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대처

(마거릿 대처에서 넘어옴)
역대 영국 총리
Great-Britain-United-Kingdom-Emblem.png
70대71대72대
제임스 캘러헌마가렛 대처존 메이저
다우닝 가 10번지에 있는 공식 사진[1]
풀네임Margaret Hilda Thatcher, Baroness Thatcher
출신 정당보수당
출생1925년 10월 13일
(영국 랭커셔 주 그랜섬)
사망2013년 4월 8일
(영국 런던시 웨스트민스터 구. 향년 87세)
재임기간1979년 5월 4일~1990년 11월 28일(11년 6개월)
가족관계알프레드 로버츠(부)
베아트리스 에셀(모)
뮤리엘 로버츠(자매)
데니스 대처(남편)
마크 대처(자)
캐롤 대처(녀)

1 개요

분열이 있는 곳엔 화합을, 오류가 있는 곳엔 진실을, 의심이 있는 곳엔 믿음을. 그리고 절망이 있는 곳엔 희망을. [2][3]
"사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회명목론?남성과 여성, 개개인이 존재할 뿐이고 개별적인 가족 공동체가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정부란 국민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국민들은 먼저 스스로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보고, 더 나아가 우리 이웃을 돌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의무는 생각하지 않고 권리만 주장합니다. 의무를 먼저 다하지 않는다면, 권리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4]

영국의 제71대 총리.

철의 여인

좋으나 싫으나, 오늘날 영국의 설계자.[5]

혈통이나 결혼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강대국의 지도자가 된 역사상 최초의 여성[6]

공산당 강철의 사나이에 맞서는 자본주의의 철의 여인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사람들이 여성 지도자 하면 바로 떠올리는 대표적인 여성 정치가 중 한 명이다.[7]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세 차례나 총선을 승리로 이끈 정치가이자,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다.[8] 역대 보수당 최장수 내각, 전후 최장수 내각의 2관왕. 역대로 치면 5번째다.

윈스턴 처칠 이후 영국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구가한 총리이자 신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하나이며,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80년대 자본주의 진영을 상징하는 정치 지도자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평가가 양극화되는 정치인 중 한 명으로, 그녀를 수식하는 대명사가 되다시피 한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부터 '신자유주의마녀'라는 별명까지 평가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어쨌든 여러가지 의미에서 역사이름을 각인시킨, 영국에서 평민 여성으로 최고의 위치에 도달한 여걸.

비유하자면 보수 우익왕안석, 상앙 같은 부류의 인물이다.

2 생애

마거릿 대처와 엘리자베스 2세 엘리자베스 2세 정색[9]

1925년 식료품 가게를 하는 중산층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10][11]. 원래 성은 로버츠(Roberts).

1943년옥스퍼드 대학의 서머빌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전공은 화학. 서머빌 칼리지는 옥스포드 대학교 내의 이공계 중심의 여자 대학이라 외롭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공계 여학생답지 않게 정치, 특히 보수당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었으며, 대학 내에서 보수 연합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살려 졸업 후 24세에 처음으로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 이후 부유한 집안의 자녀였던 데니스 대처와 결혼한 후 정치에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되었고, 1959년 당의 눈에 띄어 결국 보수당 성향이 강한 런던의 한 지역구공천받아 당선에 성공했다. 이후 승승장구하여 교육 장관을 거쳐 1975년 보수당 당수에 당선, 그리고 1979년 선거에 승리하여 영국총리가 된다. 데니스와의 사이에서 쌍둥이 남매를 두었다.

재임 초기 70년대 IMF의 지원을 받을 정도로 영국 경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총리 자리에 오른 뒤 긴축 재정을 실, 복지 지원을 삭감, 노조를 분쇄하여 실업률을 전후 최고치까지 끌어올렸다.[12][13] 1982년포클랜드 전쟁 직전에는 영국 역대 수상 중 최악의 수상으로 꼽히기도 하였으며 재선이 불가능해 보였으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재선에 성공하였다.[14] [15] 전쟁이 2개월 만에 승전으로 끝난 후엔 정권 지지도가 56% 정도까지 치솟았다. 이런 여세를 몰아 1983년실시된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16]

다만 포클랜드 전쟁승리가 대처의 장기집권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다. 1987년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포클랜드 전쟁은 대처가 치른 3번의 선거 (1979, 1983, 1987년 총선거) 중 83년 선거 승리에만, 그나마도 미미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한다.[17] 오히려 경쟁 상대인 노동당이 노선 갈등 끝에 두 쪽이 나버리면서 지지율이 반토막이 난 것이 1983년 선거에서 더 큰 호재였다. 전쟁 승리가 좋은 떡밥인 것은 사실이나 만능은 아니다. 윈스턴 처칠2차대전 승전후 노동당의 애틀리에게 선거에서 패했고, 조지 부시걸프전을 이겼지만 클린턴에 패했다. 어쨌든 이후 1987년 총선에서도 승리해 3기를 연임함으로써 영국 전후 최장 임기 총리가 되었다.[18]

집권기에는 신자유주의 경제 원리에 입각한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민영화노조에 대한 강경한 자세, 교육·의료와 같은 공공분야에 대한 대폭적인 국고지원 삭감 등 과거의 영국 내각들과는 다른 노선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는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무단 점령에 즉각적으로 대처해 영국의 위상을 지켜냈고,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견지했다. 철의 여인(Iron Lady)이라는 명칭도 사실 소련 언론에서 처음 사용한 수사로, 대처와 참모진들이 크게 만족해 본인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명확한 명암 때문에 옹호론자와 비판론자가 양립하는 정치인이다. 즉 우호적으로 평하면 "소신있고 결단력이 강한", 비판적으로 말하면 "독선적인" 정책의 정치인.

2.1 대내 정책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신자유주의의 동지였던 레이건의 정책들에 레이거노믹스라는 표현이 붙듯이, 대처의 정책도 대처리즘'이라고 불린다. 단순한 -nomics가 아닌 -ism가 어미에 붙은 것에서 나타나다시피, 대처리즘은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경제 정책뿐만 아니라 대처와 당시 보수당이 추진한 정책 전반과 그 기반이 된 이념의 명칭이다. 이는 대처의 정책들이 일반적인 신자유주의와는 여러가지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적인 면에선 21세기 기준에 비춰도 과격하고, 이민에 대한 부정적 태도나 반동성애, 가족주의적 경향 등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태도 역시 일반적인 신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경제적 정책에 대해선 후술하기로 하고 이 항목에선 일단 사회정책 전반중 특기할 만한 사항들을 짚어보기로 하겠다.

성 소수자들도 Section 28이라는 조치로 탄압을 받았다.[19] 이 조치는 대처와 보수당, 그리고 보수성향의 단체들[20]의 믿음을 영국 사회에 적극 반영하려는 정책이었고, 당시 대처 정부의 구호 였던 "경제 살리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데서 더욱 문제가 된다.

Section 28은 호모포비아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법으로 "호모질은 에이즈를 유발한다."는 인식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80년대 내내 편견과 무지로 인해 에이즈가 들불같이 번졌던 걸 생각해보면 굉장히 폭력적인 조치였다고 할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면, 지방정부가 동성애양성애적 요소를 긍정적으로 다루는 것을 금지했으며 공립학교의 성교육 과정에서 반 동성애 교육을 실시를 규정해놓았다.[21] 이 입법을 저지하기 위해 벌어진 동성애, 양성애자, 그리고 문화계의 투쟁은 그야말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필사적이었는데[22] 법이 제정되는 1988년 5월 24일, 시위대는 영국 국회의사당에 진입하고 공표가 있을 BBC 방송국의 아나운서 책상에 쇠사슬로 몸을 묶고 버티기도 하였으며 문화계에선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커밍 아웃을 통해 Section 28을 막으려고 했다. 배우 이언 매켈런의 커밍 아웃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이뤄졌다.

사실 이 조치가 직접적으로 동성애자들을 해친것은 아니다. 예컨대 Section 28 위반으로 감옥에 가거나 동성애자란 이유로 징역을 먹거나 하는 일이 벌어진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듯, 성적소수자들이 에이즈에 대한 공포로 사로잡혀있는 시기에 통과된 이와 같은 조치는 "정부는 너네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라는 인식을 보내기에 충분했고, 대처 실각 후 법이 사문화 된 이후에도 성적소수자 단체 공공의적 1호로 꼽히곤 했다. 결국 이 법은 2000년 스코틀랜드에서, 03년에 영국에서 폐지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처는 1960년대 동성애 행위를 비범죄화하는[23] 개정 법률안에 찬성 의결을 한 몇 안되는 보수당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영문 기사

지방자치정책 역시 대처 내각의 비타협 강경 노선이 여실히 드러난 부분이었다. 1981년 런던 시장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좌익/진보 성향의 케네스 로버트 리빙스턴[24][25]이 당선되고, 이어 런던 시의회를 노동당이 장악하는 일이 일어난다. 신자유주의적인 보수당과는 반대일뿐더러 노동당 주류보다도 더 진보적인 정책을 펼친 "런던 코뮌"[26]이 등장하자 대처는 영국의 모든 시의회를 없애버리는 유례 없는 일을 벌였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1986년 보수당 의회에서 지방세 상한제를 도입해 재정적으로 고사시킨 후, 한국의 광역시청에 해당하는 메트로폴리탄 카운티 의회 제도를 폐지해 버렸다. 이 조치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 런던광역의회(Greater London Council)[27] 폐지. 이것을 한국에 비유하자면, 서울특별시장과 서울특별시 의회를 야당이 모두 장악하자 대통령이 서울특별시 산하 자치구들을 일반 시-군으로 격하시켜버리고, 서울특별시 본청과 서울특별시 의회 자체를 아예 폐지하는 초강수를 쓴 셈.[28]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것이 지방의회인데 그 근간을 흔들어버리는 극단적인 조치를 한 것이다.[29] 이 조치는 꾸준한 비판을 받아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 내각이 들어선 뒤 해제된다. 런던 코뮌의 중심에 있었던 켄 리빙스턴은 자치정부 부활 이후 다시 런던 시장으로 당선 되면서 "14년 전에 아주 무례한 훼방으로 제 말이 끊기기 전에 했던 말을 마저 하자면...."이라고 운을 띄운 뒤 취임 연설을 하며 뒤늦지만 센스 있는 역습을 가했다.[30]

2.2 대외 정책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대처 내각은 강경한 대외정책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83년 총선 직전에 터진 포클랜드 전쟁의 승전도 그렇고, 소련을 상대로도 미국과 발맞춰 대립각을 세웠다. 긴 임기 덕분에 영혼의 투탑 정치적 동지 레이건의 임기 후에 벌어진 여러 역사적 사건에도 영향을 미쳤다. 통독 당시 강력한 독일의 부활을 우려해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걸프전 개입 직전 주저하는 조지 부시를 압박한 것 역시 대처. 다만 실제 걸프전 개전은 대처 후임인 존 메이저 임기 중에 일어났다.

다만 72년 벌어진 피의 일요일 사건의 은폐, 쿠데타로 수립된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지지,[31],아파르트헤이트를 고수하는 남아공에 대한 제재를 거부한 것이 오점이자 흑역사로 지적된다. 이 경우는 애초에 논쟁이 불가능할 정도로 확실한 과오라 별로 이슈가 되지 않는다.

2.3 실각과 사퇴

집권 말기에 유럽통합에 관련된 논쟁으로 당내에서 지도력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인두세 도입에 이르러서는 여론이 등을 돌렸다. 인두세는 여론의 가장 큰 반대를 몰고 온 정책이었는데, 이는 대처 내각이 소득도 없는 실업자들에게까지 투표권자 등록시에 세금을 물리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인두세는 소득의 유무와 상관없이 무조건 개인에게 일정액의 세금을 물리는 것이며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 치명적인 세제이다.[32] 현대적인 과세정책의 근본은 더 부유한 계층에 더 많은 부담이 지워지는 이른바 누진(progressive tax)세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에 역행하는 정책이었기에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33] 인두세 문제는 그의 총리직 사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인두세는 대처 퇴진 후 존 메이저 총리가 폐지시켰다.

당시 이에 대한 여론의 반발이 얼마나 컸던지, 거의 폭동 수준의 인두세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런던의 반대 시위 도중에는 사람 실물 크기의 대처 인형을 가설 교수대에 매다는 퍼포먼스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인두세에 대한 반발 여론이 컸던 것이다.

결국 1990년, 대처에 반발한 보수당 의원들이 당대표 선거를 실시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반수 획득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이지만, 단 네 표 차이로 1차 투표 당선(규정상 65%를 득표)에 실패. 이 1차투표 당시에 대처는 영국을 떠나있었고 타 의원을 통해 대리투표를 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대처가 당내 경선에 직접 참가해 얼굴을 비추고 의원들의 군기를 잡았다면 결과가 더 좋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자신의 리더십에 확신이 있었다고 생각할수도.

이유야 어쨌든 1차 투표에서 당선에 실패한 대처는 사실상 자신의 리더십이 무너졌다고 판단하여 2차 투표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 대표직과 총리직에서 사퇴한다. 그리고 1991년 5월 정계를 은퇴하였다.

대처의 보수당 당대표직 사퇴를 전하는 1990년 11월 22일 BBC 9시 뉴스.

1992년 남작 작위(케스티븐의 대처 여남작)를 받고 귀족회의인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단, 대처가 받은 작위는 종신 작위(life peer)로, 세습이 불가능하다.[34] 이후 한동안 막후에서 영향을 발휘하기도 했던 그녀는 고령에 접어들자 치매와 싸우며 투병하였으며, 본인이 전기 집필을 원하지 않은 관계로 그녀 생전에 공식적인 전기는 쓰여지지 않았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골수 신보수주의자였으며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병크를 터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집권 여당과 이념이 맞지 않는다고 지방 자체단체들을 박살내는 건 늦어도 중세 말 부터 수도에 기반한 강력한 중앙집권의 전통을 공화국 이념을 통해 아예 국가 이념으로 끌어 올린 프랑스식 민주주의와 달리 각 지역의 자치에 대한 존중을 역사적 뿌리로 두고 있고, 민주주의적 결과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더 민주주의적 과정을 중시하던 전통적 영국식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좌우익 가리지 않고 이단이라 할 만큼 광범위한 반발을 샀다. 당장 결과는 둘째 치고 집행 과정에서 싸질러 놓은 병크가 하도 많다 보니 심지어 같은 보수당 출신 후임 총리 존 메이저도 언론에서는 대처를 칭찬해도 실제 정책에서는 그녀가 벌린 일들 많은 부분을 전면 취소해버렸다.

2.4 사망과 반응

장례 행렬
500px
장례식에 참석한 불사신엘리자베스 여왕[35]

마거릿 대처는 2013년 4월 8일 오전에 타계했다. 향년 87세로, 사망 원인은 뇌졸중.

2.4.1 찬사

그녀의 부고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성 정치인의 본보기"라고 평가했으며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장례식은, 자신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지길 원치 않으며 행사비용으로 '돈을 낭비하지 말라'고 한 고인의 뜻에 따라 '국장에 준하는 장례 의식(ceremonial funeral)'으로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4월 17일 거행되었다. 이러한 의전은 다이애나 스펜서 전 왕세자비의 장례 때와 같은 것이었으며, 조의의 뜻을 표한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부군 필립공을 비롯해 170개국 2,300명의 조문단도 참석했다.

장례 행렬이 영국 국회의사당과 세인트 클레멘트 데인스 성당을 거쳐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르는 동안 육해공 3군이 관을 호위했고,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한 군인 10명이 대처의 관을 운구했으며 역시 포클랜드 전쟁 때 사용했던 대포 2문으로 조포를 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화장된 유해는 왕립 첼시 안식원에 묻힌 남편 데니스 대처의 옆에 안장되었다.

2.4.2 비판

대처의 장례를 반대하는 시위대

장례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보스턴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해 영국 경찰이 보안 문제로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300여 명의 시위대가 대처의 운구 행렬이 지나갈 때 등을 돌리고 피켓을 든 채 시위한 것을 제외하면 큰 충돌 없이 차분하게 마무리되었다.

대처의 사망을 기뻐하는 사람들, 글래스고 하지만... 기쁨은 잠시...

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잉글랜드 북부 지방 및 노동자 계급 중심으로는 온갖 고인드립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대처의 사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SNS 등지에서는 오즈의 마법사 영화판 삽입곡이었던 "Ding dong! The witch is dead!"(니나노! 마녀가 죽었다!)라는 노래를 차트에 올리자는 운동이 벌어졌고 실제로 1주일만에 52,605장을 판매하며 UK 차트 2위까지 올라갔으며 아일랜드 차트에서는 1위를 기록. 영국 내부에서는 "BBC의 주간 음반 차트 프로그램에서 이 곡을 진짜로 틀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꽤 큰 설왕설래가 있었다. 결국 노래는 하이라이트 한 소절만 틀고, 보도국 기자를 호출해 왜 이 곡이 2위에 올랐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전세계적으로 대처의 죽음을 꼬숩다고 반응한 지역들이 꽤 있었는데 그게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를 비롯한 잉글랜드 이외의 영연방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페루, 볼리비아 등 남미 지역이다. 아일랜드는 대처 정권기에 북아일랜드 독립투쟁이 극도로 치달은 상태였고 스코틀랜드는 에너지원 전환 사업에 의한 폐광크리에 따른 타격이 가장 큰 지역이었으니. 심지어 이 지역에서는 대처 장례식날에 축제 의혹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축제를 벌였다.[36] 그리고 사실 국내에서도 잉글랜드가 남북갈등이 워낙 심하다 보니 그녀의 노조 탄압, 금융 산업 육성 정책 등에서 큰 피해를 봤던 잉글랜드 북부의 유수의 공업지대 출신 사람들은 풍악행렬에 앞장서서 동참했다. 특히 리버풀 사람들은 항만 노동자 파업 강경 진압 건 및 힐스보로 참사 당시 대처가 경찰을 싸고 돌았던 점[37] 때문에 대처를 싫어한다.

남미 지역은 아무래도 포클랜드 전쟁의 영향.

3 경제 정책

보편적으로 마거릿 대처는 영국병을 극복해 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정은 조금 복잡하다. 소득세 감면, 간접세 증가, 이자율 증가, 정부 소비 감소로 대표되는 대처리즘은 결과적으로 영국의 전체적 경제 성장률을 플러스로 돌려놓았으며, 인플레이션을 잡는데도 기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강경 진압한 것과 지나친 공공기관 민영화로 인한 국민부담 증가, 전례 없는 신자유주의식 긴축정책, 벤틀리·롤스로이스 등 영국내 제조업 파괴[38], 고실업, 저교육투자 등이 주로 좌파측의 비판자들이 대처를 공격하는 주된 이유이다.

3.1 비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저서 <Peddling Prosperity>[39]에서 대처 행정부가 행한 경제 정책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으며, 영국가스공사(British Gas)와 영국전력공사(British Electricity), 그리고 잉글랜드, 웨일스 물관리공사 Regional Water Authorities(RWAs)의 민영화는 국가 기간시설(基幹施設)의 민영화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의 하나로도 언급된다.[40] 민영화 항목을 참조해 보면 알겠지만, 민영화는 경제를 회복시키는 마법의 주문이 아니다. 제대로 관리 감독되지 않으면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리스크 또한 가졌기에 무분별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세를 드높이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민영화의 리스크는 간과되었고, 대처의 민영화는 이후 경제적 측면에서 대표적인 비판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방송국 민영화라든가 BBC에 상업광고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 이웃나라 프랑스와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지에선 공영방송에서도 상업광고가 편성된 것과 대조되는 점. 참고로 이웃나라 프랑스에선 대놓고 사회복지정책을 축소하진 않았지만 대신 그 당시 총리였던 자크 시라크가 마거릿 대처도 못한 공영방송의 민영화(TF1)를 실현했다.[41]

마거릿 대처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부류는 대처 내각의 결실은 허상이고 신의 축복인 북해 유전 덕분에 영국경제가 회생했을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북해 유전으로 인한 경제 효과를 너무 과장하는 걸로 보이지만 영국이 북해 유전 덕분에 산유국으로 올라서고 거기에서 상당한 규모의 재정 수입을 얻고 수입 대체 효과와 관련 산업이 발전하는 혜택을 누린 것은 분명하다.[42] 조지 소로스의 맹우로 알려진 짐 로저스는 북해 유전의 낮아지는 생산성과 고갈 위기 등을 언급하면서 파운드화 자산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었다. 영국은 이제 x됐다. 일부 주식 커뮤니티에서는 약팔이라고 까이기도 하는 로저스지만 입지적인 전설이므로 참고해도 손해는 아닐 듯하다.

또 일각에서는 마거릿 대처 치하에 스코틀랜드 경제가 박살났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이것이 심지어 스코틀랜드 독립 의식을 증폭시켰다고 하기도 한다. 이는 당시 스코틀랜드 경제 구조와 큰 연관이 있다. 광산업과 제조업 (특히 철강업)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 특성상 대처의 구조 개혁은 말그대로 직격탄이었고, 그에 따라 대처에 대한 반감도 (수치상의 발전이나 변화와 무관하게) 무지무지하게 올라갔다.

이는 스코틀랜드 뿐만이 아니라 영국 북부 전반의 현상으로 80년대를 다룬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이런 경제 구조 개혁으로 인해 벌어진 실업문제나 도시 슬럼화가 자주 묘사된다. 대표적인게 폐광으로 실업자가 된 광부들을 다룬 이완맥그리거 주연의 영화 "브래스드 오프 (Brassed Off)". 심지어 맨유 선수들을 다룬 다큐 "Class of '92"에도 스쳐가듯 대처 욕이 많이 나온다 (...).[43]

이러한 반감을 단순한 투정이라고 무시하면 안되는게, 구조개혁으로 인한 실업과 그에 따른 수치상의 성장이 실제로 민생에 직결되지 않는 점은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문제들이다. 한국도 IMF 이후 GDP나 실업률이 원상복귀 되기는 했지만 비정규직 문제들 여러 경제문제가 여전히 남아있고, 미국도 90년대 제3의길과 자유무역으로 인해 많은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진것 처럼. 따라서 아래 옹호란에 나온듯이 스코틀랜드가 대처한테 삥을 뜯기거나 대놓고 무시당한것은 아니지만, 큰 피해를 입었고 여전히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는게 중요하다.

3.1.1 옹호 및 반론

위에 언급된 자동차 산업과 석탄 산업같은 경우 이미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국내외적으로 받고 있었다. 특히 롤스로이스같은 일부 거대한 산업같은 경우 이미 6, 70년대 들어 경영이 어려워지자 국유화해서 국민들의 세금으로 운영하다시피 했다.

또, 이미 70년대부터 북해 유전 등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지만[44], 여전히 영국은 보다 열등하며 사양산업인 석탄 산업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연명하고 있었고, 이 당시 석탄 광부들은 대처 이전에 이미 총리를 하나 갈아치울 정도로 그 정치적 위세가 막강했다.[45] 이런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석탄 산업을 대거 구조조정한 결과 이 당시 석탄 산업 근로자들은 상당수 북해 유전과 가스전으로 취업하게 되어 산업 구조 전환이 이루어졌다. 북해 유전같은 환경적인 측면이 영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맞지만, 그렇다면 왜 그 이전 행정부는 그러한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해 IMF 금융지원까지 받은 걸까? 적어도 대처가 석탄 산업을 구조조정하고 거기에 소모되는 인력과 물자를 석유, 가스 산업으로 돌리는 등 그런 환경적 혜택를 받고자 노력한 점은 이전 행정부보다는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46]

거기에 북해 유전같은 것이 마냥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마찬가지로 북해 유전으로 꿀을 빨았던 네덜란드는 이른바 자원의 저주로 말미암아 큰 경제적 홍역을 치른 바 있다. 이러한 문제가 굳이 유전만 그런 것도 아니고 대표적으로 그 옛날 제국주의 스페인이 중남미 금은광으로 재미를 봤다가 말아먹은 사례도 있다. 결국은 어떻게 써먹느냐에 달린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북해 유전의 존재가 아이러니 하게도 석탄 산업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유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스페인 역시 식민지 금은광이 흥해서 국내 제조업을 말아먹은 전례와 비슷하다.

또, 민영화의 경우 역시 열차[47]나 수도 민영화같은 개별 사안은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잉글랜드 남부 등지를 중심으로 오히려 대처의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가장 많이 생겨나게 한 정책이기도 하다. 그 이유가 뭐냐면, 이 당시 대처는 국민주 방식을 통해 공기업 주식을 염가에[48] 대거 국민들에게 팔아치우면서 수많은 국민들이[49] 주식을 사게 되었고 이들이 이를 보유하거나 기관에 팔면서[50] 돈을 만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민영화 정책 중 가장 호평받는 것은 공공주택 민영화인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서민들이 자기 집을 보유하게 되었고 뒤이어 불어닥친 부동산 시장 광풍으로 집값이 대거 상승하면서 이들이 대박을 터뜨린 바 있다. 대처의 비판자들은 보통 설문조사 해보면 40%를 찍지만 지지자들 역시 보통 5~60%를 찍는데 그게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80년대 장기집권하도록 도운 열정적인 지지세력은 죄다 여기서 나왔다. 대처의 경제 정책적 속성 중 하나로 간과되는 것이 이른바 '대중자본주의'인데, 대처의 정책으로 인해 적지 않은 중산층들이 자본 소유주가 되어 그 혜택을 누린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줄어든 제조업 비중, 금융 산업의 활성화,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 보장 축소 등의 신자유주의화는 마거릿 대처 자신의 개인적 사상과 결합해(Thatcherism)[51] 21세기의 그것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극단적이었지만, 대처는 20세기 말 까지도 긍정적인 평가를 더 많이 받았다. 대처는 영국에게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라는 메시지를 던졌고, 대처의 집권 후기인 1987년도 경에는 실업률 상승이 꺾인 점에서 미루어 그녀가 영국 경제에 놓은 극약 처방은 효과가 분명히 있었다. 괜히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나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 등 수많은 국내외 각국의 정상들이 그녀를 배운 게 아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 정책으로 말미암아 국내 진보 세력으로부터 배신자로 까였지.

스코틀랜드 경제가 박살났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구체적인 통계를 살펴보면 사실이 아니다. 일단 지표만 보자면 마거릿 대처 시기에 특별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간 격차가 커진 것은 아니다.# 영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오히려 1인당 GDP 성장률은 두 지역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스코틀랜드가 더 높은 적도 적지 않았으며,# 이 외에도 이 기사에 따르면 오히려 대처 시기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 성장률이 더 높았다. 심지어 스코틀랜드 주 정부 자료를 보더라도 [1]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는 2012년 기준으로 39642달러인데, UK의 gdp는 35671달러로 스코틀랜드가 더 높다. 이 점을 볼 때 대처가 스코틀랜드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UK에서 잉글랜드가 차지하는 gdp나 인구 비중은 통상 80+a%을 오가는 걸 감안하면 UK와 잉글랜드의 1인당 소득 관련 지표는 그닥 차이 안 난다. 스코틀랜드 독립당과 가디언지의 자료에 따르면 파운드화 기준으로 스코틀랜드의 1인당 gdp가 약 2300파운드가 높다고 했다. [2] 스코틀랜드 1인당 gdp가 영국이나 잉글랜드의 1인당 gdp보다 높다는 자료가 있으면 추가바람.[52]

3.2 경제 지표 변화와 그 설명

집권 당시 영국의 인플레이션율은 79년 27%까지 치솟았다. 거기에 더해 석탄 및 제조업 분야는 파업으로 들끓었다. 정부부채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1기 당시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율을 끌어내리고 정부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증세 및 정부지출 삭감, 통화정책에 집중되었다. 80년, 81년 경제성장률은 그런 이유로 대체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53] [54]그 이후 경제성장률은 +로 다시 회복되었다. 즉, 1기 당시의 실물지표 악화는 따지고 보면 이전 정권이 싼 똥을 치우다 생긴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2기 부터는 공기업, 공공주택 부문에서 민영화 등이 이루어진 점, 그리고 국제적으로 이 시기에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팽창한 시점이라 그 궤를 맞춰서인지[55] 자산 가격 상승에 따른 총수요 팽창이 있어 경제성장률이 제법 높았다.[56] 이 과정에서 중산층이나 서민들이 제 집을 가지게 되거나 주식 등 자산 분야에서 재미를 보게 되는데, 흔히 대처가 경제를 살렸다고 불리는 시기는 대체로 이 시기를 거론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이 과정에서 역시 자산 거품이 일어 퇴임 후 그 거품이 꺼짐에 따라 91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한 바 이 점은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다만 92년부터는 원상회복해 일본의 전철을 밟지는 않았다.[57]

그 외에 다른 지표를 보자면 일단 실업률은 대체로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이 더딘 관계로 집권 기간 동안 높은 바 이 점은 대처 정부의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다.[58] 그 다음으로, 물가는 확실히 내렸다.[59] 다만, 주택가격은 대체로 상승세를 보였고 말기들어 폭증했다. 정부부채 역시 해결되었다. 지니계수 등 소득분배 지표는 확실히 악화되었다. 최빈곤층의 소득지표는 실질지표로 볼 때 대체로 개선되거나 이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Thatcher-Gini.png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지니계수를 악화시켜서
Thatcher-income.png
하위 10%의 생활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http://www.bbc.com/news/uk-politics-22070491
http://www.economicshelp.org/blog/274/uk-economy/economic-impact-of-margaret-thatcher/
http://blogs.spectator.co.uk/coffeehouse/2013/04/margaret-thatcher-in-six-graphs/

4 평가

'영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한 강단있는 정치인'이라는 평과 '영국의 빈부격차를 크게 키운 최악의 정치인' 이라는 평까지 극과 극의 평가를 전부 듣는 인물이다. 20세기 들어 내리 쇠해가던 영국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여걸이라는 극찬을 받는가 하면 영국의 노동자, 노동당 지지자들은 노동자의 적이라고 부르며 매우 그녀를 싫어한다. 심지어 보수당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보수당 의원들이 당대표 선거를 실시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 그런데도 대처의 후임 존 메이저보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대처리즘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 부분이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블레어의 정책 노선은 마찬가지로 영국병 참조. 이처럼 반대 진영인 노동당 쪽에서도 의외로 그녀를 괜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평가 스펙트럼이 넓다는 것.

  • 의외라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보수당의 원로와 전통적 지지층 중 대처에 대한 반감을 가진 세력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버리지 보고서를 통한 계급 타협이 정착된 상황에서 노동 계급에 대한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오래된 계급 투쟁의 망령을 다시 불러왔다는 것이 당시 보수당 원로들이 대처를 싫어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양차 세계대전에서 국가 주도 동원 경제의 막강한 조직력이 전쟁 이후 클레멘트 애틀리 정권에서 보편 복지 정책으로 연결 되어 사회적 안정과 계급적 불만의 해소라는 측면에서 크게 성공한 걸 보았던 전후 영국 보수 엘리트들은 미국과 달리 사회 안정이라는 쥐만 잡을 수 있다면 적절한 수준의 정부의 시장 개입에 더 이상 개거품 물고 병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 게다가 대처는 전통적인 보수당의 문화에 적응하기보다는,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신자유주의적 질서로 재편하기 원했기 때문에 벼락출세한 정치적 졸부 취급을 당하였다. 역시 미국과 달리, 이 시점에서도 영국은 적어도 보수당 지지층이란 특정 사회적 집단 내에서 보면 여전히 근대적 의미에서, 주로 경제 정책을 두고 좌우익을 결정하는게 아니라 프랑스 혁명산업 혁명 이전 종교, 혈통, 작위 같은 전근대적 신분 결정 팩터에 큰 무게를 두는 진짜 오리지널 보수 우파적 가치관이 분명히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이 관점에서는 일단 평범한 노동자 집안 출신의 여자라는 점 자체가 문제가 되었다 [60].
  • 반대로 대처를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세력도 적지 않다. 이들은 대처 행정부의 개혁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영국이 대처리즘의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979년 대처가 넘겨받은 영국은 그야말로 막장이었고(영국병 참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극과 재생이 필요한 상태였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당시의 노선 그대로 영국이 지금까지 남아있었을 경우, 영국의 현재 모습은 지금보다 심하면 심했지, 더 낫지는 않았으리라. 따라서 그런 영국을 비록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많은 부작용이 있었다 하더라도 1차적으로 살려놓았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옹호론자 중에선 많다. 최저임금제도의 실질적 정착과 노동자 계급이 그 상황 속에서도 적은돈이나마 집을 얻을 수 있게 해준 것과, 영국보험체계의 현대화를 위해 힘쓰기도 했다.
지지자들에 따르면 대처는 근면 성실한 노력과 자립을 중히 여기는 과거 영국의 가치와 사회관이 복원되기를 희망한 사람이었고[61],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책도 이런 신념에 유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전후 시작된 영국의 사민주의적 정치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성격이었기에 그녀에 대한 평가가 더 극과 극으로 나뉘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2000년대 노동당 집권 이후 이런 식의 재평가가 강해지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대처 정권을 전후로 영국 정계, 특히 보수 우파 내 이념적 스펙트럼은 큰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기존의 보수 우파가 정책 논쟁, 계급 담론 보다 귀족 계급, 국교회 중심의 정체성 같은 가치관과 혈통에 기반한 보수주의를 추구했다면 대처 이후의 신보수주의자들은 우파적 경제정책을 우파적 이데올로기 자체의 핵심으로 두고 중산층 내에서 소위 말하는 '무임승차자'들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한 보수주의의 대중화로 포커스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대중에게 보여준 이미지도 특기할 만하다. 유머와 부드러운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졌던 영국의 정치계에 여성으로 등장해 치밀하게 준비된 자료와 방대한 지식, 그리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언변으로 토론 상대를 압도하던 스타일 또한 어떤 의미로건 인상적이었다. 결국 그런 면모가 영국 정치사에서 지금과 같은 커다란 존재감을 각인하는데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관해 재미있는 일화는 대처의 옷차림에서 대처가 어떤 자세로 그날의 토론에 임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강경한 독설로 나갈 땐 독사 모양의 브로치를, 우호적으로 사근사근한 토론 진행을 할 시에는 아기 천사를, 조용히 이도 저도 아닌 결론을 유도하고 싶다면 아무 모양 없는 둥근 형태의 브로치를 차는 기호가 있었단 것이다.

poll-tax-demo_w_new.jpg
한편 대처는 공권력 집행을 통해 강력한 법집행을 실행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가령 런던 시위 때에 기마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짓밟고 격파한 기동전술을 도입한 것은 '철의 여인'다운 강경한 대응방법이었다. 하지만 집회 및 언론의 자유 보장과 사회적 안정 보장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어떻게 찾을지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 중 하나이고, 대처의 대처 방식을 사회적 안정과 법질서의 유지라는 명목으로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파괴한 반민주적 행태로 보는 사람 역시 많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수백만개의 CCTV가 설치된 런던의 첫삽을 뜬 것도 1980년의 대처로 이 정책은 97년 이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내각때도 이어졌지만 위의 대 시위 강경노선과 더불어 '감시하는 정부'라는 낙인이 되어 많은 반대를 샀다.[62] 그래픽노블 브이 포 벤데타의 배경의 모티브가 대처 총리의 통치기라는 사실은 작가인 앨런 무어 스스로가 서문에서 공인한 바이다.

교육 부분에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GCE O와 CSE의 two-tier system을 폐지하여 하나의 시험인 GCSE로 통합하였다. 이로 인하여 저소득층 가구들이 집중된 지역의 학교에서도 고등학교인 sixth form에 진학하게 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열리게 되었다. 종전의 CSE 시험으로는 고등학교 진학이 불가능했기 때문. 결론적으로 1988- 1989년 사이에만 고교 진학률이 약 20% 증가하는 쾌거를 이뤘다. 다만 지원금은 적어지는데 학생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 이때부터 학생 대 교사비율이 크게 오르게 된다.

대처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이 따라 관점이 크게 갈리는 부분이지만, 그녀가 보인 독재정권들에 대한 우호적 행태는 대처의 소속정당인 영국 보수당 지지층 내에서도 비난받으며 옹호하려 드는 사람은 없는 부분이다. 가령 인종차별법 아파르트헤이트를 공공연하게 두둔한 점. 정적들을 무력화 하려고 법을 바꾸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점은 비호의 여지가 없다. 이런 피노체트가 통치하는 칠레에 무기를 판매했다거나, 피노체트가 실각한 후 런던에서 영국 사법당국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강경하게 석방을 주장한 일 등이 있고, 아파르트헤이트 문제[63]로 유엔에서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제를 결의했을 때 영국이 상임이사국 자격으로 반대표를 던진 것 역시 대처의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게다가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훗날 남아공 정국이 바뀌어 만델라가 석방되었을 때는 환영의사를 밝혔는데[64], 이는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무너져가고 있는 대세를 거스르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런 부분은 워낙 당연히 비판시되는 부분이라 새삼스럽게 이야깃거리가 되는 일이 드물기는 한데, 그래도 대처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실제로 대처의 행적에 대한 논쟁이나 토론이 벌어질 경우, 이런 치명적 약점에 대한 언급 자체를 회피하고 다른 부분에 중점을 두고 싶어하는 대처 지지자와, 왜 대처에 대한 평가를 이야기하면서 제일 큰 문제점을 회피하려고 드느냐고 따지는 대처 비판자 사이에서 입씨름이 벌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이 심화되어 2014년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투표가 이뤄지면서, 소위 '대처식 리더십'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다. 대처의 구조조정에 따라 스코틀랜드인들의 마음이 분리독립으로 크게 돌아선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상대방을 정적으로 규정하고 문제점이나 극복대상을 명확히 하고 타협이나 회피없이 그에 맞서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대처식 리더십의 주요한 특징이고 이 과정에서 추진력이 있다는 평판을 얻어 생긴 별명이 철의 여인 대처였다. 그러나,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추진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적과, 새로운 문제들이 생기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고, 그 새로운 문제가 심화되어 생긴 것이 2014년의 연합왕국 해체 위기라면... 대처의 리더십이 높은 평가를 받는 만큼 그 반대급부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완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미래로 떠넘긴 것이 대처식 리더십의 가장 커다란 정치적인 한계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경제적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스코틀랜드 지역의 산업기반을 해체한 대처의 조치는 연합왕국 해체 위기로 돌아오게 되었다. 예산 절감을 위해 학교 급식 예산을 삭감한 결과 어려서부터 쓰레기를 퍼먹은 젊은이들은 비만과 성인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사실, 영국 요리가 하도 농담거리로 대유행해서 웃어넘기기가 쉽지만, 현대 국가에 있어서 국민의 성인질환 예방 문제는 절대로 웃어넘길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축산업 관련 지원을 일방적으로 삭감하면서 적절한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은 결과는 광우병의 대유행으로 100만 두가 넘는 소를 살처분함으로써 영국의 축산업 기반이 초토화되는 것이었다. 결국, 대처의 비타협적인 정책 추진으로 인한 부작용의 상당부분은 대처 세대가 아니라 그 이후 세대들이 치루고 있다는 주장 역시 가능한 것.

국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과연 대처의 정책이 영국의 국력 유지나 회복에 기여했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상식적인 수준의 사회 분열을 넘어서서 아예 영토의 상당 부분과 막대한 자원, 그리고 이런 물질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전쟁이나 점령을 통한 강압이 아니라 양 독립 왕국의 의회들의 합의를 통해 만든 브리튼 섬 전체를 다스리는 통합 입헌군주국이라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를 넘어 근대 영국이란 국가적 정체성을 만든 역사적 유산 자체를 잃을 정도의 위기를 불러온 대처의 정책이 과연 영국이라는 나라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됐을까???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스코틀랜드는 점점 더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고 이는 웨일즈나 북아일랜드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스코틀랜드 독립 투표의 후폭풍 이번 독립 투표만 하더라도 결과는 부결로 끝났지만 스코틀랜드는 보다 많은 자치권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이는 또 다른 역차별 논란을 가져오면서 분열을 더욱 더 심화시키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확대 논란 이는 영국이라는 한 나라의 미래에는 굉장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스코틀랜드를 잃은 영국이 과연 지금과 같은 수준의 강대국으로 남을 수 있을까? 북해 유전의 문제도 있지만 영토의 넓이는 국력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스코틀랜드는 인구와 경제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영국 국토 면적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홀로서기가 강해질수록 독일, 프랑스와의 경쟁에서도 장기적으로 뒤쳐질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영국이 처한 현실이다. 국가의 분열을 불러온다는 이유로 마가렛 대처에 부정적이었던 일부 보수당 인사들의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4.1 대처 정권과 스코틀랜드 문제

2015년 영국 총선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독립당을 밀어 주는 결정을 내렸다.2015년 영국 총선 스코틀랜드독립당(SNP) 56석을 얻으며 약진. 웨일즈, 스코틀랜드의 자치권 확대와 보수당의 브렉시트 정책으로 인한 국가 해체 위기의 심화. "영국은 해체의 길로 가고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가 대처와 그 이후의 역대 연합왕국 행정부의 경제정책 하에서 받은 수혜 역시 크며, 특히 최근 들어서 북해 유전을 포함해 스코틀랜드가 다른 UK나 잉글랜드보다 1인당 gdp가 몇 천 달러 가량 많은 현실을 감안하면 이들이 경제적으로 볼 때 연합왕국 내에서 지배자 잉글랜드인들에게 착취당하는 그런 불쌍한 피지배자라 보는 것은 어폐가 있다. 무슨 프랑코 시기의 카탈루냐도 아니고. 대처 수상의 극약처방의 수혜자 중에는 분명 스코틀랜드가 들어간다. 스코틀랜드 독립 운동을 경제적 측면에서 찾고자 한다면 스코틀랜드 지역 경제는 전반적으로 대처 시기이래 활성화되었으니 대처는 일단 저기로부터는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건 스코틀랜드의 경제를 너무 단순화한 한 뭉텅이로만 본 비판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대처리즘의 금융업 중심 정책에서 제대로 덕을 받은 건 예나 지금이나 노동인구가 집중 된 공업 도시가 아니라, 학생들과 금융업, 그리고 수도로서의 행정 기능으로 도시 자격을 유지한 에딘버러인데, 실제로 스코틀랜드 경제 생활의 중심지는 이 에딘버러가 아니라 영국 전체에서 굴지의 제2~3의 도시인 글래스고이고, 산업혁명 자체를 상징하는 공업 대도시 중 하나였던 글래스고는 대처리즘에게 경제적 직격탄 맞았다. 경제적인 뿐만 아니라 현지 사회, 정치적인 면에서도 글래스고는 반대처 정서가 크게 성장할 확실한 이유가 있다. 글래스고는 예전부터 아일랜드계 카톨릭 이민자들이 대거 이주하여 장로회를 믿는 현지 스코틀랜드 출신 시민들과 상당한 갈등이 있었고, 이는 주로 셀틱스레인저스 사이 축구 경기의 훌리건질로 표출 되었는데, 대처 정권이 북아일랜드에서 이건 뭐 영장도 필요 없고, IRA 소속이라는 추측만 가지고도 바로 쏴서 사살할 수 있는 shoot-to-kill 정책을 도입하는 등 막나가는 탄압책을 펼치자 이게 엉뚱하게 글래스고 내에서 저런 주민들 사이의 갈등에 다시 불을 지펴 80년대 IRA의 반영 무장투쟁이 절정에 달하면서 동달아 글래스고의 폭력 범죄 또한 이때 전성기를 찍었다.

그렇다고 해서 에딘버러에서 대처를 좋게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 문제 자체도 대처리즘 정책에서 단물을 빨다가 결국 2010년대 현대 들어와 평균 집값이 런던켄싱턴에 맞먹는 엄청난 가격 상승과 물가 상승으로 인해 전통적으로 빈부격차와는 별개로 잉글랜드와 달리 상류층과 노동계급 양쪽 모두 시내 중심 도로인 하이 스트리트 양쪽으로 난 아파트에서 주거 공간과 문화, 공동체 생활을 공유하며 계급을 초월한 끈끈한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에딘버러의 사회적 전통을 파괴하는데 크게 일조를 했다.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자치 정부 수립에 일관적인 고압적인 태도로 반대했던 모습은 연합왕국의 두번째 왕국의 수도로서 행정적, 정치적 중심지라는 자부심이 강했던 에딘버러 시민들에게 전형적인 오만하고 고압적이며 스코틀랜드는 스스로 뭔가 할 줄 모른다고 무시하는 잉글랜드인이란 이미지를 각인 시켰다. 이를 또 완화 한답시고 88년 당시만 해도 스코틀랜드 사회에 아직 강한 영향력을 끼치던 스코틀랜드 국민교회 장로교 총회에서 성공회와 크나큰 역사적, 신학적, 교회 문화적 차이를 전혀 인식 못하고 연설하다 오히려 더 역풍만 맞았다.

굳이 따지면 대처 시기에 피해를 입은 지역은 북잉글랜드지역과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북잉글랜드와 접한 기존의 스코틀랜드 중에서도 남부 쪽은 피해를 봤다고 볼 수 있으나 대신 에버딘을 위시해서 스코틀랜드 내에서도 북해 유전과 관계가 깊은 지역이 새로이 부상했다. 근데 이 또한 주의 깊게 보면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애버딘은 크게 성장한 지금도 인구가 20만명이 안되고, 그나마 그 인구 중 다수가 상술한 그대로 그 동네에 찐득히 눌러 붙어 사는게 아니라 주중에는 현지서 먹고 자고 일하고, 주말이나 휴가때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삶 자체가 유동적인 유전 노동자들이다. 반면 글래스고의 경우 대처리즘 이후 경제가 침체 되며 인구가 크게 줄어든 지금도 60만에 가까운 굴지의 스코틀랜드 제1의 도시이고, 이 당시에는 백만이 훌쩍 넘었던 영국 전체에서 둘째니 셋째니 버밍햄과 경쟁하던, 어디가서든 꿀리지 않는 대도시였다. 당장 스코틀랜드 북부라는 지방 자체가 진짜 상술한 유전업 말고는 하이랜드 빼고 아무것도 없는, 인구 밀도 자체가 황량하게 낮은 동네인데 스코틀랜드 경제, 사회의 중심인 로우랜드가 엿먹은 대신 하이랜드가 컸다고 해서 "스코틀랜드는 대처리즘의 수혜자다"라는 주장이 성립하는 지 의문이다.

이런식으로 스코틀랜드에서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수혜 받은게 있어도 정치적, 문화적으로 다방면으로 대처 정부가 끈 어그로를 주목한 당시만 해도 군소정당급의 영향력 밖에 없었던 스코틀랜드 민족당은 노선을 본격적으로 좌향좌하며, 1988년 글래스고의 고번 (Govan) 선거구에서 승리를 거둔 걸 기점으로 대처리즘에게 분노한 스코틀랜드 노동 계급과 지역 정치적 엘리트 양쪽의 지지를 끌어 모으며 결국 90년대에 들어 지금의 거대 정당으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정치란 건 단순히 경제적으로 뭔가 던져 주었다 하더라도 그게 곧 지지율로 직결되는 게 아니다. 경제적으로 박탈을 하던, 혜택을 주던 그 과정과 방식에서 현지 주민들이 어떤 메세지를 받았냐가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대처는 상술한 그대로 전형적인 고압적이고 거만하며 스코틀랜드를 불평만 하는 촌구석으로 취급하는 잉글랜드 엘리트로 이미지를 각인 시키며 현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의 부상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브렉시트 이후 갈수록 더 험난해 보이는 연합 왕국 내의 상호 불신간에 직접적이고 치명적인 드라이브를 건게 대처의 스코틀랜드 정책이다.[65] 이런 세부적인 사회적, 문화적, 정치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깡그리 무시하고 텅 빈 통계로만 "스코틀랜드는 대처리즘의 수혜자다" 따위 운운하는 건 현지인들이 들으면 코웃음 치면 양반이고, 뺨다구 한대 맞을 만한 소리다. 프랑코 치하의 카탈루냐 운운하고 있는데 애초에 썩어도 준치라고 근대 의회 민주주의의 고장과 대한민국보다 더도 말고 딱 12년 일찍 민주화 된 파시스트 국민 대량학살 독재 국가와 같은 선상에서 얘기하는 거 자체가 황당하다.연합 왕국에서 프랑코식 막장 학살 민족 억압 정책을 펼쳤으면 이미 19세기, 20세기 초중반에 스코틀랜드는 진작에 떨어져나고 남았다. 스코틀랜드인들이 멍청하고 어느날 갑자기 위스키 거하게 빨고 전국민이 브레이브하트 동시 관람 한 뒤 지나치게 감동 받아서 독립하겠다고 나서는거 아니다. 대처리즘이 영국 전역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은 후 비교도 안되게 더 큰 런던을 중심부로 한 남동부의 머릿수를 무기로 도저히 이런 조류에서 벗어 날 징조 자체가 안 보이니 아예 대놓고 국가 자체를 해체하겠다는 여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영향이 살아 있는 여러 가지 커다란 결정과 정책들로 인해 대처 내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공과가 꾸준히 도마에 오르내리고 있다.

다만, 대처 이전의 영국의 경제 체제는 이미 지속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이었으며, 대처는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시스템은 대처 이후의 메이저, 블레어 총리가 물려받아 유용하게 써먹었다는 점, 나아가 전세계가 그녀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했다는 점은 특기할만 하다.

하지만, 브렉시트 선거에서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는 선거결과가 나오게 됨에따라 "영국도 이제 연합왕국으로부터 분열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정치적인 움직임이 보이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독립당에서 다시 한 번 독립투표를 하겠다는 움직임이 나왔기 때문이다. 대처리즘 이전 스코틀랜드 내에서 문화적, 감정적 민족주의 자체는 존재했지만, 본격적으로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기반삼아 작금의 영국 정계 자체를 뒤흔드는 노골적인 분리 독립 운동을 주장하는 SNP의 성장에는 대처리즘이 부정적 의미로 크게 기여했다. 이런 차원에서 적어도 2016년 현재 시각에서는 대처가 영국에 남긴 뿌리 깊은 분열의 유산은 더욱 부각될 수 밖에 없다.

4.2 영국에서의 인기?

죽음을 보는 두 시선. 헤드라인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영국을 구한 여인', '영국을 분열시킨 여인'

계급과 이념에 따라서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리긴 하지만 마거릿 대처 사망 이후의 일부 여론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대체적으로 공과에 대한 평가는 뚜렷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에 관한 뉴스

주로 대처의 인기는 잉글랜드(특히 남부)에서 높은 편이며, 대처의 조치로 광산이 대거 문을 닫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등지에선 반감이 매우 높다. 대처 사후 국제적으로 애도의 조전이 쇄도하는 와중에서도 반감이 높은 지역에서는 대놓고 축제판을 벌일 정도.

한편으로는 일부 보수당 의원들이 대처의 동상을 트라팔가 광장에 세우자고 건의했으나 '아서 웰즐리윈스턴 처칠도 얻지 못한 영예를 대처에게 줄 수 없다.'는 반발에 부딪친 일도 있었다.

한편 축구 칼럼니스트 존 듀어든 왈 "마거릿 대처는 축구의 적"이라고 비판했다. 훌리건의 행태의 사회구조적인 원인은 제쳐둔 채 개인적 자질만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라고.

한편 영국인 60%가 대처의 장례식을 대규모로 치르는 것을 반대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테스>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감독인 켄 로치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아예 장례식도 민영화해야 한다. 그것이 대처도 원하던 일이었을것.'라며 비꼬기도 했다. 처음에 추정한 장례비용은 한화로 약 173억이었는데, 실제 들어간 비용은 그 1/3 정도인 61억 원이 소요되었다.관련 기사 이 중 보안경비가 비중이 컸던 이유는 장례기간 중 터진 보스턴 폭탄테러 사건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다만 상술되어 있듯이, 대처 본인도 자신의 장례는 검소하게 치를 것을 생전에 당부했기 때문에, 국장 혹은 민영화까지는 아니지만 영국 정부도 나름의 예를 갖추어 공식적 장례 형식[66]으로 장례를 거행했다.

영국의 가디언 지에서는 대처가 카메론을 제치고 영국 최악의 수상으로 꼽혔다는 기사를 올렸다. 역사 작가 협회에서 행한 조사인데 24%의 회원들이 대처를 최악으로 꼽았다고 한다(참고로 카메론은 22%이며 3위인 체임벌린은 17%).

5 기타

오존층 보호를 위해 프레온 가스를 제한하자는 몬트리올 의정서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학 시절 그녀가 받은 이과 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칼 세이건이 높게 평가한 부분.

1+Gibbard+Milk+snatcher+1975+s+w.jpg

70~74년, 그녀가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 중에 7~11세 아동의 우유 무상급식을 폐지했다가 뒷말[67]을 많이 들었다. 그 때 붙은 별명이 바로 '우유 도둑'(Milk snatcher).[68] 비슷한 사례로 2010년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내각도 다시 우유 도둑 논란에 휩쓸렸다.

영국 인문학에도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뛰어난 고대 그리스사 학자이면서 꽤 있기있는 저술가인 로빈 워터필드는 자신이 '대처 행정부가 고전학같은 "쓸데없는" 학과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결과' 교수직에서 짤려서 외국으로 나가야만 했다고 비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현재 영국 급식 형성에 기여했다. 이전까지는 엄격한 영양학적 규정에 따라 중앙 정부에서 통제했지만, 집권하면서 급식 운영을 지방 정부에게 넘겨버리고 예산까지 줄여버리면서 영국 급식의 질적 저하가 초래되었다는 비판이다.

비슷하게 영국의 광우병 파동과 관계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농업체제를 신자유주의로 개편하면서 정부의 모든 농가 지원을 폐지했는데, 이 때문에 예전에는 버리는 물건이었던 부산물까지(쉬운말로 양의 내장을) 돈 아끼려 소 단백질 사료로 만들다가 그만 1980년대 광우병 창궐을 만들었다. 물론 현재는 동물성 사료를 초식동물에 공급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지만, 광우병으로 도축한 영국의 소가 백만 두를 훨씬 넘는다는 점에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은 격.

포클랜드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중남미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 공동 1위이다. 다른 한 명은 로널드 레이건. 다만 아르헨티나와 적대적인 관계인 모 인접국은 꼬시다는 반응을 보였으나 이는 엄청나게 멍청한 행동으로 처음에는 꼬시다는 반응이었으나 나중에는 닭 쫓던 개 지붕 처다보는 반응을 보였다.[69] 제아무리 결과론적으로 포클랜드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을 붕괴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대처는 갈티에리보다 더한 욕을 먹고 있다. 임진왜란과 비교해보자면 선조가 나라를 제대로 못다스린다고 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좋게 평가하는 조선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와는 뭐든지 정 반대다.

  • 대처는 백인, 여성, 166cm의 키로 여성으로서도 평범한 체격인 반면 오바마는 흑인, 남성 185cm의 키로 남성으로서도 상당히 큰 키이다.
  • 대처의 정치 모토는 민영화인 반면 오바마의 정치 모토는 국영화이다. 오바마는 의료보험을 국영화시켜서 병을 얻은 서민들이 저렴한 값에 쉽게 치료를 받도록 해주려고 한 반면 대처는 하나라도 더 민영화를 시도했으며 심지어는 우유 급식을 중지시켰다.
  • 대처의 정치성향과 동일한 미국의 정치계파는 오바마의 반대파인 로널드 레이건조지 부시공화당이다.

현대 영국의 노동 계급 및 노조들은, 그리고 리버풀 FC의 축구팬들은 여전히 그녀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노동 계급 출신이자 working class hero(노동 계급의 영웅)라고 불리는 브릿팝 밴드 오아시스의 前 멤버이자 리더였던 노엘 갤러거는 대처를 "노동 계급을 없애버리려고 시도했고 '어느 정도 없애버린 인물'"이라고 평했다.

영국 북부의 오래된 탄광 도시 및 오래된 공업 도시들은 대처 시절 기반을 잃고 몰락했다.[70] 현대 잉글랜드의 북부-남부간 지역감정의 씨앗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시 영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을 상실했으며 탄광은 채산성이 극도로 떨어졌다. 대처 이전까지는 이걸 국민의 세금으로 먹여 살리고 있었으나 대처의 과감한 결단에 의해 세금 낭비를 줄이게 되었다는 것.


빌리 엘리어트(뮤지컬)에서 작곡을 담당한 엘튼 존은 Marry Christmas Maggie Thatcher라는 넘버를 통해서 마가렛 대처를 극딜한다. 해당 가사가 We all celebrate today 'Cause it's one day closer to your death라는 신랄한 가사는 당시 대처에 대한 해당 지역의 민심을 짐작하게 만들어준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이지만 페미니즘 계열에서는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은 여권 신장의 가장 큰 요소이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 있어 가장 큰 장애는 무엇보다 출산과 육아이다. 영국은 국영 탁아소가 정비되어 있어 여성이 안심하고 직장에 나갈 수 있었지만, 대처가 국영 탁아소 등을 폐지함에 따라 다시 여성은 육아에 대한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사실 페미니즘과 대처가 거리가 멀다는 것은 마가렛 대처의 자서전이나, 여성 보좌관의 글이나, 심지어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영화에서도 꾸준히 나타나는 부분이다. 위의 Section 28 같은 경우만 해도 그렇지만, 대처 본인은 오히려 가부장적 보수주의에 깊이 몸담고 있는 권위주의적 우파였고, 페미니즘을 비롯한 이 시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사회적 진보주의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질 리가 만무했다.

lady_thatcher_dies.png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사망했을 때 거행될 장례식은 민영화해야 한다는 온라인 청원이 실시되자 이 청원에 3만여 명 가량 참여했다고 한다. 대처 총리 연간에 있었던 일련의 강력한 민영화 정책들을 패러디한 것.# 심지어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는 '대처 사망'이란 가상 기사 가상의 타블로이드 신문 옆으로 샴페인폭죽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대처 본인도 이미 생전 자신의 장례는 절대 국장으로 하지 말고 검소하게 치러달라유언까지 남겼다. 그리고 본래 전 총리급 인물은 예우에 따라 영국 공군이 공중 퍼레이드를 하는 것이 관례이나, 대처는 자신의 장례식 때 이런 번잡한 행사를 금해달라고 당부했었다.

2013041806494826745_2.jpg

이에 따라 실제로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위와 같이 국장 대신 '공식적인 장례식'을 통해 장례를 치렀다.

로열 블루(영국 왕실의 관복색)와 진주를 아주 좋아해서 애용했는데, 진주는 '신뢰'와 '경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하며 로열 블루는 영국 보수당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얻었다. 패션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편이었는데, 월스트리트 저널에서는 평소 대처를 좋아하던 박근혜가 그녀의 패션 스타일을 닮아가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무한도전 2013 빙고 특집 마지막 스피트 퀴즈에서 대처가 등장했는데 하하는 "마가린을 데쳐서...."라는 드립을 쳤다(...)

그녀 자신의 행적과는 별개로, 전혀 뜬금없게도 심리학자들에게 영원히 고통받는 비극적인 운명이기도 하다.(…) 지각심리학에서 시각적 착시를 다룰 때 종종 쓰이는데, 사람의 얼굴 사진에서 눈과 입을 상하로 뒤집은 사진을 흔히 "Thatcherized faces" 라고 부른다. 이 사진이 흥미로운 점은, 그냥 뒤집힌 사진을 보고 있으면 두 사진이 뭐가 다른지 그다지 느낌이 오지 않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서 보는 순간 둘 중 한 사진이 갑자기 혐짤로 변하는 착시가 일어난다! 사람의 얼굴을 뒤집어 놓아도 눈과 입 모양만 그대로 보존시켜 놓으면 이상한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착시. 그와는 별개로 과학자들의 사진 합성 실력이 영 아니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러한 착시는 대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실제로 대처의 얼굴이 가장 만만한 사례로 학생들에게 소개되곤 한다.(…)

대처 시대에 스코틀랜드 게일어 사용 인구가 감소했다는 지적도 있다.#[71]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마거릿 대처의 잘못인지 어떤지는 추가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굳이 따지자면 게일어 사용자가 저렇게 줄어들 동안 대처는 뭐했냐는 식의 비판은 가능하겠지만. 다만 대처 시대에는 UK 행정부 소속 스코틀랜드 주 장관 조지 영거[72]의 게일어에 대한 개인적 선호 등에 힘입어 게일어 방송에 대한 자금 지원이 증가했다. 반면, 오히려 블레어 시기에는 그에 대한 자금 지원이 감소했다고 나와있다. 또, 게일어 사용인구 감소가 대처시기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1755년 이래 게일어 사용 인구는 줄곧 감소추세였다. 오히려 대처 시기보다 더 감소율이 높았던 시절이 훨씬 더 많다는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게일어나 스코틀어 등이 탄압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걸 마가릿 대처 만의 책임으로 돌릴 문제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일단 비슷한 케이스라 볼 수 있는 북아일랜드의 경우 지역 언어인 게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처가 태어나기 하아아안창 이전부터 씨가 말랐다. 그리고 이렇게 따로 항목을 만들어 놓으면 이게 상당히 중요한 이슈로 보일 수도 있는데, 스코틀랜드의 경우 15세기 부터 정치, 경제, 사회의 핵심 지방인 로우랜드는 게일어가 아닌 영어, 엄밀하게 말하면 스코트어 중심 지방이었다. 킬트, 클랜 문화, 백파이프 같은 소위 대중적으로 익숙한 스코틀랜드 문화가 대부분 하이랜드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흔히 생기는 착각인데, 스코틀랜드 역사상 하이랜드 인구 비중은 로우랜드의 1/3 수준을 넘은 적이 없다. 1980년대라면 대처가 시시콜콜하게 개입할 필요도 없이 이미 일상 언어로서 스코틀랜드의 게일어는 아우터 헤브리즈 제도 같은 극오지 아니면 전혀 들을 일이 없는 사어였다고 보면 된다. 대처를 까고 싶으면 굳이 이런 마이너한 주제보다 훨씬 더 깔 만한 거리가 많은데 당장 직접적인 상관 관계도 증명하기 힘들고, 대처가 있든 없든 이미 수백 년째 자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역사적 과정을 일부로 발굴해 언급하는 게 더 이상하다.

아들인 마크 대처(1953~)가 1996년에 적도기니쿠데타를 도와준 혐의인터폴에 현상수배되었다. 마크가 적도기니의 쿠데타를 도와준 이유는 대의나 명분 이딴건 없고 그냥 쿠데타에 성공하면 적도기니에서 나오는 석유를 얻어 먹으려고 도와줬다. 결국 200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잡혔는데 마가렛 대처는 아들 보석금을 마련하려고 제대로 똥줄탔다. 어찌어찌해서 아들 보석금을 물어주는데 성공하고 마크 대처는 집행유예를 받고 영국으로 추방되었다. 보나마나 그 보석금은 결국 그 나라 독재자의 입 안으로 들어가서 꿀~꺽!하고 삼켜졌겠지...

그 외에도 마크 대처는 행보가 엄청 지저분한 인물로 자기 어머니가 총리라는 것을 이용해서 영국군 제식 무기들을 몰래 외부로 빼돌린 뒤 그걸 중동에 갖고 가서 밀판매를 일삼고 용병단을 결성해서 반정부 집단에게 돈받고 대신 전투를 치뤄주는 짓을 했다. 적도기니의 쿠데타도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5.1 발음

'Th'는 소위 말하는 번데기 발음(/θ/)으로 음성학적으로는 무성 치 마찰음이라고 한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1986년 ~)의 발음 표기 원칙을 따르면 마거릿 thㅐ처가 되어야 하겠으나, 1970년대 후반 당시 외래어 표기법(정식 명칭 '로마자의 한글화 표기법')이 /θ/ 발음도 으로 적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대처'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였고, 이 표기가 굳어져 현재까지도 '대처'가 표준 표기로 인정되고 있다. 참고로 일본어에서는 'Th'를 쪽으로 인식, 'サッチャー(삿차-)'라고 표기한다.(...) 처음 보는 한국인은 이게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뭘, 프랑스에서는 한 때 땃쥐라고 불렀는데.

6 대중매체에서

"지금은 1988년이다. 마거릿 대처가 자신의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고 있고, 다음 세기가 되어서도 무너지지 않고 계속될 보수당의 집권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하고 있다. 내 막내딸은 일곱살이며,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에이즈 환자를 수용소에 격리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폭동 진압을 위해 투입되는 전투 경찰은 자신들을 태운 말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복면을 쓰고 있으며 그들이 모는 밴에는 회전하는 카메라가 장착돼 있다. 정부는 모든 동성연애의 싹은 물론 그 추상적 개념마저도 잘라내고 싶다는 욕구를 표명했으며, 이제 어떤 소수자가 불법의 대상이 될 지는 추측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난 몇 년 안에 가족들을 데리고 이 나라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냉정하고 비열한 이곳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잘 자라, 영국. 잘 자라, 홈 서비스. 그리고 승리의 브이 사인. 반갑다, <운명의 목소리>. 그리고 브이 포 벤데타."

streep-thatcher-wa_2055714i.jpg
meryl-meryl-streep-as-margaret-thatcher-28172333-720-305.jpg

  • 파이트 클럽 후기에 따르면, 사인회에서 작가는 5성 호텔 웨이터를 만났는데, 그 웨이터는 마거릿 대처의 음식에다 정액을 최소한 다섯 번은 타 먹였다고 한다. ㅎㄷㄷ.
  • 워게임: 레드 드래곤에서는 포클랜드 전쟁 승리후 중국에게 홍콩 조차 연장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 덩샤오핑이 "우리가 홍콩에 걸어들어가 반나절 만에 접수할 수 있다"라는 협박을 보내자 어디 한번 해 보자 이자식아 이를 전면적인 무력 도발로 간주. 미온적이었던 영연방 국가들을 설득하여 홍콩에 커먼웰스 군을 대규모 증강했고, 이를 눈뜨고 당하지 않으려던 중국과 전쟁을 벌인다. 이쪽이 더 현실에서 벌어진 일 같다. 덩샤오핑의 저 발언은 실제로 있었는데 이에 대처는 "우리가 막지는 못해도 전세계가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똑똑히 보게 될것"이라는 패기로운 역협박을 가해 결국 덩샤오핑을 회담장으로 끌고 나왔으며 일국양제라는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73]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2에서 여성 영국수상이 캠페인 컷신에서 등장하는데 정황 및 시대상 (1972년) 마거릿 대처가 모티브 인듯 하다. 별 비중은 없고 폴란드에 소련군 핵미사일 사일로가 있다고 알려주는 정도.
  •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킹스맨 요원인 해리 파트가 에그시에게 자신의 과거 임무 수행에 관한 이야기를 알려주는 장면에서 마가렛 대처 수상의 암살을 막은 일화를 짤막하게 언급한다. 에그시는 "모든 사람이 고마워 하진 않았겠네요."라고 비꼬듯이 말한다.
  • 게임 세인츠 로우 4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클론 공장을 보고는 무슨 장소냐고 묻자 아샤 오데카가 '타인에 대한 공감이 떨어지는 소시오패스 성향을 보이는 인물'을 복제하는 장소라고 하자 주인공은 '누구? 대처?'(...)라는 반응을 보인다.그 반응에 이어지는 '아니, 너 말야.'
  • 라이프 온 마스에서는 애니가 여성들이 총리하는게 더 낫지않겠냐는 말을 하자 샘 타일러가 언젠가 그 말 후회하게 될거요라고 대답한다(...)

7 어록

  • "생각을 조심하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하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74]
  • "진짜 중요한 일은 타협하지 않는다"
  • "실패는 단지 더 현명하게 시작할 기회일 뿐이다"
  • "나는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어마어마한 자신감이다
  • "나는 장관들이 내가 말한 것을 수행하는 한 그들이 어떤 말을 쏟아내도 신경 쓰지 않는다"
  • "우리는 포클랜드에서 외부의 적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부의 적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내부의 적은 더 싸우기 어렵고 자유에 더 큰 위험이 된다"
  • "사회라는것은 없다. 오직 남자와 여자, 가족이 존재할뿐이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 There are individual men and women, and there are families" - 1987년 10월 31일, Women's Own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 "뭔가 말해야 한다면 남성에게, 뭔가 이뤄져야 한다면 여성에게 요구하라."
  • "내 생전에 여성 총리가 나올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75]
  • "비전이 없는 사회의 인간은 틀림없이 망한다."
  • "이제 내 돈을 돌려받길 원한다."[76]
  • "나는 여론 수렴형 정치인이 아닌 확신형 정치인이다."
  • "나는 논쟁도, 토론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냥 앉아서 나에게 동의해 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직업이 아니다."
  • "숨죽인 채로 그 좋아하는 언론 유행어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유턴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원한다면 여러분이 유턴하세요. 여인(나)은 유턴하지 않습니다."[77]
  • "내 아들 구출에 소요된 비용은 내가 내겠다. 그래야 납세자들에게 (사적 용도로) 한 푼의 세금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78]
  • "침략은 반드시 응징당하고 도둑이 훔친 물건을 가지고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싸워서 보여줬다."[79]
  • "알래스카가 침략당해 전쟁을 벌인다면 그때에는 나도 이를 국제 기구에 넘기겠다."[80]
  • "우리가 막지는 못해도 전세계는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81]
  •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최고의 신념을 잃고 용기와 반항심을 잃으면 언제라도 전제 정치가 시작될 수 있다. 전제 정치는 거기에 반대할 매력이 없으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
  • "웅변일랑 남들이 하도록 떠넘기고 나는 행동만을 해 나가겠다."
  • "나는 계속 싸웠다. 싸워서 이겼다."
  • "가정은 더 이상 잘할 것이 없을 때 오는 곳이다."[82]

8 관련 항목

  1. 마가렛 대처가 퇴임 10년 후에 찍은 사진도 있다.
    article-1230319-075574B0000005DC-809_468x544.jpg
  2. 취임 당시 연설중 일부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에서 따온 말이다. 기도문 전문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문서 참조
  3. 다만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공과를 떠나서 전혀 화합을 가져오진 않은 인물이다.
  4. 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 There are individual men and women, and there are families. And no government can do anything except through people, and people must look to themselves first. It's our duty to look after ourselves and then, also to look after our neighbour. People have got the entitlements too much in mind, without the obligations. There's no such thing as entitlement, unless someone has first met an obligation.
  5. 제3의 길이라는 중도 이념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토니블레어 역시 대처에 대해 "내가 한거라곤 그녀가 만든 정책을 조금 수정한 것뿐"이라고 말할정도로 여전히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다.
  6. 사실 대처는 중산층 집안 출신으로 부유한 남편과의 결혼을 통해 정치적 후원이나 재력 면에서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결혼이 영국 총리가 되는데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역사상 최초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도 부모나 남편의 정치적 배경 없이 강대국의 지도자가 된 사람은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과 영국 제2의 여성 총리 테레사 메이 외에는 없다.
  7. 대처 이전에는 골다 메이어가 철의 여인으로 불렸으나, 이스라엘이란 나라 자체가 중동 깡패라고는 해도 영국마냥 세계구급 강대국은 절대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에 철의 여인이라 함은 곧 대처를 일컫는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다.
  8. 두번째는 2016년 7월 13일 취임한 테레사 메이
  9.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는 대처가 일으킨 포클랜드 전쟁에 자기 아들을 내보내게 된 것, 그리고 그녀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것 때문에 대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10. 사실 아버지가 나중에 시장을 하긴 했지만 이건 정계에 대한 진지한 도전보다는 지역 봉사에 가깝다. 원래 영국식 지방자치 시스템 자체가 각 지방의 자치권은 굉장히 강하지만,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 의원을 중앙 정계 진출의 관문으로 여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냥 그 지역에서 평판 좋은 유지들에게 그 지역의 일을 맡긴다는 입장에 가깝다. 즉, 시장이나 시의회 의원 같은 지방 정부의 직책을 정계 진출 도전으로 여기는 것은 한국, 일본, 미국의 경우이지 영국의 경우는 아니다.
  11.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1926년에 태어났다. 참고로 여왕과 대처 사이에는 좀 껄끄러운 에피소드가 있는데, 엘리자베스 2세 항목 참조
  12. https://www.google.co.kr/url?sa=t&rct=j&q=&esrc=s&source=web&cd=11&ved=0CBsQFjAAOAo&url=https%3A%2F%2Fwww.kihasa.re.kr%2Fhtml%2Fjsp%2Fshare%2Fdownload_publication.jsp%3Fbid%3D12%26ano%3D1371%26seq%3D1&ei=YDQfVYr0HoW2mAXJyYDwDA&usg=AFQjCNE5maBXtw0jvpRTAjqU-I1f86dq9g&bvm=bv.89947451,d.dGY&cad=rjt http://news.donga.com/3/all/20150303/69911475/1 그러나 복지 정책 중 주로 재취업 등을 통한 빈곤 탈출을 위한 지원은 이전보다 다소 강화되었다.
  13. 소위 말하는 일하는 복지의 원조도 대처다. 이는 영국의 블레어, 한국의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등 역대 정부도 따왔다.
  14. 한때 대처 지지율 25%, 보수당 내각 지지율 18%.
  15. 사실 포클랜드 전쟁은 대처 자신이 초래한 측면이 많았다. 즉 대처는 긴축 재정을 한다고 국방비를 엄청나게 줄였고, 냉전과는 지리적 거리가 먼 포클랜드의 군 기지는 거의 경비병 수준으로 채워졌는데,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 정권은 이걸 노리고 무력 점거를 시도한 것이었다.
  16. 650석 중 397석 획득.
  17. 약 3% 정도
  18. 역사상 최장기라고 써있었는데, 사실이 아니다. 최장임기는 20년 넘게 (1721 - 1742) 총리 해먹은 로버트 워풀 경이다.
  19. Local Government Act (지역정부법) 수정안의 28항이어서 Section 28이라는 표현이 붙었다
  20. 대부분 종교단체로, 성공회, 가톨릭, 심지어 이슬람에다 구세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위 아 더 월드?
  21. 정확히 말하자면 동성연애를 "정상적인 가족관계"라고 인정하는것을 금지했다.
  22. 그 유명한 우익 프랭크 밀러까지 반대했다.
  23. 1967년 형법 개정 이전의 영국에서는 동성 간 항문성교와 같은 동성애 행위는 형사처벌 대상이었다. 이와 같은 법적제재를 이른바 'Sodomy Law'라고 한다.
  24. Ken Livingstone. 보수당을 비롯한 반대파들은 리빙스턴을 Red Ken, 즉 빨갱이 켄이라고 불렀다. 2014년 현재 박근혜 정부 하의 박원순 서울 시장이 생각나면 지는 거다
  25. 이전 버젼엔 Red Can이 별명이라서 빨간 깡통이라고 불렸다고 했는데, 도대체 근거가 없는 얘기다. Kenneth의 약칭이 Ken이라서 더 선 (블레어 집권 전까지 극악 골수보수당 지지신문이었다)이 붙여준 별명이지 깡통Can과는 상관이 없다.
  26. 공식명칭이 아니고 보수당 측에서 노동당을 소련에 엮어 이렇게 평했다.
  27. 현재의 런던광역행정청(Greater London Authority)
  28. 여기서 약간 유의해야 할 것이, 한국의 지방행정체제는 지자체장과 지방의회가 따로 분립하는 이원제이지만 당시 영국은 주민들의 투표로 형성된 지방의회가 지자체를 형성하는 일원제라는 것이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지방의회를 반드시 두라고만 규정되어있지, 지자체장을 주민 직선제로 할 것인가 지방의회를 통한 간선제로 할 것인가의 여부는 법률로써 알아서 규율하게 하고 있다.
  29. 민주주의는 절차적 정당성이 엄청나게 중요한 체제인데다 지방의회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축으로써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한다.
  30. 이후 2008년까지 시장을 역임한다. 여담으로 리빙스턴은 전두환 집권기에 김대중 석방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31. 다만, 이는 포클랜드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남미국가들은 다들 아르헨티나를 지지한 반면 유일하게 칠레만이 영국을 지지했으며 심지어 영국 군용기의 자국 영공 통과까지 허용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전쟁은 끝났다 하더라도 아르헨티나를 견제할 영국의 우방이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칠레가 해준 셈이다.
  32. 월급 100만원인 사람과 1000만원인 사람에게 10만원의 가치는 다를 수 밖에 없다
  33. 누진세제의 경제학적 근거는 1. 같은 액수의 세금이라도 가난할 수록 소득에 대해 더 큰 비율이기 때문에 평등하지 않다는 점, 2. 저소득층 일수록 덜 내는 세금이 소비로, 그것도 삶과 직결된 소비로 연결된다는 점. 등이 있다.
  34. 대신 대처의 남편이 세습 가능한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35. 그녀의 포클랜드 전쟁신자유주의 정책 등으로 둘은 평생동안 껄끄러운 관계였다고 한다. 그래도 미운정이라고 2013년 4월 17일 엄수된 장례식에 처칠 이후 처음으로 왕실자격으로 참석했다.
  36. KBS의 국제시사프로에서 실제로 방송된 내용이다.
  37. 이 사건은 경찰의 과실임이 판명되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38. 사실 대처의 집권이 영국의 제조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점도 없진 않다. 국내의 탄광들을 대거 폐쇄해서 실업자를 대량생산하고, 안 그래도 경영사정이 안 좋았던 롤스로이스나 벤틀리, 재규어영국의 대표적 자동차 메이커들도 대처 시대를 거치면서 대처의 신자유주의식 정책으로 더욱 입지가 약화되어 독일BMW폭스바겐, 인도타타 자동차에 팔려 나갔으며 대처의 개혁정책도 영국의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39. 원래 번역명은 <부질없는 번영>이 되었어야 했지만 국내 출판사의 괴상한 센스로 인해 번역명이 <경제학의 향연>으로 정해졌다.
  40. 2009년 말에만 영국가스공사는 요금을 상당히 인상했고 원가를 이유로 근 10년 내 총 40%의 요금상승이 있을 거라고 예고했다. 영국통신 BT는 유럽에서도 특히 느린 서비스 속도로 악명이 높고 물관리공사의 경우 잉글랜드, 웨일스는 OFWAT에 서비스를 위탁하게 되었고 스코틀랜드는 민영화를 피해 아직까지 3개구로 분할되어 관에서 운영하고 있다.
  41. 다만 이때 당시 시라크는 민영화를 너무 남발하였는데 결국 지지율이 급락하였고 1988년 대선에서 2차 결선 투표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한테 무려 8% 차이로 지고 말았다......참고로 이때 프랑스 대통령 임기는 7년이었다
  42. 02년 부터 스코틀랜드의 강한 민족의식에 기반해 분리 독립론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스코틀랜드 민족당(SNP)는 항상 북해 유전을 독립의 밑바탕으로 상정했고, 이건 이 유전이 독립 운운할 만큼 생산성을 보유했단 뜻이다. 나라 하나 지탱할 정도로. 그런데 이 논리대로라면 북해 유전으로 본격적으로 꿀 빨게 된 것도 대처의 석탄산업 구조조정으로 관련된 노동자들이 북해로 몰려가고서 일어난 일이다.
  43. 대처와 보수당의 무관심 속에서도 맨체스터는 살아났고 그 상징이 바로 맨유 유스팀 출신의 레전드들이다, 이런 요지.
  44. 가스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개발되었다.
  45. 무엇보다 영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은 76년은 1차 오일 쇼크와 2차 오일 쇼크 사이의 시점이다. 오히려 이 때는 석유값이 셀 때라 석유장사하기 좋을 때였는데 중동, 소련 등등 누릴 만한 나라들은 다 누렸던 이런 혜택를 받지 못한 점은 까일 만하다.
  46. 석탄 산업의 고용은 50~60년대의 70만 명 수준에서 70년대에는 25만 수준으로 감소했고, 이것이 대처 정부를 들어서 거의 0명으로 줄었고 이게 지금까지 내려져 오고 있다. 그리고 북해 유전으로 인해 석탄 산업을 포함해 38만 내지 6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동시에 북해 유전과 관련해서 이 수치에 상당하는 일자리가 생겼다. 2014년 기준으로 북해 유전, 가스전 관련 일자리 종사자 수는 450만 명이라고 한다.
  47. 이나마도 국영 철도는 그럼 얼마나 좋았냐며 비판하기도 한다.
  48. 시세 대비 20~30% 할인했다.
  49. 심지어 공기업 노조에서 반발했음에도 공기업 직원들 역시 이를 많이 구매했다.
  50. 사실 지금도 이러한 공기업들의 상당수는 기관이 보유하고 있다.
  51. 동성애 탄압, 가족의 가치 신봉 등.
  52. 참고로 위 수치는 전부 북해유전 수입을 포함한 수치다. 북해유전을 제외한 1인당 gdp는 일단은 낮게 나온다. 다만, 북해유전 수치를 제하고 보는 것도 우스운 것이 애초에 스코틀랜드 지역 산업이 개박살난 환경적 요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저 북해유전이다. 또, 지역 경제에 영향력도 큰 산업을 배제하는 것 역시 스코틀랜드의 경제력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북해 유전이 스코틀랜드에 특별히 경제적 혜택을 제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잉글랜드도 북해유전 덕을 본 것 역시 사실이다.http://www.bbc.com/news/uk-scotland-24866266
  53. 전 정부의 삽질에 따른 당시 정부 집권 연도의 경제지표 악화는 2차 석유파동 및 IMF 당시 한국에도 있었다.
  54. 사실 이때 이른바 80년대 초반 불황이라고, 일본을 제외한 여러 선진국들의 경제가 뒷걸음치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특히 라틴아메리카는 원자재 가격 폭락으로 80년대 내내 헬게이트가 열렸다.
  55. 우리나라도 이 시기 삼저호황을 겪으면서 부동산이 폭증했고, 일본은 이 분야 전설이다.
  56. 1987년의 경제성장율은 5.3%, 1988년에는 5.9%였는데, 이 경제 팽창기를 이른바 Lawsoon Boom이라고 부른다.
  57. 사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불황으로 인해 90년대 말까지 고실업, 저성장에 시달려야 했는데, 영국은 오히려 불황을 일찍 탈출했다.
  58. 사실 1970년대 후반 영국의 골머리였던 실업률이 5-6% 수준이었는데, 집권 직후 대처가 인플레이션을 먼저 잡기 위한 초강수를 쓴 데다가, 때마침 세계 경제에 불황(이른바 early 80s recession)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실업률은 1982년 10%를 넘어서서 1984년 여름에는 12%로, 전후 최고 수준을 찍었다. 이후 1986년까지 11% 이상이었으나, 1987년부터 하락하기 시작해 1989-90년 경에는 7% 정도까지 떨어졌다. 이후 1991년부터 다시 상승해 1993년 10%를 넘어섰으나, 이번에는 좀 더 빨리 하락해서 1999년이 되면 6% 아래로 떨어졌다.
  59. 다만 물가 상승의 경우 후기의 부동산 붐 등으로 말기에는 이전에 비하면 훨씬 낫지만 어쨋든 개선되었다.
  60. 이건 대처보다 더 막장인 조선시대급 꼴통 마인드라고 지적 할 수도 있고, 이게 전적으로 틀린 비판도 아니지만 일본과 비슷하게 근대에 들어와서 큰 내전도, 체제의 급격한 전복도 없었던 영국에서는 근대 이전의 사회, 신분 질서의 유산이 상당히 강력하게, 그리고 오래 유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61. 정확히 말하면 신흥 중산층의 가치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보수당 인사들은 대처를 근본없는 파괴자라고 싫어했다는 점을 상기하자.
  62. 범죄예방에 유효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이 대처 생전에 그랬듯이 '편견에 기초한 잘못된 직권 남용'에 악용될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63. 참고로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했을때 당시 국민당 정권에서 영국에게 심하게 물먹였다(...) 예를 들면 법원의 결정을 번복할수 없게 만들어 아예 추밀원에서 법에 대한 심의를 할수 없게 하지 않나, 총리가 남아공 정부를 은근히 비판했다가 아예 공화정을 전환하지 않나.(...)
  64. 물론 만델라는 그 얼마 뒤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대처와의 회담을 거부했다.
  65. 참고: http://www.edinburghnews.scotsman.com/news/politics/thatcher-s-policies-fuelled-calls-for-devolution-1-3535550
  66. 굳이 국내 환경에 비유하자면 국민장 정도 급. 물론 대체적인 급이 이렇다는 것이고 세세하게는 많이 다르다.
  67. 얼마나 크게 데였는지 이 '철의 여인'이 후회하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참고로 서양에서 우유는 단백질 공급원을 넘어 식생활의 중심이다. 한국인에게 김치가 중요한 음식이듯이, 서양인에게 우유는 매우 중요한 음식이다. 그녀의 병크가 영국인의 정서의 민감하다 못해 핵심이라 할수 있는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한국정부가 재정부족크리로 학교, 군대 급식에서 김치를 뺀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 영화 철의 여인에서 대처가 우윳값을 물어보고 우윳값이 올랐다고 남편에게 하소연한다.그러자 남편의 대답이 "잘됐군" "우리는 절약해야돼"(...)
  68. 도둑을 의미하는 다른 단어도 많지만 구태여 '스내처'로 불린건 윗부분의 짤에 나온대로 대처의 이름과 라임이 맞아 떨어져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스내...
  69. 실제로 포클랜드 전쟁 당시 자국의 영공을 잉글랜드에게 빌려줬다.
  70. 영화 빌리 엘리어트, 브래스드 오프, 풀 몬티 등에서 약간이나마 보여준다. 사실상 영국 좌파 영화 감독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71. 해당 표를 보면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스코틀랜드 게일어 사용자는 약 8000명 증가했고, 1971년부터 81년까지는 6000명 감소했다. 헌데 1981년부터 1991년까지 화자가 무려 17000명 정도 감소했다.(참고로 마거릿 대처의 집권 시기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다.) 그러나 1991년부터 2011년까지는 감소의 폭이 크게 줄어 8000명 정도 감소하는데 그쳤다.
  72. 보수당 지지자로 통합주의자다.
  73. 비록 홍콩을 중국에 내줬지만 사실상 기존의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영원히 유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번영하는 홍콩에 함부로 마수를 뻗치면 결과적으로 중국에 큰 해가 된다는 점을 덩샤오핑이 너무나 잘 알았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74. 정확히는 최영 장군의 예처럼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하니 본인의 말은 아니다. 테레사 수녀가 한 말이란 의견도 있지만 이 자료에 따르면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장인 것 같다. 다만 청와대에서 그의 죽음을 거론하며 추모한 글에서도 올라온 것이니 많은 사람들이 대처의 어록으로 여기는 듯하다.
  75. 그런데 다름아닌 그녀 스스로가 이 예상을 뒤집어버렸다.
  76. 1980년 더블린 정상회담에서 다른 유럽 정상들에게.
  77. 1980년 보수당 회의에서 경제 정책 완화를 요구하는 동료 의원들에게.
  78. 1980년 2월 그녀의 아들 마크가 파리-다카르 랠리에 참가했다가 아프리카 사막에서 실종되자.
  79. 포클랜드 전쟁 당시의 발언.
  80.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국제 기구를 통한 협상 제안을 맞받으면서.
  81.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이 홍콩 반환 연기를 거부하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중국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상륙할 수 있다."라는 위협을 가하자.
  82. 퇴임 후 6개월 무렵.