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톨스토이

1 개요


레프 니콜라예비치[1]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Lev Nikolayevich Tolstoy)
1828년 9월 9일 ~ 1910년 11월 20일

강세가 있는 러시아어 발음은 례프 니깔라예비치 딸스또이. 레프(Лев)라는 이름의 영어식인 리오 톨스토이(Leo Tolstoy)로도 불린다. 레프는 러시아어로 사자라는 의미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끝판왕

러시아위대한 대문호이자, 도덕적, 종교적 사색가이며 기독교적 아나키스트이다. 동 시대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와 자주 비교되는데, 이 비교는 인터넷 키베에서부터 후대 문학인들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러시아 문학계의 초대형 떡밥이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2 초기의 삶

톨스토이는 1828년 제정 러시아의 툴라 근방의 톨스토이 가 영지인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2세때 막내 여동생을 낳고 사망하여 '숙모'라고 부른 먼 친척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다. 숙모라 불린 친척 에르골스카야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다름없이 톨스토이의 훗날 성장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2] 사실 '숙모'는 아버지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톨스토이의 조부가 집안을 말아먹고 빚을 남겨서 부유한 여성을 만나기 바라는 대인배 마음으로 청혼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아는 톨스토이의 생모와 관계가 오히려 나쁘지 않았고 톨스토이의 생모가 사망하자 레프 톨스토이의 아버지가 다시 청혼하지만 아이들과의 사이가 어색해질까봐 다시 거절하고 대신 평생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가정사는 1836년경 아버지의 유품 편지를 정리하다 톨스토이가 발견했다고 한다.

참고로 톨스토이의 막내 여동생은 '숙모'라 불린 에르골스카야 아주머니의 조카 톨스토이 공작[3]과 결혼한다. 아버지는 카자 주지사를 거치며 관직을 역임했지만 9세 때 급사하여 큰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가 14세 때 큰고모도 사망하여 작은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 이때문에 톨스토이가문 형제들은 부모없이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고 형제들과의 사이는 전부 좋았다고 한다. 특히 맏형인 니콜라이를 좋아했는데 맏형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1844년에 외교관이 되려고 카잔 대학 동양어학과[4]에 입학했다가 다시 농민들을 위해 일하려고 법과대학으로 전과하였지만 학업에 열의는 없고 스스로 관심분야에 책만 보던터라 수업태도 불량으로 유급당했고 결국 자퇴한다. 1847년에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위의 형 셋과 달리 당시 귀족들의 진로인 문관이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중에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농촌에 틀어박힌다.

이때 잠시 농촌생활에 열의를 가지고 농노들에게 교육이라든가 병원을 제공하고 온정적인 지주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농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불신으로 실망하고 다시 도시로 나오게 되었고, 이후 젊은 톨스토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학사검정고시로 학사학위는 따지만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어머니가 2살 때 죽어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진 톨스토이는 성장하면서 여자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거액의 도박빚을 지는 등, 계속 무분별하게 살아가던 톨스토이는 도스토모씨와는 달리 도박을 끊기로 결심하고 그러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여 맏형 니콜라이가 복무하던 캅카스 전선으로 여행을 간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농노제도 없이 사는 카자크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5] 그들의 언어와 문화 풍속들에 깊은 감명을 가지는데 여기서 쓴 글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을 병탄하기 위해 그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톨스토이는 호전적인 소수민족인 체첸인들과 상대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입대하여 당시 귀족들처럼 유년군사학교나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 포병 하사관부터 시작하여 공을 세워 현지임관하고 복무 중에 틈틈이 그의 성장기가 반영된 반자전적인 소설을 썼는데 <유년 시대>(1852), <소년 시대>(1854), <청년 시대>(1857)가 그것이다. 이때쯤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고 전역신청을 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전역이 거부당하고 크림 전쟁에도 참전한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 전투에 공을 세웠고 공을 인정받아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고, 중위로도 진급한다. 이때부터 문필생활을 하기 시작하여, 1855년에는 세바스토폴 전투에 관한 짧은 글들을 잡지에 실었다. 이것이 <세바스토폴 이야기>이다. 이런 군경험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잔혹한 체험 때문에 톨스토이는 평화주의로 기울게 된다. 톨스토이는 1856년에 군에서 제대하고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서유럽을 두 차례 여행했다. 그 곳에서 교육 방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신문 <야스나야폴랴나>를 발간해서 자신의 교육관을 설명했다.

3 창작 전기

톨스토이는 30살이 넘어 겨우 정신을 차려 아내를 맞이했는데, 아내로 고른 여자가 하필이면 18살밖에 안된 친구의 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였다(당시 톨스토이는 34살). 어쨌든 나이차에 관계없이 톨스토이는 소피아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소피아의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은 톨스토이를 매료시켰고 그의 걸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 소피아를 모델로 한 주요 인물을 등장시키게 했다.

톨스토이는 1869년의 희대의 대작 <전쟁과 평화>를 완성시켰다. 나폴레옹 전쟁러시아 원정을 소재로 한 이 역사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실제로 특출난 사람이나 영웅(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은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역사관을 내세우며 '위대한 사람'을 중요시하는 역사관을 강력히 부정해 뭇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7번이나 격전지를 답사하고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는 소련 시절에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공산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인원동원이 간편했기에 보조출연자연인원 총 75만(!!)을 동원해 거대한 전투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이는 기네스북에도 오른 기록이다.[6]

톨스토이는 1875년부터 1877년까지 그의 두 번째 걸작 <안나 카레니나>를 연속물로 출간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불륜을 다룬 것 같아 보이는 이 소설은 1870년대의 귀족계급과 러시아의 사회, 도덕, 철학에 대한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 특히 간통에 대한 상류계급의 위선적인 태도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종교적 신념의 역할 등을 강하게 고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2007년 노턴출판사에서 조사한 영어권(!) 작가 125명이 선정한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뽑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보다는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했다고.

4 회심(回心)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던 해에 톨스토이는 갑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톨스토이는 도덕적 자기 점검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런 물음을 <고백>(1879)라는 에세이에서 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정신적 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교회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톨스토이는 그 에세이에서 어떤 폭력이나 무력의 사용은 해로운 것이며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맞서야 하고 정부로 대표되는 무력이나 종교, 사유재산, 맹세 등 모든 형태의 강제적인 힘에 반대하는 사상을 펼쳤다. 이는 후세에 '톨스토이주의'라는 사상 형태로 발전되었다.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강한 열정을 느낀 톨스토이는 거름통 들면서, "나도 농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동경했던지라 <인생론>, <참회록>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스스로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다.

부인 소피아는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의 폭탄선언을 듣자 톨스토이와 대판 다투고 만다. 물론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겠지만 이제껏 귀족으로 살아 온 소피아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소작농들도 톨스토이에 동조하지 않고 되려 그를 비웃었다(...) 톨스토이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을 소피아에게 양도했지만 소피아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했다(!).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준에 따라 톨스토이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흑역사 취급했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 문학계에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5 후기 작품과 최후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을 시작으로 다시 소설 쓰기로 돌아갔다. 이 작품을 읽고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톨스토이는 동서양 최대의 작가"로 극찬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찬미자는 나보코프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가 있다. 이때부터 러시아 민담과 설화에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민담 형식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바보 이반>, 조이스가 세계문학이 아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극찬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7],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그것도 나다로 끝이 나는 <사랑이 있는 곳이 신도 있다> 등의 단편 소설들을 썼으며 국내에는 <톨스토이 단편선>으로 다른 톨스토이의 걸작들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다만 후기 톨스토이 작품들은 과학교회[8] 악마의 발명이라고 조롱하는 등의 서술로 인해 전기 작품들에 비해서 홀대밭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부터 성욕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는데, 그 영향으로 노년에는 성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은 <크로이체르 소나타(1890)> 와 <악마(1889)>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톨스토이는 섹스를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행위로 비판하고, 인간이 성욕에서 해방되지 않는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상낙원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주장한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악마>는 둘 다 자신의 성욕을 절제하지 못한 주인공의 파멸로 끝난다. 둘 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톨스토이 역시 젊은 시절 아내 소피아와 결혼식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마차 안에서 강간한 적이 있었고 결혼 후에는 하녀들이나 농부들과의 관계를 즐겼다. 섹스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과거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고해성사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사회 운동가들[9]의 구명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걸작인 <부활>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매우 매우 수위 높은 비판 때문에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다.[10]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나 전 작품들을 고려하지 않고 부활 그대로의 작품만 본다면 절대 졸작이라 평할수 없다. 대귀족인 신분으로서 하층민들의 삶을 이해해가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은 그당시나 지금이나 어지간한 내공 아니고선 쓸 수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하지 무라트(Хаджи-Мурат)는 자신의 군복무 시절에 만난 무슬림 아바르인 전사, 하지 무라트의 이야기로 톨스토이 최상의 작품에 속하며 해럴드 블룸에 의하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꼽히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아와의 갈등은 점점 격해져만 갔고, 결국 대판 부부싸움을 벌인 이후 나이 80이 넘어가는 늘그막에 농민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딸을 데리고 가출을 시도하였으나, 기차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1980년대 위인전에선 비참하게 겨울 날씨 역에서 동사했다고 나온 바 있었는데, 그건 아니고 역장 숙직실로 옮겨져 눕혀진 상태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사람들은 왜......."

하여간에 엄청나게 건강했고 70세에도 젊은이와 다름없는 근력을 지녔다고 한다.

6 전쟁과 평화의 고증성 논란 떡밥

항목 참조

7 톨스토이의 조상

쿠투조프 관련
앞서 전쟁과 평화 떡밥과 관련하여 쿠투조프가 톨스토이 가문 조상설(?)까지 돌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쿠투조프는 딸만 5명을 남기고 외손자 마트베이 표도로비치 톨스토이(П. М. Толстой,Matvei Fyodorovich Tolstoi)가 물려받았다 해서 레프 톨스토이는 쿠투조프의 외증손이고(?) 전쟁과 평화에서 조상빨로 실제이상 후빨 했다는 음모론(?)까지 있는데. 결론부터 쓰자면 쿠투조프는 레프 톨스토이의 조상이 아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할머니는 고르차코바 공작 가문 출신 펠레게야 니콜라예브나 톨스토야 백작부인이지 쿠투조프의 딸 파라스코비아가 아니다...

톨스토이 가문은 14세기 발트지역 리투아니아에서 발원한 귀족가문으로 꽤 후손이 많은 편이고[11]쿠투조프의 진짜(?)외증손은 이반 이바노비치 톨스토이 백작(Ivan Ivanovich Tolstoy: 1858~1916)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12]

레프 톨스토이 직계 조상의 간략한 가문 역사를 쓰자면 17세기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절부터 톨스토이 가문은 궁내관, 궁정고관 군인 등을 지냈고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절 레프 톨스토이의 현조부 표트르 안드레예비치가 여러 활약[13]으로 백작 작위를 획득하고, 가문의 중시조급 조상이 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1세를 옹립하는데 공신이 되었고 2년 만에 사망하자 이반 5세의 후손 안나 이바노브나가 등극해서 고조부 이반페트로비차와 나란히 체포되어 작위와 재산이 박탈되고 이반 페트로비치는 현조부보다 빨리 병사하여 가문의 위기였지만, 증조부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시절 엘리자베타 여제가 즉위 하며 작위와 재산이 복구 되었고, 조부 일리야 안드레비치는 해군장교와 근위병으로 활약하고 준장으로 퇴역 했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는 조부의 외아들이며 두 여동생이 있는데 1812년 전쟁에 참여했고 파리까지 전투에 참여하여 훈장을 얻었고 중령퇴직 후 카잔 주지사를 지냈다.

톨스토이의 외가 볼콘스키 공작가문[14]은 톨스토이의 친가보다 더 명문가인데 가문의 기원은 7~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류리크비치 가문과 체르니고프스키 가문의 후손으로 러시아 전통 귀족중에서도 성골급으로 치는 초명문가이다. 볼콘스키 가문의 성은 과거 영지의 볼콘카 강에서 유래하여 13세기부터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톨스토이가 물려받는 야스나야 폴라냐는 외증조부 쿠투조프가 아니라 육군소장을 지낸 '세르게이 표트르비치 볼콘스키 공작'이 구입하였으며, 외조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는 예카테리나 2세시절 고관을 지냈다가 좌천되어[15] 영지에 정착했고 외동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를 낳았지만 딸이 2세때 아내가 사망하였지만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하나만을 열심히 길렀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외조부는 당시 러시아 귀족과 달리 상당한 지식인이라서 프랑스 문화와 볼테르에 관심이 많았고, 어머니 마리야에게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영어에 수학 물리학 경제학까지 가르치고 자신은 식물과 원예 연구를 하면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어머니 마리야는 외조부가 죽고 얼마 후에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를 만나 결혼하고 톨스토이 가문은 외가 재산을 몽땅 물려받아서 떼부자가 되었다. 결론은 장가를 잘가야 한다.

8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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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도 명문 귀족이었던 톨스토이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는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 - 밝은 숲의 빈터) 라고 불린다. 모스크바 에서 남방 200km 떨어져 있는 툴라 시의 근교에 있다. 외조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볼콘스키 공작의 영지로 외동딸인 그의 어머니 마리야 니콜라예브나가 물려받고 아버지와 결혼 한 후 이곳에 정착했다. 백작 작위를 가졌던[16] 톨스토이는 장년기 이후 이곳에 정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자신의 자택을 이용하여 학교를 만들어 소작농들의 자식을 가르쳤다. 이 저택은 작은 도서관도 딸려 있는데, 장서수는 2만권을 넘는다고. 톨옹이 사망한 후에도 이 영지내의 묘지에 묻혔다.

톨스토이가 사망한 후, 미망인 소피아는 정부에 이곳을 국가가 관리해 줄 것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1917년 집권한 공산 정부는 집권한 후 바로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하고 국가가 관리했다. 다만 이곳의 관리를 톨스토이의 큰딸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는데, 그녀는 공산 정부가 싫어서 이후 해외로 망명해버리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때 이 영지는 독일군에게 접수되고 자택은 독일군의 야전병원으로, 그가 남긴 원고들은 독일군의 땔감이 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더구나 독일군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톨스토이 묘지 옆에 줄줄히 전사한 자군 병사들의 무덤을 썼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침략자와 동침하게 된 톨스토이옹이 황천에서 상당히 불편하셨을듯..

그 당시 톨스토이의 자택을 접수했던 부대를 지휘한 독일군 지휘관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서전 "기계화부대장" 에서 자기는 대문호의 저택에 손까딱 하지 않았고, 땔감설은 소련의 모략선전이라고 주장했다. 근데 소련의 선전선동 못지 않게 구데리안의 자서전도 자기 변명이 꽤 많아서 진실은 저너머에.

어쨌든 독소전쟁 후에는 독일군이 톨스토이옹의 저택에 저지른 여러 만행들은 모두 원상복귀되었고, 현재는 2차대전 이전의 상태로 보존되어 공개되고 있다.

9 평가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도 톨스토이는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는 기묘한 현상이 생겼다. 톨스토이가 특히 소련 체제에서 높이 평가받은 이유에는 농민의 현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이 공산 세력의 '프롤레타리아 정신'과 연결된다는 점도 있었다. 한 예로 블라디미르 레닌은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다만 톨스토이만 이런 높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고 러시아의 문학 애호 경향은 소련에서도 유유히 이어져서 알렉산드르 푸시킨, 니콜라이 고골, 안톤 체호프 등의 대부분의 문호들은 소련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소련에서는 (적어도 문학에서 만큼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대대적인 문화탄압이나 과거부정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저 구체제적 경향이 농후한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비판받은 정도였다.[17] 대폭 평가 절하된 인물은 혁명 운동을 악령으로 디스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정도고 그도 흐루쇼프 시절에 복권되었다. 오히려 러시아 문학의 전통은, 막심 고리키, 알렉산드르 헤르첸, 투르게네프등의 작품을 유년 시절부터 읽고 열광하며 혁명과 인민 해방의 꿈을 꾸며 자라 결국 나라를 얻게 된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등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을 통해 소련 체제의 성립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다.

2차대전 이후 동독에서도 보인 특성이지만, 제정 러시아의 문필가들은 정치성 만으로 목숨이나 경력, 명성을 날려 버리기에는 볼셰비키 혁명가-지도자들에게 당장 감정적인 차원에서부터 너무 큰 존재였다. 후에도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저자 미하일 불가코프, 돈 강은 흐른다미하일 숄로호프 등 적지 않은 작가들이 소련의 공포 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점에서 반체제 작품을 기고했음에도 목숨을 연명했을 정도다.

제정시대 리얼리즘과 소비에트 시절의 문학이 단절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지나치게 단순한 주장이다. 이는 마치 일제시대의 임화의 이식문학론과 유사한, 문화변동에 대한 극단론이다. 아무리 정치체제가 바뀌었어도 살아있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문학이라는것이 금세 단절되고 새로 사조를 만드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제정시대의 문학에 매우 호의적이었기 때문에,굳이 단절을 이야기 할 필요도 없었다. 예를 들어, 막심 고리키가 제정시대에 쓴 작품들은 소비에트 리얼리즘의 원형이 되었고, 소련시절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하일 숄로호프의 작품들조차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현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재창조했다고 극찬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 성립후 문맹이 퇴치되고,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19세기 대가들의 작품이 지식층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폭넓게 읽혔으며, 제정말기에 정점에 이른 19세기 문학은 소련시절 이념적 압박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문학이나 비평에 영향을 끼쳤다.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직접적으로 솔제니친과 같이 체제를 명시적으로 디스하지 않는 이상 작가가 탄압받은 적은 거의 없다. [18]소비에트 시절은 이념적 압박은 있었지만 오히려 제정시절에 비하면 , 물질적으로는 작가들이 훨씬 우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문학성을 인정받아 작가동맹의 회원이 되면, 사회주의 경제하에서 배급에 우선권을 얻거나 집필을 위한 유급휴가를 얻는등, 여러가지로 우대를 받았다. 또한 소비에트 시절을 잘 모르는 서방의 평론가들은 소련에는 질낮은 프로파간다 소설이 판쳤을 것이라고 으례 짐작하곤 하지만, 제정문학의 적자를 자처하는 작가동맹에 가입하려면 당이 아니라 이런 동업자들의 엄격한 평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예전에 한국에서 등단하려면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를 통과하고 기존 작가의 추천을 받아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된다..), 이념의 압박을 강하게 받던 소비에트 문학에도 미학적 고려는 빠질 수가 없었다. 작가동맹에서 축출된 반체제 작가들이 이런 혜택을 못받고 번역등의 잡일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한건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극소수의 베스트셀러 작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가도 사실 마찬가지 처지 아닌가?

물론 솔제니친과 같은 반체제적 작가들은 작가동맹에서 파문당하고 의사 지바고처럼 체제 자체를 비판하는 소설은 출간이 철저히 금지된 건 사실이고, 일반 출판물에서도 반체제적인 요소들은 검열 때문에 걸러진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 전부가 탄압받은 것도 아니며, 반체제 작가들이 숨어서 작품활동을 아주 못한것도 아니다. 사미즈닷(самиздат)이라는 지하출판물은 익명으로 계속 돌고 있었으며, 작가동맹에서 배제된 반체제작가들이 지하로 숨은 건 맞지만 아주 박멸된 건 아니다.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경우도 다른 방면에서 활약했던 반체제 인사들에 비하면 훨씬 더 온건하게 처벌 받은 편에 속한다. [19] 게다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소련에서는 SF 소설과 역사소설 장르가 발달하기 시작했는데, SF의 경우 주로 흥미 위주의 싸구려 양판소물이었던 동시대 미국의 SF보다는 훨씬 문학성이 뛰어나고 SF의 선구로 평가받고 있다.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바로 톨스토이의 친척인 알렉세이 톨스토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83-1945).


오히려 소련체제가 붕괴되고 나서 정말로 러시아에서는 순수문학은 씨가 말랐으며, 출판계는 붕괴되었고, 서적은 출판부수나 출판종류 모두 줄어들었다. 예전에 작가들은 문학교사 등의 일자리를 쉽게 얻을 수 있었으나, 현재는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데다가 출판이 막혀있기 때문에 입에 풀칠하기도 급급한 실정이다. 예전에는 반체제작가만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면 [20] , 현재는 대부분의 작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 러시아 공화국의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후에는 정말로 "푸"대접을 받는듯. 톨스토이 사망 100주년인 2010년에도 아무 행사도 없었다고 한다. 되려 해외에서 더 화제였고 한국에서도 사망 100주기 기념이라고 행사를 가지고 그에 대한 책자나 완역판이 홍보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010년은 공교롭게도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 기념해였는데, 체호프에 대한 행사는 성대히 열린 반면 톨스토이에 대한 행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체첸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책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가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를 부담스럽게 느꼈다는 설이 유력하다. 게다가 톨스토이는 현재 국교의 레벨로 재등극한 러시아 정교회에 파문당한 인물이다. 그러나 여전히 교과목에 톨스토이의 작품이 여전히 포함되어있기도 하고 그의 후손들 중 잘나가는 인사도 있기에 마냥 푸대접받는다고 보기엔 좀 그렇다. 그의 후손 중 한명인 볼리마디르 톨스토이는 박물관을 운영하고 동시에 푸틴 정부하에서 문화 고문직을 맡는등 제법 잘나가고 있고, 표트르 톨스토이는 아예 러시아 채널1의 메인뉴스 프로그램인 브레먀를 7년 정도 진행한 유명 방송인이다. 톨스토이 직계 후손만 약 400명...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 중

어쨌든 러시아 문학 = 톨스토이 정도로 생각하는 우리나라 시각으로 보자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보통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푸시킨[21] 등을 훨씬 알아주는 편이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등도 마찬가지.

그러나 2016년 러시아 여론 조사 결과 역대 러시아 최고 작가로 톨스토이가 꼽혔다. 톨스토이는 여전히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중 한명이라는 증거다.

10 뒷이야기

아내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들을 두었고 그 중 다섯은 어린 시절에 죽었다.[22] 하지만 사실 톨스토이에겐 또다른 아이가 있었다. 자신의 하녀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 아들이었지만,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었다. 티모페란 이름의 이 아이는 마구간 지기, 산지기로 평생을 살았다. 이 사실은 톨스토이가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며 자신의 옛 여자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15년 간의 과거를 적은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줘서 아내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박으로 수많은 재산을 날렸고 온갖 여자들;집시, 창녀, 어머니 친구들의 농노들과 관계한 사실은 물론 사생아까지 있다는 사실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레빈이란 인물에 투영한다. 레빈이란 인물 역시 자신의 더럽고 방탕한 과거와 무신앙을 고백한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내고 용서받는다.

이런 독특한 남편 때문에 소피아는 대단히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유모도 없이[23] 혼자서 13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물론 톨스토이의 글을 일일이 읽고 필체를 교정하는 작업을 맡아야 했다. 게다가 노년에 겨우 대문호의 아내로서 편안하게 사는가 했더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자기 남편이 모든 재산을 버리고 뛰쳐나가려 하니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또한 톨스토이가 지나치게 대문호로 추앙받은 나머지 소피아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처럼 '위대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악처'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의 목가적 정신이 담긴 소설 작품들이나 소설책 표지나 속표지에서 볼 수 있는 수염이 성성한 푸근한 할아버지와도 같은 인상과는 달리, 청장년기는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강한 성욕으로 유명했다. 그의 부인은 결혼 초기 10여 년간 임신 상태가 아닌 기간이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그의 정신적 사상과 행동간의 괴리는 노문학에서 톨스토이를 연구할때 관심있게 보는 주제 중 하나이다.

목가적 정신이나 크리스트교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이 드러나있는 작품세계로 유명하며 어둠의 힘이라는 희곡에서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를 생매장하는 묘사가 있다. 흠좀무...

톨스토이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로 그가 여인숙에 머물고 있을 때 소녀가 톨스토이의 가방을 보고 그 가방을 갖고 싶다고 하자 그는 일이 있어서 나중에 가방을 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그 여인숙을 나왔다. 나중에 그 여인숙을 찾아왔더니 그 소녀는 병으로 이 세상에 없었으며 그는 여인숙 딸의 무덤에 가서 그 가방을 걸어 주었고 그 뒤 어느 사람이 그 무덤에 돌가방을 조각해 돌십지가에 건 다음 프라우다(pravda - 사랑을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라는 글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 러시아인 미들 네임은 아버지의 이름이다. 형제들은 다 니콜라예비치다. 같은 예로 알렉산드르 1세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파벨이라 4형제가 모두 파블로비치다.
  2. 훗날 전쟁과 평화에서 '소냐' 캐릭터로도 등장한다.
  3. 후술 하겠지만 톨스토이 가문은 레프 톨스토이 직계만 있는게 아니다.
  4. 현조부가 오스만투르크 대사를 지냈다. 동양어학과는 터키어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5. 톨스토이는 농노제도 극혐이라서 러시아 귀족들이 대제라 칭한 예카테리나 2세도 암군으로 취급했다.
  6. 물론 75만을 한 번에 동원한 건 아닌 여러 장면에 걸쳐 따로 동원했다. 사실 소련 시절, 이런 경우가 꽤 있었다. 러시아 신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에선 거대한 드래곤과 싸울 때 10만이 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도 했으며 《고요한 돈 강》(1957)이라든지 여러 영화에서도 엄청나게 동원했다. 한편 당시 중국은 제작규모 열악과 같이 문화대혁명 와중으로 영화 인력까지 숙청하던 터라 이런 대규모 인력 동원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한 장면에 엑스트라 최다 동원 영화는 1982년작 《간디》에서 장례식을 보러온 인도 30만 엑스트라들. 비슷한 예로, 북한의 《불가사리》에도 몇 만 명 동원되었다.
  7. 이 작품은 애먼 대천사 미카엘을 끌어들였다. '천사=미카엘'이라는 인지도 때문이었지만...
  8.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뜻한다.
  9. 이들은 러시아 정교회의 분파인 두호보르파(Духоборы)로, 기독교적 평화주의에 근거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며, 세속 정부와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여 이단으로 몰렸다.러시아판 여호와의 증인이다 톨스토이는 두호보르파의 캐나다 이주 비용을 <부활>의 인세로 지원했고 같은 시기에 <하느님의 나라는 그대들 안에 있다>라는 수필을 써서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여 교회에 찍히고 만다.
  10. 대문호에게 너무 한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톨스토이의 비판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매우 수위가 강했다. 단편 <지옥의 패망과 부흥>에서 교회를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였고, <부활>에서는 성체성사를 마술이라고 조롱하였다. 때문에 정교회 입장에서는 파문하지 않는게 더 이상했다. 이런 면에서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인 도스토옙스키와 대비된다.
  11. 톨스토이 가문의 여러 인물들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Tolstoy_(family)
  12. 톨스토이 가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여기도 참조하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rsakes&logNo=130175780969
  13. 원래 표트르 대제의 반대편 소피아 섭정왕 편이었으나 전향해서 표트르 대제의 신임을 얻었고 이후 여러 군공과 초대 오스만 제국 대사로 10년간 재직하면서(전쟁시엔 2년간 감금도 되었다.) 공을 쌓았는데 표트르 1세에 반기를 들고 도망간 황태자를 설득하여 납치(?)한 공로도 유명하다.
  14.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의 이름이 외가에서 유래하며 V에서 B로 바꿨을 뿐이다.
  15. 당시 권력자였던 피촘킨이 먹고 버린 정부와 결혼하길 권유했는데 거부하고 외조모 예카테리나 드미트리예브나 트루베츠카야와 결혼해서 찍혀서 관운이 막히고 아르헹겔스크 주지사를 하다가 짤렸다.
  16. 러시아 귀족은 작위라기보단 신분인데 적자는 장남은 물론 막내아들까지 다 백작으로 칭할수 있다. 다만 딸들은 시집을 가면 남편 작위를 따른다. 톨스토이 소설에서 '공작의 영애'로 불리는 경우가 이 경우인데 백작에게 시집가면 백작부인이 됨
  17. 그러나 소련 정부는 문학 장르를 소비에트 리얼리즘에 한정 지어버렸기 때문에 대대적인 탄압이 없었다는건 무리가 있다. 문화대혁명 수준으로 과거에 나온 문학을 제거하는 우는 저지르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인 점이다. 이 시기에 지하문학이 괜히 등장한 것이 아니다.
  18. 물론 대숙청때는 여러 작가가 처형되기는 했지만, 이는 문학작품의 문제라기보다는 반스탈린파(트로츠키파)로 간주된 작가들의 문제였다.
  19. 솔제니친은 서방으로 추방형을 받았는데, 소련 체제가 굳이 가혹하게 다루려고 했다면 솔제니친을 시베리아나 북극권의 굴라그나 감방으로 보내버릴수도 있었다. 다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경우 서방세계에서도 워낙 유명한 작가들이었기에 소련도 함부로 건들기 어려웠다고 생각해야 한다. 거기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경우 서방 세계의 정치적 이해에 이용된 측면이 있는 작가였기도 하고.
  20. 소련체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체제이기 때문에 어렵게 살았다고 해도 굶어 죽을 정도로 내몰리지는 않았다.
  21. 톨스토이는 혈연상 푸슈킨과도 먼 친척이라고 한다. 흠좀무
  22. 어린 학생들에겐 귀족 출신 잘사는 주제에 짐승같이 피임도 안하고 징그럽게 많이낳아서 여성학대 드립칠지도 모르지만 사실 당대 아시아권이든 유럽권에 속한 국가이든간에 극단적인 기근에 처했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냥 덮어놓고 낳는게 일반적이었고, 귀족들도 높은 영아 사망률때문에 폐경전까지 덮어놓고 낳는게 더 일반적이었다. 한국도 1960년대까지는 출산율이 5명대를 넘었다.
  23. 톨스토이는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당시 귀족 여성들이 애들을 팽겨치고 유모에게만 맡기는것에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