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예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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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Ежов
1895년 5월 1일 - 1940년 2월 4일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 의장.

무고한 사람 열 명을 처형하더라도, 한 명의 스파이도 놓쳐선 안된다.[1]
내가 살아온 평생에 예조프만큼 혐오스러운 작자는 보지못했다. 내가 그를 쳐다볼 때면 난 항상 라스테라예바 거리 광장에서 파라핀에 적신 종이를 고양이의 꼬리에 묶고 불을 붙여놓은 뒤 겁먹은 동물을 보며 즐거워하는 악동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예조프 역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외양만 틀릴 뿐 지금 역시 그것과 다를바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니콜라이 부하린이 저술한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Letter of an Old Bolshevik, 1936)"라는 회고록 중

피의 난쟁이.
토사구팽이 뭔지 제대로 보여준 인물

그가 숙청당한 뒤에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특히 유년기나 가족 사항에 대해 그렇다. 이름 역시 본명이 아니며 막심 고리키 소설의 등장인물에서 따왔다.

1 일생

소련의 공식적인 설명으론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교육은 초등학교까지만 받았고, 1909년에서 1915년까지는 재봉사 조수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먹고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17년에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17년 예조프는 공산당의 "회계 및 분배부"로 전근되었고, 이곳의 책임자가 되었다. 적백내전이 끝난 1922년 2월 이후 공산당의 여러 지역위원회의 서기로 일했다.1929년부터 1930년까지 농업부의 차관이 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당직을 거쳐 승진했다. 농업부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쿨라크 처리와 집단화를 경험하게 해주었고 이들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을 품게 만들었다. 또한 경제부서에서 일하면서 그는 부하린과 우익 반대파들이 여전히 많이 들어가 있는 경제관료들이나 기술자들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품었으며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처리하는 데는 직접 나서기도 했다. 1932년 스탈린 파벌 내에서는 급진파에[2] 속해있었는데, 기존의 대학 학제를 없애고 공장과 연계된 현장교육 + 기술교육 기관으로 바꿔버리자고 주장해서 온건파들의[3] 극딜을 얻어맞게 된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나가던 시기는 밀어붙이던 기존 속도를 조금 줄이고 숨을 고르자는 분위기가 대세여서 더 얻어맞은 감도 크다.

후에 그의 사람 족치는 능력에 어울리는 자리를 맞게 되어 1933년 숙청[4] 업무를 담당했고 교육이나 경제 쪽보다는 이쪽을 더 잘하는 것으로 판명났다. 1934년에는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다음 해 그는 중앙위원회의 서기국에 들어갔고, 당통제위원회의 의장을 겸임하였다. 당통제위원회는 당 내의 비리를 비롯해서 당원의 전반적인 기율을 감사하는 위치였다. 1935년~36년 당원 문서 확인 및 교체 작업을 진두지휘했고 이 작업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너무 심하게 당원들을 갈궈댔다는 것은 당시에도 나오던 말이었다.

그는 매력이 없는 인물이었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일단 사적인 생활과는 별개로 공적인 곳에서는 철저하게 청교도적인 인간으로 유명했다. 내전기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소련 관료들이 넥타이에 양복 입을 때 군복 입고 다녔다. 이런 모습은 1937년 그가 레닌훈장을 받은 뒤 더 심해졌다. 또한 151cm의 루저 단신이었고 부하린은 그의 잔인함과 사디즘적인 면을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별명은 '피의 난쟁이', '독 품은 난쟁이'가 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예조프

예조프는 스탈린에게 아낌없는 충성을 바쳤으며, 1935년 발표한 논문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필연적으로 폭력과 테러로 귀착된다"라고 주장했다.

당통제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당시 NKVD 의장이었던 겐리흐 야고다와 충돌했다. 야고다도 숙청 관련한 일을 당연히 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공산당은 분위기가 달라서 예조프처럼 막 해댄 건 아니었다. 특히 트로츠키 파벌 문제가 당 내에서 불거졌을 때, 야고다는 당 내의 중론을 따라 "야 적당히 반대파 놈들만 족치고 끝내자"라고 주장했으나 예조프는 아예 전국의 공산당 전체를 겁줘서 숨은 첩자들을 잡아내는 데 반대파들의 재판을 써먹자고 주장했다. 예조프는 곧 니콜라이 부하린을 기소했으나, 야고다는 수사해보고 "문제 없는데? ㅋ"로 대응해서 예조프의 심기를 건드렸다. 예조프는 얼마 안 있어 야고다의 자리를 꿰차게 되었는데, 당통제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모은 야고다에 관한 정보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으로부터 부여된 예조프의 첫 번째 임무는 전임 내무인민위원장이었던 야고다를 체포하여 조사하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의욕적으로 증거를 조작하여 야고다를 반역자로 기소하였고 처형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야고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처형 전에 옷을 벗기고 심한 고문을 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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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리흐 야고다

야고다를 첫 번째 희생자로 하여 예조프는 무자비한 대숙청을 실행하였다. 1937년~1938년 사이에 50%에서 75%의 고위 공산당원과 붉은 군대 고급장교들이 처형되거나 혹은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에서 강제노역형을 받았다. 또한 수십만의 소련의 일반 시민도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런 시민 중에서는 예조프가 임의로 할당한 체포자 수를 채우기 위해 무고하게 끌려온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5]

뿐만 아니라 내무인민위원회와 군사정보국 내부자에 대한 숙청도 단행하였다. 전임자였던 야고다나 멘진스키가 임명한 요원들을 숙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임명한 요원조차 숙청의 칼날은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무고한 사람 열 명을 처형하더라도, 한 명의 스파이도 놓쳐선 안된다"라고 주장하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그의 치하였던 1937년~1938년 130만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68만 명(그 이상일 수도 있다)이 처형되고 나머지는 굴라그로 끌려갔다. 굴라그에서도 가혹한 조건으로 적어도 14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스탈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와 함께

예조프는 내무인민위원회 설치 20주년 기념식이 벌어진 1937년 12월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그는 주인공으로 행세하면서 참석자들의 갈채를 받았는데, 행사에 참석했던 스탈린은 이를 보고 예조프의 정치적 야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자신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이 크기 전에 싹을 잘라왔으며, 이것은 자신의 권력을 수호해왔던 예조프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8년 4월 6일 예조프는 수로운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계속 내무인민위원회를 맡고 있었으나, 예조프의 마구잡이 숙청이 소련의 고급인재를 상당히 유실시켰다는 것을 깨달은 스탈린이 숙청을 완화했기 때문에 예조프의 영향력은 계속 감소되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던 때 예조프가 실시한 군대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은 소련의 국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1938년 8월 22일, 스탈린의 자신의 동향인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내무인민위원회의 제1부장으로 임명되었고, 베리야는 스탈린의 배경을 업고 내무인민위원회에서 예조프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항상 권력기관에 배치한 부하들의 권력이 커지게 되면 다른 심복으로 교체한 후 숙청하였는데, 예조프도 베리야의 임명이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을 직감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술과 절망으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계속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직무를 전혀 손대지 않았고, 스탈린은 계획대로 1938년 11월 25일 예조프의 직무소홀을 이유로 들어 해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라브렌티 베리야를 내무인민위원회의 새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요직에서 쫓아내고 듣기에 따라 중요해보이지만 실제로는 한직에 보낸 뒤에 숙청하는 방식은 조지 오웰1984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스탈린은 예조프를 몇 달간 무시하고 있다가 베리야를 시켜 연례 정치국 회의에서 예조프의 재임 중 행위를 비판하게 하였다. 1939년 3월 예조프는 공산당의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고, 4월 10일 체포되었다. 예조프는 고문을 받고 "정부기금 착복", "독일 스파이들과의 연계", "직무소홀" 등을 자백하나 증거는 없었다. 또한 다른 정치범들과는 달리, 모욕적인 죄목(성적 일탈행위, 양성애 성향 등)도 기소장에 추가되었다.

1940년 2월 3일, 소련 판사인 바실리 울리흐는 예조프를 베리야의 사무실에서 비공개로 재판하였다. 고문으로 인한 자백을 번복하고 예조프는 전임자 야고다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스탈린에 대한 변함 없는 충성심을 표했고, 스탈린 암살음모를 시인하라는 베리야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예조프는 베리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스탈린을 몇 분간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빌기도 했고, 끝까지 스탈린의 이름을 외치며 죽겠다고 맹세하기도 하였다. 판결문이 낭독될 때 그는 실신하여 몸 전체를 들려 끌려나갔다.

1940년 2월 4일, 그는 모스크바 근교에서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독소 불가침조약 때문에 전임자 야고다완 달리 독일의 첩자가 아닌 영국폴란드와 내통한 죄로 바뀌었다. 예조프는 야고다에 대해서 자신이 명령했던 것과 같이 처형 직전에 옷이 벗겨지고 심하게 구타당했다고 전해진다. 몇몇 증언에 의하면 예조프는 처형할 당시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며 심하게 딸꾹질을 하며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예조프의 죽음은 1948년까지 최고 비밀로 분류되었다.[6][7]

그의 아내는 우크라이나 예술의 중심도시였던 오데사의 극장에서 연기하던 배우였으며,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예조프가 실각하고 난 뒤 아내는 자살했다. 딸은 예조프가 처형당한 뒤 인민의 적을 수용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성인이 된 뒤 마가단에서 사실상 유형 생활을 보내야 했다.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숙청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는데, 그 때문에 대부분의 자료가 유실되었다. 소련의 포토샵

2 기타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舊 스탈린 : 강철권력)에 따르면 양성애자였는데, 그 질이 아주 나쁜 변태였다고 전하고 있다. 일례로 결혼한 부부를 협박해서 3P 플레이를 즐겼다고도 한다(...).

2015년 3월 1일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1. 이는 통계학적으로 1종 오류를 감수하면서 극단적으로 2종 오류를 최소화하려는 태도이다. 그럼 1종 오류와 2종 오류가 바뀐 거 아닌가 1종 오류가 스파이 체포 실패고 2종 오류가 무고한 시민 처형 게다가 현대법의 모토는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마라이다!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발언.
  2.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거두였다.
  3. 세르고 오르조니키제가 거두였다.
  4. 소련 공산당에서 '숙청'의 의미는 사실 당에서 일정 비율의 부적격자들을 출당이나 면직 등의 수단을 통해 정기적으로 걸러내는 것에 가깝다. '대숙청'이 특별한 이유는 이런 일반적인 숙청에서 미친 듯이 더 나가서 대규모 체포와 당원 이외의 시민들까지 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5. 6.25 전쟁 와중에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도 이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통하는 극과 극
  6. 예조프에 비하면 베리야는 호상이다(...).
  7. 1948년까지 서방에서는 예조프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