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군/역사(해방 이전까지)

1 고대(고조선~삼국시대)

고조선시대 의 군에 대한 기록은 자세히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유물을 통해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비파형 동검과 세형 동검과 같은 청동검과 돌, 또는 짐승뼈로 만든 화살촉을 사용했다는 정도이며, 위만조선이 세워지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철기 문명을 받아들여 철제 무장을 사용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군사문화에 대해 기록이 등장하는데, 삼국 모두 (가야 포함) 중기병을 중시해 농경민족치고는 꽤 많은 수의 기병을 운용하였다. 그중에서 개마무사라 불리우는 중기병이 유명했으며, 활로 무장한 경기병도 많이 사용했다. 고분벽화에 따르면 고구려는 이중 만곡궁을 사용했으며 오나라 손권에게 각궁을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무렵부터 짐승의 뿔을 사용한 합성궁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갑옷의 경우 판갑과 찰갑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판갑은 남방계 왕조들 (가야, 신라) 에서 피지배층이 보병용으로 사용하고 찰갑은 북방계 왕조들(고구려)에서 지배층이 기병용으로 사용한다. 판갑과 찰갑은 주로 철제로 만들어졌으나 찰갑의 경우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찰갑 유물처럼 뼈로 만들기도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방어거점으로 사용하고자 목책, 산성, 보루를 경쟁적으로 건설했다. 따라서 삼국시대 전투양상은 야전보다는 공성전이 주를 이루었고 성을 함락시키고자 운제나 포차 같은 공성병기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이 때 만들어진 산성들은 삼국시대 이후에도 중요한 방어거점으로 사용되며 많이 보강, 활용되었다.

신라는 피지배계층을 포섭하기 위해 서당제를 도입해 군사적 통합을 시도하였다. 장창당은 나당전쟁 당시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저지하는데 큰 활약을 했으며, 구진천이 개발했다는 신라의 목제 쇠뇌는 1000보를 날아가 당나라 황제 고종이 노사를 보낼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쇠뇌는 고려시대까지 여러가지 형태로 제작되어 사용했다.

신라 수군은 당대에 상당한 전력과 경쟁력을 갖고 있어서 시득기벌포 전투에서 당 수군을 23번 싸워 격퇴했고, 장보고는 일본 승려가 당나라에 가기 위해 장보고에게 보호를 요청할 정도로 남해-동중국해의 주도권을 잡았다.

2 중세(고려)

고려시대부터 구체적인 군사 조직 기록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구체적인 군사조직은 통일신라의 9서당 10정으로 687년 (신문왕 7년) 에 완성되었다. 고려 중앙군은 2군 6위로, 지방군은 주현군, 주진군으로 구성하였으며, 때때로 특별한 목적으로 조직한 여러 특수군이 존재하였다. 정종 때 거란 방어를 위해 설치한 광군이나, 숙종 때 여진 정벌을 위해 설치한 별무반, 대몽 항쟁시기에 설치한 삼별초, 농민과 노비로 구성한 연호군이 그 예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중기병 + 활로 무장한 보병이 주력으로 운영되었다.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거란과 적대적인 관계였던 고려는 거란을 막고자 천리장성을 쌓고 과 연결하여 거란을 압박했다. 송과 대립하던 거란은 배후를 없애고자 고려를 3차례나 침입하지만 고려를 굴복시키는데 실패했다. (자세한 내용은 여요전쟁 참고). 이는 고려가 1차 침입 이후 서희의 뛰어난 외교실력으로 얻은 강동 6주에 요새를 구축하고, 칼날을 박어 넣은 방패를 설치한 수레인 검차를 이용한 대기병전술을 사용해 거란군이 전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결국 3차 침입때 귀주 대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거란은 사실상 고려 정벌을 포기했다.

숙종 집권시에 여진족이 발흥하여 동북면을 어지럽히자 윤관주도하에 기병을 주력으로 한 별무반을 편성하고 동북면으로 진격해 여진족을 격퇴하고 동북 9성을 구축했다. 그러나 동북 9성은 고려가 예상치 못한 우회경로를 통해 여진족이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결국 포기하게 된다.

13세기에 역사상 세계 최대의 영토를 가진 제국으로 성장하는 몽골 제국이 7차례나 고려를 침공하면서(여몽전쟁) 고려는 큰 피해를 겪게 된다. 고려군은 귀주성 전투, 처인성 전투, 충주성 전투 등에서 몽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막장같은 무신정권강화도에 처박혀 나몰라라하고 본토에 지원을 전혀 안해서 고려군은 큰 피해를 겪었다. 일부 삼별초 병력이 보다못해 스스로 지원을 나가긴 했으나 병력이 너무 적어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다행히 몽골군은 해전에 약해 수뇌부가 있는 강화도를 쉽사리 공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려는 40년동안 몽골군의 침입에도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이는 고려가 몽골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1274년과 1281년에 고려는 원세조의 명령으로 일본침공을 위한 군량과 함선을 제공하고 참가한다.(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이때 원나라의 함선은 폭풍을 맞아 거의 대부분이 침몰했으나 고려군 함선은 피해를 거의 보지 않아 병력을 대부분 보존한 채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고려국방체계는 무너져 버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전혀 손을 쓰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다행히 공민왕집권 이후 최영이성계같은 신흥 무장세력들의 활약으로 고려군은 재정비되어 홍산대첩과 황산대첩을 통해 왜구를 격퇴했다. 이들 신흥 무장세력들은 고려로 침입한 홍건적을 물리치고, 압록강을 건너 요양까지 요격하는 등 큰 활약을 펼쳤다.

이 무렵부터 최무선이 화약 제조법을 익혀 화포를 비롯한 각종 화기류가 제조되기 시작했으며, 제조된 화기류는 진포해전에서 사용되어 500여척의 왜구 선단을 격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진포해전은 최초로 전함에 화포를 설치한 해전으로 평가된다.

3 근세(조선)

보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군 참조.
조선군은 5위도총부로 구성된 중앙군과 진관제에 따라 병영을 중심으로 배치된 지방군과 수영에 배치된 수군으로 구성되었다. 건국 초기에는 정도전의 주도하에 요동정벌이 계획될 정도로 명과의 관계가 안 좋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이 피살된 이후 태종때부터 명 과의 관계가 개선되어 조공이 이루어졌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화약 무기 개발에 주력했는데 그 결과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등 다양한 총통류와 화차같은 우수한 화약 무기가 발명되었다. 세종때에는 왜구를 근절하고자 이종무의 지휘아래 병선 227척과 17285명의 병력을 동원해 대마도 정벌을 감행해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3차례에 걸친 대마도 정벌 중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웠다. 또한 북방 여진족을 물리치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한반도 전체가 우리 역사에 완전히 편입된다.

이후 여진족과 왜구를 상대로 한 소규모 교전을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평화가 지속되면서 방납이나 대립 같은 군역 폐단이 속출하게 된다. 1555년 을묘왜란을 계기로 진관체제에서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에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는 제승방략제가 시행되고 판옥선, 승자총통같은 무기가 개발된다. 그러나 제승방략제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 한계와 비효울성을 보여주어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진관법으로 돌아가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개전 초기 조선군은 오랜 평화분위기(200년간 전면전 위협자체가 없었다) 속에 함경도 병력같은 일부 병력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전투력과 사기가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반면 상대인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밀한 준비와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쌓은 풍부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그 결과 선조를 비롯한 조정이 의주까지 피난하고 8도 전체가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활약과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승병들, 재정비한 관군의 반격으로 결국 일본군을 몰아냈다.

당시 조선군이 패배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러하다. 당시 일본은 전면전이라는 개념으로 나왔지만 조선군은 200년간의 전면전 위협상황이 없는 시대를 보내다보니 전면전 대비가 아니라 국지전 대비로 인식했었기 때문이었다. 제승방략제와 같은 전략은 바로 그것을 볼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다보니 당시 상륙했던 일본군은 국지전으로 격퇴하여 끝낼거라는 전략마인드가 조선군이 지상전에서 연전연패를 하는 대목이 된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군은 조총, 편곤 등 신무기와 대보병전술인 절강병법을 도입한다. 그러나 정묘호란, 병자호란에서 당시 조선군 지휘부의 병크와 삽질, 기병을 통해 빠른 기동전을 감행한 청군에 휘말려 치욕적인 수모를 겪는다. 이를 보완하고자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다수의 보병+편곤과 활로 무장한 기병+화포수+일부 살수 위주로 가게 된다. 또한 중앙군은 5위영으로, 지방군은 속오군으로 개편된다.

이후 정조때까지 진법과 무기 개발 및 개선, 병서 간행이 꾸준히 지속되나 세도정치를 거치면서 조선의 국방 체계는 말 그대로 아작나 버리게 된다. 이때 아작난 국방 체계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삼군부 부활로 약간이나마 복구되나 그마저도 고종 친정 이후에는 사실상 무효화돼버린다.

4 개항 이후

개항 이후 양반 자제를 모집해 신식 무기로 무장한 별기군을 창설하지만 양반 자제들이 훈련을 거부하는 등 문제를 보이다가 임오군란 크리로 페지된다. 이후 장위영, 통위영, 총어영이 창설되고 신무기로 무장시키나 무분별하게 신무기를 도입해 보급과 훈련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동학농민운동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신무기로 무장하고 근대적인 편제를 갖춘 친위대, 진위대를 설치하여 군제 개편을 시도한다. 그러나 모병제로 운용된데다 재정이 부족해 큰 규모를 갖추지 못하고 도리어 일제의 외압으로 1905년에 자국민인 을미의병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는 추태를 보이게 된다. 결국 일제의 압력으로 1907년 군대 해산이라는 수치를 겪게 된다. 이때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들과 손을 잡고 고종 강제폐위에 항거하여 정미의병(13도 창의군)을 일으키나 서울진공작전 실패[1]와 숭례문 전투에서의 패배로 사실상 그 힘을 잃게 된다.

4.1 대한제국 시절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군 참조.
기본적으로 대한제국군은 서울의 시위대, 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황제 경호와 치안유지, 의병 탄압 등의 왕권 수호를 위한 군대로 국방과는 거리가 있는 군대이다. 그리고 군관은 신분제를 철폐했음에도 양반출신만이 될 수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한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조선인의 재산을 보호하기위해 적잖은 무력시위(?)를 했다. 그러나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 정부에서 간도관리사 직책에서 해임되자 이에 불거하여 계속 간도에 남아 행정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또한 남은 정부군과 의용대를 조직하여 러시아군과 연합해서 일본과 교전을 한일이 있었다.

대한제국 시절 청나라와는 간도 문제로 대립을 할 때 함경도의 진위대와 청나라 군대가 소규모의 충돌을 했던 적은 있다. 그리고 의화단 사건 때 의화비라고 하는 도적떼들이 국경넘어 약탈하러 왔지만 제대로 막지는 못했던 듯 하다. 1900년 러시아군이 의화단 사건 때문에 만주를 점령하러 훈춘을 지날 때 한국인 2000명을 학살했지만 대한제국 군대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조선 말 세도정치 시기부터 이 때까지가 한반도 국방력의 최고 흑역사 시기로, 이 시기에 일어난 운요호 사건이나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병인양요등을 전쟁사 측면에서 보면 한 나라의 정규군이 타국의 극소수 부대에게 어린애 팔 꺾듯 아무 힘도 못 쓰고 일방적으로 패배한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사들이다. 발전하는 기술력과 전략 및 전술에 발맞추지 못한 군대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적나라하고 비참하게 보여 주는 사례로, 패퇴의 기록이긴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거울삼을 가치가 있다.

5 일제강점기

일제강점 이후 남한대토벌 작전등으로 국내에서 반일투쟁을 할 수 없게 되자 무장투쟁주의자들이 만주연해주로 대거 이동, 독립군을 결성하여 활동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광복군이 활약하기도 했다. 주로 국부군의 문화를 받아들인게 많다.

조선인 일본군들이 일본군에 있기도 했다. 2차대전때 조선인들에 대한 지원병 혹은 징병등을 목적으로 대거 징집과 입대를 일본군이 받아들임으로서 일본군 출신들이 급격하게 늘었고 학병들이 가장 많은 분포를 차지하게 되었다.

6 독립 이후

대한민국 국군/역사 참고.
  1. 이에 대한 흔적으로, 흥인지문 부근에 13도 창의군의 지휘관 왕산 허위의 이름을 딴 왕산로가 있다. 13도 창의군이 일본군과 대치했던 최종 지점이 현 왕산로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