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클레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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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영광 그리고 다가오는 몰락의 순간.

이름윌리엄 로저 클레멘스 (William Roger Clemens)*
생년월일1962년 8월 4일
국적미국
출신지오하이오주 데이튼
포지션선발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83년 1라운드 19순위 보스턴 레드삭스 지명
소속팀보스턴 레드삭스(1984~1996)
토론토 블루제이스(1997~1998)
뉴욕 양키스(1999~2003)
휴스턴 애스트로스(2004~2006)
뉴욕 양키스(2007)
1986년,1987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브렛 세이버하겐
(캔자스시티 로열스)
로저 클레멘스
(보스턴 레드삭스)
프랭크 바이올라
(미네소타 트윈스)
1991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밥 웰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로저 클레멘스
(보스턴 레드삭스)
데니스 에커슬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97년,1998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팻 헨트겐
(토론토 블루제이스)
로저 클레멘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페드로 마르티네즈
(보스턴 레드삭스)
2001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
페드로 마르티네즈
(보스턴 레드삭스)
로저 클레멘스
(뉴욕 양키스)
배리 지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04년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사이 영 상
에릭 가니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로저 클레멘스
(휴스턴 애스트로스)
크리스 카펜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86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돈 매팅리
(뉴욕 양키스)
로저 클레멘스
(보스턴 레드삭스)
조지 벨
(토론토 블루제이스)
1986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MVP
라마 호이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로저 클레멘스
(보스턴 레드삭스)
팀 레인스
(몬트리올 엑스포스)
보유 기록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20개
정규이닝 20K 경기2회

1 소개

통산 354승(역대 9위), 4672탈삼진(역대 3위), 7번의 사이 영 상(역대 최다)에 1번의 MVP라는 어마어마한 커리어.

메이저리그 140년 All-Time No.1, 역대 최강의 투수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커리어를 보유했으나[1] 약물 복용 의혹이 불거진 이후로 그 명성이 와장창 무너져내린 배리 본즈,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등과 함께 메이저리그 스테로이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

2 선수생활

로켓맨, The Rocket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190cm가 넘는 거대한 몸에서 던져대는 불같은 강속구가 유명했으며 포심 패스트볼 하나만 가지고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메이저리그를 평정했다. "클레멘스의 주무기는 빠른 공, 더 빠른 공, 그보다 더 빠른 공 이 세가지다."라는 말이 유명할 정도로 패스트볼의 구위 하나만큼은 역대급이었다.[2] 부상 이후 본격적으로 던지기 시작한 스플리터는 최고 90마일을 상회하는 마구나 다름없는 공이었다. 보스턴에서의 커리어 후반기부터는 포심/스플리터 투 피치 투수였고, 수준급의 슬라이더까지 구사하면서 타자들을 능숙하게 요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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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데미안 밀러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91마일(146km) 스플리터.

2.1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 찬란했던 MVP 에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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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가족 출연(...)

1983년 1라운드에서 지명을 받고 입단한 클레멘스는 1986년부터 에이스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254이닝을 던지며 24승 4패 238K 2.48 ERA를 기록, 만장일치 사이 영 상에 MVP까지 석권[3]해버렸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20승과 18완투 7완봉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닝이팅(281⅔이닝)을 선보이며 사이영 2연패.

1986년 올스타전에서 내셔널리그 최고의 투수였던 드와이트 구든을 타석에서 상대해보고는 포수게리 카터에게 '지금 저 친구가 던지는 패스트볼이 내가 던지는 것만큼 빠릅니까?' 라고 물어봤댄다. 이에 게리 카터는 '누가 낫고 못한 수준은 아니고 비슷비슷하다.' 라고 대답했다. 클레멘스는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이런 공을 칠 수 없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속구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1986년 4월 29일에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운다. 펜웨이 파크에서 시애틀 매리너스를 상대로 정규 이닝 20K를 잡아버린 것. 이후 10년이 흐른 1996년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클레멘스가 다시 한번 이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4]

그리고 1990~92년 3시즌 연속 ERA 타이틀을 차지하는데, 그 중의 백미는 1990년의 21승 1.93 ERA 시즌이다. 웃긴 것은, 이 성적을 찍고도 사이영을 27승 2.95의 밥 웰치에게 빼앗겼다(...)[5] 다행히(?) 다음 해인 1991년에 탈삼진 타이틀까지 석권하며 무난하게 통산 세번째 사이영을 수상하지만 1992년에는 데니스 에커슬리마무리 투수의 패러다임을 바꿔놓는 활약을 펼치며 표를 쓸어가는 바람에 fail.[6]

그러나 그도 세월의 무게와 젊은 날에 지나치게 폭주한 부작용은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1993년 뜻하지 않은 4점대 ERA를 찍어보기도 했고, 1994년에는 다시 리그 평정할 페이스를 이어갔으나 선수노조 파업 때문에 10승에 실패하고 적은 승수 때문에 사이영 투표에서 명함도 못 내밀었다. 그렇게 명투수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져가는가 했지만, 1996년 레드삭스에서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시즌 257K(탈삼진 1위)와 정규이닝 20K 기록을 다시 한번 달성했다.

1996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20K를 잡은 경기. 강력한 구위의 패스트볼에 낙차 큰 스플리터가 더해지면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피칭이라 할 수 있다.

보스턴은 클레멘스가 팀을 떠난 이후 그가 레드삭스 시절 달았던 등번호 21번을 어느 누구에게도 지급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구단의 비공식 영구결번인 셈이다.

2.2 토론토 블루제이스 시절 : 마와의 결탁


하지만 그런 레전드를 레드삭스 프런트는 보사구팽했다. 물론 언플로는 "레드삭스 역사상 투수 최고액을 오퍼했다", "클레멘스의 황혼기[7]를 함께하고 싶었다"는 등의 드립을 쏟아냈으나 실제로 그걸 믿은 팬은 삭스 팬들 중에도 드물었다. 아무튼 그는 192승 111패라는 사이 영(192승 112패)과 자웅을 겨루는 레드삭스 통산 성적을 남기고 4년 4000만불의 계약으로 토론토 블루제이스로 이적했다.

그리고 댄 두켓 단장이 말한 황혼기는 개뿔, 제2의 전성기가 열렸다.

1997~98년 샌디 코팩스 이후 최초의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과 개인통산 4,5번째 사이 영 상을 먹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3 뉴욕 양키스 시절 : 복수에는 성공하나...


클레멘스는 우승권 팀이 아니었던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맘에 들지 않았고, 곧 뉴욕 양키스가 그를 트레이드로 영입했다.[8] 클레멘스의 상징과도 같았던 21번은 폴 오닐이 달았기에 12번으로 바꿔 달았지만 이내 22번으로 고쳐 달았다. 폴 오닐에게 갖가지 조공을 했는데도 21번을 받지 못해서 많이 아쉬워했다 카더라. 트레이드 직후에는 솔직히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지만, 2001년 20승을 거두고 사이 영 상을 통산 6번째로 수상하는 등 양키스에서의 커리어도 준수한 선발투수 노릇을 했다 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우승도 두 번이나 하기도 했고. 2001 월드 시리즈에서는 자신을 우상처럼 여겨온 커트 실링과 7차전에서 벼랑 끝 명승부를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 대망의 300승과 4000K[9]를 돌파하고 스티브 칼튼놀란 라이언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300승을 달성했을 때 팬들은 모두 엘튼 존로켓맨을 부르며 클레멘스의 마일스톤 달성을 축하했고, 은퇴 시즌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정규시즌 마지막 펜웨이 파크 원정에서는 양키스 선수로서 왔음에도 전 관중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명장면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 ALCS에서도 그는 여느 양키스 선수들과 달리 환대를 받았다...만 매니 라미레즈에게 빈볼성의 높은 볼을 던지며 매니가 분노했고 경기장 분위기는 이내 레디 파이트.[10]

월드시리즈에서도 플로리다 말린스를 상대로 호투를 펼치고 말린스 선수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인줄만 알았는데, 자꾸만 항목이 길어진다

2.4 휴스턴 애스트로스, 그리고 알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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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묘하게 와인드업부터 이어지는 것 같다

클레멘스는 은퇴를 번복하고 텍사스 대학을 나온 인연이 있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1년간 500만불에 계약했다. 은퇴를 하려다 양키스에서 같이 뛴 앤디 페티트를 따라 입단한 클레멘스는 로켓의 본고장에서 로켓맨의 이름에 걸맞는 폭발력을 뿜어냈다.[11] 214⅓이닝 동안 18승 4패 2.98 ERA를 기록, 역대 최고령, 개인 통산 7번째 사이영상 수상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만약 이 때 2위 랜디 존슨에게 상을 내줬더라면 한 시대를 풍미한 두 에이스가 사이영 수상 횟수에서 서로 동률이 될 상황이었기에, 그리고 갖가지 지표에서 랜디가 클레멘스보다 훨씬 앞섰기에(당시 사이 영 투표 결과와 주요 지표 비교) 지금까지도 자주 회자되는 사이영 투표다. 뭐 클레멘스 개인 입장에서는 젊을 적에 뺏긴 것만큼 되돌려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될려나.

그러나 2005년부터 그는 슬슬 사람들의 짜증을 유발하기 시작한다. 전년도에 500만불에 계약한 것에서 적게 받은 양까지 싸그리 몰아서 받는 무시무시한 연봉협상으로 인해 2005년 이후 제프 배그웰의 이른 은퇴에 영향을 끼쳤다. 뭐 그래도 2005년에는 사이영상 또 먹을만한 무시무시한 성적[12]을 찍어줬으니 까방권을 좀 주더라도, 2006년에는 자신의 체력이 딸린다는 점을 인지하고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만 뛴 채 시즌 개막 직전까지 계약을 하지 않다가[13] 시즌 중반에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이 있는 팀들이 몸값을 올려놓을 때 계약에 나서는 얍씰한 짓거리를 했다.[14] 그렇게 해서 삽질한다면 속 시원하게 까기라도 하는데, 그렇게 알바 뛰면서 2점대 ERA를 찍으니 뭐라고 대놓고 욕하지도 못하고 사람들은 짜증만 난다(...) 그러나 2007년에 알바 뛸 때는 투수 역사상 최고 연봉 기록[15]을 갈아치웠는데도 구위가 따라주지 않으며 얻어맞아나가는 바람에 썩 좋은 활약을 펼치진 못했다. 로켓맨의 알바짓을 비꼬는 최훈의 카툰그런데 만화의 투수들 중 2013년을 넘긴 투수가 아무도 없다(...)-. 까놓고 말해 2007년의 클레멘스는 먹튀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성적이었다.

여담으로 2005년에는 시카고 컵스그렉 매덕스와 대결하며 113년만에 내셔널리그에서 나온 300승 투수들의 대결[16]이라는 흠좀무한 명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졌다

뭐, 말년에 영 좋지 않다 쳐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첫 턴에 당연히 헌액될 투수였다. 이 시기 클레멘스는 다른 모든 대투수를 다 제치고 월터 경과 비견되고 있었으니까... 동시대를 풍미했던 마스터와 혼슨갑도 한 수 아래로 여겨졌다. (당시 기준으로) 라이브볼 시대에 오로지 워렌 스판만이 클레멘스의 354승보다 많은 승수를 기록했고 4672K는 놀란 라이언 다음이었으니까.

그런데...

3 전설이 무너지다

2007년 말에 발표된 미첼 리포트에서 스테로이드를 복용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클레멘스는 펄쩍 뛰며 절대 약을 하지 않았다고 반발했고 청문회에서도 선서 하에 자신은 경기력 강화 약물(Performance-Enhancing Drugs)을 복용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나, 개인 트레이너였던 브라이언 맥나미의 연이은 폭로, 같은 팀에서 뛴 동료였던 앤디 페티트의 진술, 그리고 심리 전문가의 분석[17] 등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이에 커트 실링은 특유의 핵이빨을 유감없이 털며(...) 토론토 시절부터의 4회 사이영상을 반납하라 주장했다.[18] 자신의 롤모델로 여겨온 투수가 이런 인물이었다니 굉장히 배신감을 느꼈던 모양.

심지어는 민디 맥크리디라는 컨트리 가수와의 섹스스캔들도 폭로되었다. 민디가 15살일 적부터 불륜을 저질렀다[19]는 의혹이 제기되며 그간 (자신이 등판하지 않는) 원정경기에 불참하고 가족들과 함께할 정도로 가정적인 사나이라는 명예도 실추되었다.[20]

동시대에 활약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투수들인 그렉 매덕스, 랜디 존슨보다도 한수 위라는 평가를 받던 선수였으나, 사생활 문제와 약물 관련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로켓의 커리어는 단지 숫자로만 남게 되었고, 그 명성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더구나 배리 본즈처럼 위증 논란까지 불거지며[21] 미국에서는 최악의 취급을 받는 거짓말쟁이라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22]

클레멘스를 대차게 까는 김형준 기자의 인사이드MLB 칼럼을 보면, 브라이언 맥나미가 주장하는 클레멘스의 약물복용 시기가 나와있다. 1997년 토론토에서의 첫 시즌까지만 진퉁이고 5번째 사이영상부터는 약빨이라는 분석이라 보면 되겠다. 만약 약빨 상을 올바른 주인에게 돌려줄 경우 역대 수상 순위는 이렇게 변경된다.ft.배리 본즈

2012년 6월 18일 위증 재판에 대한 판결이 나왔는데, 무죄가 선고되었다.# 증거가 불충분하고 증인들의 증언이 왔다갔다 한 점에서 배심원단이 유죄로 평결할 이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서 클레멘스가 PED를 복용했느냐 명제에 대해서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아닌 것으로 남게 되었다. 먹었다고 해도 모르고 먹었다, 라고 할 수는 있다는 얘기 대중의 시선은 아직도 싸늘하지만, 적어도 법적으로는 거짓말쟁이라는 딱지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이는 미첼 리포트를 발표한 조지 미첼 상원의원에게 클레멘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고(...)

2004년에는 조지 워커 부시와 함께 유세를 다니며 부시 재선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결국 둘 다 지금 미국의 흑역사

4 기타

그가 던지는 공만큼이나 거친 성격으로도 유명하다.[23]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헤드 헌터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의 헤드 헌터는 빈볼을 망설임없이 꽂아넣을 수 있는 투수. 승부욕이 강하다 못해 지나친 그 성격 덕에 뉴욕 메츠의 전설적인 공격형 포수였던 마이크 피아자와 사이가 매우 나쁘다. 피아자는 클레멘스의 공을 잘 공략했던 타자 중 한명으로, 둘의 악연에 대해선 유명한 사례가 몇 있다.

2000년 7월, 서브웨이 시리즈로 불리는 양키스와 메츠의 인터리그 경기에 선발등판한 클레멘스가 2회초 선두타자로 들어온 피아자의 머리를 향해 대놓고 패스트볼로 빈볼을 날려 그자리에서 기절시키면서 메츠 팬들에게 쌍욕을 먹었고, 그해 월드 시리즈에서 메츠와 양키스가 맞붙게 되었을 때 2차전 선발투수로 등판한 클레멘스는 1회초 피아자가 파울타구를 치면서 부러진 배트 조각이 마운드 쪽으로 날아오자 그대로 그 조각을 주워다가 1루로 달리던 피아자 쪽 그라운드에 던져버렸다. 안그래도 원한이 쌓여 있던 피아자는 1루 선상에서 바로 마운드를 향해서 달렸고 이후는 레디 파이트. 이후 원래 축제 분위기였던 서브웨이 시리즈는 공포 분위기로 돌변해서 언제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로 전개된다. 물론 클레멘스는 그저 배트 조각을 치웠을 뿐이라고 변명하긴 했지만….

나중에 클레멘스가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이적하고 NL 올스타에 뽑혀 선발투수로 나가게 되고, 피아자 역시 올스타에 뽑혀 주전포수로 나가게 되며 결국 두 앙숙이 배터리를 이루게 된 적이 있었다. 많은 팬들은 이 상황을 굉장히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당사자들은 과거의 일은 기억이 안난다는 식으로 훈훈한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경기 시작하자마자 1회부터 볼배합 문제를 가지고 서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파ㅋ탄ㅋ.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역시 한 번 원쑤관게 맺으면 오래간다.

더불어 돈 드라이스데일의 "설령 내 할머니라 해도 타석에 바짝 붙어 있으면 빈볼을 날릴 것이다" 발언을 제대로 실천했던 인물.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인 20K를 두 번이나 달성하는 등 탈삼진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투수였으며, 선수 본인의 탈삼진에 대한 애착도 상당했다. 오죽하면 애들 이름이 죄다 탈삼진을 의미하는 K로 시작한다(...).[24][25] 클레멘스를 존경한 조바 체임벌린도 아들 이름을 Karter라 짓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탈삼진 투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300K는 한번도 달성해 본 바가 없다. 커리어 하이는 97년 292개, 88년 291개로 조금만 운이 더 따라줬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2012년에도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이 남은 듯 하다. 위증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뒤 2012년 8월에는 독립리그 팀과 계약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흠좀무한 사실이 한국나이로 51살이나 되는데 패스트볼 구속이 87마일을 기록했다(...). 이 양반은 같은 나이에 간단히 던져본 게 더 빠른 89마일을 찍었으니 역시 굇수들은 다르다

2013년부터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피칭 인스트럭터로 활동한다.

2013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37.6%의 득표율[26]을 얻었다. 이는 배리 본즈의 36.2%와 크게 차이가 없는 수준. 2014년도에는 35.4%의 득표율을 얻었고, 2015년도 역시 37.5%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다지 큰 변화는 없는 편. 2016년에는 45.2%로 클레멘스의 상황을 감안하면 꽤 올랐지만 투표인단 숫자가 줄어든 특혜를 받았다고 보는중.

2014년 영화 보이후드에서 주인공이 누나와 아빠와 함께 로저 클레멘스 선발경기를 찾아가 응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무려 2004년에 찍은 장면이다. 즉, 당시만해도 로켓은 야구 최고의 스타중 하나였고, 그 장면은 그냥 아빠와 애들이 야구장가서 좋아하는 장면을 찍은 것. 하지만 이후 약물파동과 함께 영화의 주제인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변화한다"를 어찌보면 가장 섬뜩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되어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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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는데, 같이 헌액되는 노마 가르시아파라,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상반되는 말년에 적잖은 보빠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2015년에 명전에 입성한 페드로 역시 로켓과 함께 명전에 갈 줄 알았다... 그러게 왜 약인지 뭔지 해서 이모양이냐...라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이는 보빠들의 시선과도 부합하는데, 보사구팽의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약에 손댄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팬들이 레드삭스 네이션에는 의외로 꽤 있다. 물론 쿠퍼스타운 입성 여론과는 별개라면서 선을 긋는 이들이 많지만, 빼도박도 못하게 된 매니 라미레즈데이비드 오티즈와 달리 적어도 우리 팀에서 뛰었을 때는 절대 안 했을 거라는 믿음[27]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 클레멘스 본인도 명전에 입성한다면 레드삭스 모자를 쓸 것이라 하는 등 보스턴 시절의 커리어를 좋은 기억으로 갖고 있는 모양이지만 난 명전 반드시 간다고 근자감을 뽐내는 배리 본즈와 달리 명전 입성 여부를 크게 개의치는 않는 모양.

  1. 통산 FWAR가 139.5로 역대 1위. 그 뒤를 511승 투수, 110완봉승 투수, 사이영상 4연패, 사이영상 5회 수상, 5000K 투수가 뒤를 잇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럼 뭐해. 약쟁이인데
  2. 클레멘스가 구위도 뛰어났지만 빠른 공의 완급조절에도 뛰어났다는 말일 수 있다. 같은 구질이라도 구속을 바꿔주면 굳이 느린 변화구를 던지지 않더라도 타자의 타격타이밍을 흔들 수 있다.
  3. 행크 애런이 투수 주제에 MVP를 타는 것은 좀 그렇지 않냐는 말을 하자 "행크 애런이 현역이었으면 대가리를 쪼개놓아 내가 얼마나 valuable한지 보여줬을 것"이란 패기 돋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행크 애런은 그의 30년 선배이다. 그야말로 아버지뻘 대선배..거기다가 애런은 미국 야구사에서 한 손에 꼽는 대타자다. 한국으로 상황을 가정해 보자. 만약 류현진이 MVP를 받을 때 류현진과 대선배 장효조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와 같은 상황이라 하겠다.. 물론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없지만..
  4. 클레멘스를 제외하고 한 경기 20K를 기록한 투수는 케리 우드, 랜디 존슨 뿐이었다. 존슨의 경우 유일하게 무사사구 20K를 기록했으나 한 동안 정식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랜디가 20K를 거둔 경기가 연장전으로 돌입했기 때문(...). 게다가 랜디는 그 경기의 연장전에서 등판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한 동안 정식 기록으로 인정이 되지 않았다가 MLB 사무국에서 뒤집어 정식 기록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2016년 워싱턴 내셔널스맥스 슈어저가 9이닝 20K 2실점 완투 경기를 하면서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5. 당시에는 세이버메트릭스가 비주류였고 DIPS라는 개념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금 시대에 와서 되돌아보면 그 해 클레멘스는 사이영은 만장일치요 MVP까지 노려볼 지경이었다. 베이스볼 레퍼런스 측정 WAR에서 그 해 MVP 리키 헨더슨도 제쳤을 정도니 말 다한 셈.
  6. 오늘날 클레멘스는 2001년 마이크 무시나를 제치고 사이영을 먹은 것이나 2004년 랜디 존슨을 제치고 사이영을 먹은 것 때문에 상복이 많았던 투수로 기억되곤 하는데, 최소한 레드삭스 시절에는 클레멘스는 상복이 많았다기보단 오히려 적은 편이었다. 그가 수상했던 타이틀이나 퍼포먼스의 압도성을 감안하면 오늘날의 투표 기준을 도입할 경우 사이영상을 다섯 번은 받을 수 있었고 MVP도 한번 더 노려봄직했다.
  7. 이 황혼기 드립이 클레멘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8. 이 트레이드에서 데이비드 웰스가 블루제이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9. 역사상 300승과 4000번째 탈삼진을 같은 게임에서 달성한 선수는 클레멘스가 유일하다. 확률상으로 따져도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다.
  10. 이 과정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돈 짐머 옹을 패대기쳤다(...)
  11. 클레멘스가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열어제낀 1986년은 NASASTS-51-L 챌린저 폭발사고로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전면 중단했던 연도이며, 2004년은 NASA가 STS-107 컬럼비아 폭발사고의 진상조사를 마치고 비행 복귀 연구를 진행하던 시기였다. 그냥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는 별명이긴 하지만 묘한 아이러니를 풍기는 대목.
  12. 당시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타선 사정이 워낙 안습했던지라 승수로 보자면 13승으로 당해 수상자 크리스 카펜터나 2위 돈트렐 윌리스에 비해 보잘 것 없었으나, 1점대 ERA는 승수나 탈삼진, 이닝수가 부족하다고 깎아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년도 랜디 존슨을 꺾었더니 이번엔 자신이 부메랑을 맞은 셈. 뭐 승수를 제외하더라도 탈삼진이 경쟁자들보다 적기야 했다만...
  13. 중간에 보스턴 레드삭스 클럽하우스를 방문하여 커트 실링 등의 삭스 선수들에게 환대를 받기도 했다. 또한 2월 쯤에 테오 엡스타인 레드삭스 단장은 로켓의 금의환향을 기원하는 보빠들의 염원을 담은 DVD를 선물하며 레드삭스로의 리턴을 진지하게 제안했다고.
  14. 명목상 연봉은 22,000,022달러였다. 하지만 실수령액은 $12.2M 가량이었다고 한다.
  15. 무려 28,000,022달러다! 물론 실수령액은 $17.4M 가량이지만.
  16. 아메리칸리그에서는 1986년과 1987년에 4차례 있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돈 서튼이 연루된 경기.
  17. 클레멘스의 약물 관련 인터뷰 영상을 분석하여 클레멘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밝혔다.
  18. 실링은 이전에 클레멘스가 보스턴으로 돌아오면 발레복을 입고 춤추겠다고 하기도 한 골수 로켓빠다.
  19. 이는 미국 각 주의 법에 따라 미성년자 강간 의혹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물론 민디 맥크리디는 성년이 된 이후부터 성관계를 가졌다고 말했지만.
  20. 2013년 2월 민디 맥크리디는 불우한 말년을 보내다가 자살했다. 클레멘스 측에서도 슬픈 일이라며 성명을 표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클레멘스와 민디의 검열삭제 비디오를 찾으려는 천하의 개쌍놈들이 날뛰고 있어서 포르노 업계에서도 자제를 당부할 정도였다.
  21. 그런데 언론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배리 본즈는 전미가 하나되어 천하의 개쌍놈으로 취급하였지만, 클레멘스의 경우 ESPN 등의 유력 매체들은 거의 실드를 쳐주는게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
  22. 앤디 페티트 역시 HGH 복용 혐의가 드러났지만 곧장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는 점에서 클레멘스와 대조적이다.
  23. 본질적으로 나쁜 사람이라기 보단, 거친 성격 자체는 투수로서의 승부근성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
  24. 2013년 현재까지 야구 쪽에서 가장 주목받은 클레멘스의 아들은 휴스턴 애스트로스 산하 마이너에서 활동한 코비 클레멘스(Koby Clemens). 입단 당시에는 아버지 빽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후 상당한 성장을 보인 공격형 포수였다. 하지만 포지션 변경을 거치며 자신의 메리트를 잃어버렸고, 결국 2013년 현재는 독립리그를 전전하고 있다. 독립리그 경기에서는 현역으로 복귀한 아버지의 포수로 호흡을 맞추기도. 여담으로 휴스턴 시절엔 연습경기에서 아버지의 공을 홈런으로 후려갈겼다가 다음 타석에서 강력한 몸쪽 패스트볼 공략을 당하기도 했는데, 아버지를 보며 호탕하게 웃어넘겼다고(...).
  25. 한편 2013년 드래프트에 나오는 셋째 아들 케이시 클레멘스(Kacy Clemens)는 우완투수/좌타 1루수로 나름대로의 가능성을 보이면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게 투수로 35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텍사스 주립대 입학 예정이라 지명순위가 밀린 것이며 밀려도 너무 밀렸다보니 프로 직행 가능성은 높지 않은 편.
  26. 75%의 득표율이 나와야 헌액된다. 딱 절반 수준의 표를 얻은셈이다.
  27. 다른 여러 약쟁이들과 달리 브라이언 맥나미 재판과 맞물린 클레멘스의 약물 복용 스토리는 꽤 상세하게 보도되었음을 상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