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크 위르뱅 드 부엑식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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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 Urbain de Bouëxic, comte de Guichen (6/21/1712 - 1/13/1790)

18세기 프랑스 해군에서 복무한 제독으로 프랑스 해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제독들중의 하나이다. 일반적으로는 기솅 백작으로 알려져있다. 비슷한 유명세로는 쉬프랑 제독과 데스탱 후작정도가 있는데 쉬프랑은 프랑스 제독답지않은 공격적인 전술로 이름이 높은 제독이었고 데스탱 후작은 그 자신의 용병술 자체가 크게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기솅 백작은 방어전의 귀재로 평가받았으나 그 특성상 극적인 승리는 보여주지 못했다.

2 군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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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에 해군에 입대한 이래로 승진은 빠른편이 아니었으나 서인도제도 등지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으며 내부 평가는 좋은편에 속하여 승진 자체에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대표적인 해전으로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우샨트 해전과 마르트니크 해전이 있다. 우샨트 해전에서는 90문함 라 빌 드 파리 (La Ville de Paris) 를 타고 참전하여 기함의 후방을 방어해내었고 마르트니크 해전에서는 함대의 제독으로써 영국 왕립해군의 조지 로드니 경을 상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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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티니크 근해에서 4월 17일, 5월 15, 19일에 걸쳐 세번의 교전이 벌어졌으며 이것을 통틀어 프랑스 전사에서는 ‘기솅 백작 세번의 전투’ [1] 라고 부른다. 4월 17일에 벌어진 첫번째 교전에서는 풍하의 위치에서 교전하여 로드니의 전술에 당하여 전열이 붕괴되었으나 휘하의 프랑수아-조세프 뽈 함장의 재빠른 기동덕분에 성공적으로 전열을 복구하는데 성공하였고 패배로 이어지는것을 막을수 있었다. 이로 인해 기솅 함대의 본래 목적이던 자메이카 점령은 사실상 실패하게 되었지만 이를 전훈삼아 뒤이은 5월 15, 19일의 교전에서는 풍상을 점유하고 완벽에 가까운 기동을 선보여 로드니가 어떠한 제대로 된 공격 기회도 잡을수 없게 만들었는데 이때의 기동은 전열 전술에서의 방어적인 운용의 정수를 보여주었다고 할수 있다. 7월부터 시작되는 허리케인 시즌이 시작되자 유럽으로 귀환하여 서인도제도에서의 작전은 끝을 맺게 된다. 유럽에서는 스페인 무적함대와 프랑스 해군의 연합 함대를 지휘하여 지브롤터 봉쇄와 다시 한번 서인도제도로의 증원 임무를 받았으나 둘 모두 실패로 끝나고 군사 경력을 끝마치게 된다.

3 평가

이렇게 성과만을 놓고 본다면 왜 고평가를 받는지 의아할수도 있는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기솅 백작 부분의 저자 데이비드 해네이 (David Hannay) 에 따르면 큰 성과가 없어보일지라도 기솅 백작이 서인도제도에서 활동할 동안 영국해군이 프랑스령 식민지에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군재를 알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프랑스 해군과 영국 해군의 교전사를 보면 승리는 고사하고 이렇게 기솅 백작처럼 완벽하게 영국 해군을 방어해내는 경우가 아주 찾기 힘들다는 점을 볼때 그의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고 볼수 있다.

특히 당시는 전열 파괴 전술의 태동기라고도 볼수가 있는데 기솅 백작이 그런 놀라운 성과를 올린 상대는 평범한 제독도 아닌 그러한 전술의 선구자격이며 그 자체로도 뛰어난 제독이었던 로드니였다.[2] 로드니의 후배이자 전열파괴전술을 사실상 완성시킨 넬슨이 이끈 영국해군과 빌뇌브 제독이 이끈 프랑스해군의 트라팔가 해전에서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기솅 백작의 고평가는 쉽게 이해가 된다. 기솅 백작의 이러한 활약은 초기의 전열파괴전술이 제대로 훈련된 해군을 상대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으나 어디까지나 전열 전술이라는 경직된 전술에만 의존하였다는 그 자신의 한계도 존재한다.

특이한점으로 동시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솅 백작은 과학적 지식이 굉장히 풍부했다고 하며 실제로 퇴역후에 벤저민 프랭클린이 설립한 미국 철학 협회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의 정회원으로 인정받았다.[3] 그야말로 귀족적인 해군 장교의 정점이라고 볼수 있는 인물이다.
  1. 직역은 기솅씨의 3번의 전투이다.
  2. 로드니는 개인적으로 낭비벽이 심했던 인물인데 영국해군에서는 그당시 절정에 달해있던 프랑스 해군의 역량을 상대하기위해 로드니의 빛을 탕감해가면서까지 제독으로 서인도제도로 파견했던 것이다.
  3. 현대 이전에는 철학이 곧 과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