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지마

出島 でじま


위의 그림에서 네덜란드 국기가 휘날리고 있는 곳.

네덜란드령 데지마 일본에 있던 네덜란드의 식민지[1]

에도시대 일본과 무역관계에 있던 네덜란드를 위해 막부에서 설치한 무역 거주구. 부채꼴모양의 인공섬으로 면적은 1.5헥타르로 0.013~0.015km²로 축구장 2개 넓이보다 조금 큰 정도. 일명 쇄국 일본의 숨구멍.[2]

1 역사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덜란드와의 무역 및 교류가 이루어진 유일한 장소였다. 이곳을 통해 들어온 서양학문, 즉 '난학'은 뒷날 서구열강의 쇄도에서 일본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완충제 구실을 톡톡히 한다.

본래는 포르투갈인들을 좁은 곳에 몰아넣어 쉽게 관리하려는 목적으로 나가사키의 유력자에게 명령하여 만들어졌다. 지금 금액으로 대충 4억엔(40억원)정도가 들었다고. 이후 포르투갈인들이 매년 임대료를 내면서 거주하였고 네덜란드인들로 바뀐 뒤로는 교섭을 통해 비용을 깎았는데 깎은 금액이 현재 금액으로 1억엔(10억원)정도다.

1639년 막부는 기독교(가톨릭) 포교를 이유로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하여 데지마에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는데 이에 데지마에 자금을 투자했던 지역유력자들의 불만이 있자,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을 데지마로 옮기게 된다.

매년 7~8월에 2척의 배가 입항하여 12월께 출항할 때까지 머물렀고, 그 기간동안에는 네덜란드인 선원 등으로 북적였지만 배가 없을 때는 상관장(商館長)[3]및 부상관장, 서기, 창고지기, 목수, 조리사, 흑인 잡부등 15명 내외의 인원만 거주했다.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데지마 바깥으로 나올 수 없었지만, 대표인 상관장은 에도에 연례인사 겸 조공으로 가는 일이 있었다. 데지마의 행정관할은 원칙적으로 일본측인 나가사키 부교(奉行)에게 있었고 일본측 인원들도 상당수 데지마로 출입하여 업무를 보았다. 금제(禁制)라는 규율이 있었는데, 허가받지 않은 일본인은 데지마에 출입할 수 없었으나 성진국 답게 유곽의 창녀는 출입해서 성관계를 맺어도 처벌받지 않았다.[4] 실제로 현재 남은 그림등을 보아도 데지마 안에서 일본여성들을 끼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 등이 남아 있다.

일명 난학이라 불리는 서양과학을 접하는 통로가 되었다. 난학이란 네덜란드를 음차한 '화란(和蘭)'[5]에서 따온 말이다. 당시 일본 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뇌전기의 발명이나 세키 다카카즈의 미적분 발견,미우라 바이엔의 변증법 제시를 이끌기도 했다.[6]

2 복원사업

모형

메이지 유신 이후에 무역기지로의 기능을 상실한 이후로는 추가적인 매립공사등을 통하여 사실상 섬도, 특수구역도 아닌 일반거주지로 바뀌었고 한때는 축소모형과 위치를 알리는 표지 정도만 남아 있었다. 나가사키시는 데지마의 복원을 시 중점사업으로 내걸고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점점 원래 위치에 복원 중이다. 2차대전 후 패전국인 일본이 네덜란드측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으나, 배상금 대신 데지마의 복원을 요구했다고.[7]복원고증 등 사전작업및 계획에만 45년이 걸렸다가 1996년에야 첫삽을 뜨게 되었다.

복원된 데지마. 빌딩등이 위치해 있어 일부만 복원되었다.

다만 지속적인 매립등으로 해안선과 주변환경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그림에 나온 것처럼 재현하지는 못하고 경계구역에 해자 비슷한 것을 파는 식으로 복원할 모양.

3 관련 사항

  •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 일본에 처음으로 서양의학을 전파한 독일인 의사이자 동식물 덕후.세작[8] 무역및 거주를 허락받은 것은 네덜란드인뿐이라서 스스로를 네덜란드 산골 출신(..)으로 속이면서네덜란드에는 산이 없는데? 시원찮은 네덜란드어 실력이나 독일말투를 무마했다고 한다. 데지마에 거주했으며, 일본여성과 결혼하여 쿠스모토 이네라는 딸을 낳았으며 이 딸은 일본의 1호 여의사가 된다. 그리고 손녀는 은하철도 999의 모델이 된다.
  • 공각기동대 S.A.C. 2nd GIG: 작중 난민이 거주하는 데지마란 구역명이 나온다. 유래가 바로 이것.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나가사키에 입항하게 되면 보이는 도시의 형태가 바로 이 데지마를 구현한 것이다.
  1. 포르투갈이 통치권 행사하기 전의 마카오랑 조금 비슷한데 막부가 출자를 받아 건설하고 사용료를 꼬박꼬박 받은데다가 네덜란드 군대가 주둔하거나 치외법권이 적용된 것은 아니라서 식민지라고 하긴 무리다. 조선으로 치면 왜관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2. 실제론 나가사키의 중국인 거주지에 비하면 한 줌밖에 안되었다고
  3. 카피탄'이라고 불렀다. 이는 본래 포르투갈어로 영어의 Captain과 같은 단어인데 상대국이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바뀐 뒤에도 일본에서는 계속 사용했다. 네덜란드에서는 Opperhoofden이라고 불렀다.
  4. 조선에서의 비슷한 기능의 시설인 왜관을 출입했던 조선인 여자들이 발각되어 모두 참수등 극형에 처해진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다
  5. 정확히는 '홀란드'(Holland)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홀란드 지역은 네덜란드의 중심부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홀란드는 곧 네덜란드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6. 박성래 외 2인,'과학사',전파과학사,2013,p341-342
  7.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에 점령당했을 때 세계에서 유일하게 네덜란드령(?)으로 남아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라나. 아무튼 네덜란드 입장에서 역사적인 장소인 것은 맞다.
  8. 지볼트는 일본의 문물을 수집했는데, 이 중에는일본에서 해외로 반출하는 것이 금지된 일본의 지도들이 있었다. 이것을 적발당해서 지볼트에게 지도를 준 타카하시 카게야스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다가 옥사했고, 지볼트는 1829년 추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