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조선의 5대 궁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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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壽宮 / Deoksugung

1 개요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정동 5-1) 서울특별시청 건너편에 있는 조선 시대에 지어진 궁궐. 대한제국의 정궁이기도 하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많은 수난을 당했으며, 현재의 면적은 과거의 1/3 수준이다. 이러한 격동의 세월 때문인지는 몰라도 2층 한옥인 석어당이나 서구식 석조건물인 석조전, 동양의 양식을 흉내낸 서구식 건물인 정관헌 등 서로 다른 특이한 양식의 건물이 많이 모여 있다. 게다가 덕수궁 주변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 성당, 영국과 미국 등 각 나라의 대사관, 덕수초등학교 등도 자리한다.[1]

2 역사와 복원

2.1 창건

원래는 월산대군[2]의 저택이였으나[3]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환도한 선조가 도성내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버려 거처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저택를 개보수해 임시 궁궐[4]으로 썼다.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는 공간이 부족하여 주변 민가 등도 임시로 징발하여 궁궐로 연결하여 썼다.

지금 덕수궁에 남아 있는 오래된 전각들을 보면 알겠지만, 대한제국 시절에 지어진 중화전 일대와 석조전을 제외한 원래 건물들은 궁궐이라기 보다 권세 있는 양반집의 모습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줄곧 정릉행궁에서 거처하다가 중건 중인 창덕궁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승하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중건된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정릉행궁에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내려 궁궐로 승격시킨다. #

그러나 애초에 궁궐 목적으로 지어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창덕궁이 재건되자 별궁 정도로 잊혀져갔으며 인목왕후가 이곳으로 유폐되었다. 이후 인조반정 때 창덕궁이 불타버리자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다시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아관파천이 일어날 때까지 역사에서 잊혀진 궁전이 되었다.

2003~04년 동안 방영했던 SBS 사극 왕의 여자는 이 정동 행궁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궁궐 세트가 아니라 대감집 느낌 나는 세트에서 선조 후반 및 광해군 초반의 시기가 다뤄졌다. 심지어 동궁(태자궁)은 초가집이었다.[5] 배우개그의 건물 버전으로 용인 한국민속촌의 중부지방 양반가22호는 왕과 비에서 수양대군의 사저이자 후에 월산대군이 물려받는 집으로 등장하였다가 왕의 여자에서 경운궁으로 출연하였다(...)

2.2 대한제국의 정궁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고종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경운궁에 거처하게 되면서 구한 말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하게 된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비좁은 별궁인 덕수궁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러시아 공사관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6] 참고로 러시아 공사관과의 거리는 10m 채 되지 않았으며 만약 육로로 못 갈 경우 안전하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과 연결된 지하벙커(지하도)까지 건설했다.

고종은 석조전과 돈덕전, 정관헌 등 서양식 전각과 전통적인 동양식 전각들을 세워 경운궁을 중수하였고 이후 대한제국 멸망까지 중요한 사건은 경운궁에서 일어나게 되며 고종은 죽을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다. 원래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전이었는데, 고종이 1902년에 즉조전 앞에 창덕궁의 인정전을 본따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의 중화전을 새로 지었다. 또한 새롭게 대한제국이 출범하는 시기였던 만큼 기존의 경복궁 중심으로 짜여진 도성을 덕수궁의 대한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상의 새로운 황도로 개편하려는 도시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지금의 세종로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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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층이었던 원래의 중화전. 세계로 가는 문화문 옆의 행각도 보인다. 중층 중화전이 존재했던 1902년부터 1904년 사이에 찍혔을 사진이다.

1904년에는 덕수궁 화재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나 전각 일부가 불에 타 없어졌는데 중화전 등 주요 목조건물들이 대거 소실되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고종을 시해하기 위해 일제가 일부러 방화를 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일본군들이 궁궐에 불이 나서 우왕좌왕하는 한국인들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사진이 있어서, 가해자들이 즐거워 한다며 대한제국에서는 이를 갈았다 한다. 이와 더불어 공교롭게도 그 해에 러일전쟁이 발발, 1년 후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체결되는 등 나라의 불길한 징조라는 주장도 있었다. 1905년에 덕수궁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2년 후에는 고종황제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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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덕수궁의 화재로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까지 홀라당 다 타버렸고, 1906년에 다시 지은 중화전은 재정 문제로 단층으로 낮아졌다. 중화문도 중층이었다가 낮아졌으며, 위에 있는 사진에 남아있는 문은 동아시아 제후국 궁궐관제인 3문 3조에 맞춰져 지어져 있던 조원문으로 대한문 바로 뒤에있는 금천교 다음의 문으로 중화전 회랑의 바로 바깥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2.3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덕수궁의 건물들을 철거하기 시작했으며, 중화문과 중화전을 빙 둘러 있던 2칸폭의 행각 역시 철거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복원되지 않았다. 30년대 일제가 당시 경성에 기존의 공원으로도 수용할 인원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덕수궁을 공원화할 때 석조전의 앞마당에 프랑스식 정원을 만들때 방해가 된 것이 중화전의 서쪽 행랑채였다.

해방 이후에는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덕수궁이 미군의 포격으로 없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인천 상륙작전이후 북한군을 밀어붙여 서울로 진격하던 미군은 남산과 덕수궁 일대를 사정거리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북한군이 덕수궁으로 숨어드는 바람에 미군은 덕수궁을 포격해야할 상황이 된것. 그러나 당시 미군 포병장교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한국의 문화유산인 덕수궁을 파괴하는것은 양심에 걸린다"라고 고민하던 끝에 북한군이 덕수궁에서 빠져나가 을지로로 향할 때 포격을 개시했다. 만약 딜 중위가 인정사정 보지 않고 포격을 했으면 덕수궁은 그대로 잿더미가 돼버렸을 상황(...) 이에 감사의 뜻으로 한국 정부는 1996년 해밀턴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였다.

이후 1960년대 초반 돌담이 헐리고 창살담으로 개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마치 낙동강 오리알처럼 고립되어 버렸고, 결국 이 문을 서쪽으로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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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의 고립된 대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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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의 덕수궁 권역

붉은색이 1911년의 덕수궁 권역이다.
파란색은 미국 대사관, 지금은 미국 대사관저인 하비브 하우스
녹색은 영국 대사관의 영역이다. 현재는 영국의 국교였던 성공회의 성당이 세워져 있다.
노란색이 현재 덕수궁 영역. 대한문은 원래 지도의 붉은색에서 동하단의 끝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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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의 덕수궁 추정 배치도

덕수궁도 이런 저런 일로 상당히 많이 훼손되었으며, 그 권역 또한 무지막지하게 줄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경희궁의 권역과 덕수궁은 홍교라는 돌다리로 연결될 정도로 가까웠지만, 지금은 너무나 멀게 느껴져서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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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두 궁궐을 연결하던 홍교다. 서대문에서 신문로 쪽으로 찍은 1902년 사진.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왼쪽에 경희궁, 오른쪽에 덕수궁(경운궁)이 있다.

2.4 복원

1980년대 돌담을 복원하였다. 1988년에 경희궁지를 발굴하는 것을 시작으로 90년대에 창덕궁경복궁, 창경궁의 전각들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부터 덕수궁 또한 예전의 모습을 찾기 위한 복원공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현재 규장각 및 선원전 권역 복원, 인정전 내.외 행각복원 등은 완료 하였으나 다른 구간들은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창덕궁, 서울시와 문화재청간의 예산문제와 전각들이 있던 터에 구세군 빌딩이나 서울시 역사 박물관등이 세워져 복원에 문제가 많은 경희궁, 동물원, 식물원 등으로 마개조되어 유구들이 파해친 상태라 역시 복원이 불가능해 보이는 창경궁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복원사업이 진행된 경복궁과 함께 현재까지 복원중이며 그나마 궁궐의 규모가 작은 편이라 2016~2017년 사이에 있을 3단계에 중화전 행각 복원, 조원문 복원, 금천교 복원, 광명문 이건 등이 있고 언제 있지 모르는 4단계 복원에는 미국 대사관 관저가 용산으로 이전하는 대로 선원전 복원 및 덕수궁의 양관(洋館) 중 하나이자 석조전과 함께 평면도가 남아 있는 돈덕전(敦德殿)이 복원될 예정이다.

현재까지 문화재청이 세운 덕수궁 복원 사업은 4단계까지 세운 상태로 1단계인 2010년~2013년에 석조전 내부 복원, 덕홍전 주변 행각지 발굴 및 복원, 준명당 및 즉조당 보수공사 등이 진행되고 있으며 석조전의 경우 내년인 2014년 10월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다만 현재 덕수궁 또한 경희궁처럼 궁역의 대부분이 민간에 매입된 상태이며 4단계 복원 사업 중 하나이자 양관 건물인 돈덕전의 경우 미국 대사관 관저 동쪽 담장과 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돈덕전과 선원전 일원의 복원에 많은 차질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미국 대사관 관저가 이전하는 대로 담장을 세우는 등 덕수궁의 궁역을 복원할 예정이지만, 이미 중명전을 중심으로 한 옛 수옥헌 위에 세워진 예원학교와 선원전 권역 서편에 세워진 구세군 교회, 수학원이 있던 홍원 일원을 점유한 영국 대사관과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대성당과 합의를 봐야하는 실정이다.

특히 정동 1-23에 위치한 구세군중앙회관은 덕수궁의 옛 궁역 내 건축된 건물이나, 1926년 완공된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가진 지정문화재이다. 만일 덕수궁 전역을 복원한다면 이 건물은 창경궁 대온실처럼 남겨 궁내 존치시킬 가능성이 높다. 과거 덕수궁 배치도와 현재를 비교하면 구세군회관 자리에도 덕수궁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문화재를 복원하겠다고 기존의 문화재를 파괴하는 비상식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궐내각사 터가 위치한 동쪽 궁역은 이미 태평로와 서울광장으로 뒤덮힌 상태로 교통 혼잡 등의 이유로 복원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2014년 수립된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로가 축소될 계획이라 아직은 미지수. 게다가 완전 복원의 길은 멀고도 험할 뿐더러 그야말로 산 너머 산지뢰가 잔뜩 깔려져 있다. 바로 석조전과 중화전, 준명당의 서쪽 행랑채, 담장 측면의 배치가 처음부터 어긋났다는 것이다.[8] 아무리 덕수궁이 동서양의 건축들이 한데 어울려져 있다는 평을 받지만 전각 배치가 어긋난 것 자체가 부조화스럽게 보이게 하고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 중화전이 즉조당 등의 위치에 맞게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그 까닭은 고종황제가 경운궁으로 이전할 때 중화전은 아직 세워지기 전이기 때문이다. 본디 석조전이 먼저 세워질 계획이었으나 전통 방식의 건축과 달리 기초 공사가 1년이 지나도록 계속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법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고종의 지시에 의해 결국 중화전이 석조전보다 빨리(!) 세워지게 된다. 그야말로 정신이 나갈 정도의 돈지랄이다! 결국 중화전 서쪽 행랑채를 완전히 복원하려면 석조전의 정원을 밀어버리는 것 외엔 달리 대안이 없다.

그 외에도 복원해야 할 전각이나 양관들이 많지만, 양관들의 경우 현재까지 최소한 평면도만 온전하게 남아 있는 돈덕전과 제위치를 고수 중인 정관헌, 석조전, 중면전과 달리 현재 존재하지 않은 양관인 구성헌이나 환벽정 등은 그 평면도 등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복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경복궁 내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은 복원 자료가 없어 터만 남겨두었다.

참고로 2012년 5월 7일부터 5월 10일에 걸쳐 덕수궁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 세종대왕상이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되는 등 복원 사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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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 복원이 진행될 경우 덕수궁의 모습 (출처 :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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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30일, 2039년까지 25년에 걸쳐 선원전 영역을 복원하겠다고 문화재청이 발표했다.

2015년 8월 20일에는 서울특별시에서 궁역 인근에 위치한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 별관(구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을 철거해 그 자리를 시민광장으로 개장하였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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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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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기 이전의 변형된 상태.

원형이 유지되었다면 그 자체도 역사 유적의 하나라 보존될 가능성이 컸지만, 사진과 같이 사실상 다른 건물이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철거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일제 잔재라며 홍보적으로 악용하고, 철거한 자리에서 유적이 발굴되었음에도# 가건물을 짓거나# 박물관을 짓는 등# 다른 현대적 건축물을 지어 홍보 목적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자 철거가 올바른 방향이었냐#는 논란이 일었다.

3 명칭 논란

3.1 경운궁/덕수궁

덕수궁은 본래 퇴위한 황제나 왕이 머무는 궁궐을 일컫는 말이다. 남송의 고종효종에게 양위한 후 머문 궁을 덕수궁이라고 하였다. 조선에서도 태조 이성계가 퇴위한 후 머문 궁의 이름이 덕수궁이었는데, 이 때는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하여 덕수궁 역시 거기에 있었으나, 태종 즉위 후 다시 한양으로 천도한 후 이 곳에서의 이성계의 거처도 덕수궁으로 불렸다.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개칭된 것도 고종이 퇴위한 후 지낸 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덕수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단, 다시 경운궁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에는 일제 잔재이기 때문에 덕수궁이라 불러선 안 된다는 주장이 있으며, 반대로 덕수궁의 의미는 위에 써놨듯이 처럼 퇴위한 왕/황제의 거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제 잔재라고는 할 수 없으며, 덕수궁이란 이름이 가진 역사도 무시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

문화재청에서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명칭 변경을 찬성하는 댓글은 일제 잔재라는 의견이 많았다. # 하지만 덕수궁이란 말은 일제 침략 이전부터 사용되었다는 건 여러 기록으로 확인되므로, 고종의 퇴위가 일제 침략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덕수궁/경운궁 문제도 일제 잔재의 문제로 봐야할지는 논쟁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

3.2 대안문/대한문

지금 현재 덕수궁의 정문은 동문인 대한문(大漢門), 이전엔 대안문(大安門)이었다.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이었다. 그런데 1900년 대안문 앞으로 대로가 생기고 당시 정문인 인화문 통행이 줄어들자 1904년의 덕수궁 화재 후인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정문으로 삼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꿨다.

원래는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했지만 지금의 위치로 옮겨서 덕수궁 담장과 이었다. 옮기는 방식이 흠좀무한데 해체해서 다시 지은 것이 아니라 문 전체를 조금씩 들어 옮겼다고(...)

이 대한문의 뜻에 대해 여러 오해가 있다. 일제가 퇴위한 고종을 조롱하여 '큰 놈(漢)이 사는 곳의 문'이라 그렇게 지었다든가, 일제가 조선을 중국의 속국이란 뜻으로 '위대한 중국(漢)의 문'이라고 지었다든가...하는 식. 또 다른 속설로는 매국노 배정자 연관설이 있다. 대안문(大安門)의 安자가 家 머리 아래에 女가 있어 궐문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배정자를 연상케 해서 배정자를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 女가 겁내는 漢자로 바꾸었다는 속설이 당시에 널리 퍼졌을 정도.

그런데 이런 해석은 아무 근거 없는 속설이다. 서울의 옛 이름인 한성도 중국의 성이란 뜻이 아니라 한수, 즉 큰 강의 북쪽에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한(漢)은 음차. 한국의 한(韓)과 같은 쓰임새다. 여튼 이런저런 논란이 있으나 논란 자체가 필요없는 상황이다. 왜냐면 대한문 상량문에 대한문인 이유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乃立大漢正門, 備皐門應門之規. 塗勤丹 , 取霄漢雲漢之義, 德合蒼

<이에 대한(大漢)이란 정문을 세우니 고문(皐門 : 왕궁 바깥문)과 응문(應門 : 왕궁의 정문)의 규모를 다 갖추었도다. 단청을 정성스레 칠하고 소한(霄漢, 동쪽 하늘)과 운한(雲漢, 은하수)의 뜻을 취하였으니 덕이 하늘에 합치하도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큰 하늘의 문'이란 뜻이다. 일종의 글로벌 한양으로 이해하면 편할듯? 대한제국이 앞으로 번창하길 바라며 지은 이름인데.. 그러나 현실은 모두 아는 바와 같이...

4 주요 건축

4.1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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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과거 덕수궁의 정문은 중화문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전소되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으로 개칭해 정문으로 삼았다. 원래는 태평로 한가운데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말미암아 1970년 8월 21일 이건공사를 시작해 1971년 1월 2일 마무리되어 원위치보다 22m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시청앞 광장과 마주보고 있으며, 그 건너편에는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이 있다.

4.2 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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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中和門)
중화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902년(광무 6) 창건되었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원래는 중화전 주변을 두르는 행각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이 사라지고 중화문 오른쪽에 일부가 잔존하고 있다. 1985년 1월 8일 중화전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중화전(中和殿)
덕수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1902년(광무 6) 창건 당시에는 2층 전각이었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단층으로 중건했다. 대한제국 때 영건했기 때문에 중화전 답도에는 제후국을 상징하는 봉황이 아니라 황제국을 상징하는 2마리가 새겨져 있다. 1985년 1월 8일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4.3 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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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浚眀堂)
고종이 함녕전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에 한동안 머물며 외국 사절을 접견하던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이다.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즉조당과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다. 고종은 늘그막에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를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기도 했다. 딸바보 편액으로 걸린 '명'이 '밝을 명(明)'이 아니라 '밝게 볼 명(眀)'인 점이 특이한데, 이는 중명전(重眀殿)도 동일하다.
즉조당(卽祚堂)
정면 7칸, 측면 4칸의 침전 건물로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 선조가 한성으로 환어한 이래 이곳을 시어소로 사용했으며, 1623년(인조 즉위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장소였다. 아관파천 이후 1897년(광무 원년) 환궁한 고종1902년(광무 6) 중화전 창건 전까지 경운궁의 정전으로 삼았으며,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1907년(융희 원년)부터는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가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1년 7월 20일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석어당(昔御堂)
누각을 제외한 궁궐 내의 전각 중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전각으로,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며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원래의 석어당은 1593년(선조 26)에 지어졌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승하하고, 1618년(광해군 10) 인목왕후가 폐위되어 유폐되었던 장소였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덕홍전(德弘殿)
1911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덕수궁 내의 전각 중 가장 나중에 영건되었다.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서쪽에 있으며, 고종이 내외 귀빈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함녕전(咸寧殿)
정면 9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고종의 침전이었다. 1897년(건양 2)에 지어졌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온돌 교체공사 도중 발생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의 주요 전각이 모두 전소되었다가 곧바로 중건 공사에 착수해 1906년(광무 10) 복구했다. 고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된 후에도 줄곧 이곳에서 거처했으며, 1919년 1월 21일 승하한 장소도 여기였다.
정관헌(靜觀軒)
1900년(광무 4) 고종이 다과회, 연회장, 음악당 등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전통 건축 양식이 가미되어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장식이 특징이다. 완공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커피를 즐겼으며, 현재도 매년 봄과 가을에 명사를 초청한 강연회를 여기서 열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강연을 청취할 수 있다. 다만 고종실록 등에 의하면 1912년까지 이곳을 어진을 봉안한 장소로 이용한 것으로 보여 단순히 다과회, 연회장 등의 용도로 볼 수가 없다.

4.4 서양식 건물

사진설명
석조전
영국인 하딩과 로벨 등이 설계에 참여했으며 1900년(광무 4) 착공해 1910년(융희 4) 완공한 정면 54.2m, 측면 31m의 신고전주의 양식 석조 건축물이다. 원래는 황제와 황후가 거처할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했으나 완공연도를 보면 알다시피... 광복 이후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경복궁에 마련되면서[9] 비게 되어 근대미술관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황궁으로 복원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개시했고 2012년 12월 3일 기준 복원 공정이 75%로 2013년 10월쯤에 완공되며 대한제국 역사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며, 2014년 10월 7일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 개관식을 열고 개관되었다.
구 이왕가미술관(현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이왕직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1937년 석조전 옆에 지은 석조 건축물로 회랑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훼손되었다가 1953년 수리한 후 199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명전(重眀殿)
1901년(광무 5) 건설된 2층 벽돌 건물이다. 본래 외국인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정동 여학당이란 학교도 있었으나 1897~1902년 사이 미국 공사관을 제외한 부지들이 경운궁에 편입되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달리 정관헌과 같은 양식으로 수옥헌(漱玉軒)이라는 이름의 단층 건물을 지어 황실도서관으로 사용했다. 1899년 3월 헨리 아펜젤러가 찍은 미국 공사관 전경 사진에는 중명전이 있던 자리에 단층 양관이 자리잡고 있었고 호러스 뉴턴 알렌이 1895년에 작성했다는 지도에서 king's library라 적힌 지명이 그 증거로, 1901년 11월 16일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이후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덕수궁 내의 주요 전각이 소실되자 고종은 이곳을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개칭하고 편전으로 삼아 외국 사절을 접견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1905년(광무 9)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여기에서 체결되었다. 나중에 궁역에서 벗어나 개인 소유가 되면서 외관이 심하게 변형되었으나(아래쪽 사진) 2010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했다(위쪽 사진). 다만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일제에 의해 매각되기 이전의 것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다. 매각되면서 외국인 사교 클럽으로 활용되거나 1925년에 화재가 일어나는 등의 변천을 거쳤고, 무엇보다 내부 구조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느 정도 외형을 간신히 유지한 알현실 또한 사실 다른 방과 달리 길게 늘어진 형태이기에 알현실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 뿐이다. 사실상 극히 일부, 그것도 외장만 복원한 셈이다. 참고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였기에 복원 이후 을사조약에 관한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독특한것은 좌측에 보이는 중명전 현판의 밝을 명(明)자의 왼쪽 부수가 날 일(日)자가 아니라 눈 목(目)자인데 이에 대하여 <쏭내관의 재미있는 궁궐기행>의 저자인 송용진은, "당시 대한제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의 국호에 들어간 日자가 궐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못마땅해 그리했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이 눈목부수 명자는 준명당의 명(明)자에서도 발견돼서 흥미롭다.

5 기타

덕수궁의 명물하면 돌담길 산책로인데, 옛날에는 돌담길을 연인이 끝까지 걸으면 헤어진다는 도시전설이 있었다. 솔로부대의 성지 이는 과거 서울가정법원[10]으로 가는 길목이 이 길을 지나가야만 나왔기 때문. 또한 이 지역에서 자주 커플들의 검열삭제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퍼트린 소문이라는 설도 있다. 과거 모 남녀관계 분석 프로그램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호젓하고 운치있는 분위기지만 길을 따라가는 주변에 가게 등이 적기 때문에 분위기가 상대에게 집중하면서도 이성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으므로 사랑보다 현실을 보게 하는 역할을 해서 좋지 않다나.. 아무튼 분위기 내는 데도 좋지 않으므로 인적이 없고 볼거리가 적은 황량한 시간을 선택하는 것은 피하자.

SBS의 前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은 마지막화를 찍으면서 돌담에다가 본드로 종이 여러장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병크를 저질러 까이기도 했다.

2010년 복원공사한다고 석조전 등의 건물을 뚝딱뚝딱하는 중에 벽 안에다가 단열재로 새끼줄을 해놓은 것 등이 주목받았다. 외울 거 늘었다

서울특별시청과는 악연 아닌 악연을 가지고 있다. 서울시청 설계안이 나올 때마다 문화재인 덕수궁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와 ANG각앙각(仰角) 제한 규정, 즉 문화재 담장에서 27도 사선을 그었을 때 100m 경계선 안의 건물 높이는 이 사선을 넘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에 문화재청에 의해 딱지를 맞았다. 결국 그래서 나온 것이 po쓰나미wer 높이를 대폭 낮춘 현 재의 신청사 이전의 초기 설계안들이 전체적으로 동고서저 형태를 띄는 것도 이 양각앙각 제한 규정 때문.

덧붙여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내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대한문에서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경에 수문장 교대의식이 있다. 단 매주 월요일은 의식이 열리지 않는다.

우리가 태평로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일제가 개설한 도로가 아니다! 대한제국 시절 방사형 도시계획의 일환이었고 고종이 다닐 만큼 번듯한 길이었음이 문헌에 남아있다. 흔히들 일제의 도로 개설로 덕수궁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1912년에 도로 개설이 아니라 도로 확장이다. 그 후 1960년대 한 차례 확장이 되면서 궁역이 훼손되었다.

또한 덕수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추진한다고 2013년도에 서울시가 발표한바 있다. 동아시아에 남아있는 한국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궁인데다가 한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니 충분한 이유가 될수 있다. 그런데 아직 세계유산 후보에도 없다...

  1. 기실 '주변'이라기보다는 훼손된 경운궁(덕수궁)의 옛 부지 위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복원 중인 덕수궁 주변'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2. 성종의 형
  3. 때문에 일반적인 궁궐의 배치를 따르지 않는다.
  4. 정릉행궁 또는 정릉동 행궁
  5. 보통 도성에서 도망쳐야 할 정도의 큰 난리를 겪은 군주 중에서 이런 경험을 한 군주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삼국지에서조차 헌제이각곽사가 제멋대로 마구 전횡을 부리고 자기들끼리 도성 안에 군대를 갖고와서 허구한날 쌈박질하고 도성에 살던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살해당하거나(당연히 이각곽사 무리들이 죽였다.) 도성으로부터 멀찌감치 도망치는 바람에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허허벌판인 상황까지 몰렸다. 이 때문에 헌제는 야밤에 이각곽사를 피해 도망쳐야만 했으며 이후 조조가 헌제를 영접할때까지 일반 개인집 중 하나를 주워다가 (징발이 아니라 주워다 쓴 거다. 왜냐 하면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같은 국난이 연달아 일어나서 사람들이 씨가 마르기 일보직전이라 빈집이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다.) 임시로 조정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추가로 헌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를 따라온 문무백관들의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6. 고종은 경복궁에 거처하던 시절에도 궁내 양반집 저택의 형태를 띈 건청궁이라는 건물을 지어 거처하였다.
  7. 다만 퇴위 이후에도 고종은 덕수궁에서 태상황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이태왕으로서 1919년 붕어할 때까지 계속 덕수궁의 주인으로 남았다
  8. 훼손이나 복원 과정에서 어긋난 게 아니다!
  9. 이쪽은 대한제국 황실이 처음부터 박물관 용도로 건립했기 때문에 저항이 없었다.
  10. 현 서울시립미술관. 법원 건물을 리모델링 후 계속 사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