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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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Rosa Luxembrug
폴란드어 - Roza Luksemburg
1871년 03월 05일 ~ 1919년 01월 15일

뭐가 독수린가 했더니 독수리
매부리코를 이른바 유대인의 특성종특이라고 여긴 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편견이었지만 별 근거는 없다.

1 개요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출생의 독일의 공산주의 혁명가 겸 사상가이다. 1898년 제2차 인터내셔널에 참가해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독일 사민당의 핵심 이데올로그였으나 개량적이고 친전, 관료적으로 변한 독일 사민당에 반대해서 스파르타쿠스단(Spartacus-Bund)을 창설, 독일 혁명 직후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고 우익 준군사조직(자유군단)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독일 제국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 혁명가 겸 사상가. 혹은 정치가, 철학자라고도 볼 수 있다.

2 생애와 저작

그녀는 1871년 러시아 제국의 통치 하의 폴란드 자모슈치의 유복하고 교양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병을 얻어서 그 때부터 다리 길이가 서로 짝짝이로 달라져서(혹은 엉덩이 통증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이후 그의 가족은 바르샤바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그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동유럽 유대인스러운 코스모폴리탄 '세계시민주의'에 깊게 영향을 받게되며, 이는 그가 폴란드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이탈리아어 등 6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후 그는 그의 나이 15살에 유대인 혁명서클과 폴란드 프롤레타리아당에 가입해 총파업 주도 등의 반정부 활동을 벌였으며, 제정 러시아의 탄압을 받게 되어 스위스망명하게 된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 철학부에 입학했다. 취리히 대학은 그가 유대인인데다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부당하지 않았던 곳이다. 이듬해 그는 법학부로 전과해 국민경제학과 공법학 등을 전공하면서 경제학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공부한다. 이외에도 그는 역사와 정치학 등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하게된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897년 그는 이후 폴란드의 산업발전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898년, 취리히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독일 지인의 아들 '구스타프 뤼베크'와 위장 결혼하여 독일시민권을 취득한 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1898년부터 제2차 인터내셔널에 참가하고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이 독일 사회민주당은 현재 독일 사민당(SPD)까지 맥이 이어지는 동일한 정당이다. 물론 주장하는 바야 바뀐 구석도 있지만.

이후 사민당의 좌파노선에서 명성과 악명을 동시에 떨쳤다. 그는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가 폴란드 사민당을 창당하고 폴란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게 되는데, 이 당시 계급투쟁보다는 반러시아 운동과 폴란드 독립을 먼저 주장하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하게 된다. 국제주의자였던 그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경계하였는데, 그는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거창한 미명하에 계급투쟁을 방해, 억압하거나 민족간 또는 민족국가 간의 이기주의를 부추겨 결국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어느 정도는 그의 예측이 맞았다고 볼 수 있다. 폴란드 독립운동보다 계급투쟁을 우선시한 그는 폴란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차르의 첩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으며, 이때 그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본격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수감에서 풀려난 그는 이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사민당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1907~1914) '자본축적론'을 집필하기도 한다. 그의 독자적 활동은 1914년에 더욱 본격화 되는데, 1914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연설에서 군국주의 비판과 당시 독일 황제이던 빌헬름 2세를 비판하였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1916년 출소 후 그는 그가 우려하던 민족주의와 수정주의 두가지 모두가 닥쳐온 것을 실감하게 되는데, 계급투쟁을 뒤로한 채 제국주의 전쟁에 동조하고 있는 사민당에 환멸을 느끼게된다.

이후 전쟁공채를 찬성하기로 결의한 사민당에 반대하며 독일사민당을 떠나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인터내셔널단(Di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고, 로마시대 노예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단으로 개명한다.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고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16년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또 다시 2년 반 동안 투옥된다. 독일판 멘셰비키볼셰비키[1] 1917년 2월과 10월에 발생한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을 감옥에서 맞은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환영하면서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의 독재와 권력화를 우려했다. 1918년에 감옥에서 집필한 "러시아 혁명"(사후 1922년 출판)에서는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의 권위주의적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억압, 민족주의적인 태도 등을 비판하고, 혁명이 관료주의화 되고, 부르주아적 독재로 귀착될 것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의 저작으론 제국주의에 대한 독특한 해석, 마르크스의 <자본(흔히 자본론으로 알려진 저작. Das Kapital)>에 대한 해설도 있다. 그가 주장한 대표적인 이론으로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혁명론이다. 이는 1905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혁명에서 대중들의 자발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전위당을 통한 혁명을 주장하던 레닌과 정치적 입장이 갈린다. 또 동시에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의회주의, 즉 사민주의를 주장했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등의 사민당 주류와도 의견이 갈린다. 베른슈타인이 정통 마르크스주의 대신 영국의 페이비언주의에 영향을 받아 수정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을 때 그는 베른슈타인을 가리켜 "영국인의 안경을 끼고 독일을 보려 한다"고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은 카를 카우츠키나 룩셈부르크와의 공식 논쟁에서는 패배했지만 당내 지지는 더욱 높아졌다. 막말로 누가 어려운 혁명하고 싶겠어

그렇다보니 그의 말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이 바로 이 대목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

때가 때인지라 독일에 망명한 블라디미르 레닌과는 절친한 동지였다고 하기는 하는 듯. 특히 사민당이나 멘셰비키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1919년 러시아 혁명 직후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총선에서 레닌의 볼셰비키 당이 패배하자 나에게 패배는 없다 의회를 무단으로 해체한 것에 대해서 맹렬하게 비판했다. 근거는 소비에트(평의회)에 기초를 둔 대중들의 자발적 조직에 기초를 둔 러시아 혁명에서, 의회의 해체는 대중들의 참여를 배제하는 기제로 작동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렇게 되었다. 일부 트로츠키주의나 레닌주의자들의 강변과 달리, 러시아의 이러한 관료독재체제는 스탈린이 등장하기도 훨씬 전부터 잉태된 것이다. 미국 와이오밍주 다음으로 유럽에서조차 선진적이었던 소련의 양성 보통 선거권도 자유선거가 사라지면서 무의미해졌다. 게다가 이런 막장사태는 이는 1989년 자유경선방식으로 총선거가 실시될때까지 이어진다. 딱 한명의 후보자인 공산당 후보를 뽑을 자유 이런 점에서 개량주의(사민주의)를 반대하면서 레닌주의, 스탈린주의에 반감을 가진 좌파들 상당수가 로자를 지지한다. 물론 실제적으로 의미가 있는 노선이라기보다는 로망이나 가치관적 지향 등을 존경한다는 의미에 가깝지만, 실천적 측면에서든 이론적 측면에서든 사민주의와 레닌-스탈린주의를 넘어선 일종의 '제3의 길'을 찾으려는 좌파도 엄연히 존재한다. 존재감이 없어서 그렇지. 하지만 요새는 금융위기 덕에 주목도가 높아지고 있다.

2.1 죽음

죽음이 매우 스펙터클하다. 어쩌면 필연적이었겠지만.

1918년 독일 11월 혁명으로 감옥에서 나온 그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의 기관지인 "적기(Die Rote Fahne)"를 창간하고 사민당을 수정주의라고 격렬히 공격한다. 그해 12월 스파르타쿠스단과 다른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1919년 1월 1일 독일공산당을 창당하고 혁명(1월 봉기)을 일으켰으나, 금새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해방구"들이 점차 점령되면서 결국 사민당의 지휘하의 자유군단에게 체포되어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개머리판으로 얻어 맞고,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어들이어, 단결하라!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살해되었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또 다른 주역 중 한 명이자 로자의 동지인 칼 리프크네히트 (Karl Liebknecht) 또한 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점은 훗날까지도 좌파 진영 독일 사민당독일공산당의 협력을 가로막는 원인 이었으며 독일공산당은 코민테른 성립 후, 스탈린의 지령 아래 사회주의 파시스트와 부르주아 의회제도 공화국을 타도한다는 명분아래 지속적으로 여러번 폭동을 일으키며, 나치당과 함께 바이마르 공화국 근간을 흔드는 원인이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의 생존자를 중심으로 성장한 독일공산당독일 사민당과 지속적으로 반목하며, 결국 나치에게 정권을 내줄 때까지 갈등하며 반목하는 원인이 된다. 심지어는 오늘날까지도 좌파 일각에서 "개량주의"와 타협할 수 없는 근거로 들먹여질 정도이다. 이거슨 로자의 몫이다! 향년 마흔 아홉의 나이였다.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19년 1월 15일 베를린의 밤, 에덴호텔 중앙홀로 군인들은 한 유태인 여자를 질질 끌고 나왔다. 그를 둘러싼 자유군단(Freikorps) 소속 군인들은 그에게 야유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저거 뭐야. 그 늙은 창녀잖아!”'

한 군인이 그의 머리와 관자놀이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패전 후에 그들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카이저의 퇴진과 군대의 해산을 요구하는 선동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밀리에 제거하기 위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의 입과 코에서 피덩어리가 물컹물컹 쏟아져 내렸다. 그의 시신은 란트베어 운하의 다리로 옮겨졌고 물 속으로 던져졌다.

당시에는 시체도 찾지 못했다. 시인 브레히트도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 그의 몸이 쉬는 곳조차 알 수 없으니 /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 그 때문에 부자들이 그를 처형했다네' 라고 시를 쓴 바가 있다.

운하에 던져진 그의 시신은 5월 31일 떠올랐으며, 이후 그의 혁명동지들과 함께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나치 시기에 훼손된 적이 있지만, 이후로도 1월이면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 또한 란트베어 운하의 그가 물 속으로 던져진 지점에는 추모조형물이 설치되었다.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d/d0/Rosa_memorial.jpg/220px-Rosa_memorial.jpg추모조형물 - 란트베어 운하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f/fb/Luxemburg-tomb.JPG/180px-Luxemburg-tomb.JPG베를린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

2.1.1 사망 배경에 얽힌 독일 사회주의사

독일 사민당은 이미 독일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유력한 정당으로서 입지를 굳혀나갔고,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독일 혁명으로 카이저의 제국정부의 자리를 사실상 군부의 동의속에 인수했다. 즉 독일 사민당은 주류세력 중 하나였다[2].

따라서 독일 사민당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이미 장악한 정권을 가지고 혁명을 일으키는 산통을 깰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인터네셔널을 팔아먹는 정당이 국가를 위한 전쟁을 지지했다는 자체가 병크다. 물론 독일 사민당만 탓할 일은 아니고, 이런 분위기가 전세계적인 사민주의 정당의 풍토였다. 전쟁 앞에선 연대고 동지고 없는거지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레닌볼셰비키가 그나마 전쟁을 반대하고 세계혁명을 지향한다는 것을 이유로 (러시아 내에서조차) 소수파였음에도 상당한 명분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로자 역시 레닌의 뒤를 이어 (물론 가치관은 제법 달랐지만) 혁명을 시도하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말이다. 결국 이들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헌법적으로는 민주적이었지만 혁명 없는 경제적 평등와 사회적 안정 그 어느것도 성취하진 못했고, 기어이는 나치당히틀러제3제국을 열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비판자들 중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혁명을 일으키려는 세력들이 오히려 히틀러의 집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치당과 같은 과격한 정치집단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인정을 받은 것은 바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집단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추상적인 측면 이외에도, 공산당은 나치 정권 수립에 직접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독일 정치의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공산당나치당이 세력을 불려나갔고, 공산당은 정치불안을 심화시키기 위해서 모든 내각에 불신임안을 내서 정부를 수립할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이 점은 나치당도 마찬가지였고, 공산당과 나치당이 모두 불신임안을 내는 이상 어떤 내각도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나치당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공산당과 나치당 중 하나를 선택해서 연립정권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따라서 나치당이 정권을 잡게 된 것에는 공산당에도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물론 1930년대의 상황까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겠지만, 공산당의 이러한 노선이 정치불안을 심화시켜서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 것임을 고려해보면 로자 룩셈부르크의 노선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로자의 혁명 역시 실현 가능성이 낮았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스파르타쿠스단에 기반한 독일 공산당조차도 로자의 노선보다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카를 카우츠키(1854~1938)의 노선을 따랐다. 카우츠키와 로자는 자신들보다 최소 1~2세대 전에 활동했던 마르크스의 예상과 달라진 현실, 즉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변화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둘은 자본의 필연적 탐욕을 강조했으나 원인은 달라서 카우츠키는 과소소비론[3],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4]을 주장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카우츠키는 혁명과 사회주의 도래의 필연성을 강조한 반면 룩셈부르크는 혁명과 민중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문제는 이 카우츠키의 노선을 따른 공산당은 (정권을 잡을 수는 있어도) 결국 나치도 자연히 망할거라고 믿고뭐 사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독일 사민당과 반목하는 한편, 혁명을 시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즉, 로자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차라리 그의 노선과 주장은 저런 수직적, '과학적' 사회주의 혁명론이 아닌 노동자, 농민 자체의 자발성, 자치성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이나 자유주의 좌파 운동이 강했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오히려 더 이 각광을 받았을 정도다.

그리고 정작 카우츠키는 여러 현실적 이유로 인해 공산당에서 독일 사민당으로 돌아갔으며, 개량주의 강령 작업을 주도하는 등 관료, 정당인으로서 살다 은퇴후 여유로운 말년을 보냈으나 결국 1934년의 나치 집권을 보고 데꿀멍하고 전쟁 이전에 사망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죽을 때 이미 20대 후반으로 나이차가 꽤 나는 엥겔스와 절친이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60을 넘겨 1차 대전과 전간기를 거쳐 나치의 집권과 몰려오는 전운까지 모두 보고 죽었다. 오래 살면 고생이구만 여담이지만 그와 17살 차이나는 로자가 그만큼 살았으면 1955년까지 생존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혁명가답게 일어나 혼란 속의 독일에서 혁명가답게 죽었다.

3 후일담

같은 혁명가인 남편과의 로맨스로도 유명하다. 로자가 더 사랑하는 경우였는데, 정보다는 혁명에 정신을 쏟은 남편과 그래도 나름대로 결혼 생활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로자의 심리가 드러나는 편지를 읽으면 로자가 심히 안쓰러워진다는 평이 많다.. 망했어요 까지는 아니겠지만 여하간 남편도 로자와 같은 시기에 살해당했다.

이상의 시에서 가끔 언급되는 인명이기도 하다.

그가 살해된 뒤 5개월 뒤에 시신 1구를 건져 매장했지만 2차 세계대전 도중 묘지가 파괴되어 시신이 사라진 뒤..... 2009년 5월에 그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머리와 손발이 없는 시신이 한 법의학 연구실의 지하에서 90년 만에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두개골 수집이 인기라서 머리가 없고, 시체를 유기 할 때 돌을 묶었기에 손 발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링크 이 이야기는 기존의 무덤이 가짜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직도 연구중인 듯.

독재 시절 철통같은 금서, 검열 풍토에서도 사회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평전이 검열을 통과한적은 상당했다고 한다. 국가명 룩셈부르크로 착각했기 때문. 정작 우파적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의 책은 마르크스로 착각돼서 검열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노린 작명

4 관련항목

  • 파리 코뮌 - 반세기 가량 앞서 일어난 사건으로,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처럼 제정은 폐지됐지만 뒤따라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은 패망한 대표적 사례로 회자된다.
  • 러시아 혁명 - 이건 성공한 케이스(11월 혁명)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 그녀의 유명한 저작인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를 비판하기 위해 서술되었고, 그녀의 많은 비판이 베른슈타인을 기조로한 수정주의를 대상으로 했다.
  • 카를 카우츠키
  • 블라디미르 레닌
  1. 사실 멘셰비키도 다수파였으니...
  2. 우파는 기존 세력들과 다를바도 없었고, 자유군단 등 실제 무력 세력조차 가지고 있었다(이들 상당수는 장교 등 군 출신이었다).
  3. 즉, 필연적인 잉여에 따른 세계화, 자본화의 진행.
  4. 자본의 필연적 축적과 자본주의의 유지를 위한 필연적인 세계화와 제국주의의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