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그로리그

1 개요

1920년 경부터 1960년대까지 존재하였던 미국의 야구 리그이자, 일종의 흑역사.

2 초창기의 흑인 야구

1800년대 중반 미국 동부에서는 야구가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흑인들 또한 이러한 유행을 타고 야구를 즐기게 되었다. 특히 남북전쟁 전후로 군인들이 여가시간에 야구를 즐기는 등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대중 스포츠로써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1800년대 중후반에는 군인, 실업, 대학 팀등 다양한 각계의 분야에서 흑인 야구팀이 생기게 된다. 특히 당시 미국에서 가장 흑인이 많은 도시 중 하나였던 필라델피아에서는 필라델피아 피티안스를 비롯한 많은 팀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3 메이저리그에서의 추방

당시 메이저리그 팀에서도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특히 흑인 야구 팀의 주축 선수를 스카우트 하기 위해 시도하기도 했다. 첫 번째 흑인 프로 선수였던 버드 파울러는 좋은 활약으로 마이너리그에서 각광받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을 지켜본 메이저리그에서는 흑인 선수를 영입하려는 시도를 하게되었고, 그리하여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가 탄생하게 된다.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1](이하 AA) 소속 팀인 톨리도 블루스타킹스는 1883년 형제 야구 선수였던 플리트 워커웰디 워커를 영입했다. 워커 형제의 아버지는 당시로써는 드물었던 흑인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백인인 흑백 혼혈이었다. 특히 플리트는 명문 대학교인 미시간 대학교에서도 포수로써 맹활약을 한 유망주였으며, 웰디는 오벌린 대학에서 최고의 베이스 런너로 각광받던 유망주였다. 톨레도 측 또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당시에 존재했던 흑백차별을 돌파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플리트 워커가 참가한 첫 연습 경기부터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최고의 인기 스타이자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의 선수 겸 감독이었던 캡 앤슨이 플리트 워커가 포수로 있다는 것을 알자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던 것. 결국 감독 찰리 모튼이 해당 경기에서 워커를 제외하겠다고 선언하고서야 경기가 속행될 수 있었다. [2]

다음 해인 1884년에도 톨리도와 시카고 간의 연습 경기가 있었는데, 이 때는 불명확한 이유로[3] 플리트가 선수 명단에서 빠진 채 게임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 해 5월 1일에, 플리트 워커는 간신히 메이저 리그에 최초의 흑인 선수로 데뷔하게 되었고, 웰디 워커도 7월 15일에 두 번째 흑인 선수로 데뷔하게 된다. 웰디 워커는 고작 5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지만, 플리트 워커는 디콘 맥과이어와 함께 팀의 안방을 책임졌으며, 타격에서도 .264의 타율과 .641의 OPS를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4] 그러나 플리트 워커는 시즌을 마친 뒤 다시 마이너리그로 돌아가야 했다.

팀원이었던 토니 멀레인[5]은 플리트 워커가 포수일 때 사인과 정반대로 던지기도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던 등 백인 팀원과 결국 융화되지 못했던 점이 가장 컸고, 팀에서 입지가 좁았던 플리트와 웰디는 결국 팀에서 방출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후로 1947년까지, 몇십년 동안은, 메이저리그는 백인 선수들만의 무대가 되었고, 흑인 선수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났더라도 메이저리그의 문이 닫힌채로 니그로리그에서만 뛰어야 했다.

4 몰락

니그로 리그의 몰락은 1947년 부터 시작된다. 일단 1945년 여름에 브루클린 다저스의 브랜치 리키재키 로빈슨을 영입했고, 재키 로빈슨은 1946 시즌을 몬트리얼 로열스 마이너 리그 에서 보낸 후, 1947년 4월에 다저스에서 데뷔 한다. 그리고 몇달 후인 1947년 7월에는 어메리칸 리그의 첫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6]클리브랜드 인디언스에서 데뷰를 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뛰어난 흑인 선수들은 니그로 리그 보다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게 된다. 이에 따라, 흑인 관중들도 니그로 리그 경기들 보다 흑인 선수들이 뛰는 메이저 리그 경기들로 모이게 되고[7] 이것은 그만큼 니그로 리그의 관중이 줄어드는것을 뜻하고, 니그로 리그의 상업성에 크게 타격을 입힌다.

결극 1951년 이후에 니그로 리그는 없어지고, 선수들은 메이저리그에서 뛰게 된다. 이 후에도 흑인팀이 아예 없어진건 아니지만 니그로리그라는 체계가 없어졌으니 몇년 버티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5 이모저모

역사상 제일가는 야구선수들을 거론할때 빠지지 않는 베이브 루스타이 콥등이 선수 생활을 했을떄 메이저리그에는 흑인 선수들이 없었고, 따라서 이들은 흑인 투수들을 상대해본적이 없다. 동시대에 니그로 리그에는 메이저리그 선수들 못지 않은 실력있는 투수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어느 메이저 리그 투수 보다도 더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는 흑인 투수들도 있었기 떄문에, 어떤 사람들은 베이브 루스나 타이 콥이 흑인 선수들과 같이 경기를 하고 흑인 투수들을 상대했다면 뛰어난 성적을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낸다. 하지만 전 세계 선수들이 모여있는 현대 메이저리그를 보면 백인이든 흑인이든 잘하는놈이 잘하는거고, 베이브 루스타이 콥이 흑인 선수들을 상대로도 상대적으로 못했을거라는 증거는 없다.

  1. 내셔널리그에 밀려서 사라진 미국 최초의 메이저 리그
  2. 한국에서는 이 사건 이후로 플리트 워커가 메이저리그에서 커리어 아웃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3. 플리트가 부상이었다는 설도 있고, 이전과 같은 사태를 우려하여 경기 명단에서 제외했다는 설도 있다.
  4. 이 해 AA 리그 타율은 .240, OPS는 .604였다. 이는 당시 투수 친화적이고, 발야구가 주가 되었던 근대 야구의 특성 때문이다.
  5. 메이저 리그 최초의 스위치 투수로 유명하다.
  6. 이 선수도 재키 로빈슨 못지 않은 실력 있는 선수였다. 올스타 7번, 어메리칸 리그 홈런왕 2번, 어메리칸 리그 득점왕 1번 등의 기록이 그의 실력을 증명한다. 이 선수도 물론 선수생활중 많은 인종차별주위자들의 야유와 협박을 견디면서 이겨냈지만, 재키 로빈슨보다 몇달 늦게 데뷰한 이유로 철저한 콩라인이 되어 버렸고, 인지도도 훨씬 떨어진다. 지못미
  7. 경기마다 흑인 관중이 30% 이상 되는 경기들도 흔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