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전쟁

(대몽항쟁에서 넘어옴)
몽골군고려군

1 개요

麗蒙戰爭
한반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1]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친 몽골고려 침입으로 촉발된 전쟁으로 '대몽항쟁', '항몽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2 배경

칭기즈 칸의 주도 하에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하며 유목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다. 서역을 정리하자 몽골제국은 중원으로 눈을 돌렸고 1차 목표는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혔던 금나라였다. 몽골은 남송과 연합하여 금을 남북으로 공격하니 금은 망했어요. 이 때 거란 잔당의 일부는 금나라가 망해가는 틈을 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실패, 다시 몽골에 쫓기게 되어 1216년(고종 4), 갈 곳 없어진 거란의 잔당들은 상대적으로 만만한 고려를 침략하였다.

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고려에 들어왔다. 고려도 거란 잔당 소탕을 위해 군사를 동원, 몽골-동진 연합군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의 잔당들을 소탕하였다. 이것이 강동성 전투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으니….

몽골은 이를 계기로 크고 아름다운 은혜를 고려에 베푼 듯이 행동하였고, 해마다 고려에 과중한 공물을 요구, 몽골 사신들은 고려에 들어와 깽판을 부렸다. 이러니 고려에선 당연히 반몽정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흘러 1225년(고종 12)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구유(저고여, 箸告與)가 귀국하던 도중 국경에서 자객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에서는 고려의 소행이라 주장, 고려에선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2]하여 양국 간의 관계는 점차 험악해져 결국 국교단절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몽골은 고려에 대한 침략을 계획하였다.[3]

3 제1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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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1231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3월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치기위해 배후의 위협을 미리 차단을 하기를 원했고 이에 권황제 살리타이(撒禮塔)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고려를 침략하였다.[4]

몽골군은 음력 8월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철주 등을 단숨에 함락시키고 남하, 고려군은 이에 맞서 자주·동선역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안북성 전투에서 희대의 패착을 거두며 전황이 급속도로 불리해졌다. 귀주에서 혈전 속에 그 지역을 수비하던 박서, 김경손 등의 맹활약으로 1만명의 북로군을 귀주에 묶어두며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황에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몽골군이 수도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할 수 없이 살리타이가 보낸 권항사(勸降使)를 만나고 왕족인 회안군 왕정을 적진에 보내어(사실상 인질) 강화를 맺었고 제1차 침입은 종료된다.

4 제2차 침입

일시: 1232년 음력 8월 ~ 1232년 음력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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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리한 전황에서 고려는 잠시라도 피하고자 몽골과 강화를 했지만 이는 고려의 작전상 후퇴였고 당시 집권자인 무신정권최우는 앞으로 있을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 천도를 단행하였다.[5] 결국 1232년(고종 19) 음력 6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태세에 돌입하자 몽골은 살리타이를 다시 내세워 침입해 결국 서경홍복원[6]을 앞세워 개경을 함락시킨 후 남경(南京, 서울)을 공격, 한강을 넘어 계속 남하하였다. 초원에서 자란 유목민족의 특성상 해전에 약한 몽골[7]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고려의 반응은 . 이에 열받은 몽골군은 다시 남하하여 처인부곡을 공격하다가 김윤후라는 스님[8][9]에 의해 수장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바람에 퇴각하였다.

한편 몽골군이 철수하자 최우는 계획대로 때를 틈타 북계병마사 민희(閔曦)에게 가병 3천을 주어 앞서 배반한 천하의 개쌍놈 홍복원을 토벌하고, 홍복원의 가족을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이로 보아 결과적으로 적장을 죽이고 몽골군을 패퇴시킨 승리라 할 수 있으나 글쎄다….

이 2차 침입때 많은 문화재가 불타 사라졌고, 부인사에 소장되어있던 《고려대장경》 초조판(初彫板)이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좀 어이없는 사건도 하나 있었다. 충주성 전투에서 성을 수비하던 관리들이 도주하자 양민과 노비들이 남아서 성을 지켰는데, 문제는 몽골군이 철수한 후 돌아온 관리들이 성안의 재물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처벌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 때문에 일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조정과 정예군이 대부분 강화도로 들어가 버린 탓에 2차 침입 이후부터 고려군은 몽골군에게 야전을 걸지 못하고 수성전만을 펼치게 된다.

  • 전투
    • 광주성 전투(1232년 11월 중순 ~ 12월/지휘관 : 이세화)
    • 처인성 전투(1232년 12월 16일)

5 제3차 침입

일시: 1235년 윤달 7월 ~ 1239년 4월

몽골군에 의해 초토화된 고려강역

금나라가 1234년에 멸망하자, 몽골은 1235년(고종 22) 남송을 공격하는 길에 누이좋고 매부좋고 탕우타이(당올대)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공격케 하였다. 몽골은 여러차례 타격을 받으면서도 4년간에 걸쳐 고려 영토 전역을 유린했다. 경주(동경)에까지 당도해 그 유명한 황룡사를 불질러버리는 등 고려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웅거하여 저항하였고 부처의 힘을 빌어 난국을 타개하고자 '대장경'의 재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육지에선 몽골군의 만행이 극에 달하자 결국 1238년 겨울, 고려 조정에서 몽골에게 강화를 제의했고, 몽골은 고려 고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1239년 봄에 철수하였다.

철수 후 고려는 약조를 이행하지 않다가 몽골의 협박 독촉으로 왕의 신병을 이유로 입조가 불가능함을 알렸다. 그 대신 왕족인 신안공 왕전(新安公 王佺)을 왕의 아우라 속여서 칭하여 몽골에 보냈다. 그리고 2년 후인 1241년(고종 28)에 신안공 왕전의 사촌 형인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을 왕자로 가장시켜 또 한번의 사기를 쳐서 몽골에 볼모로 보냈다

고려의 정부군이 몽골군을 기습해 승리를 거둔 개주 전투도 이때 벌어졌다. 강화도에 조정이 틀어박힌 이후, 정부군이 직접 나서서 몽골군을 격퇴한 얼마 안되는 사례.

  • 전투
    • 제2차 자모산성 전투(1236년 7월 18일 ~ 1236년 8월 13일/지휘관 : 최경후, 김지저, 김명회)
    • 개주 전투(1236년 7월/지휘관 : 희경, 명준)
    • 정주 전투(1236년 7월/지휘관 : 광대)
    • 온주군 전투(1236년 9월/지휘관 : 현려)
    • 죽주 전투(1236년 9월/지휘관 : 송문주)
    • 고란사 전투(1236년 10월/지휘관 : 전공렬)
    • 효가동 전투(1236년 12월/지휘관 : 박인걸)

6 휴식기

7 제4차 침입

일시: 1247년 윤달 7월 ~ 1248년 3월

오고타이 칸(원 태종)의 대를 이어 구유크 칸(원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의 입조와 강화도에서의 출륙을 조건으로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구유크 칸이 곧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고려의 선철군 후입조를 받아들이고 철군하였다. 1249년 2월에야 구유크의 사망 소식이 고려에 전해졌고, 최우는 어차피 약속을 이행할 생각이 없었기에 뻣대다가 그 해 11월 사망하고 만다. 뒤를 이어 최항이 권력자가 된다.

8 제5차 침입

일시 : 1253년 7월 ~ 1254년 1월

후계 분쟁이 끝나고 몽케 칸(헌종)이 즉위하게 되자 1253년(고종 40년) 예케(한자: 야굴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9월부터 10월 초까지 동주(東州 : 철원)·춘주(春州 : 춘천)·양근(楊根 : 양주)·양주(襄州 : 양양)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충주성엔 21년전의 그 김윤후가 있었다. 충주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으며 한달 이상 시간을 끌었다. 이때 (11월)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10],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安慶公淐, 혹은 안경공 강)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 안경공 창은 1254년 8월에 귀국했다.

  • 전투
    • 충주성 전투(1253년 10월 중순 ~ 12월 말 /지휘관 : 김윤후)

9 제6차 침입

일시 : 1254년 7월 ~ 1254년 12월

그러나 몽케 칸(원 헌종)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치 않았고, 최항을 대동한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하면서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자랄타이(한자: 차라대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케 하였다.

몽케 칸은 안경공 창을 만나서 그가 고려 왕자가 아니라 친척임을 알았다.[11] 게다가 수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1254년 2월, 하동군의 갈도 약탈).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원의 앞잡이 이현(추밀원 부사)을 바다에 던져 죽여버리니 휴전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자랄타이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우회해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계속 남하하여 지리산까지 내려가 진주를 앞에 두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개경으로 돌이켰는데, 이때 이 짧은 5개월 사이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만 6천 8백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 전투
    • 2차 충주성 전투(1254년 9월 ~ 10월 /지휘관 : 김윤후어째 맨날 이분한테 털린다)
    • 상주산성 전투(1254년 10월 /홍지대사가 몽골군 장수를 활로 쏘아죽임 처인성 어게인)

10 제7차, 제8차, 제9차 침입

일시 : 1255년 9월 ~ 1259년 3월

몽골군의 장기주둔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다. 사실상 6차 침입 이후의 연속전쟁에 가까웠다. 경우에 따라 6차 침입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10.1 제7차 침입 - 몽골의 상륙작전

일시  : 1255년 9월 ~ 1256년 6월
이듬해 몽골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거 침입하여, 전라도 전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갑곶 대안(甲串對岸)에 집결하여 강도(강화도)에 돌입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마침 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金守剛)이 몽케 칸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몽골은 서경으로 일시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의 산발적인 습격은 끊이지 않았고, 전쟁은 계속 되었다.

  • 전투
    • 대원령 전투(1255년 10월)[12]
    • 조도 해전(1255년 10월) - 몽골이 본격적인 수군 운용을 시작한 전투. 그러나 지역 해적에게 (...) 패했다.
    • 아주 해전(1256년 3월 /지휘관 : 충주도 순문사 한취) - 고려의 첫 해전 패전. 한취와 고려 수군의 함선 9척이 전멸.
    • 3차 충주성 전투 → 대림산성 전투 → 덕주산성 전투(1256년 중순) - 위기에 몰린 고려 민간인들이 월악산까지 숨어들었고 결국 기상악화로 몽골군 별동대 후퇴
    • 온수현 전투(1256년 6월 /지휘관 : 이천) - 수군 200명의 상륙작전. 몽골군 수십명을 죽이고 주민들을 구출함.
    • 압해도 해전(1256년 6월) - 자랄타이의 군대를 압해도(현 신안군)의 주민(해적)들이 포차[13]를 실은 전함으로 철수시킴.유구한 전통의 화력덕후 하지만 이에 감탄한 최항이 청주 주민들을 도서로 옮기려고 했고, 잘 안되니까 강제로 청주를 불태워 버렸다.(...)팀킬
    • 애도 전투(1256년 10월) - 몽골군의 애도(현 고흥군) 상륙에 별초군이 도륙한 사건이다.

10.2 제8차 침입

일시 : 1257년 5월 ~ 1257년 10월

1257년(고종 44년)에는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정지하게 되자 몽골은 또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케 하였다. 그사이 최항이 죽고 최의가 집권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257년 5월이었다.

그간 정부는 재차 김수강을 철병 교섭의 사신으로 몽골에 파견해서, 몽케 칸을 알현케 하여 그 허락을 얻으니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했다. 1257년 10월에 몽골군은 선철군 후입조의 설득에 따라 철수하게 되었다.[14]

하지만 최의는 그런 것 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전횡을 부렸다가 결국 다음해 김준일파에게 살해당한다.

10.3 제9차 침입

일시 : 1258년 4월 ~ 1259년 3월

몽골은 일단 군대를 북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약속했던 고려 태자가 오지 않자, 김준이 정권을 잡은 지 한 달만에 몽골군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앞세워 제9차 침입을 개시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도 몽골군에 대한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여 항전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1259년 3월, 고려는 여러 차례 몽골군과의 전투 끝에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어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11 후일담

1260년 고려와 몽골은 강화를 맺었으나 조정 의견불일치로 출륙(개경 환도)만큼은 계속 지연되었다. 1259년 음력 6월 고종이 죽었고, 칸이 된 쿠빌라이를 만나고 온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원종(元宗)이 되었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거듭 표시하였으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자가 된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올 수 없었다.

심지어 김준을 살해하고 새 집권자가 된 임연은 1269년 6월 강화를 반대하여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창을 임시 즉위시키니 이것이 영종(후의 시호)이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몽골의 압력으로 11월 물러나고, 임연 역시 몽골의 재침공을 두려워하다 등창으로 죽는다. 임유무 역시 출륙을 반대하지만 몽골의 군사적 뒷받침을 받은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12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지 100년만에 무신정권은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강화를 맺은지 10년만에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고려 무신들은 환도에 극렬 반대하여 삼별초의 난으로 이어졌으나 , 1273년 제주도에서 여몽연합군에 의해 김통정이 살해되면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전쟁 1231년에 시작했다.

12 결과

전쟁고려의 강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상당한 인명손실과 전국토가 유린당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덕분에 현재 몽고침입 이전의 목조건물은 아예 없는 상태.[15] 임진왜란 시기에 백성들의 고초도 상당했었지만, 그건 고작 7년이었고 이건 무려 28년간이었다. 3차 침입 이후에는 고려 전역이 쑥대밭이 되는 통에 침략군인 몽골군조차 현지징발이 매우 힘들어지는 사태까지 놓이는 일이 흔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항복하러 간 훗날 원종이 되는 태자와 고려 사절에게 쿠빌라이 칸당태종도 못한 것을 자신이 해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당시 쿠빌라이는 강력한 제위 경쟁자이자 카라코룸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인 아리크부카의 도전에 맞서기에는 명분상 취약한 상태[16]였는데, 고려는 30여년간의 장기간에 걸친 저항으로 인해 꽤 알려진 지역이었으며, 동시에 만주지역에서 상당한 위상을 지닌 고구려의 계승국가였으므로, 고려가 자신에게 항복한 것은 자신이 대칸의 자격이 있다고 선전하기에 매우 충분하고도 합당한 명분이 되었다. 여기에 고려 공략에 동원되던 만주지역의 동방 3왕가로 대표되는 초원 이남지역 몽골 귀족들이 쿠빌라이에게 동조하면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대칸으로 즉위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 측면에서도 밀리지 않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공급되던 물자운송로를 끊어서 결국 아릭 부케를 항복시킬 수 있었다. 괜히 쿠빌라이와 이후의 대칸들이 고려에게 황실의 공주들을 시집보낸게 아니다.

그래서 고려는 몽골제국에 흡수되지 않고 형식상 속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17] 거기다 당시 만주에 웅거해 있던 카사르, 카치온, 테무게 옷치긴의 동방 3왕가(모두 칭기즈칸의 형제 후손들이다.)의 견제의 필요성 때문에 고려를 존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동방왕가가 반란(나얀의 난)을 일으키자 고려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국경까지 나아갔으며, 그 잔당들이 고려로 침범하여 고려가 2차로 전장이 된다. 동방왕가는 반란 이후로 세력이 꺾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할 정도로 강력했다. 원나라 판도 안의 '동방왕가'들은 고려가 복속한 후로도 황해도 서흥-평산에까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막강했다. 심지어는 원나라 조정을 뒤로제끼고 '공물'을 뜯어가기까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물론, 무신정권 시절 고려가 강성했기 때문에 몽골을 30년간 막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민중이 더 열심히 싸웠다. 다만, 몽골군이 편재되어있던 인종에 따라 병력의 질을 1군 2군 3군으로 나누고, 그중에서 고려를 침략한것은 3군급 병력이라는 소문이 퍼져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다.

애초에 몽골제국의 군대에서 순수 몽골인의 편재는 극히 소수였고, 대다수의 병력의 차출은 현지징발이었다. 고려를 침략했을 때 사용되었던 여진족만 하더라도 12세기 금나라의 동북아 최강의 중기병으로 편제되었는데, 초반 기병전력의 상실과 야전전투력의 상실로 더불어 하북 만주 요동의 지배력을 상실했고, 결국 금나라와 몽골의 20년의 전투동안 금나라는 내내 야전에서 몽골에게 밀릴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을 활용한 병력은 유럽의 전장에서도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이는 잉글랜드 첩보의 의해 그 기록이 남겨져있다. 한마디로 소속과 활동무대만 틀릴뿐이지, 1군 2군 3군이 아니라 그냥 죄다 몽골군으로 볼 수 있고, 고려 바로 위쪽에서 징발되었던 여진족들의 전투력도 매우 높았다. 해당내용은 몽골 제국/군사 항목에서 발췌.

13 관련 항목

  1. 단,한국전쟁의 휴전기간을 포함할 시에는 한국전쟁이 가장 오랜 전쟁이다.
  2. 저구유 살해 사건 내막에 나라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 물론 저구유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몽골이라면 치를 떨던 고려의 민중들은 좋아했다. 하지만 정부에선….
  4. 참고로 이때 몽고의 주력군 10만은 금나라를 향해 진출하고 있었다.
  5. 이 때 최우는 천도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을 죽여버렸다. 대표적으로 김세충이다. 야별초(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은 대표적인 천도 반대파였는데 성을 지킬 수 있다면서도 성을 지킬 계책에 대해 말하지 못해 최우에게 처형된다.
  6. '고려의 배반자'로 성문을 열어 몽골군에 협조한 천하의 개쌍놈이다. 그의 아들 홍다구도 몽골에서 출세하여 고려로 파견와서 김방경을 고문하고 내정에 간섭하는 등 부원배짓을 일삼았다. 부자가 쌍으로 개쌍놈들.
  7. 내륙 중의 내륙이자 장난이 아닌 추위를 자랑하는 몽골은 전통적으로 물에 대한 금기가 대단했다. 빨래 안 하는 것은 기본이고(워낙 기후가 건조해서 몸의 분비물이 적다고 한다), 고인 물에 오줌을 누면 사형.(...) 현대인 다 죽겠다 이놈들아?! 1999년 발간된 '신현덕의 몽골풍속기' 참조.
  8. 이설(異說)이 있다.
  9. 이후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되었고 김윤후는 장수가 되었다.
  10. 이때 강화 성벽을 헐라는 몽골의 요구에 송나라 해적들이 강화도를 털어요ㅜㅜ 라며 나중에 하겠다며 박박 우겼다. 점령지에 달로화적(다루가치)을 두고 1만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도 반대했다(...)
  11. 물론 안경공 창은 자기가 친자가 아닌 줄은 몰랐다고이 무슨 막장 드라마 출생의 비밀 박박 우겼으며, 그와 함께 온 참지정사 최린도 왕의 사랑하는 자식(애자)인건 친자라는 이야기 아니냐고 콤비로 우겼다(...)
  12. 충주성을 지나쳐 근처의 대원령(계립령, 하늘재)를 지나다가 다인철소 천민들의 습격으로 후퇴했다. 이로 인해 다인철소의 천민들은 모두 익안현으로 승격해 일반 백성이 되었다.
  13. 여기서 말하는 포차는 투석기다.
  14. 고종이 연로하여 목표는 고려 태자의 입조로 낮춰졌다.
  15. 물론 몽골군이 다 태운건 아니고 이후에 소실된 건축물들도 꽤 있다. 하지만 황룡사등 지금 볼 수 없는 건축물의 상당수를 몽골군이 태운것은 사실이다.
  16. 몽케의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몽케조차 혼낼 정도로 그동안 보여준 유목민의 전통에서 동떨어진 행태로 인해 워낙 명분에서 밀려서 몽골 귀족들의 지지가 없다보니 자파만으로는 대칸 선출회의인 쿠릴타이조차 열 형편이 아니었다.
  17. 하지만 어쨌거나 속국인지라 세계사적인 입장에선 볼 땐 고려를 몽고의 속국이자 영토로 보는 시각이 주류이다. 여몽관계 참조.
  18. 1168~1232. 이규보와 쌍벽을 이룬 문인이자 과거 급제 동기지만 세자 시절부터 고종의 스승이었던 근왕파였다. 이를 바탕으로 재상(첨지정사 參知政事)에 올랐다. 최우의 강화 천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나 석연찮게 2개월 이후 사망한다. 반면 천도에 적극 찬성한 이규보는 그의 뒤를 이어 재상직에 오른다.
  19. 東眞으로 13세기에 있던 국가였다
  20. 정확히는 잔당
  21. 여몽전쟁의 단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