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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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의

KBO 리그의 모든 구단 팬 들 중 세 번째로 강력했던 팬들. 도원전사마산아재보다 힘은 딸렸지만, 응집력과 병신력으로는 다른 두 아재들과 맞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실 삼성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2002년 이전에는 저 둘 이상으로 드셌다.

그래서 1990년대 대구 지역 방송 아침 뉴스 첫 꼭지는 항상 대구 아재와 함께 시작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 시절 아버지 야구팬들은 특히 해태 타이거즈 전이 있는 날이면 가족들을 야구장에 절대 데려가지 않았을 정도다. 이 날 대구야구장은 찰진 욕설과 함께 1루와 3루를 가로질러 공이 아닌 물건들이 마구 날아다니는 그냥 전쟁터였다고 보면 된다.

2 그들이 남긴 화려한 전적

2.1 해태 버스방화 사건

대구아재의 서막,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과거 선수단 버스는 성난 대구아재들의 화풀이 대상으로 종종 애용되었는데 특히 대구아재들이 가장 싫어하는 감독인 김성근 감독 시절에는 거의 동네북 수준이었다.

2.2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대구아재의 절정, 자세한 내용은 역시 해당 항목 참고. 펠릭스 호세영 좋지 않은 곳에 물병을 맞으면서 격분, 관중과 붙은 사건이다.

2.3 쓰레기 투척 사건

1999년 대구 마지막 홈 경기. 상대는 한화 이글스였고, 당시 홈런 54개를 기록했던 이승엽이 홈런성 타구를 쳤다. 그러나 그게 외야 펜스 바로 앞에서 한화의 제이 데이비스가 잡아냈다. 당연히 이를 좋게 봐 줄 리 없는 아재들은 온갖 쓰레기를 외야로 투척했고, 제이 데이비스는 우산을 쓰고 서 있었다.[1]

2.4 삼리건 난입 사건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제일 잘 알려진 건 2010년 플레이오프 삼리건 난입사건.

2.5 나지완 홈런 응원 사건

세이브 조작단

오승환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2] 2011년 9월 22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대구 홈경기 때 벌어졌던 일이었다. 당시 스코어 5-1로 삼성이 4점을 앞서 있었고, 주자도 없었기 때문에, 오승환이 나와도 세이브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운드에 올라왔던 투수는 임진우였는데…

임진우가 흔들리면서 주자 1루 상황을 만들어 줬고, 타석에는 나지완이 들어섰다. 이 때, 한 대구 아재가 외치기를

"나지완 홈런"

문제는, 기아 입장에서는 이거만한 굴욕도 없었고, 이런 식의 굴욕적인 응원을 대구 관중 대다수가 따라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그 아재의 외침대로 나지완이 출루, 주자 1,2루가 되자 그제야 오승환을 올려서 결국 세이브 성공하고 경기를 이겼지만, 이 과정에서 오승환은 안타를 맞고 1점을 더 내줘서, 임진우의 방어율이 올라갔다. 뿐만 아니라, 삼성 라이온즈의 공식 트위터미투데이는 앞의 사실은 싹 빼먹고 오승환 세이브만 강조했고, 수 많은 팬들에게 까였다.

3 아재들의 변명

문단 이름이 어디서 본 거 같지만, 신경쓰지 말자

롯데 자이언츠에 묻혀서 그렇지, 삼성 라이온즈도 역사와 전통을 놓고 보면 상당히 오래된 구단일 뿐 아니라, 그만큼 팬심의 충성도도 높다. 다만, 과도한 팬심으로 인해 이런 좋지 않은 응원문화들이 생겼을 뿐.

그리고 성적이 너무 좋다 보니,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나 포스트시즌 진출은 당연시되는 경향이 심했다. 어어?? 남들은 우승을 하고도 남는 전력이니, 팀을 둘로 나눠도 우승후보라느니 하면서 삼성의 전력에 대해 높게 평가해 주는데 정작 KBO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 주지하다시피 전력의 우열은 차치하고 이기는 경우보다 지는 경우가 많았고[3], 평가받는 전력과 실제 따라오는 결과의 간극에서 오는 좌절감과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서 초조함이 팬들의 정서에 만연해 있는 탓이 컸다.

그래서 삼성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때 마다 선수들 뿐만아니라 팬들 사이에서도 "이번에는 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팽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에서의 또 한번의 실패가 현실로 다가오면 그동안 쌓았던 스트레스를 이런 식으로 풀었던 거다. 대구아재들이 유명세를 떨친 시기가 삼성의 한국시리즈 좌절의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에 유의하자.

4 세월이 지나고 슬슬 부활의 기지개를 펴다!

사실 대구아재들의 명성이 제일 높았던 때는 오히려 삼성이 화끈하게 공격야구를 추구하던 1980~90년대였다. 공격야구 때문도 때문이지만, 그보다도 더 큰 원인은 그 시기에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못해서.[4] 우승을 못 한 원인이 공격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투수력이었음을 굳이 든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공격야구든 수비야구든 팀이 못하면 팬은 강성이 된다. 삼성과는 반대로 투수력에 비해 공격력이 형편없었던 인천의 도원 전사들의 공격성이 대구아재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것만 봐도 팀이나 감독의 성향과 팬들의 공격성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일어난 버스방화사건이나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사건이 다 포스트시즌과 관련이 있음을 주목하자.

이후 김응용 - 선동열로 이어지는 해태 출신 감독들이 취임하며 지역색이 흐릿해지고, 특히 선동열 감독의 영향으로 투수 중심의 지키는 야구로 팀컬러가 변하게 됨에 따라 기존의 골수 팬들이 떨어져나가거나 젊은층 팬들과 가족 단위 팬들의 유입이 늘며 팬덤의 분위기가 다소 순해졌다. 또한 삼성이 한국시리즈 징크스를 털어내면서 포스트시즌만 되면 발동하는 우승 강박증이 해소되었다. 만약 김응룡, 선동열이 전임 감독들의 실패를 반복했더라면 대구아재의 과격성은 감독이 호남 출신이라는 점까지 더해져서 더 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거다. 역시 배가 고파야 투지도 생긴다. 우승이후엔 오히려 친김응용팬덤이 되었다.

하지만 2011년, 류중일 감독이 부임하면서 공격야구가 부활했다. 게다가 2012년 이승엽의 복귀와 20세기 시절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코치 복귀 등으로 예전에 화끈했던 아재들이 다시 야구장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은 듯.

2014년에 들어서 임창용이 계속 거하게 불을 지르자 자두를 투척하는 등 역시 대구아재다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게다가 김태한의 좌우놀이질 실패로 분노는 극에 달하는 중이다. 김태한 당장 짜르고 오치아이 에이지 다시 모셔오면 안되나? 아니면 카턱 형님이 1군 투코로 승격하는게…

예를 들어 이런거

2015년 한국시리즈의 졸전, 원정도박 사건 이후로 대구 삼성 라이온즈가 아니고 '수원 삼성 라이온즈'(?)라며 응원을 그만두자는 아재들도 나타났다. 근데 수원이라면 kt가 자리잡았을텐데? 삼성이 대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점, 제일기획의 라이온즈 인수 건도 포함해서다. 요지는 삼성 라이온즈에서 '삼성' 딱지를 떼자는 건데, 이는 딱 롯데의 그거다. 꼴성화 비밀번호의 시작이라고 한다

  1.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이 해에 이승엽은 당시 아시아 신기록인 왕정치의 55개 홈런 타이에 실패했으며 이후 2003년에 56개 달성으로 경신에 성공한다.
  2. 정확하게는 오승환/2011년 항목
  3. 실제로 삼성이 전력상 우위로 평가받았으면서도 패배한 포스트시즌만 해도 1984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 1988년 플레이오프, 1998년 플레이오프, 1999년 플레이오프, 2001년 한국시리즈, 2003년 준플레이오프 등이 있다. 열세라는 평가를 뒤집은 건 1990년 플레이오프나 2008 준플레이오프 정도.
  4. 2001년까지 삼성의 우승 기록은 딱 1번 뿐이었고, 그마저도 통합우승이라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적은 없었다. 20년간 우승 못하는 모 팀도 당시에는 삼성보다 우승횟수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