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도코이

언어별 명칭
그리스어Διάδοχοι
영어Diadochi[1], Successors

1 개요

고대 그리스어로 "후계자들", "계승자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디아도코이라고 하면 대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후 헬레니즘 제국의 분열 과정에서 서로 투쟁했던 마케도니아 장군들을 가리킨다.

2 대왕의 요절과 분열

BC 323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영토 상당 부분을 정복한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는 바빌론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는 아직 엄마인 록사나(록사네)의 뱃속에 있었고 대왕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죽었다. 대왕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온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명확한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딴 생각들을 품기 시작한다. 당시 대왕의 임종을 지켜본 장군들 중 중요한 인물들을 꼽아보면 아래와 같다.

아래는 임종 자리엔 없었지만 중요한 인물들이다.

  • 안티파트로스(Antipater) : 마케도니아 섭정, 마케도니아에 체류중, 장군들 중 최연장자
  • 카산드로스(Cassander) :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 크라테로스(Craterus) : 팔랑크스 지휘관, 후임 마케도니아 섭정, 킬리키아에 체류중
  • 폴리페르콘(Polyphercon) : 안티파트로스 사후 마케도니아 섭정
  • 안티고노스(Antigonus) : 프리기아의 사트라프, 모노프탈모스(Monophtalmos, "애꾸눈")
  • 데메트리오스(Demetrius) : 안티고노스의 아들, 폴리오르케테스(Poliorketes, "도시 공격자")

처음 현안은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였다. 멜레아그로스와 보병 장교들은 필리포스 2세의 사생아, 즉 대왕의 이복 동생이었던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를 옹립할 것을 주장했지만,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자식이 태어나기를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결국 록사네는 아들을 낳았고 양측의 입장을 절충하여 아리다이오스와 갓난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각각 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와 알렉산드로스 4세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필리포스 3세는 간질 환자였고 알렉산드로스 4세는 갓난아이였기에 페르디카스가 왕국 섭정이 되고 멜레아그로스가 그를 보좌하기로 했다. 하지만 페르디카스는 곧 멜레아그로스를 암살하고 전권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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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직책인물
바빌로니아국왕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
알렉산드로스 4세
섭정페르디카스
태수아르콘
마케도니아
일리리아
(에페이로스)
(그리스)
섭정안티파트로스
트라키아태수리시마코스
소 프리기아태수레온나토스
대 프리기아
팜필리아
리키아
태수안티고노스
카리아태수아산드로스
리디아태수메난드로스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태수에우메네스
킬리키아태수필로타스
이집트태수프톨레마이오스

권력을 잡은 페르디카스는 바빌론에서 장군들에게 제국 각지의 사트라프 자리를 분배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때 이집트를 받아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에우메네스를 제외한 모든 유력 장군들이 마케도니아인이었으로 마케도니아의 향방이 중요해졌는데, 마케도니아는 최고참인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가 공동 통치하기로 했다. 마침 알렉산드로스의 부고를 틈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폴리스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두 장군이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에게 참패했는데, 이를 라미아 전쟁이라고 한다.

최고 지위를 차지한 페르디카스는 권력욕이 심해져 아내와 이혼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였던 클레오파트라와 재혼하려고 했는데, 그 이혼당한 아내가 안티파트로스의 딸이었으므로 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가 남몰래 손잡고 페르디카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BC 320년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가 대왕의 관을 마케도니아 아이가이(Aigai)의 왕실 묘지로 운구하던 페르디카스 측 군대를 습격하여 관을 탈취[2]하면서 양측의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통합된 제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에우메네스가 페르디카스의 명에 따라 반란자들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 공동 섭정 크라테로스와 싸워 전사시켰지만, 이집트로 쳐들어가려던 페르디카스가 갑작스레 암살되면서 전면전으로 비화하지는 않았다.

이후 트리파라데이소스(Triparadisus) 협정을 통해 전후처리가 이루어졌다. 새 섭정은 안티파트로스가 되었으며 두 왕(필리포스 3세와 알렉산드로스 4세)는 마케도니아로 이송되었다. 사트라프 자리도 재분배되었는데, 리시마코스가 트라키아를 받았고 페르디카스 암살에 일조한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받았다.

3 안티고노스의 야망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에서 장군들은 페르디카스의 명령에 따라 크라테로스와 싸워 그를 죽인 에우메네스를 없애기로 합의했다. 이에 BC 319년, 안티고노스가 대군을 이끌고 카파도키아에 있던 에우메네스를 공격하여 그를 노라라는 산악 요새에 고립시켰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에서 섭정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면서 새 섭정으로 폴리페르콘을 지명했고, 동맹할 만한 세력을 찾던 폴리페르콘이 에우메네스와 손을 잡고 그를 지원하였으므로 에우메네스는 무사히 탈출했다.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이던 카산드로스는 자신을 제치고 폴리페르콘이 섭정이 된 것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폴리페르콘에 맞서기 위해 안티고노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등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카산드로스가 승리했고, 패배한 폴리페르콘은 동탁이 어린 황제를 데리고 가듯 어린 알렉산드로스 4세와 록사나를 데리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와 자신의 고향인 에페이로스로 탈출했다. 에페이로스에서 군세를 정비한 폴리페르콘과 올림피아스는 마케도니아를 다시 침공했고, 올림피아스는 필리포스 3세와 그 아내 에우리디케를 생포하여 죽여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카싼드로스에게 또다시 패했고, 카산드로스는 올림피아스를 왕을 죽인 죄로 재판에 부쳐 처형시키고 마케도니아를 장악하였다.

안티고노스에게서 탈출한 에우메네스는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군세를 재정비했지만, 문관 출신에다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장군들이나 부하들로부터 경원시되었다. 그 탓으로 안티고노스에게 점점 밀리다가 두 차례의 큰 전투에서 연달아 패했다. 결국 BC 315년 안티고노스의 사주를 받은 자기 부하들에게 사로잡힌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에게 인도되어 처형당했고, 안티고노스는 아나톨리아에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란에 이르는 영토를 장악했다. 이때 바빌론의 사트라프로 있던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에 의해 쫓겨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에게로 도망쳤다.

이처럼 안티고노스의 세력이 너무 강해지자 BC 314년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손을 잡고 안티고노스와 맞섰다. 하지만 안티고노스는 이에 맞서 영토를 더욱 확장하는 한편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잔존해 있던 폴리페르콘 세력과 연합했다.[3] 이에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를 공격했고, 안티고노스는 이를 격퇴하기 위해 북진했다. 하지만 BC 312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패배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은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수복하자 안티고노스는 다시 남하해야 했다. 이쯤 되자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모두 휴전을 바라게 되었고, 결국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프톨레마이오스와 안티고노스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 휴전 협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이 협정은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안티고노스가 모두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졌음을 공인한 것이기 때문이다[4]. 실제로 카산드로스는 이 협정 이후 별 필요가 없어진 알렉산드로스 3세의 마지막 혈육 알렉산드로스 4세와 그 모친 록사나를 죽여버렸다. 그리고 폴리페르콘을 보내 알렉산드로스 3세의 사생아이자 그의 마지막 자손이었던 헤라클레스마저 독살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대는 단절되었다.[5] 한편 바빌론을 차지한 셀레우코스는 동쪽으로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대했고, 안티고노스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BC 311년부터 309년까지 바빌론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휴전 협정으로 잠시 숨을 돌리자 디아도코이들은 곧바로 딴 생각들을 품었다. BC 308년 카산드로스는 폴리페르콘과 화해했고, 이에 그리스 폴리스들이 동요하자 프톨레마이오스가 안티고노스와 은근슬쩍 손을 잡고 에게 해와 펠로폰네소스에 쳐들어갔다. 하지만 별 성과를 얻지는 못했고 안티고노스와의 협력도 곧 무산되었다. BC 307년 카산드로스가 에페이로스에 간 사이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를 점령했고, BC 306년에는 키프로스로 쳐들어가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를 연속으로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장악했다. 이 때부터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공공연히 을 칭하기 시작했고, 카싼드로스, 뤼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도 뒤질세라 왕위를 차지했다.[6]

카산드로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모두 한 방씩 먹인 데메트리오스는 BC 305년 로도스를 공격했고, 엄청나게 거대한 공성탑 헬레폴리스를 동원하기도 했지만 결국 로도스를 함락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할 때만 빼면 안티고노스를 지원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7] 데메트리오스는 그리스로 돌아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폴리스 동맹을 창설했고, 궁지에 몰린 카싼드로스는 휴전 협정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를 대적하기 위해 리시마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가장 가까운 트라키아에 있던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에 침입하자 그리스의 데메트리오스는 부친 안티고노스를 돕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철수했다. 아나톨리아를 휩쓸고 다니던 뤼시마코스의 군대는 입소스에서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의 군대에 의해 고립되었는데, 때마침 셀레우코스의 군대가 당도하여 양측 사이에 대전투가 벌어진다. 이것이 BC 301년 벌어진 입소스 전투로써, 디아도코이 전쟁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으며 셀레우코스의 압승으로 끝났다. 당시 70대 중반의 노인이던 안티고노스는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만 패잔병을 이끌고 겨우 그리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셀레우코스의 역습"이 가능했던 것은 서방에서 디아도코이들끼리 각축전을 벌이는 동안 셀레우코스는 큰 방해를 받지 않고 땅따먹기 하듯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동방 영토를 차례차례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저지할 만한 유일한 세력은 한창 인도 전역을 석권하고 있던 찬드라굽타의 마우리아 왕조였는데, 셀레우코스는 찬드라굽타가 차지한 동방 영토를 공격하려다 실패한 뒤[8] 휴전하고 BC 303년 동맹을 맺었다. 이 결과 셀레우코스는 아라코시아와 게드로시아, 드랑기아나 및 그 외의 모든 인도 접경 영토를 포기하고 딸을 찬드라굽타와 결혼시키는 대신 코끼리 500마리를 받았다. 이로써 다소 굴욕적이긴 하나 큰 손해 없이 안정된 동방 영토를 차지한 셀레우코스는 기본적인 수적 우위에 더해 페르시아 기병과 인도 코끼리까지 동원한 압도적인 전력으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타를 가할 수 있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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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스 전투 직전 디아도코이들의 영역.

입소스 전투 이후 안티고노스의 영토는 승자들이 나누어 가졌다.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 서부를,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대를 차지했으며 킬리키아와 뤼키아는 카산드로스의 형제 플레이스타르코스에게 돌아갔다. 데메트리오스는 테살리아, 그리스 일부, 키프로스 정도만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셀레우코스가 차지했다. 이 시기를 마케도니아의 안티파트로스 왕조 /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왕조 /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4왕국이 정립된 시기라 하여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4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라고 설명을 마치기도 하지만, 아래 서술하겠지만 안티파트로스 왕조와 리시마코스 왕조는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그야말로 광탈하므로 이후 3왕국의 정립까지 적는다.

4 3왕국의 정립

입소스 전투 이후에는 주로 마케도니아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패잔병들을 이끌고 그리스로 돌아온 데메트리오스는 재기를 노렸고, 플레이스타르코스로부터 리키아와 킬리키아를 빼앗았다. BC 298년 카산드로스가 병으로 죽은 뒤 그 아들인 안티파트로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에 내분이 일었고, 알렉산드로스는 데메트리오스와 에페이로스의 새 왕 퓌로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쳐들어가 알렉산드로스를 죽이고 마케도니아를 점령했으나, 리시마코스와 피로스가 서로 손잡고 압박해 오자 곧 쫓겨났다. 뒤이어 키프로스와 킬리키아, 뤼키아 등도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에게 빼앗겼다.

BC 287년 데메트리오스는 아들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게 그리스와 테살리아를 맡기고 아나톨리아를 침공했으나, 셀레우코스에게 패하고 사로잡혀 2년 후에 죽었다. 리시마코스와 피로스는 테살리아에서 안티고노스 2세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데메트리오스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리시마코스는 피로스를 배신하고 그를 마케도니아에서 쫓아냈다.

BC 282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숨을 거두었고, 큰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 대신 작은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결국 필라델포스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로 왕위를 계승했고,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에게 투항했다. 그 때 마침 뤼시마코스가 자기의 둘째 부인인 아르시노에의 말에 속아 첫째 부인 소생의 아들인 아가토클레스를 죽이는 일이 생겼고, 아가토클레스의 부인이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딸이었던 리산드라도 셀레우코스에게로 도주했다. 케라우노스와 리산드라는 셀레우코스에게 리시마코스를 칠 것을 종용했고, 셀레우코스는 아들인 안티오코스를 내정 대리인으로 임명한 뒤 리시마코스를 공격하여 BC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Battle of Corupedium)에서 그를 죽였다.

리시마코스가 전사하면서 그의 왕국은 붕괴되었으며[10], 마침 동방으로 대규모 이주하던 켈트 부족들이 그 힘의 공백을 틈타 마케도니아, 그리스, 아나톨리아로 쇄도해 왔다. 리시마코스에게 승리한 셀레우코스를 암살한 뒤 마케도니아를 차지하러 나갔던 케라우노스는 켈트 약탈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러자 그리스에서 근근이 버티고 있던 안티고노스 2세가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 BC 276년 리시마케이아 전투에서 켈트인들을 몰아내고, 나머지 켈트인들이 아나톨리아 중부의 갈라티아에 정착하면서 마케도니아는 겨우 안정되었다.[11]

BC 272년 마케도니아를 호시탐탐 노리던 에페이로스의 피로스가 전사하면서[12] 마케도니아는 확고한 안티고노스 왕조의 땅이 되었다. 이로써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라는 3왕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또한 이 3왕국에서 1세대(디아도코이)-> 2세대(에피고노이)의 왕위 계승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13] 왕조 체제 역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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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75년경 3왕국의 판도. 이 지도에는 파르티아 영토가 표시되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때는 아르사케스 왕조가 파르티아를 차지하기 전이었다. 은근슬쩍 마우리아가 땅을 더 먹어놨다[14]

이 이후의 역사는 다음 항목들을 참고하라. 이들을 보통 헬레니즘 왕조 혹은 계승자 국가(Successor States), 디아도코이 왕조 혹은 에피고노이 왕조[15]라고 한다.

안티고노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아래는 엄밀히 말하면 디아도코이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후대에 성립된 헬레니즘 계열 왕조들이다.

폰토스
페르가몬 (아탈로스 왕조)
박트리아

5 기타

한국역덕들에게는 참 애매한 시대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시기는 역덕들도 나름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지만, 그 이후의 디아도코이 시대는 역동적이고 피튀기는 시대인데도 막상 딱히 관심이 없다. 이는 디아도코이 이후의 헬레니즘 시대도 마찬가지였지만, 로마: 토탈 워 희대의 모드인 Europa Barbarorum의 등장 이후로 역덕들도 알음알음 손을 뻗치는 시기다. 셀레우코스를 주깁시다 셀레우코스는 나의 원수 EB와 토탈 워: 로마2의 시작 시기가 바로 BC 272년(…). 또한 만화 히스토리에가 이 시기를 다룰 가능성이 높다.

2013년 2월에 이 시기를 다룬 사서인 지중해 삼국지가 출간되었다. 이 시대에 손톱이나마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참조하시길. 세력 분포 등을 표시한 지도가 챕터 별로 수록되어 있다.
  1. 다이'애더키 처럼 발음된다.
  2.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정치 상징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후 보존 처리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은 황금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그의 무덤을 도굴해서 부장품들과 황금관을 쓸었고 그의 시신은 유리관으로 옮겨진 뒤 프톨레마이오스의 궁전 속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로마 아우구스투스가 참배한 기록이 있었으나, 기원후 5세기 이후에는 자연재해로 바닷속으로 신전이 잠기는 바람에 역사 기록에서 사라져서 현재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구 소련이나 북한 등 공산권 국가에서 지도자의 시신을 영구보존처리하여 정치상징으로 써먹는 행위의 원조가 바로 이것이다. 즉, 훌륭한 시체팔이.
  3. 다만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의 거점들에 틀어박혀 BC 303년 사망할 때까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4. 사실상 독자적인 왕국
  5. 카싼드로스는 기원전 301 병사했지만 그의 자손들은 요절하거나 내분으로 연이어 피살되었다. 그리고 안티고노스 1세의 아들 도시의 포위자 데메트리오스 1세에 의해 멸족되었다.
  6.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리스-마케도니아인이 아닌 토착민들에게는 진작부터 왕으로 행세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파르티아에서 사용했던 연호를 보면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로부터 바빌론을 탈환했던 BC 311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7. 데메트리오스의 별명인 폴리오르케테스(도시 공격자)와 프톨레마이오스의 별명인 소테르(구원자)가 이때 얻은 것이다.
  8.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아피아노스는 둘이 전쟁하다 "서로를 이해하게 되어" 동맹을 맺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아래 서술하듯 정치가 정말로 소년만화마냥 전개된 게 아니면 셀레우코스가 영토를 꽤 많이 떼 준 것을 보면 그의 공격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했음은 짐작할 수 있다.
  9. 셀레우코스는 다른 마케도니아인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 결혼한 페르시아 아내와 이혼할때 끝까지 이혼하지 않았고 자신의 후계자 역시 페르시아 아내와의 혼혈인 아들 안티오코스를 선택한 인물이다. 페르시아 기병대에 호감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10. 이는 나중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일대를 차지한 로마를 공격하는 명분이 된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리시마코스 왕조와 싸워 이겼기 때문에 그 영토인 트라키아 지역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정당한 전리품이라는 논리였다.
  11. 몇몇은 이집트까지 내려가 용병생활을 했다.
  12. 피로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안티고노스 2세가 다른 적들과 싸우는 동안 피로스는 이탈리아에 건너가 로마와 싸우고 있었다.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에페이로스로 철수한 뒤 안티고노스 2세를 상대적으로 만만하다 여겨 펠로폰네소스 일대를 들쑤시고 다니다 전사했다.
  13. 안티고노스 왕조의 경우에는 3세대
  14. 탁사실라 분파의 영역 확장이다.
  15. 디아도코이가 "계승자" 라면 에피고노이는 "후손"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