경기에 9점밖에 안내준것.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평소 3경기에 15점 20점은 가볍게 내주는 팀이다.
  27. 당장 다저스만 해도 1988년이 마지막 월시.
  28. The New York Times; The Boston Globe; Araton, Harvey; Kepner, Tyler; Anderson, Dave; Vecsey, George; Ryan, Bob; MacMullan, Jackie (2004). The Rivals: The New York Yankees vs. the Boston Red Sox–––An Inside History (1st ed.). New York: St. Martin's Press. ISBN 0-312-33616-0.
  29. 엄밀히 말하면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팔려온 것이긴 하지만 야구사를 바꾼 그의 활약은 양키스 시절부터였다.
  30. 자이언츠의 경우 등 번호와 함께 이름이 있었다가 2000년 새 구장이 개장되면서 유니폼 디자인을 소폭 바꾸는 과정에서 홈 유니폼에서 이름을 뺐다. 잠시이기는 했지만 2004~2006년 기간에는 컵스와 다저스도 유니폼에 선수 이름을 뺀 적이 있었다. 심지어 양키스의 연고지 라이벌 메츠도 1999 시즌에 한해 유니폼에 이름을 뺐었다. 지금도 미네소타 트윈스나 시애틀 매리너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즈 등의 일부 구단들은 얼트 유니폼을 입을 시 이름을 빼기도 한다.
  31. 현재는 NBA 뉴욕 닉스, NHL 뉴욕 레인저스, 뉴욕 아일런더스, MLS 뉴욕 레드불스 경기 중계로 먹고 살고 있다. 지역 라이벌 뉴욕 메츠의 경기는 SNY(Sportsnet New York)에서 중계 중이고, 동부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우에는 구단주인 펜웨이 스포츠 그룹에서 소유 중인 NESN에서 중계 중.
  32. 사실 유력한 수준이 아니라 이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병크가 터지지만 않으면 100% 확정이다.
  33. 첫 우승인 1923년은 기념용 회중시계를 줬다. 1927년부터 반지를 줬다.
  34.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올스타전을 두 번 했고, 맨틀은 그 모든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따라서 16년 동안 20번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35. 최고의 야구 선수란 의미에서 'Donnie Baseball'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는데, 뉴욕의 양키스 팬과 지역 언론들이 즐겨 불렀던 별명이다.
  36. 데릭 지터는 1999년에 기록한 219개가 최다.
  37. 단 그중 37승은 휴스턴에서 거뒀다
  38. 호킨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데, 21번을 원한 이유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번호이기 때문이었지, 폴 오닐의 것을 뺏으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39. 신시내티 레즈 1개, 뉴욕 양키스 4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