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배경

1 공식 배경

룬테라의 최고 마법사로 널리 알려진 라이즈는 산전수전을 겪으며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고대의 대마법사다. 가공할 마력과 무한한 체력을 보유한 그는, 태초에 무에서 세계를 창조한 원초적 마법의 파편인 룬을 찾기 위해 쉴 틈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룬이 룬테라에 어떤 참사를 일으킬 수 있는지 알고 있기에 라이즈는 룬이 잘못된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빠짐없이 찾아야만 한다.


세계 각지에 숨겨진 강력한 마법의 힘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라이즈는 젊은 청년이었다. 외교 임무 수행 중에 그는 스승 타이러스가 쭈글쭈글하게 늙은 어느 마법사와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들은 ‘룬’이라는 물건의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논의하고 있었다. 라이즈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타이러스는 항시 몸에 지니고 다니는 두루마리를 꼭 붙들고 서둘러 대화를 끝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룬 채굴이 늘어나면서 룬에 대한 지식도 확산되었다. 고대 문양인 룬의 위력을 알아내기 위해 전세계의 지식인들은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룬의 기원의 중요성이나 룬 속에 담긴 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각에서는 룬이 룬테라의 탄생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추론해 냈다. 미지의 유물 룬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룬테라 내 모든 국가의 지형이 모조리 바뀌었기 때문이다. 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창조자의 위력’이 무기로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가 생겨났고, 그에 따라 서로 간의 불신이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타이러스와 라이즈는 만연한 공포감을 가라앉히고 룬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방문했지만 임무를 성사시키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끈질긴 노력 끝에 재앙을 여러 차례 막긴 했지만 라이즈는 스승의 근심이 날로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전시 국가 사이를 중재하던 어느 날, 타이러스가 우려한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었다. 양국 군대는 라이즈의 어릴 적 고향 크홈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치 중이었다. 양측 모두 상대국이 룬을 무기로 사용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룬으로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양국 간의 긴장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고조되자 타이러스는 도저히 중재할 수 없는 싸움이란 걸 알게 되었다. 양측이 전쟁을 불사하는 상황에서 그는 제자와 함께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인근의 산맥을 반쯤 넘고 있을 때, 전투가 시작되었다. 라이즈는 발 밑에서 땅이 갑자기 꺼지는 것을 느꼈다. 땅이 요동치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머리 위의 하늘은 치명상을 입은 듯 움츠러들었다. 타이러스가 그를 잡고 소리치며 지시사항을 말했지만 초자연적인 정적이 내려앉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맞붙은 두 룬의 파괴력을 난생 처음으로 목격하고 있었다.


몇 초가 지나자 감각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초토화된 근처 산봉우리로 기어 올라가 양국 군대가 대치했던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말도 안 되는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물리적 원칙에 위배될 정도로 모든 것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군인과 백성은 물론, 토지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하루 거리에 떨어져 있던 바다는 이제 두 사람 쪽으로 몰아쳐 오고 있었다. 라이즈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세상 한가운데에 뚫린 거대한 구멍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정든 고향마저도.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룬테라는 전 지역이 포화에 휩싸였다. 전쟁의 참상을 통해 룬의 위력을 깨달은 룬 보유자들 사이에선 공포가 확산됨과 동시에 침공도 빈번해졌다. 라이즈도 고향의 가족을 앗아간 것과 같은 재앙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전쟁에 뛰어들어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의 손을 꼭 붙들고 타이러스는 복수는 더 많은 상처를 남길 뿐이라고 타일렀다. 라이즈는 스승의 말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속에 담긴 지혜를 이내 받아들이게 되었다.


타이러스는 전세계를 다니며 룬 보유자들을 만나 협조를 구했다. 룬테라의 미래를 위해 모든 룬을 인간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가두어 보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멸망의 위협이 목전에 다가오자 타이러스에게 룬을 넘긴 사람도 있었지만 룬 덕에 새로이 갖게 된 힘과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도 있었다.


타이러스는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룬을 모두 찾아내기 위해 쉼 없이 일했다. 세계가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은 날로 커져 갔지만 그와 라이즈의 사이는 뜻밖에도 점점 더 소원해졌다. 타이러스가 조금씩 변해갔기 때문이다. 타이러스는 룬 수집이 아닌 다른 사소한 임무를 라이즈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그런 사소한 임무를 수행하러 나간 어느 날, 라이즈는 끔찍한 대재앙이 또 한 차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는 이케시아 발로란 남서부였다. 라이즈는 스승이자 친구인 타이러스가 살아있길 기도하며 부리나케 현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하자 마자 라이즈는 타이러스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기쁨이 오래 가진 못했다. 라이즈가 단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한 두루마리 옆에 두 개의 룬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러스는 룬이 효력을 발한 이상 자신이 직접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라이즈는 타이러스가 단순히 재앙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재앙을 일으킨 장본인이란 것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타이러스는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모한 어린 아이처럼 인류가 알지도 못하는 힘을 가지고 놀았다고...무지한 권력자들을 상대로 외교관 노릇만 할 수는 없었다고…직접 나서서 그들을 막아야 했다고…


라이즈는 타이러스가 정신을 차리도록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존경해 마지않은 지혜로운 스승은 사라지고 없었다. 눈 앞의 사내는 자신이 폄하한 어리석은 이들만큼이나 쉽게 유혹에 흔들리는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룬으로 인해 뼛속까지 부패한 그는 룬을 쓰고 또 써서 세계를 시나브로 파괴할 것임이 분명했다.


하나뿐인 진정한 친구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라이즈는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는 갖고 있는 마법 에너지를 한데 모아 공격을 가했다. 타이러스는 룬만큼은 뺏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던 중 라이즈에게 순간 틈을 보이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타이러스는 검게 그을린 주검이 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라이즈는 격한 감정에 휩싸여 덜덜 떨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영롱한 빛을 뿜으며 유혹하는 두 개의 룬 옆에 홀로 서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나씩 룬을 집어 들자 온몸이 더욱 강력하게, 아니 더욱 끔찍하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라이즈는 부르르 떨면서 룬을 놓아버리고 뒤로 물러섰다. ‘스승님처럼 강하고 청렴한 마법사까지 망가뜨린 룬을 내가 어떻게 다룬단 말인가?’ 하지만 그가 포기하면 다른 누군가가 룬을 찾아 사용할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라이즈는 자신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깨달았다. 룬이 효력을 유지하는 이상 룬 전쟁은 계속되고 룬테라는 멸망할 터였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중, 타이러스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두루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펼치자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그 때, 라이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날부터 라이즈는 보이지 않는 부름에 이끌려 세계를 떠돌기 시작했다. 라이즈에게 그 부름은 안내자인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는 룬의 유혹에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그 어떤 생명체도 접근할 수 없도록 비밀의 장소에 룬을 묶어 놓았다. 이 일을 하며 라이즈는 수 세기를 보냈고, 그 과정에서 흡수한 마법으로 인해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라이즈는 아직도 속도를 늦추지 못하고 있다. 룬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세상은 룬을 휘두른 대가를 이미 잊었기 때문이다.

2 오랜 친구

온 몸이 긴장의 에너지로 불타고 있지 않았다면 라이즈는 차가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날 짊어지게 된 무거운 부담 때문에 그는 프렐요드의 매서운 눈보라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굶주린 얼음 트롤의 울음소리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즐겁지는 않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임무였다.


성문 앞에 다다르자 그를 검문하기 위해 군사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소나무 숲 사이로 그들의 털옷이 스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군사들은 몇 초 만에 성벽으로 올라가 창을 높이 올려 들고 진열을 갖췄다. 라이즈에게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을 찾으면 단숨에 처단할 태세였다.


“이아고를 만나러 왔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보랏빛 피부가 보일 만큼만 벗고 라이즈가 말했다. “급한 용무가 있다.”


결연한 표정으로 성벽 위에 서 있던 군사들은 룬 마법사를 보고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아래로 내려 와 육중한 목재 성문을 열었다. 성문은 침입자의 등장에 걱정 어린 한숨을 쉬듯 끼익 소리를 냈다. 이 마을은 찾는 이가 별로 없었다. 있다 해도 외부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의미로 죽임을 당하곤 했다. 하지만 라이즈는 룬테라의 가장 적대적인 지역에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드높은 명성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겨우 몇 분이긴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찬바람에 튼 얼굴로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공격할 명분을 찾고 있었다. 라이즈는 그 사이를 담담한 표정으로 걸었다.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 할머니 옆에서 라이즈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용기를 내어 다가왔다.


“주술사세요?” 소년이 물었다.


“뭐, 그렇게도 볼 수 있지.” 라이즈는 소년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라이즈는 마을 뒤편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놀랍게도 마을은 수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달라진 점이 거의 없었다. 그는 수정처럼 빛나는 얼음 돔을 한눈에 알아 보고 그곳으로 향했다. 나무와 흙이 거의 전부인 이곳에서 푸른 얼음 돔은 단연 눈에 띄었다.


‘언제나 현명한 친구였지. 아마 협조해 줄 거야.’ 라이즈는 심호흡을 하고 사원 안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사원 안에선 나이 든 마법사가 제단 위의 접시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라이즈가 다가오자 그는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머릿속으로 라이즈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라이즈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마법사의 얼굴에 이내 미소가 번졌고 그는 오래 전 잃어버린 형제를 만난 듯 라이즈를 꼭 안아주었다.


“너무 말라 보이네.” 마법사가 말했다. “뭘 좀 먹어야지.”


“자네는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살짝 처진 이아고의 뱃살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라이즈가 답했다.


두 사람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어제도 만났던 친구 사이처럼 편안해 보였다. 라이즈는 긴장이 천천히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이 세상에 별로 없었지만 어쩌다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영혼이 충만해졌다. 두 사람은 한 시간 동안 추억을 떠올리고 식사를 하며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유쾌한 일인지 라이즈는 잊고 있었다. 이아고와는 술 한 잔과 함께 승리와 패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몇 주고 함께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다 프렐요드의 한복판까지 오게 되었나?” 이아고가 마침내 물었다.


그 물음에 라이즈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이 때를 대비해 철두철미하게 준비한 말들을 재빨리 기억해냈다. 슈리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거의 하룻밤만에 소왕국 수준으로 보유 재산과 토지를 늘린 유목 민족을 조사하기 위해 라이즈는 슈리마에 갔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그들은 룬을 갖고 있었다. 라이즈가 추궁하자 그들은 저항을 했다. 그리고…


라이즈는 사원 안에 흐르는 정적만큼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세계가 무사하려면 지독한 짓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는 것보단 지독한 짓을 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고 이아고에게 설명했다.


“룬은 안전하게 보관되어야 하네.” 라이즈가 마침내 결론을 말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이아고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 사이에 돌아왔던 온기는 곧바로 증발해버렸다.


“룬은 트롤로부터 우리 마을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이네. 그걸 알면서도 가져가겠단 말인가?” 이아고가 물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지 않았는가.” 라이즈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지난 긴 세월 동안 알고 있었겠지.”


“시간을 좀 더 주게. 봄이 되면 남쪽으로 내려갈걸세. 룬 없이 겨울을 어떻게 보내나?”


“자네는 전에도 그렇게 말했네.” 라이즈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아고는 라이즈의 손을 잡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이 마을엔 어린 아이가 많네. 뱃속에 아기를 품은 여인도 셋이나 있어. 그들을 전부 희생시킬 순 없잖나.”


“마을 인구가 어떻게 되나?” 라이즈가 물었다.


“모두 아흔 두 명일세.” 이아고가 답했다.


“그럼 세계 인구는?”


이아고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은 못 기다리네. 룬을 차지하려고 어두운 세력이 모이고 있어. 이곳의 룬은 오늘 내가 가져가겠네.” 라이즈가 말했다.


“네 사리사욕을 위해 쓰려고?” 이아고가 시기 섞인 분노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전과 달리 험상궂은 적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라이즈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룬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룬을 사용하면 반드시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고. 하지만 격분한 이아고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라이즈는 돌연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바닥에 쓰러져 침을 뚝뚝 흘리면서 몸부림쳤다. 위를 올려다보니 이아고가 사정거리에 서서 필멸자가 소유해서는 안 되는 힘을 손가락으로 내뿜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라이즈는 마력의 원을 만들어 이아고를 그 자리에 묶었고 그 틈을 타 두 발로 일어섰다.


라이즈와 이아고는 오랫동안 세상이 보지 못한 힘을 서로에게 발사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이아고는 스무 개의 태양만큼 뜨거운 열기로 라이즈의 피부를 그을렸다. 라이즈는 강력한 마력으로 반격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마법 공격으로 인해 사원의 벽엔 구멍이 뚫렸고 급기야는 두툼한 얼음 돔이 무너지기에 이르렀다.


중상을 입은 라이즈는 잔해를 헤집고 밖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상처 입은 이아고가 잔해 속에서 꺼낸 자물통을 열려고 손을 더듬는 형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라이즈는 이아고의 두 눈 속에서 이글거리는 탐욕을 보고 이아고가 무엇을 꺼내려고 하는지, 그리고 이아고가 그것을 손에 넣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마법 에너지가 소진된 라이즈는 이아고의 등 위로 뛰어올라 자신의 겉옷에 있던 허리띠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단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깊이 사랑했던 친구는 이제 끝마쳐야 하는 임무에 불과했다. 이아고는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쳤지만 이내 숨이 끊어졌다.


라이즈는 이아고의 목걸이에서 열쇠를 꺼내 자물통을 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따뜻한 주황색 빛을 발하며 고동치는 룬을 꺼냈다. 라이즈는 죽은 친구의 옷자락을 뜯어 룬을 감싸 가방 속에 조심스레 넣고는 절뚝거리며 사원 밖으로 나왔다. 또 한 명의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에 애통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룬 마법사 라이즈는 마을의 성벽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었다. 도착할 때 그를 지켜보았던 거친 얼굴들이 길가에 서 있었다. 라이즈는 공격을 예상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의 사나운 방어태세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들은 눈 앞에 닥친 종말에 망연자실한 힘 없는 백성일 뿐이었다. 그들은 무력한 큰 눈으로 라이즈를 바라보았다.


“이제 우린 어떡하죠?” 소년의 할머니가 물었다. 소년은 할머니의 털옷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나라면 떠날 겁니다.” 라이즈가 말했다.


떠나지 않으면 어두운 밤을 틈타 트롤이 마을을 습격하여 주민을 몰살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마을 밖엔 더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같이 가면 안 돼요?” 소년이 물었다.


라이즈는 걸음을 멈췄다. 분별 없는 연민이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을 데려가자고. 이 사람들을 보호하자고. 다른 세상 사람들은 그냥 잊어버리자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수북이 쌓인 프렐요드의 눈밭 속으로 그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남겨둔 이들의 얼굴은 다시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하러 가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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