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일본어: 日露戦争(にちろせんそう)
러시아어: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파일:Attachment/rusjap war.jpg
거인난쟁이의 전쟁(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 Le Petit Parisien, 1904. 4. 3) [1]

1 개요

" 나는 우리가 한국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 니콜라이 2세 1901. 프로이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2]에게 (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의 운명을 결정한 전쟁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벌어진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대한제국에서 벌인 전쟁이다.

서구 열강 누구나 러시아가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러시아는 모두의 기대를 제대로 배신하고 말았다. 심지어 당시 영국에서는 사교클럽을 중심으로 전쟁의 양상에 내기를 건 사람들도 많았는데, 누가 이기느냐에 돈을 건 게 아니고 일본이 언제 패배하고 러시아가 언제 승리하느냐에 돈을 걸었다. 결국, 최종 승자는 일본이었기에 아무도 내기에 이기지 못하고 무효가 됐다. 헌데 영국은 원래 일본을 지원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1894년에 치른 청일전쟁 이후 10년만에 대국(大國)과의 전쟁에서 일본군 병력만으로 청에 이어서 대국을 상대로 무찌르며 승리한 전쟁이자 조선을 침략할 수 있는 기회와 자신감을 얻게 해주었던 전쟁이라 10년만에 청과의 전쟁 이후 연속으로 승전을 거두게 된 전쟁이었다. 그리고 승전의 대가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아갔다.

참고로, 당시의 아시아인들은 최초로 아시아 국가가 서구 열강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으로 보기도 했다. 또한 이 승리는 일본이 근대적 애국주의를 경험하기 시작한 전환점이다.

2 배경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게 막대한 전비와 영토할양을 했어야 했는데 그 중에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하였다. 러시아가 욕심내던 곳인 데다가 반도 끝자락의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일본의 세력 확대를 탐탁치않게 여기던 독일프랑스를 끌어들여서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키고 이후 두 국가는 반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는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대립을 벌였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갖고 있는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러시아가 인정하면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 이익을 인정한다고 제안했지만 러시아는 당연히 반대했다. 애시당초 일본은 러시아에게 원래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약소국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이용해서 일본을 꾸준히 압박해 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1896년 5월의 베베르-고무라 각서,[3] 1896년 6월의 러청 비밀협정[4], 그리고 3일 뒤인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5]을 연이어서 체결하면서 궁지에 몰린 일본은 심지어 아관파천마저 인정하는 국면에 몰렸다. 심지어 이때 일본은 39도선을 중립지대로 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여기서 고종은 줄타기하면서 적당히 러시아 세력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낸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려고 했다고 한다.

문제는 1897년 11월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독일이 중국의 칭다오 주변을 점령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는 청과의 비밀협정을 파기하고 만주 중에서도 요충지인 뤼순다롄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청나라로부터 강제로 양도받아 해군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이에 한반도 방면에 자원을 투입할 여유가 사라진 러시아가 양보하여 성립한 것이 1898년 4월에 일본에서 맺어진 로젠-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양국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여 내정 간섭을 자제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에서 이룩한 상업 관계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한제국 내 일본 경제권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만주 지역의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6]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자국의 국민들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고 송화강을 경계로 북만주를 빼앗으려 하고 더 나아가 만주 전체를 노리자, 서양 열강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만주에서 무역 이익을 보기를 원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매우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7] 게다가 러시아가 태평양 지역에 가진 부동항이 없기 때문에 [8] 부동항을 가지기 위해 대한제국과 청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러시아는 15만 대군을 만주로 보내 점령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진행시켰으며, 일본 및 다른 열강들은 철수를 요구하면서, 러시아는 일시 만주 철군을 발표했으나 조선에서 사태 진전이 러시아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철회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면서 상황은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렇게 대립이 심화되면서도 정작 러시아는 충분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일례로 뤼순 요새도 선전만 난공불락이었지 실제로는 청일전쟁 당시 구축한 중국제 요새를 수복하고 약간 강화한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상당 부분이 미완성이라 무늬만 요새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아직 미완성이라 여러 곳에서 끊어진 상태였으며 수송능력도 매우 낮았다. 결정적으로 바이칼호 근방 노선의 경우 호수 자체의 거대한 크기와 근방 지역의 절벽을 포함한 험준한 지형 덕분에 수십 킬로미터의 공백이 발생한 상태라 유사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철도였다. 덕분에 나중에 가면 겨울의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 철도를 임시로 부설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9] 물자 문제도 심각해서 석탄, 식량, 탄환, 무기, 옷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정 러시아는 군대를 팽창시키긴 했으나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인 극동 지역은 모든 게 부족한 상태였다. 항구의 경우 전함의 수리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전쟁 직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극동총독 알렉세예프에게 내린 훈령을 보면 '일본이 백두산 천지까지 점령하더라도 허용할 것.'으로 되어있다. 원래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차지하기 위한 의지는 굉장히 강했으며, 심지어 1903년에 러시아가 한국을 분할 통치하자고 일본에 제안한 적도 있었고 1902년 9월 12일 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로젠 남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올린 보고서에서 한국에 대한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로젠 남작의 견해에 따라서 러시아 정부는 만주에서의 철군을 철회, 1903년에 용암포를 무단으로 점령하고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록 미국과 영국, 일본 3국이 압박하여 물러나게 되나 이 용암포 사건은 일본에게 러시아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켜 러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 러시아 입장에선 당장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지 않아 한반도까지 병력을 진출시킬 여유가 없었다.

일본은 이미 전쟁을 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군비 확충과 국민들의 이념 무장, 만주 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첩보망을 갖춰놓은 상태였다. 모든 게 러시아에게 불리했다.[10]

3 경과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세밀히 관찰해서, 유럽에서 극동까지 동원되는 러시아군이 약 10만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에다 단선이라 1개 대대를 뤼순으로 보내는 데도 40여 일이나 걸렸다.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고작 10만 정도였는데 반해 일본군은 약 25만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하지만 7천 킬로미터가 넘는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본 일본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11]을 함으로써 러일 전쟁이 발발한다.

이후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기 이틀 전에 뤼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에 러시아도 선전포고를 개시하여 전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제정 말기인지라 무기도 노후한데다 워낙에 거리가 멀어서 지원도 어려웠고 병력도 분산되어 있는 어려운 처지였다. 한 예로 연발총용 탄환이 2,800만발이 부족했다. 결코 28만, 280만이 아니다! 거기다 유럽의 러시아에서 보낸 방한복, 털모자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전장에 도착했다.

반면 일본은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켜서 대한제국을 굴복시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확보했다. 영국도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로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러시아군 사령관 크로파토킨은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지난 뒤에야 현지에 나타난다. 그 자신의 판단으로도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르기에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객관적인 전력상의 우세를 점한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부 러시아에서 지원이 오려면 무려 40일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자는 전략을 택한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 차례의 전투 후 본인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간 벌인 전쟁들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 규모에다가 객관적인 국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어떻게든 한 방 제대로 먹여 러시아군을 괴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크로파토킨이 의도한 장기전에 따라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없이 철수해버렸고 봉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하고 그저 부분적으로 타격을 가해 후퇴시키기만 하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슬슬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군의 무능한 지휘력이 문제가 되었다.[12] 앞선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이야 상대가 상대였으니만큼 그럭저럭 먹혔고, 이후의 중화민국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와 미국은(…). 덕분에 전쟁은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어도 함대를 보내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은 있었다.

가장 유능했던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하여 몇차례의 해전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후려잡고 무능한 지휘관들을 쳐내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교체하는 등 강직하고 훌륭한 지휘관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미처 러시아 해군이 집결하기 전에 기뢰가 터져 기함과 함께 전사하끔살되는 바람에 해상을 일본이 장악하게 됐다. 일본 역시 기뢰로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호를 잃었으나 마카로프 제독의 끔살을 본 러시아 해군 장교들은 소극적인 행동을 벌였다. 그 동안 일본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고 만주로 진군해 러시아군을 압박했다.
지독한 뤼순 공방전 이후1905년 뤼순까지 점령하였으나 이때 역시 일본의 극심한 작전능력 소모 덕에 일본군 병력 손실이 심해 만주에서 러시아를 몰아낼 만큼의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특히 203고지의 뻘짓이 그 절정.

결국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끌고 온 발틱 함대는 이 해전에서 우월한 성능의 전함과 숙련도 높은 승조원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아키야마 사네유키라는 명장을 보유한 일본 연합함대에게 전멸되었고,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게 된다.

4 러일전쟁의 이면

4.1 일본의 속사정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 측은 자신들이 승리했으므로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야겠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측 대표였던 비테는 지금 국내사정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려는 것 뿐이지,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며 한푼도 낼 수 없다고 맞섰다.

이를 보면 우습게 보던 상대에게 참패하고 체면이 바닥까지 떨어진 러시아가 억지로 자존심을 세우려는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테의 말이 진실에 가까웠다. 우선 뤼순 요새의 함락으로 러시아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사실 일본군의 타격도 그에 못지 않았다. 뤼순을 공략하면서 일본군은 무려 3만명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개전 당시 일본이 확보한 군대는 20만에 불과했는데 그 중 2할에 가까운 전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는 점점 확대되었고, 봉천전투에서 약 7만명의 사상자늘 낸 일본군은 상당수를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신병으로 채워야 했다. 러시아 제정군도 많은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상비군 100만을 유지하고 예비군 동원에도 여유가 있었다. 다만 유럽 전선에 항상 주전력을 배치해야 하는 러시아 제국은 그 여유를 살릴 수가 없었다.

만주에서의 전쟁은 겉으로 보면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기보다 단지 격전 끝에 러시아군이 물러나는 양상에 가까웠으며 일본군 역시 지속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최대한 활용해서 유럽에 주둔 중인 주력 병력을 수송하고 만주 일대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던 병력은 이를 위한 시간을 번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애초에 땅이 워낙 넓다보니 철도타고 여유롭게 뒤로 빠지면 이를 추격할 여건이 전혀 안 되는 일본군은 무작정 추격하다간 자멸하거나 반격당해서 괴멸되는 관계로 뒤를 도모해야 하는, 전혀 우선권이 없는 행동 밖에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러시아군의 작전술의 기본이 빠른 후퇴 후 따라오면서 힘이 빠진 적을 친다는 전략이니 대륙전을 해본 적 없는 일본군이 그걸 따라갈 수가 없었다.[13]

그 후 러시아군이 집결하자 일본군이 이를 공격한 봉천 전투에서 결국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승리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면 수세방어로 참호를 파고 버티는 러시아군에 대한 포위계획은 결국 러시아군의 신속한 퇴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31만 러시아군과 25만 일본군이 맞붙었던 봉천전투는 러시아군 9만에(개중 2만 명은 미처 퇴각하지 못한 포로) 일본군 7만5천이라는 사상자 숫자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으며, 일본군으로서도 역시 더 이상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고 봉천을 격퇴시키며 발트 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를 주장했지만 인명 피해는 일본 측도 상당했던 것이었다.

러시아군은 비록 스스로 봉천 전투에서 물러난 것을 전투의 패배로 인식하긴 했으나, 기본적인 국력차를 고려할 때 전쟁에서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지속적인 병력 수송으로 최대 40만까지 북만주로 이동시켜 추후 공세를 노리나, 이전의 몇차례의 육전 패배와 사령부의 무기력함 때문에 강력한 공세로 나서지는 못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신속한 철도개설과 여러 갈래의 보급선 확보 등 보급에 최선을 다했지만, 기본적인 국력 부족으로 인해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며, 그 결과 식량 공급도 부족했고 방한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일본군은 만주의 추위에 떨며 주먹밥으로 연명하느라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었다.[14]

일본의 재정도 이미 파탄상태였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거액의 국채를 발행했지만 그 액수가 너무 늘어나자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이나 우호국이었던 미국도 더 이상의 매입을 거부하게 되어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당시 일본의 1년 세입이 2억엔에 못 미쳤는데 러일전쟁 총전비는 이미 19억 8,400만엔에 육박하고 있었다. 여기서 12억엔을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긴 했지만 만약 1~2개월만 전쟁이 지속되거나 러시아가 일본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강경론으로 나간다면 일본은 국가파산에 처할 위기였다. 물론 러시아도 만만찮은 전비를 지출하여 파산 위기에 있었으므로 피차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휴전협상에서 일본은 반드시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러시아 전권대사 비테는 배상금 지불을 강력히 거부했다. 일본 전권대사 고무라 주타로는 어떤 식으로든 배상금을 받아내려 했으나 러시아 측의 협상하기 싫으냐는 압박에 결국 본국에 상의하게 되었고, 일본 정부는 모든 상황을 재점검한 후 도저히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배상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협정을 진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협정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결국 일본은 최우선 목표인 조선만을 건사할 수 있었고 다음 목적으로 요구했던 사할린 전체 할양도 남사할린 할양으로, 하얼빈-여순의 동청절도 이득권도 장춘-여순선의 권리 획득으로 그쳤다.

당시 러시아가 전쟁 수행 의지를 잃어버리고 휴전협정에 나선 것은 전쟁 수행능력이 고갈되어 영·미의 간접 개입에 대한 부담감이 가장 컸고, 여기에 일본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게다가 봉천 전투와 뤼순 함락으로 인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탓도 있었고, 보급이나 병력의 보충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전쟁 중에 터진 피의 일요일 사건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피의 일요일 사건도 러일전쟁 초기 전투의 패배가 상당한 이유가 되었다. 만약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으면 그 여파로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을 것이었다. [15] 일본으로서는 행운이었던 셈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러시아에 있던 일본 외교관들은 비밀리에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3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사건, 상세히 설명하면 한 어린 소녀가 강간되어 임신당한 사건을 단지 소문으로 유대인이 저질렀다는 게 퍼지면서 유대교 회당을 비롯하여 유대인이라는 게 드러나면 사람들이 그냥 죽였다. 그런데 그 사건이 소녀의 친척이 저지른 걸로 드러났음에도 학살은 멈추지 않았고 이 와중에 수천에서 수만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및 폴란드 소수민족들이 학살 및 약탈, 강간을 당했고 결국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고, 이를 갈던 미국 및 유럽의 유대인 부호랑 폴란드인들이 일본을 지지하여 국채를 사들인 점도 있었다.

어쨌든 러시아나 일본이나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휴전협정에 비교적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서만 파악하고 있었을 뿐, 국민들에게는 일본군의 승리만이 선전되었으므로 막대한 배상금은 물론이고 당시 일본의 일각에서는 배상금뿐만 아니라 연해주랑 캄차카 반도도 할양받자(...)는 일본인들은 포츠머스 협정 내용에 빡쳐서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히비야공원방화사건 같은 반정부 폭동까지 일어났다. 당시 일본측 대표는 일본 정부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몰리기도 했다. 또한 휴전협정을 주선한 미국에 대한 비난도 이어져 강렬한 반미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대해서 미국 언론에서도 일본측의 황당무개한 행동을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양국 국민간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이건 말 그대로 전쟁에 이겼다고 해도 남는게 거의 없는 상황.

또한 사실상 전혀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어 한 번 모험삼아 걸어본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대승리를 거두게 됨으로써 "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나라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 보여도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뛰어들면 어떻게든 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후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호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 러시아, 아시아, 조선 모두에게 악영향을 끼친 셈.

군국주의의 발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에게 상당히 나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일본 육군은 위의 정신력 우월주의와 함께 봉천 전투, 203고지 전투 등을 겪으면서 보병의 총검 돌격을 통한 공세로만 일관된 전술에 집착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해군은 쓰시마 해전의 승리를 통해서 함대결전사상에 뼈속까지 중독되 버렸다. 이렇게 일본군에게 박힌 악영향이 이후 중일전쟁태평양 전쟁 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지경.

4.2 아시아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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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의 내면. 결국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뒤흔들린, 만주에서 치러진 전쟁이었다. 여기선 잘려져 있는 삽화의 해설문에는 고종이 러일전쟁에서 중립을 선택했단 기사가 짧게 나온다.

한국에서는 물론 을사조약을 맺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는 점에서 러일전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 외의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러일전쟁은 상당히 큰 여파를 남겼다. 황인종이 백인에게 승리한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당시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

중국에서는 이미 청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에 대해 재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러일전쟁은 뒤이어 그 영향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이 바로 쑨원이다. 물론 당시만 해도 량치차오처럼 벌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해 회의하고 돌아선 인물이 있기는 했지만.

베트남에서도 일본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아졌다. 일례로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축이 된 인물 중 한 명인 판쩌우찐은 러일전쟁을 위해 베트남 근해를 지나가는 발틱 함대의 위용을 지켜보았고, 그 발틱 함대가 일본군에게 무너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베트남 민족 운동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는 동유 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의 게이오 유숙을 본딴 통킹 의숙이 세워지는 등 한동안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일본의 승전은 이처럼 일본이 홍보하던 '대아시아주의'를 널리 퍼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다소 어이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조선에서도 러일전쟁의 승전에 잠시나마 기뻐했다. 그럴 수 밖에없는게, 상기한대로 일본 국민들조차 자세한 내막을 몰랐던 만큼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당연히 내막을 알 리 없는 상황이였고 이는 조선도 예외가 아닌지라, 어째되었건 조선인 입장에서는 '그래도 좋든 싫든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동네 총각 vs 어느날 불현듯 들어온 백인 코쟁이'의 싸움 정도로만 알았기 때문. 설마 이웃사람이 그 동네 총각 일줄은 누가 알았을까? 물론 일본의 진짜 의도를 깨닫고는 바로 항일투쟁을 시작하지만.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의 조약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체결되었던 조약이었고, 경부선경의선의 건설도 매우 수탈적으로 이루어졌다. 명백히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었음에도 을사조약과 같은 반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수호해주겠다는 일본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미 중립을 유지할 국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조선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독립협회 등의 활동처럼, 조선 내에는 러시아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고종의 탄압으로 이미 독립협회는 소멸되고 모두 러시아 편을 들 뿐, 소수 친일파만이 일본을 믿고 지지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야멸차게 조선을 배신했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 친일파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 중에서

당시 조선 내에 한중일이 연합해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열강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론이 널리 퍼진 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한중일의 연합 이론은 국제 정세에 무지했던 탓에 벌어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쇄국 정책으로 문을 걸어잠근 수십 년 사이에 조선과 별 차이도 없던 일본은 국제 정세를 잘 타고 동아시아 최대의 패권국으로 성장했으니.

한때 친미, 친러파였던 것으로 알려졌던 매국노 이완용은 이 때를 계기로 친일파로 전향하여 을사늑약의 주역이자 악역이 되어서 을사오적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전만 했어도 친러파였기 때문에 친일파도 배척했던 성향이었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자신이 지지하고 있는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망할 것을 예상하였고 여기에 미일간의 가쓰라 - 태프트 밀약까지 더해지자 결국은 일본 편에 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완전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친일에 완전히 빠지게 되면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5년 후에는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게 넘겨버리는 주역으로서 평생의 친일매국노가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혜안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그냥 쉽게 말해서 눈감고, 귀막고 자기 보고 싶은거만 보고 듣고 싶은거만 들으면 바보된다.

5 전후

포츠머스 조약미국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재했다. 이 사건 덕분에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러시아와 일본 모두 전쟁을 계속했다간 재정이 파탄나게 생겨서 반 강제적으로 전쟁을 끝내게 된다. 그러나 그 '평화' 덕분에 동방의 어떤 국가멸망으로 치닫게 된다.[16](...)

이후 러시아 제국의 무능을 비난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제1차 세계대전까지 벌어지자 견디지 못한 러시아인들의 분노로 제정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게 된다. 또한 일본은 이 때 서양의 열강인 러시아에게 승리하면서 다른 열강들로부터 그들과 동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이후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일본인데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배상금도 없고 영토할양한 남사할린도 당시로서는 큰 가치가 없는 곳이라 당연히 일본 국민들은 분노가 폭발했고 일본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가까스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그것을 진압하였지만 이후 일본 국민들의 불만이 급증해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민주주의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전쟁에서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열강으로의 인정이었고 이후 일본은 강대국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조정자라고 불릴 정도의 위신을 얻게 된다.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조선(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들어 합병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이후 그나마 마지막 희망인 세력 균형까지 깨졌다. 당장 조선의 입장에서는 둘이 계속 대립하다가 그 과정에서 완충지대로서 중립국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17] 결국 러일전쟁 종전 후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보호국으로 전락하며 일본령 식민지 병합이 진행되었다. 청일전쟁과 함께 한반도,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일동맹이나 가스라 테프트 밀약에서 볼수 있듯 러일전쟁 당시 영국이나 미국은 일본에게 우호적이었다. 따라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사실은 일본에게 있어 한반도에 진출하는 데에 더이상 방해될만한 세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러시아에게 있어 일본과 청 말고도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막기 위해 대러시아 봉쇄 정책을 펼친 영국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대조된다. 또한, 일찍이 정한론이 대두하였던 일본과 달리 러시아는 한반도 자체에 대한 합병에 관심이 없었다. 위의 니콜라이 2세의 발언처럼, 동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사는 줄곧 만주와 부동항 확보에 있었다. 때문에 러시아는 1903년 일본에 한국을 분할 통치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한반도 자체보다 만주의 안전 확보에 중점을 두는 모습이다. 한편, 일본은 러일전쟁 수행의 일환으로서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을 체결하였는데, 결과적으로 한일합방의 절차가 되었다. 따라서 러일전에서 일본의 승리는 러시아 승리에 비해 한반도가 손쉽게 병탄당하는 데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1902년 9월 12일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로젠 남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올린 보고서에서 한국에 대한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것만으로 한반도가 외세에 병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 후,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러시아와 일본은 다시 맞붙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할힌골 전투이다. 러시아 혁명 발생 후 러시아는 소련으로 바뀌며, 만주로 진출 하려던 일본군과 주둔중이던 소련 군이 할힌골 전투[18]로 맞붙고, 일본은 대패한다. 당시 소련(러시아)은 예전 러일전쟁 때의 2류 공업국가 러시아 제국이 아니라 세계 2위 규모의 공업국 소련이었다. 일본은 할힌골 전투 패배 후 중앙 아시아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동남 아시아 방면으로 진출 한다. 이후 일본은 독일의 소련 배후 공격 요청도 묵살하며 소련을 피했고, 소련 또한 종전 직전까지 일본과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독일의 패망 후 소련은 아시아로 진출 하고자 태평양 전쟁 참전을 선언하고 남하하기 시작 했고, 이를 저지하고자 미국은 일본에 원폭을 결정하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된다. 결국은 한반도의 북부는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한반도 차지를 위한 전쟁은 최종적으로 러시아의 승리가 되었고, 러시아는 한반도 북부에 소련군정을 세우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안가 이 한국 전쟁으로 한반도 자체가 또다시 전장이 된다.

이 전쟁은 또한 일본 정부에게 국민의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래와 같은 삽화가 매 전투마다 수백개, 수천개 출판되어서 각 도시와 마을의 중심가에 걸려 모든 국민이 일본군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서 천황폐하에게 목숨을 바치는지 상세히 보여주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군가를 연주, 녹음하였다. 군함행진곡, 눈의 진군, 히로세 중좌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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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인해 세계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의 패배를 생각하고 거문도를 점령해 해군기지화 하는 등 러시아군과 맞설 계획을 하고 있던 영국은 1세기간 이어졌던 그레이트 게임을 종결했다. 이는 영러협상로 이어져 러불동맹, 영불협상과 함께 삼국협상이 탄생하고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에이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10년뒤의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어 세계 공산화에 큰 족적을 남긴 소련 탄생의 배경도 됐다.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일본이었지만 이로써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이권을 지켜내었고, 이를 바탕으로 나중에 중국 본토 등을 침공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 태동의 단초를 제공해주었다.

6 관련 문서

6.1 주요 전투

6.2 기타 관련 문서

  1. 당시 세계열강들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무대에 끼어들지 못해서 뒤에 매달려있는 구경꾼으로 전락해버린 중국(청나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의화단 사건에 의해 만주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열강들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이다. 무대의 바닥에는 만주를 둘러싼 동아시아 지도가 그려져 있다. 일본 선수는 한발을 조선에 두었고, 러시아 선수는 거만하게 일본을 쳐다보고 있다.
  2.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해군 원수. 1899년 방한하기도 했었다.
  3.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와 주조선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 사이에서 체결. 일명 경성의정서 혹은 베베르 소촌 각서. 고종의 환궁과 자주권을 보장하고 조선 주둔 러시아와 일본군을 800명으로 제한했다.
  4. 이홍장-로바노프 협정. 러시아, 청, 조선 가운데 하나라도 공격을 받으면 서로 협력하여 요격한다는 협정. 이를 위해서 청은 길림성흑룡강성을 통과하는 철도 부설권을 러시아에 넘겨줬다.
  5. 조선의 군경 양성을 허용하고, 양국은 균형적으로 지원한다. 비밀 조항으로 만일 양국이 출병하게 되면 같이 출병하며 양국 사이에 군사중립거점을 둔다. 일명 모스크바 의정서 혹은 로바노프 산현 의정서.
  6. 이 과정이 조선에 영향을 준 사건이 바로 1897년 12월 창설 예정이었던 한러은행이 다음해 3월로 연기된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를 독립협회와 관련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투쟁으로 막아낸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일시 변심하고 러시아 군사고문단을 해고하기로 한 것이 원인이고, 그나마 얼마 못가 재개되었다.
  7. 그래서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의 아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을 키워야 한다'는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과 여론을 견지하게 되는 데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시각이 1920년대 워싱턴 회의 체제까지 지속되었다.
  8.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이 아니다.
  9. 러일 전쟁 말기에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패색이 현저해진 상태였다.
  10. 물론 러시아도 바보는 아니었고 이에 대한 문제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만 완성되면 유럽 러시아의 주력군과 물자를 러시아 철도를 통해 만주까지 보내면 그 정도 문제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문제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먼저 일본이 공격해올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지 못해서 제 역할을 못했다는 거지만(...).
  11. 단, 당시 전쟁 전 선전포고는 의무사항이 아니였으므로 국제법 위반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선전포고는 국가간의 암묵적 전통이기에 일본은 미리 러시아가 1809년에 스웨덴을 기습공격했단 사실을 명목으로 사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12. 이 고질병을 정확히 말하자면 보급이나 장비 등에 제한이 가해질 수 밖에 없는 국력상의 문제를 일선 장병들과 중하급 지휘관들의 정신력으로 때워보려는 시도가 거의 처음 나타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13. 만약에 전장이 주요 도시와 가까운 러시아 서부였다면 혹시 모를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의 일본군보다 몇배는 막강했던 독일 국방군2차 대전 때 여기를 못 넘고 궤멸당한 걸 생각하면 보급에 한계가 있는 일본군이 러시아 서부랑은 비교도 안될만큼 훨씬 넓디넓은 시베리아를 육로로 돌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가다가 다 죽겠다 이놈들아
  14. 단 일본의 의료체계는 상당히 선진적이어서 비전투 손실이 이전보다 확실히 줄었을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놈의 각기병 [1]
  15. 결과적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러시아 황실 붕괴→사회주의 혁명 테크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차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이것은 1차 세계대전 시점의 사정이다. 러시아에서는 본격적으로 혁명의 열기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은 국내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더 이상 외국과의 전쟁에 신경쓸 수 없게 된 것이다.
  16. 종전협정이 열렸던 포츠머스에서는 매년 포츠머스 조약체결일에 축제를 연다. 자기네들이 중재하여 전쟁을 멈추고 세계평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본다면, 지극히 강대국적인 마인드가 아닐 수 없다.
  17. 타이가 이 케이스이다.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를 식민지로 만든 프랑스와 인도와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만든 네덜란드등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독립을 유지했다. 비록 러시아의 내정간섭은 심했지만 몽골도 중국과 러시아 등 양대 강국의 줄다리기 사이에서 독립을 지켜냈다..
  18. 영화 '마이웨이' 배경. 전차 창격술을 볼 수 있다.
  19. 비록 청일전쟁시에 작곡되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대규모로 이용되었다.
  20. 당시 일본에서 제작된 반전시
  21.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이 시마네 현 고시를 통해 '점거'하고 해상 망루를 설치마개조한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 게다가 점거와 동시에 원래는 울릉도를 가리키던 다케시마라는 이름까지 여기에 갖다 비벼놓았다. 사실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가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