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

1 후한 말의 인물

위서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동탁원소원술유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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董卓
(138? ~ 192년 5월 22일)

후한 말의 군벌, 정치가. 는 중영(仲穎). 통닭 망탁조의의 멤버 중 하나. 하진과 더불어 삼국지의 첫 단추를 꿰는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저지른 악행을 보면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인간 쓰레기. 그 망탁조의의 이다.

1.1 생애

1.1.1 초기 생애

양주(서량 지역) 농서(농군 임조현) 출신. 거치고 지략이 있었으며, 덩치가 크고 대단한 완력을 가졌고 궁마술에 능했는데 이 때문인지 그는 화살집 두개를 차고 좌우 자유자재로 활을 쏠 수 있었다고 한다.

젊어서부터 호방하고 보스 기질이 있어 패거리를 이끌고 다녔고 강족의 유력자들과도 친분을 맺었다.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강족 무리가 찾아오자 밭갈이 소를 잡아서 연회를 베풀었기에 강족들이 감격했다는 일화도 있다.

환제 말엽에 우림랑으로 천거되어 병주에서 전공을 세워 병주자사가 되다. 그리고 포상으로 받은 전리품들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인심 장악에 뛰어난 기질을 가졌다.

이후로도 동탁은 북방 이민족 토벌에 자주 전과를 올려 승진을 거듭했으며 하동태수로 재임한다.

1.1.2 황건적의 난

하동태수로 재임하던 중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184년, 황건적을 상대로 승전을 거듭하던 노식이 좌풍(左豊)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서 소환당하고 동탁이 대신 동중랑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황건적에게 패배하여 면직되었다. 능력없음을 보여주다

1.1.3 변장·한수의 난

184년에 한수 등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185년 삼보까지 침범하자 다시 복직되어 황보숭을 따라 그 진압을 맡았다.

하지만 황보숭도 뇌물을 바치지 않아서 금방 잘리고 조정에서는 사공 장온을 대장으로 삼았으며 동탁은 파로장군으로 올렸다. 장온은 조서를 보내 동탁을 불렀으나 동탁은 늦장을 피우며 한참만에야 도착했다. 특히 상관인 장온을 우습게보아 불손하기 짝이 없게 대하였다. 이때 장온의 부장으로 종군하고 있던 손견은 동탁이 평소 무례하고 윗사람을 가볍게 여기며, 반란 진압을 맡고도 몇년이 지나도록 공을 세우지 못한 데다, 군율을 무시하고도 오히려 뻔뻔하게 행동하니 절대 살려두면 안 된다고 장온에게 진언했지만 장온은 강족과 동탁의 관계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장온은 변장과 한수를 상대로 고전을 거듭하였는데 11월 동탁이 분전하여 변장 등을 격퇴하였다. 장온은 주신에게 그 추격을 지시하였다. 동탁은 주신의 보급로를 지켜야한다고 진언했으나 장온은 이를 씹고 동탁에게 강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과연 주신은 보급로가 끊기는 바람에 패퇴하였고 동탁은 수만 명의 강족에게 포위된 채 고립되어버렸다. 식량이 떨어지지만 물고기를 잡는 척하면서 빠져나가고, 도중에 하천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를 통과시키고 나서 제방을 무너뜨렸다. 이에 강족은 물이 깊어 추격하지 못해 동탁은 상처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조정이 보낸 여섯 군중 다섯 군은 모두 패배했지만 오직 동탁의 군대만이 무사하였다. 이 공로로 동탁은 전장군 태향후로 봉해진 뒤 병주목으로 임명되었다.

186년 겨울 한수가 북궁백옥 등을 죽이고, 그 세력이 10여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187년에는 이상(李相), 마등, 왕국마저 합세하였다. 188년 왕국 등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자 전장군이 되어 황보숭과 함께 구원하러 갔다. 동탁은 진창으로 바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황보숭은 진창이 충분히 버틸 수 있다며 반군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189년 2월, 왕국 등이 스스로 군을 물리자 황보숭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려 하였다. 동탁이 이번에는 궁지에 몰린 적을 치는 것은 위험하다며 반대하자 그의 부대를 후방에 남겨둔 채 황보숭만이 진격하여 만여 명을 베고 반군을 소탕하였다. 동탁은 몹시 부끄럽고 한스러워 황보숭을 미워하였다.

동탁은 장온, 황보숭에게 원한을 품어 훗날 정권을 잡자 원술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형을 부과해 죽게 하였다.[1] 황보숭은 아들 황보견수의 간청으로 살려주었다.

1.1.4 낙양 입성

동탁은 군대를 사병화하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상관을 무시했으므로 조정에서는 동탁을 두려워했다. 이에 188년에는 동탁을 소부로 삼고 지휘하는 군대를 좌장군 황보숭에게 맡기려고 했으나 당연히 이를 달갑지 않아하던 동탁은 상소를 통해 부하들이 자기를 너무 좋아해 보내주지 않는다며(...) 이를 무시했다. 189년에 조정에선 동탁을 병주목으로 승진시키고 병권을 다시 황보숭에게 내놓게 하였다. 동탁은 이에 자신이 통솔하는 병력을 병주로 데려가겠다는 상소를 올리면서 반발한다.

두 차례나 조서를 무시했지만, 대장군 하진이 환관 제거를 모의하기 위해 지방의 장수들을 소집하였는데, 동탁도 이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다.[2] 그러나 동탁이 낙양에 도착하기 전에 환관들(십상시)의 책략에 의해 하진이 주살되고, 이에 분노한 원소 등에게 환관들도 주살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십상시의 난 참조.

이 소동 중 살아남아 도망친 장양 등 일부 환관들에게 연행된 소제와 진류왕의 신변을 동탁군이 확보하였고 환관들은 강에 투신하였다. 동탁은 이때 소제와 대화를 하였는데 소제는 겁에 질려 울고 있었고 제대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진류왕 유협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대화하였고[3] 또한 동탁은 유협의 보호자가 자신과 같은 동씨인 동태후였다는 점을 상기해내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황제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4]

1.1.5 정권 장악

비록 황제의 신변을 장악하긴 했지만 동탁의 병사는 3천명 정도로 원소 등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크게 강할 것도 없었던 데다 동탁 본인을 포함해 군사들 대부분이 변방 촌놈들이라 위엄이라곤 전혀 없었고 사람들이 무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동탁이 꾀를 내서 4~5일 간격으로 밤에 네 성문에서 밖으로 군사를 보내 다음날 아침 군기와 북을 가지고 입성시켜 서쪽에서 대군이 계속 도착하는 것 처럼 보이게 했다. 이에 주인이 없던 하진, 하묘(何苗) 형제의 군사들은 강해 보이는 동탁쪽으로 붙었다. 이로써 수도의 군사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포를 부추겨 병주자사[5] 집금오 정원(丁原)을 제거[6]하도록 하고 그 군대마저 흡수하자 엄청난 세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원소 등 경쟁자들은 데꿀멍하게 된다.

1.1.6 소제 폐위와 폭정

정권을 장악하자 동탁은 가뭄을 이유로 사공 유홍을 면직시키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자마자 태위로 승진한다. 그 뒤 동탁은 한 달도 안되어 소제를 폐위하여 홍농왕으로 강등시킨 뒤 이틀 뒤 곧바로 이유를 시켜서 모후인 하태후를 함께 시해[7]하고 진류왕을 옹립시켰다.

동탁의 포악함이 극심해진 것은 이 때부터다. 군대를 이끌고 순찰중에 양성에서 주민들이 춘절을 즐기는 것을 보자, 예를 갖추지 않는다고 비위가 거슬려 거기에 있던 남자들은 목을 베고 여자는 탈취하여 병사들에게 첩으로 주고 재산을 몰수했다. 심지어 궁녀나 공주에게까지 함부로 폭행을 가하거나 강간까지 했다. 또 하태후가 죽고 영제가 묻힌 문릉에 묻었는데 그 틈을 타서 문릉에 있던 부장품과 보물을 모두 도굴했다.

이와 같은 만행을 참을 수 없어 오부가 동탁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지만 실패하여 살해되고 만다. 연의에서는 조조(曹操)도 (왕윤의) 칠보도(七寶刀)를 빌려 동탁 암살을 모의하지만 실패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또한 하내태수 왕광도 이에 반발하여 수도 근방에 병력을 배치한 뒤 동탁을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이때 동탁은 자신의 병력을 강을 건너는 것으로 눈속임 한 뒤 몰래 정예병을 보내 왕광군의 배후군을 급습하여 대파하여 거의 몰살하였다.

1.1.7 장안 천도

190년 각지의 제후가 원소(袁紹)를 맹주로 하여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안 그래도 황건적이었던 곽태(郭太) 등의 백파적이 봉기하여 그 규모가 10여만 명이었는데, 반동탁 연합군까지 일어나자 동탁은 매우 난감해졌다. 동탁은 화풀이로 한복(韓馥), 유대(劉岱), 공주(孔伷), 장막(張邈) 등의 제후들을 천거했던 주비오경을 참했다.

동탁은 장안(長安) 천도를 하고자 하였는데 사도 양표, 황완이 반대하자 이들을 면직시키고 강행했다.

이때 여포를 시켜 후한 역대 황제와 후비들의 능묘를 파서 보물을 도굴했는데 심지어는 공경대부들의 무덤마저 도굴하자 그의 군사들은 백성들의 무덤까지 도굴했다. 이때 낙양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렸는데, 역사계에서는 이를 낙양 대겁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로마 약탈은 이민족한테 당하기라도 했는데 한족이 한족 수도를 개털어버리다니 덕분에 약 1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낙양에 사는 주민들은 동씨를 싫어한다.

그리고 기존의 수도인 낙양은 불태운 뒤 군사기지화 시키고 자신도 낙양에 주둔하며 하내, 산조에 집결한 연합군과 대치한다.

1.1.8 반동탁 연합군

반동탁 연합군은 막상 모여놓고서는 동탁을 치는 것을 꺼려 지지부진했다. 조조, 포신 등이 그나마 동탁을 치러 나가봤지만, 동탁은 에이스 카드 서영을 꺼내어 조조와 포신을 털어버렸다. 한편 손견도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하고 원술 휘하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191년에 하남까지 이르렀으나, 손견도 서영에게 크게 패하고 간신히 군대를 수습하였다.

동탁은 손견을 마저 몰아내기 위해 호진여포를 파견해 손견이 있는 양인성을 공격했으나 호진과 여포 등의 반목으로 인해 실패하고, 오히려 원술의 든든한 물자지원[8]을 등에 업은 손견의 반격을 받아 패하고 도위 화웅 등이 전사했다.

동탁은 손견의 용진을 꺼려 이각을 보내 화친을 시도했지만 동탁을 증오하는 손견이 오히려 온갖 굴욕을 주며 동씨 가문을 멸하겠다고 선언까지 하면서 이 화친제의를 거절했다. 손견과의 화친도 실패하자 동탁은 다시 손견과 싸웠지만 털려 결국 손견이 낙양에 입성하게 된다. 이때 동탁은 손견을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관동의 군대가 여러 차례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하니, 능히 할 수 있는 게 없소. 오직 손견만이 젊고 외고집인데다, 자못 사람을 잘 등용하지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게 되어서는 나를 기피한다는 것을 알게 했소.

나는 옛날에 주진(主神)과 같이 서정(西征)을 나섰는데, 서정은 변장과 한수를 금성(金城)에서 포위했소. 내가 장온에게 말하여, 거느리는 병사들로 주진의 뒤에 주둔케 하려 했는데, 장온이 듣지 않았소. 내가 이때 그 형세를 상언하였는데, 주진이 필히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았소. 대각(臺閣 = 상서)에는 지금 (당시 일의) 본말(本末)이 있소.

일을 아직 보고하지 않았으면서 장온은 또한 나더러 선령(先零)의 모반한 강(羌)족들을 토벌하게 하여, 서방 지역을 일시에 소탕하려 하였소. 나는 모든 그 일이 옳지 않음을 알지만, 그만두게 할 수 없어, 마침내 일을 행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 유정(劉靖)을 남겨두어 보기 4천명을 거느리고 안정(安定)에 주둔하여 성세(聲勢)로 삼았소. 모반한 강족들이 곧바로 돌아가면서 돌아가는 길을 끊고자 하기에, 내가 조금씩 공격하여 번번이 (길을) 소통시키니, 안정에 병사가 남아있음을 두려워했소.

오랑캐들은 안정에 수만 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유정에 대해서만은 몰랐소. 이 때 또한 소장을 올려 그 상황을 말하니, 손견은 주진을 행군을 따르면서 주진은 1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을 지으려 한다고 말하기에, 주진에게 2만 명으로 뒤에 주둔토록 하였소. 변장과 한수의 성중에는 묵을 곳이나 먹을 것이 없기에 응당 밖에서 운반하려 하지만, 주진의 대병(大兵)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벼이 손견과 대전하지 못했고, 손견은 병사가 풍족하여 그 운반로를 끊고, 아이들을 써서 강족이 반드시 곡중(谷中)으로 돌아갈 것이라 하니, 양주(凉州)는 혹 안정될 수 있었소.

장온은 이미 능히 나를 기용하지 못했고, 주진 또한 손견을 등용하지 못하여, 직접 금성을 공격하고 그 바깥담을 무너뜨려서, 말을 달려 장온에게 얘기하게 하여 나의 승리가 아침저녁에 달려 있다고 하니, 장온이 이 때 또한 스스로 계획이 적중했다 여겼소. 아과(兒果)에게 건너가 규원(葵園)을 끊어버리니, 주진은 군수품을 버리고 달아나고 아과는 내 계책대로 되었소. 대각에서는 이것 때문에 나를 도향후(都鄕侯)에 봉했소. 손견이 좌군사마(佐軍司馬)가 된 것은 이를 보는 바가 남들도 같이 보았듯이, 나도 할 수 있었던 것일 뿐이오.“ - 정사 오서 손견전

손견에게 동탁군이 크게 패하고 낙양 입성을 허용하고 말았지만 낙양은 이미 황폐해진 상태였다.

동탁은 동월, 단외, 우보를 배치하여 대치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반동탁 연합군은 오래가지 못하고 원술공손찬이 연합해 공손찬의 요청을 원술이 수락해서 공손찬이 원술에게 사신으로 파견한 공손월을 지휘관으로 삼고 부장으로 손견을 배치해 원소에게 공격했으나 원소군의 주앙이 공손월을 전사시키면서 손견이 전투를 그만두게 되고 이 사건을 빌미로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1.1.9 막장 전횡

동탁은 황제를 데리고 장안으로 도착하여 푸른 덮개에 금 장식을 두른 수레를 탔는데, 위엄이 마치 천자와 같았다. 아우 동민(董旻)을 좌장군으로 삼고, 조카 동황(董璜)을 중군 교위로 삼으니 종족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조정에 나란히 섰으며, 손녀 동백은 위양군에 봉해지고 심지어 시첩(侍妾)의 배 속에 든 아이까지도 제후에 봉해졌다.

자신이 사는 미(郿)에 만세오(萬歲塢)라는 성채를 쌓았는데, 당대 사람들이 흔히 미오(郿塢)라고 불렀다고 한다. 높이와 두께가 무려 7장(丈)으로 장안과 같은 규모의 성을 쌓아 30년 분의 식량과 엄청난 보물들을 비축했다. 동탁은 스스로 "일이 성사되면 천하에 웅거하고, 일이 그르치면 이곳을 지키며 한평생 지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게 참 골때리는 게 동탁은 일을 그르친 게 지나쳐서 웅거가 아니라 훙거(薨去)[9]를 하고 만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오(塢)는 거점 요새의 개념에 가까운데 유사한 군사거점인 진(鎭)과의 차이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만세오는 미 땅에 세운 요새 또는 성채라는 의미로 훗날 위와 오가 대립하는 유수에 새워진 유수오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미오성이란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사실 동탁의 이 장면은 동시대 인물의 훨씬 유명한 행동과 사실상 근본적 형태가 같은데 바로 공손찬역경루다. 공교롭게도 동탁과 공손찬은 공통점이 참 많은데 이짓 외에도 둘 다 죄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인 데다가 동탁은 손견의 밥이고 공손찬은 국의의 밥이다.

단, 이 미오 관련 항목 정사 서술과 관련해서는 한국의 김운회 교수처럼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오늘날 아파트 단지 건설공사가 대략 2~3년이 소요되며, 조선시대 정약용이 거중기 등 최신 장비를 동원하여 쌓은 수원 화성 의 경우 2년 8개월의 공정 끝에 완공되었는데, 역사의 기록대로라면 당시 피폐한 장안 일대의 여력으로는 2, 3년에 불과한 동탁의 치세 동안 그런 대규모 역사를 일으키거나, 30년 분의 식량을 비축한다거나 한다는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탁이 실제로 미오를 지었어도 당시 사람들이 동탁을 너무도 미워한 나머지 그의 죄를 부풀렸거나 이미 존재한 요새를 추가적으로 보수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이외에 주연회를 열 때마다 죄인을 끌고와 혀와 팔다리를 자르거나 눈을 도려내기도 하고, 큰 솥에 삶기도 했다. 심지어 장온의 경우는 원술과 내통한 죄를 뒤집어 씌운 뒤 자기가 직접 주먹으로 때려서 죽였다.[10] 게다가 자기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고 사람들이 서로 무고하였기에 억울하게 죽은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황의백 저서인 《삼국지의 지혜》에서는 이런 새디즘을 보인 이유가 정서불안이었거나, 대신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으로써라고 평하고 있다.

게다가 명절이 있어 백성들이 낙양 성 밖을 나와 축제를 즐기고 있는 곳에 뜬금포 병력들을 끌고 가서 남자는 죄다 학살하고 여자는 죄다 잡아다가 이 대학살에 참여한 병력들에게 포상으로 내렸다.

거기에다 헌제를 협박해서 상국이라는 어마무시한 관직을 따내버렸다. 이 전설의 관직을 따낸 이후 기록된 동탁의 행보는 말 그대로 눈 앞에 걸릴 것이 없는 기세. 동탁은 장안에서 위세를 떨치며 대신들을 능멸했으며, 아울러 원소의 숙부인 태부 원외(袁畏)와 원술의 형인 태복(太僕) 원기(袁基) 두 집안 사람 50여 명을 잡아 죽였고 거기에 사공(司公)인 장온도 매질에 부과해 죽였다. 이 때 원소와 원술은 오직 살기 위해 야반도주했는데 원소는 동쪽으로 도주해 남피에 정착했고 원술은 남쪽으로 도주해 남양에 머물렀다가 손견 사후 고향 근처인 수춘으로 이사갔다.

특히 경제 정책에서 큰 실책을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화폐개혁. 오수전을 녹여 조그만 동전으로 주조하지만, 그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고 모양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불순물까지 잔뜩 섞여서 이게 돈인지 뭔지조차 모르게 찍힌 개체도 있었다. 너무 돈을 많이 찍은 관계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서 후한의 경제는 혼란에 빠졌고, 화폐경제는 이후 한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오늘날의 각 나라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항목이 화폐임을 감안할 때,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점은 학계의 평이 일치하고 있다.

1.1.10 최후

동탁의 전횡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192년 4월 사도 왕윤은 동탁의 시녀와 밀통했다가 뽀록날까봐 떨고 있던 동탁의 심복 여포를 꾀어내어 동탁 살해를 모의했다.[11]

주석으로 달린 영웅기에 따르면 이 당시에 천리초 십일복(千里草(千+里+草=董) 十日卜(十+日+卜=卓))이라는 풍문이 있었는데 "온 천지에 난 풀은 열흘을 못넘긴다"라며 동탁의 이름을 파자한 것이었다. 또한 동도(董逃)라는 동탁이 달아난다는 뜻의 노래가 지어졌다. 또 어떤 도사가 포(布)에 여포의 성인 여(呂)자[12]를 적어 동탁에게 여포를 경계할 것을 알렸지만 동탁은 도사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도사를 쫒아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 한정으로 이숙은 동탁 입장에서 보자면 여포를 데려온 1등 공신이었지만 어느새 잉여가 되어 있었다. 특히 동탁이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여포가 왕윤(및 황완 등)에게서 "동탁을 꾀어낼 인물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듣자 곧바로 이숙을 추천한다. 이리하여 동탁은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고 이숙을 따라 궁궐로 간다. 동탁이 궁궐로 올 때 생기는 숱한 불길한 징조(수레바퀴가 부서진다든지, 먹구름이 낀다든지. 이 중에는 동탁이 오래 못 살거나 여포에게 죽는다는 것도 있었다.)에 대해 이숙이 거짓말로 둘러댄다.

동탁은 말이 넘어져 앞으로 가지 못하자 내심 괴이하게 여겨 그만두려 했으나 여포가 행보하기를 권하자 이에 안에 갑옷을 입고 궁에 들어갔다. 동탁이 궁궐에 들어가자 호위병에게 제지당하고 이숙이 먼저 칼로 동탁을 베려 했으나 조복 밑에 갑옷을 입고 있어 팔만 베어낸다. 동탁은 부상을 당한채로 여포를 불렀으나 그 여포한테 생각지 못한 배신을 당하자 자치통감에 따르면 "개같은 놈(用狗),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으냐"라는 말을 남기고 최후를 맞이했다.

동탁의 머리와 사체는 저잣거리에 내걸렸는데, 뚱뚱한 몸의 배꼽에 불을 놓자 며칠씩이나 계속 탔다고 한다.[13] 이 때문에 살아서는 장안을 통치하던 동탁이 죽어서는 장안의 등불이 되어 며칠 동안 장안의 불을 밝혔다고 하는 농담이 있다.

동탁이 사망할 당시 동탁의 생모는 100살이 넘었는데 동탁이 그렇게 효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동탁의 생모는 자기 아들이 뭐하고 다니는 사람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고 동탁이 주살당하자 동탁의 구족을 멸하려는 왕윤에게 뜬금없이 잡혀갔다. 동탁의 생모는 그 장대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더 살고 싶어서 왕윤에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왕윤은 동탁의 생모의 목도 동민, 동황 등 다른 동씨 일족들과 마찬가지로 가차없이 베었다. 그래도 동탁네 어머니가 삼국지에 등장한 모든 인물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데 좀... 은 개뿔! 역적의 어머니인 게 자랑이냐?

여담이지만 동탁 모살 사건은 훗날 북위의 효장제와 그 측근들이 연구하여 이주영을 살해하는데 이용되었다.

1.2 평가

1.2.1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악인

제갈량노숙 등의 천하삼분지계를 보면 동탁이 워낙에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언급이 나오는 걸로 보아 당대에 동탁은 이미 악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동탁이 해놓은 짓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황제를 갈아치움으로서 정통성 붕괴,

2) 이유야 어쨌건 군벌과 대치중 수도를 옮김으로서 중앙이 허술해짐을 신호하였고(즉, 중앙 권력 붕괴),
3) 화폐를 마구 찍어내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경제를 붕괴시켰는데 그나마도 제대로 찍지 못해서 정규화폐가 위조화폐보다도 더 조잡한 상황이 되어 위조화폐가 난립하게 되었으며,
4) 본인의 계급장을 본인 맘대로 마구 달고 그걸로 전횡을 부린 탓에 중앙 관직의 권위를 붕괴시켰다.(이는 원술의 칭제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원술 왈 : 동탁같은 등신도 다는 계급장, 나는 더 좋은 걸로 달아보자)
5) 이외에도 셀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다.

동탁이 이런 짓거리를 저지르자 원소는 헌제가 황제라는 것을 부정하면서 한 황실에서 대인배로 이름높은 유우를 옹립하려 시도했고 원술은 칭제 유표는 자기 동네에서 황제놀이를 했다.[14][15] 동탁 때문에 이 정도로 황실이 개무시당했다.

그야말로 후한을 박살낸 주 원인중 하나라 봐도 무방하다. 사실 이 이후 위진남북조는 동탁이 싸질러 놓은 걸 기반으로 이 놈도 싸고 저 놈도 싸고 다른 놈은 정리하는 척 하면서 싸고 어떤 놈들은 정리하는가 했더니 아들이나 부하가 싸고...

1.2.2 뛰어난 무인

앞서 언급되었듯 기본이 무인이라 궁술에도 뛰어났고 힘이 세서 초인적인 완력이 있었다고 한다.[16]

다만 황건적에게 패하고, 변장 토벌에 지지부진한 것 등 지휘관으로서는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연의에서도 힘이 굉장해 자기를 암살하려고 칼로 찌르려는 오부의 팔을 잡아 꼼짝 못하게 하여 역관광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조조왕윤의 칠성보도를 받아 암살하려고 할때 동탁의 힘을 두려워하여 동탁이 침대에서 뒤로 돌아누웠을 때를 노린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침대 반대쪽의 거울에 조조가 칼을 뽑아드는 모습이 비쳐 동탁이 그걸보고 놀라면서 암살이 실패하게 되지만(...)

그런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한 사람이 손견이었다. 손견 이외의 모든 사람은 자기가 무략으로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만큼 업신여겼다.

1.2.3 타락한 능력자?

젊어서는 이민족들과 친분을 맺는 정도의 사내였지만 지위를 확립한 이후는 악인이 되었으니 권력을 잡자 타락한 케이스라고 볼 수도 있겠다. 혹은 애초부터 간사한 악인이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지만.

흔히 동탁을 가리켜 그저 악당 괴수급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대반수이지만 실제로 따지고 본다면 그는 서량지역의 변방 장수 출신 답지 않게 의외로 중앙조정의 권위와 힘을 알고 이것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점은 권력을 잡는 시점에서 끝나고 만다.

혹자는 그가 시골 촌놈 답지 않게 정치적 센스가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에 조조의 선배격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집권과정만 비슷할 뿐, 그 이후는 전혀 보지 못한 단견이다. 일단 조조는 동탁과 비슷한 경로로 협천자 령제후를 하긴 했지만, 적어도 자기의 영역에서는 확실히 질서를 잡고 치국을 실시했다. 하지만 동탁은 정권을 잡는 순간 폭정을 다해 국치를 문란하게 했고, 그것으로 자신의 몰락도 재촉했다. 즉, 권력을 잡을줄만 알았지 그걸 제대로 쓸 줄 몰랐던 자라고 할수 있다. 인사배치는 되려 정반대인데 조조가 능력을 보고 그 능력에 맞게 인재를 배치한 것에 비해 동탁은 갓난아기도 자기 친척이면 태수같은 중요한 자리를 주는 기행을 저질렀다.

그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권력을 즐길 줄만 알았지,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천하를 망치고 자기 자신의 신세도 망친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천하를 다스리려는 비전(역심이겠지만)이라도 있었다면 민심을 휘어잡을 어진정치를 폈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인간성만이라도 겸손했더라면 유비처럼 부하들에게 친근하게 대하면서 조언을 구하고 부하들이 잘하는 걸 시켜가며 번창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탁의 사전에 겸손은 없다. 이런 면에서 동탁은 정치적 감각은 있어도 식견은 없는 일개 무부가 운좋게 정권을 잡았을 때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술한 내용대로 동탁의 가치를 평가하자면 남의 밑에서 무용을 뽐내서 국경수비대장 같은 걸 하면 적성에 맞지만 군주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책 현안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면 절대 안되는 인물이다.

1.3 미디어 믹스

동탁이 죽고 시체가 효시되었을 때 더운 여름에 뚱뚱한 몸에서 기름이 흘러나와 끓었다는 기록이나 배에다 심지를 박자 며칠 동안 타올랐다는 기록 등을 봤을때 체구가 비대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기에(...) 여러 창작물에서 뚱보의 모습으로 나온다.

2 동으로 만든 종

銅鐸

강철신 지그에선 지그의 동력원으로 나온다.

포켓몬 중 하나인 동탁군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에밀레종 아니었어?! 1과 엮은 이런 그림도 있다.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는 작품이 작품인지라 흉기로 등장(…).

여담이지만 1의 동탁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런 개그가 있다.동탁으로 만든 종 어째선지 갑동탁이 더 단단한다.
  1. 이 사실을 삼국지연의에서는 동탁이 문무백관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연회를 베푸는 도중 갑자기 장온이 여포에게 뒷덜미를 잡혀 그대로 끌려 나간 후 목만 쟁반에 담겨 돌아오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2. 연의에서는 조조가 그 계획을 엿듣고 "외부의 군사를 불러들이면 조정의 상황을 그대로 발설해 버리는 것, 앞으로 그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3. 우둔하다는 소제를 폐위하고 현명하다는 진류왕을 옹립한데서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어 다양한 추론이 나오기도 한다.
  4. 당시 하태후와 하진의 잔류세력들이 보호자로 있던 소제와 달리 유협에게는 아무런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동탁이 마음데로 권력을 휘두르기에 훨씬 용이했으며, 사실 동탁과 동태후는 별 상관 없는 사람이지만 아무튼 같은 성씨라는 것은 지금과 달리 그 의미가 굉장히 컸기 때문에 자신이 전권을 틀어지는데 약간이나마 명분을 세울 수가 있었다.
  5. 연의에서는 형주자사로 나온다.
  6. 연의에서는 이 제거를 사주하는 역할을 이숙이 맡았다. 그리고 여기서 여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해진 선물이 바로 적토마.
  7. 연의에서는 그 이유가 유폐된 이후 '날 구해줄 충신 어디 없나'라는 의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홍농왕과 하태후말고도 홍농왕의 아내인 당희까지 죽이지만 실제 역사에선 당희는 죽지 않았다.
  8. 당시 원술이 웅거한 남양군은 광무제가 그곳에서 거병한 이래, 성세에는 36개현 약 36만호 194만명의 인구를 거느린 거대 권역이었다. 낙양이 있는 수도권 하남군이 성시에 22개현 약 28만호 174만명이었으며, 당시 인구가 집중된 연주, 예주, 기주 주요 군국 인구가 최대 70만~120만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웬만한 군국 2 ~ 3곳이 합쳐진 셈. 훗날 조조가 형주를 정벌한 후 신야현을 포함한 남양군의 몇몇 현을 분리해 단위의 행정구역을 신설하였다.
  9. 고관대작이 목숨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사망의 극존칭인데 서거별세보다도 더 높임말이다.
  10. 삼국지연의에서는 여포가 장온의 뒷덜미를 잡아서 끌고 밖으로 나가는데 얼마 후 여포는 쟁반에 담긴 장온의 수급을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11. 뒷날 잡극에서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밀통했다는 소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창작했고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이 양녀 초선을 이용하여 연환지계(連環之計)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형태로 완성된다. 이 연환지계의 전개에 대해선 초선 항목 참조.
  12. 판본에 따라 입 구(口)자 두 개를 위 아래에 적어 여(呂)자를 나타냈다는 말도 있다.
  13. 《삼국지》 동탁전에는 없고 《후한서》 동탁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배철수의 만화열전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90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나온다.
  14. 정사 삼국지 위서 유표전에 이르기를 유표는 후한 황실 조정에 대한 조공을 끊고 황제와 복식을 동일하게 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15. 이 때문에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동탁=원소=원술=유표라는 평가를 내렸다. 고우영 역시 이로 인하여 원소와 원술을 아예 도둑놈 형제라 칭했다.
  16. 전근대시대에서는 장군이 되려면 최소 기본 무예는 있어야 될수 있다. 동탁이 전략에서는 무능하지 무인으로서의 기본 실력은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