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방송

htm_2007102606241920002010-002.JPG
언론통폐합 직후 쓸모없어진 깃발을 내리는 모습. JTBC가 개국할 때 깃발을 올리는 것에 큰 의미를 둔 게 이것 때문이다.

1980년 11월 30일 동양라디오 방송종료멘트와 사가[1]

"온 국민에게 보다 잘 살 수 있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주고 그를 위해서 스스로 땀흘려 일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일깨우며, 이 나라에 모든 개인과 가정과 촌락 그리고 국가사회 구석구석에 맑게 샘솟는 도의심이 충만하도록 하자"

- 1964년 개국 당시 슬로건

"우리는 전진합니다. 우리는 창조합니다. 우리는 듣고, 우리는 보고, 우리는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증언할 것입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괴로움을 넘어서는 즐거움을, 역경을 극복하는 맑은 웃음의 원천을 마련하고, 우리는 자유의 화신, 우리는 평화의 역군임을 선언합니다."

- 1964년 개국방송 당시 멘트 중

"이제 비록 저희들은 TBC 브라운관을 떠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과 항상 영원히 같이 있겠습니다."

- 1980년 11월 30일 고별 프로그램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중 강부자의 작별인사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부호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는 육백 삼십 구 킬로헤르츠(639 KHz)… HLKC… (울먹이며) 동양방송입니다…"

- 1980년 11월 30일 '밤을 잊은 그대에게' 중 황인용 아나운서의 멘트듣기

TBC는 영원하리!

- 1980년 11월 30일 마지막 종파자막

1 개요

과거 대한민국의 민영 방송사. 약칭은 TBC(Tongyang Broadcast Company[2]).

1964년 개국부터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넘어갈 때까지 국내 방송계를 주름잡았던 대형 방송사였다. 텔레비전 방송은 서울과 수도권, 부산 및 일부 동남권이 주 시청권역이었으며, 라디오 방송은 제휴를 맺은 지역 민방들을 통해 호남 및 대구·경북 지역에 일부 방송을 송출했었다.

의외로 전국구가 아닌 방송국이었다. 이는 당시 TBC의 논조가 당시 방송 3사중에서 비교적 정부 비판적인 논조를 띄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게 수시로 밉보였기 때문인 것하고 연관이 있다.[3] 덕택에 전국단위로 방송송출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퇴짜만 맞았고, 언론통폐합 이후가 되어서야 KBS 2TV의 전국방송이 시작되었다.KBS 2FM도 제발 전국방송 좀 해 주세요 네? 그래서 MBC가 5.16 장학회와 경향신문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말미암아 전국방송화가 신속하게 진행된 것에 비해, 동양방송은 방송사가 KBS로 흡수될때까지 전국구로 방송을 송출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당시 DBS 동아방송에서도 서울 이외 지역에서의 송출 및 TV방송을 할려고 했지만 당대에는 동아일보가 야당지였기 때문에 퇴짜만 맞았다는 후문도 있다.

중앙일보와 같이 삼성그룹 계열사였다. 그래서인지 당시 라디오 시보 협찬사가 다 삼성그룹 계열사의 광고였다.

광고(여자) :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이 미 국무성 문화 사절단으로 5월 11일, 13일 국립극장에서 역사적인 내한 공연을 갖습니다. 모던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세기의 안무가 알윈 니콜라이가 이끄는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은 빛과 율동의 환상적인 종합 예술로 벌써부터 국내 무용계에 큰 화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의 관람권(?)[4]은 본사 문화사업부, 시내 각 예매처에서 절찬 예매중입니다.[5]

시보멘트(여자) : 89.1MHz, 즐거움과 안식의 샘, 동양FM 방송입니다. HLKC FM.
시보광고 : 이코노 이코노 이코노~ 텔레비전은 이코노![6]
시보멘트 : 삼성전자 제공시보, 다섯 시를 알려드립니다.(시보음~♪)
방송멘트 : (오프닝 음악) 학생들의 노래 경연 학생 콩쿨...

1976년 방송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FM 라디오 시보. 삼성전자 또는 삼성시계[7]가 주로 시보 스폰서를 맡는 형식이었다. 만약 지금까지 방송되었으면 갤럭시 S 시리즈, 갤럭시 노트 시리즈 등의 광고가 나왔을 것이다.

2 역사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이 뭔가 국가에 기여를 하고 싶은데 정치를 한번 해 보려고 했지만 이건 좀 아니다는 판단을 하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선택한 게 언론사업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중앙일보와 TBC라고. 참고로 럭키금성도 TBC 경영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사업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사업에서 철수했다고 한다.

2.1 개국

RSB 라디오서울로 개국하였으며, 1964년 5월 9일 정오부터 전파를 내보냈다.[8] 이후 1964년 12월 7일 DTV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으며[9], 1965년 8월 3일에는 방송국의 이름을 JBS로 바꾸고 1965년 12월 7일 중앙일보와 함께 중앙매스컴센터(현재 중앙일보 사옥)로 입주한다. 하지만, 사세가 커지고 삼성의 투자가 계속 되면서 각자 독립해 있던 라디오 방송과 텔레비젼 방송이 합병, 1966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TBC 동양방송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10] 이후 서울FM을 인수, 1966년 8월 15일에는 동양 FM을 개국하며 FM 라디오 방송 시대를 열었다.[11]

본디 개국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방송이다. 개국은 위에 서술한대로 1964년이었지만, RSB 라디오 서울을 운영하기 위해 서울방송주식회사어?를 1963년 6월 25일 인천시 남구 용현동 287번지[12]에서 라디오 방송을 개국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무선국 설치 가허가[13]를 받은 김규환[14]이 이재형을 회장으로, 삼성그룹이병철과 럭키금성의 구인회 그리고 조병학을 이사로 추대하여 세웠다. 설립 이후 1963년 7월 18일 서울 중구 동자동에 준비사무실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개국 작업에 착수했는데, 방송기재 도입을 위한 외화를 배정받지 못해 개국 준비가 수월치 못했다고 한다. 겨우겨우 인천국제복음주의 방송국[15]에서 쓰던 중고 송신기를 3만달러에 인수해 직접 수리해서 쓴다. 당시 일하셨던 분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기자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밤을 새워가며 정비하고 시험해 보는 것으로 바쁘게 움직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역부족이었는지 결국 방송을 위한 기기들을 직접 생산해 사용하기로 하고, 가허가 기간도 1964년 8월 31일까지 연장한다.

이후, 1963년 12월 24일 경기도 시흥군 서면 철산리 37번지[16]에 송신소를 완공하고 나흘 뒤인 12월 28일 시험전파를 발사했는데, 이는 최초 가허가 만료일 3일 전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또 발생한다. 본디 가허가는 출력이 10kW였으나, 송신출력이 20kW인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사옥을 1964년 1월 6일 서울 태평로1가의 동양화재 사옥[17]으로 이전하고[18], 체신부에 출력변경 및 호출부호 변경을 신청한다. 이것에 대하여 허가가 떨어진 것이 동년 3월 12일이었다.[19] 이후 시험방송을 시작했으나,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1380kHz의 RSB 라디오서울 송신탑과 1230KHz의 DBS 동아방송의 송신탑 사이의 직선거리가 고작 700m밖에 되지 않아 혼신이 많이 생겨 방송이 잡음때문에 거의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20] 이러한 문제로 인해 개국 후 1964년 6월 9일 주파수를 640kHz로 바꾸게 된다.

2.2 60년대, 듣보잡 방송국

당시 사회 분위기 상으로 기업이 방송국을 개국하는 것은 사회발전에 일조하는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동양방송과 함께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한 중앙일보보다는 비판적인 논조에서는 벗어나 있었다.[21] 개국 초기에는 연극대본을 중심으로 한 단막극이나 외화를 중점적으로 방송해 방송시간을 때우기도 하였다. 자체제작하는 프로그램의 편성을 늘리기에는 개국 초기라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탄한 자본력으로 곧 안정을 찾아가며 동양방송 사상 전무후무한 흑역사를 하나 찍게된다. 바로, 사카린 밀수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삼성은 엄청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이러한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이 힘을 합쳐 창업주 구하기에 온 힘을 쏟은 것. 다른 언론사들은 모두 삼성을 비판하고 사건의 진상을 보도하기 바쁜데 유독 중앙일보와 동양방송만 쉴드 보도를 했기 때문. 이 때문에 한 동안 보도부문에서는 동아방송 등에 크게 밀리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22]

그나마, 개국 초기부터 열정을 쏟던 '쇼쇼쇼'등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과 연속극 등은 갓 태어난 듣보잡 방송국에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후발주자였던 MBC에서 대형 쇼 기획[23]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면, 동양방송은 '쇼쇼쇼'를 필두로 도회적인 느낌의 쇼 프로그램과 다양한 형식의 공개방송을 진행함으로써 시청률 잡기의 각축을 벌였다.

2.3 70년대, 방송왕국 TBC

1970년에 들어서자마자 드라마 '아씨'가 시청률 70%라는 초대박을 친다. '아씨'는 우리나라 최초로 100회를 넘긴 연속극이자, 최초로 에필로그 방송[24]을 한 기록도 있다. 당시 인기가 어느정도였냐면 '아씨'가 방송될 때 물을 꼭 잠그고, 문단속과 불단속을 잘 하라는 경고방송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씨'를 계기로 동양방송의 드라마는 연속극과 시리즈 사극으로 연결되는 드라마왕국이 되었으며, 체계적인 전속배우 관리로 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그러나, 비난도 많았다. 드라마들의 인기는 좋았으나, '매일연속극', '수요연속극', '주말연속극' 등 드라마에 평일 몇 시간 안되는 방송에 대부분을 할애하다시피 한 편성에 지금의 아침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막장드라마의 원조들을 많이 배출하면서 언론들의 비난을 엄청 받기도 했다. 중간중간 광고를 한 것은 당연한 일.

또한, '쇼쇼쇼'를 기반으로 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선 끊임없이 신인가수들이 배출되었다. 조영남이 TV데뷔 무대로 옷을 벗고(!!) 누워서 노래를 불렀다고 늘 이야기 하는 무대가 바로 '쇼쇼쇼'의 무대다. 남진이 제대 후 복귀무대를 가진 곳도 '쇼쇼쇼'였다.[25]

뉴스에서도 'TBC석간'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앵커'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사 프로그램 '봉두완의 동서남북'[26]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타 방송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중앙일보와의 보도연계는 물론, 70년대 초반 서해방송, 전일방송 등 지역방송과의 협동관계가 자리잡으면서 나타난 시너지가 보도부문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더불어, TV방송을 하고 있던 방송국 중에서 정부의 목소리만 대변하던 KBS뉴스의 딱딱한 진행[27]과 아직 개국 초기여서 보도부문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MBC와 달리 동양방송은 현재 우리가 보는 형태의 뉴스를 일찌기 시작해 타 방송국보다 세련된 보도방송을 진행했다.

다만, 개그 프로그램은 동양방송이 휘어잡지 못했는데 이유는 MBC웃으면 복이와요 때문이었다. 구봉서, 배삼룡을 비롯하여 60년대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들과 연출진들이 대거 포진해 있던 MBC에 맥을 못췄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옷지 못할 해프닝흑역사 넘버투을 만들기도 하는데, 바로 1973년 12월 일어났던 '배삼룡 납치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MBC의 대우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던[28] 배삼룡에게 동양방송이 웃으면 복이와요의 연출진과 더불어 배삼룡을 영입하고자 무려 백지수표를 제시한 상태였고, 이를 막기위해 MBC의 직원들이 당시 배삼룡이 진행하던 동아방송의 공개방송남의 방송국에서 녹음현장에서 난투극을 벌이며 배삼룡을 서로 납치하려 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배삼룡은 '웃으면 복이와요'에 3주 정도 출연을 하지 않았지만, MBC에 잔류하였다.[29] 동양방송은 그야말로 흑역사를 새로이 써버린 사건이었다. 이후 서영춘이 영입되어 '고전유모어극장'이 만들어지는 1976년까지 동양방송에는 제대로 된 코미디 프로그램이 없었다.

위에 상기한 여러가지 인기프로그램또는 흑역사 때문일까? 70년대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동양방송을 빼고서는 방송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동양방송의 판이 되어버렸다.

2.4 주요 편성 프로그램

지금의 SBS마냥 주로 쇼·연예 등 예능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시청률은 거의 그쪽으로 몰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채널이 1개 뿐이었고 관변보도와 교양, 시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던 KBS와 후발주자 격인 MBC를 누르고 시청률 1위를 달렸던 방송사였다. 이런 점들과 함께 화질도 방송 3사 가운데 가장 우월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화질을 비교하면 TBC > MBC >>> 넘사벽 >>> KBS 순이었는데 이런 화질 차이는 방송 통폐합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지다가 컬러 방송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방송국 간의 차이가 줄어들었다.

물론 덕분에 타 신문사들에게 이 당시부터 내려온 전통성 있는 소재 막장 드라마(혼외정사, 통속적 애정행각, 고증오류 등), 중복편성 등의 시비거리로 신나게 까이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도 시청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금보다 성 관념이 훨씬 엄격했던 시절인 만큼 막장도는 지금보다 훨씬 덜하긴 하지만) 연속극에 자극적인 장면을 넣거나 일일연속극을 매일 3회씩 편성했으며, 중간광고가 폐지된 다음부턴 1시간짜리 주간극을 광고수입(토막광고, 자막광고)의 감소를 막기 위해 두 번에 나누어서(...) 편성하는 꼼수도 벌였다.[30][31]

하지만 경쟁사인 MBC도 딱히 다를 바는 없었고, 심지어 광고가 폐지된 KBS에서도 이런 식의 편성을 하기도 했다(…).[32] 물론 이면에는 광고쟁탈전이 숨어있었다는건 공공연한 비밀. 어쨋거나 정부에서도 공익성 강화를 명목으로 1973년에 (스포츠 중계, 문화예술 실황프로그램을 제외한) 중간광고가 금지되었고 1978년에 프로그램 광고 편성비율을 기존 10%에서 8%로 줄이기도 했다.[33]

관영방송의 성격상 유연성이 떨어지는 KBS와 후발민방으로서 자금력이 다소 떨어졌던 MBC와 달리 자금력이 탄탄했고 정부의 통제[34][35]에서 상당히 자유로웠던 TBC가 프로그램의 질, 실험성 면에서 타 방송사를 압도했기 때문에 시청률이 높았던 것이다.

드라마에선 70년대 초반부터 '아씨' 같은 히트작을 터뜨려 주도권을 잡고, 70년대 중반엔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와 남자배우 노주현, 한진희 등을 내세워 타 방송사를 압도했다. 이순재, 이낙훈,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같은 든든한 연기파들이 뒤를 받쳤고, 당시 동양방송 이사로 근무했던 이건희 회장은 특히 조연배우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어 이들을 방송사의 기둥으로 만들어두는 것이 드라마 제작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전투(Combat), 도망자, 600만불의 사나이, 뿌리, 원더우먼, 헐크 등 화제의 외화들(지금으로 말하면 미드)도 TBC를 통해 방영되었다. 배한성, 양지운 같은 성우들이 TBC를 통해 스타성우가 되었다.

보도에서도 인기 앵커맨 봉두완 등을 앞세워 관영방송인 KBS와 MBC를 눌렀다. TBC 석간이라는 9시 메인뉴스가 방송3사 중에서 시청률 1위를 달렸었다.

오락프로그램의 대명사 격이었던 쇼쇼쇼도 TBC의 간판이었다. 동양방송이 텔레비젼 방송을 시작하면서 역사를 같이 한 한국 쇼 프로그램의 파이오니어로서, 초대 MC 후라이보이 곽규석[36]을 시작으로 마지막 3대 MC 허참-정소녀까지 거의 20여 년간[37] 장수했던 프로그램이었다.

스포츠 중계에서도 대한민국 최초로 해외경기 위성 중계[38]를 하거나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를 녹화중계하거나, 프로레슬링 중계를 통해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켰다거나 고교야구 중계를 통해 고교야구 붐을 일으키는 등 선구적인 노력을 많이 했고 나중에 KBS의 간판 스포츠 캐스터가 되는 아나운서들 중에서는 TBC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유수호 아나운서.

황금박쥐[39], 짱가, 그레이트 마징가, 그렌다이저, 독수리 오형제, 딱따구리 등 화제의 애니메이션도 TBC의 전파를 탔다. 안타까운 것은 1980년 건담의 국내방송을 추진 중이었다는 것!!![40] 다만 이런 애니메이션은 당연하지만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작품이었다.[41] 사실 동양방송에서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자 한일합작으로 황금박쥐를 제작한 경험과 자본을 바탕으로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을 계획했는데 수지타산이 안 맞아 접어야 했다(…). 사실 국산 TV 애니메이션은 1987년이 되어서야 방영되기 시작했고, 그것도 수지타산이 안맞는지[42][43][44] 2000년대 초반까지도 대다수 애니메이션이 미국이나 일본 수입작이었다. 사실 딱히 한국 뿐 아니라 전세계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물론 국산 애니메이션을 1987년에야 제작했다는 점에서 KBS를 까야하는건 맞다. 당대에도 시청료 2500원 받아먹고 1TV도 광고를 실컷 했었을 때인 점이란 걸 생각하면 더더욱

또한, 일본NTV와 제휴관계를 맺어 위에 서술된 황금박쥐 이외에도 NTV 및 계열방송국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들여와 방송하기도 했으며, 1972년에는 당시 NTV의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던 '스타 탄생(スター誕生!)'[45]의 첫 해외 녹화방송을 동양방송에서 공개녹화로 촬영해 방송하기도 했다.#[46]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신문사인 중앙일보와 방송사인 TBC를 합친 언론사업을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보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계열사인 제일제당의 식료품[47], 삼성물산제일모직의 의류, 신세계백화점, 삼성전자, 동방생명 등의 광고를 계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에서 만들어서 중앙일보와 TBC를 통해 내보내고, 중앙일보와 TBC는 안정적인 광고수입을 얻는다는 식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삼성의 언론사업은 순항했다.

2.5 언론통폐합과 폐국의 비극

통폐합 직전 70년대 말은 그야말로 동양방송 천하였다. '여배우 트로이카'를 앞세운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을 필두로 그야말로 대한민국 방송계를 다 해드셨던 방송국이 바로 동양방송이었다.
이미, 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컬러TV방송을 준비해 오던 동양방송은 컬러TV방송용 기자재 도입은 물론 실제로 쇼쇼쇼에 컬러필름을 투입, 촬영하여 방송하기도 했다.[48]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1980년 7월 서울에서 열렸던 미스 유니버스대회의 모든 행사를 미국 CBS와 함께 실황중계를 KBS 대신 진행하게 된다.[49]
또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방송 스튜디오를 한 곳으로 모으고, 드라마 및 쇼 프로그램을 더욱 수월하게 제작하기 위해 당시로써는 동양 최대 규모였던 여의도 신사옥을 1979년 말 준공하여 1980년 7월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50] 동양방송에서 자체적으로 1979년 11월부터 1년 주기로 'TBC 세계가요제' 를 열었다. 1979년 11월 1회, 1980년 11월 2회까지 개최된 불운의 가요제였지만 참가국과 가수는 수준급으로 당시 대한민국 내 단일방송사가 제작하여 개최한 가요제 중에서는 단연 탑이었다. 1979년 1회 그랑프리는 일본의 여가수 오오하시 준코로 현재 기록에 남아있는 내한 일본가수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을 가진 가수일 것이다. 1980년 2회 그랑프리는 모잠비크의 슈디가 'Ecstacy'[51]라는 곡으로 두번째이자 마지막 그랑프리를 차지한다. 참고로, 그랑프리를 차지한 슈디의 친척이 당시 모잠비크 전 대통령이라 대회가 끝나고 동양방송에 축전을 보냈는데, 대회가 끝난 후 열흘 뒤에 통폐합쥐쥐이 되어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는 말이 있다.[52][53]

이처럼 주요한 이벤트와 뚜렷한 성장이 70년대 말 가속화 되어[54] 1979년폐국 1년전 극에 달하는데,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에게 1979년은 참 각별한 해였을 지도 모른다.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이 창립된 지 15년이 되던 해여서, 두 언론매체가 같이 북극탐험이나 아프리카 오지탐험 같은 해외 다큐멘터리도 제작했었고, 동양방송은 새 건물을 지었고 해외 네트워크를 강화하던 한해였다.[55] 또한, 1980년 단행될 컬러TV방송도 착실히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56] 당시 사회 분위기가 1980년대에 대한 기대감이 무르익던 시기여서 그랬을 지 모르지만, 이 때 동양방송은 말 그대로 '정점'을 찍고 있었으나 '세계가요제', 컬러TV방송, 여의도 신사옥 모두 아래 서술될 언론통폐합에 의해 한 순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1980년 11월 전격 시행된 언론통폐합에 의해 동양방송이 KBS로 흡수통합되면서 17년동안 한국 방송계 정상위에 있던 멀쩡한 방송국이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당시 분위기를 짐작해 볼 만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는데, 고별방송 녹화 때 출연진, 연출진 할 것 없이 많이 울었다고 한다. 고별방송이었던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57]에서 여성 무용단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출 때 흥겨운 분위기와는 달리 관객과 출연자들의 얼굴은 완전 굳어 있는데 동양방송의 고별방송이 있기 며칠 전, 보도방송 중지를 당한 기독교방송의 마지막 뉴스를 진행하던 여자 아나운서가 울면서 방송한 게 신군부에게 찍혀서 '절대 울지 말라'는 신군부의 압박이 있었던 것.[58] 당시 현장에 있던 제작진과 출연진들도 '울지 말고 웃지도 말고 NG 내지 말고 녹화합시다.'라고 말하며 서로 다독여가며 녹화에 들어갔지만, 그래도 눈물은 멈출 수 없었으니... TBC 고별방송에서 맨 처음으로 노래를 부른 가수 이은하가 울면서 노래를 부르는 게 그대로 방송되었고, 이것이 신군부에게 찍혀 3개월 방송 출연금지를 당한 적이 있다.[59] 당시 이 프로그램을 연출했던 연출자의 증언에 따르면, 녹화가 끝난 뒤 테이프를 보안사령부에서 테이프를 압수하겠다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지인의 집으로 테이프를 들고 가 숙박한 뒤 방송 직전 주조정실에 넘겼다고코렁탕 먹으려고 작정을 했군!한다.[60][61]

또한, 녹화 현장에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방문하여 연기자들을 위로하였는데, 연기자들이 훌쩍훌쩍 울고 있는걸 보고는 '이렇게 울면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고 말하며 안타까워 했다는 일화도 있다[62]

한편, 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허참정소녀는 다음날 12월 1일[63] 저녁 7시 40분부터 방송되었던 KBS2 'KBS 새가족'이라는 방송의 진행자로 나서야 했다. 허참의 인터뷰에 따르면, 전날까지 잘 있던 자신의 직장이 한순간에 사라져 너무 허탈하고 마음이 아픈데, 그 다음날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축가를 부르며 진행했다고 회상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이후에 동양방송이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과 후대에 보여주기 위해 컬러로 제작어찌보면 선견지명하였으며, 해당 프로그램의 오프닝부터 약 15분가량 되는 분량의 영상이 온라인(유튜브)에 올라와 있었으며 지금은 JTBC가 저작권으로 막아 놓아서 볼 수 없지만 # 다음tv팟에서 볼 수 있다.제공 자막에 보이는 뼝뼝스토아[64]

파일:EvGR8R5.jpg

고별방송인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를 끝으로 'TBC는 영원하리'라는 종파자막을 띄우며 TV 방송을 마감했다.

TV에 비해 가려진 게 없지 않아 있지만, 동양라디오 진행자들도 정말 안타까운 상황에서 고별방송을 맞이했다. 이날 동양라디오에서 내보낸 마지막 뉴스 프로그램이었던 '뉴스 기상도'의 맹관영 아나운서가 중간에 울먹거리며 진행하는가 하면, '밤을 잊은 그대에게'[65]의 DJ였던 황인용 아나운서의 애절한 최후의 콜은 인구에 회자가 될 정도였다.[66]

참고로 이건희 회장도 동양방송을 통해 입사했다. 상술했듯이 언론사업을 그룹의 주력사업 중 하나로 본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TBC와 중앙일보, 이밖에도 삼성에버랜드의 전신이었던 동화부동산과 삼성생명의 전신이었던 동방생명보험을 맡길 계획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혹자는 전두환의 언론통폐합 덕분에 결과적으로 삼성그룹이 언론과 금융 대신 전자분야를 키워 지금의 글로벌기업 삼성전자가 되었다는 드립도 치지만 당한 입장에선 과연(...)

1991년 중앙일보KBS에 TBC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신군부의 강요로 방송사를 강제로 빼앗겼다'는 이유였지만 민법상 취소권 행사기간은 '그 원인이 종료한 것으로 추인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인데, 당시 사법부에서는 이 원인이 종료된 것을 1987년 6월로 추인하였고 따라서 1991년 시점에선 이 기간이 훨씬 도과되었다고 판단하여 기각했다. 그와 별개로 중앙일보에서 신규 방송되는 민영방송사의 지분을 취득하면서 방송계에 복귀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태영건설이 민영방송 사업자로 선정되자 쓰라림을 느껴야 했다고 한다(...)

2.6 역대 사옥

파일:Attachment/a0102488 49701884ee1fe.jpg
RSB 라디오서울(TBC 라디오의 전신)사옥. 태평로 1가에 있던 옛 동양화재 건물에서 개국했다.

파일:Attachment/동양방송/dtvtbc.jpg
DTV 동양텔레비전이 있던 신세계 백화점. TBC의 사옥은 개국 초기에는 종각과 신세계 백화점 4, 5층에 있었다.

파일:Attachment/a0102488 49700d7349d75.jpg
1966년 중앙일보와 함께 서소문동으로 이사하게 된다. 앞쪽의 조금 낮은 빌딩. 당시 중앙 매스컴 센터라 불렸다. 현재의 중앙일보 사옥에서 시청역 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다. 현재는 삼성그룹 연수원을 비롯해 일부 중앙일보 관계사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과 달리 지금은 리모델링이 되어 외관이 많이 다르다.

파일:ReS8GAe.jpg
이 외에도 위 사진의 운현궁 근처에 있었던 제3스튜디오[67] 등 크게 이 두 곳으로(서소문 방송센터, 운현궁 제3스튜디오) 흩어져 있던 방송시설들을 모아 만든 건물이 아래의 여의도 신사옥이었다.

k12tz.jpg
동양방송은 매년 TV방송이 개국한 12월 7일 전후로 '프로그램 대행진'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했었다. 매년 방송된 내용 중에서 재미있었던 방송장면을 편집해서 보여주거나 동양방송 소속 안무팀의 공연 및 코미디언들의 꽁트를 하는 프로그램인데 신사옥이 완공된 1979년 12월엔 'TBC 여의도대행진'이라는 방송을 신사옥에서 촬영했었다.# #

이 외에도 '동양 최대의 방송시설'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방송을 편성해 방송하는 등 앞날이 창창한 방송으로 거듭 성장하는 듯 했으나...망했어요.

1980년 7월 여의도에 완공된 신사옥으로 완전히 이전[68]했는데, 5개월이 지나서 언론통폐합으로 사옥까지 통째로 KBS에 넘어가버리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 결과 현재 KBS 별관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인터넷에서 지도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69] KBS 본관, 신관이랑 별관의 거리가 먼 이유 중 하나다. KBS 본관 뒤에 붙어있는 IBC라고 써있는 신관[70]과는 다르다. KBS에서 운영하는 방송국 중에서 제2TV, 제3라디오(사랑의 소리 방송), 제2FM(쿨FM)이 언론통폐합 이전 동양방송의 채널이었다. 이 안에 있던 스튜디오와 공개홀은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방송 시설이었지만 KBS에 홀라당 넘어갔다.

3 그래서 누가 후신이냐

31년 동안 폐국되어 있었다가 2011년 미디어법 개정에 의한 종합편성채널로 중앙일보를 통해 2011년 12월 1일에 재개국할 때 재개국 약칭이 TBC가 아니고 JTBC다. 동양방송의 후신인데 TBC를 TBC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는 중간에 개국한 대구방송 때문이다(…).

JTBC는 개국하자마자 TBC 방송자료를 쏟아내고 일해거사와 KBS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TBC의 문을 닫은 장본인이 몇십년 만에 축하를 해주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에게 계속 씹히는 중.당연하지

그러나 인적, 물적 자원을 가져가버린 KBS2 역시 후신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TBC에서 간판만 바꿔 단게 KBS2니까 말이다. 거기에다가 KBS는 TBC의 방송자료를 갖고 있고 저작권까지 갖고 있다(…). 다만 강압적으로 얻어온 것이니만큼 껄끄러운 것은 사실. 그러나, TBC 시절 중요한 방송자료는 모두 카피를 떠서 중앙일보 사옥 통제구역에 고이 놔뒀다가 공개했다. 오오! 선견지명. 게다가 TBC의 마지막 사장이자 현 JTBC 상임회장인 홍두표가 문민정부 때 KBS 사장으로 재임하기도 했었다.

한편 중앙일보와는 상관없지만 옛 삼성 계열사인 CJ가 미디어 산업에 진출했고, 2011년 3월 CJ E&M을 만들어 대박쳤다. 사실 CJ의 설립주체를 봐서는 동양방송이라고 볼 수 있긴 하다. 중앙일보가 멀쩡히 살아있어서 그렇지(…).

결론적으론 결국 치토스의 후신이 "돌아온 치토스"이냐 "투니스"냐나 혹은 구.에프킬라[71]의 후신이 "한국존슨 에프킬라"냐 "삼성킬라"냐와 같은 문제.(…) 축구계에도 비슷한 관계인 팀들이 있다. 야구 쪽에선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이전으로 말미암은 SK 와이번스넥센 히어로즈의 인천야구 계승팀 논쟁이 있다. 삼청태현참고. 여기에 쌍방울 얘기까지 나오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벌어진다(...). 걸그룹계에도 비슷한 관계라 할수있는 팀들이 있다.

4 동양방송 출신인

이낙훈[72], 김성원[73], 이순재, 강부자, 선우용녀[74], 김세윤, 여운계, 사미자, 박용식, 홍성우[75], 김성환, 현석[76], 김종결, 정동남[77], 연규진,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서미경, 노주현, 한진희, 김영철[78], 최란, 허참, 정소녀, 김민희[79], 강수연[80], 김영남, 원미경, 이미숙, 차화연, 하일성[81] 등이 대표적인 동양방송 출신 인물들이다.

또한 TBC 성우극회 역시 인수 후 합쳐졌기에 KBS 성우극회 일부 인물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배한성이나 양지운, 유강진, 김종성, 장정진이나 나수란, 최수민, 차재완[82][83] 같은 성우분들이 대표적. 또한 작고한 배우 김무생도 이곳에서 성우로 처음 방송 활동을 시작했었다.

배일집[84], 배연정[85], 김병조, 고영수[86], 김영하[87], 최용순, 방일수, 이주일[88] 등의 코미디언들도 동양방송에서 활동했으며, 고전유모어극장을 위해 영입된 송해, 서영춘 또한 적을 둔 적이 있다.[89]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정부'의 공약을 읽어내려갔던 박종세 아나운서[90]와 '가로수를 누비며' 등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고려진 아나운서[91], 국내에서 처음으로 '앵커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봉두완 기자,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진행자로 명DJ였던 황인용 아나운서, 황인용 아나운서와 늘 짝을 이뤄 주요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박초아 아나운서[92] 그리고 맹관용 아나운서 등 60~70년대를 대표하는 아나운서 대부분이 TBC 출신이었다. 스포츠중계의 레전드로 꼽히는 유수호 아나운서도 이곳 출신.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리랜서 방송인인 왕종근씨도 방송인 커리어는 여기에서 시작했다. [93]

또한, 용의눈물, 여인천하등을 연출했던 김재형PD[94], MBC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집필했던 신봉승[95] 작가도 동양방송에서 활약한 방송인이다.

전 KBS 사장인 홍두표 현 JTBC 회장은 1964년 12월부터 동양방송의 창립요원으로 활동해왔던 동양방송의 산증인이다. 단, 홍두표 회장은 처음에 KBS의 창립위원으로 시작했었다.

위와 같이 서술된 동양방송 출신 방송인들의 결속력이 대단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동양방송이 전속가수 및 탤런트, 성우들에게 타 방송국 대비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다는 것이 꼽힌다. 대표적인 예로 1979년 말 완공된 동양방송 여의도 사옥(현 KBS 별관) 안에는 동양방송 전속 배우들의 대기실이 각각 1인실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개인 대기실이 기본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한 대기실을 여러 명의 배우들이 공유했던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니 파격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연예인들만을 위한 식당을 따로배치해 무려 등가구를 배치했고, 물감들인 단무지같은 요리는 일절 제공금지 였다고한다.

5 방송망

  • 동양텔레비젼 (HLKC-TV, CH 7/10kW)
현재 KBS 2TV
  • 부산동양방송 (HLSX, CH 9/5kW)
전국 유일의 동양방송 텔레비젼 지역국이었으며, 당시 부산은 물론이고 경상남도 진해시, 마산시, 밀양시, 울산시(현.울산광역시), 삼천포(현.사천시)가 양시청지역에 해당되었고, 경상남도 진주시, 전라남도 여수시까지 가시청지역에 해당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봤을때 봉래산(부산), 무룡산(울산), 불모산(창원), 망진산(진주) 등지에 중계소를 여럿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같은 프로그램이라도 서울에 비해 1주일 정도 늦게 방송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KBS나 MBC와 달리 마이크로웨이브나 광통신을 이용한 중계를 하지않고 서울에서 방송한 녹화 테이프를 가지고 와서 방송했기 때문.
  • 동양라디오 (HLKC, 639kHz/20kW)
현재 KBS 제3라디오 -----> 주파수 면으로는 KBS 제3라디오이지만 현재의 KBS 제3라디오와는 엄연히 다르다. 오히려 프로그램적 면으로 보면 KBS 제2라디오가 그 후신이라고 볼 수 있고 이 당시 KBS 제3라디오가 사용하던 주파수 639kHz는 현재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 증거로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KBS 제2라디오에서 송출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동양라디오 광주지역국. 현재 KBS광주방송총국 제3라디오.[96]
동양라디오 군산지역국. 언론통폐합 이후 KBS군산방송국이 되었다가 2004년에 KBS전주방송총국에 흡수되었고 예전 사옥은 현재 군산문화원 건물로 사용중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제2라디오를 송출하였으나, 2002년 10월 10일부터 KBS 제3라디오를 송출중에 있다.
  • 동양FM (HLKC-FM, 89.1MHz/10kW)
현재 KBS 2FM
  • 대구 한국FM (BBC-FM, HLCB, 89.7MHz/1kW)
전국 유일의 동양FM 지역국이자 국내 최초로 지방에서 설립된 FM방송국이었으며, 언론통폐합 이후 KBS대구방송총국 음악FM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97] 대구지역 다른 FM방송사들이 거의 대부분 다 그렇듯 팔공산에 송신소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8]

6 프로그램

(1) TV

[99][100]
  • 쇼쇼쇼 - 언론통폐합이후 KBS2에서 방영하다 잦은 시간대 변경과 이듬해 방영된 MBC쇼2000에 밀리면서 시청률이 하락하여 1983년 7월에 종영.
  • TBC 석간 - JTBC가 동양방송의 사실상 후신이라면 이 뉴스 프로그램은 JTBC 뉴스룸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시간대나 메인 뉴스라는 점도 그렇고...
  • 매일연속극 달동네 - 1980년 10월 1일부터 방송된 동양방송의 마지막 일일연속극. 언론통폐합 이후 KBS1로 이동.[101][102]
[103]

(2) 라디오

7 트리비아

1977년 동양방송에서 권투선수 홍수환의 타이틀전을 중계하던 당시, 대구 앞산 기슭의 동네와 김천 산간지역에서 동양방송이 잡혀 시청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이 때 대구 앞산 기슭 마을 주민들이 당시 500원씩 거두어 모아서 산꼭대기에 안테나와 부스터 동축 케이블 1km를 가설하고 사설중계소를 몇 달간 운용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 이 현상은 스포라딕 E층 반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105]

2000년대 초반, TBC 출신 직원이 개인 홈피를 만들어 TBC 방송과 관련 자료를 모아 인터넷 박물관을 꾸몄다. 처음에는 희귀 자료들이 올라오는 개념찬 홈페이지로 방송덕후들이 한두번은 다녀갔을 정도였지만,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우파를 비판하는 내용을 게시판에 올리면 ID가 삭제되거나 활동중지를 먹여버리는 등 홈피가 극도로 흑화가 되어버렸다(…). 이후 열람제한까지 걸 정도로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다가 JTBC가 개국된 직후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영화 쎄시봉에서 민자영이 오근태에게 동양방송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오근태는 "우리 동네에 TBC 안 나오는데" 라고 전국구 채널이 아닌 동양방송을 디스했다. 그런데 통영이면 부산동양방송 나올텐데...
  1. '우리의 방송'이라고 한 가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동양방송 사가가 맞다.
  2. 혹은 Corporation
  3. 물론 정부 비판적이라 해도 대놓고 비판적인 논조를 취한거냐면 그건 또 아니다. 검열을 상대적으로 덜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받은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4. 정확히는 이 단어가 뭐였는지는 불명이다.
  5. 이 공연에 대해서는 중앙일보 웹페이지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해당 자료가 1976년 것임을 알 수 있다.
  6. 삼성전자의 절전형 텔레비전 상표명. 삼성전자 문서에 해당 제품에 대한 내용이 있다.
  7. 이름처럼 시계를 제조하는 삼성그룹의 과거 계열사. 현재는 SWC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였다.
  8. 출력은 20kW. 호출부호는 HLKC, 주파수는 1380kHz였다. 개국 당시 개시멘트는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계환 아나운서.
  9. 부산은 12월 12일 개국, 호출부호는 서울 HLCE 채널 7번, 부산은 호출부호 HLKE 채널 9번이었다.
  10. JBS에서 TBC로 이름을 '급하게' 바꾼 것에는 한 가지 이 존재하는데, 당시 사용하던 JBS의 이름이 KBS의 당시 한글 이름이었던 '중앙방송국'과 혼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윗분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현재 JBS는 일자리방송이 사용하고 있다.
  11. 동양 FM은 우리나라 최초의 스테레오 방송을 시작하였다.
  12. 현재 인천광역시 남구 소성로 24
  13. 가허가 일자는 1962년 12월 31일이었다. 호출부호는 HLCZ, 주파수 1380kHz, 출력 10kW였다.
  14. RSB 라디오서울 개국 후 사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곧 홍진기로 사장이 바뀌게 된다.
  15. 지금의 극동방송이다. 1956년부터 1967년까지 인천에 있었다.
  16. 현재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철산우성아파트 단지 주변
  17. 현재의 서울파이낸스센터 자리
  18. 이 때 럭키금성이 경영에서 손을 뗀 것으로 추정된다.
  19. 호출부호가 본디 HLCZ였으나 이때, HLKC로 바뀐다.
  20. 동아방송의 송신소 위치는 현재 남부순환로 개봉역 인근 광복교 옆에 있었다.
  21. 당시 기성 언론과 다르게 탄탄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중앙일보의 마케팅은 종종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2. 동양방송에서 근무했던 분들도 이 때 이야기는 꺼려한다. 그만큼 흑역사 ...
  23. 예를 들면 윤복희 귀국 리사이틀 공연 녹화중계 등
  24. 253회 마지막회 때 드라마 종반부에 출연진 및 연출진들이 나와 드라마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다.
  25. 쇼쇼쇼가 단순히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쇼는 아니었다.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간단한 콩트를 하기도 하고, 사회자인 곽규석의 원맨쇼와 동양방송 출신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26. 당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여 육영수여사가 챙겨들을 정도로 인기가 있던 방송이었다고 한다.
  27. 아나운서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원고를 딱딱하게 읽어내려가는 초기 보도형태와 같았다.
  28. 배삼룡의 증언에 따르면, 구봉서와 배삼룡 모두 절친한 사이인 동기였으나, 구봉서가 먼저 MBC에 영입되었다는 이유로 구봉서의 출연료가 자신보다 높고, 평상시 대우가 다르다는 것에 힘들었다고 한다.
  29. 잔류를 택한 이유가 인상적인데, 청와대에서 박정희대통령이 웃으며 복이와요에 모습을 보이지 않자, MBC에 배삼룡의 거취에 대해 직접 물어봤고, 이를 MBC가 배삼룡에게 반협박조(본인은 그렇게 느꼈다고 한다.)로 '윗분께서 당신을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보고 싶으시다는데 이렇게 돈 몇푼에 가시려구요?'라고 말하자 어쩔 수 없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대우는 물론 그 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30. 후술할 정부의 제재 역시 일견 납득이 갈 수도 있는 것이, 당시 방송 환경 기준으로 1시간짜리 드라마 편성은 정말 엄청나게 긴 것이다. 보통 이 시기의 드라마 편성은 20분, 심한 경우 15분 정도로 짧았다.
  31. 동양방송이 한창 잘나가다가 외압에 의해 간판을 내리기까지의 10년간은 오일 쇼크로 인해 국가적 차원에서 에너지 절약을 부르짖던 때이고, 이를 구실로 텔레비전의 아침 방송이 무기한 중단되었던 시기이다. 지금 같은 다채널 종일방송과 다르게, 텔레비전 채널에 국한해서 보자면 오로지 지상파 3사만 있고 그조차도 하루에 방송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봤자 하루 중 저녁~밤 6시간에 불과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가 늘어가니 윗분들 입장에서도 이래가지곤 버틸 수가 없다고 느꼈을 듯.
  32. 다만 중복편성의 경우는 얘기가 다른데 1976년 정부 당국에서 공익성 강화를 목적으로 평일 오후 6시에 어린이 프로그램 오후 7시대에 가족프로그램 오후 8시에 드라마와 캠페인 오후 9시에 보도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편성할것을 지시했고 당연히 때가 때인만큼 방송국에서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이런 지시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 이전에도 맞불편성을 하는 일은 꽤나 있었다.
  33. 참고로 이 규정은 1994년 KBS-1TV의 상업광고 폐지에 따라 복구되었다.
  34. 물론 완전히 자유로웠다는 얘기는 아니다. 연예인 이름을 한글화하는 조치에 동참하기도 했고, 중간광고를 폐지했으며 TV프로그램에 외래어가 너무 많아 순화해야 한다는 박정희의 지시에 따르기도 했고 1976년도에 시간대별 편성지시에 동참하기도 했다. 다만 프로그램 제작면에서는 확실히 KBS보다 자유로웠던건 사실.
  35. 외래어순화에서는 타 방송사에 비해 자유로웠다는 것이 1978년 TBC 해변가요제에 나갔던 항공대의 스쿨밴드 '런웨이'가 같은 해 MBC 대학가요제에서는 '활주로'(...)로 바꿔서 출전했다.
  36. 개그린 버스 드립으로 유명한 원로 코미디언. 이 분이 사회를 10년 넘게 보셨으니 흠좀무. 2대 MC는 전국노래자랑 초대 MC인 위키리(본명 이한필)와 정윤희였다.
  37. 쇼쇼쇼는 언론통폐합 이후에도 약 3년 동안 심야시간에 방송되었다. 쇼쇼쇼의 인기가 워낙 좋아서 폐지를 시키지 못해 시청률이 떨어지는 심야시간대로 시간을 옮겨 방송한 것이다. 언론 통폐합 이전 쇼쇼쇼는 프라임 타임이라 일컬어지던 매주 토요일 밤 9시에 방송되었었다.
  38. 그 당시에는 '우주중계'라고 불렀다.
  39. NTV계열의 YTV에서 제작했는데, 이 때 최초로 한일합작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자세한 설명은 항목 참조
  40. 게다가 TBC 폐국 2달 전에 사회정화운동 당시 추진한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한국방송협회 측이 폭력물 프로그램 편성 금지 정책을 시행했다. 단, 1981년을 기점으로 폭력물이 슬금슬금 올라오면서 씨알도 안 먹혔다.
  41. 국산 작품도 방영하긴 했는데 자체제작은 당연히 아니고 극장판 애니메이션 재방이었다.
  42. 당시 방송사들 재무제표를 보면 매년 수백억원씩 흑자를 기록하고 광고판매율이 90%를 넘던 상황이었다. 해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여유가 없었던건 아니었지만, 60분짜리 드라마 한편 만드는 것보다 30분짜리 애니메이션 한편 만드는 게 제작비가 훨씬 더 들었다. 그래서 방송사 입장에서는 매년 매출액이 크게 늘었다 해도 애니메이션 제작에 별로 구미가 당길리가 없긴 하다.
  43. 더군다나 90년대에는 정부 당국이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신경을 쓰느라 TV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원이 부족했기도 하고, 국산 애니 제작을 안한다 해도 쿼터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던 시기라 크게 제재조치 먹을 일도 없으니 크게 욕먹지 않는 선에서 드문드문 제작했던 것. 참고로 쿼터제가 처음 마련된 건 2000년이고 현재와 같은 쿼터제가 적용되기 시작한 건 2005년이다.
  44. 여담이지만 삼성도 후에 잠깐이나마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든 적이 있었긴 했다. 바이오캅 윙고가 삼성에 의해 제작된 대표적인 애니메이션이다. 그러나 돈이 안 되었는지 얼마 안가 사업을 접었다. 한편으로 삼성의 방계 그룹인 CJ그룹도 애니메이션 제작에 어느정도 관여하고 있기는 하다. 제작량이 그리 많은건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쿼터제 덕분인지, 아니면 투니버스를 소유하기 있기 때문인지 어쨌든 삼성과는 다르게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 중.
  45. 이 방송을 통해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준코, 야마구치 모모에 등 기라성같은 가수들이 데뷔했다.
  46. 해당 내용은 일본 위키피디아 동양방송 항목에 서술된 내용이다. 영상자료를 발견한 분은 추가바람.
  47. 아래의 달동네 오프닝 영상의 제공자막에서 3번째 참조
  48. 실제로 1977년 이후 동양방송 관련 자료를 보면 컬러필름으로 제작된 영상을 드문드문 볼 수 있다.
  49. 당시 KBS도 1979년 초부터 컬러방송 준비를 진행하였으나, 동양방송에 비해 기자재나 스태프의 수준격차가 커 결국 국내 실황중계방송사로 선정되지 못한다.
  50. 현재의 KBS 별관이다
  51. 사랑의 절정이라는 말로 번역되었고, 민해경이 나중에 이 곡을 리메이크 한다.
  52. 1980년 2회 가요제 때 게스트로 당시 일본의 인기아이돌이었던 핑크 레이디가 공연을 했으며 이는 최초의 내한 공연을 가진 일본아이돌인 셈이다.
  53. 1980년 제 2회 대회때 조용필이 금상을 수상했는데, 원래는 조용필의 점수가 제일 높았다고 한다. 대회 전야제 때 조용필이 한오백년을 불렀을 때 심사위원들이 모두 인상 깊게 지켜봤는데 '국내 가수에게는 그랑프리를 주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어서 금상을 받았다고 한다.
  54. 물론 안좋은 측면이 없지 않다. 드라마는지금보다는 덜하겠지만막장의 끝을 달렸고, 무분별한 쇼프로그램 제작으로 당시 언론에서 대차게 까는 등 언론과 방송국 사이에 치열한 기싸움이 있던 때이다.
  55. 특히 유럽에 있는 방송국들과 네트워크를 강화한다.
  56. 당시 신축된 '여의도 신사옥'에 있던 장비들은 타 방송사와 비교했을 때 최신식 장비였다고 한다.역시 자본력 갑
  57. 녹화는 1980년 11월 17일에 진행되었으며, 1980년 11월 30일 밤 9시 30분부터 2시간동안 방송되었다. 사회는 당시 쇼쇼쇼를 진행하던 허참, 정소녀 그리고 박종세 아나운서였다.
  58. 이후 동아방송등 대부분의 폐국된 방송사의 거의 웬만한 고별방송은 사전 녹화로 방송을 했다.
  59.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동양방송 전속 코미디언이었던 최용순과 전속 탤런트였던 강부자도 우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되어 이후 KBS 프로그램에 잘 나오지 못하는 등 한동안 곤욕을 치뤄야 했다.
  60. 당시 연출자였던 조용호씨 증언이다.
  61. 재미있는 점은 이은하씨가 한참 뒤인 JTBC 개국 후, 신년특집 패티김쇼에서 패티김씨와 듀엣으로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TBC 고별방송 당시 울면서 불렀던 바로 그 곡)을 다시 불렀다는 것이다.#
  62. 사미자씨가 jTBC개국 축하 프로그램에서 증언한 일화다.
  63. 이 날부터 대한민국에서 전격적으로 컬러TV방송이 시작된다. 70년대 중반부터 컬러TV방송을 준비했던 동양방송 관계자들에게는 맥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64. 당시 존재했던 패션전문 매장.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65. 언론통폐합 이후 KBS 제2라디오에서 방송했다가 1991년 5월에 종영되는데 그 이유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오락 위주에서 생활 정보로 전환하려는 당시 KBS의 프로그램 방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1992년 10월 8일에 가을 개편 때 부활되어 KBS 제2라디오에서 방송되고 있다.
  66. TBC가 KBS로 넘어가기 직전 TBC가 최후로 방송했던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23시부터 익일 1시까지 진행됐지만 이 날은 자정을 기점으로 TBC의 전파송출을 중단해야 했으므로 1시간 단축 방송을 해야 했다. 황인용 아나운서가 울먹이면서 말했던 최후의 콜은 다음과 같다.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부호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는 육백 삼십 구 킬로헤르츠… HLKC… 동양방송입니다…" 여기서 들을 수 있다.
  67. 정확히는 운현궁 앞, 현재의 래미안 주택 전시관(운니동 래미안갤러리) 자리이다. 언론통폐합 이후 중앙일보 문화센터를 거쳐 sbs가 개국하면서 임대, 1993년 12월까지 스튜디오로 사용했다.
  68. 본디 1979년 완공을 본 건물이지만, 서소문에서 여의도로 완전히 이전하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다. 완전히 이전하기 전까지는 특집프로그램 및 일부 드라마 또는 예능프로그램을 여의도 신사옥에서 녹화했다고 한다.
  69. [1] 참고. 붉은 벽돌의 건물이 지금은 흰색 대리석으로 뒤덮여버렸고, 그나마 그 크기도 KBS 본관보다 훨씬 작다(…). 참고로 사진에 보이는 화단이나 보도블럭 등의 앞길은 전부 차도로 변했다. 또한 그 땅 밑에는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지나고 샛강역이 개업하였다.
  70. 1988 서울 올림픽 국제방송센터(IBC)로서 건설됨.
  71. 1997년까지 삼성제약에서 생산했던 에프킬라를 말한다.
  72. 1962년 KBS에서 데뷔하지만, 동양방송 개국 당시 전속배우로 활약한다.
  73. 1957년 CBS 성우로 데뷔, 이후 동양방송 개국 당시 전속배우로 활약하게 된다.
  74. 동양방송 1기 무용단 출신이다.
  75.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 1호라는 타이틀이 있는 배우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76. 1970년 동양방송 성우 6기 출신. 이후 1972년 MBC에서 탤런트 공채에 합격해 배우로 데뷔한다.
  77. 1972년 무술사범 특채
  78.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궁예', '김두한'을 연기한 배우 맞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79. 1980년에 방영된 '달동네'에 그 유명한 '똑순이'로 나온다.
  80. 1971년 '똘똘이의 모험'이라는 제목의 어린이드라마에 출연한 뒤 통폐합 할 때까지 아역배우로써 활동한다.
  81. 79년 고교야구 중계 해설가로 입사했다.
  82. 차재완과 최수민은 배우 차태현의 부모님이다.
  83. 차재완은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음향감독으로 전업한다.
  84. 1971년 MBC에서 배연정과 함께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하지만,누가 콤비 아니랄까봐동양방송으로 소속을 바꾸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85. 원래 MBC 출신이지만 배일집과 콤비 연기를 펼치며 동양방송에서 인기를 얻게된다.
  86. 라디오 DJ로도 유명했다.
  87. 1969년 MBC웃으면 복이와요로 데뷔했으나, 1976년 고전유모어극장이 생긴 이후 동양방송에 스카우트되어 적을 두게 된다.
  88. 1979년 MBC 웃으면 복이와요에서 브라운관에 데뷔했으나, 출연 단 1회만에 시청자의 항의못생겨서 죄송합니다.로 쫒겨난 뒤, 동양방송의 토요일이다 전원출발(당시 일본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던 8시라고, 전원집합!과 포맷이 유사한 프로그램이었다.)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자세한 사항은 이주일 항목 참조.
  89. 동양방송 소속 코미디언들도 정부의 방침에 따라 KBS로 활동무대를 옮기지만, 배일집, 배연정, 김병조, 김영하는 언론통폐합 이후 MBC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90. 본디 1956년 KBS에 입사했으나, 1962년 DBS로 이적 후 1964년 동양방송 개국과 함께 이적해 언론통폐합때 다시 KBS로 소속을 옮겨 방송주간으로 활동하게 된다. 1983년 은퇴
  91. 그 당시 생경했던 미인대회(미스탐라) 출신 아나운서로, 70년대 인기 아나운서였다.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1987년까지 아나운서로 활동하다가 1995년부터 2002년까지 CJ홈쇼핑의 쇼호스트로 왕성하게 활동한 이력이 있다.
  92. 언론통폐합 이후 KBS에서 아나운서 생활을 이어갔으며, KBS1의 아침간판프로인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진행하기도 했다.
  93. 정확히 말하면 TBC 부산방송국 소속이었다. 언론통폐합으로 KBS 부산방송총국 아나운서로 옮겼다가 1994년 본사로 올라가게 된다.
  94. 1961년 KBS에 입사했으나, 동양방송 개국 이후 이직하여 '이조여인 500년사'등의 사극을 연출했다.
  95. 2016년 4월 19일 작고
  96. 2001년까지 제2라디오였으나 2002년부터는 제3라디오를 송출하고 있다.
  97. 현재는 KBS 1FM 중계 및 로컬방송만 하고 있지만, 2001년 2FM에서 광고방송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2FM도 중계하기도 했었다.
  98. 참고로 대구지역 FM방송들 중 팔공산이 아닌곳에 송신소가 세워진 것은 대구극동방송이 최초다.
  99. 해당 프로그램은 1980년 11월 29일 방송된, 동양방송에서 방송된 마지막 쇼쇼쇼로써, 오프닝 일부와 조용필 출연분, 그리고 프로그램의 엔딩만 따로 편집한 영상이다. 출연진은 윤수일, 조용필 이외에도 제 2회 TBC 세계가요제 게스트로 출연했던 살바토르 아다모와 그랑프리를 차지했던 '슈디'가 출연했다.
  100. 이 방송 중 살바토르 아다모가 '눈이 내리네'를 부른 영상은 다음날(11월 30일) 방송된 고별방송 'TBC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에 다시 방송된다.
  101. TBC 방영시절에는 흑백으로 방영되다가 언론통폐합으로 인해 KBS1로 이동하면서 컬러로 방영되었다.
  102. 언론통폐합 그 다음날인 1980년 12월 1일부터 컬러방송을 전격적으로 시행한 덕이다.멀쩡한 방송국을 흑백의 과거로 가두려는 술수
  103. 어느 팬이 음원으로 남아 있는 한국어판 오프닝을 가지고 재현한 영상이다.
  104. 방송 날짜가 1980년 5월 22일이다. 듣다보면 광주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들리는데, 그렇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날조된 발표를 그대로 보도한 것이다! 물론 당시 상황상 외부 언론이 정확한 상황을 취재도, 보도도 할수 없었지만. 그나마 외신에서 필사의 각오로 광주에 잠입해 취재를 하여 전세계로 퍼질수 있었다.
  105. 비슷한 예로 1991년 일본에서 KBS청주방송총국의 화면조정 영상을 잡은 사례가 있다. 그런데 그 영상의 KBS 로고가 1984년 이전 버전이었다는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