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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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통일'이라는 용어는 크게 2가지 사건을 가리킨다. 양자를 구분할 때는 후자를 '독일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라고 설명한다.

2 1871년 독일통일

2.1 제국의 분열

30년 전쟁을 종결지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제후국들의 주권이 인정되면서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상태가 되었고 그나마도 나폴레옹에 의해 제국이 완전히 해체되고 빈 체제를 거치면서 유럽 중부의 도이치 민족은 여러 개의 군소 국가로 분열되었다. 빈 회의의 논의 결과 35개의 군소 국가와 4개의 자유시를 가진 국가연합 '독일 연방Deutscher Bund'이 탄생한다. 독일 연방은 구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를 바탕으로 하는 국가연합이기는 하였으나, 군대, 경찰, 관세가 모두 회원국의 주권으로 인정되고 있어서 시민과 부르주아 들에게는 매우 불편하였다.

2.2 소독일주의와 대독일주의

지정학상, 독일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지역에는 독일인에 의하여 세습되며, 각각의 체제와 주권을 바탕으로 개별적으로 통치되는 왕국, 대공국, 공국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국가로서 단일한 수반에 의하여 통치되는 독일을 향한 민족주의 사상과 통일을 향한 경향 역시 수면 밑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There is, in political geography, no Germany proper to speak of. There are Kingdoms and Grand Duchies, and Duchies and Principalities, inhabited by Germans, and each separately ruled by an independent sovereign with all the machinery of State. Yet there is a natural undercurrent tending to a national feeling and toward a union of the Germans into one great nation, ruled by one common head as a national unit.)

- 뉴욕 타임스, 1866년 7월 1일자 기사.

이 두 방안을 둘러싼 갑론을박을 놓고 보통 '독일 문제(Deutsche Frage)'라고 부른다.

2.3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통일 논의

1848년에서 1849년에 걸쳐서 열린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는 독일통일이 논의되었다. 국민회의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독일황제로 추대하려 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거부하였다.

2.4 독일 제국의 통일

프로이센 왕국은 1864년 덴마크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영유권을 놓고 전쟁을 하여 덴마크를 격파하고 이 지역을 손에 넣는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1867년 북독일연방(Norddeutscher Bund)을 결성한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며,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선포한다.

3 1990년 독일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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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3일, 베를린 구 제국 의사당(Reichstag) 앞에서 통일을 축하하는 독일 시민들, 또한 45년간 동베를린, 서베를린으로 갈라져 있던 베를린시도 이날을 기점으로 다시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1990년 서독동독으로 갈라져있던 독일이 다시 통일되었다.

3.1 배경

1945년, 지도자를 잘못 뽑았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독일은 서독동독으로 나뉘어졌다. 그 후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라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점차 시장경제민주주의를 도입하여 자유화가 진행되었다. 이 와중에도 독일민주공화국은 강경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는데, 이는 동독 지도부가 동독은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오직 '사회주의'만이 국가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민주화시장경제의 도입은 곧 동독의 정체성을 무너뜨려 서독과 아무 차이가 없는 나라가 되고, 결국 동독을 유지할 이유가 없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 그러나 동독이 아무리 폐쇄를 유지하려 해도 주변의 모든 동유럽 국가들이 자유화되면서 폐쇄를 유지하기가 극히 어렵게 되었다. 물론 북한처럼 아예 나라 전체를 닫아 버리면 모르지만 그건 소련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 불가능했고 동독 지배층도 인민이 죽든 말든 자기들 입장만 신경쓰는 쓰레기 집단은 아니었다.[2][3]

1989년 5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 놓여 있던 철조망을 철거해버렸다. 이 소식을 듣고 동독 주민 1,000여명이 헝가리로 여행을 가서 서독으로 망명하려는 생각을 품고 헝가리로 여행을 떠났다. 사실, 국경이 개방된 상태에서도 원칙적으로 이 국경은 헝가리 여권을 가진 사람만 통과가 허용될 예정이었으므로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어야 했으나 하필이면 당시 헝가리에서도 민주화 운동이 진행중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헝가리 민주 포럼에서는 억지를 써서라도 이들을 월경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오스트리아 측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가구주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이를 지원했으며, 헝가리 내무부는 이 움직임을 저지하기는 커녕 묵인하거나 모르는 척 지원했다. 결국 1,000명의 동독인이 헝가리 정부가 개방한 국경 게이트로, 헝가리 국경경비대의 묵인 아래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버렸다. 심지어 이 때 경비대원들은 못 본 척 하기는 커녕 부모와 떨어져 넘어진 아이를 안아서 데려다 주는 등 대민 지원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물론 아이가 엄마랑 떨어져서 넘어져 있는데 데려다 주는건 현재 시점에서는 인간적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는 냉전 시절이었으므로 이 사진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이 충격을 주고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서 계속 동독 주민들이 서독 대사관, 국경을 넘어 이동하게 된다. 10월 3일, 동독 정부는 급히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폐쇄했지만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70,000여 명이 모이는 집회가 벌어졌고, 호네커는 이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주독 소련군마저 출동하지 않았고 게다가 소련동독군의 유혈 진압까지 막았다.[4] 공산당 내에서도 호네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10월 17일, 호네커는 사퇴를 택하고 18일에는 호네커 파의 에곤 크렌츠가 후임이 되어 일당독재 하의 완만한 개혁 노선을 제시했지만 11월 4일에는 동베를린에서 100만 명이 모이는 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단 어느 정도 개혁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3.2 오보

오보의 현장 기자회견 영상 (1989년 11월 9일자 타게스샤우)

1989년 11월 9일, 크렌츠는 당 중앙위원회에서 "여행 허가에 대한 출국 규제 완화"에 대해서 법령을 발표했다. 이는 출국 규제가 완화된다는 선언이었다. 막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사회주의통일당 대변인 귄터 샤보프스키가 18시부터 이 안에 대해서 기자 회견을 하기로 하고, 크렌츠로부터 서류를 받아서 발표를 하러 갔다.

샤보프스키는 "외국 여행(여행 목적, 친척 등)의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신청할 수 있다. 경찰의 여권, 등록 부서는 모든 출국 비자를 지체없이 발급하도록 지시한다. 국외 이주에 대해서 동서독 국경 혹은 동서 베를린의 모든 검문소를 사용할 수 있다."는 발표를 아주 약간 잘못 읽어서 "동독 국민은 베를린 장벽을 포함하여 모든 국경 출입소에서 출국이 인정된다."고 발표했다. 이 법률은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아직 받지 않았고, 내각에서도 결의되지 않은 시안이었지만. 샤보프스키는 착각으로 이미 결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언론사의 기자가 시행령이 언제부터 발효되는 것인지 질문했을 때, 원래 11월 10일 아침에 발효될 예정이었음에도 서류에 날짜가 명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샤보프스키는 얼떨결에 그만 지체없이(sofort, unverzüglich) 발효된다고 대답해 버렸다.

3.3 장벽으로 몰려오는 시민들

오보 이후 베를린의 모습 (1989년 11월 10일자 타게스샤우)

이 보도와 방송을 본 시민들은 반신반의 하면서도 하나 둘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왔다. 지시를 받지 못한 국경 경비대는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유화 조치가 내려졌다고 해도 일단 방송 보도만 봐도 '비자여권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며, 사실상 이 조치는 그때까지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동독 방송에서는 샤보프스키의 헛소리(…)를 수습하려고 열심히 이 사실을 알렸으나 군중들은 듣지 않았다.

몰려든 군중들은 개방을 요구했고, 국경경비대비자여권을 가져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군중심리 때문인지 방송내용을 완전히 오해한 군중들은 "지금 즉시 국경은 개방되었다."는 방송이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군중들은 수비대의 해명을 듣지 않고 점점 더 공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논리적으로 해명하는 경비대장에게 되려 방송 못 봤냐그 방송이 그런 내용이 아니라니까요며 윽박지르면서 막무가내로 문 열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시간이 갈 수록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까지 우글우글 몰려들어서, 그 숫자가 검문소마다 수천 명씩 나타날 정도로 점점 증가했다. 이미 국경경비대에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밤 10시 무렵, 국경 경비소에 모여드는 주민들이 만 명대에 달하게 되자 각지의 국경 경비소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결국 시민들을 상대로 유혈 진압을 하다가 분노한 시민들에게 죽도록 쳐맞고 몰살당하든가, 지시도 없고 규칙에도 어긋나지만 얌전히 통과시키든가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동독 국경경비대김씨 교단이나 차가놈의 사병들과 달리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통과시키기로 결정하고 조용히 철수했다. 이 때 서베를린으로 몰려가는 주민들이 너무 숫자가 많아서 허가증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1989년 11월 10일 새벽에는 주민들이 망치, 곡괭이, 그 외 중장비를 가져와서 무단으로 베를린 장벽철거하기 시작했다.[5] 베를린 장벽 뿐만 아니라 동서독 국경도 몰려드는 군중의 압력에 견디다 못해 개방되었고, 동독 주민들은 트라반트를 타고 달려와 서독에 도착했으며 서독 주민들은 그들을 환영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샤보프스키의 말실수와 언론의 오보, 군중심리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하룻밤만에 동서독 국경은 시민들의 손에 이미 '파괴'되어 버렸다.

3.4 동독의 해체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작으로 동독 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했다. 동독의 모든 경찰은 기능을 정지했고, 악명높던 슈타지의 지부는 시민들에게 습격되어 파괴당했다. 이런 사태에서도 동독 정부는 손도 쓸 수 없었다. 하루에 약 2,000명의 동독 주민이 서쪽으로 유출되었고, 동독 마르크의 가치는 1/10로 폭락했다. 사회주의 통일당은 조약 공동체에 따른 국가연합을 제창했지만 이미 동독은 자력으로 생존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동독 멸망은 기정사실이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일당제도 완전히 붕괴되었던 참이었다.

국제적으로는 독일을 너무 좋아해서 독일이 2개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던[6](...)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동독이 이미 망한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각국 역시 통일을 반대할 만한 명분이 부족하였고, 서독 측에서도 유화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결국 외교적 타협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주위국가들, 특히 폴란드처럼 통일을 바라지 않던 국가들의 압력에 의해 국경은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인정하고 과거 독일영토 수복을 완전 포기했다. 독일 입장에선 너무나 아까웠겠지만 통일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폴란드 같은 경우 동독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선을 그대로 고수하라고 압박 넣었고, 프랑스, 영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

1990년 3월, 독일민주공화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선거가 시행되었고 첫 자유선거에서 당초에 점진적인 통일을 내세운 사회민주당이 압승할것으로 전망되었지만 선거 막판에 독일연합이 조속한 화폐통합을 통한 동독 경제재건을 내걸며 압승을 거두었고, 이에 따라 통일도 급속한 과정을 걸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동독 지역의 5개주가 부활. 그리고 각 주가 독립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는 방안으로서 통일이 결정되었다. 즉, 법적으로는 '동독'이 '서독'에 통합된 것이 아니라, '동독'은 공중분해되어 멸망, 동독을 구성하던 5개 주가 서독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통합된 것이다. 동독 중앙 정부 조직들은 해체 후 일부 인사들이 독일 정부에 합류하였으며, 동독군국가인민군 역시 해체되고 부사관 이상 간부 인원 36,000여명이 서독군에 합류하였으며 나머지는 퇴역 처분되었다. 이외 외교관도 한 국가에 두개의 공관을 둘 필요가 없었으므로 통일 기준으로 동독의 대사관은 폐쇄되었고, 서독의 대사관이 그 업무를 이어서 하였다.[7]

그리고 마침내 1990년 10월 3일, 정식으로 독일 통일이 선언되었다.

3.5 각국의 반응

3.5.1 영국

1단어로 요약가능하다. NEVER

당시 마가렛 대처가 이끌고 있던 영국은 독일의 재통일에 가장 강경한 반대 의사를 표출한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세력 균형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영국 정부는 '통일 독일'이라는 국가가 등장했을 시 일어나게 될 세력 붕괴를 걱정했다. 독일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에서는 대놓고 '영국은 독일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소련군이 계속해서 동독 영토에 진주할 것을 요청했을 정도. 심지어 1989년 12월 유럽 각국의 정상들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모였을 때 대처는 서독 수상 헬무트 콜이 뻔히 쳐다보고 있음에도 '우리는 지난 대전에서 독일을 2번이나 꺾었다. 이제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라는 엄청난 수위의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 때 대처가 제시한 방안은 통일 기간을 5년 이상으로 잡고 분단 상황을 당분간 유지하자는 것. 2차 대전 직전 독일의 지도를 들고 와 독일이 동프로이센을 요구할 거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상술했듯이 동독이 이미 붕괴에 놓인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 실행되기도 힘들었던 데다가 콜 독일 수상과 겐셔 외무장관이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과 같은 유화적인 정책을 내놓았기에 마지못해 통일을 승인해주었다. 다만 그러고도 못내 못마땅했는지 주영 프랑스 대사에게 '독일의 위협에 영불이 다시 한 번 힘을 합쳐야 한다'라고 하기도 했으며 역사학자와 외교 전문가들에게 '통일 독일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협이 될까'라고 자문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1985년 대처는 '영국은 독일 통일과 관련되어 독일 주민들의 의사를 무조건 지지합니다.'라고 공식석상에서 발언했던 적이 있었단 거다. 5년 사이의 말뒤집기에 대한 대처의 반응은 '그 땐 그렇게 빨리 통일될 줄 몰랐지'였다고(....)...

3.5.2 프랑스

충격과 공포

프랑스 역시 급속한 통일 움직임에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8]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대처와 마찬가지로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설사 불가피하다고 할 지라도, 프랑스는 독일의 재통일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미테랑을 비롯한 프랑스 정부를 크게 걱정시켰던 것은 통일이 독일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을 자극시켜 2차 대전 이후 상실했던 알자스-로렌 등 옛 영토를 되찾으려고 움직일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9] 그렇지만 영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딱히 반대할 근거가 없었던 데다가 독일의 통일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유럽 단일 화폐를 도입[10]시키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서서 금방 찬성으로 돌아선다.

3.5.3 소련

독일의 재통일에 가장 큰 은인[11]

독소전쟁으로 3,000만 명이라는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던 소련이니만큼, 소련 내부에서는 독일의 통일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다. 그렇지만 원체 고르바초프가 독일의 통일을 강력히 지지하는 편이었던지라, '독일이 나토에서 탈퇴하고 중립국 지위를 유지한다면 통일을 인정하겠다'라는 입장을 보인다. 문제는 정치백단 헬무트 콜의 꼼수에 의해 독일이 통일은 통일대로 이루고 나토 탈퇴는 하지 않았다는 거지 한편 훗날 헬무트 콜 독일 수상은 '10조 마르크를 지불해서라도 소련을 구워삶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쇼미더머니

3.5.4 미국

미국, 그리고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은 독일이 민주주의로의 긴 전환기를 거쳤음을 인지했다. 독일은 훌륭한 우방이었고, 나토의 구성원이었다. 1945년의 시점에서 존재했던 각종 문제들은 이제 잊어버려도 충분히 괜찮을 것으로 보였다. 미국에게 '독일이 통일되어야만 하는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통일이 진행되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새로 부상하는 독일과 관련한 걱정은 없었다.(The United States – and President George H. W. Bush – recognized that Germany had gone through a long democratic transition. It had been a good friend, it was a member of NATO. Any issues that had existed in 1945, it seemed perfectly reasonable to lay them to rest. For us, the question wasn't should Germany unify? It was how and under what circumstances? We had no concern about a resurgent Germany) - 콘돌리자 라이스의 독일 통일 시기에 관한 회상.

독일과 인접한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먼 나라인데다 자기들의 힘으로 독일을 내리찍었던 경험덕에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고, 독일의 재통일을 흔쾌히 승인한다. 미국이 내건 조건은 단 하나, '통일 독일이 나토에 잔류할 것'이었다. 나토에 잔류하는 것은 헬무트 콜 독일 수상 역시 개인적으로 원하던 바[12]. 콜은 통일 독일이 나토에서 탈퇴할 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왕따시킬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국은 전승국 4개국 중 가장 빠르게 독일의 통일을 승인했다.

3.5.5 기타 유럽 국가들

몇몇 유럽 국가들의 경우 통일 독일이 유럽 단일 화폐 및 유럽 시장 통합에 기여하여 자국의 경제 발전에도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환영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떨떠름하면서도 냉담(Eisig)에이씨 히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탈리아의 경우 같은 추축국이었으면서도 독일의 통일이 범게르만주의를 부흥시켜 쥐트티롤의 독립운동을 자극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으며, 네덜란드의 경우 당시 총리였던 뤼트 뤼버르스가 나서서 '전쟁 일으켰다가 분단된 주제에 무슨 근거로 민족자결주의로 재통일을 결정하겠다는거냐'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그 외에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그리스등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이야 당연히 제2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 생생했던 탓에 독일의 통일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대다수였다.앵?그리스는 남유럽 아님?[13] 그러나 독일이 통일 되자 독일의 통일에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네덜란드와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기존에 통일에 반대하던 목소리에서 통일을 축하하나 제1,2차 세계 대전의 쓰라렸던 과거를 잊지 않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여 독일의 통일을 승인했다.근데 네덜란드와 동유럽권 상당수 나라들도 독일 통일은 인정하면서 독일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결사반대하는게 함정.

3.5.6 남북한

이후에도 여전히 남북분단을 걸어가는 대한민국은 독일 통일에 대해서 비중있게 보게 되었으며 독일 통일의 사례를 들어 남북통일에 대한 노력을 이루고자 하고 있는 중이다. 반면 북한은 이 통일을 빌미로 남한과 미국이 북침(北侵)하여 흡수통일을 이룰 가능성이 있다며 다소 공포적인 입장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김일성의 체제하에 결속을 다짐하였던 편이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독일 통일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지않도록 단속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3.6 평가

사실 서독은 이 시점에 통일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갖고 있는 고민을 서독이 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장 동독 정권 보전 및 장기간 분리를 통한 발전 이후의 점진적 통일 같은 건 서독이 이미 구상했던 것들이다. 그 때문에 동독 정부와의 관계를 적당히 유지하고 유화책을 펴는 한편 동독 정부가 자국 내 반대 세력의 서독 이주를 강요하는 것도 받아줬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결국 급속통일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 소련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의 권력이 1990년대 초에 오면서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1970년대에 이뤄졌어야 할 개혁을 1980년대 중반부터 이루었던데다 때 마침 석유 값도 거의 반값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재정적 여유가 없었던 상황에서 튼튼한 지지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개혁을 급격히 추진한 결과 나라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기 때문인데 이 상황에서 소련이 갑자기 해체될 경우 독일은 통일 과정에서 독립구성국들과 일일이 협상을 하는 신세가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소련은 독일이 통일된 뒤 불과 1년이 지나고 나서 바로 붕괴되었다.
  • 동독 정부의 강력한 요구. 물론 거절할 수도 있긴 했지만 동독에게는 통일이 좌절될 경우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자립 및 개방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게다가 동독은 소련보다도 국민소득이 앞설 만큼 발전한 국가로써 당장은 국민소득이 하향된다 쳐도 외부 투자를 대규모로 유치하는 방법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데다,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이 통일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확실하게 지지하고 있었던 건 미국 뿐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 서독이 통일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서독인들에게 있어 통일은 한 나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제로 국민적인 합의가 이미 끝난 사안이었으므로 결론은 통일이었다.

4 여담

"독일민족의 통합국가화"라는 관점에서 독일통일을 정의하자면, 나치 독일오스트리아 병합과(오스트란트 주가 되었다) 룩셈부르크 합병도(역시 독일 영토가 된다) 이에 포함될 수 있다. 게다가, 더 범위를 넓혀보면 스위스쥐트티롤 역시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실제로 2차 대전 직전에는 스위스에서도 독일로 통합하자는 움직임이 적지 않았다. 스위스독일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이기 때문. 리히텐슈타인 역시 독일계가 주류인 국가다.

따라서 광신적인 독일민족주의를 기준으로 하자면 독일은 사실 2개의 국가가 아니라 6개의 국가로 분할된 것이다. 서독동독 만이 아니라 최소한 오스트리아룩셈부르크, 리히텐슈타인, 스위스, 쥐트티롤도 '독일민족국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에는 나치흑역사이기 때문에 나치 독일을 대체한[14] 독일연방공화국과의 통합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다. 당장 오스트리아독일과의 통일을 헌법으로 금지한 상태. 룩셈부르크2차 대전 중에 독일에 강제로 합병당하고 문화적 조교를 당했던 기억[15] 때문에 자신들의 독일 정체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1. 폴란드는 망해도 폴란드로 남아있겠지만, 동독은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사실 개방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중국이 순조롭게 개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설득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동독에게는 진영은 서로 다르다 해도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 서독이라는 동족 국가가 있었던 것이다.
  2. 당장 호네커도 구 서독(자를란트 주 노인키르헨) 태생이었고 나치 정권이 붕괴된 이후엔 계속 동독에서 살았지만 그의 여동생은 여전히 자를란트에서 살았다. 즉, 이산가족.
  3. 사실 그 덕택에 통일 이후 적극적인 청산 대상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통독 정치권에 다시 진출하기까지 했다
  4. 국가인민군은 진압준비를 해놓긴 했으나 초급장교병사들은 진압에 회의적이었으며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공격할 수 없다는 인식이 만연했다. 당시 장성 중 1명은 이미 국가인민군 내에선 그런 분위기 속에 무력진압을 강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고 증언하였다. 호네커가 강행했다면 동독군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미스테리.
  5.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독일 유학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서베를린 동독 난민 수용소 수위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베를린 시민들이 난민 수용소에 갇힌 가족들을 보러 오느라 몰려들어 김정운 교수는 이들을 저지하고 수용소 열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치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6. 드골이 2차 대전 말. 전후 독일 문제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잘못 알려졌지만 사실은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 모비아크가 한 말이다. 어쨌든 독일 통일을 하지 않았으면 하고 비꼬는 것.
  7. 그런 이유로 동독의 외교관들은 통일 이후 거의 다 짤렸다.
  8. 1989년 10월 동독 전역에서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열리던 와중에도 프랑스 당국은 '독일 통일은 당분간 요원할 것이다.'라고 자체 결론을 내놓고 있었다.
  9. 결국 알자스-로렌도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통일을 인정받는 대가로 포기했다.
  10. 반면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의 경우 유럽 단일 화폐에 대해 단호한 거부 입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이 이런 걸로 대처를 꼬시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영국은 지금까지도 파운드 스털링파운드 화를 쓰지 심지어 유럽연합탈퇴하려고 시도까지 그리고 성공했다!
  11. 아닌게 아니라 영불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소련까지 태클을 걸었다면 독일 통일은 언젠가 이루어지기는 했더라도 그리 급속히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쿨하게 독일 통일을 승인하면서 통일은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게 된다.
  12. '개인적으로'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시기 각종 여론 조사에서 30% 미만의 독일 국민들이 통일 이후 독일이 나토에 잔류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13. 그리스의 경우 대부분 남유럽으로 분류되지만 지리적으로 유럽 동남부에 위치해 있어 사실상 동유럽 국가로 보는 경우도 있다.
  14. 사실 나치의 정신 나간 가치관만 빼고 그대로 계승했다고 볼 소지도 있다. 고위급 인사들은 아니지만 실무자들 중에는 홀로코스트 등의 반인륜 범죄에 가담하거나 침략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나치 출신도 꽤 됐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다수의 독일 기업들이 전범 혐의와 나치 부역 전적이 있고, 독일 연방군의 경우 창설 당시부터 말단부터 고위급 인사까지 전범 혐의 혹은 전적이 있는 많은 수의 독일 국방군 인사들과 심지어 일부 슈츠슈타펠 출신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어서 더더욱 그렇다.
  15. 룩셈부르크프랑스어도 많이 쓰는데 나치 독일프랑스어의 사용과 프랑스식 이름을 금지하고 룩셈부르크인들을 강제로 징병해서 전쟁터로 끌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