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공습

Firebombing_Tokyo.jpg
도쿄를 폭격 중인 B-29
지상으로 내리꽂는 죽음의 불꽃비(f​lame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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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도쿄

도쿄 大空襲
일본어 : 東京大空襲(とうきょうだいくうしゅう)
영어 : Bombing of Tokyo[1]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커티스 르메이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일본의 도시란 이런 식이다. 공장이 있다. 그 옆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64호나 65호, 63호 너트, 아니면 그 사이에 끼는 모든 개스킷을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순서로 부품들을 모아서 가는 거다.)

커티스 르메이, 폭격 직전에 민간인 대상 공습이란 상황에 죄책감을 느낀 부하들을 보고.


1 개요

드레스덴 폭격을 능가한 최대의 전략 폭격이자, 일본인에게 패배가 직면했음을 보여준 공습
일본 제국심장에 비수를 꽂다

태평양 전쟁일본 본토 공습 작전의 일환으로 일본의 수도 도쿄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 끝자락인 1945년 3월 9~10일, 미군이 전쟁의 빠른 종결을 위해 일본 제국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B-29 폭격기를 대량으로 동원, 도쿄에 대량의 네이팜탄을 투하하여 모조리 태워버린 공습작전을 말한다.

이로 인해 도쿄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공습 이전까지만 해도 도쿄에는 600만 명이 있었는데, 공습 이후에는 약 200만 명까지 급감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뒤이어 일본의 다른 주요 도시들(오사카, 고베, 나고야 등)도 비슷한 방식의 폭격으로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폭격이 유발한 직접적인 피해(특히 사상자수)는 원자폭탄 투하보다도 도쿄 등에 이뤄진 공습이 더 심했다. 단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그리고 반드시 최후가 되어야 할 원자폭탄,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종전이 결정된 두 개의 결정타 중 하나라는 임팩트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일본 본토 공습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게 된 것뿐이다. 더 중요한 건 원자폭탄 투하 자체도 일본 본토 공습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일본 본토 침공 작전인 몰락 작전에서도 원자폭탄 투하가 예정되었고, 핵 폭격 후 대응까지 준비되고 있었을 정도. 이 핵 폭격에 대해서는 몰락 작전 문서를 참조할 것.

도쿄 대공습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일본 최대의 정신적 트라우마이다. 핵폭탄 투하 다음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며, 동시에 그럼에도 항복하지 않는 일본의 모습에 연합군에게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

고지라를 비롯해 마징가 이후로 일본 영상 매체에서 줄창 울궈먹는 '악역의 도시 강습 테마'의 정신적 원형이기도 하다.

2 다른 나라와의 비교

영국도 같은 섬나라라서 본토에서 직접적인 전투는 없었지만, 전쟁 초기부터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까지 자국 상공에서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고 여러차례 폭격을 당했다. V1, V2와 같은 무기가 유명하지만, 본토 항공전 이후에도 독일은 여전히 폭격으로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대전 말에도 보복을 위해서 영국에 공습을 시도했다. 심지어 항복하기 직전까지도 제트 폭격기인 Ar 234를 영국 상공에 날려보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독일은 2차대전 참전국 중 가장 심한 폭격을 당했으며, 드레스덴 폭격과 같은 무시무시한 폭격을 당한 끝에 전국토가 잿더미가 되었다.

유럽 전선에서 최초로 대규모 폭격을 당한 나라는 폴란드이다. 그 중에서 수도 바르샤바가 가장 큰 참화를 가장 오랫동안 입었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고 9월 28일 바르샤바 전투폴란드군항복으로 끝날 때까지 바르샤바는 매일 폭격을 당했다. 특히 9월 25일에는 독일 지상군의 대규모의 포격과 함께 1,200여 대에 이르는 항공기가 출격하여 바르샤바를 때려부쉈다. 전쟁 전의 바르샤바의 인구는 135만여 명이었는데,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항복할 때까지 폴란드군 6천여 명과 시민 2만 5천여 명이 사망했다. 당시의 폭격으로 도시의 12%가 폐허가 되고 50% 이상의 건물이 손상을 입었다. 바르샤바뿐만 아니라 프람폴(Frampol), 비엘룬(Wielun) 등 다른 폴란드 도시들도 독일 공군의 극심한 폭격에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프람폴은 폭격 직후 멀쩡히 남은 게 도로 2개밖에 없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0월 6일, 본토의 마지막 폴란드군이 항복하면서 폴란드 침공이 종료될 때까지 10만여 명의 폴란드 민간인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3 초창기의 공습 (1944년 6월 ~ 1945년 2월)

작전반경의 한계 탓에, 미국의 일본에 대한 폭격은 처음에는 미미한 것이었다. 첫 폭격은 둘리틀 특공대가 있었지만, 이는 일본인 전체에 충격을 줬다기보단 대본영에 충격을 주었을 뿐이다. 애초에 이들이 몰고갔던 건 중(中)형 폭격기라 피해를 크게 줄 수도 없었다. 둘리틀 특공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둘리틀 특공대는 애초에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키면 어떨까?" 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항공모함에서 날아갈 수 있으면서 일본에 그나마 제대로 된 폭격을 때릴 수 있는 폭격기로 중(中)형 폭격기인 B-25가 결정되었고, 그나마도 착함[2]은 불가능해서 기체를 1회용으로 써야 했다. B-25보다 항속거리가 긴 폭격기[3]도 있었으나 덩치 및 활주거리 문제 때문에 항모에서는 이함[4]은 커녕 탑재조차 불가능했다. 이러한 중형 폭격기 몇 대의 공격에 대해 당시 일본인들 반응은 "어떻게 미국이 천황폐하가 계신 곳에 폭격을 가한단 말인가?"라고 하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카더라.

1944년 6월 사이판 전투를 통해 비로소 B-29의 작전반경 안에 일본 본토 전역이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공습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전부터, 그리고 다른 곳에서부터 일본 공습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의 일본 폭격 근거지는 중국이었다. 미국장제스중국 국민당과 동맹국이었기에 중국 내륙의 비행장들을 활용할 수 있었고, B-29쿤밍충칭에서 발진하면 큐슈 등 일본 본토 서부지역을 작전반경 안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서 1944년 초반부터 열심히 발진했지만 한계는 명백했다. 일본군의 점령지를 너무 많이 지나야 하는 탓에 가능한 한 고고도를 오래 비행해야 했기에, B-29가 지닌 폭장량(약 9톤)[5]의 반의 반도 제대로 쓰지를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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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B-29 한 대의 최대 폭장량.
저거 하나하나가 500lb(226.796kg)짜리다.

따라서 사이판 전투의 전략적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사이판은 일본 본토를 목표로 하는 안정적인 폭격기지로서, 중국 내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기에 B-29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

때문에 미군은 보병들이 일본군을 사이판 북쪽으로 몰아내면서 투닥거리는 와중에 부랴부랴 대규모 활주로와 기지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군 공병대는 무시무시한 건설능력을 발휘해서 1~2개월 만에, 사실상 임야나 다름없던 중부 사이판 평원에다가 B-29를 위한 활주로 5~6개 이상과 관제탑, 유류고, 정비창, 막사 등 주요 기반시설을 완비한 초대형 비행장을 뚝딱 건설해내었다. 이것으로도 모자란 미군은 폭격기 항로상의 비상활주로 겸 호위전투기(P-51)의 기지로서 딱 중간에 위치한 이오지마를 손에 넣고자 했고, 이는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의 전략적 배경이 된다.

그러나 애써 확보한 전략기지 사이판ㆍ괌에서 출격한 B-29 폭격대의 초반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일본군은 빈약한 공군력과 기술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치열하게 방공전을 전개했고 물론 미군 폭격기대를 상대로 1943년에 선전했던 독일군에 비하면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지만[6][7] J2M 라이덴, Ki-45 토류 등으로 꾸준히 반격에 나서 1~3%의 소규모 손실이나마 꾸준히 입히고 있었다. 물론 Bf109, Fw190 등에 비하면 항속력도 화력도 방어력도 눈물겹게 빈약한 비행기를 몰고, 죽을 힘을 써 가며 B-29의 비행고도까지 올라갔다가, M2 중기관총 11정+20mm 기관포 1정으로 무장한 B-29 밀집대형에 뛰어들며 갈려나간 일본군 전투기와 조종사는 훨씬 더 많았지만. 때문에 일본군은 B-29에 대한 자살충돌공격까지 감수했다.

때문에 중국에서 발진할 때도, 사이판에서 발진한 초기 폭격에도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은 그 규모에 매우 소극적인 편이었다. 일본군 방공전투기가 도달하기도 힘들고, 도달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7,000 ~ 9,000m 이상의 고고도는 B-29에게 매우 안전한 공역(空域)이었고, '매우매우 귀한' B-29의 손실을 우려한 폭격대장은 그냥 이 고도에서 폭탄을 때려부어버린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 폭격대장은 무차별 융단폭격을 상정하긴 했으나 민간인의 피해까지 고려했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류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유럽 상공에서는 이렇게 폭격해도 효과를 봤지만, 문제는 일본 상공에서는 제트기류에 의해 폭탄의 명중률이 최악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고고도에서 투하되는 폭탄들은 시속 수십~수백 km의 바람(기류)를 만나며 마치 건물 옥상에 올라가 종잇조각을 마구 뿌리는 것마냥 사방천지로 흩어져 낙하 탄도가 엉망이 되었다. 게다가 이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서 운항하기 위해서는 폭탄 또한 폭장량의 절반 이하 밖에 실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이루어진 폭격의 성과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무사시노에 위치한 군수 공장을 폭격할 때는 약 100여 대의 B-29가 출격하여 수천 발의 1,000 파운드 폭탄을 때려부었는데, 명중률은 2%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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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B-29에 맞서 도쿄의 하늘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의 늠름하고 강력한 방공포대 [8]

마찬가지로 도쿄에도 공습이 가해졌으나, 위에서 말한 단점 때문에 대다수의 도쿄 시민들은 이 폭격을 한낱 유희거리로 여겼다. 시가지가 아닌, 시 외곽의 군수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명중률이 형편없는 폭격이었는데다가 도쿄 시민들은 대본영에서 내보내는 엉터리 조작, 선동 방송[9]이나 들으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므로 전쟁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 시민들은 근방 뒷산이나 건물 옥상에 올라가 폭격을 구경하거나, 심지어 폭격기가 오는 날짜(보통 3일 간격)까지 헤아려 가며 애타게 기다릴 정도였다.\[출처 필요\]

당연히 미군으로서는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여가며 세계에서도 손꼽는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폭격기 B-29를 수백 대라는 최대 규모로 생산하고, 많은 희생을 치룬 끝에 일본 본토를 폭격할 최적의 비행기지도 확보하고서 폭격을 가했는데 성과가 미미하니, "도대체 우리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는 거지?"라는 회의가 들기에는 충분했다. 로리스 노스태드(Lauris Norstad) 중장은 이를 보다 못해 전략폭격대장(제 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 헤이우드 핸셀((Haywood S. Hansell)) 소장을 석기시대 매니아로 교체했다. 그리고 도쿄 시민들에게 폭격은 더 이상 유희가 아니게 되었다.

4 작전 내용

커티스 르메이는 유명한 석기시대 드립에서부터 익히 알 수 있듯 매우 '공격적이고 과격한' 지휘관이었다. 하지만 그냥 전쟁광인 성격이였으면 역사에 남지 않았거나 악명만이 남았겠지만, 르메이는 값비싼 B-29, B-29에 탑승하는 승무원, 그리고 명령을 내리고 지휘하는 자기 자신의 목숨마저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10]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떨어진 작전 명령은 일본의 산업 역량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일단 전임자인 헤이우드 핸셀 소장이 그랬던 것처럼 민간인 거주 지역을 피해 산업 지대에 다시 한번 고고도 폭격을 시험해봤지만 결과는 역시 형편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안전하지만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주간 고고도 폭격은 집어치우고, 야간에 1,500~3,000m의 저고도로 B-29를 대량으로 때려넣는 것이었다.

겉보기에 자살 돌격처럼 보이는 이 명령에는 몇가지 계산이 숨어 있었다. 우선, 고도 2,000m는 기관포와 같은 소구경 대공 화기가 무력화되면서도 대구경 대공포는 시한 신관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 없는 높이였다.[11] 영국 공군의 야간폭격에 대해 대전 초부터 충분한 경험을 쌓아온 독일의 방공망이라면 대공포를 낮게 조준해서 다가오는 폭격기 대열에 멀리서부터 포격을 가했을 수도 있겠지만, 야간 방공 능력이 없는 일본 측[12]은 저공으로 날아드는 폭격기를 제대로 타격할 수단이 없었다. 기습을 포착하고 대응할 수단이 없었으므로 전투기가 제대로 방공 임무를 수행할 리도 만무했다. 아니 애초에 요격기를 타고 저고도 비행하는 폭격기를 줄줄히 떨어뜨릴만한 훌륭한 조종사들부터 이미 다 죽고 없었다. 르메이는 이런 기습을 통해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저공으로 비행할 때는 고공비행에 비해 탑재 중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으므로, 폭격기 설계시에 상정한 대로 폭탄 적재량을 최대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당시 대부분의 일본 가옥은 목조였으므로 기존에 사용하던 고폭탄은 집어 치우고 B-29에 소이탄을 한가득 꽉꽉 채워 보내기로 하였다. 고폭탄 60%에 소이탄 40%였던 기존의 폭장 비율을 소이탄 100%로 변경하고 폭격 소티 수를 늘려서, 일반적인 작전이라면 2달간 쓸 수 있는 소이탄 물량을 5일 안에(...) 퍼붓기로 한 것이었다.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제 21 폭격기사령부 전체가 이미 잘 알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민간인 피해가 크게 발생할 것임은 자명했고 이를 지적하는 부하들도 있었다. 하지만 르메이의 관점에서 이들은 단순한 민간인이 아니라 일본의 공장 노동자, 즉 일본의 군수 산업 역량 그 자체였으므로, 이 산업 역량을 무력화시키려면 결국 공장 노동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르메이는 "사실 저 밑의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걸 가내수공업이라 하지."라고 설명하고는 민간인 피해에 지적을 상큼하게 씹었다. 전후에도 이에 대해서는 '전쟁에서는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다.'라는 반응이었다.

4.1 네이팜탄(소이탄)이 사용된 이유

르메이는 중국-버마-인도 전선에 가 있었을 때인 1944년 12월에 일본군 제6방면군 사령부가 있던 한커우(漢口)에 대규모 소이탄 공습을 가하고 위력을 확인하였으며, 일본에서도 효과가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1945년 2월 4일에는 고베를 공습하였고 2월 25일에는 도쿄에 소이탄 공습을 가해 260헥타르 면적을 파괴하면서 소이탄의 위력을 다시 확인하였다.

소이탄을 쓰기로 한 원인 중 하나는, 육군 항공대에서는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는 동안 해군에서는 소이탄만으로 폭격해서 성과를 내는 것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르메이가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쓰던 기존의 방법을 집어치우고 소이탄 100%를 쓴 저고도 폭격으로 폭격 방침을 바꾼 결정적인 배경은 이 항목을 참고하자.

당시 일본의 가옥은 90%이상이 목재로 지은 목조 건축물이었다. 이는 누군가 작정하고 방화하면 쉽게 초토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3] 일본의 건축물 재료가 주로 목재라는 것은 빌리 미첼(Billy Mitchell) 준장이 1924년에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평가하면서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강조되었던 부분이고, 더군다나 드레스덴 폭격의 결과를 통해 소이탄의 위력을 폭격기 승무원을 비롯한 육군 항공대 전체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시점이기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무릅쓰고 소이탄을 실제로 투입한 이유는 3가지였다.

  • 첫 번째는 몰락 작전의 실행이 1년 이내로 가까워져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략 폭격으로도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지 못하면 결국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일본 본토를 직접 침공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어느 정도나 인명손실을 입을지 모르는 몰락 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없도록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찍 끝내야 일본 민간인도 덜 죽고 미국 장병도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2번째로, 당시 미군 폭격기가 수행하던 고고도 폭격으로는 폭격의 정확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당시의 최첨단 정밀 폭격용 조준기인 노던 조준기(Norden bombsight)조차 원형 공산오차(公算誤差)가 30m였기에 특정 건물을 정확하게 노려서 폭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다가 일본 상공에서 불어대는 제트기류로 인해 아무리 정밀 조준해서 폭격을 한다 해도 폭탄들이 제트기류에 휘말려서 폭탄의 탄도부터 엉망이 되며 폭격 정확도는 개판이 된다. 즉 특정 건물을 노려서 폭격한다 해도 떨어지는 폭탄들이 바람에 휘말리면서 탄착지점이 투하시 겨냥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되는 것이다. 일례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서도 투하 예정지에서 벗어나서 떨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애초에 커티스 르메이의 전임자이며, 정밀폭격론자였던 헤이우드 셰퍼드 핸셀이 제 21 폭격기 사령부에서 전출된 원인도 이것이다. 그래서 르메이는 제트기류를 피해 저공으로 폭격을 가하고, 이왕 저공으로 폭격을 가할 것 같으면 좀 더 광범위한 범위에 피해를 입힐 목적으로 네이팜탄을 선택한 것이다.
  • 마지막으로, 소이탄의 파괴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당장 유럽전선에서 석조 건축물 위주였던 드레스덴에 가해진 드레스덴 폭격에서도 발군의 파괴력을 보여준 게 소이탄이었다. 대량의 소이탄 앞에서는 건물이 목조냐 석조냐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석조 건축물 위주인 드레스덴도 이렇게 박살 났으니 목조 건축물 위주의 도쿄는 과연?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무사시노의 항공기 공장을 폭격할 때 르메이와 핸셀은 무려 15번이나 고고도에서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쓴 정밀 폭격을 했는데 해군에서 급강하 폭격기를 동원한 저고도 소이탄 폭격을 딱 한 번 했는데 르메이와 핸셀이 15번 정밀 폭격을 한 것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도 르메이의 폭격방침이 바뀌는데 근거가 됐다.

또한 중일전쟁 중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을 비롯한 중국 도시 폭격 방법에서도 영감을 얻은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에다가 쓴 방식에 똑같이 당했다는 말이다. 도쿄 대공습 전에 커티스 르메이에게 영감을 준 2가지 공습 사건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위에서 언급된 드레스덴 폭격이고 2번째가 다름아닌 이 충칭 대공습이다. 그뿐 아니라 커티스 르메이의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라는 말이 충칭 대공습 당시 소이탄을 전쟁 자체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민간인 거주지역에 투하해댄 일본군을 보고 한 말이라는 설도 있다.[14] 이 사실로 인해 도쿄 대공습으로 일본이 피해자 행세와 망언을 하면 가장 먼저 중국이 비웃는다.

일본의 건축물은 목조가 대부분이라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약점은 일본도 인식은 하고 있었다. 워낙 목조 건축물이 많으니 역사적인 대화재도 여러번 겪었고, 화재에 예민해진 덕분에 수백 년전부터 민간 의용 소방대가 치밀하게 조직될 정도로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해 왔다. 이런 약점에 처해 있던 차에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대본영은, 시내에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는 화재가 빠르게 확산되는 걸 막을 수 없을테니 시내를 일정 구역으로 나누고 사이사이에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한 방화대(防火帶)[15]라 부르는 빈 공간을 만들었다. 물론 그 방화대 안에 있던 가옥은 전체주의 국가답게 그냥 헐어버렸다. 또한 시내 곳곳에 방화수조, 물을 채운 구덩이 등을 마련했는데 이 탓에 모기 떼가 창궐하며 이미 반년이 넘는 소방훈련에 지쳐있는 도쿄 시민들을 더 힘겹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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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힘겨운 때가 정말 행복했던 시간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이 나름대로 세운 대책도 미군의 실제 폭격 앞에선 애들 장난이었다.

5 도쿄대공습의 시작과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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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황불. 공중에서 불이 붙은 채 쏟아지는 네이팜탄.[16] 어떻게 보면 긴 치마를 입은 채 두 팔을 들어올리고 노래하는 천사 같다. 물론 지상에 있던 일본인들에게는 죽음의 천사였다.

1945년 3월 9일 밤 ~ 10일 새벽에 걸쳐, 사이판과 티니안 섬에서 344 기[17]B-29 슈퍼 포트리스 폭격기가 출격했다. 이들은 기존의 고고도 폭격 대신 5,000피트(약 1.5km)의 저공에서 폭격기 1대당 7톤씩, 총 2,400여톤의 소이탄(네이팜탄)을 도쿄에 떨어뜨리기로 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비행기 무게를 줄여 비행속도를 높이고 폭탄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폭격기 후방 기총을 제외한 모든 방어기총과 탄약을 제거한 후, 로버트 K. 모건 소령 [18]의 지휘하에 폭격에 나섰다.

이날은 새벽부터 초봄의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오후부터는 3월의 거센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저녁에 접어들면서 바람은 점점 더 강해졌다. 밤 10시 30분, 라디오 방송이 B-29 편대의 도쿄 접근을 알렸다. 적기에 관한 정보는 도쿄 만(灣)으로부터 남쪽으로 오가사와라 군도까지 이어진 일련의 섬에 배치된 감시원들에 의해 잇따라 중계되어 들어왔고, 얼마 후 첫번째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밤 12시 직전, 제 1번기가 동쪽으로부터 저공으로 급히 접근하여 30lkg\[출처 필요\]짜리 네이팜탄 뭉치를 풀어놓았다. 그것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지상에서는 화염이 선을 그리며 분출하여 밤하늘을 밝혔다. 제 2번기는 스미다 강(隅田川) 상공에서 제 1번기의 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제 1번기와 제 2번기가 교차하며 던진 소이탄으로, 도쿄의 공장, 상점, 소주택이 몰려있는 도쿄의 동북지역에 거대한 불의 X자가 조용히 그려졌다. 그리고 곧 이어 불의 X자를 표지 삼아, 280여 대의 폭격기가 폭음을 울리며 3,000m의 고도로 진입해왔다. 책상에 올려놓은 찻잔 속의 녹차가 밖으로 튈 정도로, 도쿄 시민들은 그렇게 낮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B-29의 엔진 폭음과 진동이 울려퍼지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B-29 놀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란 것을 다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6시간 동안 도쿄 상공에 뿌려진 8,500발의 E-46 확산탄은 50만 개의 M-69 소이탄 자탄, 총 1,700톤의 네이팜 소이탄을 투하했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린 네이팜탄과 기름뭉치들은 도쿄 시내 8,500여 곳에 떨어졌고, 순식간에 불꽃이 밤하늘 30m 높이까지 치솟으며 치명적인 화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여기에 애초부터 불어 오던 시속 27 ~ 45km의 지상풍이 만나자 화염은 순식간에 옆으로 위로 사방 팔방으로 기세좋게 뻗어나갔다.

화재는 화재끼리 만나면 덧셈이 아닌 곱셈으로 위력이 증폭되는 속성이 있는데, 이를 '화재선풍'(火災旋風)[19]이라고 한다. 처음 15분 동안에 목조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구역이 소이탄으로 거대한 불구덩이로 변했고, 화재로 가열된 공기는 팽창하며 위로 치솟았다. 그리고 다시 주변의 공기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여 풍속은 점점 강해졌다. 이 격렬한 대류 현상은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는 불기둥을 만들었으며 시속 65km가 넘는 강풍은 불붙은 연소물들의 잔해를 빨아올렸다가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이렇게 퍼져나간 불티들은 다시 잔불을 일으키며 화재를 확산시키고 작은 화재들이 다시 합쳐져 더욱 더 화재를 키우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불의 쓰나미는 골목길과 애써 만들어놓은 방화대 따위는 있지도 않은 것처럼 수십~수백 m를 우습게 뛰어넘어서, 경로상에 위치한 목재든 인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유기물을 닥치는대로 삼켜나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불이 모든 것을 태우고 스스로 꺼지거나 큰 비가 내리는 것 외에 인력으로는 소화가 불가능하다. 화재 예상 진로상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방화대를 구축하는 정도가 한계다.

시민들은 처음에는 소방훈련 때 배운대로 실천하려고 했다. 소이탄에 물이나 젖은 걸레를 퍼붓기도 하고, 양동이 릴레이를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경찰관, 소방관, 훈련받은 민간요원들이 지시하는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정부 당국은 각 동네의 시민들이 자기 할 일을 완수하면 그 동네들은 무사할 것이고 결국 도시 전체가 무사할 것이라고 말해왔지만, 적기가 네이팜탄뿐 아니라 기름이 가득찬 25톤짜리 폭탄을 2.6㎢당 1개 꼴로 투하하고, 그로 인한 화재 그 자체가 폭풍처럼 회오리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결국 화재 진압을 시도하던 사람들도 모조리 화재에 잡아먹혀 버렸다. 경찰은 사람들을 방화대, 공터, 혹은 이미 모든 게 다 타버린 장소로 이동시키려고 노력했고, 소방대원들은 살아남은 몇개의 소화전을 통해 화염에 휩싸인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 몸에 물을 뿌려줬지만 화재선풍이 시속 100km 가까운 속도로 사방팔방에서 덮쳐오는 상황에서는 별 소용이 없었다. 타죽지 않은 사람들은 뜨거운 연기에 질식해 죽었고, 불이 산소를 모두 태워버린 탓에 질식해 죽어갔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화재현장의 열기로 인해 가까이만 가도 화상을 입거나, 옷이 갑자기 화르륵 타오를 정도였다고 한다.

도쿄 동북쪽에는 피난민들이 간논사라는 에 몰려들었다. 그 절은 오랜 세월, 도쿄의 숱한 화재들 속에서도 한 번도 불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절이 관세음보살의 가호를 입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내의 정원에 불이 옮겨붙자, 절의 목조 건물과 수많은 수목들은 거대한 화장(火葬)용 장작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공창가가 있었으며 여기는 접대부들의 탈주를 막고 외부에서의 화재를 막기 위해 큰 철문들이 닫히게 되어 있었는데, 수많은 접대부와 손님들이 그 철문 안에서 죽어갔다.

도쿄 남쪽의 니혼바시 근처에서 경찰들은 피난민들을 유명한 극장인 메이지좌(明治座)로 피난토록 했다. 그러나 이미 도쿄를 가득 메운 불에 극장안의 산소도 부족해져갔고 마침내 무대의 막에 불이 옮겨붙자, 극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장로(火葬爐)로 돌변하고 말았다.

동북지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스미다 강은 화염 폭풍으로부터 안전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양쪽 기슭에서 수만명의 사람들이 강의 얕은 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네이팜은 강물 위에서도 꺼지지 않고 잘만 타올랐으며, 화재 선풍의 열기로 인해 강물도 끓어올랐다. 문자 그대로 사람들은 물 속에서 삶겨 죽었다. 강변에, 다리 위에 있던 사람들도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끓는 물에 뛰어들어 죽어갔다. 강에서 빠져나온 사람들도 불에 타 죽거나 증기에 질식사하곤 했고 겨우 살아남았어도 심각한 화상은 피할 수 없었다. 네이팜탄의 불길 확산을 위해 같이 투하된 25톤 규모의 기름 폭탄이 이 강렬한 불길을 지속시켰다. 드레스덴에서 소이탄에 희생된 사람들 상당수도 이런 죽음을 맞았다. 이건 뭐 도저히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3월 9일 밤 12시에 시작된 공습은 3월 10일 새벽 5시 공습 해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끝났다.

6 도쿄대공습의 결과


네이팜 불길에 직접 쏘여 죽은 시신 혐오주의 : 네이팜의 파란 불꽃은 1,000도를 넘는 고온으로서 인체와 접촉할 경우 수분을 고속으로 증발시켜버리기 때문에 시체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된다.

도처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 스미다강을 따라 걸어간 한 군의관은 강 기슭에 쌓인 시체들을 보았다.

"표류하는 수많은 시체를 보았다. 옷을 걸친 시체도 벌거숭이 시체도 모두 목탄처럼 검게 타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사람의 시체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남녀를 분간할 수조차 없고, 그 곁을 떠내려가는 물체가 팔인지 다리인지 아니면 불탄 나무조각인지도 식별할 수 없었다."

반상회 조직은 살아남아서 식량조달과 임시거처 마련을 위해 힘썼다. 군대가 파견되어서 시체들을 수습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체는 100구씩 모아서 커다란 공동 무덤에 매장하였다. 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 명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이들을 실어날랐다. 그제서야 히로히토 덴노는 방공호에서 기어나와 2시간 동안 폭격지역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신의 화신'이라는 덴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흘겨봤다고.\[출처 필요\] 단 한차례의 폭격으로 대략 25만 동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180만 명이 집을 잃었다. 그리고 약 40㎢의 도심이 잿더미로 변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집계하지 못했다. 정부는 120,000명이 사망했다는 신문 보도도 발표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프랑스인 기자 로베르 기얭(Robert Guillain)은 사망자로 간주되는 피해자 수가 197,000명이라고 보고된 문서를 접했다고 한다.

일본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83,793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40,918명이 중상, 10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피해자가 약 20만명에 달하는 원폭 이상의 피해를 가져왔다. 공습 피해 및 소개[20]로 인하여, 종전 직후의 도쿄 인구 수는 진주만 공습이 발발하기 직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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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밭이 되어버린 도쿄 시가지. 수도로서 도쿄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관동 대지진 때문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계획도시로 복구한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는 이 작전으로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도쿄에서 과거 에도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사이타마현의 카와고에시는 옛날 에도 분위기의 길거리가 보존된 것으로 유명한데 원조 에도인 도쿄에는 이런 곳이 거의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7 도쿄대공습의 전략적 성과와 의미

작전 시점에서 미군이 전선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제공권을 획득한 상태에서 치밀한 준비 속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폭격의 성과는 매우 컸다. 미군이 이런 무차별 공습을 통해 의도한 바는 아래와 같다.

  • 일본 국민의 동요: 폭탄을 퍼부은 미국 측에선 죽창 운운하던 최후 항전 이야기 때문에 사실 이쪽으로 별 기대는 안했다고 하는데, 일본 쪽의 기록에 따르면 대단한 동요를 가져온 모양이다. 일본 국민들에게는 진주만 공습, 난징 대학살, 이오지마 전투, 동남아에서의 일본 육군의 몰살 등등의 이야기는 그냥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음.' 정도로 남 일처럼 취급되었고 이오지마 전투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하는 국가같지가 않았으나, 폭격 이후로 국민들은 '전쟁'을 실감하기 시작했으며 핵 투하와 함께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이 기억하는 '일본이 했던 전쟁'의 이미지로 남게 된다.[21] 이후 미군의 일본 도시에 대한 전략폭격이 본격화된 시기에는, 전쟁에 나간 아들이 덴노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 높으신 어르신들은 정작 대공습이 시작되자 폭격을 피해 다 시골로 튀어버린 상황이었다.
  • 큐슈 상륙작전(올림픽 작전) 시행을 위한 준비: 큐슈 상륙 전에 이와 같은 네이팜 폭격과 상륙지에 대한 핵 투하가 예정되어 있었다. 미군이 투입될 상륙작전지에 핵을 사용하려 한 것은 그 당시 방사능의 위험을 맥아더 장군을 포함한 장성들과 과학자들이 과소평가했던 것도 있다.
  • 큐슈 상륙작전, 더 나아가 몰락 작전 전체의 당위성 약화: 위와는 완전히 대치되어 보이지만, 작전을 입안한 커티스 르메이는 제21폭격기 사령부 발령 당시 상관인 노스태드 중장으로부터 "몰락 작전이 실행되는 (그리고 백만명 이상의 미군 장병이 죽고 다치는) 꼴을 막고 싶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일본의 공업 능력을 무력화"시키라는 지침을 받았다.[22] 이는 아군 인명피해를 최소화시키려고 노력했던 르메이에게 던지는 떡밥이었다. 그 떡밥을 문 방식은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 군 시설과 군수공장의 괴멸: 이미 도쿄는 관동 대지진으로 박살난 뒤 재건되었는데, 누가 재건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나 시가지 내에 민간인 거주지와 군사시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있었다![23] 하지만 이런 무질서한 도시계획은 미약한 산업기반만으로 군국주의 국가로 진화한 일본에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형 공장을 세우고 이를 채울 최신 산업설비를 갖출 능력이 없이 수공업 따위에만 의지하니 주택가와 공장이 섞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24] 이러한 흔적은 서울에도 남아 있는데, 을지로 5가에 있는 주한미군 공병대가 일제시대 일본군 병영을 그대로 쓰고 있다. 다른 사례를 들자면 을지로 한복판의 공구상가나 소규모 영세공장들과 주택들이 마구 뒤섞인 독산동같은 곳들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또한 현재와 비교해 보면, 대중교통을 비롯하여 노동자들이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직장과 주거 공간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할 필요성이 더더욱 커지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특히 2차대전 이전의 일본 자동차공업은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고, 2차대전 중으로 가면 아예 연료부족으로 목탄버스가 일상적으로 운행되고 있던 시절이기 때문에 직주근접[25]이 아니면 노동자의 통근을 보장하기가 힘들었다. 일본 쪽의 기록에 따르면 그 이전까지의 고고도 폭격으로도 이미 꾸준히 피해를 입어왔지만, 미군 수뇌부에서는 일본의 전투기 등 병기 생산 능력을 소멸시킬 것을 폭격 작전 실무자들에게 요구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이 "사실 저 밑의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고 말한 것이 순전히 자기합리화에서 나온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덧붙이면 "옆집 스즈키네"라는 르메이의 발언은 폭격 당시 미군 장성들의 실제 관점과도 일치했다. 당시 일본의 공업지대는 산업혁명 당시의 영국처럼 거주지역과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특히 파괴 전까지 항공기 생산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일본의 항공기 생산 공장들은 미군 장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미국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당시 국제법상으로도 위법은 아니다. 방어되고 있는 군수공장과 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집을 박살내야 하는데, 원칙대로라면 군수공장만 노려야겠지만 그런 시설과 노동자 주거지를 민간인 주거지에 혼합해 자국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만들어 버린 일본 때문에 민간인 희생이 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민간인을 동원한 인간 방패 전술을 실제로 쓴 적이 있다. 일본군의 민간인을 동원한 인간 방패 전술에 대해서는 사이판 전투 문서와 오키나와 전투 문서를 참고하자.

덧붙여서, 도쿄 대공습은 이전까지의 '미군이 평가하기에는' 별 효과가 없었던(일본군의 관점에서는 "고고도 폭격기를 격추할 수 없어!"라며 좌절한 전투기 파일럿이 적지 않았다지만) 일반 폭탄을 이용한 고고도 수평 폭격 대신 미군의 공습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냈던 기념비적인(?) 사건이며, 르메이 등이 주장했지만 그 당시까지 지지부진하던 미 공군의 독립과 관련한 논의가 급진전되는 계기가 된다.

8 이후의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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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월 9일의 도쿄 대공습이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피해를 입힌 폭격이라 가장 유명하지만, 폭격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3월 11일 나고야, 13일 오사카, 16일 고베, 19일에는 다시 나고야가 르메이의 3월 1차 공습의 표적이 되어 총 82㎢ 면적이 지도 위에서 불로 지워졌다. 이로써 일본의 주요 공업 도시들이 단 10일 만에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이중에서 3월 13일 ~ 14일에 이뤄진 오사카 공습이 절정이었다. 일본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상공업 거점이었던 오사카를 미군이 놔둘 리 없었고, 274대의 폭격기로 1,700여 톤의 소이탄을 퍼부어 오사카 항구를 포함해 약 20㎢의 시가지를 파괴했다. 이 당시 오사카 성도 완파당했다.[26] 당시 가옥 13만 여 채가 완파되었지만 도쿄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방 방재가 잘 이루어져서 인명피해는 사망자 4,000여명, 행방불명자 500여명으로 도쿄에 비해선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 때 폭탄이 오사카의 육군 병기창에 명중, 대폭발을 일으켜 2,000m 상공을 비행하던 폭격기를 고도 3,600m까지 날려버린(!) 에피소드도 있다. 이후 해당 폭격기는 실속 상태에 빠져 하강했으나 다행히 조종사가 상황을 수습해 600m 고도에서 정상 비행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순식간에 여러 도시에 폭격을 쏟아낸 이유는 일본측이 B-29의 저공 비행에 대한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전에 공업시설을 최대한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어찌나 폭격을 퍼부어댔는지, 약 1주일 후인 3월 19일에 마지막으로 나고야를 폭격한 뒤에는 잠시 폭격을 멈춰야 했다. 장병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쌓여있던 소이탄 물량을 전부 소진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일반적인 정밀 폭격 작전에 쓰인 폭탄의 비율은 대략 고폭탄 60%에 소이탄 40%였다. 이런 폭장 비율과 일반적인 폭격 소티(sortie) 수를 따져보면 당시 르메이가 보유하고 있던 소이탄은 약 2달간 쓸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르메이는 비범한 작전을 실시했고, 소이탄을 더 보급해달라고 르메이가 요청하자 그 많은 양을 다 썼을 리가 없다며 비웃었던 해군도 도쿄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부랴부랴 소이탄을 실어날라다 주었다.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4월에는 잠시 주춤했던 공습은 5월부터 더 큰 규모로 전개되었다. B-29가 이틀에 한 번씩 날아와서 목표물들을 지졌으며 7월 들어서는 사흘에 두번씩 날아왔다. 정부의 피난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노동자, 시민들이 지방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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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24일의 재공습으로 간판만 빼고 홀랑 다 타버린 궁성. 이 때 군, 소방대, 공무원 등 1만 명이 40대의 소방차를 동원하여 주택가가 훨훨 타고 있는 동안 약 4시간동안 진화작업을 벌였으나, 정전(正殿)을 포함해 27동이 홀랑 다 타버렸다. 천황가 삼종신기는 이때 도쿄 궁성에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히로히토는 동경이 폭격을 받던 기간 내내 황실 도서관 지하 방공호에 짱박혀 있던 덕분에 무사했으며, 전쟁 끝날 때까지 계속 거기서 살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 웃기는 미신이 퍼지기도 했다. 무너진 집에서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용케 빠져나온 도쿄의 한 부부는 이 행운을 폐허더미 속에서 시체로 발견된 그들의 금붕어 한쌍이 주인을 위해 대신 죽은 덕분인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이 금붕어들을 가까운 절에 들고 가서 정성껏 매장했는데, 이 소문이 퍼지자 도쿄의 금붕어란 금붕어는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순식간에 다 팔려버렸다. 진짜 금붕어처럼 착색한 가짜 금붕어도 날개돋친 듯 팔릴 정도. 그 와중에 장사하는 상인들의 위엄 물론 효과가 있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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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폭격 사전 경고 삐라. 일본인들은 궐기해서 독재자들을 몰아내라는 내용도 쓰여 있다. 이 삐라를 줍는 자는 징역 3개월형에 처해졌다. 경고문의 자세한 내용은 히로시마의 경고문 항목을 참고하자. 그러나 원자폭탄을 매개로 한 히로시마의 경고문 자체는 도시전설이지만, 공습 대상 도시들의 리스트를 좍 나열해놓고 그 도시들을 골라서 해당 도시 거주민들에게 폭격 경고 삐라를 날린 후, 리스트에 적힌 순서대로 혹은 랜덤으로 폭격한 건 절대 도시전설이 아니다. 자세한 건 일본 본토 공습 문서의 오늘은 여기다. 문단을 참고할 것.

전쟁이 끝나가는 걸 아쉬워하는 듯 7월 10일에는 도합 2,000 대의 폭격기가 동원된, 개전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합동폭격이 결행되었다. 500대 이상의 B-29가 오사카 근교의 와카야마와 사카이, 나고야 근처의 요카이치에 있는 정유소, 나고야 배후의 기후, 도쿄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센다이의 5개 도시를 폭격했다. 함재기 1,000여 대는 도쿄 주변의 비행장을 때렸으며, 300대는 규슈의 비행장을, 나머지 항공기들은 오사카와 나고야를 폭격했다.

그렇게 폭격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파괴할 것조차 없겠다고 여길 정도가 되었다. "폭탄은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도쿄 사람들은 절대 믿지 않았다.

1945년 3월부터 7월까지 4개월간, 미국은 90,000톤에 가까운 폭탄을 일본에 투하했고, 도시 26개, 총면적 330㎢를 초토화했다. 건물 250만 동이 소실되었으며, 산업 생산량은 1944년에 비해 약 40% 수준으로 떨어졌다. 석탄 생산량은 절반, 정유량은 15%, 항공기 엔진은 25%, 총포, 화약은 45%, 알루미늄은 9%로 생산량이 떨어졌다. 그 동안 약 50만명이 폭격으로 죽었고 1,300만 명이 집을 잃었다. 반딧불의 묘의 경우처럼, 옥외생활 및 식량부족으로 인한 사망자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일본 전역이 개박살나는 와중에도 이상할 정도로 폭격을 안 맞는 도시들이 있었는데, 교토, 니가타, 고쿠라 그리고 히로시마나가사키였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군수 공업도시였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멀쩡했던 이유를 사람들은 무척 궁금해했는데[27],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 행운(?)의 도시들은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9 조선에 끼친 영향

도쿄 대공습 같은 대규모 폭격 시, 목조주택이 많은 일본 대도시 특성상 일부 지역의 폭격만으로도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폭격을 당해도 해당 지역만 화재가 일어나고 화재가 도시 전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 내부에 마치 도로처럼 줄 모양으로 특정 지역을 비워놓는 소개지역을 대규모로 만들게 된다. 이는 일본 열도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경성부(京城府) 중심가에도 이러한 지역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곳이 현재 종묘앞에서 퇴계로까지의 남북 구간과 광희동 사거리에서 4호선을 따라 서울역까지의 동서 구간이다.

이 남북 구간은 해방 후 그냥 빈 땅으로 남았다가 집 없는 사람들이 움막을 치고 살거나 노점을 하곤 했는데, 훗날 이 지역을 일제시대 당시 계획대로 화재가 번지지 않게 만든 방재구간으로서 빈 땅으로 둘 것인가 건물을 세워 재개발할 것인가 의견이 맞서다가 결국 두 가지 다 하기로 결정되어 세운상가로 개발된다. 현재의 종로 세운상가에서부터 진양상가가 들어선 곳이다. 동서 구간은 해방 이후 도로포장을 하여 도로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퇴계로다. 일제강점기 당시 태평양전쟁 전의 경성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퇴계로에 해당되는 도로는 없었다. 대신 오늘날 충무로라고 부르는 도로는 있었다. 왕복 6차로인 퇴계로 한 블럭 뒤에 있는 왕복 2차로짜리 도로이다. 이 구역들이 조성될 당시, 일본은 철거지역 건물주에게는 단 한푼의 보상도 없이 정부시책이라고 그냥 내쫒았다고 한다. 뭐 일본군은 보상해줄 작자들이 절대 아니지만...

대공습 당시, 한국인들은 이 처참한 소식을 듣고 우리도 폭격을 당할지 모른다며 걱정하기도 했으나 조금이라도 국제 정세를 아는 사람들은 미국은 절대로 조선은 폭격하지 않는다며 안심시켰다고 한다. 다만, 한국에 대한 공습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어서 함흥, 원산, 부산, 대구 등지에 소규모의 폭격이 있었다. 하지만 도쿄 대공습과 같은 초토화 공습 대신 산업 및 군사시설, 철도역 등에 대한 정밀폭격이 주를 이루었고, 폭격 빈도나 규모도 일본 본토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10 도쿄 대공습에 대한 반응

첫타자로 도쿄가 얻어맞은 탓에 가장 대규모의 피해가 있었고, 덕분에 그 수많은 폭격 중에서도 소이탄 폭격 얘기가 나오면 언제나 도쿄대공습도 같이 거론된다.

10.1 일본

십만 단위의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킨 대규모 공습으로, 당시의 생존자는 그날, 또는 그 3월의 어느 날이라고 부르며 몸서리칠 정도로 매우 끔찍한 사건으로 회상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우익과 만나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함께 일본의 피해자 행세의 구실로 이용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2013년 5월에는 도쿄 대공습이 인도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에둘러서 미국의 '전쟁 범죄'로서 책임론을 제기하며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자세한 것은 이 항목을 참조하자.

피해자 행세가 무엇인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유튜브 동영상.

10.2 미국

수준 이하의 선빵을 맞았던 당시로서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일본에는 민간인 거주지와 군수공장이 뒤섞여 있어서 그 당시의 기술로는 둘을 구분해서 공격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정찰 위성이나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엑스칼리버 포탄 같은 정밀 타격 무기[28]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걸 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둘을 구분해서 군수 공장만 폭격하려고 계속 고고도 정밀 폭격을 주장했던 핸셀 소장(Haywood S. Hansell)은 결국 기술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시간만 보내다가 르메이에게 폭격단 사령관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차라리 이 정밀 폭격이 완벽 성공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르메이는 절대로 핸셀 소장에 대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느니 하는 험담을 하지 않았다. (Kozak, 2009) 핸셀이 강판된 이유는 단순히 정밀 폭격을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전 수행의 효율성이 미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르메이도 취임 초기에는 조직의 최적화를 단행하면서 폭격 소티 수를 2배로 늘렸지만, 그렇게 늘린 소티 수로 똑같은 정밀 폭격을 시도했다.

민간인 피해를 염려해서 공격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미군을 죽일 무기들이 무더기로 생산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미군은 손놓고 봐 줄 수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은 모든 참전국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전쟁에 결집하는 총력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고, 당대의 수많은 폭격 작전에 비추어볼 때 '군수공장이 포함된 도시 파괴'를 전제로 한 도쿄 대공습은 당시의 미군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작전이었다.

또한, 만약 핸셀 식의 정밀 폭격 시도가 계속되다가 너무 시간을 끌었을 경우, 미군은 몰락 작전을 발동해 일본 본토를 침공하여 어느 제독진주만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해군 기지를 보고 했던 말 그대로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물론 몰락 작전이 실행되면 미군 역시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인 수만에서 수십만[29][30]의 장병을 희생해야 했으니, 커티스의 대규모 폭격과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지지부진한 소모전에서 벌어졌을 대규모 희생을 최소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종전 후 르메이는 일본 항공 자위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훈장[31]을 수여받는다.

10.3 중국

중국은 도쿄 대공습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적이 없는데, 중국 또한 일본으로부터 충칭 대공습을 당한 바 있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가 충칭을 임시수도로 정하자 일본은 충칭을 집중 폭격했는데,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명목으로 고의로 민간인 거주지역을 폭격했을 뿐만 아니라 소이탄도 사용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방공호를 찾아가다가 피격 혹은 질식해서 사망했으며, 방공호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1,200명이 질식사한 끔찍한 공격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미군이 자신이 당한 것을 방법까지 똑같이 가해국의 수도에 되갚아준 상황이니, 쌍수를 들고 환영했으면 했지 불편해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충칭에 면한 쓰촨 성 또한 여기저기에 폭격을 당한 기억이 강렬히 남아 있는데다 반일감정이 강한 상황이다.

11 대중매체에서의 묘사

  • 반딧불의 묘 : 애니메이션. 일본을 피해자로 다루었다는 논란과 달리 사실 주인공들이 찌질하게 나온다.
  • 언브로큰 : 영화. 이쪽은 실화를 다루고 있다. 도쿄 대공습날 주인공과 포로들이 수용소 불끄기에 강제동원된다. 이때 '이거 우리가 왜 꺼야 하나? 타버리게 놔두자.'라는 말까지 나온다.
  • 여름의 폭풍! :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과거로 날아가 겪는 주요사건들이 모두 도쿄 대공습과 관련된 것들이다.
  • 하나우쿄 메이드대 : 만화 및 애니메이션인. 최종 보스인 하나우쿄 호쿠사이가 도쿄 대공습의 생존자들 중 하나이다.
  • 하울의 움직이는 성 : 폭격 전 삐라를 날리는 것이나 공습을 받은 도시 묘사로 보나 도쿄 대공습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듯하다.
  • 러브라이브 : SID소설 코우사카 호노카 편에서 "함께 살고 계시는 할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이 주변은 태평양 전쟁때 공습으로 불타지 않은.."라는 말이 나온다. 러브라이브 배경이 도쿄 이고 "태평양 전쟁" 으로 보아 도쿄 대공습을 말하는듯 하다. 호노카 할머니가 도쿄 대공습 생존자 인듯

12 관련 문서

13 참고 자료

  1. 정확히는 본 문서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1945년 3월 9일 ~ 10일에 있었던 'Operation Meetinghouse'의 공습만이 아닌 도쿄를 대상으로 이뤄진 모든 공습을 일컫는 말이다.
  2. 着艦 : 비행기가 항공 모함 갑판에 내려앉음
  3. 유럽 전선에서 커티스 르메이와 함께 한 B-17이 대표적이다.
  4. 離艦 : 비행기가 항공 모함 갑판에서 떠오름
  5. 이 9톤이란 최대 폭장량은 상대적인 것으로, 도쿄 대공습 때처럼 짧고 낮게 날면 연료를 덜 넣어도 되니까 그만큼 폭탄을 더 많이 실을 수 있다. 그리고 도쿄 대공습에서 실제로 투하된 네이팜탄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네이팜의 불길 확산을 위해 같이 싣고 간 25톤 규모의 기름 폭탄때문이었다. 또 B-29의 폭탄창은 하나가 아니라 두개다. 각 폭탄창마다 9톤 이하의 폭탄을 탑재가능하므로 꽉 채우면 18톤이다.
  6. 이전에는 미군 폭격기대, 구체적으로는 제8공군이 독일 공군에 의해 전멸위기까지 몰렸다고 서술되었는데 이는 이만저만한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슈트르가르트 공습이 벌어졌던 달의 소티당 손실률이 5%를 넘어간 경우를 제외하고는 심각한 수준에 도달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고, 폭격기 손실이 심했던 1943년에조차도 제8공군의 가용 폭격기 대수는 오히려 매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이전 글에 언급된 10% 손실률은 소티당 손실률이 아닌 월간 손실률을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7. 그래도 독일은 대전내내 4만기의 연합군 비행기를 독일 본토 항공전에서 격추시켰지만 일본은 도합 100대도 미치지 못한다. 독일만큼 항공전을 벌였다면 일본 본토공습이란 이름대신 일본본토 항공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것이다.
  8. 물론 저 당시 도쿄 방공용으로 저런 기관총만 쓰인건 아니고 대구경 대공포들도 배치되었다.
  9. 이러한 대본영의 정보 조작은 결국 나중에 일본이 항복하고 나서 항복에 반대하는 반란이 터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궁성사건마츠에 소요 사건 참고.
  10. 르메이는 유럽 전선에서 십 수 차례나 선두 기체에 탑승하여 폭격기 대열을 진두지휘한 전력이 있다. 그의 부관은 후방 기체를 맡았다. 폭격기 대열에서 가장 먼저 전투기에게 공격받는 대상이 선두와 후방 기체임을 생각하면 가히 솔선수범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편대기들 줄줄히 떨어져 나갈때도 이 양반이 탑승한 선두기는 왠지 멀쩡했다. 심지어 대공포 직격을 당하고도 살아돌아온적도 있다.
  11. Air Raids on Tokyo, National Geograpghic
  12. 이 당시 일본의 야간 방공 능력이 없는 원인은 없느니만 못한 레이더에 있다. 자세한 건 일본군/무기체계 문서를 보기 바란다.
  13. 때문에 동서고금을 통틀어 방화범에 대한 처벌(사형)이 제일 가혹했던 곳이 에도 막부 시기의 일본이었다. 방화미수범에 대해서도 기본이 화형이었고, 거기에 몇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14. 김태우,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2013, 창비, 51~52쪽
  15. 방화선(防火線)이라고도 한다. firebreak
  16. 네이팜의 불길 확산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신관 설정을 저렇게 한 것이다.
  17. 이 날의 작전 Operation Meetinghouse에 폭격기 총 339대가 참가했고 그 중 282대가 목표 지역 상공에 도달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고, 기록마다 조금씩 숫자가 차이가 난다. 영어 위키백과
  18. 이 사람은 유명한 B-17기인 멤피스 벨의 파일럿이다. 멤피스 벨이 유럽 전선에서 물러난 후 소령으로 진급하여 B-29의 조종간을 잡은 것이다.
  19. 만화 일본침몰 7권에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20. 疏開 : 공습, 재난 등에 대비하여 주민, 시설물 등을 분산시키는 것
  21.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더라도 외계인 침략자들은 일단 닥치고 도시를 때려부수는 것으로 시작한다.
  22. Kozak, W., LeMay: The Life and Wars of General Curtis LeMay, 2009
  23. 현대에도 일본 자위대 기지나 시설 등이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오이타 분둔지, 네리마 주둔지 등이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렇게 자위대 기지가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이유는, 자위대 기지가 먼저 들어서고 그 주변에 민간 거주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런 경우는 제네바 협약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서 딱히 뭐라 못한다.
  24. "... 1944년 즈음에는 일본의 전쟁 경제에서 가내수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부품과 장비의 상당부분은 직원 250명 이하인 소규모 공장에 하청을 맡기는 식으로 조달하였다. 이런 소규모 공장은 도쿄에 밀집되어 도시 전체 공업 생산량의 50% 가량을 차지하였다." United States Stategic Bombing Survey, 1946, p. 87. 표준화와 대량 생산 분야에서 한참 앞서있던 미국 입장에서 250명 규모의 공장은 사실상 가내수공업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25. 職住近接 : 직장과 주거 공간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
  26. 하지만 오사카 성은 이미 19세기에 벼락으로 천수각이 완파되어 193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구된 것이었다. 부서져도 안심(?).
  27. 커티스 르메이 역시 이 도시들을 폭격하지 않는 이유를 따지고 들었을 정도였다. 특히 교토. 교토야말로 최고의 목표인데 대체 왜 못 때리게 하는지 모르겠다며 몇 번이고 육군부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에게 격렬하게 항의했다. 교토가 폭격을 면한 것은 일본의 문화재 보존을 위한 배려가 있었다.
  28.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F-117의 레이저 유도 포탄 등 정밀 타격 무기는 핸셀 소장의 주장을 현대 기술로 구현한 것에 가깝다. 민간인 오폭의 정치적/외교적 악영향이 2차대전 때보다 엄청나게 커진 데 따른 운용 교리의 변화이다. 사실 21세기 들어 최첨단 장비로 정밀 타격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지만 100% 민간인 피해 없는 작전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전세계가 총력전을 펼치던 2차대전 때결코 멈추지 않는 일본 군수공장이라는 급한 불을 꺼야 했으니...
  29. 단 몰락 작전이 예상대로 시행되었다고 (대체 역사) 가정 시 미군의 예상 피해 규모는 학자와 밀덕 둘 사이의 추측이 서로 다르다. 크게는 몇십만명 적게는 몇만명 혹은 그 이하로 잡는 추정치도 있다. 자세한 건 몰락 작전 문서에서 미군 피해 규모 예상 쪽을 참조하자.
  30. 이러한 전략을 취했던 것이 베트남 전쟁이었다. 문서 참조.
  31. 욱일대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