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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魯迅(노신)

출생1881년 9월 25일 중국 저장 성 사오싱 시
사망1936년 10월 19일 장쑤 성 상하이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지상 위에 놓인 길과도 같은 것이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1 개요

중국작가이자 만화가[1], 사회운동가, 사상가

사실 루쉰이 본명이 아니다. 저우(周)씨였고, 어린 시절의 이름은 장서우(樟壽)였다. 본명으로 알려진 수런(樹人)은 그가 17세 때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바꾼 이름이다.

2 연표

  • 1881년 - 9월 25일, 중국 저장성 샤오싱 시의 성 안 마을에서 태어남
  • 1892년
9월, 삼미서재에 들어가 "맹자" 등의 경서를 배움
이 무렵부터 고전 소설이나 야사 등을 즐겨 읽고, 민간 목각화, 그림 등을 수집함
  • 1893년
청나라 관리였던 할아버지가 과거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힘(~1901)
겨울, 성 밖의 외가에 맡겨져, 뒷날 소설 창작에 영향을 준 농촌 생활을 체험함
  • 1894년 - 중병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전당포와 약방을 돌아다님
  • 1896년 - 1월, 아버지가 37세로 죽고, 집안이 더욱 궁핍해짐
  • 1898년 - 5월, 새 학문을 익히기 위해 난징에 있는 강남 수사 학당에 들어갔으나, 곧 그만둠
  • 1899년
1월, 강남 육사 학당 부설 광무 철도 학당에 입학
이 때부터 서양 근대 사상을 전하는 책과 잡지, 신문 등을 읽고, 진화론에 영향을 받으면서 과학과 민주 사상에 눈뜸
  • 1902년
3월,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의 쿄붕 학원에 입학
새로운 의학이 중국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리라 생각하고 의학을 배우기로 함
  • 1904년
9월, 일본 센다이 의학 전문 학교에 입학. 여기서 훗날의 회고처럼 강의 도중에 러시아 스파이로 잡힌 중국인을 칼로 참형하는 장면이 상영[2]되자, 어이없어 보던 그는 생각을 고치게 된다. "생각없이 있다면 저렇게 다른 나라와서 자국인이 참수되는 거나 보고 있는 신세가 된다. 즉, 정신을 바꾸고 생각을 하게 해야한다. 그렇게 위해선 문학이 의학보다 정신을 바꾸는데 중요하다."
12월, 광복회에 가입
  • 1906년 - 2월, 문학 예술 활동으로 중국 민족 의식을 개조하리라 결심하고, 의학 공부를 그만둠
  • 1907년 - 3월, 문예 잡지 "신생" 출판을 계획했지만 실패함. 혁명적 잡지에 여러 가지 글을 발표함
  • 1909년 - 8월, 중국으로 돌아와 사오싱 중학당 등에서 교사를 지냄
  • 1911년 -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남. 사오싱에서 열린 민중대회의 주석직을 맡고 적극적으로 활동함.
  • 1912년 - 임시 정부의 교육부 관리가 되어 난징을 거쳐 베이징에 감
  • 1918년 - 4월, "광인 일기"를 써서 "신청년"에 발표함. 처음으로 루쉰이란 이름을 사용함. 이후 계속하여 "신청년에 소설 등을 발표하여 신문화운동을 이끎
  • 1921년 - 12월, "아큐정전"을 "신보부간"에 연재하기 시작함
  • 1925년 - 8월, 베이징 여자 사범 대학교 해산 사건으로 군벌 정부의 교육 당국에 맞서 투쟁함
  • 1926년
1월, 베이징 여자 사범 대학교 복귀, 교육부 검사로 복직
8월, 군벌 정부의 탄압을 피해 하문으로 가서 하문 대학 문과 교수를 지냄
  • 1927년 - 2월, 광저우 중산 대학 문과 주임으로 있다가, 국민당의 청당 운동에 항의하여 물러남
  • 1928년
1월, 국민당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에서 도피 생활을 함
2월, 창조사, 신월사 등과 문학 논쟁을 벌이며 마르크스주의 문예론을 연구함
  • 1929년
목판화 민중 예술 보급 운동을 벌임. 이후 여러 민주 단체에 가입하여 국민당의 반공 독재 정치에 항의하는 운동을 벌임
  • 1936년 - 10월 19일, 동지 취추바이의 유작집을 편집하던 도중 천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남

※ 출처 :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출판사)

3 작품 일람

4 기타 등등

루쉰에게 두 동생이 있었는데 훗날 매우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큰동생 저우쭤런(周作人)은 루쉰처럼 문학을 공부했으며 신문화운동에도 함께 참여한다. 저우쭤런은 문학이론가, 번역가, 에세이스트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그 명성은 훼손된다. 전쟁으로 베이징 등 주요 도시의 일본군이 진주하자 베이징대, 칭화대 등 많은 대학의 교수들은 협력을 거부한 채 낙향하거나 쿤밍에 세워진 시난연합대학으로 강단을 옮긴다. 그러나 베이징대에서 일하고 있던 저우쭤런은 베이징에 남아 베이징대 총장, 왕징웨이 정권의 교육청 독판(교육부 장관)을 지낸다.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기도 한다. 전쟁 중 보여준 그의 친일적 행보로 인해 종전 직후 국민당 정부는 저우쭤런을 한간으로 처벌받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복권되지 못한 채 1967년 삶을 마무리해야 했다. 반면 형제의 막내인 저우젠런(周建人)은 생물학을 공부했는데, 국공내전중국공산당에 가입, 중공 수립 이후 고향 저장성의 성장과 교육부 부부장,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 등 여러 요직을 맡는다.

루쉰이 사망한 지 20년이 지난 1957년에 누군가가[3] 마오쩌둥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만약 루쉰이 살아있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 마침 반우파 투쟁이 한창이던 무렵이라 문화계 인사들의 행로가 화제에 올랐는데 마오쩌둥이 상하이를 방문한 틈을 타서 물어본 것. 그러자 마오쩌둥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한다.

"나의 생각으로는 (루쉰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소." 그리고 약 10년 뒤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너희들도 가만히 있어, 라는 경고일지도

자기 나라의 중국인에 대해 안좋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인을 이기적이고 허세정신승리를 잘 드러내며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고 쓸데없이 외래문화에 배타적이라고 주장했다.[4] 루쉰이 생각한 중국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아Q정전이다. 그런 시각에서 한자 폐지 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다.
"漢字不滅,中國必亡。한자불멸, 중국필망.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정작 외국인이 중국인을 이렇게 까면 그건 또 싫어했다. 펄 벅을 비난하고 그녀 대표작인 대지를 비난한 것도 바로 루쉰이다. 내 민족을 건드리지 마라! 내 민족은 내가 깐다.

생전에 리영희가 매우 존경한 인물이기도 하다. 리영희의 자서전 격인 '대화'를 보면 루쉰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잘 알 수 있다.

루쉰 전집의 정장 기념본 초판은 200질만 만들었는데 예전부터 구하기 어렵기로 유명하다. 저우언라이가 캄보디아 국왕 시아누크에게 선물해 줄 한 질을 구하지 못해 애먹었을 정도다. 마오쩌둥 역시 한 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투 중에도 가지고 다닐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다자이 오사무가 루쉰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석별(惜別)을 발표한 적이 있다(한국에도 번역되었다). 일본유학 시절의 루쉰의 모습을 회고하는 형식. 문제는 이 소설이 쓰여진 것이 일본이 한창 전쟁 막바지에 다다랐던 1945년이었고, 집필 동기도 전시 어용문인 단체인 문학보국회[5] 의뢰를 받아서 지어진 소설이라는 거...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1944년 1월 30일에 도호 영화사의 프로듀서 야마시타 료조에게 쓴 편지에서 "새해가 되자마자 문학보국회에서 대동아 5대 선언을 기초로 한 소설을 쓰라는 어려운 명령을 받아, 이것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다른 일을 제쳐두고 이 일에 매진하는 중입니다."라고 밝혔다. 소설 후기에서도 "써달라는 의뢰가 없었어도 언젠가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자료를 모으고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자이 오사무 자신이 당시 일본문학보국회에 소설 개요를 제출했던 소설가 50명 가운데 선발된 6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 스스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일본문학보국회의 기획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당시 평론가들은 작품에 그려진 루쉰의 모습과 그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일본과 중국의 관계가 지극히 피상적이라면서 이 작품을 '실패작'으로 간주했다고.[6]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폭탄투척 의거로 우리에게 유명한 홍커우 공원은 현재 루쉰 공원이라고 이름이 바뀌어 있다. 공원 내부에 루쉰 기념관도 같이 있다.

루쉰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 참조.

중국의 소설가 위화는 수필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한 친구와의 사소한 논쟁에서 불현듯 떠오른 "루쉰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라는 한 마디로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던 그 친구의 입을 다물게 한 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놀랍게도 그때는 한창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전역이 어수선하던 시대였는데, 그 서슬퍼렇던 문혁 시절조차 루쉰의 이름이 중국 민중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 하긴 그 마오쩌둥도 진심이었든 립서비스였든 "그는 위대한 문학인이자 또한 위대한 사상가였다"고 칭송했던 루쉰을 부정한다는 것부터가...

  1. 해외소설을 대거 연환화하는 작업에 나선적이 있다. 다만 중국내에서 연환화 작가는 일반적인 만화가와는 따로 취급하는 듯
  2. 일설에 의하면 영상은 둘째치고 그 영상 속에서 처형되는 중국인을 다른 중국인들이 묵묵히 구경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도 한다.80년대 위인전 만화에서는 아예 이 영상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중국 유학생들이 환호하는 걸 보고 울면서 같은 중국인이 죽는데도 저런다니!? 라고 그려지기도 했다.
  3. 루쉰의 아들 저우하이잉이 쓴 '나의 아버지 루쉰'(2008, 도서출판 강)의 에필로그에 따르면 저우하이힝의 어머니 쉬광핑의 친구이자 번역가였으며 루쉰을 몹시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진 뤄지난이라는 인물이다.
  4. 서성,'한권으로 읽는 중국문화',넥서스,2005,p30
  5. 국민들에게 전쟁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거나 전쟁터에서의 옥쇄를 찬미하고 승전을 축하하는 내용의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이 이들의 주요 업무였다.
  6. 출처: 다자이 오사무 전집 제6권 '쓰가루', 도서출판b,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