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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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위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동명이인이 여럿 있다. 본 항목에선 가장 유명한 2차 삼두정치의 레피두스를 기재한다.

파일:Attachment/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jpg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1](Marcus Aemilius Lepidus, ? ~ BC 13년)은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다.

1 생애

자신의 이름과 같은 정치가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레피두스는 이전에 로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패하고 사르디니아로 귀양가 죽은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적으나 BC 62~58년에 조폐 관련 관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지자가 되면서 공화정말 내전 상황에서 측근이 되었다. 민회를 소집해 카이사르를 독재관으로 추대하는 법을 통과시켰으며 BC.48년 카이사르가 동부로 폼페이우스 세력과 전쟁을 하러 떠날 때 폼페이우스 세력의 주요 거점이었던 가까운 스페인(Nearer spain) 총독으로 임명되어 스페인을 안정화시켰다. 이 전공으로 로마에서 개선식을 열었고 BC.46년 카이사르와 함께 콘술직에 선출되고 기병대장을 역임했다. 카이사르가 로마를 비울 때 키케로를 위시한 반대 세력의 공세를 약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되던 BC 44년 3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가까운 스페인 총독으로 선임되었으나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카이사르가 암살된다. 그는 수완을 발휘해 포룸을 장악해 시민들의 소요를 막고 안토니우스와 제휴하여 공화정 지지자들과 어느정도 균형을 이뤄낸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후임으로 종신 대신관이 된다. 이후 로마를 안토니우스에게 맡기고 스페인으로 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협상해 내전으로의 확대를 막았다. 이때 폼페이우스와 어느정도 친분이 생겼는데 이는 훗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그를 공격하는 빌미가 된다.

흔히 2차 삼두정치의 들러리 정도로 알려져 있으나 의외로 카이사르 암살직후에는 가장 세력이 강했다. 그의 임지인 갈리아와 스페인에 속한 현역/퇴역병 군단이 7개 군단에 달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가 캄파니아에서 사재를 털어 긁어모은 퇴역병 2개군단(7, 8군단)에 3천명에 역시 돈으로 안토니우스에게서 낚아온 2개 군단(제3 마르스 군단, 제4 양 군단)이었고 안토니우스가 친위부대 종달새군단에 옥타비아누스에게 빼앗길 뻔 했다가 겨우 지켜낸 2개 군단이었고 그나마 무티나 전투 참패로 세가 줄었으니 차이가 꽤 많이났다. 하지만 레피두스가 임지에 머물러 있는 동안 옥타비아누스가 무티나 전투를 거쳐 북 이탈리아에서 데키무스 브루투스의 병력까지 흡수해 힘을 키워 원로원을 압박하고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복수와 막대한 보상을 미끼로 레피두스 휘하 군단의 지지를 얻어[2] 무티나 전투 이후의 열세를 뒤집은데 반해 레피두스는 측은 안토니우스와의 제휴 이전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후세인들에겐 수동적이고 끌려다닌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3]

BC 43년 레피두스의 주선아래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까지 3명이 모였고 이들은 보노니아 협정을 통해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회'를 출범시키고 키케로를 위시한 공화정 지지자들을 대거 숙청한다. 삼두정치 결성 직후의 세력권 배분에선 갈리아와 스페인을 차지하여 북 아프리카, 시칠리아, 사르데냐가 고작이었던 옥타비아누스를 크게 앞섰고 안토니우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필리피 전투를 기점으로 상황이 변한다. BC. 42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마르쿠스 브루투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공격하러 떠난 사이 콘술로서 로마에 남아 내정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그의 몰락을 불렀다. 필리피 전투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전리품과 토지를 미끼로 레피두스 휘하의 군단들을 포섭해 버리고 그에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군단과 영역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BC.41년 페르지아 전쟁이 발생하자 옥타비아누스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로 있던 레피두스를 포섭해 그에게 로마를 맡기고 자신은 반란을 진압한다.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투항해온 안토니우스 계 6개 군단을 레피두스에게 넘겨주고 북 아프리카로 보냈다. 이는 충성심을 담보할 수 없는 안토니우스의 군단관리를 떠넘기는 한편, 레피두스가 안토니우스의 힘을 빼앗은 모양새를 만들어 둘의 제휴를 막고 최종적으론 자신이 삼두와의 합의로 분배받은 영역임에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장악당해 있던 시칠리아 정벌에 이용하려는 포석이었다.

BC. 40년에 브린디시 협정으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상호우호를 재다짐할때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 양해하에 북 아프리키를 인도받는 것에 그쳤다. BC. 37년 타렌툼에서의 협정으로 3인 위원의 지위는 5년 연장되었으나, 레피두스는 여기에 끼지도 못했다.

BC 36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점령한 시칠리아에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출진한다. 레피두스는 이를 세력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의욕적으로 참여하여[4] 옥타비아누스가 고전하는 사이 공을 세우고 폼페이우스의 최후 거점인 메사나에서 항복을 받고 8개군단을 접수한다. 이때 아그리파가 레피두스가 아닌 옥타비아누스가 항복을 받아야 한다며 대립한다. 레피두스는 삼두의 일원이고 아그리파는 삼두중 한명의 부하장군이니 정상적이라면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그만큼 이때 레피두스가 약해져 있었음을 뜻 한다.

공을 세운 레피두스는 자신의 몫이라고 여긴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의 통치권을 주장하며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한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안토니우스에게서 투항해온 6개 군단에 방금 투항한 폼페이우스의 8개 군단이 주력인 레피두스군은 제대로 된 교전도 없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포섭되었고 레피두스는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채 팽당했다. 3인 위원의 지위를 비롯한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종신 대신관의 지위만을 보전할 수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키르케이(Circeii)로 유배보냈으나, 그래도 원로원 의원 자격으로 로마를 방문했다. 이후 기원전 12년(혹은 13년)에 사망했고 사후 대신관 직위는 아우구스투스가 가져간다.

2 평가

삼두정치에서 머릿수만 채워놓기 위해 나온 인물이라느니, 카이사르 꼬붕이 얼떨결에 감투 하나 차지하고 있다가 상황 정리되어 3인 중 대빵이 나가라고 하니까 데꿀멍하고 나갔다느니 하는 별 희한한 악평이 돌아다니는데 절대로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카이사르 생전 측근으로 중임을 맡아 잘 수행했고 카이사르 사후 정국을 일시 수습하고 스페인을 안정화 시킨 역량은 원로원도 인정했다. 삼두 사이를 주선해 삼두정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도 그였다. 그가 삼두의 일원이 된건 그만큼 실력과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칠리아 전투에서의 모습을 보면 장군으로서의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불운은 단지 그의 상대는 그 먼치킨 옥타비아누스였다는 것 뿐 이다. 키케로, 안토니우스같은 로마 공화정 말기 거물들이 모두 옥타비아누스에겐 부처님 손바닥안 손오공이었고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레피두스만 유독 낮춰볼 이유는 없다. 오히려 천수는 누렸으니 운이 좋았다고 볼 수 도 있다.[5]
  1. 여담으로 레피두스는 라틴어로 '멋있는, 말쑥한'이란 뜻이다.
  2. 특히 퇴역병들로 이뤄진 6, 10군단의 호응이 컸다. 6군단은 자기네 토지가 속해있고, 내전때 폼페이우스 편을 든 죄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마실리아에 원로원이 권한을 돌려줬기 때문에, 10군단은 6군단 다음은 자신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을 제지하려 했다간 병사들이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지휘관으로 낙인 찍혀 다른 군단들의 지지까지 잃어버릴 염려가 있었고 결국 레피두스는 안토니우스와 제휴한다.
  3. 이런 평가를 받게 된 원인제공자 중 한명은 키케로다. 왜냐하면 레피두스는 자기네 편 안들어주고 공화정 무너뜨리는데 한몫했으니까. 좋은 소리를 할리가 없다.
  4. 폼페이우스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있었다. BC.39년 미세눔 협약을 통해 삼두와 폼페이우스 간 일시적인 화친이 이뤄졌을때 폼페이우스는 레피두스를 제외하고 자신을 삼두의 일원으로 받아달라 요구했던 적이 있었다.
  5. 압도적인 술수와 정치력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권력을 꿰찬 옥타비아누스의 집권과정에서 걸림돌이라면 처음부터 명분 다 내주고 자멸한 안토니우스나 철저하게 이용만 당한 공화정 지지자들 보다야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더 큰 걸림돌이었다. 이 양반 잡겠다고 정략혼도 실시하고 선공 날렸다 패하기도 하고 안토니우스를 꾀어 그의 함대를 빌려오는 등 상당히 손을 많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